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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5-01)


의인 한 명이 없는 예루살렘

예레미야 5장 1-9절


그리스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죽을 때, 알렉산더 대왕이 와서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당신이 내 앞에서 햇볕을 가리지 말아 달라!”라고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또 이 사람이 유명한 것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그리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정직한 사람을 찾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정직한 사람을 몇 명이나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에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며,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길과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배부르며 부유하나 음욕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버리고 떠난 유다 백성을 반드시 징계하실 것입니다.

 

한 명의 의인이 없는 예루살렘(1-6)

사람들은 혼자 정의롭게 살아봤자 세상이 변하지 않으니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는 게 지혜롭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꼐서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의인을 주목하십니다. 한 사람의 의인을 보시고 그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심판을 철회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로 했습니다. 심판하시기 전에 의인이 있다면 심판을 유보한다고 했습니다. 그 의인을 찾고 계십니다.

1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2그들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찌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3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찌라도 그들이 아픈줄을 알지 못하며 그들을 거의 멸하셨을찌라도 그들이 징계를 받지 아니하고 그 얼굴을 반석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므로 4내가 말하기를 이 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 것 뿐이라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니 5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리라 그들은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 하였더니 그들도 일제히 그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지라 6그러므로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가 그들을 죽이며 사막의 이리가 그들을 멸하며 표범이 성읍들을 엿보온즉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 이는 그들의 허물이 많고 패역이 심함이니이다(1-6)

하나님께서는 유ㅠ다 백성을 향해 예루살렘 거리로 다니면서 ‘정의를 항하여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성읍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의인 10명을 찾으신 것과 같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ㅇ었는데 예루살렘에는 의인 1명이 조건으로 제시된 것을 볼 때 예루살렘의 죄악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1) 의인이 없는 예루살렘(1)

하나님께서 복수의 청자 ‘너희’에게 주시는 말씀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1). 정의와 진리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찾는다면, 그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읍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옛적에 소돔을 구하기 위해서는 의인 열 명이 필요했는데(창 18:23-33), 예루살렘의 용서는 의인 한 명만으로도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성읍도 아닌, 여호와의 성전과 다윗 왕조가 있고 여호와의 율법이 선포되는예루살렘에서 단 한 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을 피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 악함에 있어 예루살렘은 소돔을 압도했습니다(참조, 겔 16:47-48).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했다면, 이제 단 한 명의 의인도 없는 예루살렘이 멸망을 피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2) 여호와 이름의 남용(2)

한 명의 의인도 없다는 하나님의 주장은 어쩌면 예루살렘 주민에게 황당하게 들렸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했지만, 이는 모두 거짓 맹세였습니다(2). 고대 세계에서 특정 신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하는 자는 자신이 그 신의 통치 아래 있음을 전제하는 행위로, 일종의 신앙고백과도 유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는 자들은 원칙상 여호와의 통치를 인정하는 자들, 곧 여호와께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입술로만 여호와의 통치를 인정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자들이었습니다(참조, 출 20:7). ‘정의’는 일차적으로는 이웃들 사이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으로 사회·경제적 약자를 돌보고 불법과 폭력을 멀리하는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경험되고(참조, 7:5-6), ‘올곧음’을 의미하는 ‘진리’는 ‘거짓’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참조, 9:3)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교훈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나타납니다(참조, 7:28).

(3) 열매 없는 하나님의 징계(3)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 거리와 광장을 찾아가 살펴본 결과, 예언자는 낙담하였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경험한 예루살렘 주민들의 영적 무능력과 완악함을 탄식하듯 보고합니다. 여호와께서 찾으시는 올곧게 사는 사람이 예루살렘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다들 영적으로 무감각하여 하나님께 매를 맞으면서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3a). 이들은 거듭 임하는 재앙에서 이스라엘의 실존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만, 재앙의 배후를 살펴 그분의 의지를 읽어내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강도를 더해가며 치셨지만, 이들은 그분의 징계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럴수록 더욱 완강해져 갔습니다. 얼굴을 바위보다 더 굳게 하며 돌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3b). 하나님의 징계가 아무 결실도 보지 못하고, 거꾸로 노골적 반감만 초래했습니다.

(4) 예언자의 착각(4-6)

예언자는 자기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인정합니다. 한때 그는 예루살렘 주민 가운데 다수는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할지라도 지배 계급에 속하는 일부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나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배우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알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은 어리석게 처신한다. 그들은 여호와의 길, 저희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4절의 사역). ‘여호와의 길’을 모르는 자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찾는다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분명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은 다를 것이라 생각하고 이들을 찾아가 보았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도자들이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알리라는 기대는 온전히 예언자의 착각이었습니다(5). 이들은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었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은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안다는 자들이 모두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는 소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법을 모르는 비천한 자들은 ‘그들의 얼굴을 바위보다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아는 지도자들은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습니다.’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하나님을 떠나 제 생각과 결정에 따라 산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습니다. ‘비천한 자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난한 자들을, ‘대인들’로 옮길 수 있는 ‘지도자들’은 왕궁의 관료와 성전의 종교 지도자, 부자와 지역 사회의 장로와 같은 지배계층을 구성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의 최소한의 조건조차 충족할 수 없는 예루살렘이기에 심판이 확정됩니다.

(5) 멸망의 심판(6)

하나님께서 택하신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아는 자가 한 사람도 없어 모두가 멸망을 당합니다. 숲속의 사자가 물어뜯고, 사막의 이리가 찢어발기고, 표범이 성을 엿보다가 나오는 자들을 모두 갈기갈기 찢어 죽이듯이 모두 죽음에 넘겨집니다(6). 모든 성읍이 파괴되고 폐허가 됩니다. ‘허물이 많고 반역이 심하기 때문에’ 심판도 예외를 허락하지 않고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7-9)

의인 한 사람이 없어 멸망을 당했던 예루살렘은 타락한 인간의 영적 무능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의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도는 생명과 진리와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인으로 살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무엇입니까?

7내가 어찌 너를 사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8그들은 살찌고 두루 다니는 수 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 9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7-9)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용사할 수 없다고 학정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꼐서 아닌 것, 곧 우상을 두고 맹세했고(7a),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상기시키십니다.

(1) 수사적 질문(7aa)

화자가 예언자에서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루살렘의 우상숭배와 배은망덕과 파렴치를 고발하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거짓 맹세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2), 더 나아가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기도 했습니다(7a). 필요에 따라 여호와의 이름으로도, 우상의 이름으로도 맹세했습니다. 혼합주의의 늪에 빠져 우상을 섬기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공적 자리에서는 여호와를 찾고, 사적 자리에서는 우상을 찾았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다가도 환난을 당하면 여호와께 구원을 간구했습니다(참조, 2:27). 이들의 악행은 한계를 몰랐습니다.

(2) 책망의 말씀(7ab-8)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간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그들은 두루 다니는 살진 수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르며 소리지르는 도다”(7b-8). 하나님의 축복으로 배가 부르자 복을 주신 분을 잊고 간음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돌리기는커녕 그분께서 주신 풍요를 파렴치한 짓거리에 썼습니다. ‘창기의 집’과 ‘이웃의 아내’는 간음이 우상숭배보다는 윤리적 타락과 관련해 사용됐음을 보여줍니다. 종교적 혼합주의의 간음이 윤리적 간음을 조장합니다. 욕정을 주체할 수 없는 우상숭배자들은 성욕을 채우기 위해 무리 지어 창녀의 집으로 몰려다닙니다. 발정기의 수말이 암말을 찾아 들판을 헤매며 돌아다니듯, 음란에 빠진 예루살렘 사람들이 헐떡이며 제 이웃의 아내를 뒤쫓습니다. 종교적 간음에 빠진 자들에게 윤리적 간음은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참조, 29:23). 예루살렘 사람들의 종교적 간음과 윤리적 간음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3) 수사적 질문(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9). 하나님께서 용서의 한계를 넘은 예루살렘과 유다의 종교적·윤리적 타락에 책임을 물어 보복을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악인에 의해 훼손된 그분의 정의를 바로잡는 사법적 행위에 속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의인에게는 구원으로, 악인에게는 심판으로 구체화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그분의 길과 법’을 잊어버리고 ‘이런 나라’, 곧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한 이방 민족들 가운데 하나로 변질되어 하나님의 보복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눈이 의로운 자 한 사람을 찾고 계실 때,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 되길 원합니다. 불신앙과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하게 해드릴 수 있는 의로운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에는 의인 한 명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한 사람이라는 책임감으로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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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4-01)

 


멸망을 보며 탄식하는 선지자

예레미야 4장 19-31절


큰 선거를 하고 나면, 날이 새도록 생방송을 합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실시간 중계를 보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티비 영상으로 혹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라디오로 중계합니다. 이런 생중계를 우리는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또한 그렇게 중계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본문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생중계를 보게 됩니다.

 

폭력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재앙을 보며 선지자는 울부짖습니다. 유다를 덮치는 멸망 심판이 그를 영적·육체적으로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선지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탄식하십니다. 악을 행하기에만 열심인 이스라엘이 어리석음과 미련함을 슬퍼하십니다.

 

예언자의 탄식(19-2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으며 지각이 없고 미련한 저들은 악을 행하는 데만 지각을 사용할 뿐, 선을 행하는 데는 무지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백성이 이런 상태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냥 저들을 구원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신 적이 없지만, 그렇다고 죄를 짓고도 평안하고 형통하게 살도록 내버려 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19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 21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19-22)

하나님께서 보여주심으로 이미 유다의 멸망을 알고 있던 예레미야는 ‘슬프고 아프다’라며 탄식합니다.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낄 만큼 그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아무런 애정이 없었다면 그저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하신 대로 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1) 고통의 외침(19a)

적들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것을 (아마도 환상 중에) 보는 예언자가 격렬하게 반응합니다. 적들의 손에 넘겨질 수밖에 없는 유다의 참담한 운명이 예언자를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빠뜨립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속이 뒤틀리는구나. 내 심장의 벽이여, 내 안에서 심장이 마구 뛰는구나.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나’(19a의 사역). 엄청난 무게로 짓누르는 영적·정신적 고통이 육체에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해산하는 여인이 죽음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듯 창자가 뒤틀리고 심장이 터지는 아픔에 예언자가 온몸을 뒤틀며 소리 지릅니다.

