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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2-01)

 


에서를 만날 준비하는 야곱

창세기 32장 1-12절


 20년의 세월은 형 에서의 존재를 더 무겁고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형의 낯빛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생각으로는 벌써 몇 백 번이고 세일 땅을 오갔습니다. 상상으로도 몇 백 번 형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 하나님을 만난 마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멀리 세일 땅 에돔 들판에 사는 형 에서에게 전령들을 보내 자신의 귀향 소식을 알립니다. 세일 산이 있는 세일 땅은 에돔 족속의 거점 지역을 일컫는 총칭으로 사해 남쪽 지역의 고산 지대를 말합니다. 에돔이 그곳을 점유하기 전에 호리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에돔 지역에는 그 산지를 중심으로 인근에 아라바 광야라 일컫는 꽤 넓은 평원도 존재했습니다. 압복 강 근처에서 세일 땅까지는 약 150km의 거리였습니다.

 

야곱이 만난 하나님의 사자들(1-2)

형 에서와의 재회를 앞두고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던 야곱에게는 온통 두려움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에서 위기 때마다 찾아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에서 위기 때마다 찾아와주셨습니다. 고향을 떠나던 길에도, 20년이 지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에도 두려움에 휩싸인 그에게 나타나셔서 동행의 증표를 쥐여주셨습니다.

1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1-2)

야곱은 귀향길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의 등장은 언제나 중대한 사건과 전환점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족장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반복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동사 ‘파가’는 공격적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입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마 집단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칭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이 동사는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왜 그 사자들이 야곱에게 나타났는지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습니다. 사자들이 야곱을 만났고, 야곱은 기이한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행렬을 목격한 뒤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칭하고 거기에 ‘마하나임’이라는 지명을 부여했을 뿐입니다(2). 출현한 사자(들)의 침묵과 역할의 부재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사자들의 출현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곧 닥칠 에서와의 만남에 대비한 보호와 인도를 위함이면서 야곱의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를 무장시키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천사들은 무리 지어 군사적 대열을 이루며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칭했습니다. ‘마하네 엘로힘’은 ‘큰 군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큰 무리의 행렬을 목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여기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로 해석되는 것이 무난해 보입니다. 야곱은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쌍수 형태의 ‘마하나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합니다. 야곱은 ‘두 개의 군대(진영)’를 말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두 무리로 나뉜 군대들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단순히 야곱이 목격한 천사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행진했기 때문에 그가 ‘두 개의 군대’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분명히 암시적입니다. 그 두 진영의 군대는 야곱의 진영과 에서의 진영의 만남을 미리 예고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에서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그를 만나러 올 때 야곱은 자신의 무리를 둘로 쪼갭니다. ‘두 떼’로 만듭니다. 이때 ‘마하네’의 복수형이 사용되면서 분립된 두 진영이 ‘두 개의 마하노트’로 표현됩니다. 하늘 군사들의 출현은 야곱에게 어떤 징조를 느끼게 하면서 그로 하여금 심리적 준비를 하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그곳에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은 그에게 이 경험이 특별했음을 암시합니다. 이 경험은 단순히 에서와의 조우에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땅의 약속과 관련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첫발을 내디딜 때 하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그는 하늘 군대가 머물러 있을 곳을 지정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에서에게 인사말을 보내는 야곱(3-5)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어도 평안은 잠시였습니다. 야곱은 외교력을 발휘하여 세일 땅에 사는 형 에서에게 심부름꾼을 먼저 보내 자신을 주의 종으로, 형을 주로 일컫고 있습니다. 세심하게 할 말을 일러주었습니다. 형의 동행을 파악하여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으려 준비했습니다.

3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3-5)

야곱은 전령들에게 극진한 예우를 담은 인사말을 보냅니다. 그는 형 에서를 ‘주인님’(‘아도니’으로 호칭하면서 자신은 주인을 시중드는 ‘종’(에베드)으로 격하합니다. 이것은 상급자에 대한 하급자의 관례적인 인사법이긴 했지만, 그의 호칭에는 형에 대한 뉘우침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극도의 살의를 품은 형에게 화해를 시도하지만, 어쩌면 도리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의 약속을 신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인사말을 담은 전갈은 단지 도착 소식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라반과 함께 거류하여 머물다 돌아오는 중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떠났다가 이제 많은 가축 떼와 종들을 데리고 왔음을 덧붙입니다(4). 이것은 금의환향을 자화자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과분한 축복을 형과 함께 나누겠다는 의사가 들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20년 세월과 왜 라반을 떠났는지는 건너뜁니다. 월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만 아마 단순히 그 긴 사연이 인사의 자리에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형의 자비를 얻기를 바란다며 말을 맺습니다(5).

 

마중 나오는 에서와 겁에 질린 야곱(6-12)

야곱은 에서가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에 겁에 질렸습니다. 즉시 일행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누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곱씹으며 전직으로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지난 시간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6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6-12)

전령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비관적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형 에서가 무려 4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행진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6). 이 ‘만남’에 사용된 동사 ‘카라’는 일반적 만남에도 사용되지만(창세기 24:65; 여호수아 9:11; 열왕기하 8:8,9; 9:18) 전쟁터에 적을 만나러 갈 때도 사용됩니다(창세기 15:10; 민수기 21:3; 열왕기상 20:27; 열왕기하 23:29). 야곱은 에서가 대군을 끌고 오는 이유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 에서의 행동은 군사적 관점에서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전령을 먼저 보내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 자신들을 모두 노출시키며 상대방이 대응할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의 공격은 효과적이지 않으며, 공습이나 야간 기습 작전이 상식적인 군사 행동일 것입니다. 사실 에서는 야곱을 호위하기 위해 큰 병력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잔뜩 겁에 질렸습니다(7). 죽느냐, 사느냐의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명석한 그는 자신들은 무장행렬이 아니기에 승산이 없는 정면 대결은 피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습니다. 그는 대열을 반으로 나눕니다. 이것은 절반만이라도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만일 에서가 한 무리를 공격하면, 그때 시간을 확보한 다른 무리가 탈출한다는 계산입니다(8). ‘두 떼’로 번역된 단어는 흥미롭게도 ‘두 개의 마하노트’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쌍수’가 아닌 둘을 받는 복수형입니다. 그는 앞서 두 무리로 나뉜 하나님 군대의 대열에서 힌트를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절박한 기도를 올립니다(9). 이것은 그의 서원 기도를 제외하고(창세기 28:20-22) 야곱 이야기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최초의 기도이며 매우 긴 기도입니다. 그는 조부 아브라함에게 땅의 선물과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시고 인도와 보호를 보장하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맹세했던 약속을 기억하시기를 탄원합니다. ‘네 고향, 네 족속에게 놀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라고 하셨으니 지금 자신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베풀었던 그분의 모든 은총(헤세드)과 모든 진실하심(에메트)에 호소합니다. 혜세드는 끊임없는 자비와 성실한 도움을 의미합니다. ‘에메트’는 ‘진리’, ‘진실성’, ‘옳은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헤세드를 베푸는 자가 보여주는 변함없는 신뢰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진실하신 분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고향을 떠날 때 지팡이만 쥔 맨손의 홀몸으로 요단강을 건넜으나 하나님께서 두 개의 진영(‘두 떼’)으로 나눠도 될 만큼 거부가 되게 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10). 지팡이에서 거대한 군단으로의 변화입니다. 야곱이 말하는 요단강은 사실은 요단강으로 흘러가는 지류인 얍복 강인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중에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 때문입니다. 얍복 강은 암몬 땅에서 흘러나와 동서로 흐르면서 요단강으로 합류합니다. 야곱은 지금 요단강 지류인 얍복 강을 요단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강은 요단강을 향해 동서로 흐르는데 메소포타미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이었습니다. 현재 그는 얍복 강 너머에 머물러 아직 건너오지 않았습니다(창세기 32:22).

야곱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호소하며 자신을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를 건지시옵소서!’(11). 야곱의 삶에서 그의 입으로 내뱉는 최초의 탄원입니다. 그의 삶의 여정을 볼 때 그는 벨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 그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20년의 긴 세월 동안 라반의 끊임없는 견제와 핍박, 착취 속에서도 성자처럼 생활했습니다. 자신의 지혜로 라반의 부를 모두 차지하긴 했지만, 더 이상 속임수와 반칙, 그리고 착취를 부의 축적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야곱 그가 기도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힘든 기억도 잊힌다고 하지만, 야곱에게는 20년 전 형과 해결하지 못한 갈등이 계속 마음을 옥죄어왔습니다. 두려움이 평안을 앞지를 때, 우리가 선 곳이 마하나임, 곧 칼의 진영이 아닌 하나님의 진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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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1-03)


 야곱과 라반의 언약 체결

창세기 31 36-55


우리는 축적한 재산과 명예 등이 자신의 잘남이나 노력으로 된 것인 줄 알고 자신을 높이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엄청난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라반과 대등한 존재로, 아니 두려움이 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신실함의 산물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음을 고백하고, 겸손히 청지기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0년 세월을 섬겼습니다. 7년간 레아를 위한 기간, 추가적인 7년의 라헬을 위한 기간, 그리고 이후 라반을 위한 6년의 섬김 기간의 합산입니다(41). 그러나 야곱은 이 20년 동안 라반이 품삯을 무려 열 차례나 변경했다고 비난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열 번은 실제적인 수라기보다는 꽉 채움을 의미하는 완전수의 개념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라반의 계약 위반이 수도 없이 빈번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이러한 상황이 극적으로 뒤집힙니다.

  

라반을 책망하는 야곱(36-42)

라반이 잃어버린 드라빔에 대해 야곱에게서 아무런 협의점도 발견하지 못하자, 야곱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지난 20년간 라반을 위해 일하면서 대가는커녕 배상하기 바쁜 세월이었습니다. 마치 욥기 31장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욥의 변론 고백을 듣는 듯합니다.

36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7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38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42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6-42)

야곱은 드리빔을 훔쳤다는 건으로 자신을 취격해온 외삼촌 라반을 향해 지금까지 참아 온 모든 울분을 쏟아 냅니다. 지난 20년 동안 착취당한 일들을 열거하며, 밤낮없이 더위와 추위와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면서 삼촌에게 항상 정직했음을 강변합니다.

