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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9-03)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유다의 자랑

예레미야 9장 17-26절


우리 인생은 가면서 두 가지 길에서 선택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거나 우상을 섬기거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거나 불순종의 길을 가거나, 아니면 슬픈 노래를 부르며 살거나 기쁜 찬송을 부르며 살거나, 둘 중에 한 가지 길을 우리는 다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길을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곡하는 부녀를 불러 ㄷ그들을 위해 애곡하게 하라 하십니다. 사람은 지혜·용맹·부가 아닌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사랑·정의·공의를 행하심을 깨닫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 민족과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이스라엘을 모두 벌하실 것입니다.

 

시온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가(17-22)

우리를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부인해도 역시 지혜와 물질 그리고 종교 행위를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들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17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해 보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18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19이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거처를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20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21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22너는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17-26)

사람의 헛된 것들을 붙든 유다는 애곡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우상을 따르며 자신들의 욕망을 좇아 쉽게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붙들며 자랑하지 않고, 사람의 헛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1) 곡꾼의 소집(17)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에게 ‘곡하는 부녀’, 곧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라고 명령하십니다(17). 장례예식의 전문가라는 점에서 당시 사회에서 곡꾼은 지혜자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초상집에서 상주를 대신하여 하는 자가 곡꾼이기에, 여호와의 명령은 누군가가 죽었음을 전제합니다.

(2) 곡꾼 소집 목적(18)

곡의 대상을 언급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곡꾼을 불러오게 한 목적을 알려주십니다.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18). 곡을 하거나 애기를 불러 초상을 당한 사람들의 애통함을 더 크게 해주는 것이 곡꾼의 주된 역할이었습니다. 애곡은 상복 기간 중에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에 속했습니다(참조, 창 23:2; 삼상 25:1; 28:3; 삼하 1:11-12, 17-18; 3:31; 11:26). 창세기 50:10에 의하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했습니다. ‘우리’는 애가의 대상이자(‘우리를 두고 애곡하여’) 동시에 눈물을 흘리는 상주입니다. 곡꾼을 불러 애곡하게 하는 사연이 구체적으로 알려집니다(18),

(3) 애곡의 이유(19)

멸망한 시온을 위한 애곡이었습니다. 시온이 황폐해지고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시온이 점령군에 의해 짓밟혔기에 주민들은 제 땅을 떠나야합니다. 시온이 폐허가 되고 주민들이 유배를 당하는 원인은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13-14절에 의하면 언약을 깨뜨리고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4) 애가를 가르침(20)

20절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예언자와 ‘부녀들’로 바뀝니다. 예언자가 여자 곡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기존의 곡꾼 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죽음의 재앙이 너무나도 전면적이고 엄청났습니다. 곡꾼은 제 딸들은 물론, 이웃의 부녀들에게도 애가와 장송곡을 가르쳐 이들을 장례 의식에 동원해야 했습니다.

(5) 애가를 가르침(21)

죽음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집 안이나 집 밖이나 온통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습니다. 죽음이 창문을 넘어 궁궐에까지 들어오고, 거리와 광장에서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덮칩니다(21). 시온의 주민들이 모두 죽음에 삼킴을 당합니다. 어린아이들과 청년들마저 희생당하기에 후일을 기대해볼 여지조차 완전히 사라집니다(참조. 10:20).

(6) 들판의 시체(22)

22절에서는 다시 화자와 청자가 바뀌어 여호와께서 예언자에게 말씀을 주신다.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들판의 오물이 그대로 버려지는 것처럼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거리에 나뒹굽니다. 추수꾼이 단으로 묶어 밭에 세워둔 곡식단의 비유도 의미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옮기기 좋게 묶어 놓은 곡식단이 거둬들일 사람이 없어 밭에 쓰러져 썩는 것처럼 시체들이 거리에 그대로 방치됩니다. 오물의 비유가 편만한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면, 곡식단의 비유는 남은 자가 없는 멸망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이들과 청년들마저 죽음에 넘겨졌기에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시체가 거리와 광장과 들판에서 그대로 썩어갑니다.