(2) 곤경의 묘사(19b-20)

싸움터에서 혼란스럽게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와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립니다(19b). 공격하는 나팔 소리에 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유다의 성읍을 공격합니다. 성읍이 차례로 함락되고 온 땅이 황폐해집니다(20a). 광풍이나 도적의 기습 공격에 장막이 한순간에 허물어지듯, 병거와 말들을 앞세우고 무섭게 진격하는 적들 앞에 집들이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예언자는 백성의 터전인 집을 ‘나의 장막들’과 ‘나의 휘장들’이라 부르며 이들에 대한 강한 연대감과 깊은 연민의 정을 내보입니다(20b). 적들에 의해 허물어지는 동포의 집들은 ‘나의’ 장막들이고 ‘나의’ 휘장들입니다. 여기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부사 ‘홀연히’와 ‘한순간’은 재앙의 갑작스러움과 철저한 파괴적 면모를 보여줍니다.

(3) 탄식(21)

적들의 공격으로 순식간에 유다의 집들이 남김없이 파괴되고 땅은 황폐해집니다. 그리하여 고개를 떨군 예언자의 탄식은 절망적인 하소연으로 끝을 맺습니다. “내가 저 깃발을 보며 나팔 소리 듣기를 어느 때까지 할꼬”(21). 유다 백성의 악한 ‘길과 행위’가 초래한 재앙이기에(18), 예레미야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까지 예언자는 그저 전쟁의 깃발을 보고 나팔 소리를 듣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4) 하나님의 탄식(22)

예언자의 탄식은 하나님의 탄식으로 이어집니다(22).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 부르는 자들이 그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분을 모르기 때문에 예언자를 통해 선포되는 그분의 말씀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합니다. 또 지각이 없기 때문에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14)라는 권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련한 자들이기 때문에 완강하게 자기 길과 행실을 따르며 재앙을 자초합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들이 악을 저지르는 데는 지혜로우면서도 선을 행하는 데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동사 ‘알다’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하나님을 앎’이 ‘선을 행할 줄 앎’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선을 행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을 행할 줄 모르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임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혼돈에 넘겨진 땅(23-31)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이방인들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예언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방인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진노 중에도 회복의 약속이 함께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에게 예고된 심판 가운데 긍휼의 은혜를 보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27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8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29기병과 활 쏘는 자의 함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읍 사람들이 도망하여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르며 각 성읍이 버림을 당하여 거기 사는 사람이 없나니 30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31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시온의 딸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의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가 있도다 죽이는 자로 말미암아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23-31)

예레미야는 환상을 통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이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라는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산들은 진동하며 요동하고 사람도 없고 공중의 새도 날아가서 없다고 했는데, 이 또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질서도 없고 생명체도 없었던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 혼돈의 땅(23-26)

예루살렘이 에워싸이는 것을 본 예언자는 더 나아가 창조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어 창조 이전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땅을 보니 창조 이전처럼 혼돈과 공허뿐이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빛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23). 피조물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질서와 빛이 사라지고 생존에 적대적인 혼돈과 어둠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창조 이후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제자리를 지키던 산들이 떨고 언덕들이 뒤흔들립니다(24). ‘흔들리지 않는 산과 작은 산’은 안전과 지속성을 상징합니다. 창조 질서가 사라지고 우주적 혼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어디에도 사람이 살 만한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땅에는 사람이 없고, 하늘의 새도 모두 도망가고 없습니다(25).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에 의하면, 땅이 아직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1:2)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첫째 날에 빛(1:3)을, 셋째 날에 땅과 땅의 식물(1:9-12)을, 다섯째 날에 하늘의 새와 바다의 생물(창 1:20-21)을, 여섯째 날에 땅의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24-28).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것이 모두 파괴됩니다. 창조의 질서가 붕괴된 세상에서 인간의 역사가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과일나무가 심겼던 ‘좋은 땅’이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메마른 땅으로 변하고, 안전한 삶을 위해 건설한 성읍이 모두 허물어집니다(26). 여호와의 진노는 그분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불의와 불법과 폭력을 징벌하는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8절에서는 그분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한 유다와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가 임합니다. 창조 세계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심판이 대등한 차원에서 이뤄질 것을 시사합니다.

(2) 확정된 심판(27-28)

여호와께서 땅의 심판을 선언하시는데,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앞 단락과 구분됩니다. 먼저, 멸망의 철저성이 다소 완화됩니다.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다’(27). 하나님께서 온 땅을 폐허로 만드시지만, 완전히 끝장내지는 않으십니다. 폐허가 된 땅에서도 사람은 계속해서 살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땅’의 의미가 조금 달라집니다. 앞 단락의 ‘땅’은 온 세상이 분명한데, 여기의 ‘땅’은 일차적으로는 세상이지만 문맥에 의해 이차적으로 유다까지 포함합니다. 특히 26절이 온 땅의 심판과 유다의 심판을 이어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땅’으로 옮긴 ‘카르멜’은 원래 과수원을 의미하고, ‘성읍들’은 4장에서 항상 유다의 성읍들로 나옵니다(참조. 4:5,7,29). 하나님의 심판 의지는 단호하고 확정적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고 계획하셨고, 후회하지 아니하시고 돌이키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8b). 땅/유다를 심판하시려는 그분의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거나 바뀌지 않습니다. 땅/유다의 황폐함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에 땅은 통곡하고, 위의 하늘은 어두워집니다(28).

(3) 멸망을 당한 자, 시온(29-31)

먼 땅에서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치려고 올라오자,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기병과 활 쏘는 자의 함성’에 유다 백성은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모든 성읍에서 주민들이 도주합니다(29). 성읍을 버리고 은신하기 용이한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가거나, 접근이 어려운 바위로 뒤덮인 산으로 피합니다. 주민이 도망하고 자취만 남은 성읍들은 무자비한 적들의 수중에 넘어갑니다. 유다의 성읍들이 차례로 점령당하고 예루살렘의 함락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처한 예루살렘은 침략군의 환심을 사서 위기를 넘겨보려 합니다. 여인이 애인을 꾀기 위해 화려한 옷에 값비싼 금붙이로 치장하고 눈 화장을 하는 것처럼, 예루살렘도 매력적인 조건으로 침략군의 마음을 돌려보려 시도합니다(30). 그러나 기대와 달리 예루살렘의 천박한 치장은 ‘연인들’의 경멸 어린 시선만 끕니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예루살렘의 미모가 아니라 생명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절망적인 처지는 첫아이를 낳느라고 온 힘을 소진한 여인의 형편과 같았습니다(31). 이미 기운이 다하였기에 그들은 적을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숨을 헐떡이며 도움을 간구하지만,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파국적 재앙의 배후에 누가 계신지를 보지 못합니다. ‘소리’와 29절의 ‘함성’은 같은 ‘콜’의 번역입니다. 공격하는 적들의 ‘합성’이 높아가고, 예루살렘은 단말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죽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도 가차 없이 벌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안일하게 생각하다가는 무서운 징계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 하더라도 돌이키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어떤 생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씨앗을 남겨 두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공의로우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니다. 그분 앞에 늘 신실한 성도로 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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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4-01)


남 유다에게 회개하길 원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4장 5-18절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더 가까워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멀리 나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항상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 시간이 회개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욱더 깊게 누리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5절 이후에는 아주 다른 분위기를 서술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한다면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는 듯 보였지만, 5절 이후에는 다시 북방에서 오는 대적을 서술합니다(6). 이러한 묘사는 이스라엘이 회개했음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멈추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다가올 적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에워싸일 것입니다.

 

북방에서 오는 재앙(5-8)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맹세함은 말로만 하는 맹세가 아니라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여호와만을 믿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편단심의 신앙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백성에게 복을 주실 것이요 복 받은 자들을 보고 주변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복을 구하게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5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6시온을 향하여 깃발을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리라 7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나아 왔으되 네 땅을 황폐하게 하려고 이미 그의 처소를 떠났은즉 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되리니 8이로 말미암아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이는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아직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5-8)

예언의 대상이 북 이스라엘에서 남 유다로 바뀌었습니다. 앞에서 북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된 돌이키라는 외침은 유다의 입장에서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북방에서부터 침략을 당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1) 임박한 재앙(5-7)

여호와께서 복수의 청자 ‘너희’를 보내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게 하십니다. 이미 ‘그의 처소’를 떠난 대적은 ‘나라들을 멸하는 자’로 유다가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7). 굶주린 사자가 숲에서 뛰쳐나와 먹이를 덮치듯이 민족들을 멸망시키고 막강한 제국을 세운 자가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유다의 멸망은 확정적입니다. 성읍들은 폐허가 되고 주민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하는 것뿐입니다. 조금도 지체할 여유가 없기에 서둘러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빨리 나팔을 불어 사람들에게 긴급 상황을 알리고 방어 시설이 가장 잘 갖춰진 요새화된 성으로 즉시 대피하도록 알려주어야 합니다(5). 골짜기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이 유다에서는 그래도 가장 안전하므로 높은 언덕 위에 깃발을 세워 그리로 피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6a). 그러나 상황이 절망적인 것은 여호와께서 이 침략전쟁을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북방에서 침략자들을 불러 당신 백성을 치시기에 ‘재난과 큰 멸망’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6).

(2) 위협적 권면(8)

주전 701년 예루살렘이 앗수르의 침략에서 극적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과 같은 대반전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맹렬한 노’가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8b). 그들은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불러오는 적들로, 유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서도 그분께 부르짖게나 도움을 간구할 수 없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탄식하며 슬피 우는 것만 남았습니다. ‘굵은 베’는 거친 베로 자루처럼 짠 옷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거나 회개하거나 죽은 자를 애도할 때 입었습니다.

 

예언자의 탄식(9-10)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선포하는 말씀만 좋아하고, 죄를 지적하며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 어두운 면을 내려놓고 참된 지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9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왕과 지도자들은 낙심할 것이며 제사장들은 놀랄 것이며 선지자들은 깜짝 놀라리라 10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이르렀나이다(9-10)

바벨론의 침공에 유다의 왕과 지도자, 제사장, 선지자들은 낙심하고 놀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지켜 주시기에 늘 평강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달콤한 말씀만 듣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1) 지도자들의 무능력(9)

하나님께서 ‘북방에서 재난과 큰 멸망’을 가져오시는 날에 유다의 지도부가 공황에 빠져 붕괴됩니다. 병사들을 지휘하며 적들에 맞서 싸워야 할 ‘왕과 지도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용기를 잃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강대국에 빌붙어 생존을 도모하던 정치가들은 전쟁의 위기에 전혀 속수무책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전쟁이기에 이들의 정치적ㆍ군사적 능력으로는 버텨낼 수 없습니다. 준비해놓은 모든 계책과 방어 시설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혼란과 놀람에 있어서는 종교지도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깜짝 놀라고 ‘선지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평강이 있을 것을 선포했는데, 정반대되는 현실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놀랄 뿐입니다. 전쟁의 위기를 신화적으로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답을 찾지 못합니다.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함락은 이들이 대변해온 다윗 왕조 신학과 성전 신학의 붕괴와 다름이 없기에 이들의 경악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합니다.

