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9-03)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유다의 자랑

예레미야 9장 17-26절


우리 인생은 가면서 두 가지 길에서 선택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거나 우상을 섬기거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거나 불순종의 길을 가거나, 아니면 슬픈 노래를 부르며 살거나 기쁜 찬송을 부르며 살거나, 둘 중에 한 가지 길을 우리는 다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길을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곡하는 부녀를 불러 ㄷ그들을 위해 애곡하게 하라 하십니다. 사람은 지혜·용맹·부가 아닌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사랑·정의·공의를 행하심을 깨닫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 민족과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이스라엘을 모두 벌하실 것입니다.

 

시온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가(17-22)

우리를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부인해도 역시 지혜와 물질 그리고 종교 행위를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들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17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해 보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18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19이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거처를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20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21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22너는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17-26)

사람의 헛된 것들을 붙든 유다는 애곡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우상을 따르며 자신들의 욕망을 좇아 쉽게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붙들며 자랑하지 않고, 사람의 헛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1) 곡꾼의 소집(17)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에게 ‘곡하는 부녀’, 곧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라고 명령하십니다(17). 장례예식의 전문가라는 점에서 당시 사회에서 곡꾼은 지혜자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초상집에서 상주를 대신하여 하는 자가 곡꾼이기에, 여호와의 명령은 누군가가 죽었음을 전제합니다.

(2) 곡꾼 소집 목적(18)

곡의 대상을 언급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곡꾼을 불러오게 한 목적을 알려주십니다.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18). 곡을 하거나 애기를 불러 초상을 당한 사람들의 애통함을 더 크게 해주는 것이 곡꾼의 주된 역할이었습니다. 애곡은 상복 기간 중에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에 속했습니다(참조, 창 23:2; 삼상 25:1; 28:3; 삼하 1:11-12, 17-18; 3:31; 11:26). 창세기 50:10에 의하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했습니다. ‘우리’는 애가의 대상이자(‘우리를 두고 애곡하여’) 동시에 눈물을 흘리는 상주입니다. 곡꾼을 불러 애곡하게 하는 사연이 구체적으로 알려집니다(18),

(3) 애곡의 이유(19)

멸망한 시온을 위한 애곡이었습니다. 시온이 황폐해지고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시온이 점령군에 의해 짓밟혔기에 주민들은 제 땅을 떠나야합니다. 시온이 폐허가 되고 주민들이 유배를 당하는 원인은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13-14절에 의하면 언약을 깨뜨리고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4) 애가를 가르침(20)

20절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예언자와 ‘부녀들’로 바뀝니다. 예언자가 여자 곡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기존의 곡꾼 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죽음의 재앙이 너무나도 전면적이고 엄청났습니다. 곡꾼은 제 딸들은 물론, 이웃의 부녀들에게도 애가와 장송곡을 가르쳐 이들을 장례 의식에 동원해야 했습니다.

(5) 애가를 가르침(21)

죽음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집 안이나 집 밖이나 온통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습니다. 죽음이 창문을 넘어 궁궐에까지 들어오고, 거리와 광장에서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덮칩니다(21). 시온의 주민들이 모두 죽음에 삼킴을 당합니다. 어린아이들과 청년들마저 희생당하기에 후일을 기대해볼 여지조차 완전히 사라집니다(참조. 10:20).

(6) 들판의 시체(22)

22절에서는 다시 화자와 청자가 바뀌어 여호와께서 예언자에게 말씀을 주신다.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들판의 오물이 그대로 버려지는 것처럼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거리에 나뒹굽니다. 추수꾼이 단으로 묶어 밭에 세워둔 곡식단의 비유도 의미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옮기기 좋게 묶어 놓은 곡식단이 거둬들일 사람이 없어 밭에 쓰러져 썩는 것처럼 시체들이 거리에 그대로 방치됩니다. 오물의 비유가 편만한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면, 곡식단의 비유는 남은 자가 없는 멸망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이들과 청년들마저 죽음에 넘겨졌기에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시체가 거리와 광장과 들판에서 그대로 썩어갑니다.

 

참된 자랑(23-24)

사람들은 저마다 가진 것들을 자랑합니다. 그 자랑의 뿌리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언약 백성다운 바른 자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실패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경외하는 것을 자랑합시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세속적 조건이 아닌,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은혜입니다.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23-24)

지혜문학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과 부자의 부함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속합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힘입어 백성을 통치했고(참조, 왕상 3:4-15),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이름’에 의지해 용감하게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웠고(참조, 삼상 17장),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던’(창 32:10)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수많은 양과 소와 낙타를 거느리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참조. 창 30-31장).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지혜자는 그의 지혜를, 용사는 그의 용맹을,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고 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전통적인 가르침에 맞서 예언자는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23). 이는 지혜문학의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지혜와 용맹과 부함’에서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위험, 곧 인간의 교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용맹과 부합’을 주셨다고 말하면서도 이를 자신의 능력과 업적으로 자랑스러워하다가 하나님을 떠납니다. 사람이 참으로 자랑해야 하는 것은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입니다(24). ‘여호와를 앎’은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따르는 역동적 앎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는 역사와 삶 속에 계시된 그분의 활동을 인정하고, 그분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임을 깨닫고 기뻐합니다. 지혜자나 용사나 부자가 아니라, 여호와가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는 주체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과 부자의 부함이여호와께서 땅에서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대신할 수 없다. 참된 자랑을 아는 자는 여호와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서 행하시도록 비워놓고 기다립니다. 앞에 나오는 시온의 멸망을 선포하는 17-22절과 함께 보자면, 23-24절은 이스라엘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과 부자의 부함’이 이스라엘로 애가를 부르게 했음을 깨닫고, 여호와께서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주시길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25-26)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를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따라야 할 가치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고 기뻐하며 그것을 자랑과 공의를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26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25-26)

언약 백성의 표지인 할례(참조, 창 17장)가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심판의 날은 포피에만 할례 받은 자들이 징벌을 받는 날입니다. “보라, 날들이 오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 포피에(만) 할례 받은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리라”(25). 할례의 풍습을 알고 있는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 및 광야에 살면서 살짝을 깎은 자들’이 모두 심판에 떨어집니다(26). 애굽은 유다 남쪽에, 에돔과 암몬과 모압은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들이고, ‘살짝을 깎은 자들’은 ‘관자놀이의 머리를 민자들’로 이스라엘 북동쪽의 사막에 사는 아랍 족속들을 가리킵니다. 민족들의 순서가 어떤 기준에 따른 것인지는 전혀 불분명합니다(46장 이하에 나오는 민족들의 신탁에서는 애굽-[블레셋]-모압-암몬-에돔의 순서로 나온다). 특이하게도 애굽이 먼저 나오고 유다가 그 뒤를 따릅니다. 할례와 관련해 유다에게 남다른 특권이나 지위도 허락되지 않고, 주변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언약의 표지인 할례는 유다에게 어떤 혜택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언약의 표지인 할례가 여호와의 심판으로부터 유다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민족들의 할례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몸의 할례는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즉 민족들도 잘 알고 있는 포피를 잘라내는 풍습일 뿐입니다.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26b). 여기서 ‘모든 민족’은 앞에 열거된 다섯 민족들로, 이들이 받지 못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가리킵니다. 민족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해서 심판에 떨어지듯, 이스라엘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해 심판에 떨어집니다. 다시 말해, 몸에 할례를 받은 유다가 여호와의 징벌을 면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몸의 할례를 아는 다른 민족들도 징벌을 면할 수 있습니다. 포피를 자르는 할례에서 구원사적 기능을 완전히 박탈해 버립니다. 구원사적으로 유효한 할례는 오직 마음의 할례뿐입니다(참조. 신 10:16; 30:6).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중요한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와 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더욱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꼐서는 이러한 삶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사랑과 공의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시게 하실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9-02)

 


유다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9장 7-16절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인간이 죄악에서 돌이켜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심판으로 환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판에 대해 미리 깨달아 파멸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죄악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거짓과 사기가 하나님 백성의 본질이 됐습니다. 서로 속이고 악을 행하며 공동체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하였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듯 그분께서 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심판선언(7-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자원을 주십니다. 그분 안에는 모든 풍성한 은혜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그 무한한 자원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통해 거룩한 삶을 회복하십니다. 당장은 징계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그것 또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7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8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 9내가 이 일들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7-9)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의 타락한 삶을 마냥 두고 보지는 않으십니다. 죄인들은 자기 삶을 방치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언젠가 끝장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유다 백성에게 징계의 채찍을 드셨습니다.

(1) 징계의 선언(7)

마치 악을 행하기 위해 사는 것처럼 악행이 편만했습니다. 거짓과 속임수가 사회 규범인 양 일상적으로 행해졌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들짐승의 세계처럼 됐습니다.

(2) 고발(8)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8),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떠난 화살이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듯이 거짓을 말하는 자들의 혀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겉으로는 친근하게 평화를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다정하게 인사하며 상대를 함정에 빠뜨립니다. 웃는 얼굴의 거짓 혀는 ‘죽이는 화살’과 같이 치명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혹감과 분노 가운데 행동에 나서십니다. 징계를 통해 죄악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십니다.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7)는 심판의 목적이 아직은 멸망이 아니라 정화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광석을 용광로에 집어넣고 불을 가해 순도 높은 금속을 얻는 것처럼, 혀를 치명적인 화살로 악용하는 자들을 녹이고 연단해 다시 깨끗하게 하십니다.

(3) 징계의 선언(9)

하지만 9절의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복하지 않겠느냐’는 제련이 성공적이지 않을 것을 암시합니다. 8절의 고발을 중심으로 ‘내 딸 백성’이 ‘이런 나라’로 바뀝니다. 전자가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된 유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담고 있다면, 후자는 거리감과 단호함을 보여줍니다. 9절의 ‘벌하다’는 동사 ‘파카드’의 번역으로 ‘잘못에 관하여 책임을 묻다’를 의미합니다. ‘보복하다’는 동사 ‘나캄’의 번역으로, 악한 자들을 보복하시고 세상을 다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뜻합니다.

 

멸망의 탄식(10-11)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비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 인간이 죄악에서 돌이켜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심판으로 환난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판에 대해 미리 깨달아 파멸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십니다.