 

참된 자랑(23-24)

사람들은 저마다 가진 것들을 자랑합니다. 그 자랑의 뿌리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언약 백성다운 바른 자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실패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경외하는 것을 자랑합시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세속적 조건이 아닌,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은혜입니다.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23-24)

지혜문학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과 부자의 부함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속합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힘입어 백성을 통치했고(참조, 왕상 3:4-15),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이름’에 의지해 용감하게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웠고(참조, 삼상 17장),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던’(창 32:10)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수많은 양과 소와 낙타를 거느리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참조. 창 30-31장).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지혜자는 그의 지혜를, 용사는 그의 용맹을,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고 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전통적인 가르침에 맞서 예언자는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23). 이는 지혜문학의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지혜와 용맹과 부함’에서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위험, 곧 인간의 교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용맹과 부합’을 주셨다고 말하면서도 이를 자신의 능력과 업적으로 자랑스러워하다가 하나님을 떠납니다. 사람이 참으로 자랑해야 하는 것은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입니다(24). ‘여호와를 앎’은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따르는 역동적 앎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는 역사와 삶 속에 계시된 그분의 활동을 인정하고, 그분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임을 깨닫고 기뻐합니다. 지혜자나 용사나 부자가 아니라, 여호와가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는 주체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과 부자의 부함이여호와께서 땅에서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대신할 수 없다. 참된 자랑을 아는 자는 여호와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서 행하시도록 비워놓고 기다립니다. 앞에 나오는 시온의 멸망을 선포하는 17-22절과 함께 보자면, 23-24절은 이스라엘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과 부자의 부함’이 이스라엘로 애가를 부르게 했음을 깨닫고, 여호와께서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주시길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25-26)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를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따라야 할 가치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고 기뻐하며 그것을 자랑과 공의를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26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25-26)

언약 백성의 표지인 할례(참조, 창 17장)가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심판의 날은 포피에만 할례 받은 자들이 징벌을 받는 날입니다. “보라, 날들이 오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 포피에(만) 할례 받은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리라”(25). 할례의 풍습을 알고 있는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 및 광야에 살면서 살짝을 깎은 자들’이 모두 심판에 떨어집니다(26). 애굽은 유다 남쪽에, 에돔과 암몬과 모압은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들이고, ‘살짝을 깎은 자들’은 ‘관자놀이의 머리를 민자들’로 이스라엘 북동쪽의 사막에 사는 아랍 족속들을 가리킵니다. 민족들의 순서가 어떤 기준에 따른 것인지는 전혀 불분명합니다(46장 이하에 나오는 민족들의 신탁에서는 애굽-[블레셋]-모압-암몬-에돔의 순서로 나온다). 특이하게도 애굽이 먼저 나오고 유다가 그 뒤를 따릅니다. 할례와 관련해 유다에게 남다른 특권이나 지위도 허락되지 않고, 주변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언약의 표지인 할례는 유다에게 어떤 혜택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언약의 표지인 할례가 여호와의 심판으로부터 유다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민족들의 할례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몸의 할례는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즉 민족들도 잘 알고 있는 포피를 잘라내는 풍습일 뿐입니다.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26b). 여기서 ‘모든 민족’은 앞에 열거된 다섯 민족들로, 이들이 받지 못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가리킵니다. 민족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해서 심판에 떨어지듯, 이스라엘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해 심판에 떨어집니다. 다시 말해, 몸에 할례를 받은 유다가 여호와의 징벌을 면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몸의 할례를 아는 다른 민족들도 징벌을 면할 수 있습니다. 포피를 자르는 할례에서 구원사적 기능을 완전히 박탈해 버립니다. 구원사적으로 유효한 할례는 오직 마음의 할례뿐입니다(참조. 신 10:16; 30:6).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중요한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와 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더욱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꼐서는 이러한 삶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사랑과 공의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시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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