(2) 예언자의 불만 어린 탄식(10)

땅을 폐허로 만들고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는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에 뜻밖에도 예레미야가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이르렀나이다”(10).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을 속이셨다고, 사자와 같은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생명을 위협하는데도 예언자들을 통해 평강을 선포하게 하셨다고 비난합니다. 예레미야는 심판을 선포했으므로 여기서 평강을 선포한 자들은 9절의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입니다. 예레미야의 비난에 따르면,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신 여호와께서 예언자들로 평강을 선포하게 하셔서 백성이 죄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멸망을 결정하신 여호와께서 멸망의 심판을 집행하기 위해 백성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속이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아주 대담하게 유다의 멸망에 어떤 식으로든 여호와의 연루, 곧 책임이 있음을 주장합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대다수의 유다 백성이 추종하는 구원 예언자들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부정적 활동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참조, 왕상 13:11-24: 22:19-23).

 

재앙을 자초한 죄악(11-18)

부모가 자녀를 꾸중하는 것은 미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녀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신 적이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유다가 전쟁의 참화를 겪도록 내버려 두시지만, 정작 유다 백성보다 더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11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12이보다 더 강한 바람이 나를 위하여 오리니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행할 것이라 13보라 그가 구름 같이 올라오나니 그의 병거는 회오리바람 같고 그의 말들은 독수리보다 빠르도다 우리에게 화 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 하리라 14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15단에서 소리를 선포하며 에브라임 산에서 재앙을 공포하는도다 16너희는 여러 나라에 전하며 또 예루살렘에 알리기를 에워싸고 치는 자들이 먼 땅에서부터 와서 유다 성읍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다 하라 17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8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는 네가 악함이라 그 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치느니라(11-18)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일상에서 경험했던 자연현상을 예로 들어 더욱 분명하게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이 깨닫고 돌이키기를 바라셨습니다.

(1) 심판 경고(11-12)

하나님께서 바람의 표상을 사용해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11). 광야의 ‘뜨거운 바람’은 요단 동편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바람을 가리킵니다. 타작한 곡식을 까불러 고를 때 바람이 알맞게 불면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는 데 도움이 되지만, 광야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동풍은 파괴적인 바람으로 키질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모두 쓸어가 버립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불어오는 바람은 광야의 동풍보다 훨씬 더 강한, 여호와로부터 오는 치명적인 바람입니다(12).

(2) 탄식과 권면(13-14)

광야의 동풍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보내시는 강한 바람에 휩싸여 모두 날아갑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강한 바람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감히 맞설 수 없는 중무장한 막강한 군대입니다. 바람이 휩쓸듯이 말과 병거로 중무장한 ‘구름 같이’ 엄청나게 많은 군대가 땅을 뒤덮고 진격합니다(13a). 병거는 ‘회오리바람’처럼 무서운 소리를 내며 어지러이 내달리고, 말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게 달립니다. 무섭게 진격해오는 적 앞에 ‘우리’는 두려워 몸을 떨며 멸망을 탄식할 뿐입니다(13b). 적들의 공격을 이겨낼 길은 없지만, 그래도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구원의 문이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서둘러 그 마음에서 악을 깨끗이 씻어내고, 더는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합니다(14). ‘강한 바람’이 불어오게 하는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죄악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3) 적의 침략(15-18)

뒤따르는 말씀은 예언자의 긴급한 회개 호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전제합니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을 쫓아내지 않았기에 ‘재앙’이 임합니다. 적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회오리바람처럼, 독수리보다 빠르게 진격해옵니다.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있는 단에 출현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벌써 이스르엘 골짜기 남쪽에 있는 에브라임 산지가 위협을 받습니다(15). 예루살렘의 위기가 바로 코앞에 닥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 곧 민족들과 예루살렘에 알려야 할 말씀을 주십니다. ‘에워싸고 치는 자들이 먼 땅에서부터 와서 유다 성읍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른다 (하라) 그들이 밭을 지키는 자 같이 예루살렘을 에워싸나니 이는 그가 나를 거역했기 때문이니라’(16-17).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면 먼저 유다의 성읍들을 공격해 배후의 위험을 제거해야 합니다. 먼 땅에서 쳐들어오는 적들이 함성을 지르며 유다의 성읍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합니다. 적들이 사방에서 예루살렘을 물샐틈없이 에워쌉니다(참조. 1:15). 17b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3인칭으로 고발하셨는데, 18절에서는 예언자가 2인칭을 사용해 직접 고발합니다. ‘네 길과 행위가 이 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 이것이 너에게 닥친 재앙이다. 얼마나 쓰라린 재앙인가! 네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스스로 선택해서 걸어온 길과 행위가 초래한 파국적 재앙이기에 예루살렘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심장까지 파고드는 고통스런 재앙을 감내해야 합니다. 14,15절과 함께 읽으면, ‘네 마음의 악(라아)을 씻어버리라’는 권면을 거절하고 ‘네 악한(아웬) 생각’을 마음에 품은 예루살렘이 성이 에워싸이는 ‘재앙’(아웬), 곧 ‘심장’(마음)에 까지 파고드는 ‘쓰라린 재앙’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심으로 더 이상 이웃에게 “너는 여호와를 알라”고 말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은혜를 누리는 성도는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온전히 섬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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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4-01)


할례받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

예레미야 3장 19절- 4장 4절


인간관계에서는 속마음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함으로 어느 정도 상대방을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하는 지를 교훈받고자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스라엘에게 돌아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12-18절까지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19절 이후에는 다시 심판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신뢰할 만한 자들이 못 되었습니다. 그들은 남편을 속임같이 하나님을 속이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신을 숭배한 것을 ‘헛된 말’이라고 고백하며 여호와께 돌아가고자 노력합니다.

 

이스라엘의 배신(19-20)

죄는 속임, 곧 거짓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며,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아멘’으로 화답했으면서도 정작 삶에서 순종하지는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의 말씀을 알면서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19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20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 온 땅이 탈취를 당하니 나의 장막과 휘장은 갑자기 파멸되도다(19-2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녀들 중에 둘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게 하며 하나님을 떠나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부터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표현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기대(19)

18절까지 여호와의 약속 이후에 본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간략한 약속을 다시 서술합니다. 19절에는 “내가... 네게 주리라”라는 미래형 약속이 나오는데, 이로써 저자는 이 약속이 여호와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합니다. 덧붙여 여호와는 “너를 자녀들 중에 두며”라고 선언합니다. 개역개정에는 성(性)의 구분이 나오지 않지만, 여기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너’가 여성으로 나온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여호와가 여성인 ‘너’에게 줄 것은 ‘아름다운 기업, 즉 귀한 땅’입니다. 여호와는 이 기업을 의도적으로 ‘여성’으로 표현된 이스라엘에게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또한 이 땅은 ‘귀중한다’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나오는데, 이것은 ‘기름진’ 땅으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2:7). 여호와는 ‘나를 떠나지 말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내 뒤에서 돌아서 떠나가다’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좋은 땅을 주었지만, 이 땅은 ‘어두운 땅’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2:31). 이것이 그처럼 변한 이유는 여호와를 ‘속였기’ 때문입니다(2).

(2) 이스라엘의 배반(20)

이것은 유다의 ‘패역함’을 서술할 때 사용된 것과 동일한 단어입니다(3:8).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신실하지 못한 행동이며 패역한 행동인 것입니다. 개역개정은 “아내가 그의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라고 번역합니다(20). 하지만 히브리어 레아(“남편”)는 본래 ‘친구’ 또는 ‘이웃’을 의미합니다(창 38:12; 43:3; 2:13).

 

백성의 회개(21-25)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세상의 우상들이 더 달콤하고 능하다는 거짓말에 속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붙들지 않으면 세상의 거짓말에 쉽게 속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속이고 떠난 이유는 우상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21소리가 헐벗은 산 위에서 들리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 22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23작은 산들과 큰 산 위에서 떠드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라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24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25우리는 수치 중에 눕겠고 우리의 치욕이 우리를 덮을 것이니 이는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21-25)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떠나 망해 버린 이스라엘 자손이 애곡하며 간구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마 이는 망해 버린 이스라엘이 주님 앞에서 나아와 회개하는 환상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배역한 자식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돌아오라 하시며, 그들을 고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1) 헐벗은 산에서 탄식(21)

여호와는 “헐벗은 산”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2절에서 헐벗은 산을 언급했는데, 그곳은 행음이 일어나는 부정적 장소였습니다. 이제는 그곳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 소리는 ‘애곡하며 간구’하는 이스라엘의 통곡입니다. 그들은 ‘길’을 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망각했음을 고백합니다(21). “그들의 길”은 이스라엘이 화자가 되므로 ‘자기들의 길’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잘못 가고 있거나 바른 길에서 벗어났음을 고백하는 발언입니다. 여호와를 ‘잊었다’는 표현은 예레미야 2:32에서도 서술되어 이스라엘의 행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으므로, 본문은 예언자의 선포에 따라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 3장은 ‘요시야’를 언급함으로써 이 사건의 시간적 배경을 가리킵니다. 요시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후손 가운데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왕으로 나옵니다: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2) 하나님의 초대(22a)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배역한 자’라고 말하며 ‘돌아오라’고 명령하는데, 여기에는 동일한 어근(슈브)이 사용되었습니다. ‘배역한 자’(쇼바빔)는 앞서 여호와를 ‘떠나지 말라’고 말했지만, 여호와께 등을 돌리고 떠났던 자들을 가리킵니다(19). 명령문 이후에는 ‘내가 고치리라’라는 미완료 동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결과절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고칠 수 없으며, 여호와만이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출 15:26). 그들의 죄는 이제 비누로도 씻을 수 없는 본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2:22).