(1) 야곱의 소나기 펀치(36-40)

야곱은 아무것도 찾지 못한 라반에게 향해 분노하며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냅니다. 그가 라헬에게 크게 분노한 이후(창세기 30:2) 다시 여기서 분을 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는 라반과 법정 소송에서 싸우는 것처럼 자신을 변론하며 라반의 죄를 나열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라고 따집니다. 내 허물의 히브리어 페샤는 반역질과 같은 항명죄이고 무슨 죄로 옮긴 하타트는 일반적인 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의 질문은 외삼촌에게 내가 무슨 반역질을 했습니까,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대든 적도 몰래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는데 무고한 나를 과연 이렇게 맹렬히 추격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항의입니다(6). 무엇보다 드라빔 분실에 대한 혐의를 야곱 일행에 뒤집어씌운 것이 오히려 라반을 난처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상대의 약점을 노리고 계속 몰아붙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확인시키기 위해 자신의 헌신적인 목축 원칙을 하나씩 나열합니다. 라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의 섬김은 독자들을 놀라게 하며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38-39). 첫째, 나는 임신한 양과 염소를 잘 돌보아 유산이 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나는 외삼촌의 숫양 고기를 일체 먹지 않았습니다. 셋째, 맹수에 물려 찢긴 가축은 내가 배상했습니다. 넷째, 도둑맞은 가축도 내가 배상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목축 원칙은 큰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야곱이 얼마나 놀라운 인물로 변화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야곱의 허풍이 아닌 이유는 라반이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국가들의 법에 의하면, 천재지변이나 짐승에 의해 가축이 죽었을 때, 그리고 가축을 도둑맞았을 때, 목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되었습니다. 맹수에 잡아먹히거나 찢긴 짐승은 그것을 증거로 제시할 때 목자의 책임은 없었으며, 도둑맞은 가축에 대해서도 관리 소홀로 인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상 책임이 면제되었습니다(출애굽기 22:9-13). 결국 야곱은 이 모든 손실을 자신이 메울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그는 외삼촌에게 가축의 손실분을 일절 청구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떼어 그것을 채웠습니다. 암양은 새끼를 치고 우유를 짜는 이유로 비싸서 숫양을 흔히 식용으로 잡았습니다. 목자가 자신의 재량으로 가끔씩 잡아먹어도 되었지만, 야곱은 그 어떤 숫양도 일절 손대지 않음으로써 외삼촌에게 아무런 손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원칙을 따라 목축을 함으로써 외삼촌의 가축을 크게 늘려 놓았으며 낮에는 더위와 싸우고 밤에는 추위를 견디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했다고 항변합니다(40). 가혹한 환경 속에서 야곱은 오랜 세월 인내하며 라반의 목축업을 도맡아 최선을 다해 크게 번성시켜 놓았습니다. 그 혜택은 모두 라반에게 돌아갔습니다.

(2) 야곱의 인고의 20(41-42)

야곱은 20년을 인내하며 라반을 섬겼습니다. 그의 희생적이고 성실한 목축으로, 또한 그와 함께하며 그가 가는 곳마다 큰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라반의 가축 떼는 해마다 크게 번성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소나기 펀치 끝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려 라반을 무릎 꿇게 했습니다. 이런 당신은 결국 빈손으로 밧단아람에 온 나를 다시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아시고 어젯밤에 직접 외삼촌에게 나타나 꾸짖었지 않했습니까?(42) 야곱은 그에게 현몽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자신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야곱과 라반의 조약(43-55)

라반은 야곱과 언약을 채결하여 비로소 야곱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합니다. 또한 자신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으로 딸들에 대한 보호와 안정적인 결혼행활, 상호 불가침의 조항을 달아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제는 종이 아닌 가장의 지위를 얻게 됐습니다.

45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50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1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3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54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55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43-55)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께하시고 야곱의 수고를 감찰하셔서 일시불로 품삯을 얻도록 복 주셨습니다. 당하고만 산 것 같은 20년이 하나님 앞에서는 한 날도 허사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눈에 보이는 부()보다 야곱이 자기 한계와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더 큰 보상이었습니다.

(1) 화해의 조약식(43-50)

라반은 야곱에게 굴복합니다. 분명히 그는 야곱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조약 협정을 제의합니다(43). 하지만 그의 허세는 여전합니다. 그는 여전히 야곱의 아내과 손주들, 그리고 야곱의 모든 소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의미 없고 공허한 주장입니까! 소돔 왕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마치 강자인 자신이 큰 아량을 베풀고 있는 것처럼 뻐깁니다. 그러나 이미 그가 조약을 제안한 순간 그는 자신의 패배와 열세를 인정한 셈입니다. 따라서 야곱과 라반의 관계는 더 이상 주종 관계도 상하관계도 아닙니다.

엄중한 조약을 맺은 후 그들은 기념석으로 세운 돌무더기에 각자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증거석(證據石)과 더불어 그것은 그들의 조약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또한 이것 역시 증거석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이 기념석을 중심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로운 동맹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각각은 자신의 언어로 그 돌무더기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라반은 아람어로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가나안어(히브리어)로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습니다. 둘 다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라반은 그 돌무더기가 오늘 자신과 야곱 사이에 증거가 될 것이라고 공포합니다.  오늘은 오늘부터 이 조약이 영속적으로 유효하다는 선언입니다. 라반은 아마도 돌무더기와 함께 세운 별도의 기둥에 미스바라는 이름을 추가합니다(49). 미스바(미츠파)는 망을 보는 탑인 망대라는 뜻입니다. 라반은 그 기둥의 이름에 여호와께서 서로 멀리 떠나는 자신과 야곱을 그 망대에서 살피시고 지켜달라는 소망을 담았습니다(49).

라반은 이 조약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하게 준수해야 할 것을 마지막으로 성기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두 딸입니다. 그는 야곱이 자신의 딸들을 학대하거나 다른 아내들을 맞아 그들의 위치를 위협한다면, 하나님께서 둘 사이에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50). 그가 다른 아내들을 경계하는 이유는 아내들의 증가로 인해 자신의 딸들의 상속권이 위협받고 손주들의 유산의 몫이 축소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딸들을 터인 취급하고 딸들을 팔아 큰 이듯을 얻었던 비정한 아버지였습니다.

(2) 야곱과 라반의 송별식(51-55

라반은 조약 예식의 마지막 절차로 상호간의 철저한 조약 준수를 맹세합니다. 조약의 기념물로 세운 돌무더기와 기둥이 또한 조약의 증거물이 될 것입니다(52). 동시에 그 기념물인 돌무더기와 기둥은 양측의 경계선 역할을 합니다. 말ᄒᆞ자면, 이 조약은 일조의 상호불가침 조약이었습니다. 만일 그 돌무더기 경계선을 넘어와 계약 위반을 한다면, 이제 아브라함의 신들과 나홀의 신들’(개역개정의 하나님보다는 신들’), 그들의 조상의 신들이 둘 사이를 판단해달라고 기원합니다. 복수의 신들을 부른 라반과 달리 야곱은 하나님을 유일신 하나님이신 자신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분으로 호칭하며 맹세하고 있습니다. 조약식은 마지막 제사와 더불어 (주로 화목제였다) 풍성한 식사를 하면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출애굽기 24:5-8,11; 신명기 27:7). 야곱은 그 산에서 화목제를 드린 후 라반 측의 사람들(‘형제들’)을 모두 불러 함께 풍성한 식탁을 나누었습니다(54). 그들은 그 밤을 거기서 지낸 뒤,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날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라반은 자신의 딸들과 손주들과 더불어 송별 인사를 나누며 축복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야곱은 과거 자신이 무너뜨린 질서와 속임수에서 대가를 치르고 자신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속이는 자에서 속는 자로 살아가면서, 과오를 씻고 경계를 복구하는 시간은 길고 고달픈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묵은 시간과의 결별을 통해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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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1-02)

 


라반을 피해 도망하는 야곱의 대작전

창세기 31장 17-35절


 살면서 웬만하면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라반과 에서가 그런 존재일 것이고, 라반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존재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문이 누군가에게는 은혜로운 만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날벼락 같은 만남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게 될 때 그 만남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곱은 제2의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조부 아브라함이 했던 떠남을 재현합니다. 아브라함도 아내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종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었습니다(창세기 12:5). 그러나 이번에는 마치 야반도주와 같은 탈출극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가 밧단아람에 올 때는 낙타도 없이 홀몸으로 걸어서 왔습니다. 신부 값도 없었던 빈털터리 도망자가 이제 낙타들을 거느리고 많은 가축 떼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야곱의 도주(17-22)

야곱은 라반이 먼 길을 떠난 틈을 타 도주합니다. 사흘 후에야 라반은 친족들과 함께 떼로 추적하여 7일 만에 야곱이 머무는 길르앗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의 가나안 행을 위태롭게 할 라반을 사전 봉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17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19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21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22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17-22)

두 아내의 동의를 얻은 야곱은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아마 그는 즉시 도주를 시도하지 않고 최고의 기회를 노린 것 같습니다. 그는 디데이를 양탈 깎는 시기로 정했습니다(19). 양털 깎기는 봄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식구들이 오랜 기간 집을 비우고 멀리 떠나 커다란 수입이 보장되는 그 일에 집중했습니다. 라반의 가족들 모두가 양털 깎기에 동원되어 나갔을 때, 야곱은 작전을 실행에 옮겼습니다(17). 그는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을 모두 낙타들에 태우고 모든 가축과 소유물을 가지고 나와 가나안 땅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향했습니다. 이때 라헬은 라반의 막사에서 드라빔을 홈쳐왔습니다(19).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드라빔의 정체와 기원, 용도, 그리고 크기와 형태에 대해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상의 형상인데 그 우상이 신인지 죽은 조상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개체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복수형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에 대해 많은 견해가 제시되나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주석을 써내려가 혼동을 일으킵니다. 베스터만은 이것을 단수로 취급하지만, 월키와 웬함 그리고 해밀턴은 복수로 간주하면서 드라빔을 지칭하는 신을 일관되게 ‘신들’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복수의 신들로 번역하는 이들조차 하나의 개체가 왜 복수의 ‘신들’로 표현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필자의 견해로, 드라빔은 여러 신들의 단일 합일체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한 개체이면서 항상 복수형 ‘테라핌’으로 표기되고 대명사 또한 복수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드라빔의 용도는 분명하지 않으나 구약에서 그것이 일단 점술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됩니다(에스겔21:26; 스가랴 10:2). 그 외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아마 드라빔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가족의 수호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역만리 타향으로 떠나는 라헬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 그리고 번성의 복을 위해 수호신 드라빔을 빼돌렸을 것입니다. 결국 여전히 메소포타미아 우상숭배에 심취했던 그녀였기에 자녀를 얻기 위해 합환채의 신통력에 의존했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창세기 30:14; 참조. 창세기 35:2).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으로 도주했습니다(21절). 이 ‘강’은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쪽으로 오기 위해서는 남서쪽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행진하면 갈릴리 호수 근처의 북부 길르앗에 도착합니다. 그가 도주한 지 삼 일이 지나서야 라반이 알아차렸습니다(23). 여기서 ‘삼 일’은 앞서 ‘사흘 길’의 어법이 그러하듯이 여러 날일 수 있습니다.

 

라반이 추격(23-30)

야곱과 대면한 라반은 매섭게 쏘아 붙었습니다. 그동안 야곱과 딸들에게 한 속임수를 생각하면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들입니다. 거짓말 탐지기가 있다면 들통 났을 말들을 뻔뻔하게 내뱉었습니다. ‘야곱에게 아무 소리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입니다.

23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24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25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26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28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29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30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23-30)

추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야곱이 하란에 도착했을 때 라반은 달려가서 그를 맞았습니다. 이제 야곱이 하란에서 도망가자 다시 라반은 달려가서 그를 붙잡습니다. 둘 다 물욕에 사로잡힌 달리기입니다. 라반은 형제들(아마 친족들)을 데리고 ‘칠 일 길’을 추격하여 길르앗 산에 도착하여 야곱의 대열에 바짝 붙었습니다(다바크 P7; 23). 거의 야곱을 따라잡았던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시어 야곱에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잘잘못을 따지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24). 라반은 앞서 20절에서부터 ‘아람 사람’으로 불립니다. 이로써 야곱과 라반의 근본적인 민족적 간격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두 부류의 별개의 민족을 대표한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조약을 예고다’(Waltke).

