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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0-02)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멸망

예레미야 10장 17-25절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 기복신앙을 갖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 수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고 그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확정됐습니다. 여호와께서 극적으로 구해주시리라 기대한다면, 이는 착각일 뿐입니다. 그분께서 멸망과 유배를 결정하셨기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유다는 이제 필요한 물품을 미리 싸놓고 유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멸망(17-22)

우리는 형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자기 인생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다가 우상을 숭배한 이유도 형통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형통이란 다산과 풍요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헛되고 무가치한 우상을 좇으면 유다의 같이 패망합니다. 반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누립니다. 인생의 참된 복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전하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17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 1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19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20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21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22들을지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니 유다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승냥이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17-22)

예레미야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성안에 갇힌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땅을 심판하실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은 이제 짐을 꾸리고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에 대해 괴로워하시며 통곡하십니다.

(1) 심판 선고(17-18)

처음 두 절은 포위당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역사적 배경으로는 주전 597년의 제1차 유배, 또는 주전 587년의 제2차 유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 곧 예루살렘이 적들의 포위 공격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항복을 하건 함락당하건 적들에 사로잡히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유배를 대비하여 짊을 꾸려놓으면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17).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포위됐다가 극적으로 구원을 받은 놀라운 일(참조, 사 36-37장)을 다시 기대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적에게 넘겨주기로 하신 여호와의 이번 결정은 변경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18). 용사나 목자가 적이나 짐승을 향해 물매로 돌을 던지듯이 여호와께서 주민들을 단호하게 내던지십니다. 먼 이방 땅으로 쫓겨나는 유례없이 혹독한 재앙입니다. 여호와로부터 오는 괴로움이기에 이를 피할길도 없고, 그분께 도움을 간구할 수도 없습니다(18b).

(2) 일인칭 탄식(19-20)

다음 두 절은 이미 포위가 끝나고 유배지로 쫓겨나는 장면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선포한 위협이 현실화됐습니다. 예루살렘을 대변하는 ‘나’가 장막의 표상을 사용해 처참한 현실을 탄식합니다. “나의 상처로 내게 화가 미쳤구나! 나의 부상이 심하다”(19).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는데 고통을 호소할 데도,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습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19b), 그래도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예루살렘의 처지는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나 적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줄이 끊어지고 휘장이 찢겨, 완전히 훼손된 장막보다 더 참담합니다. 파괴된 장막은 수선하거나 새것으로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모두 떠나버리고 아무도 없는 예루살렘은 재건이 불가능합니다(20). 장막의 비유는 아마도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을 ‘한 가족’으로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 주민도 모두 떠나거나 사로잡혀 갔습니다. 회복을 소망해볼 만한 싹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입은 중상은 치료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를 선포하며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치명적 부상입니다.

(3) 재난의 원인(21)

이번에는 목자와 양의 표상을 사용해 멸망의 심판이 임하게 된 원인을 알려줍니다.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21). 목자와 양 떼를 구분해서 양 떼가 흩어진 책임을 목자에게 묻습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 여호와의 의지를 묻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따라 유다 백성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위정자들의 어리석음과 불순종이 백성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그렇다고 백성을 통치자에 의해 오도된 희생양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의 언약 파기를 고발하는 11장이 잘 보여주듯이 ‘여호와를 찾지 않음’에 있어서는 백성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양 떼’(13:17)를 돌봐야 할 통치자들의 책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4) 신판 선고(22)

심판의 선고(17-18)와 탄식(19-20)과 심판의 원인(21) 다음에 다시 한 번 심판을 선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17절의 예루살렘은 적들에 포위당했고, 20절의 예루살렘은 이미 함락당해 그 주민들이 유배를 떠났습니다. 22절의 적들은 아직 ‘북방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전쟁의 진행 순서에 따르면 22절이 먼저 와야 합니다. 아마도 17-21절이 예루살렘에만 관심을 두기에 ‘유다 성읍들의 황폐함’을 언급하는 22절을 보층한 것 같습니다. 적들이 북쪽에서 내려오는데,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말발굽 소리와 함성을 뒤로하며 거침없이 진격해 옵니다. 이들의 원정 목적은 하나입니다.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해서 승냥이(자칼)의 소굴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찢기고 무너진 장막처럼 되듯이 유다 성읍들도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됩니다.

 

간구의 기도(23-25)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받은 예레미야는 비참한 현실에 처한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들의 죄악에 대해 애통하며, 유다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해야 합니다.

23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24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25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23-25)

유다가 실패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국가 지도자들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 중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공동체에 심각한 위기가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1) 하나님의 공정 간구(23-24)

19-20절의 경우처럼 ‘나’가 다시 화자로 등장하지만, 동일한 ‘나’는 아닙니다. 전자의 ‘나’는 예루살렘이고, 후자의 ‘나’는 예언자입니다. 물론 본문은 예언자의 사적 기도가 아닙니다. 심판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예언자는 이 기도를 통해 멸망의 시대를 사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는 먼저 지혜 문학의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23; 참조. 잠 16:9; 20:24). 이스라엘은 사람이 자기 길의 주인이 아님을, 길을 걷는 자가 자기 발걸음을 정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지만, 이를 온전히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때도 있지만, 제 운명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여호와만을 유일한 결정권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은 어리석음(21)은 자신을 최고 결정권자로 간주한 유다 백성의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계획을 신뢰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그 교만의 대가로 멸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과거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다시 그분께 자신의 운명을 내맡겨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내버리고 겸허하게 여호와께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결정하시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신 분께서 앞으로의 운명도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은 멸망과 유배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계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미래를 철저하게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24). 적어도 일부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멸망과 유배를 하나님의 무능력과 패배로 돌렸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파국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극복 없이는 새로운 시작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완전히 소멸할 수밖에 없기에 ‘너그러이’(공의로) 채찍질해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공의로운 징계’의 구체적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진노’와 공의를 구별해서 전자는 완전한 멸망과 관련해, 후자는 징계(훈계)와 관련해 사용합니다. 아마도 ‘진노’는 심판받은 자들에게 지속해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부정적 작용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2) 민족들이 멸망 간구(25)

하나님의 심판으로 초라해진 야곱은 주변 민족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탐욕스런 민족들이 약탈하거나 침략해 들어오지만, 야곱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땅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 야곱에게는 여호와의 개입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25). 자신과 관련해서는 ‘너그러운/공정한’ 징계를 호소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쏟으시길 간구합니다.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분노’는 24절의 ‘진노’와 내용상 유사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야곱은 민족들의 우상을 헛것으로 선포하는 단락(1-16)의 마지막 절인 16절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분깃’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이기에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려는 민족들은 여호와의 소유를 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야곱의 몫’에 대한 보복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슬퍼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참상을 자기 일로 슬퍼하고 아파합니다. 유다의 고통은 곧 예레미야의 고통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백성의 비극 앞에 그는 중상을 입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의 경험은 백성들이 겪을 고통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낍니까! 특별히 죄로 인해 심판 아래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에 대한 마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공감하는 것을 ‘통감’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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