(3) 초대에 대한 응답-회개(22b-25)

22b절은 ‘보소서’라는 말로 시작하여 내용이 전환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나아와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은 ‘주’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용어로 시작하며, ‘당신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으로 번역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비로소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23절은 “진실로”라는 표현을 2회 활용하여 이스라엘이 깨달은 바를 서술합니다. 하나는 “헛된 일”이라는 것인데, 여러 언덕과 산에서 떠드는 행위를 대상으로 합니다. “산 위”는 이방 종교를 숭배하던 장소로(2:20), 예언자는 그곳에서 행해지는 것을 ‘헛된 일’로 규정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거짓’을 의미하는데,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거짓된 것이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3:10).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을 연속하여 사용함으로써 여호와를 구원의 주체로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라는 문구가 25절에 한번 더 기록되는 것을 볼 때, 저자는 그 의미를 강조합니다. 계속해서 24절은 “부끄러운 그것이 자신들의 산업과 자녀를 삼켰음을 고발합니다. 원문은 ‘부끄러운 그것’을 ‘하바알’로 읽을 것을 제안하는데, ‘보쉣’은 바알을 경멸조로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부끄러운 것’은 23절이 서술하는 ‘헛된 것’과 연결되며, 이스라엘은 바알 숭배와 ‘헛된/거짓된 것’을 연결합니다. 동시에 본문은 구원을 주는 ‘여호와’와 자신들의 것을 삼기는 ‘바알’을 대조적으로 서술합니다. 덧붙여 ‘양, 소, 자녀들’을 삼키는 모습은 왕권 비판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삼상 8:13-17). 25절은 자신들의 죄를 이방 숭배의 관점이 아니라, 여호와를 청종하지 않은 불순종과 연결합니다. ‘순종하지 아니하였다’는 신명기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들으라’는 명령과 연결됩니다(신 4:1; 5:1; 6:4). 본문은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청년의 때로부터 오늘까지”라고 서술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한 과거부터 현재의 기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불순종의 역사로 규정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스라엘은 수치와 치욕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과정(4:1-4)

우리는 회개를 쉬운 것으로 야기다 보니 죄를 쉽게 짓기도 합니다. 죗값은 절대 가볍지 않고, 회개는 절대 편안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시며 마음에 할례를 받아 여호와께 속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2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3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4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1-4)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돌아오려거든 다른 곳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백성이 여러 가지 위기에 봉착해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 할 때, 그들이 살기 위해 달아가야 할 곳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가증한 것, 즉 우상들을 숭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1) 가증한 것을 버리라(1)

1절에는 ‘임’을 사용한 조건문이 2회 나옵니다. 첫째는 “네가 돌아오려거든”이고, 둘째는 ‘네가 버리고(면)’입니다. ‘네가 돌아오려거든’은 ‘내게로 돌아오라’와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며, ‘네가 버리면’은 ‘요동치 아니하며’와 형태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가증한 것을 버리라’고 요구합니다. 이 둘은 ‘수치와 치욕’에 처한 이스라엘이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돌아오라’는 명령은 예레미야 3장에서 세 차례나 언급되었기 때문에(12,14,22), 새로운 명령은 아닙니다. 두 번째 조건인 ‘가증한 것을 버리는’ 행위는 여호와에게 돌아왔음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가증한 것”은 신상을 가리키는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여호와의 성전에 두고 숭배해왔음을 암시합니다(7:30; 32:34).

(2) 진실과 정의와 공의를 취하라(2)

2절에는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할 것을 요구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진실, 정의, 공의’가 함께 나오는 경우는 예레미야 4:2이 유일하며, 이것은 이스라엘의 삶을 정의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오고자 한다면, 그는 ‘진실, 정의, 공의’를 실천할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3) 할례를 행하라(3-4)

비유적인 명령(3) 이후에 여호와는 ‘할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스라엘은 마음의 가죽을 베어야 여호와께 속할 수 있습니다. 4절이 언급하는 할례는 창세기 17장과 연결됩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할례 명령이며, 남자에게만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언급하는 ‘마음에 하는 할례’는 창세기 17장을 뛰어넘습니다. 마음에 하는 할례는 남녀를 구분하지 않으며, 외형적 할례가 아니라 본질적 할례를 가리킵니다. 덧붙여 고대 이스라엘은 ‘마음’을 사고의 체계로 이해해왔기 때문에, 마음의 할례는 이스라엘에게 과거의 행동과 생각으로부터 탈피해야 함을 요구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를 선포하는 말씀만 좋아하고, 죄를 지적하며 회개하라는 메시지는 듣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죄를 지적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기 위해 나의 어두운 면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크게 뉘우치며 나 자신을 바로잡는 참된 지혜자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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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3-01)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초대

예레미야 3장 1-18절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 7절에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신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개혁의 출발점이고 공동체가 새롭게 변화되고 시작될 때, 처음 시작했던 것은 회개입니다. 개인의 일생에서도 회개함으로 새로운 인생을 수많은 사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회개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작을 회개로부터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부부관계를 비유로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던 여인이 돌아온다면, 남편은 그 연인을 받아줄 것입니까? 예언자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예언자는 유다에 대해 선포합니다. 유다와 비교하면 이스라엘은 선한 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면교사로 심지 않았습니다.

 

논쟁의 음란(1-5)

가끔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면 다 받아주시니 우리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라는 식의 뻔뻔한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 돌아갈 자격조차 없습니다. 남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지만, 사실상 이들은 하나님께 돌아갈 자격조차 없습니다.

1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4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5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1-5)

음란과 행악으로 온 땅을 더럽혔습니다. 비를 거두심으로 심판하셨는데도 창기의 낯을 가진 그들은 수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보호자로 부르지만, 행위는 여전히 악하니 기만일 뿐입니다. 피상적인 회개는 자신을 속여 자신을 더욱 위선적으로 만듭니다.

(1) 논쟁의 말(1)

예언자는 아주 빈번하게 혼인 관계를 통해 여호와와 이스라엘을 설명하는데(호 1-2장), 1절은 당시 사람들의 관습과 법적인 상황을 비유로 제시합니다. 한 여인이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에, 그녀는 재혼한 남편과 이혼하고 첫 남편에게로 돌아올 수 있습니까? 예언자는 다시 받아들이면 ‘더러워지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원문에서 ‘더러워지다’는 ‘더러움’의 의미를 강조하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덧붙여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많은 무리’(레임 라빔)와 행음했다고 서술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다른 남자에게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돌아오다’(슈브)라는 동사는 행동을 의미할 뿐 아니라 ‘회개’를 가리키기도 하므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2) 유다에 대한 고발(2-5)

예언자는 독자의 시선을 ‘산’으로 인도하는데, 그 산은 벗겨진 산입니다(2). 벗겨진 산들 중에 이스라엘이 행음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산이 벗겨졌다는 묘사는 이스라엘이 행음한 장소임을 가리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이 산중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왕래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아라바 사람과 비교됩니다. 70인역은 이들을 ‘까마귀’로 이해하는데, 이들은 유목을 하며 다니는 자들로 보입니다(사 13:20). 3절은 ‘단비’와 ‘늦은 비’를 통해 이스라엘 기후에 대해 언급합니다. 10월에 시작한 우기는 이듬해 5월에는 끝납니다. 씨를 뿌리는 데 도움이 되는 이른 비는 10월 즈음에 내리는 비를, 그리고 늦은 비는 이듬해 3-4월경에 내리는 비를 가리킵니다. ‘단비’는 봄철에 내리는 소나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북이스라엘보다 남유다를 더욱 심각한 상황에 몰아넣습니다. 왜냐하면 남유다의 대부분 지역은 년 강수량이 500mm 이하로 대단히 낮았기 때문입니다. 비가 그쳤다는 것은 남유다에 기근이 올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 기근은 이스라엘의 행위와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결과입니다. 이것은 언어유희에서도 관찰되는데, 이스라엘에는 비가 ‘그쳤으며’(마나),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수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아버지’와 ‘보호자’로 부릅니다(4). 개역개정은 “이제부터”라고 번역하지만, 이것은 ‘오래전부터’를 의미하며, “보호자”는 ‘친구’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느냐?’ 그리고 ‘끝까지 품으시겠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여호와와 친분을 과시했고 여호와를 잘 알고 있는 듯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이 거리낌 없이 죄를 짓는데 일조합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여호와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알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여호와의 인내로 점철되었고, 여호와는 이제 그들을 벌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역한 자매 이스라엘과 유다(6-10)

죄를 범한 자들이 징계당하는 것을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라는 외침에 겉으로만 뉘우치는 척하면서 계속 죄를 범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가증할 뿐입니다. 우리가 교훈을 받고서도 변화하지 않고, 눈물만 흘릴 뿐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이러한 책망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6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8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6-10)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남 유다는 교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기회를 주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긍휼이 풍성하시고 노를 한없이 품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죄(6-9)

6절은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로 시작하여 새로운 계시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매의 모습으로 나오며, 두 나라는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반역한 사들입니다. 만약 본문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나누어 설명한다면, 그것은 각각 남북 분열 왕국을 가리킵니다. 6절은 다시 한 번 ‘요시야’ 통치 시기를 서술하는데,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이미 멸망했으므로, 요시야 통치 시기(주전 639-609년)에 북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한 시대는(주전 626년)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약 100년이 지났으므로 본문이 가리키는 “이스라엘이 행한 바”는 유다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배역함(메슈바)을 통해 배우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요시야는 주전 622년에 성소 단일화를 실행하고, 이를 통해 전무후무한 이스라엘 왕으로 칭송을 받은 인물입니다(왕하 23:25). 따라서 6절의 내용은 요시야의 성소 단일화 이전에 있었던 선포를 암시합니다. 7절이 말하는 “이 모든 일”은 바로 ‘배역’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이후에 여호와께 ‘돌아오리라’(타브) 다짐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반복하여 ‘슈브’를 어근으로 취하는 용어를 활용하여 언어유희를 만들고 있습니다(메슈바-타슈브-로-샤바). 배역(메슈바)은 거짓된 돌이킴(슈브)일 뿐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에게 돌아감’을 의미하지 않고, ‘여호와로부터 돌아섬’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배역함을 ‘보았다’(봐테레), 이것은 인지동사로서 시각적인 의미일 뿐 아니라, ‘학습’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8절은 ‘봐에레’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1인칭 단수형이므로, 주어는 신탁을 받은 예레미야 또는 신탁의 주체인 여호와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 사본들은 이것을 ‘봐테레’, 즉 3인칭 여성 단수로 수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2) 유다의 죄 고발(10)

뒤이어 나오는 서술은 유다가 목도한 것을 다시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7절에서 유다는 이스라엘의 배역을 목도했다면, 이제는 예언자 또는 여호와가 유다를 목도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8절은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고 그 결과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내쫓은 것을 유다가 본 것을 서술한 것이고, 뒤이어 나오는 유다가 ‘행음한다’는 것은 여호와가 목격하고 있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경우에서 보고 배웠는데도 그들은 두려움 없이 여호와를 배교합니다. 유다가 ‘보았다’(봐테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이로써 예언자는 유다가 보았지만, 보지 못한 것처럼 눈이 가려진 상황을 연출합니다. 그들이 ‘두려움 없이’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보았으나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아도 알지 못한다’며 비판했는데(사 6:9), 100년이 지난 예레미야의 시대에도 백성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행음함으로 땅을 더럽혔으며(9), 여호와께 돌아오겠다는 것은 거짓일 뿐입니다(10). 예언자는 먼저 사용된 단어를 차용하여 유다의 죄를 지적합니다: ‘더럽히다’(하나프, 9), 게다가 여기에는 ‘더럽히다’(하나프)와 ‘행음하다’(나아프)가 언어유희로 기록되어(9) 유다의 죄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구원과 회복(11-18)

하나님의 용서는 법으로도, 도덕으로도, 합리성으로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처벌을 당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백성에게 돌아오라 부르시며 회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의 말씀을 들었다면 주님께 돌아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다시는 죄악에 거하지 않겠노라 약속하며 결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12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1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17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18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11-18)

배역한 자식들을 시온으로 다시 데려와 이루실 미래를 약속하십니다. 지식과 명철로 양육할 지도자와 언약궤가 필요 없는 나라를 주실 것이며, 예루살렘이 예배의 중심지가 되고, 분열된 형제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참다운 회복의 소망이 되십니다.

