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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2-03)


바알 신을 더 사랑한 이스라엘

예레미야 2장 20-28절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점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되면 그분의 삶 속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나고 이 땅에서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숭배하고 세상을 좋아하면 세상을 닮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은 고통과 한숨과 죄악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 호언장담합니다. 그들은 이방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옛적부터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이방 민족들처럼 되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자신이 우상숭배에 빠져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본질이 바뀐 타락이기에 원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죄에 사로잡힌 이스라엘(20-22)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먼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그분의 뜻과 말씀에 전적으로 순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살아가야 합니다.

20네가 옛적부터 네 멍에를 꺾고 네 결박을 끊으며 말하기를 나는 순종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21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 22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20-22)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의 욕망대로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인간적 욕망을 좇아 살았습니다. 그들은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몇 가지 기본적인 영적 원칙들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소의 표상을 사용해 이스라엘의 완강한 배반과 부패를 고발합니다.

(1) 옛적부터의 불순종(20)

이스라엘은 멍에와 굴레를 벗어버리고 주인으로부터 도망하려는 소처럼 하나님께 순종을 거절했습니다(20a). ‘멍에’와 ‘결박’은 자주 속박이나 강제 노역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의무와 사명의 비유적 표현으로 사용됐습니다. 멍에를 메고 쟁기를 끌며 밭을 가는 일이 소에게 맡겨진 사명이듯,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땅을 경작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맡긴 사명을 벗어던지고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갔습니다. ‘옛적부터’는 이스라엘의 배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죄악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멍에와 결박 대신에 이스라엘이 선택한 것은 가나안의 풍요제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창녀처럼 드러누워 음란을 즐겼습니다(20b). ‘높은 산’과 ‘푸른 나무’는 가나안 사람들로부터 배워 알게 된 제의 처소를 가리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본받아 높은 산에 산당을 만들거나 푸른 나무 아래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특히 농경사회로 바뀌면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져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남편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에서 알게 된 정부 바알을 따랐습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하나님을 한숨짓게 만드는 총 자체를 바꿔버리는 악한 변화였습니다.

(2) 변질된 포도나무(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최상품의 포도나무로, 가장 순수한 종자로 심었는데 그들은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됐습니다(21),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퇴화해서 먹을 수 없는 들포도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완악한 민족은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신부였고, 그분을 위한 성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푼 기대가 산산이 깨져버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정부와 놀아나는 창녀가 됐고, 먹을 수 없는 악한 열매를 맺는 이방 포도나무가 됐습니다. 본성이 변했기에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다시 광야의 이스라엘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3) 씻어낼 수 없는 죄악(22)

몸의 더러움은 세제로 씻어낼 수 있지만, 속속들이 부패한 성품은 무엇으로도 다시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라”(22). 이스라엘의 회개 가능성, 곧 하나님과의 재결합 가능성은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갔습니다. 파국의 책임을 묻는 일만 남았습니다(이스라엘의 본성이 질적으로 타락해 회개가 불가능하다면, 심판 이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이에 관해서 예레미야 31:31-34 새 언약으로 답합니다).

 

풍요제의에 빠진 이스라엘(23-25)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상으로 인식하기 쉽지 않은 현대적인 우상들이 있습니다(마 6:24). 예수님께서는 재물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좇고 있는 것들, 그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23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발이 빠른 암낙타가 그의 길을 어지러이 달리는 것과 같았으며 24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 그것을 찾는 것들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그 발정기에 만나리라 25내가 또 말하기를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나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 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23-25)

하나님의 신령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망령된 우상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습은 마치 발정난 암나귀들이 헐떡이는 것같이 우상을 향하여 특히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제쳐두고 우상들을 좇았습니다.