10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 11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10-11)

우리 삶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풍요로움이 황폐함으로 변합니다. 무성하고 풍요로운 곳이 모두 황무지가 되고, 사람으로 가득 찼던 곳이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가축도 공중의 새도 들의 짐승도 사라진 사막과 같은 곳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 탄식(10)

화자 ‘나’의 탄식(10)과 심판선언(11)으로 이뤄진 단락입니다. 11절의 ‘나’가 하나님임은 분명한데, 10절의 ‘나’는 불분명합니다. 통일성 있게 하나님의 일인칭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10절의 내용과 표현은 예언자의 탄식에 좀 더 어울립니다. 10절은 하나님께서 선포한 멸망의 심판(10)이 성취될 것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던 예언자의 반응입니다. 문맥 안에서 앞 단락과의 연결은 희미합니다. 혀를 죽음의 화살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선포된 여호와의 보복(7-9)은 일종의 정화의 심판인데, 11절의 심판선포와 10절의 탄식은 완전한 멸망을 지향합니다. 심판의 대상을 전자는 감정이 깃들인 “내 딸 백성”(7) 또는 “이런 나라”(9)로 부르는데, 후자는 중립적인 표현인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로 말합니다. 반면에 12절과의 연결은 비교적 뚜렷합니다. 특히 예언자의 질문(12b)과 예언자의 탄식(10)은 일부 표현까지도 공유합니다. ‘광야’와 ‘지나가는 자가 없다’와 ‘불에 타다’는 양쪽에 다 나옵니다. 또 멸망한 ‘이 땅’은 유다 산지와 광야를 포함하기에 10절의 ‘산들’과 ‘광야 목장’과 일치합니다. 요약하자면, 현재의 위치에서 10-11절은 예언자가 멸망의 원인에 관해 질문하는 12절의 배경 역할을 담당합니다.

(2) 심판의 선언(11)

죽은 자를 위해 애곡하듯이 예언자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을 애통해하며 애가를 부릅니다. 한때 사람들이 가축을 키웠던 푸른 산들과 광야의 목초지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사람도 없고 가축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10). 하늘의 새부터 땅의 짐승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산들과 광야의 목초지가 들짐승도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됐습니다. 예언자가 산들과 광야 목초지를 두고 울부짖으며 애가를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멸망을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무더기로 만들며 승냥이 굴이 되게 하겠고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11). 하나님의 심판으로 돌무더기가 된 예루살렘은 승냥이의 소굴이 되고, 사람들이 사라진 유다의 성읍들은 황무지가 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그처럼 파국적 심판을 받는 이유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13-14절의 문맥에 따르면, 불순종과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재난의 원인(12-16)

사람이 궁극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당신의 말씀 안에서 만족을 얻도록 설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그 안에 거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12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 같이 불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느냐 13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14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5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 곧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16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 그들을 흩어 버리고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하셨느니라(12-16)

예레미야는 슬픈 노래를 부르며 묻습니다. 이 땅이 왜 멸망해 광야같이 되었는지를 알 만큼 지혜 있는 자가 누구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사람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 선지자는 불타 버린 땅을 향해 의미 없는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 화자의 질문(12)

예레미야서는 자주 가상적 질문과 답변의 틀을 사용해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요약적으로 가르쳐줍니다(참조․ 5:19; 13:22; 16:10–13; 22:8-9). 보통은 백성이 묻는데, 여기서는 예언자가 묻고(12) 하나님께서 답변하십니다(13-16).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언자의 질문은 10-11절이 선포한 심판 위협이 눈앞의 현실이 됐음을 전제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황폐해진 것을 보고 사람들이 탄식하며 던질 질문을 예언자가 대신합니다.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만한 자가 누구며 여호와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선포할 자가 누구인고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여 광야 같이 불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느냐”(12). 처음 두 질문은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과 관련한 수사적 질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 심판에 떨어져 황무지가 된 이유를 아는 자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놀랍게도 예루살렘 거리에는 단 한 사람의 의인도 없었던 것입니다(5:1). 하나님 백성이 이처럼 처참하게 멸망한 원인을 깨달아 아는 지혜자도 없고 이에 관해 말씀을 받아 선포할 예언자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광야처럼 초토화된 현실 앞에서 지혜자들과 많은 예언자들은 할 말을 잃고 그저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원인을 모르면 치유가 불가능하기에 상황은 아주 절망적입니다. 많이 늦었지만, 그들은 이제라도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입’이었음을(참조, 1:9; 5:14; 15:19) 인정하고, 예언자의 선포를 들어야만 합니다.

(2) 하나님의 답변(13-16)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세 번째 질문은 예언자의 좌절과 절망과 연민을 담고 있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이처럼 불타서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되었단 말입니까! 심판 선포의 성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앞의 현실이 너무나도 참담합니다. 멸망의 원인에 관한 여호와의 답변은 예레미야가 지금까지 선포한 내용의 요약입니다.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3-14).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주어진 율법을 버렸습니다. 준수하면 생명과 축복이 주어지는 율법을 버린 대가로 죽음과 저주가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가르침 안에서 걷기를 거절하고 조상들의 길을 따라 오직 바알을 섬겼습니다. 우상숭배에 있어 이스라엘은 조상들의 가르침에 충실했습니다.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들을 섬기며 멸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15-16절에서는 시점이 바뀌어 다시 멸망 이전의 현재 상태에 대한 기술로 돌아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길을 간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쓴 쑥을 먹이고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해서 멀리 이방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지게 하십니다. 멸망과 유배가 심판의 정점이기는 하지만, 그 끝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먼 곳으로 쫓겨난 유다 백성에게 칼을 보내 그들을 진멸하십니다. 누구도 그분의 심판에서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 조상 대대로 불순종하며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따라 하나님은 철저하게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는 문자 그대로 그들이 ‘모르는 나라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알지 못함’의 모티브는 공간적 거리감과 심리적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다. 멀리 있어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그들은 더욱 두렵게만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진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들이 저지른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 죄악 때문에 그들은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한 생명의 땅이 황폐해지고 모든살아있는 것이 죽음에 이르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의 이러한 죄악 중에서도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순종의 길만 걷기를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9-01)


유다의 죄를 탄식하는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8장 18절-9장 3절


요즘 우리는 환경의 오염에 대해서 많은 생각과 염려를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오염입니다. 마음이 오염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오염이 되어지고 결국 사람과의 관계가 망가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겉을 깨끗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속이 깨끗해져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의 기도를 따라서 함께 ‘하나님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주옵소서! 정직한 영으로 나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치명적인 뱀과 독사를 보내신 것을 알기에 예레미야는 고통스럽게 반응합니다. 고집스럽게 귀를 막고 제 길로만 가지만, 그래도 유다는 예레미야에게 동포였습니다. 슬픔에 그의 마음이 병들고, 백성의 상처 때문에 예레미야도 상처를 입습니다.

 

예언자의 탄식(18-9:1)

한 공동체의 영적 정체성과 실제 모습이 언제나 일치하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지 않고 죄의 본성대로 살면, 어느 새 죄악의 길 한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정체성은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징계가 있을 때 감사하길 바랍니다. 그런 사람, 그런 공동체가 거룩한 길을 걷습니다.

18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19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20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9:1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8:18-9:1)

하나님을 떠난 유다 백성은 우상숭배와 간음이라는 타락의 길로 빠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죄악은 서로에게 속임수를 행하고 거짓말을 꾸미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더 이상 신뢰도 진실도 없는 공동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1) 예언자의 탄식(18)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다를 향해 외쳤지만,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완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심판을 결정하십니다. 적들은 기병대를 앞세우고 이미 원정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시기에(뱀과 독사를 보내) 죽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딸 내 백성’을 덮치는 재앙이 예레미야를 고통과 절망에 빠뜨립니다.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심판에 떨어지지만, 그래도 유다는 그의 백성이었습니다. 유다의 비극적인 운명을, 아마도 환상 가운데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던 예언자는 눈물을 흘리며 애통합니다.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그의 마음이 깊이 병듭니다(18). 예언자는 ‘딸 내 백성’이 도처에서 넋이 나간 듯이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2) 백성의 탄식(19a)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19). 유다 백성은 시온을 덮친 재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럽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왕으로 계시는데 시온이 망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시온의 안전과 구원을 확신한 자들에게는 눈앞의 현실이 차라리 원망스럽게도 느껴졌습니다. 시온의 왕이 시온을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시온의 왕이시라면 당연히 시온을 구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왕이 백성을 이처럼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있단 말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구원의 보루로 간주하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시온의 보호자란 의미에서 시온의 왕이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 이름을 두신 여호와께서 시온의 심판자가 되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3) 여호와의 탄식(19b)

백성의 원망 어린 탄식에 뒤이어 여호와의 탄식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19b), 백성의 탄식에 대한 답변으로, 이들을 덮친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시온의 왕으로서 도와주기가 싫거나 그럴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에 격노하신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재앙을 보내 징벌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왕이시라면, 그들이 합당한 모습으로 왕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입술로만 그리할 뿐, 그들은 왕을 배반하고 다른 왕(우상)을 섬겼습니다.

(4) 백성의 탄식(20)

다시 백성의 원망 어린 탄식이 인용됩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20). 자신들의 처지가 마치 수확 없이 여름을 보내고 굶주림의 겨울을 맞는 농부의 절망적인 형편과 같다고 탄식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시온의 왕 여호와께서 계시기에 재앙이 곧 극복되리라 기대했다가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좌절한 듯합니다. ‘우리’는 재앙의 원인을 되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의 곤궁한 처지만 염려하며, 시온의 왕께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을 토로합니다. 이들의 하나님 이해에 따르면, 여호와는 시온의 왕으로서 백성이 재앙을 당하지 않게 보호해주셔야 했고, 설혹 재앙이 닥칠지라도 구해주셔야 했습니다. 가나안 지역의 농경은 4-6월에 보리와 밀을 추수하고 늦은 여름에 과일을 따서 말리고, 이것들을 곳간에 저장하여 겨울을 대비합니다. 저장한 곡식과 과일로 이듬해 봄보리를 수확할 때까지 지내야 합니다. 가뭄이나 병충해 같은 자연재해나 전쟁의 여파로 여름 수확기를 빈손으로 보내면 겨울과 이른 봄을 굶주림으로 버텨내야 합니다.

