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36-02)
끝까지 패역한 이스라엘
예레미야 36장 20-32절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지만 성경은 그것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책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정확하고 틀림이 없으며 결코 사라지고 않고 다 이루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무엇입니까? 어둠을 드러내는 말씀, 욕망의 재조정하도록 요구하는 말씀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본문은 예레미야에 의해 전해지고 바룩에게 대서했던 재앙의 경고를 여호야김 왕이 듣습니다. 왕은 선포된 말씀을 듣고 기록된 두루마리의 성경을 찢어 불에 태워버리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으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시 두루마리에 말씀을 기록하되 더 많이 기록하게 하십니다.
말씀을 불태우는 여호야김 왕(20-23)
이스라엘은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왕도 여호와의 권위 아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여호와의 권위로부터 분리된 자기만의 독자적인 권위를 주장했습니다. 왕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여호와의 활동은 종교 영역에 한정 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종교와 정치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왕이시라고 주장했습니다.
20그들이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뜰에 들어가 왕께 나아가서 이 모든 말을 왕의 귀에 아뢰니 21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의 귀에 낭독하니 22그 때는 아홉째 달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23여후디가 서너 쪽을 낭독하면 왕이 면도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더라(20-2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바룩에게 두루마리를 기록하게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 그리고 왕에게 하나님의 의도대로 읽혀졌고, 이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3).
⑴ 왕에게 보고(20)
본문의 여호야김은 바룩이 예레미야의 말이 적힌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갓을 들은 미가야가 서기관 방으로 들어가서 고관들에게 보고한 것처럼, 두루마리의 내용을 알게 된 고관들은 왕을 찾아가 보고합니다.
⑵ 두루마리의 낭독(21)
고관들이 여후디를 보내 바울이 두루마리를 가져와 낭독하게 한 것처럼 왕은 여후디를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낭독하게 합니다. 여호야김 왕과 고관들 앞에서 읽어졌지만, 그들의 반응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과는 정반대로 다릅니다. 왕은 여후디에게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있던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왕과 신하들 앞에서 그것을 읽게 합니다. 그들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⑶ 여호야김 왕의 반응(23)
두 이야기는 모두 낭독을 들은 자들의 반응으로 끝납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에서 반응은 다릅니다. 고관들은 듣고 놀라 서로 바로보고, 왕과 측근들은 듣고 놀라지 않습니다. 고관들은 바룩에게 예레미야와 함께 몸을 숨기도록 권면하고, 왕은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아 오게 명령합니다.
이런 병행 구조는 유다의 멸망이 여호야김에 의해 되돌릴 수 없게 확정됐음을 보여줍니다. 유다의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여호야김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이 기회를 잡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가 대변하는 여호와의 권위마자 짓밟아버렸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아버지는 요시야 왕입니다. 요시야 왕은 성전을 청소하다가 두루마리 성경을 발견하고, 그것을 읽어가면서 자기 옷을 찢으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열왕기하 22장). 하지만 그의 아들인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무시하였습니다.
고관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왕은 여후디를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읽게 합니다(20-21). 요약해서 보고를 받지 않고 낭독하게 합니다. ‘∼의 귀에 낭독하다’가 모두 열 번 사용되면서 듣는 자들의 반응을 연결해줍니다. 서기관들의 귀만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백성과 여호야김과 그의 측근 신하들의 귀는 부정적으로 반응합니다.
하지만 여호야김 왕은 자기 아버지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신하 여후디가 두루마리를 서너 단씩 읽어 내려갈 때마다 왕은 칼로 그 두루마리를 잘라서 화롯불에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심판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마치 시기적으로 아홉째 달이어서 화롯불이 타고 있는 겨울궁전에 머물고 있던 왕은, 여후디가 서너 단을 낭독하면 서기관의 칼로 그것 을 베어 화롯불에 던져 두루마리를 모두 태워버립니다(22-23). 예레미야와 바룩의 수고가 값비싼 양피지가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말씀이 재로 사라집니다.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는 듯 보입니다.
아홉째 달(9)은 대략 604년 12월에 해당합니다. 여호야김의 겨울 궁전은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 만든 왕궁 일부를 가리킵니다. 22:14에 따르면 여호야김은 자신을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었습니다. 여호야김 왕의 이러한 태도는 교만이 극치를 이룬 것입니다.
교만을 말리는 신하들(24-26)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만큼 말씀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말씀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만큼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24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25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26왕이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에게 명령하여 서기관 바룩과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24-26)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여호야김 왕과 고관들의 반응은 정말 놀랍습니다. 교만한 행동은 화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 엘리단과 들라야와 그마랴라는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으로 하여금 두루마리를 불태우는데 말리지만, 왕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와 서기관 바룩을 잡아 오도록 명령하기까지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된 말씀에 조금도 두려움을 모르는 여호야김과 그의 주변 신하들의 태도와 예레미야의 선포에서 여호와의 의지를 읽는 일부 서기관들의 태도가 대조됩니다. 왕의 신하들은 ‘왕의 곁에 선 모든 고관’(21)으로, 12절 이하에 나오는 ‘고관들’과는 구별되는 자들입니다. 고관들은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놀라 서로 쳐다보았는데(16), 왕과 측근 신하들은 두루마리에 적힌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않았습니다(24). ‘두려워 하거나’와 ‘놀라’(16)는 같은 단어입니다.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두루마리를 태우지 말도록 왕에게 간청해보지만, 예언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왕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25). 악볼의 아들 엘라단은 애굽으로 도피한 예언자 우리아를 소환해오기 위해 여호야김이 바로에게 파견한 사절의 일원이었고(26:22), 열왕기하 24:8에 언급된 엘라단과 동일인이라면, 그는 여호야김의 장인이요 여호야긴의 외조부가 됩니다. 두루마리를 조각조각 잘라 불태워버린 왕은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보내 두루마리를 만들어 낭독한 예레미야와 바룩 사로잡아 오게 합니다(26; 참조, 26:21-23). ‘왕의 아들’은 혈통보다는 직분과 관련된 표현일 것입니다. 물론 왕의 권력은 명령을 내리는 데까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예언자 예레미야와 그의 동반자 바룩을 지켜주시기에 왕의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여호와께는 고관들을 통해 (19절) 이들을 지켜주십니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언제까지 숨어 지냈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여호야김의 통치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35장에서 예레미야는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전체적으로 여호야김의 모습은 그의 아버지 요시야의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여호야김은 두루마리의 말을 듣고 옷을 찢지 않는데, 요시 야는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수리 중에 발견한 율법책을 사반이 읽어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열왕기하 22:11; 참조 3:6-7), 여호야김은 부하들을 보내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 오게 하는데, 요시야는 여 예언자 훌다에게 사절을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묻습니다(열왕기하 22:12.14).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말씀을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준수합니다(열왕기하 23:3), 여호야김은 시신이 들판에 버려지는 저주받은 죽음에 떨어지고, 요시야는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된다(열왕기하 22:20). 요시야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 앞에 어떻게 서야 할지를 보여주는 모범적 인물이고, 여호야김은 악한 왕의 전형입니다.