참고로 칠 일 길의 ‘칠 일’도 분명히 어림수이거나 꽉 찬 기간을 표현하는 문학적 숫자일 수 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북부 길르앗까지는 직선거리로 무려 450km나 됩니다. 당시 일반적인 여행 속도는 하루 약 24km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반의 추격 속도가 매우 빨랐더라도 거의 보름은 걸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따라서 위의 ‘삼 일’과 ‘칠 일’을 문자적으로 볼 필요 없이 상당하긴 기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라반은 야곱을 따라잡아 야곱이 막사를 설치한 맞은편 길르앗 산에 자신의 막사를 쳤습니다(25). 라반은 야곱을 만나 그를 강하게 질책하며 꾸중합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전쟁 포로처럼 끌고 가고 있다고 비난합니다(26). 그러나 오히려 라반이 그들을 포로로 취급했었습니다.

라반은 그가 자신을 훔쳐갔다고 거듭 비난하면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이별을 통보했다면,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성대한 송별식을 마련해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그의 허세이자 위선이요 거짓말입니다. 그동안 그는 이런 사탕발림으로 야곱을 열 차례나 속였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손자들과 딸들에게 이별의 입맞춤도 하지 못하게 하고 빼돌린 야곱의 행위가 비열하고 어리석다며 구석으로 몰아갑니다. 그는 군사적 행동을 들먹이며 야곱에 대한 힘의 우의를 최대로 과시합니다(29). 그러나 라반은 지난밤 자신에게 현몽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무력 행위를 참는다고 말합니다. 다신숭배자인 그가 야곱의 하나님의 권능을 인지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야곱의 귀향 명분을 인정하면서 야곱을 놓아줍니다(29). 그러나 그가 결코 보낼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아마 가족 수호신으로 섬겼던 드라빔입니다. 그는 야곱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신들’(엘로힘)을 ‘훔쳐갔다고’(가나브) 항의합니다. ‘신들’은 드라빔을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드라빔은 하나의 형상에 결합된 여러 신들의 단일 연합체였을 것입니다. 이로써 라반은 야곱이 훔쳤다(가나브)는 말을 세번 말합니다. ‘내 마음을 훔쳤다’(26); ‘나를 훔쳤다’(27); ‘내 신들을 훔쳤다’(30).

 

라헬이 드라빔을 숨김(31-35)

야곱은 외삼촌이 내 아내들을 억지로 빼앗을까 봐 두려웠노라며 드라빔을 훔친 사람이 있다면 죽여도 좋다고 말합니다. 다행히 찾지 못하고 상황은 종료되지만, 하마터면 라헬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라반이 믿는 수호신이란 스스로 자기 실체를 드러낼 수 도 없는 허망한 존재였습니다.

31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32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3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31-35)

야곱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강력히 변호합니다. 요지는 이 모든 것은 외삼촌 라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내를 라반이 강제로 빼앗아갈까(가잘) 두려워 탈출극을 벌였다고 항변합니다. 여기에는 야곱에게 20년 동안 자행된 라반의 탄압과 부당한 착취에 대한 비난이 들어가 있습니다(창세기 31:36-42). 이러한 악덕 고용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라반의 ‘신들’을 훔쳐간 자가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범죄에 대해 어떤 형벌이 주어졌는지 분명한 사례는 없는데, 왜 야곱이 그 범죄에 대해 죽음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자신의 가족은 결코 도둑질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들의 가슴은 철렁입니다. 범인은 그가 가장 아끼는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자칫 그의 발언은 그녀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라반의 범인 수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야곱과 레아의 막사에 이어 두 여종의 막사까지 모두 뒤졌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라헬의 막사로 들어가서 수색을 진행했습니다(33). 그러나 라헬은 드라빔을 빼돌려 ‘그것들을’(복수 대명사) 낙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라반은 방 구석구석을 모두 찾았으나 허탕을 쳤습니다. 라헬은 자신이 생리 중이라 일어나 영접하여 안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아버지의 이해를 구했습니다. 후대 레위기 15장의 율법에서(19-30절) 생리하는 여자는 부정하므로 격리된 채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됩니다. 레위기 이전이지만, 이미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유사한 정결법이 적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라반은 라헬에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라헬은 최후의 극단적 방법을 쓴 셈입니다. 하지만 이로써 그녀는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 혹은 필사적으로 드라빔을 지키기 위해 드라빔을 부정케 하는 일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 신들은 더럽혀진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되었다.’(Waltke). 이것은 라반의 가족들이 드라빔을 목숨처럼 간직하려 했지만, 정작 드라빔을 대하는 태도나 종교심은 사실은 얼마나 느슨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말씀한 대로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창세기 28:15) 하십니다. 야곱은 아내들에게 고백한 대로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창세기 31:7) 하심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약속한 말씀을 지키시며 응답을 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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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1-01)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음

창세기 31장 1-16절


하나님의 계획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황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머물러야 할 때가 있고, 일어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야곱이 떠나고자 할 때는 머물러 있게 하셨으나,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떠나도록 이끄십니다. 당신은 겸손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오늘의 어려움을 견뎌 내고 있습니까?

 

결국 야곱은 복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신붓감을 찾는다는 명분하에 사실상 맨몸으로 이국땅으로 도피했다는 사실입니다. 텅 빈 야곱이 채워진 야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텅 빔과 채움의 주제는 구약 전반에서 반복되는데, 노예로 이방 땅에 팔려간 요셉에게, 또한 속박의 땅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출애굽기 12:35-36), 그리고 이방 땅에서 텅 빈 몸이 되어 가나안으로 귀환했던 나오미의 삶을 그린 룻기에서도 재현됩니다.

 

거부가 된 야곱을 위협하는 라반의 아들들(1-3)

양 떼를 상대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라반과 그 아들들은 야곱이 의심스러웠습니다. 대대로 목동 일을 해왔지만 이런 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얼룩 유전자 피폭이라도 당한 듯 야곱의 양 떼는 온통 얼룩 물결입니다. 하나님의 편인 자를 어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1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2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3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1-3)

야곱의 성공은 곧 라반의 실패였습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아곱이 라반의 재산을 가져가(라카흐) 거부가 되었다고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야곱의 귀에까지 이 소문이 들렸습니다. 라반의 법적 상속자인 아들들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야곱의 부를 ‘모든 재물을 모았다(카보드 기그)’라 표현하는데, 이것은 현재 야곱이 받은 복이 얼마나 큰지 가늠해볼 수 있게 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달라진 안색을 살피고서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했습니다. 라반 집안 남자들의 야곱에 대한 공동 대응으로 인해 야곱과 라반 사이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며 파국이 감지됩니다. 사실상 가족을 거느린 홀몸의 가장인 야곱에게 상황은 매우 불리하며 위협적입니다.

서사의 흐름으로는 이 순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임재는 분명 아래 10-13절에서 설명된 하나님의 현몽, 곧 라반과 가축 분할 협약을 마치고 야곱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육종법을 적용해서 새끼를 늘려 나가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셨던 사건이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이미 조만간 라반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사실이 그 임재의 말씀이 여기 배치됨으로써 재확인됩니다. 하란(밧단아람) 땅을 떠나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명령에 상응합니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떠나야 하는 결경의 시점을 하나님께서 정확히 알려주셨습니다. 한편, 야곱이 도망 오는 도중 벧엘에서 그분이 나타나셔서 맹세하셨던 약속, 특히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이 이제 이루어집니다(창세기 28:15). 섭리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그 약속을 재확증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 아내에게 자신을 변증하는 야곱(4-9)

라반의 안색이 변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니 남빛이 고울 리 없습니다. 그동안 야곱을 종으로 취급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네 소유를 다 빼앗은 도둑 취급을 했습니다. 라반이나 그 아들들이나 생각하는 게 같습니다. 의심은 불신을 낳고 그것은 곁을 밀어내는 또 다른 폭력입니다.

4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5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6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8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4-9)

야곱은 두 아내를 자신의 목초지로 불러 긴급한 비밀 가족회의를 개최한다. 야곱과 두 아내와의 대화는 4-16절로 구성된 긴 부분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습니다. 위협이 다가오는 절박한 상황에서 이 대화는 비밀스럽게 라반 몰래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이 대화에서 사실상 그동안의 라반의 모든 추악한 행각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사실은 들판에서 야곱의 가정 법정이 열린 셈입니다. 야곱의 긴 변론이 이어진 뒤 재판관이 된 라반의 딸들이 그의 변론을 듣고 아버지에 대한 규탄을 쏟아내며 중벌의 유죄 판결을 선고합니다

5-9절에서 원고 야곱은 피고 라반의 세 가지 죄목과 그에 따른 결과를 재판관인 두 아내에게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1) 라반의 태도가 바뀌었다-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5)

(2) 라반은 열 번이나 속였다-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셨다(6-7)

(3) 임금은 공정했다-다만 하나님이 양 떼를 내게 몰아주셨다(8-9)

첫째는 라반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비난입니다. 재물 때문에 자신을 더 이상 가족이 아닌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라반에 대한 고발입니다. 둘째 죄목으로 그는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속였습니다. 여기서 ‘열 차례’는 실제적인 문자적 횟수라기보다는 꽉 채움을 의미하는 완전수의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에서를 속인 야곱의 속임수가 결국에는 열 배의 보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야곱은 신적 인과웅보의 형벌을 받은 것일 수 있으나 라반의 죄가 면피될 수는 없었습니다. 임금을 변경했다는 것이 급여의 체불과 미지급 또는 삭감인 것은 당연합니다. 라반의 범죄 사실은 사실 그의 두 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그대들도 알거니와’라고 발언하기 때문입니다(6). 흥미롭게도 여기서 야곱은 라반이 최초에 저지른 대형 사기극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이미 뗄 수 없이 한 가족이 되 레아를 배려한 의도적인 침묵일 것입니다. 셋째 죄목은 고정한 협상을 통해 야곱 자신이 큰 손해를 보고 시작한 위탁 사업이었는데, 하나님이 복 주셔서 정당하게 모든 부를 거머쥐었음에도 지금 라반이 그것을 빼앗으려 한다는 고발입니다. 야곱은 라반과의 가축 분할을 위한 방법과 협상 내용을 공개합니다. 그는 자신이 크게 불리했던 조건, 즉 드물게 돌연변이 색을 띄고 출산되는 양과 염소만을 가져가기로 했던 조건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라반은 크게 유리한 조건을 거머쥐었음에도 결국 그것이 그에게 불리한 결과로 이어졌는데, 야곱은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라반의 양들을 빼앗아 자신에게 주신 일이었다고 고백합니다(9). 앞서 우리는 야곱이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내걸 때 그의 목축 경험에서 온 확신에 근거했을 것으로 추론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지혜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셨기에 라반의 모든 것이 그의 수중에 들어온 셈입니다.