(5) 예언자의 탄식(21-9:1)

마지막 세 절은 예언자의 탄식입니다. 백성의 중한 상처 탓에 예언자도 중한 상처를 입고, “딸 내 백성”을 덮치는 멸망의 그림자 때문에 공포와 놀라움에 사로잡힙니다(21). 유다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음에도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와 같습니다. 길르앗에는 상처를 아물리는 데 좋은 유향과 유능한 의사가 있지만(참조, 창 37:25), 유다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22). 여호와께서 마시게 하신 ‘독이 든 물’이기에, 그분이 보내 물게 하신 ‘뱀과 독사’의 독이기에 어디에서도 해독제를 구할 수 없습니다. 유다의 멸망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예언자는 슬픔과 절망 가운데 눈물을 흘리며 애도할 뿐입니다(1), ‘죽임을 당한’은 ‘칼이나 창에 찔려 죽은’을 의미합니다. 유다는 이미 전쟁에서 패하고 목숨을 잃은 백성입니다. ‘딸 내 백성’의 죽음이기에 그 슬픔은 끝이 없습니다. 밤낮으로 울어 눈물이 메말랐지만 슬픔은 더해만 갑니다. 죽음에 넘겨진 자기 민족을 위해 예언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애곡하는 것뿐인데, 눈물이 메말라 마음껏 울지도 못합니다.

 

책망 어린 탄식(9:2-6)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매일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속이거나 거짓을 일삼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무슨 말을 하기에 앞서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려는 말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먼저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을 의식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이끕니다.

2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4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5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6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6)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원하시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입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떠나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습니다. 예례미야는 하나님의 마음처럼 유다 백성의 타락을 슬퍼합니다.

(1) 탄식(9:2)

일인칭 화자 ‘나’가 자신의 참담한 마음을 독백에 담아 한탄하듯 토로합니다.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2), ‘나’는 하나님도 예레미야도 모두 가능합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맹목적 거절에 차라리 무력감을 느끼시고 가슴이 에이는 아픔에 빠지십니다. 간음과 반역을 일삼는 유다를 포기하고 관계를 끊으셔야 하는데, ‘내 백성’이기에 단호하게 쳐내지 못하십니다. 유다가 당신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완강한 거절에 지친 예언자의 절망과 그럼에도 끊을 수 없는 자기 민족에 대한 연민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적임을 알고 거듭 경고를 발하지만, 멸망을 향한 유다의 질주는 도무지 멈출 줄 모릅니다. 예언자의 선포는 허공을 가를 뿐, 최소한의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절망적 현실 앞에 차라리 아무도 없는 광야로 도망하고 싶지만, 자기 민족과 함께 있어야 함을 알기에 이들을 버리고 떠나지도 못합니다. 듣지 않고 응답하지 않을지라도(참조. 7:27)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 예언자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하나님과 그분 백성이 정면으로 충돌하기에 예언자는 더 깊이 좌절과 절망에 빠져들어 갑니다. ‘간음’과 ‘반역’은 자주 우상숭배의 죄악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뒤따르는 3-6절에 따르면 윤리적 계명의 위반입니다.

(2) 고발(9:3-6)

관계의 단절을 초래한 ‘간음’과 ‘반역’의 구체적 예로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사기를 고발합니다. ‘내 백성’의 허가 전쟁 무기인 활과 같습니다(3).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치명적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이들의 혀는 이웃을 향해 거짓의 화살을 날려댑니다. 이들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거짓에 있어서는 뛰어난 능력과 열심을 발휘합니다. 속임수와 거짓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제 혀를 가르치고 만족을 모르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칠 때까지 악을 행합니다(5). 거짓과 속임수가 진실을 쫓아내고 사회규범으로 통용됩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속이기 위해 사는 사회로 변질하였습니다. 형제는 서로 사기를 치고 이웃은 서로 헐뜯기에 어떤 형제도 신뢰하지 말고 제 이웃을 조심해야 합니다(4).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3b), 하나님을 알기 싫어하는(6b) 사회의 추하게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이웃을 속이며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차라리 거추장스러운 존재였고, 그분을 아는 지식은 거짓과 악을 행하는 데 방해만 됐습니다. 사회적 질서와 규범의 원천이시자 보장자이신 하나님께서 없는 사회는 중상모략이 난무하고 거짓이 승리하는 불신과 불의의 사회이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불법이 난무하는 사회입니다(6a).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떠나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는’(5)것은 어쩌면 사기꾼의 본성에서(4, 완전히 속이며) 나온 자연스런 행태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겉과 속이 다른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지도자들이 거짓 평안을 전하며 심각한 영혼의 중병을 가벼운 감기로 바꾸는 동안 백성들도 치명적 죄악을 감춘 채 평화를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취소하거나 연기할 이유를 찾지 못할 만큼 총체적으로 썩어 있었습니다. 의사가 환부를 도려내듯, 제련사가 뜨거운 불로 불순물을 태워 녹이듯, 이대로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하고 있다면, 신속하게 자신의 마음을 주께 토로하고 새롭게 해달라고 간구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8-02)

 


진리에서 멀어진 이스라엘의 결과

예레미야 8장 4-17절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알을 낳기 위해서 회귀하여 갑니다. 그곳을 향해 가는 연어들의 모습은 봅니다.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면 물결을 타고 상류로 올라갑니다. 큰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엄한 바위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다가 배가 찢어지기도 하고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는 ‘여호와께 돌아가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는 것이 그곳에 생명이 있고 살 길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원인으로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어리석음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떠나면 돌아오는 것이 정상인데 그들은 돌아올 줄을 모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엎드러질 줄 모르고 평안하다 합니다. 결국 이들은 최후까지 고집하다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백성의 완악함과 어리석음(4-7)

진리(말씀)에서 떠나면 본향을 잃고 완악해져서 표류하는 인생이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배반하고 떠난 이스라엘은 도무지 돌아올 줄(회개) 모릅니다. 그래서 거짓을 고집하면서 정직을 말하지 않고 자신들의 악을 뉘우치는 기색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길로 그대로 달려갑니다. 동물들도 그 정한 시기와 때를 아는데 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합니다.

4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5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6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7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4-7)

심판의 날에 멸망 당한 자들은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속이려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미물보다 못한 자들이었고, 자신들이 원하는 말만 들었습니다. 죄를 행하는 백성, 죄악 된 행실을 보고서도 아무 경고도 하지 않았던 지도자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1) 하나님의 탄식과 고발(4-5)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유다의 행태에 하나님께서도 당황스러워하십니다. 누구나 길을 걷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가던 길이 틀리면 다시 돌아 나오는데, 유다는 쓰러져도 일어나려 하지 않고 빗나가도 다시 돌아오려 하지 않습니다(4). 여기서 ‘떠나갔으면’과 ‘돌아오지’는 동일한 단어 ‘야숩’의 번역으로, 전자는 ‘길을 벗어나 옆길로 들어서다’를 의미합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길을 가다 옆길로 빠지면 얼마쯤 가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돌아와서 바른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완악함이 몸에 밴 유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이나 되돌아봄이 없이 고집스럽게 제 길로만 나아갑니다. 마치 하나님을 배반하고(머슈바) 그분에게서 멀리 떠나가는(쇼버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5). ‘어찌함이냐’(마두아)는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좌절이 담긴 책망의 표현입니다. 거짓에 사로잡혔기에(5b; 참조. 9:3-6)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보내 구원의 길을 벗어나 멸망의 길로 가고 있다고 아무리 경고하고 위협해도 이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귀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7.4)과 ‘평강하다.’ ‘평강하다’하는(11) 구원 예언에만 익숙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당신 이름을 두신 여호와를 오직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고발과 멸망 선포가 악의에 찬 거짓말이거나 남의 이야기로만 들릴 뿐입니다.

(2) 예언자의 고발과 탄식(6-7)

6-7절에서는 화자가 하나님에서 예언자로 바뀝니다(4-5절의 경우처럼 일인칭 화자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6절 서두의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 즉’과 7절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는 예언자에게 더 잘 어울립니다. 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거리감을 내포한 ‘이 백성’을 사용해 유다의 배반을 고발하였다.) 예언자가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지만,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6a). 아무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바른길을 벗어났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기에 돌이켜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명령에 따라 요란스럽게 전쟁터로 내달리는 군마와도 같이 모두가 앞만 보며 달려갔습니다(6). 철새도 창조주께서 정해놓은 질서를 알아 떠나야 할 때 떠나고 돌아와야 할 때 돌아오는데,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다는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고 돌아오지 않습니다(7). 학과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 같은 철새가 때맞춰 이동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유다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고 거짓을 고집하며 돌아오기를 거절한다면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여호와의 규례’는 유다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일반적인 규범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지혜자의 어리석음(8-9)

심판이 임박한 유다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복음의 핵심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입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지혜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날에 준비할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8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9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8-9)

고발의 대상이 ‘내 백성’에서 하나님의 법을 맡은 ‘서기관’으로 바뀝니다. 앞 단락과 연결해 읽자면,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법을 왜곡했기에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해 멸망합니다. 유다의 맹목적 질주는 서기관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만들어낸 거짓에 불과합니다(8). 철새보다도 못한 자들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떠들고, ‘여호와의 규례’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자신들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고 자랑합니다. 지혜와 율법은 입술의 주장만으로는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지혜롭다면 지혜 주신 분을,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면 율법 주신 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는 서기관들의 교리적 율법 해석을 고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속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평강’을 선포한 것처럼 서기관들도 전통적인 구원신학에 근거하여 율법을 해석했습니다. 이들의 왜곡된 율법 해석이 유다로 거짓을 고집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거짓되게 하는 자들은 결코 지혜로운 자들일 수 없습니다. 지혜로 ‘여호와의 율법’을 해석한다는 서기관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두려움에 떨며 사로잡혀갈 것입니다(9).

 

평강을 외치는 자들(10-12)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며 순종을 촉구하는 자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만약 교회가 위로의 말씀과 축복 선언만 외친다면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도 강단에서 물려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경성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때문입니다.

10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1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12)

특히 거짓의 붓을 휘두른 서기관을 포함해 제사장과 예언자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유다 백성도 거짓에 사로잡혀 여호와를 배반하고 그분께 돌아오기를 거절했지만, 이들에게 맹목적 구원의 환상을 심어준 종교 지도자들의 책임은 훨씬 큽니다. 이들은 평강이 없음에도 평강을 외치며 멸망을 향한 유다 백성의 질주를 부추겼습니다. 이들의 거짓 구원을 신뢰한 자들은 가던 길을 되돌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벌할 때’ 이들은 모두 넘어지고 쓰러질 것입니다(참조. 6:12-15).

