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02-02)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예레미야 2장 9-19절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연구하고 또 발표합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얻는 고통의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누구인지를 깨달을 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의 고통에 이유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고통의 문제는 이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문제입니다. 자신이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서 그 고통의 이유를 깨닫게 되면 그 고통의 문제는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들이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는 버젓이 행해집니다. 비록 헛것이기는 하지만 이방 사람들은 자신이 섬기던 신을 바꾸지 않는데,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 되는’ 하나님을 버리고 실체가 없는 ‘무익한 것’을 좇습니다.
현 세대의 우상숭배(9-13)
어떤 분야든지 기본기가 탄탄한 사람이 대성합니다. 스포츠, 음악, 미술 등 모든 분야가 그렇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기본기가 허약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실패한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선전포고 하십니다.
9그러므로 내가 다시 싸우고 너희 자손들과도 싸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너희는 깃딤 섬들에 건너가 보며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 이같은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11어느 나라가 그들의 신들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의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2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9-13)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헛된 것과 바꾸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1) 징벌 선언(9)
고발의 말씀 다음에 나오는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절에서는 보통 심판이 선포되는데, 여기서는 다시금 고발의 말씀이 나옵니다. 4-8절은 회고적 시점으로 ‘너희의 조상들’을 고발하고, 10-13절은 현재로 돌아와 ‘너희’를 고발합니다. 그 사이에 놓은 9절에서는 특이하게도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자손들’(문자적으로는 ‘너희 자손들의 자손들’)에게 소송을 거십니다. 고발의 대상에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이스라엘의 미래 세대까지 포함됩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과거(“너희 조상들)와 현재(너희)와 미래(너희 자녀들)는 똑같습니다. 조상이나 현세대나 후손이나 한가지로 ‘헛된 것’을 따르며 언약을 파기합니다. 시간을 초월한 고발은 이스라엘이 뼛속까지 우상숭배자가 됐음을 시사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태까지 참아오시던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인내하지 않으시고 심판에 나선 이유를 보여줍니다.
(2) 이방인보다 불성실한 이스라엘(10-11)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의 경고와 위협의 말에 긍정적으로 반응해 회개하는 일은 미래에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들에 비교해 고발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디 한번 온 세상을 뒤져 그들의 배반과 유사한 배반이 민족들 가운데 있었는지 조사해보도록 명령하십니다(10). 깃딤은 원래 키프로스(구브로)를 가리키지만, 때로는 지중해 동쪽 지역을 지칭하기도 한비다. 게달은 시리아-아라비아 사막 지역에 사는 아랍 족속의 이름입니다. 가나안에서 볼 때 깃딤과 게달은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도 하지 않는 황당한 짓을 범했습니다. ‘어느 나라가 (자기네) 신들을 바꾼 적이 있더냐? 비록 그것들이 신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내 백성은 무익한 것과 자기 영광을 바꾸었다’(11). 민족들은 신들이 아닌 헛것을 섬기면서도 한번 섬긴 신들을 바꾸지 않았는데, 이스라엘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헛것을 섬기기 위해 출애굽과 광야의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의 영광’(자기 영광)은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배반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내 백성’에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좌절감을 읽을 수 있습니다.
(3) 생수의 근원을 버린 이스라엘(12-13)
이스라엘의 배교를 고발하신 하나님께서 하늘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12). 하늘이 전율할 만큼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 ‘하늘과 땅’은 증인으로 참여했습니다(참조. 신 4:26;31:28;32:1). 이스라엘은 물론 민족들 가운데 벌어지는 일도 빠짐없이 목격한 하늘은 신실하고 확실한 증인입니다. 소송의 증인으로 초대받은 하늘은 이스라엘이 범한 잘못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 잘 알고 있었기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을 중인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며 고발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13). ‘두 가지 악’은 두 종류의 죄악이라기보다는 종이의 양면처럼 완전한 배반의 이중적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께 의존하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을 위해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을 팠습니다. 가나안에서는 석회암을 파고 그 안쪽에 회반죽을 발라 만든 웅덩이에 빗물을 저장해 사용했습니다. 관리를 게을리하면 회반죽이 떨어져 나가고 벽이 갈라져 물이 새거나 이물질이 들어와 부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샘에서는 언제나 시원하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만, 웅덩이의 물은 겉으로는 깨끗해도 몸에 해로울 수 있고, 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 대신 선택한 가나안의 우상들에게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썩거나 오염된 물이기 때문에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강대국 의존적 정치(14-19)
세상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들이 판치는 세상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힘겨운 믿음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 싸움을 계속될 것입니다. 싸움이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을 떠나지 마시길 바랍니다. 생명을 걸고 말씀을 묵상하며 그 길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14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15어린 사자들이 그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질러 그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으며 그의 성읍들은 불타서 주민이 없게 되었으며 16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 17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18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19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셔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만으로도 죽음을 자초하는 일인데, 스스로 밑 빠진 독과 같은 웅덩이를 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노예와 포로라고 말씀하십니다.