 

야곱의 귀향을 지시하신 하나님(10-13)

하나님께서는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거듭되는 악행 속에서도 야곱과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잘 지켜주셨습니다. 비록 열 번이나 라반에게 속았고 해하려는 위협도 받았지만 그때마다 건져주셨습니다. 최근에 야곱이 얼룩무늬와 점 있는 양들, 아롱진 양들을 많이 얻은 것도 야곱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꿈속에서 들려주신 전략을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이 고난 받는 동안 하나님은 쉬지 않고 그 백성을 위해서 복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10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11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10-13)

야곱은 변론을 마치고 특별한 영적 체험이었던 하나님의 현몽을 간증합니다. 월키는 이 꿈과 환상이 그가 라반과 가축 떼 분할 협약을 하기 전에 경험한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야곱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을 알고 라반에게 얼룩진 양 떼만 취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설명입니다. 결국 이 현몽 사건은 시간의 순서가 이탈되어 여기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경우 월키는 스스로 모순된 논리를 펼치는 셈입니다. 야곱의 방법을 교묘한 또 하나의 사기극으로 평가하고는 그 방법은 결국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꿈은 서사의 시간 순서대로 야곱이 라반에게서 떼어 온 양을 치기 시작할 때 발생한 사건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전략에 복을 주시어 얼룩이들이 대거 태어나도록 가축들의 선택적 교배가 이루어질 때 더욱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친히 간섭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야곱이 양 떼를 교배시킬 즈음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얼룩진 숫염소들이(개역개정의 ‘숫양’은 오역) 다른 염소들 위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축의 짝짓기 행위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꿈의 의미는 자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육종 전략에 복을 주셔서 얼룩진 가축들이 우세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염소 떼 환상에 이어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지시한 말씀을 두 아내에게 들려줍니다. 그 사자는 야곱의 탁월한 육종 기술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직접 양 떼의 유전자를 통제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얼룩진 양들이 양 떼를 지배할 것입니다. 이어서 그 사자는 야곱에게 이곳을 떠나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벧엘에서의 야곱과의 만남과 아마도 그에게 맹세한 약속 그리고 그의 서원을 상기시키십니다.

 

아버지를 떠나기로 하는 두 딸(14-16)

사위에 대한 라반 부자의 시기가 야곱 배후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시기가 돼버렸습니다. 좋은 아버지도, 좋은 고용주도 되지 못한 라반. 딸들을 가축과 맞바꿀 만큼 지금은 가축 부자로서 배부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상은 허기를 느끼는 빈자일 뿐 딸도 사위도 곁을 떠납니다.

14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15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16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4-16)

두 딸에 의해 아버지의 범죄에 대한 최종 선고가 내려집니다. 재판관인 라헬과 레아는 또한 추가적인 증인이기도 합니다. 그녀들은 자신들도 아버지의 피해자라고 합세합니다. 자신들도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몫을 받지 못했습니다. 두 여자가 말하는 자신들의 몫은 유산이라기보다는 신부 지참금이나 혼수품을 말할 것입니다. 15절의 ‘우리의 돈(은전)’이 바로 그것을 지시합니다. 그녀들은 아버지에게서 두 여종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두 딸은 자신들이 물건처럼 취급되어 팔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자신들을 딴 식구(외국인)로 취급했습니다. 이로써 라반은 두 딸에게서 중범죄자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녀들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빼앗아 가신 아버지의 재산은 이제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라고 판결 내립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하나님의 지시대로 즉시 도주를 실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듯, 고용할 때 마음과 고용 후 마음이 다릅니다.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 대신, 노동하는 인간의 생산에 가치 우위를 두는 사회 속에서 그동안 우린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왔고 잃는 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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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0-02)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축복

창세기 30장 25-43절


우리는 지나친 경쟁에 집착하지 말고,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속이는 자 야곱은 더 큰 속이는 자 라반에게 20년간 속임 당했습니다. 야곱, 그리고 야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가 된 라반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딸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조카이자 사위인 야곱을 착취하면서 부를 쌓아 가려 합니다. 

 

야곱은 라헬이 요셉을 낳은 직후 귀향을 결심합니다. 그가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운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는 것을 볼 때(30), 그는 14년을 이미 채웠는데 아직 라반이 붙잡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됩니다. 게다가 아마 자녀를 갖지 못한 여자는 스스로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 상태로 고향으로 떠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이 열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이 아들들이 몇 년 동안에 태어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야곱이 귀향을 요청(25-28)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는 본입니다. 야곱은 20여 년 전 이곳에 올 때만해도 아무것 없는 단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가족의 가장이 되어 있습니다. 라반을 위해 양과 염소 떼를 친 세월이 마뜩찮아도, 하나님은 그의 발이 이르는 곳마다 복음 주셨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라. 주님이 꽤 많이 주셨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5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26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27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28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25-28)

야곱은 두 아내를 위해 필요한 14년의 기간을 이미 다 채웠습니다. 그가 31:38에서 20년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두 번의 결혼을 위해 14년을 보내고 이후 6년을 더 라반을 위해 일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야곱은 라반을 찾아가 자신의 처자를 데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겠으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25). 야곱은 자신의 직무를 다했기에 처자들과 모은 재산을 가지고 떠나도 전혀 문제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가장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이 최선을 다해 외삼촌을 섬겼음을 말씀드리며 공손히 공식적인 허락을 받으려 합니다(26).

라반은 야곱으로 인해 자신이 여호와께 복 받았음을 인정합니다(27).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민족이 복을 누린다는 것의 성취입니다. 여기서 라반의 말인 ‘내가 깨달았다’는 오역입니다(27). 동사 ‘나하쉬’는 ‘점술을 행하다’를 뜻합니다. 웬함을 비롯한 몇몇 학자는 ‘내가 부자가 되었다’는 뜻의 동사로 보려 합니다. 왜냐하면 라반의 말로 판단해보건대 그가 번영할 때 점술에 의존했을 것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월키가 말한 대로, 그는 점술에 의존해서 자신의 재산이 왜 늘어났는지 알아보는 어리석은 자일뿐입니다. 결정적으로 나중에 라반은 야곱 일행이 자기 가정의 수호신인 드라빔을 빼돌린 사실을 알고 추적합니다(창세기 31:19, 34-25). 라반은 야곱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면, 자기와 함께 더 머물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원하는 품삯을 야곱 본인이 제시하면 그대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28). 마치 백지 수표를 제시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의 권위를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그는 야곱이 라헬과 레아 그리고 자녀들을 가진 가장으로서 이제 돈을 충분히 벌어서 떠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곱의 능력을 알아보았기에 이대로 떠나보내는 것이 자신에게 큰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 몸값을 제시하여 유능한 일꾼을 붙잡아놓으려 합니다.

 

야곱과 라반의 협상(29-33) 

야곱은 벧엘에서 주신 말씀을 상기하며(창세기 28:15), 라반의 집을 떠나려 합니다. 평생 라반 밑에서 무일푼 불공정 계약의 비애를 맛봤기에, 그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에게 불리해 보이는 제안을 했습니다. 라반은 이런 조건에서도 얼룩진 가축을 빼돌려 야곱의 확률을 낮춥니다.

29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0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31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32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33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것이나 점이 없는 것이나 양 중에 검지 아니한 것이 있거든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29-33)

협상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종처럼 몸을 숙여 행동하던 야곱이 이제 당당히 목소리를 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 삶이 변화되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속임수나 꼼수를 쓰지 않고 거드름 피우는 일 없이 진심으로 성실하게 외삼촌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 사실을 라반도 잘 알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자신 때문에 라반의 적은 가축 떼가 크게 번성하여 라반이 거부가 되었음을 강조합니다(29-30). 야곱은 자신의 발이 가는 곳마다 라반이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복의 성취합니다.

야곱은 ‘나는 언제 내 집을 위해 뭔가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자신은 라반을 위해 일했을 뿐, 정작 자신의 수입을 제대로 얻지 못해 가정의 재정을 채울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라반은 다시 야곱에게 원하는 몸값을 묻습니다. 야곱이 제시한 조건은 놀랍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양 떼를 계속 돌보는 조건으로 자신의 요구사항 한 가지만 들어주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라반이 거절하기 힘든 매력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참고로 개역개정의 ‘양 떼’는 앞서 말한 대로 ‘촌’인데 이것은 양과 염소를 포괄하는 소형 가축 떼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편의상 이것을 ‘양 떼’로 쓸 것입니다. 야곱은 양 떼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만 가려서 자신의 품삯으로 삼겠다고 제안합니다. 정확히는 양 떼에서 온몸이 흰 것들은 모두 제외되고, 염소 떼에서는 온몸이 흰 것과 검은 것 둘 다 제외됩니다. 따라서 양은 얼룩무늬를 가진 것(점박이와 얼룩이)과 검은 것(진갈색 포함)이 야곱의 것이며, 염소는 얼룩무늬를 가진 것(점박이와 얼룩이)이 야곱의 것으로 분류됩니다(32). 우리는 온통 털이 하얗거나 검은 가축을 제외하고 35절의 ‘얼룩무늬 있는 것’(아마 줄무늬)을 포함하여 색깔이 뒤섞인 털은 모두 ‘얼룩이’로 칭하기로 합니다. 또한 편의상 검정색과 진갈색의 털은 둘 다 ‘검은색’으로 칭하기로 합니다. 야곱은 그런 얼룩이들만(양은 검은 것 포함) 솎아내서 자신이 품삯으로 삼겠다고 제안하며 지금 바로(오늘) 라반의 양 띠 사이를 두로 돌아다니며 그것들을 가려내겠다고 말합니다(32). 이어서 후일에 만일 라반이 조사하여 다른 가축이 자신의 가축 떼에 끼어 있다면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합니다(33). 당시 목자들의 입금은 보통 새로 태어난 양/염소 새끼의 20%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들은 대부분 하얗기 때문에 얼룩진 양과 검은 양은 매우 드뭅니다. 또 염소는 희거나 검은 염소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얼룩진 염소는 드물을 것입니다(실제로 양들 중에는 검은 양과 진갈색 양이 존재한다). 라반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야곱의 제안을 거의 횡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제안을 수용하는 라반(34-36)

라반은 자신은 사랑스럽게 여김 받길 바라면서(30:27) 야곱에게는 너무도 야박했습니다. 이번에도 야곱의 제안이 조카에게 터무니없이 불리할 줄 알면서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뿐 아니라 얼룩무늬와 점 있는 숫염소와 아롱진 점이 있는 암염소와 검은 양은 야곱의 무리에서 사흘 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두어, 야곱의 소유가 아예 생기지 못하도록 차단했습니다. 야곱을 두고두고 부려먹겠다는 고약한 심보입니다.