 

북쪽으로부터 오는 적(13-17)

말씀을 떠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열매가 없음입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고 여호와께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견고한 성읍으로 피하면서 멸망하자고 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생긴 문제를 여호와를 향하여 핑계하고 불평하고 있는 배은망덕함까지 자행합니다. 마침내 심판의 군대가 탄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이스라엘 땅과 소유와 성읍과 주님을 삼키게 됩니다.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14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라 15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16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켰도다 1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13-17)

탐욕스러운 선지자와 제사장들은 끝까지 평강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가증한 일을 행할 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으로 말미암은 멸망의 순간에 백성과 함께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여호와의 재앙선언(13)

‘우리’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이 단락은 ‘이 백성’의 완강한 배반을 고발하는 4-7절의 연속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농부가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수확하듯 여호와께서는 빠짐없이 모두 거두어들이실 것입니다(13). 여호와께서 농부가 되셔서 거두시기에 어떤 열매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축복을 상징하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다 빼앗기고 잎사귀마저 말라버립니다.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약속의 땅을 포함해 그분께서 구원의 선물로 주신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유다는 여호와께서 주셔서 지금까지 누려왔던 구원과 축복의 선물을 모두 빼앗깁니다.

(2) 재앙에 대한 우리의 반응(14-15)

심판에 떨어진 자들의 탄식을 인용해 이들의 절망적 형편을 기술합니다. 적들의 침략에 대한 ‘우리’의 반응 특이합니다.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14a). 적이 쳐들어오면 살기 위해 요새로 피신하는데, ‘우리’는 멸망하기 위해 피신합니다. ‘우리’는 견고한 성읍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할 것을 압니다. '우리'가 그처럼 절망하는 이유는 전쟁의 신학적 성격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범죄한 ‘우리’에게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셨기에, 성읍으로 피한들 멸망을 모면하지는 못합니다(14). ‘우리’는 여호와의 심판을 초래한 자신들의 죄악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우리’는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을 만나지 못하고, ‘고침을 입을 때’를 고대하나 '놀라움뿐인 현실을 탄식합니다(15).

(3) 침략하는 적의 묘사(16)

대적은 이미 유다를 향하여 원정을 떠났습니다. 적의 기병대가 지축을 뒤흔들며 단을 지나 무섭게 진격합니다. 마치 사망의 스올이 생명을 삼켜버리듯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켜버립니다(16).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서운 적군의 돌진입니다. 성들이 함락되고 재물은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적군의 칼날 앞에서 맥없이 쓰러집니다.

(4) 여호와의 심판선언(17)

이는 여호와께서 보내신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이기에, 해독제가 있을 수 없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17; 참조, 민 21:4-9), 독사에게 물린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처럼, 유다가 적들의 침략을 받아 처참하게 멸망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외침을 무려 40년이나 외치고 살았습니다. 기적하나 없이 자신이 선포(설교)한 것을 누구도 듣지 않는 현실, 그러나 멸망으로 치닫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망해가는 이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도 괴로웠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그 길을 오늘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니 여러 가지로 말씀을 맡은자의 사명의 길이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8-01)

 


성전과 도벳에 우상숭배하는 사람들

예레미야 7장 29절-8장 3절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구원은 이신칭의인,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행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임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임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고 죄를 떠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임하면 우리에게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우상숭배를 지적합니다. 가장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우상을 세워두었습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하나님께 반역한 행위입니다. 또한 힌놈 골짜기에서 도벳 사당을 세워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더럽힌 유다 백성을 강하게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우상 숭배한 현장들을 전부 죽음의 장소로 바꾸실 것입니다. 멸망의 날에 예루살렘은 죽은 자들의 시신이 무덤에서 꺼내질 정더러 완전히 뒤집어 집니다.

 

우상으로 성전을 더럽힌 유다 백성(29-31)

누구나 고질병이 있습니다. 나았다 싶으면 다시 도져서 또 문제를 일으키는 약점입니다. 유다의 고질병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왜 유다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를 끊지 못하겠습니까? 우상숭배를 한 자들에게 선포된 말씀이 참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매섭습니다.

29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 버리셨음이라 30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31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29-31)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자녀를 헛된 우상에게 재물로 드리는 유다 백성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를 쏟아 부으셔서 그들을 우상에게 제사하던 그곳에서 끔찍하게 살육 당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1) 진노의 세대(29)

예언자가 애가의 형식을 빌려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28)에게 심판을 선고합니다.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29). 사람이 죽으면 얘기를 부르듯이 ‘너’는 헐벗은 산 위에서 죽음을 통곡해야 합니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 버리셨기에’(29b)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애가를 부르는 일만 남았습니다. 애가를 부를 ‘너’는 여성으로, 문맥에 따르면 예루살렘과 유다 또는 가나안 땅이 모두 가능합니다. ‘벗은 산’은 예루살렘과 유다가 우상들과 음란을 즐겼던 산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풍요와 생명을 기대하며 산당에서 제사를 드린 결과로 죽음이 주어집니다. 3:21에서도 예레미야는 환상 가운데 이스라엘 족속이 헐벗은 산에서 애곡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머리를 미는 행위는 애도의 전통적 풍습에 속하는데(참조. 사 22:12; 겔 7:18; 암 8:10), 여기서는 특별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너의 봉헌물을 잘라 버려라”의 뜻입니다. “머리털”로 옮긴 히브리어 ‘네제르’는 원래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나실인 규정(민 6:5)과 관련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표현 같습니다. 나실인은 서약 기간이 끝난 후에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기에, 머리카락을 잘라 내던지라는 예레미야의 명령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관계가 끝났음을 시사해줍니다. 순종의 봉헌 서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더는 하나님께 구별된 자가 아닙니다.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그분 진노의 세대’로, 하나님의 진노가 현세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보여줍니다.

(2) 성전의 우상숭배(30)

다시 여호와께서 화자로 등장해 유다 백성의 죄악을 고발하십니다. 이들은 여호와가 보는 앞에서 노골적으로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한 것'을 세워놓고 그 집을 더럽혔습니다(30).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를 점령한 우상들이 예루살렘 성전까지 차지해버렸습니다. 도둑의 소굴이 된(11) 여호와의 집이 우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도둑과 우상숭배자들은 여호와께 예배하러 성전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에스겔도 환상 중에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겔 8:16). ‘가증한 것’을 여호와의 집에 들여다 놓은 자들의 가증함은 한계가 없었습니다.

(3) 도벳의 우상숭배(31)

이들은 예루살렘 남서쪽을 두르고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다 도벳 사당을 세우고 자기 아들들과 딸들을 불에 살라 제물로 드렸습니다(31a).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거리를 지나 예루살렘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31)는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께 드려졌음을 시사해줍니다. 어린아이 희생제사가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하나님의 주장은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아이 희생제사를 여호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유다 백성 가운데 일부는 출애굽기 22:29의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를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원래 바알에게 드려졌던 어린아이 희생 제사를(참조, 렘 19:5; 32:35) 여호와 제의 안에 수용했던 것 같습니다. 미가 6:7의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도 속죄제를 위해 맏아들을 드리는 경우가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에스겔 23:37-39도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어린아이 희생제사와 성전 예배를 함께 묶어 우상숭배를 고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자녀를 잡아 우상에게 음식으로 바친 바로 그날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와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전 6세기 전후의 이스라엘이 얼마나 철저하게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졌는지를 보여줍니다.

 

심판 선고(32-8:3)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죄 중 하나는 교만입니다. 성경에서 132번이나 교만에 대해 ‘교만하지 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처럼 자신을 높이는 마음, 바로 사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 줄 수 없습니다.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33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34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2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3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2-8:3)

성전을 가증한 것으로 더럽히고, 자녀들을 불살라 우상에게 바치는 끔찍한 죄를 범한 유다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 힌놈의 아골 골짜기에서 그들이 떼죽임당하게 하심으로 그곳이 살육의 골짜기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1) 도벳의 심판(32-34)

예루살렘이 이방 제의의 각축장이 됐다. 여호와를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진 여호와께서 심판을 결정하신다. 먼저 가증스러움의 극단을 보여준 도벳과 관련한 심판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때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죽임의 골짜기’로 바뀔 것입니다(32). 축복과 번영을 기대하며 우상을 섬겼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멸망과 죽음의 상징이 됩니다. 죽은 자들이 너무 많아 매장지가 없어 제의장소인 도벳에 시체를 묻게 됩니다. 어린아이를 불살라 바치던 도벳이 공동묘지가 됩니다. 가증한 짓이 행해지던 곳이 가증한 짓을 행하던 자들의 시체로 더럽혀집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전면적이고 파멸적입니다. 매장되지 못하고 들판에 버려진 수많은 시체는 날짐승과 들짐승의 밥이 됩니다(33). 새와 들짐승이 시체를 뜯어먹지만, 그것들을 쫓아내고 시체를 지켜줄 사람이 없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로 활기가 넘치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는 죽음의 적막이 감돕니다(34). 땅이 완전히 황폐해져 생존이 불가능하기에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사라집니다. 도벳에서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친 결과로 자녀들이 완전히 끊어집니다.

(2) 완전한 멸망(8:1-3)

여호와의 심판은 산 자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에서 쉬고 있던 자들도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할 것입니다(1-2).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무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무덤까지도 훼손되어 이들의 뼈가 땅 위에 분토처럼 내버려집니다. 고대 세계에서 무덤은 고인의 영원한 안식처였기에, 때로는 복수의 차원에서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무덤에서 뼈를 꺼내 들판에 내버리기도 했습니다. 들판에 버려진 뼈는 우상들의 무능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우상들은 한때 자기들을 섬겼던 자들의 무덤이 파헤쳐져도 속수무책입니다. 우상숭배자의 수치는 우상의 수치이기도 합니다. 들판에 나뒹구는 숭배자들의 뼈로 그들이 한때 신으로 섬겼던 “해와 달과 하늘의 별”이 더럽혀집니다. 우상숭배자들에게는 죽음도 안식으로 허락되지 않습니다. 헛것을 숭배한 대가로 영원한 저주가 주어집니다. 마지막 절은 산자의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보여줍니다.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3). 전쟁의 심판에서 살아남았다고 목숨을 구한 것은 아닙니다. 살아남은 자들의 운명이 죽은 자들의 운명보다 더 비참할 것입니다. 이들은 유배지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향에서 쫓겨나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은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차라리 죽음을 소망할 것입니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우상숭배에 빠졌기에 아무도 여호와의 심판을 피해 가지 못합니다.