예레미야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경고의 메지시가 전파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한 가닥 마지막 소망을 가지고 회개하길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왕은 회개치 않고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니깐 예레미야를 숨겨주십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무시하는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십니다. 혹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지 않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앞에서 듣는 것처럼 들어야 합니다.
다시 기록된 두루마리(27-32)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죄악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마음을 찢으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성경을 아는 만큼 지적인 유희를 즐기고, 말씀을 개인적인 이득을 챙겨보려는 도구로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게 존경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먀에게 불타버린 두루마리 책 대신에 말씀을 다시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7왕이 두루마리와 바룩이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기록한 말씀을 불사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8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29또 유다의 여호야김 왕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이 두루마리를 불사르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바벨론의 왕이 반드시 와서 이 땅을 멸하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없어지게 하리라 하는 말을 이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느냐 하도다 30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에게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31또 내가 그와 그의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이 그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그 모든 재난을 내리리라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32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외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27-32)
여호야김 왕이 예레미야가 기록한 두루마리를 불태우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를 다시 기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받아 적게 했으며, 이번 두루마리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심판의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⑴ 여호와의 지시내용(27-28)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불살라버린 후에 여호와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27). 여호와의 두 가지 명령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명령은 두루마리를 준비해 첫 번째 두루마리에 기록했던 모든 말씀을 다시하는 것입니다.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와, 유다 왕 여호야김이 태워버린 첫 번째 두루마리에 (적혀) 있던 첫 번째 말씀을 다 거기에 적어라’(28절의 사역), ‘첫 번째’를 두 번 사용해 두 번째 두루마리가 첫 번째 두루마리의 완전한 복사본임을 강조합니다.
⑵ 여호야김에게 주신 말씀(29-31)
여호야김이 첫 번째 두루마리를 태워버렸지만, 거기에 적힌 말씀은 하나도 변경되거나 상실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명령이 그대로 실행됩니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책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가 전하는 대로 기록하고 그 의에도 그 같은 밭을 많이 더 하였더라’(32절). 첫 번째에도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뿐만 아니라 비슷한 내용의 많은 말씀이 더 첨가됩니다. 두 번째 명령은 두루마리를 태워버린 여호야김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심판 선포에 앞서 심판의 근거로 여호야김의 말이 인용됩니다(26). 21-26절은 여호야김의 외적 반응만 기술하고, 그가 여호와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워버리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체포하려는 동기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인용을 통해 기록된 말씀의 내용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여호야김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1) 바벨론 왕이 반드시 옵니다. 예레미야는 20:4부터 바벨론 왕에 의한 유다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는 ‘반드시’를 통해 이를 더욱 강조합니다. 2) 그가 이 땅을 멸합니다(참조, 열왕기하 18:25, 이사야 36:10). 3) 그가 사람과 짐승(참조. 7:20, 21:6), 곧 살아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립니다. 27:5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사람과 짐승을 내가 보기에 옳은 사람에게 주십니다.
고발의 말씀에 뒤이어 두 가지 내용으로 이뤄진 심판의 말씀이 주어집니다(30). 첫째, 여호야김에게는 후계자가 없을 것입니다(참조 22:30). 둘째, 여호야김에게는 왕에게 합당한 장례가 허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들판에 버려져 낮과 밤의 기온 차로 급속히 부패하게 됩니다(참조 22:18,19). ‘던져서’(23)와 ‘버림을 당하여’는 같은 단어입니다.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대로 서기관의 칼로 잘라 화롯불에 ‘던져서’ 태워버린 왕에게 그의 시산이 들판에 ‘던져지는’ 징벌이 선언됩니다. 심판의 대상이 왕을 넘어 ‘그의 자손과 신하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로 확대됩니다(31).
⑶ 지시의 이행(32)
두루마리의 말을 듣고 돌이키지 않기는 왕이나 일반 백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선포에 귀를 막은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하십니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은 약소국의 바에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정치적 파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아들의 죄악에 책임을 물으시는 신학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소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순종 여부에 상관없이 말씀하신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혜이고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겸손히 그 말씀을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기득권에 취해 돌 같은 마음이 되어 말씀이 읽혀지지 않는 인생은 자신의 욕망을 불태우게 됩니다. 자기 옷을 찢고 우상을 불태우는 삶에 소망이 있습니다. 신앙 양심에 비추어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고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담대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귀를 기울이며, 주신 말씀을 겸손히 말씀에 순종하며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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