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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3-01)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초대

예레미야 3장 1-18절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 7절에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신 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개혁의 출발점이고 공동체가 새롭게 변화되고 시작될 때, 처음 시작했던 것은 회개입니다. 개인의 일생에서도 회개함으로 새로운 인생을 수많은 사람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개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회개할 때,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작을 회개로부터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부부관계를 비유로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던 여인이 돌아온다면, 남편은 그 연인을 받아줄 것입니까? 예언자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예언자는 유다에 대해 선포합니다. 유다와 비교하면 이스라엘은 선한 자들이었습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면교사로 심지 않았습니다.

 

논쟁의 음란(1-5)

가끔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면 다 받아주시니 우리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라는 식의 뻔뻔한 생각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 돌아갈 자격조차 없습니다. 남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지만, 사실상 이들은 하나님께 돌아갈 자격조차 없습니다.

1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4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5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1-5)

음란과 행악으로 온 땅을 더럽혔습니다. 비를 거두심으로 심판하셨는데도 창기의 낯을 가진 그들은 수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보호자로 부르지만, 행위는 여전히 악하니 기만일 뿐입니다. 피상적인 회개는 자신을 속여 자신을 더욱 위선적으로 만듭니다.

(1) 논쟁의 말(1)

예언자는 아주 빈번하게 혼인 관계를 통해 여호와와 이스라엘을 설명하는데(호 1-2장), 1절은 당시 사람들의 관습과 법적인 상황을 비유로 제시합니다. 한 여인이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에, 그녀는 재혼한 남편과 이혼하고 첫 남편에게로 돌아올 수 있습니까? 예언자는 다시 받아들이면 ‘더러워지지 않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원문에서 ‘더러워지다’는 ‘더러움’의 의미를 강조하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덧붙여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많은 무리’(레임 라빔)와 행음했다고 서술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다른 남자에게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돌아오다’(슈브)라는 동사는 행동을 의미할 뿐 아니라 ‘회개’를 가리키기도 하므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2) 유다에 대한 고발(2-5)

예언자는 독자의 시선을 ‘산’으로 인도하는데, 그 산은 벗겨진 산입니다(2). 벗겨진 산들 중에 이스라엘이 행음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산이 벗겨졌다는 묘사는 이스라엘이 행음한 장소임을 가리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이 산중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왕래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은 아라바 사람과 비교됩니다. 70인역은 이들을 ‘까마귀’로 이해하는데, 이들은 유목을 하며 다니는 자들로 보입니다(사 13:20). 3절은 ‘단비’와 ‘늦은 비’를 통해 이스라엘 기후에 대해 언급합니다. 10월에 시작한 우기는 이듬해 5월에는 끝납니다. 씨를 뿌리는 데 도움이 되는 이른 비는 10월 즈음에 내리는 비를, 그리고 늦은 비는 이듬해 3-4월경에 내리는 비를 가리킵니다. ‘단비’는 봄철에 내리는 소나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은 북이스라엘보다 남유다를 더욱 심각한 상황에 몰아넣습니다. 왜냐하면 남유다의 대부분 지역은 년 강수량이 500mm 이하로 대단히 낮았기 때문입니다. 비가 그쳤다는 것은 남유다에 기근이 올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 기근은 이스라엘의 행위와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결과입니다. 이것은 언어유희에서도 관찰되는데, 이스라엘에는 비가 ‘그쳤으며’(마나),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수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아버지’와 ‘보호자’로 부릅니다(4). 개역개정은 “이제부터”라고 번역하지만, 이것은 ‘오래전부터’를 의미하며, “보호자”는 ‘친구’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느냐?’ 그리고 ‘끝까지 품으시겠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여호와와 친분을 과시했고 여호와를 잘 알고 있는 듯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이 거리낌 없이 죄를 짓는데 일조합니다. 이후에 등장하는 여호와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알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여호와의 인내로 점철되었고, 여호와는 이제 그들을 벌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역한 자매 이스라엘과 유다(6-10)

죄를 범한 자들이 징계당하는 것을 보고서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라는 외침에 겉으로만 뉘우치는 척하면서 계속 죄를 범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욱 가증할 뿐입니다. 우리가 교훈을 받고서도 변화하지 않고, 눈물만 흘릴 뿐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이러한 책망을 받아도 마땅합니다.