우상 또한 피조물이며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해코지도 무엇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지금 심각한 것은 일월성신 이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돈의 우상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을 왜곡시키고, 주권을 휘청거리게 하고, 탐욕을 부추기고, 법과 정의를 굽게하고, 교회를 부정하게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해야 할 대상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7-02)


돌이킬 수 없는 진노의 심판

예레미야 7장 16-28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모르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렇기에 순종의 결과가 복으로, 불순종의 결과가 저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를 위해 중보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은 유다의 심각한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줍니다.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일관한 그들에게 심판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단절(16-20)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이 듣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계속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16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7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18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19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20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6-20)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유다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것도 ‘기도하지 말라,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간구하지 말라’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면서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유다 백성 가운데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1) 중보기도의 중지(16)

성전 문에 서서 도둑의 소굴로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을 주십니다. 이번에는 예레미야 개인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해서도 부르짖거나 간구해서도 안 됩니다. 유사한 표현을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중보기도의 금지를 단호하게 명하십니다. 중보기도는 예언자의 기능 가운데 하나로, 때로는 백성 편에서 하나님께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알게 된 아모스가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라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보기도를 받아들여 뜻을 돌이키셨습니다(암 7:1-3, 4-6).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중보기도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위한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어주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심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셨기에 심판을 집행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성전의 제사뿐만 아니라 예언자의 중보도 그 기능과 유효성을 상실합니다. 유다와 하나님 사이의 통로가 모두 폐쇄되었습니다.

(2) 고발(17-19)

현재의 문맥에서 17-18절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를 금지시키신 이유를 보여줍니다.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예레미야도 보아서 잘 알기에 변호의 여지가 처음부터 없어집니다(17). 예레미야로서는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신 하나님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배교는 노골적이고 전면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연한 우상숭배 가운데서 특별히 하늘 여왕 제의를 고발하십니다. 하늘 여왕에게 드릴 과자를 만들기 위해 온 가족이 역할을 분담해 제의를 준비했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를 주워 모으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밀가루를 반죽했습니다(18). 하늘 여왕을 숭배하는 동기와 목적은 풍요였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여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하늘 여왕을 섬겼을 때는 양식도 풍부해 잘 지냈고 재난 겪지 않았습니다(44:17). 성전은 희생제물로 죄를 세탁하려는 자들로 들끓게 되었고, 거리의 집들은 우상을 섬기느라 분주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과 그분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 우상들로 점령당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치 ‘어떻게 하면 여호와를 더욱 노하시게 할 수 있을까’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것 같았습니다. 진노의 심판을 선포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의 어리석음을 고발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한이나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19). 우상숭배의 부끄러운 짓이 이들에게 재앙의 부끄러움을 초래합니다. 중요와 번영을 기대하며 하늘 여왕과 우상들을 섬겼는데, 멸망과 파멸이 주어집니다.

(3) 심판선언(20)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긴 유다 백성에게 볼 심판이 선언됩니다.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들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봄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20). 하나님의 진노의 분노가 붙이 되어 우상들로 가득 찬 예루살렘과 유다를 초토화 시킵니다. ‘꺼지지 않는 불’이 사람과 짐승뿐만 아니라 야생의 나무와 경작지의 소산 끝까지 모두 태워버립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자연환경마저 남김없이 파괴됩니다. 죄악의 심각성에 비례해 심판도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나무’는 들판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나무를, ‘땅의 소산’은 과실이나 곡식과 같은 수화물을 가리킵니다.

 

제사에 우선하는 말씀의 순종(21-28)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고 명령하셨던 것은 번제물이나 회목제물이 아니라 순종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더욱 잘 순종할 수 있습니까?

21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22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23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5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26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27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28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21-28)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향해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번제는 제물 전체를 태워 바치는 제사기 때문에 오느 누구도 제물의 일부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번제물의 고기를 먹으라는 것입니다.

(1) 제사 거절(21)

우상숭배의 늪에 빠진 자들에게 제사 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파격적인 명령이 내려집니다.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21) 이는 성전의 제사를 전혀 무시하는 명령입니다. 번제는 제물을 모두 제단에서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고, 다른 제사의 경우는 제물의 일부만 화제로 드리며, 나머지는 제사장과 제의 참석자들의 몫으로 돌려집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에 따르면 번제물의 고기는 제의 참석자들이 먹을 수 없습니다(참조, 레 1:3-17). 하나님의 명령은 차라리 풍자적입니다. “너희의 희생제물과 너희의 번제물이니 고기를 좋아하는 너희가 희생제물의 고기뿐만 아니라 번제물의 고기도 다 먹어라!” 우상과 불의로 부정하진 자들이 가져온 제물은 모두 부정하기에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고, 부정한 제물이기에 부정한 자들이나 먹을 수 있습니다. 정과 부정이 제의적 차원에서 윤리적 차원으로 옮겨집니다.

(2) 제사 대신 말씀 순종(22-23)

번제물의 고기도 함께 먹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은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어긋나는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다. 여호와 신앙의 근간인 출애굽 사건을 살펴보면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셨고 명령하지 아니하셨습니다(22). 그들로부터 제사를 받기 위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는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점인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없었슨비다.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였습니다(23).

(3)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대조(24-25)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명령은 제의 규정의 준수가 아니라, 말씀의 순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분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때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그분께서 명령하신 길로 가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고 언약의 근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길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줄기차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피와 완악한 대로’ 행하였습니다(24). 이들의 불순종은 의도적이며 계획적이었습니다. 등을 돌리고 완강하게 제 갈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돌려세우기 위해 그분은 거듭 ‘종 선지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25). 완악함과 악행이 이스라엘의 본질이 됐습니다.

(4) 더 악한 현세대(26)

시점이 과거에서 현재로 옮겨지는 26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불순종과 악행과 완악함에 있어 현세대는 조상들보다 더했습니다(26).

(5) 예언자의 선포 거질(27)

조상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그분께서 보내신 그분의 종 예언자들을 거절했던 것처럼, 목이 뻣뻣한 현세대도 다르지 않았다.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불러도’ 그들은 응답하지 않을 것입니다(27). 조상들처럼 현세대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멸망의 길을 가려 하기에 예레미야의 선포는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6) 교훈을 받지 않는 민족(28)

예언자적 사역이 성과 없이 끝날 것을 알려주시고 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선포할 메시지를 주십니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민족이다. 진실이 없어져 버렸다. 그들의 입에서 끊겼다”(28절의 사역). 내용상 27절의 반복으로, 메시지라기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적 평가입니다. 예레미야의 선포에 귀를 막고 응답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술순종과 완고함이 심판을 초래하게 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랑의 매를 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등을 돌리고 얼굴을 향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되돌리기 위해 징벌하셨지만, 이들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익한 거짓말’에 의존해(8,4)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하지 않기에, 이들의 입에서는 ‘진실’이 끊기고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율법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백성의 삶이 어떠냐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백성이 율법을 따라 살 때 하나님과의 관계는 정상적이 됩니다. 순종을 바탕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위치에 머무르게 되고 그들의 삶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형통한 삶을 살 것입니다. 순종에 관심 없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가려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6-02)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들

예레미야 6장 16-30절


옛날에는 남자와 여자가 주유소를 들어간 이유가 다르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주유소에 길을 물어보기 위해 들어가지만, 남성들은 길을 찾아 헤매다가 기름이 바닥나서 주유소를 찾는다고 합니다. 사실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자신의 고집과 안다고 생각하는 경험에 묶여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도 자칫 잘못하면 목적지에서 멀리 떨어져서 헤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바른 길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앞에도 여러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생의 길을 물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분의 법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북방에서 치러 오는 민족은 아주 잔인하고 무자비해 유다 백성은 두려워 떨며 고통스러워할 것입니다. 유다는 내어 버린 은이라 칭함 받을 것입니다.

 

선한 길을 택하라(16-21)

사람들은 새것과 새로운 방법이 신앙생활에 좋으리라 기대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교회를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에 다 들어 있음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유다 백성들의 실수는 무엇이었습니까? 이전에 알려주셨고, 언약으로 보여주셨고, 지시하신 많은 계명과 율법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방법대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는 원리를 따르지 않는 유다 백성들의 경고가 나옵니다.

16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17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18그러므로 너희 나라들아 들으라 무리들아 그들이 당할 일을 알라 19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20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21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두리니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이웃과 그의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16-21)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옛길 길’이 ‘선한 길’이라 하시면서 그리로 가야 평강을 얻는다고 하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또한 나팔을 부는 파수꾼을 세워 주셨으나 그 경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1) 최고적 고발(16-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역사를 되돌아보며 살길을 찾으라고 권면하십니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16). 이스라엘은 지금의 길을 버리고 생명으로 인도해주던 옛길(참조. 18:15)을 찾아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옛적 길’은 출애굽ㅡ광야 가나안에 이르는 길을 가리킵니다.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따라간 길이었습니다. ‘선한 길’은 생명과 축복과 평강과 같은 선한 것이 주어지는 길입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권면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16). 지금의 길이 선한 길이고 가나안의 물질적 삶에서 ‘평강’(쉼터)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옛적 길’을 찾아 되돌아갈 이유가 없다고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파수꾼(예언자)을 세워 나팔 소리를 들려주셨지만, 그들은 귀를 막고 듣기를 거절했습니다(17). 평강의 선포에 길들여진 귀(14)는 회개를 외치는 파수꾼의 경고를 듣기 싫은 소음으로 여겼습니다.

(2) 심판 선언(18-19)

하나님께서 ‘나라들’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완강하게 거절한 이스라엘을 재판하십니다. 모든 민족이 알도록 이스라엘에 대한 판결을 공개적으로 선포하십니다. 판결은 징벌보다 그 원인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재앙은 유다가 자초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유다의 (잘못된) 생각이 자라나서 결실한 (악한) 열매가 재앙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자기 생각과 계획에 따라 살았기에, 그들에게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불순종의 씨를 뿌린 이스라엘은 재앙의 열매를 거둔다. 동사 ‘듣다’와 17절의 ‘파수꾼’을 함께 고려할 때, ‘내 말’은 파수꾼-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3) 제의적 고발(20)

현재의 문맥에서 제의적 경건을 비판하는 20절은 ‘그들의 생각의 결과’의 구체적인 예에 해당합니다. 시바에서 들여오는 값비싼 유향과 먼 땅에서 가져오는 귀한 향품으로 분향한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기름지고 풍성한 번제물과 희생 제물에 하나님께서 배부르시겠습니까? 귀하고 값진 예물과 풍성한 제사가 그분의 말씀과 율법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참조. 14:12; 사1:11: 암 5:22).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저들만의 행사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의적 경건은 ‘그들의 생각’에 따른 것이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은 ‘옛적 길’을 찾아 그 길을 가는 삶, 곧 그분의 말씀과 율법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유향’은 제사 때 피우는 거룩한 향을 만드는 주재료고(출 30:34), ‘향품’으로 번역한 ‘카네 하톱’은 창포나 향초 줄기를 가리킵니다(출 30:23). 유향과 향품은 모두 먼 곳에서 들여오는 귀한 수입품이었습니다. 유향과 황금, 향료와 보석으로 유명했던 시바는 아마도 아라비아 남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4) 신판 선언(21) ‘옛적 길’을 찾아 그 길로 걷기를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에다가 장애물을 놓아 이스라엘이 걸려 넘어지게 하십니다(21). ‘그들의 생각의 결과’(19)라는 점에서 멸망은 이스라엘이 초래한 재앙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장애물을 두어 걸려 넘어지게 하셨다는 점에서 멸망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그분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놓으신 장애물이기에 넘어짐과 멸망에 예외는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들’(집안)과 ‘이웃과 그의 친구’(공동체)가 함께 넘어져 멸망합니다.