34라반이 이르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 35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36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34-36)

물욕에 사로잡힌 라반의 음흉한 모습이 다시 드러납니다. 그는 즉시 자신의 가축 떼 중에서 얼룩이를 모두 속아낸 뒤 자신의 아들들에게 맡겼습니다(35). 그리고 야곱에게는 양 중에서는 약속대로 흰 양만을, 염소 중에서는 흰 염소와 흑염소만 건네주었습니다. 얼룩이는 한 마리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백지수표를 건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에 일절 응대하지 않고 그 조건을 수용합니다. 이 순간 야곱에게서 물질에 초연했던 조부 아브라함이 보입니다. 라반은 야곱을 사흘 길이나 멀리 보내 점박이와 얼룩이가 많은 자신의 가축 떼와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격리합니다. 지혜로운 야곱은 양을 치면서 유전 법칙을 나름 깨우친 것으로 보입니다. 라반은 야곱의 지혜를 능가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장인과 멀리 격리된 환경이 오히려 그에겐 최적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는 가축들을 인위적으로 교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유전학 지식을 활용하여 원하는 개체를 늘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양 떼의 번성(37-43)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타이밍입니다. 야곱에게는 온통 흰 양과 염소뿐이니 출생을 통해 얼룩진 새끼를 얻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두 아내를 통해 태의 문을 여시는 분이 주님임을 경험했기에, 주께서 허락하시면 가능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주의 손길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37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37-43)

사르나(Sarna)는 버드나무, 살구나무(아몬드 나무), 그리고 신풍나무, 이 세 종류의 나무는 특수한 약 성분을 함유하여 의학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짐승의 발정기를 앞당겨 교배를 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지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나무들을 약간 다른 용도로 사용합니다. 그는 세 종류의 푸른 나무 가지들을 꺾어온 뒤 껍질을 벗겨 하얀 가지(라반)들을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빨간 죽으로 에돔(즉, 빨강)을 갈취했던 것처럼 이제 흰색 가지(라반 12)를 이용해 라반을 갈취합니다. 야곱은 그 나뭇가지들을 양 데가 물 마시러 오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놓았습니다. 그 가지 앞에서 양과 염소들이 교미를 하고 새끼를 별 때 얼룩진 양과 검은 양들이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분명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미신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배 방법에 대한 개론적 설명이고 이 방법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 내용이 41절부터 이어집니다. 매우 튼튼한 양과 염소는 잡종인 녀석들이 많은데 잡종끼리 교배할 경우 열성의 색깔 유전자의 발현으로 얼룩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야곱은 튼튼한 양들이 교배할 때가 되면 나뭇가지들을 세워 그 앞에서 그것들끼리 교배를 시켰고, 약한 양들에게는 나뭇가지들을 세우지 않고 따로 그것들끼리 교배를 시켰습니다. 결국 색깔이 일관된 순종은 약했고 색깔이 얼룩진 잡종은 강했기에 자동적으로 약한 양/염소는 라반의 것이 되고 강한 양/염소는 야곱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라반은 알지 못했던 지식, 곧 야곱이 목축 경험에서 체득한 유전학적 지식에 따른 것으로 추론됩니다. 야곱은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남녀종, 낙타와 나귀의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하나를 포기하면 열을 주시는 희한한 계산법을 적용하시면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일한 우리의 품삯을 챙겨주시는 분도 앞으로 얻게 될 우리의 분깃을 관리해주시는 분도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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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0-01)


야곱의 집에 출산 전쟁

창세기 30장 1-24절


 우리는 내일 일도 알 수 없고, 오늘의 의미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생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종종 지난날을 돌아볼 때, 우리는 무릎을 치며 이때를 위함이라고 고백하며 찬양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의 고난을 묵묵히 이겨 내가면서 승리해야 합니다.

 

라헬은 오래도록 임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을 무려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야곱에게 달려갔습니다. 언쟁의 시작됩니다. 야곱과 라헬이 결혼식에서 사랑하는 모습 이후 두 사람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부부싸움입니다. 그녀는 야곱에게 자신도 자식을 낳게 하라며 만일 자식을 낳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1). 이후 야곱의 두 아내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출산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의 두 아들(1-8)

인간의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레아의 아픔이 좀 해소되는가 싶더니 라헬의 질투가 기승을 부립니다. 레아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선물이 라헬에게는 도리어 상처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사랑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붙임 콤플렉스 앞에선 열등감에 시달리기 일쑤였습니다.

1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1-8)

레아의 연달은 출산 소식과 더불어 더욱 낙심이 커진 라헬은 야곱을 찾아가 하소연하며 불임은 남편 탓이라고 떼를 씁니다. 애를 낳지 못하면 자신은 죽을 것이라고 겁을 줍니다. 이것은 자살 의사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낙심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며, 또한 무자녀로 인해 자신이 낙심하여 병이 들거나 쇠약해져 시름시름 죽어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나중에 아이를 낳는 중에 죽습니다(창세기 35:16-19). 여성에게 불임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종종 하나님의 저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임은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경험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사라나 리브가에 비해 인내심이 전혀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라헬은 지금 불임의 책임을 남편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야곱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분을 내다’의 히브리어 ‘하라 아프’는 문자적으로 ‘~의 코/콧구멍이 타오르다’입니다. 야곱이 매우 크게 화를 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말하는 야곱은 불임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2). 태를 열고 닫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임신은 사람의 통제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라헬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과 인내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질투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혀 성급히 행동합니다. 자신의 몸종 빌하의 몸을 빌려 자식을 얻고 야곱의 총애를 되찾아 오고자 합니다. 그녀는 ‘내가 그를 통해 세워질 수 있다’(개역개정,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고 말합니다(3). 이것은 자신이 대리모의 아들을 통해 야곱의 가문이 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란 기대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아내’로 주었고 야곱은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습니다(4). 여기서 ‘아내’는 후처나 첩을 의미합니다. 첩으로 불린 여자들은(창세기 16:3; 25:1; 30:4; 35:22) 동시에 흔히 아내로 호칭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족장 시대 이후 첩은 아내와 더 이상 동의어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지금 두 시녀 빌하와 실바를 차례로 법적인 후실 개념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야곱은 지금 합법적인 첫째 아내 레아를 통해, 그가 그녀를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합법적인 장남이자 상속자인 르우벤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네 명의 아들이 태어났기에 이미 자신의 혈통 문제는 해결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현재 라헬의 입장에서는 본인을 통한 후대의 가문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빌하는 야곱에게서 단을 낳았습니다(5). 라헬은 자신이 원하던 대로 빌하가 아들을 낳자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6). 단을 낳은 후 드린 감사의 기도를 볼 때 그녀가 인내심과 신앙심이 부족하긴 했어도 임신 문제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의 이름도 ‘하나님께서 판결하셔서 억울함이 풀렸다’는 뜻으로 단이라 지었습니다. 빌하는 이어서 둘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해서 이겼다’고 선언하고 아들 이름을 ‘경쟁’, ‘씨름’이란 뜻의 납달리로 짓습니다. ‘크게 경쟁하다’의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경쟁/씨름으로 경쟁했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씨름’으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서 ‘하나님께서 관여하신 씨름’으로 혹은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라헬의 열심 있는 기도를 뜻한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여러 모로 어색해 보이며 대리모에 의존하는 라헬의 신앙이 그 정도 경지는 아닌 듯합니다. ‘엄청난 경쟁을 했다’가 타당한 해석입니다.

 

레아의 여종 실바의 두 아들(9-13)

자긴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긴장감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갈수록 팽팽해져 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두 여인의 아들 경쟁은 자신의 여종들까지 동원하여 2차전을 이어갑니다. 추월한 자는 더 승점을 올리기 위해, 추월당한 자는 역전하기 위해 내달립니다.

9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10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11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12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9-13)

두 아내의 경쟁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레아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넷째 유다를 낳은 뒤 잉태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녀의 태가 닫혀서가 아니라 남편 야곱의 총애를 잃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레아는 라헬이 자기 시녀를 통해 두 아들을 낳은 것을 보고 자신의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들여보냈습니다(9). 실바에게서 다시 아들이 태어났으며 레아는 그의 이름을 ‘복 되도다’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갓이라 지었습니다. 실바는 둘째 아들도 출산했습니다. 레아는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할 것이다’라고 찬양하며 ‘기쁨’, ‘행복’을 뜻하는 아셀이란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레아가 추가로 두 아들과 딸(14-21)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기대가 이뤄지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사람에게서 자신의 무력함과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고백을 받아내십니다. 시종을 통해서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 라헬과 레아가 이번에는 최음제로 쓰이던 합환채를 사용합니다.

14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16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17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19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21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14-21)

언니 레아는 승승장구합니다. 아마도 경쟁이 약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즈음, 합환채 사건이 발생합니다. 큰 아들 르우벤이 들판에 나가 합환채를 채집해 왔습니다. 합환채는 지중해의 다년생 식물로 구토제나 통변제로 쓰이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무엇보다 성욕을 일으키는 최음제, 또는 임신 촉진제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참조. 아모스 7:13). 이 약재에는 마술적 요소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성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별명이 ‘합환채의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약초는 ‘밀 거둘 때’ 채집했는데, 보통 팔레스타인의 밀 수확기는 음력 3월(양력 5월)의 봄철입니다. 이 식물을 두 아내가 서로 탐내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이것이 임신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전히 라헬은 임신을 못한 상태이며, 레아는 출산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라헬은 레아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요청합니다(14). 그녀는 다시 마술적 혹은 인위적, 의료적 방법을 써서라도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라헬은 합환채의 거래 조건으로 레아에게 야곱과의 동침을 양보하겠다고 말합니다(15). 아마 레아는 야곱과 오래도록 잠자리를 못하고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녀의 출산 중단의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입니다.

여기서 라헬이 비록 아들이 없지만, 잠자리에서 야합의 총애를 받으며 실제적 권력을 쥐고 있음이 확인됩니다. 합환채 교환과 더불어 레아가 남편과 동침할 권리가 확보되었습니다. 레아는 ‘내가 당신을 샀다(사카드)’는 말로 고용주를 자처합니다. 라반과 야곱의 혈육 관계가 상업적 거래를 통해 고용 관계로 변하더니 이제 두 딸과 야곱의 부부 관계가 합환채 거래를 통해 고용 관계로 변합니다.

그날 밤 야곱은 레아와 동침하였고 레아의 다섯째 아들 잇사갈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소원으 들으셔서 야곱을 통해 다섯째 아들을 낳게 하십니다. 합환채를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임신은 궁극적으로 인간적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이 다시 한 번 증거 됩니다. 분명 레아의 소원은 끊어진 남편과의 잠자리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덤으로 그녀는 또 다른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품삯/보상을 주셨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그 아들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불렀습니다. 레아는 이어 여섯 째 아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는 남편이 ‘나를 영예롭게 하리라(자발)’(개역개정의 ‘나와 함께 살리라’보다 더 타당함)고 노래하며 아들의 이름을 ‘영광 받음’, ‘찬양 받음’을 뜻하는 스불론으로 짓습니다. 레아의 출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심판’, ‘변론’의 뜻을 담은 디나로 지었습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음(22-24)

공교롭게도 이 숨 막히는 전쟁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한 방향은 아니었더라도 두 여인의 아들 경쟁을 통해 그분의 약속(창세기 28:14)은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잔잔하고 평온한 일상이 아닌 아옹다옹하는 상황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일하십니다.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22-24)

레아의 연이은 출산으로 라헬은 더욱 낙심이 컸을 것입니다. 합환채를 쓰지 않은 레아는 연달아 임신을 했고 합환채를 쓴 자신은 여전히 불임이었습니다. 태는 합환채가 아닌 하나님께서 여신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습니다(자카르).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기억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구원 행동을 시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창세기 8:1; 19:29; 출애굽기 2:24). 하나님께서는 라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의 태를 여셨습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고 하나님께서 비로소 자신의 수치를 씻어내셨다고 찬양하며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었습니다. ‘그가 더 하신다’는 뜻의 이 이름에는 추가적인 자녀에 대한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더해진 아들, 곧 베냐민의 출생을 예고합니다.


 부러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비교는 자신을 유리 감옥에 가두어 그 수준에 머물게 합니다. 욕망의 벽이 투명한 탓에 자신이 감옥 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고 주 안에서 축복하는 성숙함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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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9-02)

 


사기 당한 사기꾼

창세기 29장 21-35절


우리는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슬퍼하기보다는,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새로운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 사람은 자신의 행동은 쉽게 잊어도, 당한 사람에게는 두고두고 상처가 되는 법입니다. 자신의 행동에서 실수를 모른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보다 더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야곱이 하란에 온지 7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찾아가 기간을 채웠으니 라헬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이미 그는 라헬을 ‘내 아내’라 칭하는데, 당시 관례로 약혼 관계는 이미 실질인 부부 관계로 인정되어 다른 남자가 그 여자를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라반의 대답은 언급되지 않고 단순히 그가 곧바로 결혼식을 진행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22). 라반의 무반응을 통해 어쩌면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미 라반이 그 결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암시를 주는지 모릅니다.

