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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34-01)

 


심판 중에도 끝까지 남겨놓은 은총

예레미야 34장 1-7절


 

사람에게나 동물에게 무서워서 기를 펴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것을 일컬어 ‘주눅 들었다’고 합니다. 가끔 사람이나 환경 앞에서 주눅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꼼짝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주눅 들어서는 안 됩니다.

 

  • 하나님의 경고대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멸망은 초읽기에 다다랐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는 항복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다시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그리고 여전히 남은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를 전합니다.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멸망(1-2)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 왕에게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경고하십니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머지않아 함락될 것입니다. 이는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1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모든 군대와 그 통치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에 말씀이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가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1-2)

 

느헤미야는 지금까지 감옥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전합니다. 새롭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에게 붙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서 바벨론 왕 앞에 설 것을 예언합니다.

신탁의 시대적 배경을 제공해주는 1절은 시점보다는 바벨론의 엄청난 군 병력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과 그 모든 성읍을 칠 때’ 여호와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하는 바벨론의 군대를 이처럼 자세히 서술하는 곳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동원 가능한 모든 병력을 거느리고 예루살렘과 유다를 공격합니다. 군사력에서 비교될 수 없는 변방의 유다가 앗수르의 뒤를 이어 근동의 패권을 장악한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7절의 정보는 좀 더 구체적입니다. 유다의 모든 성읍이 점령당하고, 예루살렘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 라기스와 아세가만 남습니다. 이 두성마저 함락된다면 예루살렘은 완전히 고립됩니다. 예루살렘 다음으로 중요했던 라기스(Telled-Duweir)는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아세가(Tell ez-Zakariyeh; 참조. 수 10:10-11; 15:35; 삼상 17:1; 대하 11:9)는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대략 30km, 라기스 북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이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대항하는 전쟁을 멈추라고 합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심판을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항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받아 들려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마음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비록 왕이 라고 해도 눈치 보거나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할 수 있습니까?

 

전달할 신탁 내용(3-5)

하나님의 마음이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신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지만, 그 최종 목적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들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완전히 실현됩니다.

 

3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여 나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5평안히 죽을 것이며 사람이 너보다 먼저 있은 네 열조 선왕에게 분향하던 일례로 네게 분향하며 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다 주여 하리니 이는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3-5)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신탁을 받아 시드기야 왕에게 전한 내용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왕에게 함락될 것이며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가지만, 죽을 때는 평안히 죽고 백성들이 그를 위해 애도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1) 첫 번째 신탁: 시드기야의 절망적 운명(2-3)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신탁이 전달될 상대를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2). 예레미야는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소유적 관계를 보여 주는 표현으로, 현재의 문맥에서는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짝을 이룹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에 유다 왕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21:1과 37:3에서는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신하들을 보내 신탁을 구하고, 37:17과 38:14에서는 시드기야가 요나단의 집 또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를 불러 여호와의 신탁을 묻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여호와의 말씀에 시드기야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 왕 시드기야의 파국적 운명에 큰 관심을 갖고 개입하시지만, 정작 위기의 당사자인 시드기야는 그분의 신탁에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신탁의 주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인데, 후자에 대해 무게가 주어집니다. 성의 운명에 관해서는 두 개의 동사가, 시드기야의 운명에 관해서는 여섯 개의 동사가 사용됩니다. 동사 ‘넘기다’와 ‘바벨론 왕의 손’은 양쪽에 다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시기에 시드기야 왕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손’에 넘겨집니다. 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운명이 하나로 묶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완전한 파괴와 시드기야의 사로잡힘을 결정하셨기에, 막연한 또는 최소한의 소망마저(참조. 21:2) 다 사라집니다. 시드기야 왕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점령당한(39:2; 52:6) 예루살렘은 한 달 후인 다섯째 달 열째 날에 화염에 휩싸입니다(52:12-13). 신탁이 전하는 시드기야의 절망적 처지는 39:4-7과 52:7-11에 그대로 나옵니다. 성벽이 깨지자 시드기야 왕은 야음을 틈타 왕실 정원길을 따라 성벽 사이의 통로를 지나 도성 밖으로 탈출하여 아라바 쪽으로 피신하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갈대아 군대의 추적을 받아 여리고 평지에서 사로잡혀 하맛 땅 립나(리블라)의 느부갓네살의 사령부로 끌려갑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아들들을 죽인 후에 그의 두 눈을 뽑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시드기야는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2) 두 번째 신탁 : 예루살렘의 운명(4-5)

 