 

위기의 시온(22-26)

평강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선한 길로 행할 때 옵니다. 우리는 앞에 놓인 여러 길 가운데 생명의 길, 진리의 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넓고 편한 길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불순종한 결과는 재앙과 장애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들은 수천 년간 말씀 위에 서 있을 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역사를 무시하고 새로운 흐름을 따르겠노라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2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23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사랑이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처럼 포효하는 소리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시도다 24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그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25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라 26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 멸망시킬 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올 것임이라(22-26)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한 길을 떠나 먼 곳에서 온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임할 것은 먼 곳에서 올 재앙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방에서 잔인하고 강한 나라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자들에게 임한 새로운 소식은 그 손을 약하게 하고 고통을 줄 뿐입니다.

(1) 북방에서 오는 민족(22-23)

시온을 치려고 ‘북방에서’ 한 민족이 내려오고, ‘땅 끝에서부터’ 큰 나라가 일어납니다(22). 두려움과 놀람을 불러일으키는 강한 민족이 시온을 향해 원정을 떠납니다. 이들은 활과 단창으로 무장한 잔인하고 무자비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바다가 포효하듯 함성을 지르며 말을 타고 급히 달려옵니다(23).

(2) ‘우리’의 반응(24)

시온의 주민은 북방에서 무서운 적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져 손이 축 처지게 됩니다. 시온의 주민은 마치 해산하는 여인처럼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들을 죽은 목숨과도 같이 여깁니다(24).

(3) 예언자의 권고(25-26)

유다 백성은 적을 보기도 전에 겁에 질려 용기를 잃고 절망합니다. 시온의 주변이 언제 적군의 수중에 떨어질지 모르기에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숨어 있어야 합니다. 원수의 칼이 높이 들려 ‘사방에 두려움’뿐이기에 밭으로 나가거나 길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25). 파괴자가 ‘갑자기’ 덮쳐올 것입니다. 시온은 이미 죽은 목숨이기에 죽음을 애도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 뿐입니다(26). 이는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고 애곡하는 의식이 행해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시온의 통곡은 집안을 이어갈 외아들을 잃고 울부짖는 여인의 통곡처럼 처참할 것입니다.

 

내버린 은(27-30)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는 공의와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백성을 한없는 사랑으로 인내하시며 권고하십니다. 하지만 죄악이 범람할 때는 반드시 심판의 매를 드십니다. 하나님의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면, 결국 하나님은 잔인하고 포악한 바벨론 사람들을 일으키셔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27내가 이미 너를 내 백성 중에 망대와 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28그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며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 29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 30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렸음이라(27-30)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셨지만 유다 백성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27). 이에 하나님께서는 은제련 비유를 통해 유다를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 시금자 예레미야(27)

하나님께서 예언자에게 유다 백성의 영적 상태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기십니다. “내가 너를 내 백성 중에 시금자(와 검사자)로 세워 저들의 길을 살펴 시험하게 하였노라”(27). 시금자는 광석에서 뽑아낸 금속의 순도를 조사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시금자로서 하나님 백성이 바른길을 가는지, 그분 말씀에 순종하며 율법을 따라 사는지를 살펴 조사해야 합니다. 현재의 문맥에 따르면, 2-6장에 수집된 고발의 말씀들은 예언자가 시금자의 임무를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시금자 예언자는 그 기능에서 파수꾼-예언자(6:17)에 가깝습니다.

(2) 시험의 결과(28-23)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28-30절은 맡겨진 사명에 따라 조사를 수행한 시금자-예언자의 보고로서, 그 결과는 아주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며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28).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라 부르는 자들이 모두 고집 센 반역자, 헐뜯고 돌아다니는 자, 멸망을 가져오는 부패한 자였습니다. 전반절과 후반절에 한 번씩 사용된 ‘그들은 다’라는 어구는 유다 백성 전체가 타락했음을 강조합니다. 완고함과 공격성을 상징하는 ‘놋과 철’은 유다 백성과 예레미야를 대비시켜줍니다. 1:18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은 자신들을 ‘놋과 철’로 만들어 하나님과 그의 예언자에게 완강하게 대듭니다. 예언자의 사역은 실패한 제련과정에 비교됩니다. 풀무에 광석을 넣고 화학 물질을 첨가한 후에 불을 지피면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수한 은이 남는데, 풀무불을 더욱 세게 지펴 뜨겁게 해보았지만, 금속과 불순물이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29). 이스라엘을 다시 깨끗하게 하려는 하나님과 예언자의 노력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실패했음을 비유합니다. 예언자는 강도를 높여가며 이스라엘의 부패를 고발했지만, 어떤 긍정적 반응도 얻어내지 못했다. 하나님은 사랑의 매를 들어 치셨지만, 이스라엘은 깨닫지를 못하고 더욱 완고하게 저항했습니다. 풀무불에 들어갔지만 은을 뽑아내는 데 실패한 광석이 쓸모없는 놀로 버려지는 것처럼,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죄악에서 떠나기를 거절하는 이스라엘은 버려집니다(30).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을 버린(19) 이스라엘을 버려, ‘내버린 은’이 되게 하십니다.


형식만 있고 마음은 없는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십니다. 값비싼 유향과 향품을 동원한 호화스러운 예배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많은 헌금과 근사한 찬양대와 오케스트라를 앞세워도 하나님께서는 예배한 자의 순종과 정직한 고백이 없으면 그 예배를 가증스럽게 여기십니다. 형식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순종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길 바랍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6-01)


예루살렘에 분노하신 하나님

예레미야 6장 1-15절


 

불순종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재앙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경고가 되는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재림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약속은 만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길로 행함으로 주의 재림을 기쁘게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장차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임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름답던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성은 파괴되고 소유는 타인에게 넘어가고, 남녀노소가 다 잡혀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을 욕으로 여기고, 선지자와 제사장이 거짓 평안을 말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벌 받을 성 예루살렘(1-8)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이 계속 죄 가운데 거한다면, 하나님이 바벨론 군대를 끌고 오셔서 직접 예루살렘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라면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저 과거에 주어진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주님이 우리의 대적이 되실 수도 있다는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1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4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5일어나라 우리가 밤에 올라가서 그 요새들을 헐자 하도다 6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책을 만들라 이는 벌 받을 성이라 그 중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니라 7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 8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1-8)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반적으로 작은 성읍에 사는 사람들이 예루살렘같이 크고 방비가 잘된 성안으로 피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오히려 예루살렘으로부터 피난하라고 명합니다. 그리고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고 외칩니다

(1) 북방에서 오는 적(1-5)

적의 침략이 예루살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목숨을 구하려면 포위당하기 전에 빨리 성을 떠나야 합니다. 위험을 피해 예루살렘으로 피난 온(4:6) 베냐민 사람들은 ‘재앙과 큰 파멸’이 오기 전에 서둘러 다시 예루살렘을 떠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1). 드고아는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은 깃발을 들어 피난민들이 안전하게 유다 산지로 피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합니다(1). 예루살렘의 운명은 확정됐습니다. 여호와께서 북방에서 민족들을 불러 파멸시키기로 결정하셨기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습니다(2). 시온을 수식하는 ‘아름답고 우아한’은 여호와께서 시온에게 허락해 주신 특권과 영예의 표현입니다. 시온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도성으로, 그분의 보호와 축복 가운데 번영과 영예를 누렸습니다. 시온은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현존하시기에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이지, 시온이 아름답고 우아한 도성이어서 그분께서 택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잃어버린 시온은 여호와로부터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들이 방목에 좋은 초지를 찾으면 장막을 치고 머물면서 양 떼를 먹이는 것처럼, 적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기 위해 주변에 진을 펼칠 것입니다(3). 시온을 택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시온을 치는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공격 준비를 명령하시자 적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4-5).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은 출병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한시라도 빨리 예루살렘을 점령하려는 자들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었습니다. 준비가 길어져 저 됐지만, 이들은 준비가 잘오져 저녁이 됐지만, 이들은 중단하지 않습니다. 군대를 움직이기에 매우 불리한 밤도 이들의 출정 의지를 꺾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을 멸절하려고 여호와께서 불러온 군대이기에 한낮의 무더위나 밤의 어둠이 이들의 앞길을 막지 못합니다. 이들은 요새들을 파괴하고 성을 점령하자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2) 벌 받을 성(6-8)

출정을 명령하신 여호와께서 성의 공격도 진두지휘하십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군대에게 성을 칠 수 있도록 공격용 축대를 쌓게 하십니다(6). 성을 공격할 때 원정군은 주변에 성벽과 비슷한 높이로 흙이나 돌을 쌓아 언덕을 만들고 이를 공격거점으로 활용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총사령관이 되셔서 예루살렘을 공격하시기에 성 함락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실 때는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안에는 ‘오직 포학한 것’뿐이었습니다(6). 샘에서 시원한 물이 흘러나오듯, 예루살렘에서는 끊이지 않고 악이 흘러나왔습니다(7). 들리는 것은 ‘폭력과 탈취’(폭력과 파괴)의 소란뿐이었고, 보이는 것은 폭력과 파괴로 생긴 ‘질병과 살상’뿐이었습니다(7). 폭력으로 이웃을 억압하고 공동체를 파괴하며, 서로를 병들게 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이 예루살렘의 일상사였습니다.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이 포악과 폭력과 파괴가 지배하는 ‘벌 받을 성’이 됐습니다. 예루살렘의 악행은 본성에 속하기에 멸망의 심판 이외에는 달리 기대할 것이 없어졌습니다. 예루살렘 공략 준비를 다 마친 원정군에게 공격 명령을 하달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모든 것이 결정 난 것 같은 순간에 여호와께서 갑자기 마지막 명령을 잠시 뒤로 무르시고, 예루살렘에게 최후의 기회를 한 번 더 주십니다.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를 황폐하게 하여 주민이 없는 땅으로 만들리라”(8). 더 이상의 기다림은 없습니다. 멸망을 모면하려면 이 마지막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이 이번에도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호와는 예루살렘을 버리고 떠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인적이 없는 폐허로 만드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위협적인 권면은 예루살렘이 교훈을 받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포기하실 수 없는 그분의 안타까움의 반영입니다.