(1) 정치적 자유의 상실(14)
예언자가 정치적 자유를 빼앗기고 강대국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의 참담한 현재를 탄식합니다. ‘여호와를 위한 성물’이 이방 나라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이 다시 종이 되어 대를 이어가며 종살이를 합니다(14). ‘씨종’은 종인 부모에게서 종의 신분으로 태어난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었던(3) 이스라엘이 힘 있는 자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습니다. 언약 관계를 파기한 이스라엘은 굶주린 사자들의 먹이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15). 남편의 보호를 박탈당한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의 탐욕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이들의 침략으로 성읍들은 불탔고 주민들은 죽거나 사로잡혀 갔고 땅은 황폐해져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디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2) 강대국의 침략의 악탈(15-16)
예루살렘이 의지하였던 애굽마저 유다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놉과 다바네스의 자손도 네 정수리를 상하였으니’(16)는 아마도 주전 609년 유다의 개혁적인 군주였던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의 바로 느고에게 죽임을 당한(참조, 왕하 23:29) 비극적 사건을 회고하는 것 같습니다. 높은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대략 2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고대 애굽 왕조의 수도였고, 다바네스는 나일 삼각주 동쪽 연안에 있는 국경 도시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닥친 재앙은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입니다.
(3) 자초한 재앙(17)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은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떠나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고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면서 멸망을 자초했습니다(17). 그분과 맺은 언약을 파기한 결과로 재앙이 이스라엘에 임했습니다.
(4) 강대국 의존적 대외정책(18)
예언자가 이스라엘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탄식합니다. 강대국에 의존해 생존을 모색하다가 파국적 위기를 경험했음에도 깨달은 것이 없었습니다.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내려가고, 유브라데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내려갑니다(18). 생존을 위해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외교적인 줄타기를 합니다. 파국적 위기를 당하기 전이나 이후나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정치에 여호와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시홀’은 원래 나일의 한 지류 또는 나일 삼각주 동편의 한 호수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나일을 대신하여 사용됐습니다. ‘강’은 유브라데를 가리킵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시홀의 물과 유브라데 강물은 13절에 나오는 ‘생수의 근원’에 연결됩니다. ‘생수의 근원’인 여호와를 버린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는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의 물을 마시고, 정치적으로는 시홀의 물과 유브라데 강물을 마십니다. 생수를 거절하고 마실 수 없는 물을 마시는 이스라엘의 행태는 자기파멸적입니다.
(5) 악행의 결실, 재앙(19)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19aa). 이스라엘이 범한 ‘악’과 ‘반역’이 ‘징계’와 ‘책망’으로 결실합니다. 악이 성장해 재앙의 광풍으로 덮치고, 반역이 보호를 박탈해 민족들의 침략을 초래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악과 반역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고통 가운데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버린 것이 얼마나 악하고 쓰라린지 보고 알아라’(19ab절의 사역). 이스라엘은 징계를 당한 이후에야 뒤늦게 배반의 고통과 쓰라림을 깨닫게 됩니다(참조, 4:18), 19b절에서는 화자가 예언자에서 여호와로 바뀝니다.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구나.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교의 동기나 원인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부재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분을 버리고 우상을 따르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그분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것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실패는 믿음의 기분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외면했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믿음의 기분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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