예루살렘의 운명을 먼저 짧게 언급했던 첫 번째 신탁과 달리 두 번째 신탁은 오직 시드기야의 운명에 집중합니다. 2절의 ‘유다의 시드기야 왕’을 호격으로 사용하는 권면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라’는 10절의 경우처럼 순종의 의미도 함축합니다(10절의 ‘듣고’와 ‘순복하여’는 같은 동사 ‘듣다’의 번역이다). ‘여호와께서 네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는 예외적인 표현으로, 여호와께서 시드기야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신탁의 주제는 시드기야가 맞게 될 죽음입니다. 시드기야는 칼에 맞아 죽지 않고 평화롭게 죽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장례 의례에 따라 이전 왕들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처럼 그에게도 격에 맞게 불을 피우고 애곡을 할 것입니다. ‘칼에 의한 죽음’에 대비되는 ‘평화로운 죽음’은 불행이나 폭력으로 세상을 떠나지 않고 제 명을 다한 죽음을 가리킵니다. ‘분향하던 것’과 ‘분향하며’는 각각 명사 ‘불에 태움’을 의미하는 ‘미스러 포트’와 ‘불에 태우다’를 의미하는 동사 ‘사라프’의 번역입니다. ‘선왕들에게 분향하던(불에 태우던) 것 같이’는 ‘불에 태우는 의식’이 전통적인 장례 의식의 일부에 속했음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표현이 사용됐지만, 역대하 16:14; 21:19도 유다에서는 왕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불을 피우는 의식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시신 가까이에 불을 켜놓고 그 위에 유향이나 향신료를 태웠던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언급된 애곡은 장례 의식의 핵심에 속합니다. ‘슬프다 주여’는 여기와 22:18에만 나오는 애도의 표현으로(참조. 왕상 13:30), 시드기야의 죽음과 여호야김의 죽음을 서로 대비해줍니다. 시드기야를 위하여 사람들이 ‘슬프다 주여’하고 애곡하지만, 여호야김을 위하여는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하고 통곡하지 않습니다. 불의와 불법으로 통치한 여호야김의 (저주받은) 죽음과 다른 죽음이 시드기야에게 약속됩니다. 첫 번째 신탁은 시드기야에게 사로잡힘과 유배를 선포하고, 두 번째 신탁은 평화로운 죽음을 약속합니다. 두 신탁 사이에 있는 긴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후자가 전자의 심판을 조금 완화하고 있다고 해석하지만, 고대적 사고에 따르면 유배지에서의 죽음은 평화로운 죽음이 될 수 없습니다. 평화로운 죽음과 왕에게 걸맞은 장례 의식은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에서 죽게 될 것을 전제합니다. 예레미야서의 보고(참조. 39:4-7;52:7-11; 왕하 25:4-7)에 따르면 시드기야는 극히 비참하게 유배지의 감옥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시드기야의 운명이 질적으로 상이하게 언급됐다면, 두 말씀은 선택의 문제에 속하게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두 번째 신탁은, 본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조건이 함축된 약속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여호와에 의해 확정된 운명이기에 피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가능성은 바벨론에 항복하고 완전한 파멸을 모면하는 것뿐입니다(참조. 21:8-10). 시드기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여호와의 심판 의지로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한다면, 그에게는 평화로운 죽음과 유다 왕에 합당한 장례 의식이 허락될 것입니다(참조. 38:17-18).

 

바벨론 군대의 침략(6-7)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면 산성이고 방패이십니다. 유다가 멸망한 것은 바벨론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야 우리 삶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는 유다의 많은 성들은 너무나 쉽게 바벨론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넘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6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고하니라 7때에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6-7)

 

시드기야의 실패는 믿음과 자기신념을 구별하지 못한 맹신과 자기기만이 가져다준 비참한 결말을 봅니다. 바벨론 왕의 군대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성들을 침략하고 점령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전쟁은 너무나 손쉽게 진행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2a)을 예레미야가 그대로 이행했다는 6절의 보고는 매우 특이합니다. 예언자에 의한 실행보고가 주요 구성 요소에 속하는 표적행위의 경우와 달리 말씀 선포에서는 일반적으로 명령 이행에 관한 보고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예레미야의 즉각적이고도 단호한 순종과 시드기야의 침묵(불순종)을 대조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 유다 왕 시드기야에게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지만, 그는 듣기만 하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돌출적입니다. 32:2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는데, ‘예루살렘에서’는 그의 출입이 자유로웠음을 전제합니다. 양자를 함께 보면, 예레미야가 전한 ‘이 모든 말씀’을 들은 시드기야의 반응은 예레미야의 체포와 구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시드기야 왕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기회를 주셨을 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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