 

사기 결혼을 당한 야곱(21-27)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야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정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생깁니다. 또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내하게 됩니다.

21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21-27)

만 7년 기간을 채운 뒤 야곱은 라반에게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소서’라고 말한 동사 ‘야하브’는 구약에서 아주 절박한 요구를 할 때만 나타납니다. 그가 얼마나 라헬을 갈망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구약에서 이미 혼전에 남자는 여자에게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여자는 물론 남자 또한 혼전 순결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라반은 결혼식을 열고 사람들을 초청해 결혼 잔치를 벌였습니다. 결혼식 축하연은 1주일간 계속되었습니다(27; 사사기 14:17). 결혼식 당일 저녁 라반은 라헬이 아닌 큰 딸 레아를 얼굴을 가린 채 데려갔으며, 야곱은 그녀를 데리고 신방에 들어갔습니다(23). 라반은 레아를 사기극으로 시집보내면서 관례대로 여종 실바를 일종의 혼수품으로 딸려 보냈습니다(24). 당시 관례로 그런 혼수품과 여종은 여주인의 개인 소유물입니다. 라반은 야곱을 의도적으로 포도주에 취하게 했을 것이며 신부의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심야의 어둠을 이용하여 그를 속이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은 라반의 누이 리브가가 털가죽 피부와 에서의 옷, 그리고 맛있는 죽으로 이삭을 속인 것에 비견됩니다.

라반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무래도 큰딸 레아를 더 편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그녀가 큰딸이어서만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었을 듯합니다. 예를 들어, 동생 라헬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당히 버거웠을 주로 물 긷는 역할을 했던 목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 집안에 노동력이 부족해서 라헬의 역할이 상당히 컸음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목축은 신뢰하기 어려운 종이나 삯꾼에게 맡기지 않고 가족들이 직접 감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아마 언니 레아는 집안에서 주로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기질과 성향의 차이로 인해 들판을 누비던 에서와 집 안에서 지내길 좋아하고 조용했던 야곱의 생활 방식과 비교됩니다. 활동이 왕성한 에서가 남성적 매력이 더 있었다면, 목축을 하는 라헬은 햇볕에 그을려 오히려 여성적 매력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야곱이 우물가에서 목축을 하던 라헬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은 이유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레아는 주로 집 안에서 지냈다면 여성미를 가꾸는 데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라반이 혼기가 먼저 찬 레아를 시집보내기 위해 집 안에 두었는지 모르나 라반이 큰딸을 편애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아는 야곱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라헬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도 아닌 듯합니다. 라헬이 우물가의 첫 만남에서 리브가와 같은 친절을 베푼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야곱이 라헬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물 길으러온 리브가와 물 먹이러 온 라헬은 역할이 달랐으니 당연했을 것이다), 오히려 라헬이 처음부터 야곱에게 호감을 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라반의 집에서 지낸 한 달 동안 야곱은 그녀의 미모와 매력을 발견하고 그녀의 내면을 살피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대조가 엿보입니다. 이삭은 큰아들 에서를 편애했고 라반은 큰딸 레아를 편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역전되고 신적인 인과응보, 혹은 자업자득의 원리가 실현됩니다. 야곱은 이삭과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얻었으나, 여기서는 야곱이 라반과 레아에게 속아 라헬을 얻지 못합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왜 자신을 속였냐고 따집니다(25). ‘속이다’라는 동사는 에서가 야곱의 행위를 표현한 명사 ‘속임수’의 동사형입니다. 동일한 속임수를 이제 야곱이 당합니다. 위장술을 사용했던 야곱이 동일한 위장술로 당합니다. 원조 사기꾼이 도리어 사기를 당합니다. 장남 에서는 차남 야곱에게 사기극과 위장술로 지위를 뺏겼으나, 이번에는 장녀 레아가 차녀 라헬에게서 사기극과 위장술로 지위를 지킵니다. 라반은 위선적이고 교활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는 ‘우리 지방에서는’ 둘째를 첫째보다 먼저 주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받아칩니다(26). 하지만 그가 정직한 인물이었다면 처음부터 야곱과 계약할 때, 그런 관례를 말해줬어야 합니다. 아마 라반은 어디서 들었는지 야곱의 사기극 전말을 알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가 정곡을 찔러 ‘우리 지방에서는’ 둘째를 첫째보다 먼저 주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희 집안에서는 둘째가 첫째 자리를 차지했을지 몰라도 여기서는 턱도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라반은 허를 찔러 야곱의 약점을 공략함으로써 그가 대응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야곱은 더 이상 항변하지 못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라반은 큰소리치며 말합니다. ‘레아를 위해 7일을 채우라’(27). 이는 당시에 결혼식이 7일간 계속 진행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마 ‘7’은 완전수로서 결혼의 완성을 뜻하는 기간일 것입니다. 태어난 지 7일이 지나 8일째에 남자 신생아가 할례를 받는 이유도 동일한 숫자의 신학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라반은 7일의 결혼 축하연이 끝나면 라헬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27). 이것은 야곱이 라헬을 위해 다시 7년 봉사를 하면 그 후에 그녀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시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삼되, 대신 신부 값으로 7년간의 봉사를 필히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라반은 이렇게 야곱을 혈육이 아닌 고용인처럼 부리며 착취합니다. 라반은 심지어 자신의 딸들도 이익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딸들의 이름은 각각 ‘암소’와 ‘암양’을 의미하는데 목축을 하는 가족에게 적절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라반은 레아와 라헬을 자신이 기르는 가축처럼, 말하자면 매매하려고 내놓은 물건처럼 취급합니다.

 

라헬을 얻은 야곱(28-30)

신부에게 가장 기쁘고 행복해야 할 날이 가장 슬프고 잔인한 날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아내로 산다는 것, 그것도 동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산다는 것, 더욱이 7일 후면 사랑받는 아내의 자리마저 동생 라헬의 몫이 돤다는 것, 레아의 마음 밭은 이미 피밭입니다.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28-30)

야곱이 레아와의 결혼 축하연을 정상적으로 마치자 7일 후에 라반은 약속대로 라헬을 그에게 아내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라헬을 위해서 여종 빌하를 혼수품으로 딸려 보냈습니다. 야곱은 다시 라헬과 잠자리를 가졌고 그는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했기에 다시 7년 동안 라반을 인내하며 섬겼습니다. 여기서는 7년을 며칠처럼 생각했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나중 7년의 세월이 처음 7년과는 분명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아가 네 아들을 낳음(31-35)

하나님의 사람은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삶이 아닌 대화와 양보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레아의 마음을 헤아려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이름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번째 자녀를 얻고 나서야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야곱의 아내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하나님의 신부 레아로 정체성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레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31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31-35)

레아는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원문은 ‘미움을 받았다’인데 이것은 남편의 감정적인 배제를 뜻합니다. 그러나 여러 번역들이 이것을 ‘사랑을 받지 못했다’로 순화합니다(NIV; NASB).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태를 먼저 여시어 연달아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자녀를 갖지 못했습니다. 레아가 낳은 아들들의 순서는 각각 르우벤, 시므온, 레위 그리고 유다입니다. 그녀는 각각의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의미 있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처음 세 아들의 이름에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는 뜻을 담았습니다: 르우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셨다’; 시므온,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 레위, ‘내 남편이 나와 연합할 것이다’; 유다, ‘내가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레아가 아들들에 부여한 작명의 의미들은 그녀가 얼마나 남편을 사랑했는지 엿보게 합니다. 그녀는 넷째 아들 유다의 이름에는 하소연이 아닌 찬양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넷째 아들 유다와 더불어 그녀의 출산이 멈췄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불임의 상태가 되었다는 뜻일 수 있으나 남편 야곱과의 잠자리가 중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창세기 30:14-20). 어쨌든 넷째 아들과 더불어 그녀의 한이 풀린 듯하며 그녀는 비로소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유다는 장차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지파로 부각되어 유다의 뿌리에서 다윗이 출현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술책에 야곱은 사기 결혼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치 않던 아내를 통해 섭리하시면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야곱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두고 일하십니다. 레아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랑 안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선입니다. 비록 지금은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도 반드시 깨닫게 될 날, 회복될 날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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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9-01)

  


야곱과 라헬의 우물가 사랑

창세기 29장 1-20절


성도들이라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 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에 서 있는 자에게만 부어주십니다. 하란은 향한 야곱의 여정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가까스로 그곳에 도착하더라도 새로운 험로가 펼쳐질 것입니다. 라반과 야곱, 라헬과 레아의 갈등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어떻게 개입하시겠습니까, 어떻게 그를 향한 약속을 이루시며,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겠습니까!

 

야곱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떠납니다. 그는 낙타를 타지 않고 도보로 직선거리 600km가 넘는 거리를(아마 실제 여행 거리는 800km 정도 될 수 있음) 여행 중입니다. 왜 이삭이 신부를 구하도록 야곱을 보내면서 신부 값을 실어 나를 낙타와 종들의 대동 없이 혼자 보냈게습니까? 아마 이삭은 에서를 배려하거나 그의 눈치를 봤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 규모 있는 야곱의 여행단은 형 에서를 더욱 견디기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 근처에 도착(1-8)

성도는 구별된 자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성도들은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로서 영적인 순결을 지녀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악과 섞일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1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1-8)

이삭은 야곱에게 아브라함의 복으로 축복하면서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가 아니라 그 친족 중에서 아내를 맞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을 고향으로 보냈듯이, 이삭도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섞이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출발을 히브리어로 독특하게 ‘발을 들었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며, 그가 먼 거리를 낙타도 타지 않고 일행도 없이 홀로 도보 여행 중임을 시사합니다. 그는 ‘동방 사라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가 하란 근처의 들판에 도착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들판에 한 우물이 있고 주변에 목자들이 거느린 세 무리의 양 떼가 누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현재 목자 세 명이 각자의 양 떼를 몰고 왔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관례에 따라 그들은 약속된 목자들이 각자의 양 떼를 몰고 모두 모이면 우물을 열어서 공평하게 물을 먹였습니다.

‘큰 돌’로 우물 위를 덮어놓았다는 언급은 분명 다분히 의도적입니다(2). 이것은 나중에 야곱이 라헬 앞에서 의도치 않게 이 돌을 홀로 치울 만한 기력을 가진 능력 있는 남자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돌이 너무 컸기에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나중에 10절에서 야곱이 그 돌을 라헬 앞에서 혼자 치운 것은 갑자기 괴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갑자기 그런 놀라운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의 이전 모습이나 이후의 모습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영리하고 계획적이고 경영에 능한 사람일 뿐 놀라운 육체적 능력은 전혀 그의 특징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야곱 이야기에서 그의 갑작스런 괴력은 너무나 엉뚱할 뿐입니다. 이 문제는 그가 돌을 치우는 10절에서 더 살피기로 합니다.