(1) 죄를 부정하는 이스라엘(23)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자기 파멸적이고 맹목적이었습니다. 타락이 본성에까지 미쳐서 잿물과 비누로 아무리 씻어도 깨끗해질 수 없다는 하나님의 책망에 이스라엘은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라고 항변합니다(23aa). 이스라엘은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들과 음란을 즐기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깨끗함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살펴보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고 반박하십니다(23ab). 이스라엘의 항변과 여호와의 반박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가나안의 풍요제의를 여호와 종교 안에 받아들였음을 시사합니다. 이들에게 바알의 풍요제의는 여호와 종교의 보완이었기에, 바알들과 여호와 사이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예언자의 선포는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기에 자신들은 바알을 따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예언자는 겉으로만 여호와를 찾고 실제로는 바알을 섬긴다고 이들을 고발합니다. ‘옛적부터’ 참여해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풍요제의가 여호와 종교에 이교적인 풍습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2) 제어할 수 없는 욕정(24-25)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명목적인 우상숭배를 암낙타와 들암나귀의 비유를 통해 신랄하게 고발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는 짓은 가는 길을 종잡을 수 없는 암낙타와 같습니다(23b). 이스라엘의 길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때로는 여호와를, 때로는 우상들을 찾습니다. 또 욕정을 통제 못하는 이스라엘은 발정 난 들암나귀와도 같습니다. 발정기의 들암나귀는 몸이 달아 사방으로 수컷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수컷이 암컷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24). 풍요제의의 음란에 빠진 이스라엘도 욕정을 배설할 간부(姦夫) 바알들을 찾기에 혈안입니다. 욕정의 노예가 되어 날뛰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서 몸을 생각하며 우상들과 음란을 즐기라고 조롱하듯 경고하십니다. 몸이 달아 골짜기를 뛰어다니다가 발을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타오르는 정욕에 목이 마르지 않게 절제하라고 충고하십니다(25). 분별력과 통제력을 상실한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경고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신의 욕정에 몸을 내맡깁니다.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 신들을 사랑하였은 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25b).

 

우상숭배로 인한 수치(26-28)

우상은 아무런 능력도, 생명도 없는 헛된 것일 뿐입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은 무가치한 우상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우상은 자신들의 악한 욕망을 좇아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불순종하면 신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 섬깁니다. 참된 구원자이신 하나님만 인정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26도둑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 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느니라 27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리라 28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26-28)

이스라엘 백성의 죄보다 더 심각한 것은 지도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지도자, 그리고 제사장과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온갖 우상을 섬기는 데 심취해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본을 보여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에게 심판이 선고됩니다.

(1) 수치를 당할 지도자들(26)

먼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을 도둑에 비교합니다. 물건을 훔치던 도둑이 현장에서 붙잡혀 수치를 당하는 것처럼(참조 출 22:1-4), 우상숭배가 드러난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26).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이(2:3) 거짓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또 도둑과의 비교는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남의 것을 훔치다 잡힌 도둑이 벌을 받듯이 우상숭배자로 폭로된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별을 받습니다.

(2) 혼합주의(27)

여호와께서 인용하신 백성의 말은 이들이 얼마나 깊이 혼합주의에 빠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얼굴이 아니라 등을 돌리고, ‘나무를 향하여 너는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고 떠듭니다(27a). 이들은 본질상 나무와 돌에 불과한 우상들을 창조신으로 섬기며 땅을 더럽혔습니다(참조, 3: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으셨는데, 이스라엘은 자신의 근본을 나무와 돌에게로 돌립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습니다. 평상시는 우상을 섬기다가도 환난 당할 때에는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하나님께로 얼굴을 돌리고 도움을 구합니다.

(3) 우상의 무능력(28)

가나안의 풍요제의를 여호와 종교의 일부로 받아들인 이스라엘은 아마도 풍요와 관련한 사적인 영역의 제의에서는 우상들을 숭배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적 예배에서는 여호와를 섬겼던 것 같습니다(참조. 7:1-20). 하나님께서 조롱하듯이 우상들에게 도움을 구해보라고 혼합주의에 빠진 ‘유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재앙이 닥칠 때 혹시 모르니 성읍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우상들에게 한번 도움을 요청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네가 나무와 돌로 만들어 섬기던 우상들이 너를 구하기 위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환난을 당할 때에’ 유다는 누가 참된 하나님이신지를 고통과 쓰라림 가운데 깨닫게 될 것입니다(참조. 19). 우상의 실체를 보여주는 ‘너를 위하여 네가 만든 네 신들’은 13절의 ‘스스로 판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에 내용상 일치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든 터진 웅덩이와 같은 것으로, 터진 웅덩이에서 생수를 구할 수 없듯이 우상에게서 구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예배했습니다. 그런데 실제 삶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의 신을 따라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깨어 백성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백성을 죄악으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죄악에 대해 심판하시고 수치스러운 결과를 안겨 줄 것을 경고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 앞에서 우리 자신을 냉철하게 살피고, 순종의 행위를 통해 참된 신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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