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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5-03)

 


배반과 반역과 속임의 이스라엘

예레미야 5장 20-31절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제각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은 보는 기능을, 귀는 듣는 기능을 합니다. 만약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는 것이 될 뿐 아니라 혼란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며, 지도자들은 더욱 그러하다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확정되었습니다. 이제 예언자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는 백성의 우둔함을 서술합니다. 그들은 눈이 있지만 장님 같으며, 귀가 있지만 귀머거리 같습니다. 백성의 상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백성(20-25)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밎지 않는 행동을 하고서도 몰랐다고 변명하지만, 사실 대부분 알면서도 하지 않았거나 거역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지, 알면서도 거역하고서 몰랐다며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20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21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22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23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24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25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20-2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과 지각 없음을 말씀으로 표현하십니다. 만약 그들의 눈과 귀가 제대로 기능을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다와 땅의 경계에 모래를 두어 바다가 땅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1) 선포 명령(20)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외하지 않는 ‘야곱 집’과 ‘유다’를 책망하십니다. ‘야곱 집’은 전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참조, 2:4). 책망의 대상에 유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전 북왕국에 속했던 주민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에 있어 유다는 예전의 북왕국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2) 직접적 책망(21-22)

유다는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었습니다(21). 이들의 눈과 귀는 육체적으로는 멀쩡했지만, 영적으로는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현실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도 못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고 지각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그분 앞에서 떨지도 않습니다(22a). 사납게 날뛰는 바다도 하나님께서 경계로 정해놓은 모래를 넘지 않고 경계를 준수하는데(22b), 유다는 창조 질서를 정하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3) 서술적 책망(23-24)

눈과 귀가 영적으로 고장 난 자들의 마음이 온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배반하여 반역하는 마음’(완강하고 반항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어, 하나님께 등을 보이고 돌아서서 가버렸습니다(23). 이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에 따르는 길을 거절하고 자기 계획과 결정에 따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삶과 역사를 결정하는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고, 창조 질서를 정하신 분을 역사의 유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유다 백성은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에 땅의 결실이 그분께서 주시는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비를 주시고 추수 기한을 정하신 분임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자연 질서를 다스리시는 분께 의존하지 않았습니다(24). 제 때에 비가 내리지 않아도, 가뭄이나 병충해로 흉년이 들어도,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눈과 귀와 마음이 영적으로 마비된 유다는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4) 직접적 책망(25)

하나님께서 유다를 직접 책망하십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25). ‘이러한 일들’과 ‘좋은 것’은 창조주께서 정하신 자연 질서, 구체적으로는 때를 따라주시는 비를 가리킵니다. 유다의 죄가 비를 내리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현재의 재앙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른 비’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내리는 가을비를, ‘늦은 비’는 12월부터 2월까지의 우기가 지난 후에 3월과 4월에 내리는 봄비를 가리킵니다. 거의 전적으로 비에 의존해 농사를 짓는 가나안에서 때맞춰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결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추수 기한’은 곡물에 따라 수확 시기가 달리 정해졌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4-5월에 보리 수확이 시작되고, 보통 한달 보름이 지나 밀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보리 수확을 시작(무교절)할 때부터 밀 수확을 끝낼 때(칠칠절)까지 대략 일곱 주간이 걸렸습니다.

 

사회적 불의와 불법(26-29)

재판은 본래 힘이 없는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약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재판관들은 결국 하나님의 처벌을 받을 수밖ㄸ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해 나갈 때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어찌 너희를 벌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26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27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28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29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6-29)

하나님께서는 새장에 새가 가득함같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집에 속임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해졌으나 그들의 영혼은 타락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판결하지 않았습니다.

(1) 고발(26-28)

유다로부터 ‘좋은 것’을 막은 허물과 죄를 구체적으로 고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회는 폭력과 속임수가 판을 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사회였습니다. 정의 와 공의가 사라지고 가난한 자가 부당하게 짓밟힙니다. 악인들이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노골적으로 악을 행합니다. 새 사냥꾼이 나무나 수풀 또는 물가에 그물을 쳐놓고 새들이 함정에 빠지길 기다릴 듯이 이들은 덫을 놓고 숨어 기다리다가 사람들을 잡습니다(26). 우연이나 실수로 이웃에게 악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계획하고 이를 그대로 실행에 옮겨 이득을 탐했습니다. 이들에게 이웃은 먼저 잡으면 제 것이 되는 사냥감에 불과했습니다. 새 사냥꾼이 사냥한 새로 새장을 가득 채우듯, 악인들은 사기 쳐 얻은 재물로 제집을 가득 채우며 더욱 번창하고 거부가 됐습니다(27). 더 부유해질 수만 있다면, 이웃을 짓밟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번창하고’와 5절의 ‘지도자들’은 히브리어 어근이 같습니다. 사기와 불법과 폭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된 자들이 곧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지도자들입니다. 부당한 수단을 사용해 부자가 된 자들의 얼굴에는 기름기가 흐르고 윤기가 돕니다. 세속적인 보응 신학에 따르면 성공한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들의 악행은 한계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안다는 자들이지만,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했다’(28).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은 ‘고아가 승소할 수 있도록 송사를’로 옮기는 것이 좋다). 자기 집을 채우는 일에 혈안인 지도자들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의 송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재판의 공정성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더 부유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면 법(정의)을 무시하고 거짓을 따랐습니다.

(2) 징계 선포(29)

하나님께서 연민을 갖고 ‘내 백성’이라 불었던 유다가 정의를 왜곡한 부패한 지도자들로 인해 그분의 보복을 받아야 하는 ‘이 같은 나라’가 됩니다(29: 5:9). 하나님의 법과 길을 모르는 백성(4)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21-24), 하나님의 법과 길을 아는 지도자들(5)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짓밟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총체적 타락입니다.

 

무섭고 놀라운 일(30-31)

교회가 진리 위에 서 있지 않는데 교인들이 오히려 그 상태를 좋아한다면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진리 위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백성은 저들에게 세뇌되다시피 했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잘못된 지도자들에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그 악한 자들을 통해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생각만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30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0-31)

전체 고발의 요약입니다. 한마디로 ‘무섭고 놀라운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30).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끔찍한 일이 유다에서 벌어집니다. ‘무섭고’는 ‘황량/황폐하다, 생명에서 잘리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로, 황량함이나 폐허가 야기하는 두려움과 놀람과 같은 경악스러움을 가리킵니다. ‘놀라운’은 23:14에 한 번 더 나오는데, 하나님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증한 일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충격적인 것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일이 정치와 사회가 아니라 여호와 종교 안에서 자행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1). 하나님의 의지를 대변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그분의 백성이 끔찍한 일의 주인공들입니다. 여호와의 예언자가 ‘거짓’을 예언합니다. 거짓 존재인 우상에게서 신탁을 받아 전하거나 자기 생각을 하나님 말씀으로 포장해 선포합니다. 이들은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을 떠들고(6:14),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합니다(23:14). 제사장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집을 제멋대로 다스립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7:4)을 퍼뜨리고, 십계명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성전을 개방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듭니다(7:9-11). 황당한 것은 하나님 백성이 그런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심판 예언자들은 싫어하고(12-13), 죄의 용서와 구원을 값싸게 선포하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좋아합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이 서로 도와가며 제 욕심과 이기심을 만족시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이 한 패거리가 돼 ‘무섭고 놀라운 일’을 즐깁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정직하고 바르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살지 않는 자들을 용납하거나 그들 편에 서서 이기적인 욕심을 채운다면, 하나님을 경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올바르게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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