(1) 이스라엘의 구원(11-13)

11절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라는 문구를 통해 새로운 신탁이 주어졌음을 암시합니다. “배역한 이스라엘”과 “반역한 유다”는 ‘배역한 여인 이스라엘’과 ‘반역한 여인 유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의롭다’(찌데카)고 언급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배역하여 여호와의 심판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고 서술했는데(1-10), 유다와 이스라엘의 상대적 개념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그의 ‘의로움’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로움’은 무죄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레미야에게 다시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북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12).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는 선포와 함께 여호와는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며 구원을 말합니다. 예언자는 이보다 앞서서 ‘돌아오라’(슈브)고 명령합니다(12,14).

(2) 유다의 회복(14-18)

이처럼 갑작스럽게 심판의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16절 이하는 이스라엘이 돌아왔다는 서술은 없고 여호와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 즉 하나가 되는 결과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17).


배도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과 원수 된 우리를 자녀 삼으사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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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2-04)


하나님의 백성들이 알아야 할 것

예레미야 2장 29-37절


지혜로운 사람은 책망을 즐겨듣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미련하고 교만한 사람은 그 책망을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4:13)라고 권면합니다. 훈계와 책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때로는 책망이 있고, 때로는 위로가 있고 격려가 있고, 어려가지 다양한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미련한 사람은 그 책망과 교훈의 말씀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은 그 책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성장의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논쟁적 언어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경고하기 위해 예언자를 보내셨지만, 그들은 예언자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죽어기도 했습니다(30). 그들의 옷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가득합니다. 그러한 유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누구입니까? 유다는 여호와의 진노가 떠났다고 말하고 다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유다의 배반(29-32)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촉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회개야말로 성도를 성도답게 만드는 은혜의 수던입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 돌이켜야 하는 죄가 없는지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악 가운데 있었다고 할지라도 회개하는 마음을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29너희가 나에게 대항함은 어찌 됨이냐 너희가 다 내게 잘못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0내가 너희 자녀들을 때린 것이 무익함은 그들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31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 무슨 이유로 내 백성이 말하기를 우리는 놓였으니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 32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셀 수 없거늘(29-32)

죄의 결과로 징계를 받는데도 이를 인정하거나 수용하려 들지 않습니다. 적반하장으로 대항하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입니다.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한 모습은 결국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징계가 올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1) 여호와의 논쟁(29)

29절은 예언자를 통한 여호와의 말입니다. ‘대항하다’(리브)는 법적 논쟁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호와꼐서 유다와 ‘싸우겠다’는 서술과 연결됩니다(9). 9절은 여호와가 유다에 대해 ‘대항한다’고 말한다면, 29절은 유다가 여호와에게 ‘대항하고’ 있습니다. 결국 두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유다는 한편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여호와에 대항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언자의 고난은 여호와의 고난을 대리합니다. 이 논쟁에서 여호와는 ‘너희가 내게 잘못하였으니라’라고 말합니다. 이와 동일한 표현이 8절에서는 ‘나에게 반역하며’로 번역되었는데, ‘잘못’보다는 ‘반역’이 더 적절합니다.

(2) 여호와의 징계를 거절(30)

하나님께 반역한 것은 무엇입니까? 8절에서 ‘반역’이 이방 신 숭배를 가리킨다면, 30절에서는 여호와의 ‘선지자’를 삼켰다고 유다의 행위를 지적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메시지를 거부합니다. ‘너희 자녀를 때리다’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내릴 재앙을 연상시킵니다(30). 30절은 ‘무익하다’라고 시작하며 그 의미를 강조하는데, 십계명에서는 ‘망령되게’라는 의미로 번역되었으며, 하나님의 징계를 무익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비판하는 표현입니다. 사자의 ‘사나움’은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로 맹렬합니다(4:7). 이것은 여호와의 사나움이 아니라 유다의 ‘사나움’을 가리킵니다. 유다가 예언자를 맹렬하게 대했기에 여호와께서 유다를 맹렬하게 대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3) 여호와의 탄식(31-32)

31절은 “너희 이 세대여 여호와의 말을 들어 보라”라고 시작합니다. ‘말’(다바르)이라는 명사가 ‘듣다’라는 동사가 아니라 ‘보다’라는 동사와 결합되었습니다. 여기서 ‘다바르’를 ‘일/사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신 4:9). 이후에 여호와께서는 세 차례의 수사적 표현으로 유다에게 반문합니다. 먼저 “내가 이스라엘에게 광야가 되었었느냐?”라고 묻습니다. ‘광야’(미드바르)는 ‘말’(다바르)과 어근을 공유하는데, 여호와의 ‘말씀’(다바르)을 ‘광야’(미드바르)로 생각하는 유다를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뒤이어 “캄캄한 땅이 되었었느냐?”는 질문이 나놉니다. ‘캄캄한 땅’은 칠흑 같은 어둠을 가리킵니다. 두 수사적 질문에서 기대되는 대답은 ‘No!’입니다. 여호와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는 광야와 빛이 없어 방향을 알 수 없는 흑암의 땅을 가로질러 이스라엘을 인도한 분입니다. 이것은 “다시 주께로 가지 아니하겠다 하느냐?”라는 세 번째 질문과도 연결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광야’와 ‘캄캄한 땅’에서 인도한 분인데도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광야, 캄캄한 땅’으로 간주합니다. 이스라엘은 ‘놓여’ 자유롭게 다니게 되었다고 서술하는데, 이것은 유다의 멍에가 풀렸다는 서술과 연결될 수 있으며(20), 6절이 언급하듯이 출애굽 사건과 연결됩니다(6).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향해 나아가기를 거부하며, 여호와가 어디 계시는지 관심도 없습니다(6). 32절도 수사의문문을 활용하여 “처녀가 어찌 그의 패물을 잊겠느냐”” 그리고 “신부가 어찌 그의 예복을 잊겠느냐?”고 질문합니다. ‘베툴라’는 ‘젊은 여인’을 의미하며, 결혼을 앞둔 여성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두 비유는 여성과 결혼을 비유로 이스라엘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과 연결됩니다(2:2). 여호와께서는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지만’, 본문은 이스라엘이 결혼에서 중요한 패물과 예물을 ‘잊었다’(샤카하)고 두 차례나 서술합니다(2:32). 결혼을 앞둔 여성 같은 이스라엘이 신랑 여호와를 잊어버렸습니다(참조, 렘 3:21; 13:25).

 

하나님의 심판 결정(33-35)

인간은 죄악 저지르기를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어둠의 강력한 힘에 의해 죄는 더욱 타락한 상태로 악화됩니다. 작고 사소한 죄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는 영적 무감각의 단계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겉으로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실상을 들추어내십니다.

33네가 어찌 사랑을 얻으려고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 그러므로 네 행위를 악한 여자들에게까지 가르쳤으며 34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35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다 하거니와 보라 네 말이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므로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33-35)

처녀가 패물을 잊을 수 없고 신부가 아름다운 옷을 잊을 수 없듯이, 백성이 하나님을 잊는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1) 유다의 행음과 폭력(33-34)

33절은 “네 행위를 아름답게 꾸미느냐”로 시작합니다. ‘행위’는 ‘데렉’이라는 단어의 번역으로 ‘길’, ‘형동’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이 ‘길을 아름답게’ 꾸미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2절과 연결하여 ‘길’을 꾸미는 것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얻으려는 사랑의 대상은 여호와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사랑을 잊은 대신에 바알을 좇아가지만, 겉으로는 바알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2:23). 그들은 자신들도 악하게 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가르칩니다. 이스라엘이 가르치는 자는 ‘악한 여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악함의 교본과 스승이 되어 악한 여인을 더악한 길로 인도하며, 사람들이 여호와를 떠나도록 결정하는 것에 리더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악행의 일부는 34절에서 나옵니다. 그들의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어 있습니다. ‘죄 없는’ 자들의 피를 옷단에 묻혔다는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이 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습니다(출 23:7; 신 19:10).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옷단에 묻은 피와 관련해서도 설명합니다. 개역개정은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원문은 ‘그들이 뚫고 들어올 때 네가 그들을 붙든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22:12에 따르면 해가 지고 도적이 담을 뚫고 들어오는 경우에 피를 흘린 죄를 묻지 않습니다.

(2) 유다의 무죄 주장(35)

하지만 본문은 피의 주인이 ‘죄 없다’고 서술하므로, 그를 도둑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옷깃에 피가 묻어 있는데도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무죄하다” 그리고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두 차례나 주장합니다(35). 34절은 “가난한 자를 죽인 피”라고 서술하여, 피해자가 사망한 상황임을 암시합니다(창 9:5; 레 17:14). 즉, 가해자를 고발할 사람은 부재한 상황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므로(미 3:2-3),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이것에 관심을 갖는 이조차 없습니다. 그들이 철면피처럼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진노가 참으로 내게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이런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처벌받은 적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그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은 법정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상황이 되었으므로(29), 그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결할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심판도 포함합니다.

 

이스라엘의 대외 정책(36-37)

형통한 삶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에 있습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은 강대국이나 큰 세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불행은 하나님을 망각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36네가 어찌하여 네 길을 바꾸어 부지런히 돌아다니느냐 네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함 같이 또한 애굽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라 37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로 말미암아 형통하지 못할 것임이라(36-37)

이스라엘은 죄악의 증거인 옷단에 죄 없는 가난한 자의 피가 묻어 있는데도 스스로 속이며 과오를 회피합니다. 그 결과 강대국을 의지할지라도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불의와 죄가 엄연한데 기만적 행동으로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1) 이스라엘의 정치적 간음(36)

본문은 다시 한 번 “네 길”을 언급하는데, ‘길’은 예레미야 2장에서 빈번하게 사용되었습니다(17,18,23,33). 무엇보다 33절은 길을 꾸미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우상숭배뿐만 아니라 애굽과 앗수르를 찾아다니는 행위와 연결되기도 합니다(36).