야곱과 목자들의 대화는 전반적으로 단순하고 무료합니다(3-8). 야곱은 그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며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습니다. ‘형제’라는 호칭은 전형적인 접근을 위한 친근감의 표시입니다. 이러한 무뚝뚝한 단답식 대화를 통해 저자는 현재 야곱이 어느 곳에 와 있는지 알려주면서 결국 하나님의 섭리로 하란 사람과 만났으며 또한 정확한 시점에 라헬을 만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6).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야곱의 여정에 그분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목자들의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홀대는 곧 있을 라헬의 따뜻한 환대를 더욱 부각하는 역할을 합니다. 야곱은 그들에게 아직 해가 지려면 멀어서 가축 떼가 모일 시간이 아닌데 양 떼에게 물을 빨리 먹이고 다시 양 떼를 몰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의향이 없다고 하면서 목자들이 양 떼를 몰고 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말합니다(7-8). 그들이 이렇게 예정 시간보다 훨씬 빨리 온 이유는 아마 도착한 순서에 따라 선착순으로 물을 먹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과 라헬이 만남(9-14)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정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생깁니다. 또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내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야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9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11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13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14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9-14)

야곱과 목자들의 대화는 더 이어진 것 같습니다. 우물을 여는 시간까지는 상당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양 떼를 몰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그가 하란의 목자들을 거기서 만나 라헬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는 물을 얻어먹고 계속 길을 갔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녀가 목자들이 말한 라반의 딸인 것을 인식하고 가까이 가서 돌을 옮기고 그녀가 몰고 온 양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 야곱이 아브라함의 종과 달리 기도와 찬양을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라헬과의 만남은 덜 극적이고 신비적이며, 이어지는 라반과의 만남에서도 일이 꼬이고 고난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여행과 만남이 지닌 특징을 간과한 지나친 단순화로 보입니다. 앞서 그는 아브라함의 종과 달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체험했기에 영적인 충만함과 민감함 속에서 여행 중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기도를 통한 섭리로 인도를 받았으나 야곱은 임재를 통한 섭리로 인도를 받습니다. 섭리의 방식과 과정이 다를 뿐 야곱의 경우도 전혀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극적인 섭리가 작동 중입니다.

10절에서 야곱이 돌을 치울 때 저자는 별다른 인상적인 묘사를 하지 않고 ‘큰 돌’이라고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돌’로 칭할 뿐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무슨 괴력을 발휘했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으며 오로지 야곱과 라헬의 조우와 야곱의 한 여성에 대한 친절과 배려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우물 덮개용 돌은 실제로는 다른 목자들이 합세해서 치웠거나, 아니면 그 돌은 분명 상당한 무게의 돌이긴 했더라도 성인 한 사람이 감당할 정도였을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의도적으로 ‘큰 돌’로 묘사되었던 것은 야곱의 자상함과 야곱이 남자로서의 능력이 중문하다는 것을 라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앞서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나 여기서는 야곱이 라헬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야곱은 양 떼에게 물을 먹인 뒤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이것은 멀고 힘든 여행 끝에 극적인 친족 상봉에 대한 기록의 눈물로 이해됩니다. 또한 이 눈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때서야 라헬에게 자신을 상세히 소개하며 그녀의 혈육임을 밝힙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처음 봤을 때와 달리(창세기 24:16), 여기서는 라헬에 대한 첫인상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라헬은 뙤약볕 아래서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때 등장한 라헬에게서는 여성적 매력이 부각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라헬은 즉시 아버지 라반에게 달려가 야곱의 도착을 알렸습니다. 라반은 조카 야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달려와서 그를 영접했습니다(13). 아마 그는 앞서 아브라함의 종이 낙타 열 마리를 동반해서 방문했을 때 막대한 재물을 함께 가지고 왔음을 상기하고 이번에도 그런 물욕에 사로잡혀 급히 달려 나왔을 개연성이 큽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맨몸의 여행객인 야곱은 라반에게 얼마나 실망스러웠겠습니까? 비록 라반이 겉으로는 야곱을 안고 입 맞추며 그를 맞아들이긴 하나 이미 빈 몸으로 확인된 야곱을 그가 진심으로 환대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모든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장자권이나 그것을 획득하게 된 과정 등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그저 이삭의 아들임을 확인해 주면서 신붓감을 구하러 왔다고 말했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라반이 야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너는 정말 내 혈육이구나’라고 말하며 비로소 그의 거주를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아크)은 반색과 환영의 뉘앙스가 아닌 ‘진짜네’와 같은 심드렁한 감정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결국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한 달을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함(15-20)

하나님의 사람은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삶이 아닌 대화와 양보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살펴서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원망 대신 감사의 기도를 하길 바랍니다.

15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16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15-20) 

한 달 동안 야곱을 지켜본 라반은 음흉한 계산을 끝낸 것으로 보입니다. 신부를 찾으러 온 야곱이 라헬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을 간파했을 것입니다. 그는 품삯으로 무엇을 주길 원하는지 물으면서 우회적으로 야곱을 자신의 목적으로 유도합니다. 그는 이 순간 야곱에 대한 혈육의 관계를 끊고 품삯을 주는 삯꾼으로 전락시킵니다. 라반에게는 큰딸 레아와 작은 딸 라헬이 있었습니다. 라반의 입장에서는 야곱이 괜찮은 신랑감이고 집안도 매우 좋기에 딸들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일이 나쁘지 않다고 결론내린 것 같습니다(19).

레아는 시력이 약했습니다. 문자적으로 ‘레아의 두 눈이 약했다(라크)’인데 이것은 시력보다는 눈에 총기가 없음을 뜻할 것입니다. 이삭에게서 보듯이 흔히 시력은 영적 분별력을 암시하기도 하므로 어쩌면 이것은 은연중에 내려진 그녀의 신앙과 분별력 또는 총명함에 대한 평가인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라헬은 곱고 아리땁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라반은 7년 노동의 대가로 라헬을 주기로 약속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가 라헬을 주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것에서도 드러납니다(26). 그런데 그는 대놓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7년이 매우 긴 세월이지만, 야곱은 라헬을 위해 기쁘게 불과 며칠을 일한 것처럼 7년 동안 라반을 위해 일했습니다.


 등불(시 119:105)은 헤드라이트와는 다릅니다. 목적지까지 속 시원히 비추진 않지만, 발걸음 하나하나를 내딛게 하는 안전한 빛이 되어줍니다. 하나님의 길을, 마음을, 존재를 일깨우시는 만큼 우린 안심하고 나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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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8-02)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창세기 28장 10-22절


 우리는 외롭고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항상 함께하시며 신실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진심으로 섬기고 신뢰해야 합니다.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라반의 집이 밧단아람이 아닌 하란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브두엘과 라반의 집을 강조할 때는 밧단아람, 29:1에서 야곱의 여행 방향에 주목할 때는 ‘동방’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란’이란 지명을 쓰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떠나온 지역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은 결국 아브라함이 떠나온 곳을 그대로 역행하여 여행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본인이 직접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늘 사다리(10-12)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탑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오직 혼자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들과 언약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며 저녁에 꿈을 꿉니다.

10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10-12)

야곱은 에서를 피해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 집이 있는 하란으로 갑니다. 도중에 어느 곳에 도착해 해가 지자 밤을 보내기 위해 여장을 풀었습니다. 저자는 그곳을 ‘그 장소’(하마콤 디)로 부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단순히 ‘한 장소’를 의미한다고 말하나 그 경우 관사 없이 ‘마콤’을 쓰는 것이 관례입니다(창세기 24:23,25; 출애굽기 21:13; 신명기 1:33). 분명 저자는 그곳이 특별한 장소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돌 하나를 취해 베개 삼고 누워 잠들 없습니다(11). 혹자는 돌이 베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맡에 두었을 뿐 베개로 삼지는 않았다고 말하나 애굽에서는 금속으로 만든 베개가 있었습니다. 베개용이라면 그 돌은 그리 큰 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사실 많은 학자들의 견해대로 쌍방향 통행이 가능한 층계가 분명해 보이나 우리는 편의상 전통적인 견해대로 사닥다리로 간주합니다. 사닥다리에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천상과 지상을 오가는 천사들의 분주한 임무 수행 장면으로 보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13). 참고로 예수님은 장차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자신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현재의 하나님이 계신 자리에 자신을 놓으셨습니다(요한복음 1:51).

 

야곱에게 주신 여호와의 약속(13-15)

초등학생들을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로 서열을 정한다는 이 관기의 시대에, 내가 누운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적인 줏대를 세우고 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모든 백성들을 보호해주십니다. 이러한 약속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13-15)

사닥다리 위에 계신 여호와께서 야곱을 향해 자신을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분이며 그와 언약을 맺고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던 그 하나님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분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이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계보가 야곱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확증하고 계시며 더불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모든 약속이 야곱의 것이 될 것임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야곱은 어머니와 꾀를 내어 에서와 이삭에게서 그 권리를 훔쳐냈습니다. 이삭은 속았지만 야곱의 합법적 권리를 승인하고 마침내 그에게 아브라함의 약속이 승계됨을 선언했습니다(창세기 28:3-4). 이제 그것을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인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 대한 약속들을 구체적으로 확증하십니다(13-14). 앞서 12:1-3,7의 반복입니다. 또한 더욱 흥미롭게도 아브라함이 롯과 결별한 후 현재의 장소인 벧엘로 거주지를 옮겼을 때인 13:14-16에서 약속된 복들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땅의 선물과 후손의 번성, 만민이 야곱의 후손을 통해 받을 복, 그리고 보호와 동행입니다. 먼저 그가 누워 있는 땅, 즉 가나안 땅을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 줄 것입니다. 후손은 번성하여 사방 땅에 퍼질 것입니다. 땅에 퍼져 나간다는 것은 아마 가나안 땅의 정복과 그 땅의 분배에 대한 예고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이어 야곱 자신이 받을 복은 생략되어 있지만, 열국이 그를 통해 받을 복에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약속이 다 성취될 때까지 언제나 야곱을 보호하고 동행하며 인도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 땅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벧엘에서 이 약속을 맹세하셨고 이제 역으로 야곱이 다시 하란 땅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이 약속을 재확증 하십니다. 야곱과 끝까지 동행하시고 그를 지키시며 그에게 준 약속들을 반드시 성취하겠다고 맹세하십니다(15절). 이후의 야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그 약속들이 그분이 맹세한 대로 어떻게 실현되는지 드라마처럼 보여줍니다.

 

야곱의 서원(16-22)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을 때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애곱은 자신의 미래를 이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께 결박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만약 …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신앙이었습니다. 더 깨지고 버리고 변해야 할 것이 남은 야곱이었습니다.

16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16-22)

야곱은 에서를 피해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갑니다. 도중에서 날이 저물자 돌을 베개를 삼고 잡니다. 그는 그곳에서 꿈을 꾸게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을 때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현현을 기념(16-19)

야곱은 아마 그 꿈을 꾸고서 한밤중에 깨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심히 두려운 마음이 엄습해왔습니다. 그는 떨며 ‘여호와가 과연 여기 계시는데 내가 알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의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을 거의 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잔 곳을 가리켜 ‘이곳이 하나님의 집(베트 엘로힘)이요 하늘의 문(샤아르 하샤마임)이구나’하고 말합니다. 베트 엘로힘의 축약형이 벧엘입니다. ‘하늘의 문’은 앞서 11:5-7에서 설명한 대로 ‘바벨’의 원래 이름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바벨이나 다른 장소가 아닌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진정한 ‘신의 문’임을 깨닫습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어나 자신이 뺐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어 기념석으로 삼았습니다. 돌기둥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그곳을 거룩한 장소로 삼았음을 암시합니다(출애굽기 40:90-13; 레위기 8:10-12). 말하자면, 야곱은 그곳을 거룩한 성소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벧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나안의 종교적인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는 그가 돌기둥을 세운 뒤 제단을 세워 바졌다거나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벧엘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창세기 35:1-7). 그 후 야곱은 원래 루스라 불리던 그 장소에 '벧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미 족장 시대, 곧 루스로 물리던 시대에도 벤엘은 가나안의 큰 성읍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곳이 아무리 유명한 지역이었을지라도 신학적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장소’가 중요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비로소 벧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됨으로써 구속사의 관점에서 중대한 장소로 바뀝니다.