 

심판을 초래하는 백성의 완악함(9-15)

불순종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재앙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경고가 되는 역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대로 재림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잊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길로 행함으로 주의 재림을 기쁘게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9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포도를 따듯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시나니10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11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남편과 아내와 나이 든 사람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12내가 그 땅 주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4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5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15)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심판을 경고하시면도 그들에게 훈계를 받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심판을 철회하시고자 최대한 미루시면서 그들이 훈계를 받고 회개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1) 완전한 멸망(9a)

9a절은 9b-10절에 대한 여호와의 답변입니다. 예언자의 선포를 비웃으며 거절했기에(9b-10)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남김없이 거둬들이게 하십니다(9a). ‘그들’의 신분은 달리 언급되지 않지만, 문맥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징벌하려고 여호와께서 북방에서 데려오는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심판은 벌써 심판이 한 차례 있었음을 전제합니다. 이전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자들마저 남김없이 이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구약성경 내에서 추수는 자주 여호와의 심판 표상으로 사용됩니다.

(2) 멸망의 이유(9b-11a)

9b절은 여호와께서 예언자에게 사명을 맡기며 주시는 명령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를 살펴서 좋은 열매가 맺혀있는지 조사해보는 임무가 예언자에게 맡겨졌습니다. 예언자의 답변(10-11)은 결과가 매우 부정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의 완악한 반응에 예언자는 절망합니다. 그들의 귀는 할례를 받지 못한 귀라 아무리 선포하고 경고하여도 예언자가 선포하는 여호와의 말씀은 그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10). 평강의 예언에 길들여진 귀는 심판과 멸망의 선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생명과 구원의 길을 거절하고 죽음과 멸망의 길을 고집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예언자를 절망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로 가득 채웠습니다(11a). 배반한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분노하시는 것처럼 예언자도 마찬가지로 분노합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분노하는 예언자에게 마음속에 가득찬 ‘여호와의 분노’를 남김없이 쏟아붓도록 허락하십니다(11ab).

(3) 멸망과 유배(11b-12)

완고하게 당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예언자를 조롱하는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땅 주민’을 거슬러 손을 뻗으시기에 누구도 도피하지 못합니다(12a). 길거리에서 장난치며 노는 아이들과 모여서 젊음을 즐기는 청년들도 재앙을 피하지 못하고, 남자나 여자, 나이 든 자나 노인 모두 사로잡혀갑니다(11b). 북방에서 내려오는 대적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말갛게’ 주울 것입니다(9). 심판의 범위가 인적 자원에 한정되지 않고 물적 자원까지 확장됩니다. 사람들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고, 이들 삶의 터전이었던 집과 밭과 아내는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갑니다(12b). 생존에 필요한 모든 소유물을 상실합니다. ‘강한 손과 편 팔’(참조, 신 4:34; 5:15)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해내신 여호와께서 이제는 당신 백성에게 진노하여 손을 펼치고 그들을 치십니다.

(4)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13-15)

다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합니다. 가장 작은 자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유다 백성이 모두 탐욕을 부립니다(13a). 소유욕에 사로잡혀 자기 잇속만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한통속이었습니다. 이러한 부패에서 종교 지도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예언자와 제사장이 거짓으로 백성을 오도했습니다(13b). 오진에 의한 처방이 환자를 죽음으로 이끄는 것처럼, 이들의 그릇된 영적 판단이 백성의 완악함을 악화시켰습니다. 백성이 중병에 걸렸는데도 이들은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수롭지 않게 처방했고,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을 외쳤습니다(14). 영적 지도자들의 무능력과 부패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모두는 ‘가증한 일’을 범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15a). 그들은 탐욕과 거짓에 대한 죄의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망적 기대감(8)은 이제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특히 이들의 영적 무감각에 책임이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심판이 선포됩니다(15b).


성도라면 본문 말씀을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이 되실 수 있다는 경고 앞에 안일한 태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게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때로는 매를 드셔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아버지의 그 사랑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5-03)

 


배반과 반역과 속임의 이스라엘

예레미야 5장 20-31절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제각각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은 보는 기능을, 귀는 듣는 기능을 합니다. 만약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쓸모없는 것이 될 뿐 아니라 혼란을 야기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기능을 다하지 못했으며, 지도자들은 더욱 그러하다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확정되었습니다. 이제 예언자의 역할은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일입니다. 예언자는 백성의 우둔함을 서술합니다. 그들은 눈이 있지만 장님 같으며, 귀가 있지만 귀머거리 같습니다. 백성의 상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예언자의 사명입니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는 백성(20-25)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밎지 않는 행동을 하고서도 몰랐다고 변명하지만, 사실 대부분 알면서도 하지 않았거나 거역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지, 알면서도 거역하고서 몰랐다며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20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21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22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내 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 내가 모래를 두어 바다의 한계를 삼되 그것으로 영원한 한계를 삼고 지나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파도가 거세게 이나 그것을 이기지 못하며 뛰노나 그것을 넘지 못하느니라 23그러나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으며 24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25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20-2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음과 지각 없음을 말씀으로 표현하십니다. 만약 그들의 눈과 귀가 제대로 기능을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다와 땅의 경계에 모래를 두어 바다가 땅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1) 선포 명령(20)

하나님께서 당신을 경외하지 않는 ‘야곱 집’과 ‘유다’를 책망하십니다. ‘야곱 집’은 전체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참조, 2:4). 책망의 대상에 유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전 북왕국에 속했던 주민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음에 있어 유다는 예전의 북왕국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2) 직접적 책망(21-22)

유다는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었습니다(21). 이들의 눈과 귀는 육체적으로는 멀쩡했지만, 영적으로는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현실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도 못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도 못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고 지각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그분 앞에서 떨지도 않습니다(22a). 사납게 날뛰는 바다도 하나님께서 경계로 정해놓은 모래를 넘지 않고 경계를 준수하는데(22b), 유다는 창조 질서를 정하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3) 서술적 책망(23-24)

눈과 귀가 영적으로 고장 난 자들의 마음이 온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배반하여 반역하는 마음’(완강하고 반항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어, 하나님께 등을 보이고 돌아서서 가버렸습니다(23). 이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에 따르는 길을 거절하고 자기 계획과 결정에 따르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을 삶과 역사를 결정하는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고, 창조 질서를 정하신 분을 역사의 유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유다 백성은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에 땅의 결실이 그분께서 주시는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비를 주시고 추수 기한을 정하신 분임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자연 질서를 다스리시는 분께 의존하지 않았습니다(24). 제 때에 비가 내리지 않아도, 가뭄이나 병충해로 흉년이 들어도,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눈과 귀와 마음이 영적으로 마비된 유다는 자신들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4) 직접적 책망(25)

하나님께서 유다를 직접 책망하십니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25). ‘이러한 일들’과 ‘좋은 것’은 창조주께서 정하신 자연 질서, 구체적으로는 때를 따라주시는 비를 가리킵니다. 유다의 죄가 비를 내리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현재의 재앙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른 비’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내리는 가을비를, ‘늦은 비’는 12월부터 2월까지의 우기가 지난 후에 3월과 4월에 내리는 봄비를 가리킵니다. 거의 전적으로 비에 의존해 농사를 짓는 가나안에서 때맞춰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는 결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추수 기한’은 곡물에 따라 수확 시기가 달리 정해졌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4-5월에 보리 수확이 시작되고, 보통 한달 보름이 지나 밀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보리 수확을 시작(무교절)할 때부터 밀 수확을 끝낼 때(칠칠절)까지 대략 일곱 주간이 걸렸습니다.

 

사회적 불의와 불법(26-29)

재판은 본래 힘이 없는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약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재판관들은 결국 하나님의 처벌을 받을 수밖ㄸ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해 나갈 때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어찌 너희를 벌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26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 새 사냥꾼이 매복함 같이 지키며 덫을 놓아 사람을 잡으며 27새장에 새들이 가득함 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너희가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28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 29내가 이 일들에 대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같은 나라에 보복하지 아니하겠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6-29)

하나님께서는 새장에 새가 가득함같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집에 속임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탐욕으로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해졌으나 그들의 영혼은 타락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판결하지 않았습니다.

(1) 고발(26-28)

유다로부터 ‘좋은 것’을 막은 허물과 죄를 구체적으로 고발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회는 폭력과 속임수가 판을 치고 악인이 승승장구하는 사회였습니다. 정의 와 공의가 사라지고 가난한 자가 부당하게 짓밟힙니다. 악인들이 하나님 백성 가운데서 노골적으로 악을 행합니다. 새 사냥꾼이 나무나 수풀 또는 물가에 그물을 쳐놓고 새들이 함정에 빠지길 기다릴 듯이 이들은 덫을 놓고 숨어 기다리다가 사람들을 잡습니다(26). 우연이나 실수로 이웃에게 악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계획하고 이를 그대로 실행에 옮겨 이득을 탐했습니다. 이들에게 이웃은 먼저 잡으면 제 것이 되는 사냥감에 불과했습니다. 새 사냥꾼이 사냥한 새로 새장을 가득 채우듯, 악인들은 사기 쳐 얻은 재물로 제집을 가득 채우며 더욱 번창하고 거부가 됐습니다(27). 더 부유해질 수만 있다면, 이웃을 짓밟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일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번창하고’와 5절의 ‘지도자들’은 히브리어 어근이 같습니다. 사기와 불법과 폭력으로 남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된 자들이 곧 ‘여호와의 길, 자기 하나님의 법을 안다’고 주장하면서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은’ 지도자들입니다. 부당한 수단을 사용해 부자가 된 자들의 얼굴에는 기름기가 흐르고 윤기가 돕니다. 세속적인 보응 신학에 따르면 성공한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들의 악행은 한계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길과 법을 안다는 자들이지만,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자’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했다’(28).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은 ‘고아가 승소할 수 있도록 송사를’로 옮기는 것이 좋다). 자기 집을 채우는 일에 혈안인 지도자들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의 송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재판의 공정성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더 부유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면 법(정의)을 무시하고 거짓을 따랐습니다.

(2) 징계 선포(29)

하나님께서 연민을 갖고 ‘내 백성’이라 불었던 유다가 정의를 왜곡한 부패한 지도자들로 인해 그분의 보복을 받아야 하는 ‘이 같은 나라’가 됩니다(29: 5:9). 하나님의 법과 길을 모르는 백성(4)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21-24), 하나님의 법과 길을 아는 지도자들(5)은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를 짓밟습니다. 하나님의 보복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총체적 타락입니다.