(2) 하나님의 심판(37)

종교적 우상숭배는 정치적 간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과 앗수르’로 돌아다니는데, 이것은 물을 마시려고 ‘애굽과 앗수르’를 찾아다니는 모습과 동일합니다(18). 격변하는 지중해 동편 상황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고 강대국에 의존하는데,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그들을 버렸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언자는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언어유희를 사용합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인데, 여호와가 그들을 ‘버렸기’(마아스)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거기서 나가게’ 될 것인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갈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형통의 영적 원리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려 놓고도 아쉬울 때만 하나님께 도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행을 맞았습니다. 형통한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그분의 통치를 기뻐할 때 형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그분의 통치를 기뻐할 때 형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동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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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2-03)


바알 신을 더 사랑한 이스라엘

예레미야 2장 20-28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점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면 그분의 삶 속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고 이 땅에서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숭배하고 세상을 좋아하면 세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은 고통과 한숨과 죄악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호언장담합니다. 그들은 이방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옛적부터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이방 민족들처럼 되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자신이 우상숭배에 빠져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본질이 바뀐 타락이기에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죄에 사로잡힌 이스라엘(20-22)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먼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그분의 뜻과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살아가야 합니다.

20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21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22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20-22)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간적 욕망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몇 가지 기본적인 영적 원칙들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소의 표상을 사용해 이스라엘의 완강한 배반과 부패를 고발합니다.

(1) 옛적부터의 불순종(20)

이스라엘은 멍에와 굴레를 벗어버리고 주인으로부터 도망하려는 소처럼 하나님께 순종을 거절했습니다(20a). ‘멍에’와 ‘결박’은 자주 속박이나 강제 노역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의무와 사명의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됐습니다.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며 밭을 가는 일이 소에게 맡겨진 사명이듯,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땅을 경작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을 벗어던지고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갔습니다. ‘옛적부터’는 이스라엘의 배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죄악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멍에와 결박 대신에 이스라엘이 선택한 것은 가나안의 풍요제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창녀처럼 드러누워 음란을 즐겼습니다(20b). ‘높은 산’과 ‘푸른 나무’는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배워 알게 된 제의 처소를 가리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본받아 높은 산에 산당을 만들거나 푸른 나무 아래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특히 농경사회로 바뀌면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남편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에서 알게 된 정부 바알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하나님을 한숨짓게 만드는 총 자체를 바꿔버리는 악한 변화였습니다.

(2) 변질된 포도나무(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최상품의 포도나무로, 가장 순수한 종자로 심었는데 그들은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됐습니다(21),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퇴화해서 먹을 수 없는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완악한 민족은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신부였고, 그분을 위한 성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푼 기대가 산산이 깨져버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정부와 놀아나는 창녀가 됐고, 먹을 수 없는 악한 열매를 맺는 이방 포도나무가 됐습니다. 본성이 변했기에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다시 광야의 이스라엘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3) 씻어낼 수 없는 죄악(22)

몸의 더러움은 세제로 씻어낼 수 있지만, 속속들이 부패한 성품은 무엇으로도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라”(22). 이스라엘의 회개 가능성, 곧 하나님과의 재결합 가능성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갔습니다. 파국의 책임을 묻는 일만 남았습니다(이스라엘의 본성이 질적으로 타락해 회개가 불가능하다면, 심판 이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이에 관해서 예레미야 31:31-34 새 언약으로 답합니다).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23-25)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상으로 인식하기 쉽지 않은 현대적인 우상들이 있습니다(마 6:24). 예수님께서는 재물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좇고 있는 것들, 그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23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24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25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 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23-25)

하나님의 신령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망령된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습은 마치 발정난 암나귀들이 헐떡이는 것같이 우상을 향하여 특히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쳐두고 우상들을 좇았습니다.

(1) 죄를 부정하는 이스라엘(23)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자기 파멸적이고 맹목적이었습니다. 타락이 본성에까지 미쳐서 잿물과 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질 수 없다는 하나님의 책망에 이스라엘은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라고 항변합니다(23aa). 이스라엘은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들과 음란을 즐기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깨끗함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살펴보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고 반박하십니다(23ab). 이스라엘의 항변과 여호와의 반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가나안의 풍요제의를 여호와 종교 안에 받아들였음을 시사합니다. 이들에게 바알의 풍요제의는 여호와 종교의 보완이었기에, 바알들과 여호와 사이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예언자의 선포는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기에 자신들은 바알을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예언자는 겉으로만 여호와를 찾고 실제로는 바알을 섬긴다고 이들을 고발합니다. ‘옛적부터’ 참여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요제의가 여호와 종교에 이교적인 풍습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2) 제어할 수 없는 욕정(24-25)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명목적인 우상숭배를 암낙타와 들암나귀의 비유를 통해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짓은 가는 길을 종잡을 수 없는 암낙타와 같습니다(23b). 이스라엘의 길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때로는 여호와를, 때로는 우상들을 찾습니다. 또 욕정을 통제 못하는 이스라엘은 발정 난 들암나귀와도 같습니다. 발정기의 들암나귀는 몸이 달아 사방으로 수컷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수컷이 암컷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24). 풍요제의의 음란에 빠진 이스라엘도 욕정을 배설할 간부(姦夫) 바알들을 찾기에 혈안입니다. 욕정의 노예가 되어 날뛰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서 몸을 생각하며 우상들과 음란을 즐기라고 조롱하듯 경고하십니다. 몸이 달아 골짜기를 뛰어다니다가 발을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타오르는 정욕에 목이 마르지 않게 절제하라고 충고하십니다(25). 분별력과 통제력을 상실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경고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신의 욕정에 몸을 내맡깁니다.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 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25b).

 

우상숭배로 인한 수치(26-28)

우상은 아무런 능력도, 생명도 없는 헛된 것일 뿐입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은 무가치한 우상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우상은 자신들의 악한 욕망을 좇아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불순종하면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 섬깁니다. 참된 구원자이신 하나님만 인정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26도둑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 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27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28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26-28)

이스라엘 백성의 죄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지도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지도자, 그리고 제사장과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온갖 우상을 섬기는 데 심취해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본을 보여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에게 심판이 선고됩니다.

(1) 수치를 당할 지도자들(26)

먼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도둑에 비교합니다. 물건을 훔치던 도둑이 현장에서 붙잡혀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참조 출 22:1-4), 우상숭배가 드러난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26).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이(2:3) 거짓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또 도둑과의 비교는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남의 것을 훔치다 잡힌 도둑이 벌을 받듯이 우상숭배자로 폭로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별을 받습니다.

(2) 혼합주의(27)

여호와께서 인용하신 백성의 말은 이들이 얼마나 깊이 혼합주의에 빠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얼굴이 아니라 등을 돌리고,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떠듭니다(27a). 이들은 본질상 나무와 돌에 불과한 우상들을 창조신으로 섬기며 땅을 더럽혔습니다(참조, 3: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으셨는데, 이스라엘은 자신의 근본을 나무와 돌에게로 돌립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습니다. 평상시는 우상을 섬기다가도 환난 당할 때에는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하나님께로 얼굴을 돌리고 도움을 구합니다.

(3) 우상의 무능력(28)

가나안의 풍요제의를 여호와 종교의 일부로 받아들인 이스라엘은 아마도 풍요와 관련한 사적인 영역의 제의에서는 우상들을 숭배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적 예배에서는 여호와를 섬겼던 것 같습니다(참조. 7:1-20). 하나님께서 조롱하듯이 우상들에게 도움을 구해보라고 혼합주의에 빠진 ‘유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재앙이 닥칠 때 혹시 모르니 성읍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우상들에게 한번 도움을 요청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가 나무와 돌로 만들어 섬기던 우상들이 너를 구하기 위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환난을 당할 때에’ 유다는 누가 참된 하나님이신지를 고통과 쓰라림 가운데 깨닫게 될 것입니다(참조. 19). 우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은 13절의 ‘스스로 판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에 내용상 일치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든 터진 웅덩이와 같은 것으로, 터진 웅덩이에서 생수를 구할 수 없듯이 우상에게서 구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삶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의 신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깨어 백성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백성을 죄악으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죄악에 대해 심판하시고 수치스러운 결과를 안겨 줄 것을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살피고, 순종의 행위를 통해 참된 신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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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2-02)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예레미야 2장 9-19절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연구하고 또 발표합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얻는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누구인지를 깨달을 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의 고통에 이유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고통의 문제는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문제입니다. 자신이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서 그 고통의 이유를 깨닫게 되면 그 고통의 문제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는 버젓이 행해집니다. 비록 헛것이기는 하지만 이방 사람들은 자신이 섬기던 신을 바꾸지 않는데,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리고 실체가 없는 ‘무익한 것’을 좇습니다.

 

현 세대의 우상숭배(9-13)

어떤 분야든지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이 대성합니다. 스포츠,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가 그렇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기본기가 허약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실패한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선전포고 하십니다.

9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9-13)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헛된 것과 바꾸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1) 징벌 선언(9)

고발의 말씀 다음에 나오는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절에서는 보통 심판이 선포되는데, 여기서는 다시금 고발의 말씀이 나옵니다. 4-8절은 회고적 시점으로 ‘너희의 조상들’을 고발하고, 10-13절은 현재로 돌아와 ‘너희’를 고발합니다. 그 사이에 놓은 9절에서는 특이하게도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자손들’(문자적으로는 ‘너희 자손들의 자손들’)에게 소송을 거십니다. 고발의 대상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이스라엘의 미래 세대까지 포함됩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과거(“너희 조상들)와 현재(너희)와 미래(너희 자녀들)는 똑같습니다. 조상이나 현세대나 후손이나 한가지로 ‘헛된 것’을 따르며 언약을 파기합니다. 시간을 초월한 고발은 이스라엘이 뼛속까지 우상숭배자가 됐음을 시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태까지 참아오시던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인내하지 않으시고 심판에 나선 이유를 보여줍니다.