월키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여러 가지 변화들로 채워져 있다: 고향으로부터 도망가며 달음질하는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달려간다: 형제를 두려워하던 한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저 어떤 한 장소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장소가 됩니된다; 바위가 성소가 된다; 밤이 아침으로 바뀐다; 가나안의 루스가 벧엘이 된다; 그 꿈이 성취될 때, 야곱(‘발꿈치/움켜쥐는 자’)은 이스라엘(‘하나님과 사람을 이긴 자’)이 될 것이다.’

(2) 서원하며 간구하는 야곱(20-22)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께 서원을 드립니다. 성경에서 서원과 서약(맹세)은 구분됩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기도 제목의 조건을 걸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서원자가 자신이 약속한 것을 실행하는 기도입니다(사무엘상 1:11, 한나의 서원; 사사기 11:30-31, 입다의 잘못된 서원). 그러나 서약(맹세)은 일방적인 다짐과 결심의 약속입니다(여호수아 2:17,20, 라합의 비밀 보장의 서약: 이사야 21:1,5,7, 이스라엘의 베냐민에 대한 서약). 야곱의 이 서원은 구약에서 가장 긴 서원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셔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면’, 자신이 돌기둥을 세운 곳은 하나님의 집(전)이 될 것이며 자신은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는 야곱이 그곳을 성소로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앞의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줌으로써 ‘증명되는 사실’일 뿐 야곱이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최초로 택자의 백성이 십일조를 서원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피엘 동사 ‘야야세르’는 지속과 반복의 피엘 용법으로 ‘계속 십일조를 할 것입니다’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향후 계속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기로 서원합니다.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선물로 바친 십일조는 그것의 원형일 수 있으나(창세기 14:20)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로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거기서도 설명했듯이 원래 십일조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널리 시행되던 제도로 국세와 종교세 개념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은 이제 그 십일조를 왕이나 이방 신전의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께 바칩니다.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내려놓는다는 결단입니다.


우리 머리 위로도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면, 그 사다리 끝에서 천사를 부리시는 분이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세상이 규정한 행복의 문법에 휩쓸릴 이유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조차 나를 위해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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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8-01)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야곱

창세기 27장 41절- 28장 9절


한 가족이 두 패로 나뉘어 속고 속이는 최악의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수습해보려는 저마다의 빗나간 노력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오해와 다툼 속에 조차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짚어볼 겨를 없이, 성급하게 내 뜻을 앞세워 추스르려 하는 우리 말입니다.

 

야곱의 속임수에 모든 것을 빼앗긴 에서는 오래도록 야곱에 대한 증오심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에 아버지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야곱을 살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서의 살인 계획은 가인을 연상시키는데, 이로써 그는 자신이 택함 받지 못한 가인의 계열의 후손과 다름없는 인물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 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기지를 발휘해 야곱을 멀리 밧단아람으로 도피시킵니다

 

살의를 품은 에서(41-45)

야곱이 죽으면 원한도 풀리고 장자권도 되찾을 수 있으니, 에서는 즉시 복수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복수심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반추할 과거를 향한 여백이 없고, 하나님의 신원을 상상할 미래를 향한 여유도 없습니다. 복수심은 성령이 숨 쉴 공간을 탈취합니다.

41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5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46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41-46)

야곱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은 에서는 야곱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시 약속의 씨의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에서의 증오감을 표현한 동사 ‘사탐’은 오래도록 내면에 축적된 그의 감정을 잘 표현합니다. 여기서 그는 살의를 발설하지 않고 혼자 마음에 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다’는 말은 앞서 일련의 사건들에서 이삭이 시력을 거의 잃고 육시의 감각이 쇠퇴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무려 180세까지 생존했음을 밝힙니다(창세기 35:28). 에서는 아마 아버지가 죽은 다음 야곱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서가 가인에 비하면 덜 충동적인 인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에서는 매우 즉홍적이고 충동적인 기질의 소유자가 분명합니다. 그는 허기진 배를 참지 못해 팥죽 한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 정도로 성급한 성격을 지녔으며 나중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그의 신중치 못한 성격은 현재의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어느 날 리브가는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42). 혹자는 리브가가 에게서 그런 낌새를 눈치 챈 것일 수 있다고 말하나 사용된 동사 ‘나가드’는 항상 누군가 말을 전할 때 사용되므로 잘못된 추론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자신의 음모와 살의를 누군가에게 발설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것은 에서의 경솔하고 성급한 성격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셈입니다. 이것은 그가 팥죽 한 그릇에 엄청난 권리를 포기한 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님을 시사합니다. 이 말을 들은 리브가는 에서가 한이 맺혀 야곱을 죽이려 한다고 야곱에게 말해주며 긴급히 도망갈 것을 지시합니다. 그녀의 계획은 구체적입니다. 먼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에 사는 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하라고 지시합니다. 여기서 긴박함을 느끼게 하는 짧은 명령형 동사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피신하라’(43). 앞서 이삭을 속일 때처럼 리브가가 빠른 작전 지시를 내리고 야곱은 즉시 이행하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몇 날 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다 오라고 말합니다. 가나안에서 하란까지는 약 600km의 먼 거리로 편도 여행 시간만 한 달 정도 소요됩니다. 거기서 머무는 기간도 불과 며칠이 아닌 한 달 이상의 기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몇 날 동안’은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충분한 기간 동안 피해 있으라는 뜻입니다. 리브가는 에서의 분이 풀리면 사람을 보내 야곱을 불러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두 아들을 잃을 수는 없다고 어머니로서의 심정을 전합니다. 리브가의 지시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혹자는 어머니의 지시에 대한 야곱의 반응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므로 야곱은 즉시 실행하기를 망설였다고 추론합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의 생략 혹은 침묵은 오히려 그가 즉시 어머니의 말에 수긍하고 동조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야곱 역시 사태의 긴박성을 깨닫고 어머니의 말을 즉시 실행에 옮길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앞서 이삭을 속일 때도 드러났지만, 리브가는 매우 치밀한 여자입니다. 남편 이삭을 찾아가 야곱의 안전한 도피를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합니다. 이삭에게 에서의 음모를 정면으로 고발하지 않고 야곱의 결혼 문제를 꺼냅니다. 리브가 입장에서는 에서의 음모를 이삭에게 알린다 해도 이삭이 에서를 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을 수 있습니다. 에서의 고집과 성격은 아버지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례로 에서는 부모가 원치 않는 헷 여자를 자기 멋대로 아내로 삼은 인물입니다. 게다가 아마 이삭은 여전히 에서를 편애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리브가 입장에서 이것은 현명한 문제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리브가는 야곱의 결혼 문제를 들고 이삭에게 접근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전략가인지 보여줍니다.

리브가의 놀라운 협상술과 지혜는 이어지는 그녀의 어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녀는 자신이 헷 족속 출신 며느리들로 인해 인생의 낙이 없다고 푸념합니다. 이것은 이삭의 동감을 쉽게 얻어냄으로써 자신의 의도대로 이삭을 이끌어가려는 전략적 발언입니다. 에서의 잘못된 결혼은 이삭의 마음도 크게 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26:35). 리브가는 이삭의 이 심리를 효과적으로 잘 이용합니다. 이삭의 육체적 약점을 치밀하게 이용했던 리브가가 이제는 이삭의 심리적 약점을 절묘하게 이용합니다.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야 하고는 리브가의 명분은 이삭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확실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의도적으로 ‘에서의 아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이삭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신중한 언어 선택입니다. 또한 리브가는 의도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삭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합니다. 만일 그녀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야 한다고 설득한다면, 이삭이 자신의 계획을 눈치 챌 것을 염려했는지 모릅니다.

 

야곱을 밧단아함으로 보내는 리브가(28:1-5)

에서의 분노가 해소되기까지 아주 잠시만 리브가는 야곱을 피신시키려 합니다. 잠깐의 이별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남은 생애 동안 야곱을 만나지 못할 줄은 몰랐습니다. 회피는 비겁하고 무책임합니다. 갈등 속에는 당신이 개입하여 수습하길 주께서 바라시는 분명한 몫이 있습니다.

1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2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3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5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1-5)

이삭은 리브가의 의중을 따라 야곱의 결혼만큼은 에서의 길을 반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불러 축복하고 가나안 여자와 결혼해선 안 되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신붓감을 찾으라고 지시했습니다(1-2). 이어지는 축복은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 문제를 상의한 후 야곱에 대한 마음이 크게 변했음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그대로 야곱에게서 실현되기를 빕니다(3-4). 후손의 생육과 번성을 통해 여러 족속을 이루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그가 받고 또한 약속의 땅을 그가 차지하길 기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야곱이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합법적인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삭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순간입니다. 이로써 불법적인 방법으로 장자권을 거머쥐었던 야곱은 아버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아브라함의 계승자가 됩니다. 야곱은 이삭의 축복을 받은 뒤 밧단아람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습니다(5).

 

에서의 추가적인 아내들(28:6-9)

에서는 이방인과 통혼한 잘못을 중혼이라는 또 다른 잘못으로 덮으려 합니다. 거짓을 거짓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거짓을 덮으려면 스무 개의 거짓을 새로이 고안해야 합니다. 고통스럽더라도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고통스럽더라도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비난과 수치라도 진실하게 통과해야 합니다.

6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6-9)

에서는 야곱의 결혼 여행 소식을 전해 듣고 부모의 환심을 사기 위한 또 다른 결혼을 시도합니다. 그의 실패한 결혼은 예견되는 야곱의 성공적인 결혼과 대비됩니다. 에서의 추가적인 아내에 대한 기사가 여기에 끼어든 것은 다분히 야곱의 합당한 결혼과 대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가문의 전통은 가나안 여인을 배제한 족내혼이었기에 야곱의 혼인은 부모의 마음을 흡족케 했을 것입니다. 이는 에서의 헷 여인들과 이 결혼이 부모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던 것과 대조됩니다. 이로 인해 에서는 뒤늦게나마 나름대로의 족 내 혼을 시도했으나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에서는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의 딸 마할랏을 얻어 아내로 맞았습니다(9). 웬함은 창세기의 연대를 그대로 따르면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취할 때 이스마엘이 이미 죽었으니 에서는 이스마엘 족속에게 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당시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마엘은 137세에 사망했는데, 이때 에서와 야곱의 나이는 63세였습니다. 에서가 40세에 결혼할 때, 이스마엘은 114세였습니다. 25:19-20에 제시한 족장들의 연표를 보시길 바랍니다. 한편, 에서의 아내들의 목록은 두 군데서 나타나는데 둘 사이에서 차이점들이 관찰된다. 이것은 주석가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줍니다. 아래 도표에 이를 정리해놓았는데, 이 문제는 36장에서 상세히 논하기로 합니다.

창세기 26:34; 28:9 창세기 36:2-3
26:34 28:9
헷 여인 헷 여인 이스라엘 딸 헷 여인 히위 여인 이스마엘 딸
브에리의 딸 유딧 멜론의 딸
바스맛
느바욧의 누이 마할랏 엘론의 딸
아다
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

싸우고 나서도 술 한 잔 기울이며 금세 서로를 포용하는 세상 사람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갈등을 다루는 데 서툴 때가 많습니다. 야곱을 축복하면서 떠나보낸 이삭의 마음으로, 해결의 길을 여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먼저 용납하고 책임지며 사죄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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