6요시야 왕 때에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배역한 이스라엘이 행한 바를 보았느냐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 7그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한 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 아직도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는 그것을 보았느니라 8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9그가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럽혔거늘 10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6-10)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도 남 유다는 교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기회를 주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긍휼이 풍성하시고 노를 한없이 품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의 죄(6-9)

6절은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로 시작하여 새로운 계시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매의 모습으로 나오며, 두 나라는 공통적으로 여호와를 반역한 사들입니다. 만약 본문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나누어 설명한다면, 그것은 각각 남북 분열 왕국을 가리킵니다. 6절은 다시 한 번 ‘요시야’ 통치 시기를 서술하는데,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이미 멸망했으므로, 요시야 통치 시기(주전 639-609년)에 북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한 시대는(주전 626년)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약 100년이 지났으므로 본문이 가리키는 “이스라엘이 행한 바”는 유다가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배역함(메슈바)을 통해 배우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요시야는 주전 622년에 성소 단일화를 실행하고, 이를 통해 전무후무한 이스라엘 왕으로 칭송을 받은 인물입니다(왕하 23:25). 따라서 6절의 내용은 요시야의 성소 단일화 이전에 있었던 선포를 암시합니다. 7절이 말하는 “이 모든 일”은 바로 ‘배역’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이후에 여호와께 ‘돌아오리라’(타브) 다짐했지만, 그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반복하여 ‘슈브’를 어근으로 취하는 용어를 활용하여 언어유희를 만들고 있습니다(메슈바-타슈브-로-샤바). 배역(메슈바)은 거짓된 돌이킴(슈브)일 뿐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에게 돌아감’을 의미하지 않고, ‘여호와로부터 돌아섬’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배역함을 ‘보았다’(봐테레), 이것은 인지동사로서 시각적인 의미일 뿐 아니라, ‘학습’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8절은 ‘봐에레’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1인칭 단수형이므로, 주어는 신탁을 받은 예레미야 또는 신탁의 주체인 여호와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 사본들은 이것을 ‘봐테레’, 즉 3인칭 여성 단수로 수정할 것을 제안합니다.

(2) 유다의 죄 고발(10)

뒤이어 나오는 서술은 유다가 목도한 것을 다시 서술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7절에서 유다는 이스라엘의 배역을 목도했다면, 이제는 예언자 또는 여호와가 유다를 목도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8절은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고 그 결과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내쫓은 것을 유다가 본 것을 서술한 것이고, 뒤이어 나오는 유다가 ‘행음한다’는 것은 여호와가 목격하고 있는 상황처럼 보입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경우에서 보고 배웠는데도 그들은 두려움 없이 여호와를 배교합니다. 유다가 ‘보았다’(봐테레)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이로써 예언자는 유다가 보았지만, 보지 못한 것처럼 눈이 가려진 상황을 연출합니다. 그들이 ‘두려움 없이’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보았으나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보아도 알지 못한다’며 비판했는데(사 6:9), 100년이 지난 예레미야의 시대에도 백성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행음함으로 땅을 더럽혔으며(9), 여호와께 돌아오겠다는 것은 거짓일 뿐입니다(10). 예언자는 먼저 사용된 단어를 차용하여 유다의 죄를 지적합니다: ‘더럽히다’(하나프, 9), 게다가 여기에는 ‘더럽히다’(하나프)와 ‘행음하다’(나아프)가 언어유희로 기록되어(9) 유다의 죄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구원과 회복(11-18)

하나님의 용서는 법으로도, 도덕으로도, 합리성으로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처벌을 당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백성에게 돌아오라 부르시며 회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의 말씀을 들었다면 주님께 돌아가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다시는 죄악에 거하지 않겠노라 약속하며 결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1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반역한 유다보다 자신이 더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12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15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1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17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18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11-18)

배역한 자식들을 시온으로 다시 데려와 이루실 미래를 약속하십니다. 지식과 명철로 양육할 지도자와 언약궤가 필요 없는 나라를 주실 것이며, 예루살렘이 예배의 중심지가 되고, 분열된 형제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만이 참다운 회복의 소망이 되십니다.

(1) 이스라엘의 구원(11-13)

11절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라는 문구를 통해 새로운 신탁이 주어졌음을 암시합니다. “배역한 이스라엘”과 “반역한 유다”는 ‘배역한 여인 이스라엘’과 ‘반역한 여인 유다’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유다보다 ‘의롭다’(찌데카)고 언급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배역하여 여호와의 심판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고 서술했는데(1-10), 유다와 이스라엘의 상대적 개념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그의 ‘의로움’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의로움’은 무죄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레미야에게 다시 임한 여호와의 말씀은 북이스라엘의 구원을 선포합니다(12).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는 선포와 함께 여호와는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며 구원을 말합니다. 예언자는 이보다 앞서서 ‘돌아오라’(슈브)고 명령합니다(12,14).

(2) 유다의 회복(14-18)

이처럼 갑작스럽게 심판의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무엇입니까? 16절 이하는 이스라엘이 돌아왔다는 서술은 없고 여호와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드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이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 즉 하나가 되는 결과를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예루살렘’입니다(17).


배도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당신과 원수 된 우리를 자녀 삼으사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 속에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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