(2) 이방인보다 불성실한 이스라엘(10-11)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의 경고와 위협의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해 회개하는 일은 미래에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들에 비교해 고발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디 한번 온 세상을 뒤져 그들의 배반과 유사한 배반이 민족들 가운데 있었는지 조사해보도록 명령하십니다(10). 깃딤은 원래 키프로스(구브로)를 가리키지만, 때로는 지중해 동쪽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비다. 게달은 시리아-아라비아 사막 지역에 사는 아랍 족속의 이름입니다. 가나안에서 볼 때 깃딤과 게달은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도 하지 않는 황당한 짓을 범했습니다. ‘어느 나라가 (자기네) 신들을 바꾼 적이 있더냐? 비록 그것들이 신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내 백성은 무익한 것과 자기 영광을 바꾸었다’(11). 민족들은 신들이 아닌 헛것을 섬기면서도 한번 섬긴 신들을 바꾸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헛것을 섬기기 위해 출애굽과 광야의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의 영광’(자기 영광)은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배반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내 백성’에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좌절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3) 생수의 근원을 버린 이스라엘(12-13)

이스라엘의 배교를 고발하신 하나님께서 하늘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12). 하늘이 전율할 만큼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 ‘하늘과 땅’은 증인으로 참여했습니다(참조. 신 4:26;31:28;32:1). 이스라엘은 물론 민족들 가운데 벌어지는 일도 빠짐없이 목격한 하늘은 신실하고 확실한 증인입니다. 소송의 증인으로 초대받은 하늘은 이스라엘이 범한 잘못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알고 있었기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을 중인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며 고발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13). ‘두 가지 악’은 두 종류의 죄악이라기보다는 종이의 양면처럼 완전한 배반의 이중적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께 의존하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을 위해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을 팠습니다. 가나안에서는 석회암을 파고 그 안쪽에 회반죽을 발라 만든 웅덩이에 빗물을 저장해 사용했습니다. 관리를 게을리하면 회반죽이 떨어져 나가고 벽이 갈라져 물이 새거나 이물질이 들어와 부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샘에서는 언제나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만, 웅덩이의 물은 겉으로는 깨끗해도 몸에 해로울 수 있고, 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대신 선택한 가나안의 우상들에게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썩거나 오염된 물이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강대국 의존적 정치(14-19)

세상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들이 판치는 세상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힘겨운 믿음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싸움을 계속될 것입니다. 싸움이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을 떠나지 마시길 바랍니다. 생명을 걸고 말씀을 묵상하며 그 길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14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15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 16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17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18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19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셔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만으로도 죽음을 자초하는 일인데, 스스로 밑 빠진 독과 같은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노예와 포로라고 말씀하십니다.

(1) 정치적 자유의 상실(14)

예언자가 정치적 자유를 빼앗기고 강대국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의 참담한 현재를 탄식합니다. ‘여호와를 위한 성물’이 이방 나라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이 다시 종이 되어 대를 이어가며 종살이를 합니다(14). ‘씨종’은 종인 부모에게서 종의 신분으로 태어난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던(3) 이스라엘이 힘 있는 자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언약 관계를 파기한 이스라엘은 굶주린 사자들의 먹이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15). 남편의 보호를 박탈당한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탐욕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이들의 침략으로 성읍들은 불탔고 주민들은 죽거나 사로잡혀 갔고 땅은 황폐해져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2) 강대국의 침략의 악탈(15-16)

예루살렘이 의지하였던 애굽마저 유다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16)는 아마도 주전 609년 유다의 개혁적인 군주였던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의 바로 느고에게 죽임을 당한(참조, 왕하 23:29) 비극적 사건을 회고하는 것 같습니다. 높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대략 2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고대 애굽 왕조의 수도였고, 다바네스는 나일 삼각주 동쪽 연안에 있는 국경 도시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닥친 재앙은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입니다.

(3) 자초한 재앙(17)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은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고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면서 멸망을 자초했습니다(17). 그분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결과로 재앙이 이스라엘에 임했습니다.

(4) 강대국 의존적 대외정책(18)

예언자가 이스라엘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탄식합니다. 강대국에 의존해 생존을 모색하다가 파국적 위기를 경험했음에도 깨달은 것이 없었습니다.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유브라데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내려갑니다(18). 생존을 위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외교적인 줄타기를 합니다. 파국적 위기를 당하기 전이나 이후나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정치에 여호와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시홀’은 원래 나일의 한 지류 또는 나일 삼각주 동편의 한 호수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나일을 대신하여 사용됐습니다. ‘강’은 유브라데를 가리킵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시홀의 물과 유브라데 강물은 13절에 나오는 ‘생수의 근원’에 연결됩니다. ‘생수의 근원’인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는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의 물을 마시고, 정치적으로는 시홀의 물과 유브라데 강물을 마십니다. 생수를 거절하고 마실 수 없는 물을 마시는 이스라엘의 행태는 자기파멸적입니다.

(5) 악행의 결실, 재앙(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19aa). 이스라엘이 범한 ‘악’과 ‘반역’이 ‘징계’와 ‘책망’으로 결실합니다. 악이 성장해 재앙의 광풍으로 덮치고, 반역이 보호를 박탈해 민족들의 침략을 초래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악과 반역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고통 가운데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버린 것이 얼마나 악하고 쓰라린지 보고 알아라’(19ab절의 사역). 이스라엘은 징계를 당한 이후에야 뒤늦게 배반의 고통과 쓰라림을 깨닫게 됩니다(참조, 4:18), 19b절에서는 화자가 예언자에서 여호와로 바뀝니다.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구나.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교의 동기나 원인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부재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분을 버리고 우상을 따르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그분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실패는 믿음의 기분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외면했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믿음의 기분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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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2-01)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예레미야 2장 1-8절


한자성어 ‘조변석개(朝變夕改)’, ‘조령모개(朝令暮改)’, ‘작심삼일(作心三日)’ 등은 사람들이 자꾸 변하는 속성을 잘 말해줍니다. 자꾸 변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변질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도 변질되면 사람을 해롭게 하여 해치게 됩니다. 변질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은 변질된 신앙을 가진 이들입니다. 변질된 신앙의 무서움을 명심하고 우리 인생길 종착역에서 기다리시는 주님을 향해 열심히 달리는 성도가 됩시다.

 

여호와께서는 과거 이스라엘의 순종을 기억하십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신실한 언약적 사랑을 나누었던 광야시절을 회상하면서 현재의 망각과 무관심을 질타합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 땅을 더럽히며, 지도자들 또한 악을 행합니다. 그들의 죄악은 두 가지, 곧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한 광야의 이스라엘(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하여 깨뜨려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십니다. 본래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실 것입니다. 그 까닭에 이스라엘이 관계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로서는 단지 하나님의 주도적인 갱신 행동에 응답할 수만 있을 뿐이며,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3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3)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자격과 상관없이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언약을 맺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광야에서 은혜 때문에 사랑을 나누었던 신혼 시절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를 회상하시며 이스라엘의 과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와 그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 말씀의 계시(1)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말씀을 주시며 ‘예루살렘의 귀에’ 외치게 하십니다. 선포해야 할 말씀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와 관련한 하나님의 회고적 평가입니다.

(2) 광야의 신혼(2)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2)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한 광야의 여정을 신혼의 밀월여행으로 기억하십니다.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부족하고,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열심을 다하여 남편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만 따랐습니다. 4절 이하와 함께 읽으면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실망, 그리고 어떻게든 처음 사랑을 회복해보려는 간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동의어로 사용된 ‘인애’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 헌신’을 가리킵니다. ‘씨 뿌리지 못하는 땅’은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가나안 땅에 대비되는 표현입니다. 척박하고 위험한 땅이지만, 광야는 풍요 제의를 주관하는 바알이 없는 곳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만 따른 구원의 장소입니다.

(3) 여호와를 위한 성물(3)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소유관계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이었습니다. 구별되어 여호와께 드려진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할 그분을 위한 민족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9:6에서도 유사하게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소산 중 첫 열매도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 줍니다. 수확의 첫 열매가 하나님의 몫으로 돌려지는 것처럼(참조, 출 23:19a),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되어 그분의 몫으로 드려졌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내로, 그분의 소유물로 남아있을 때 이스라엘은 남편과 소유주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을 때, 그분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분의 보호는 중단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내요 소유물이라는 사실 자체가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결혼 관계 안에 있을 때만, 소유관계 안에 있을 때만 그분의 보호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버린 가나안의 이스라엘(4-8)

미국의 청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이 소위 ‘파티 문화’랍니다. 이런 저런 명목으로 자주 파티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 때 분위기에 휩쓸려 성관계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많은 경우 동거하기도 합니다. 이 때 자신의 신앙과 삶 사이에 감당하기 힘든 괴리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양심의 가책에 지치고 죄악된 생활 방식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경우 결국 신앙을 저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지적 회의나 교회에 대한 실망감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이런 도덕적 타협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라는 것입니다.

4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5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 6그들이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우리가 통과하게 하시던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고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7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 8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에게 반역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느니라(4-8)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가장 값진 소유입니다. 성물과 첫 열매는 아무도 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것으로 제사장과 그 직계만 먹을 수 있었고, 그것을 어기면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은 그토록 소중했는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선택 사랑 중 하나였고, 그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대상도 되지 못했습니다.

(1) 도입부(4)

예언자가 ‘야곱의 집과 이스라엘의 집 모든 족속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4). 현재 문맥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조상들부터 현 세대까지 모든 이스라엘이 고발 대상이 됩니다. 우상숭배는 가나안 정착 이후 계속된 고질병입니다.

(2) 여호와의 자기변호(5)

하나님께서는 먼저 수사적 질문을 통해 실망과 당혹스러움을 토로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5). 광야에서 하나님을 따라갔던(2)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는 그분을 멀리하고 ‘헛된 것’을 따라가다 헛것이 됐습니다. 이스라엘의 배반은 하나님을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조상들의 행태를 이해하실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들이 가나안에서 그처럼 돌변했는지, 당신께 무슨 잘못이 있었기에 당신을 떠나 우상을 찾아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셨습니다. ‘헛된 것’으로 옮긴 ‘헤벨’은 ‘(사라져버리는) 입김/숨결’, ‘아무것도 아닌 것’, ‘덧없음’을 의미하고, 자주 ‘우상’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우상은 본질상 헛것이기에 헛것을 쫓은 이스라엘은 헛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하나님께 ‘불의함’이 없었음은 이스라엘이 잘 알고 있는 출애굽과 광야와 가나안 정착의 역사를 통해 확인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해하신 일을 돌이켜 본다면 헤어짐의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백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3) 잊힌 여호와(6)

하나님께서는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애굽 바로의 강제노역에서 해방해주셨고, ‘광야 곧 사막과 구덩이 땅. 건조하고 사망의 그늘진 땅, 사람이 그 곳으로 다니지 아니하고 그 곳에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을 안전하게 지날 수 있게 보호하고 인도해주셨습니다(6).