 

무섭고 놀라운 일(30-31)

교회가 진리 위에 서 있지 않는데 교인들이 오히려 그 상태를 좋아한다면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진리 위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백성은 저들에게 세뇌되다시피 했기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어떻게 잘못된 지도자들에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도리어 그 악한 자들을 통해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생각만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30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0-31)

전체 고발의 요약입니다. 한마디로 ‘무섭고 놀라운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30).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끔찍한 일이 유다에서 벌어집니다. ‘무섭고’는 ‘황량/황폐하다, 생명에서 잘리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나온 단어로, 황량함이나 폐허가 야기하는 두려움과 놀람과 같은 경악스러움을 가리킵니다. ‘놀라운’은 23:14에 한 번 더 나오는데, 하나님은 ‘예루살렘 선지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증한 일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충격적인 것은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일이 정치와 사회가 아니라 여호와 종교 안에서 자행된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31). 하나님의 의지를 대변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그분의 백성이 끔찍한 일의 주인공들입니다. 여호와의 예언자가 ‘거짓’을 예언합니다. 거짓 존재인 우상에게서 신탁을 받아 전하거나 자기 생각을 하나님 말씀으로 포장해 선포합니다. 이들은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을 떠들고(6:14), ‘간음을 행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을 행하는 자의 손을 강하게 하여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합니다(23:14). 제사장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립니다. 하나님의 집을 제멋대로 다스립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7:4)을 퍼뜨리고, 십계명을 무시하는 자들에게 성전을 개방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듭니다(7:9-11). 황당한 것은 하나님 백성이 그런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심판 예언자들은 싫어하고(12-13), 죄의 용서와 구원을 값싸게 선포하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좋아합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이 서로 도와가며 제 욕심과 이기심을 만족시킵니다.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이 한 패거리가 돼 ‘무섭고 놀라운 일’을 즐깁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정직하고 바르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살지 않는 자들을 용납하거나 그들 편에 서서 이기적인 욕심을 채운다면, 하나님을 경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올바르게 감당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05-02)


반역자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5장 10-19절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생각하고 여겨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갈 수 있는 그러한 때는 없는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바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힘들어하고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순종의 기회가 됨을 기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반전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유다 백성들은 심판 전이나 후에도 변함없이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기 때문에 결코 재앙이 자신들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에 있는 그분의 말로 불을 만들어 그들을 사르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을 섬긴 그들은 타국에서 이방인을 섬길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주는 혼란(10-14)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방 신들을 섬기자 이방 땅으로 끌려가 종노릇 하며 이방 신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유다 백성들의 강퍅한 태도가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0너희는 그 성벽에 올라가 무너뜨리되 다 무너뜨리지 말고 그 가지만 꺾어 버리라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니라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내게 심히 반역하였느니라 12그들이 여호와를 인정치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는 계신 것이 아닌즉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13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 14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찌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12-1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심히 반역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반역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르기를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것은 영적으로 타락한 자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줍니다.
(1) 파괴되는 포도원(10-11)
여호와께서 종교적·윤리적 간음을 즐긴 ‘이런 나라’에 보복하십니다. 그분께서 2인칭 복수의 청자 ‘너희’에게 파괴를 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녀의 포도원 두둑으로 올라가서 파괴하여라. 그러나 끝장을 내지는 말라. 그 가지들만 잘라내어라. 그것들이 여호와께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10절의 사역). 포도원의 파괴가 제한적입니다. 포도나무가 잘려 나가지 않고, 가지들만 꺾입니다. 그 가지들이 여호와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명령은 포도나무와 가지를 구별하는 것이지, 좋은 열매가 열린 가지와 나쁜 열매가 맺힌 가지를 구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지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 아니기에 잘립니다(1-5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에는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 가지가 다 잘려 거의 죽은 나무와 같지만, 그래도 줄기와 뿌리는 남아 있기 때문에 완전히 말라 죽지 않습니다. 아마도 유다가 대적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지만, 완전히 끝장나지 않고 언젠가 다시 회복될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이 모두 심판에 넘겨지지만, 미래의 회복 가능성마저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의 가지가 다 잘리는 혹독한 심판을 받은 이유는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이 여호와께 ‘심히 반역하였기’ 때문입니다(11). 이미 오래전에 멸망한 이스라엘을 유다와 나란히 언급합니다. 여호와께 ‘심히 반역한’ 이스라엘이 주전 722/1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심히 반역한’ 유다의 운명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철저한 번역이 멸망과 유배를 초래했듯이 유다의 철저한 반역도 멸망과 유배를 초래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유다의 경우는 회복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입니다.
(2)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12-14)
현재의 문맥에서 다음 두 절은 유다 사람들이 어떤 연유에서 여호와께 반역하고 예레미야와 같은 심판 예언자들의 선포를 거절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심판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12).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라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분의 심판 의지를 무시하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구원사적 전통에 매몰된 자들은 여호와께서 유다를 심판하시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칼과 기근’의 재앙을 선포하는 심판 예언자들에 맞서서 그런 재앙은 결코 자신들에게 임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예언자들이 심판받아야 할 거짓 예언자들입니다. “선지자들은 바람이라 말씀이 그들의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하느니라”(13). 여호와의 심판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볼 때 재앙을 선포하는 심판 예언자들은 실체가 없는 '바람'에 불과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자들로, 저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허공으로 사라지는 바람과 같으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칼과 기근’의 재앙은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칭한 자들에게나 임할 것입니다. 심판 예언자들을 거짓 예언자들로 정죄한 자들에 맞서서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옹호하시며, 그들에게 볼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재앙을 선포하셨음을 그리고 예레미야를 당신의 예언자로 선택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에 두신 그분의 말씀(참조 1:9)은 봄이 되고, 그의 선포를 거절한 유다 백성은 나무가 됩니다.
 

강하고 오랜 민족에 의한 심판(15-19)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도 믿지 않기 때문에 굳이 선하게 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믿음 때문에 결국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은 유다 백성의 행위와 그 결과를 묵상하고, 새 언약 백성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5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내가 한 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 하리니 곧 강하고 오랜 나라이라 그 방언을 네가 알지 못하며 그 말을 네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6그 전통은 열린 묘실이요 그 사람들은 다 용사라 17그들이 네 자녀들의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떼와 소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의뢰하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18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 19그들이 만일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너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은즉 이와 같이 너희 것이 아닌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리라 하라(15-19)
하나님께서는 반역자들에 대해 말씀이 불이 되게 하고 그들은 나무가 되게 하셔서 말씀으로 그들을 불태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알지 못하던 강한 민족이 올라와 그들을 치고 성읍을 파멸시키며 모든 것을 갈취해 갈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1) 강하고 오랜 민족(15-16)
여호와의 심판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 집’을 태울 붙은 전쟁의 불입니다. 여호와께서 ‘한 나라를 먼 곳에서’ 오게 하시는데, ‘강하고 오랜 민족’으로 이스라엘이 알아듣지 못하는 모르는 말을 사용하는 민족입니다(15). 이들은 모두 잘 훈련받은 용사들로 이들의 화살은 빗나감 없이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혀 무덤에 들어가게 합니다(16). 이스라엘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무서운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들과 싸워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먼 곳’은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알지 못하는 곳이고, 감정적으로는 두려움과 야만스러움의 장소입니다. ‘강하고’는 원래 ‘지속적인’, ‘영속적인’을 의미합니다. 흥망성쇠를 경험하지 않고 고대로부터 계속 있어 온 민족은 강한 민족입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모르는 말’은 낯섦과 무서움의 대상입니다.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고 여호와께서 불러오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은 20장에서 바벨론으로 밝혀집니다. 강하고 오랜 민족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은 남김없이 파괴되고 약탈당합니다.
(2) 침략의 결과(17)
“그들이 네 추수 곡물과 네 양식을 먹으며 네 자녀들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17). 스올이 입을 크게 벌리고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를 다 집어삼키듯이 침략자들이 모든 것을 먹어 치웁니다. 사람들은 칼에 맞아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혀 끌려갑니다. 곡식과 가축을 다 빼앗기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잘려 버렸기 때문에 기근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 대신 의지하였던 ‘견고한 성들’도 모두 ‘칼’에 파괴되기 때문에 그들은 안전하게 몸을 쉴 곳이 없어집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하나도 남겨지지 않습니다. ‘칼과 기근’의 재앙이 닥칠 리가 없다고 하나님의 심판 능력을 인정하지 않던 자들이 모두 ‘칼과 기근’에 쓰러지고 멸망합니다.
(3) 진멸의 모면(18)
침략자들이 ‘아들들과 딸들’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마저 먹어 치우는 17절에 따르면, 멸망 이후 전망하기 힘든 완전한 멸망입니다. 그러나 10절의 경우처럼 심판은 철저하게 집행되지만, 그것으로 완전히 끝장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 백성을 위해 미래를 열어놓으십니다. “그 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하지는 아니하리라”(18), 적들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폐허로 만들고 백성을 사로잡아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단절된 것은 아닙니다.
(4) 심판의 이유(19)
하나님께서는 이미 심판 이후를 준비하십니다. 그분은 회복의 약속을 주시기에 앞서, 먼저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에게 심판 원인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과거의 극복 없이는 새로운 미래도 없기 때문에 가상적 질문과 답변의 양식을 빌려 이를 알려주십니다(19).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냐”는 질문에는 재앙을 경험한 자들의 당혹감과 한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재앙을 임하게 하셨음을 인정하지만, 어떤 연유로 그분께서 이처럼 혹독하게 심판하셨는지는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구원자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그분 백성의 멸망은 이해하기 힘든 파국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멸망의 원인을 묻는 자들에게 줄 답변을 예언자에게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땅에서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이제 자기 땅이 아닌 곳에서 ‘이방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유다의 멸망과 유배는 겉으로는 전쟁과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된 재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상숭배가 초래한 신학적 사건입니다. 병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면 처방전도 확실해지는 것처럼, 심판의 원인이 우상숭배에 있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비교적 분명해집니다. 심판의 시대를 사는 자들은 우상숭배의 잘못을 인정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분의 도움을 기다려야 한다. 지난 시대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와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비위에 맞는 말씀만 듣고자 한다면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시고 복 주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만을 듣고자 할 뿐, 정작 진리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평안과 사랑과 복과 보호하심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찌른다면 그 말씀에 오히려 더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