(4) 더럽혀진 땅(7)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광야에서 양식과 물을 제공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셨습니다(7). 출애굽부터 광야를 지나 가나안 정착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부족함 없이 베풀어주기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사적 경험에 따르면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애쓰셨던 일들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처럼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던 여호와를 과거의 인물로 치부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아내요 ’자신의 소산 중 첫 열매‘로 여기셨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출애굽과 가나안 정작으로 그 역할을 다한 신처럼 여겼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결별을 선언하고 우상들을 섬기며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다’(7b). 가나안은 원칙상 여호와의 소유로 그분이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신 땅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땅 가나안에서 그분을 위해 구별된 민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땅을 선물로 주신 분을 버리고 가나안에서 바알을 섬겼습니다. 마치 가나안이 바알의 소유인 양 바알에게 땅의 결실과 풍요를 간구했습니다. 7b절이 레위기 18:24-30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이라면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습니다. ‘가증한 일’로 땅을 더럽힌 가나안 원주민을 땅이 토해낸 것처럼 ‘역겨운 것’으로 땅을 더럽힌 이스라엘도 땅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고발 대상이 이스라엘 전체에서 백성이 배교에 더 큰 책임이 있는 종교·정치 지도자들로 좁혀집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여호와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백성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지배계급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는 총체적 부패였습니다(참조, 5:3-5). 율법과 제의를 책임진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전에서 그분께 제사를 드릴 뿐, 예배의 대상인 그분의 의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하고 묻지 않았기에 백성 또한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하고 묻지 않았습니다(6). ‘율법을 다루는 자들’은 그 법을 주신 분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명목상으로만 인정하는 자들이 그분의 법을 가르쳤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형체만 남은 전통과 교리로 변질시켰기 때문에 백성은 땅의 ‘열매’와 ‘아름다운 것’을 먹으면서도(7) 이를 주신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5) 지도자들의 배반(8)

‘제사장들’과 ‘율법을 다루는 자들’이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과 신학적 전통 안에 유폐했다면,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에게서 다른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관리’로 옮긴 ‘목자들’은 원래 왕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왕궁의 고위 관료들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도록 위임받은 목자들이 그분께 반역한 자들입니다. 양 떼의 원주인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주인인 양 다스렸습니다. 예루살렘 왕궁은 다윗 왕조의 영원한 보좌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종주권을 거절하고 독립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분의 뜻을 선포해야 하는 예언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들’을 따랐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여호와의 예언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바알의 예언자였습니다. 예언자들이 여호와와 바알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합주의에 빠졌습니다. 예언자들은 ‘무익한 것들’을 따라가다 무익한 존재가 됐고, 이스라엘은 ‘헛된 것’을 따라가다 헛것이 됐습니다(5).


주의 자녀들은 세상 사람들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빛 된 삶을 살아 내면서 소금과 같이 맛을 드러내어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희망이 없다는 그들에게 산 소망과 평안의 길을 안내하는 등대와 같은 삶을 살아 내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에서 신을 벗어라’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지금 내가 선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파송한 선교지라 믿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성실과 정직하고 진실하게 감당할 때, 이 시대를 이끄는 영적 지도자와 선한 일꾼으로 우뚝 서게 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섬김의 자리와 헌신의 자리가 되게 하는 저와 주님의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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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1-02)


지켜보시며 지켜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1장 11-1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보내시는 분 이십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소명이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시는 것을 사명, 미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어떤 목적을 위해서 사명을 주시고 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다 사명 받은 사람입니다. 사명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맡은 사명을 온전히 책임감 있게 감당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시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소명을 확신하도록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 가지 환상과 끓는 가마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먼저는 함께하심에 대해 약속하시고, 이어서 예언한 메시지의 내용을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환상으로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한 번 함께하심에 대한 약속으로 격려하며 권면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모두 유다에 전하라고 명령받습니다.

 

두 가지 환상(11-15)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인간이 만든 우상을 섬기면, 그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기다려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 가지와 끓는 가마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이는 예레미야에게 구원 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11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14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15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북방 모든 나라의 족속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면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11-15)

예레미야에게 나라들과 왕국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시는’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 번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두 환상은 하나님의 질문과 예언자의 답변과 하나님의 해석이라는 동일한 구조로 보고됩니다.

(1) 살구나무 가지 환상(11-12)

첫 번째는 언어적 유사성을 활용한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살구나무 가지’를 보여주시고 그 의미를 해석해주십니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함이라”(12). 이른 봄에, 때로는 1월 말에서 2월 초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로 알려진 살구나무(편도나무)의 어원을 활용한 해석입니다. ‘살구나무’의 히브리어 ‘샤케드’는 ‘지켜보다’를 의미하는 동사 ‘샤카드’에서 나온 이름이고, 12절의 ‘지켜’로 옮긴 히브리어 ‘쇼케드’는 동사 ‘샤카드’의 현재분사 형태입니다.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들로 자음이 같고 발음도 거의 유사합니다. 살구나무가 봄이 오는 것을 지켜보듯이 하나님께서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십니다. 예레미야를 당신의 예언자로 부르신 분께서 모든 것을 지켜보시다가 때가 되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2) 끓는 가마 환상(13-15)

두 번째는 상징을 활용한 환상으로, 예레미야가 앞으로 선포하게 될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예레미야가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진 ‘끓는 가마’를 봅니다. 아마도 가마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기울어진 채 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마에서 끓는 내용물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았지만, 가마가 엎어진다면, 그 안에서 끊는 것은 쏟아지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기울어져 끓는 가마가 상징하는 바를 알려주십니다.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14). 여기서는 재앙의 내용에 관해서는 생략하고, 재앙이 오는 방향만 언급합니다. 재앙이 덮치는 대상인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은 15-16절이 보여주듯이 일차적으로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주민들이지만, 10절은 민족들도 이 재앙에서 안전하지 못할 것을 시사합니다. 예를 들면, 25:11에서 예레미야는 민족들이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길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재앙이 임하는 이유는 16절에서 설명됩니다. 북방에서 내려오는 재앙은 20:46에 가서야 바벨론으로 밝혀집니다. ‘북방으로부터 오는 재앙’이 예레미야가 선포해야 할 핵심 메시지가 됩니다.

 

북방에서 오는 재앙과 그 원인(15-16)

유다가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했다면 이런 끔찍한 재앙의 채찍을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렸고 그 징계로 하나님의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우리의 형통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주관자이심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형통한 삶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그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15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6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베풀어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15-16)

현재의 문맥에서 이 두 절은 14절을 이증적으로 보충해줍니다.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는 북방의 재앙은 정치적으로는 북방 민족들에 의한 유다와 예루살렘 침략이 원인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측면에서 틀 때, 재앙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우상숭배가 초래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겉으로는 강대국에 의한 약소국 침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소국의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죄악을 징계하시는 전쟁입니다. 15절의 ‘내가’로 옮긴 ‘힌니’는 ‘보라/이제 내가’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레미야가 환상 중에 본 북방의 재앙은 먼 미래에 발생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일어나고 있는, 즉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재앙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치려고 불러들이시는 치명적 재앙입니다.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은 침략군이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제국의 군대임을 시사합니다. 유다와 같은 변방의 작은 나라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막강한 군대입니다. 앗수르와 바벨론 같은 제국의 군대는 용병들과 자국민 병사들과 봉신국의 징집된 병사들로 구성된 다민족 다국적 군대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북방 왕국들의 침략군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보좌)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에 맞서 싸웁니다. 유다의 성읍들도 침략을 고하지 못하지만, 공격의 주요 목표는 예루살렘입니다. 성문을 중심으로 구역을 나눠 왕들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포위 공격을 합니다. 엎어진 가마의 뜨거운 물(기름?)이 북방에서 흘러 예루살렘 성문 입구까지 다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북방 왕국들을 불러 유다와 예루살렘을 침략하게 하실 때는 당연히 그렇게 하실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16). 유다와 예루살렘의 배교와 우상숭배가 재앙을 초래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죄악’(라아)에 대해 북방의 ‘재앙’(라아)으로 징계하십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은 민족들이 신들로 섬기는 우상들의 본질을 폭로하는 표현입니다(참조, 10:3b-5, 8-9). 예레미야서의 문맥에서 볼 때,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고발(우상숭배)과 심판 선포(북방에서 내려오는 재앙)를 거절한 결과로 주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가 멸망했습니다. 파국의 원인이나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됩니다.

 

예언자의 파견(17-19)

교회와 세상이 들어야 할 말을 두려움 없이 선포하는 증인들을 이길 수 있는 세상도 없고 교회도 없습니다. 그렇게 소신 있는 사역자를 교회는 지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들과 동행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수담만이 아니라 목적이기도 합니다. 일의 성취에 몰두하기보다 내가 놋성벽이 되어가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17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다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두렵건대 내가 너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게 할까 하노라보라 18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19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7-19)

심판의 메시지를 전지자를 완악한 시대가 용납하지 않겠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동행하시면 스스로 아이같이 여기는 선지자가 난공불락의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길 세력이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맡고 그분과 동행하는 선지자를 이길 자는 없을 것입니다.

(1) 순종 권면(17)

마지막 단락은 예언자 개인에게 주는 권면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진 유다와 예루살렘이 북방의 재앙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이들의 우상숭배를 고발하고 북방의 재앙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도 고난의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예언자로 불러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하나님께 의지해 적다적인 청자들에 맞서야 합니다. 폭력적이기까지 한 저항에 부딪혀 심한 좌절과 고난을 겪겠지만, 끝내 승리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단락 서두의 ‘그러므로’는 ‘그러나’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17절의 명령은 소명기사의 일부 내용을 반복하는데, 전반절은 7b절을, 후반절은 8절을 받습니다. ‘허리를 동이고’는 결단과 행동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일하러 나가거나 여행을 떠날 때, 또 싸움에 나설 때 겉옷이 방해되지 않게 허리를 묶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선포의 외적 환경이 호전적일지라도 예언자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너는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두려워 떨게 하리라’(17b),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예레미야를 징계하셔서 그로 사람들 앞에서 두려워 떨게 하실 것입니다. 예언자는 청중을 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선포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2) 견고한 성(18)

예언자의 직분에 충실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뇌성벽이 되게’해 줄 것을 약속하십니다(18). 하나님의 약속은 다른 한편으로 예언자가 모든 백성, 특히 정치·종교·사회 지도자들로부터 대놓고 공격받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북방 왕국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듯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에워싸고 공격합니다.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예레미야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3) 구원 약속(19)

하나님께서 누구도 함락할 수 없는 ‘견고한 성읍’, ‘쇠기둥’, ‘성벽’으로 만들어주시기에, 적들이 집요하게 공격할지라도 예레미야를 이기지 못합니다(19).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예레미야이기에(20:7; 1:7), 대적들이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20:11). 듣기 싫어하는 고발과 심판의 말을 선포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환난을 피할 수 없겠지만, 예레미야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19b)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 맡겨진 사명을 충실하게 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예레미야에게 환상과 약속으로 확신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지금 두려워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오직 말씀을 성취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이 살아질 것입니다. 주께서 예레미야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용기를 얻어서 주의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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