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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7-01)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할례를 행한 아브람

창세기 17장 1-27절


작명(作名)은 당사자를 위한 소원을 담는 일입니다. 그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계시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약속을 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꾸십니다. 할례를 명하십니다.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지어주십니다. 켜켜이 약속을 쌓아주십니다. 안 믿을 수가 없게 하십니다.

 

아브람의 나이 90세가 되었습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의 세월이 흘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스마엘의 나이 13세이지만, 사래의 태는 여전히 닫혀 있었습니다. 하갈을 대리모로 사용하여 상속자를 얻으려한 계획은 심각한 가정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언약의 재확증(1-9)

하나님께서는 13년간의 침묵을 깨고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으로 알리십니다. 아브람의 나이 99세는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는 터무니없는 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비와 어미의 이름을 바꾸시고, 그 이름에 걸맞게 책임지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표명하십니다.

1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1-9)

이스마엘이 탄생한 후 13년의 세월이 흘러 아브람은 99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13년간이나 자신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셨으며, 이제 그는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연령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적자로 인정하여 상속자로 삼으려 했는지 모릅니다. 이어지는 하나님과 아브람의 대화에서 드러난 그의 태도와 발언에서 암시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엘 샤다이’(전능자 하나님)로 소개하십니다(1). ‘아마 샤다이’는 ‘산’이란 단어에서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엘 샤다이’는 위엄 있는 신들이 장중하고 높은 산에 거주한다는 고대 근동의 신관에 따른 이름에서 기원했는데, 구약에 그런 요소가 탈색되어 하나님께 사용된 명칭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능한 하나님’은 무난한 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다고 평가받은 조상 에녹과 노아와 같은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내 앞에서 완전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하라는 뜻입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아브람 사이에 언약을 두겠다고 말씀하십니다(2). 아브람과의 언약은 15장에서 체결되었으니, 이것은 언약 수립에 대한 표현은 아니고, 둘 사이에 이미 수립된 언약을 유효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창세기 외에서는 민수기25:12). 그 언약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후손을 크게 번성케 하겠다고 재차 확언하십니다. 아브람은 그분 앞에서 엎드렸습니다(3). 이 엎드림은 17절의 엎드림과 달리 경외의 표시입니다. 엎드린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언약대로 그는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4). 이미 맺은 언약의 약속들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거듭 확증하십니다. 앞서 번성의 축복은 단순히 벌처럼 많은 후손의 중다함으로만 표현되었는데, 여기서는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표현과 더불어 그 축복이 더욱 강화됩니다. ‘여러 민족의 아버지’라는 히브리어 문구인 ‘아브 하몬 고임’의 앞부분 ‘아브하몬’은 개명된 이름 ‘아브라함’과의 말놀이를 의도한 것이 분명합니다(5). 아브람은 압(아버지)과 람(높다)의 조합으로 ‘높임을 받는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하나님일 수 있고 혹은 육신의 아버지 데라나 아브라함 자신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 창세기 저자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란 이름을 부여합니다.

번성할 것이라는 사실이 수차례 반복됩니다(6). 아브라함에게서 민족들(고임)이 나오고 왕들이 나올 것입니다. 왕들에 대한 언급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누릴 권세를 암시하며, 특히 다윗 가문의 왕들에 대한 계시로 볼 수 있습니다. ‘고임’은 앞서 말한 대로 혈통으로서의 민족과 체제를 갖춘 나라를 뜻할 수 있습니다. 20절에 비추어 볼 때, 아브라함에게서 나올 민족들과 나라들은 이스마엘의 자손들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6절의 민족들은 아브라함에게서 날 모든 후손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나 7절의 언약의 다짐은 언약의 후손으로 제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사이에 영원한 언약으로 ‘세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언약을 세우다’의 숙어는 ‘헤킴 베리트’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카라트 베리트’는 최초의 언약 수립을, ‘헤킴 베리트’는 수립된 언약의 확립을 의미하는 데 사용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는 둘의 차이가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최초 언약 수립일지라도 헤킴 베리트는 분명히 언약 수립의 ‘견고성’과 ‘불변성’을 강조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따라서 7절의 ‘헤킴 베리트’는 15장에서 체결된 언약의 재확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영원한 언약과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은 물론 그의 후손도 대대로 이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고 명하십니다(9).

  

언약의 증표로서의 할례(10-14)

자손과 땅을 약속하신 후에 그 약속에 대한 기억과 믿음을 훈손 대대로 요구하시려고 난 지 팔 일 된 아이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하십니다. 인간의 생식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약속 성취가 달려 있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에 세긴 약속이었습니다.

10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10-14)

10절의 개역개정은 자칫 할례가 언약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은 ‘이것이 내 언약이니라’가 앞에 선언되고, 뒤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표로 모든 남자의 할례를 명하십니다(11). 이것은 남자 성기의 포피를 베어내는 의식입니다. 신생아는 태어난 지 8일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12). 할례의 대상은 아브라합 혈통의 모든 남자들과 돈으로 사서 고용한 이방인들을 포함합니다. 이 일꾼은 아마 외국에서 온 거류민(계르)으로서 오늘날의 영주권자와 같은 신분이었을 것입니다. 함께 거주하는 타국인이라도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집안사람들은 대대로 할례를 받음으로써 그의 언약을 영원한 언약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그가 언약을 깨트렸기 때문입니다. 끊어짐(카라트)의 형벌은 사형과 같은 무서운 형벌입니다. 이것을 사형의 다른 표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나 조기 사망 혹은 대 끊김이나 열조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징벌로 보기도 합니다.

 

사래에서 사라로:씨 약속의 보증(15-22)

사라를 통해 복 주실 계획을 듣고 아브라함은 웃었습니다. 비웃음입니다. 불신의 웃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웃음’, 즉 ‘이삭’으로 짓게 하십니다. 그 자녀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듣고 비웃는 자들, 불신의 웃음을 짓고 있는 아브라함을 진정으로 웃게 할 것입니다.

15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16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17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18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9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20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21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22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15-2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개명하셨습니다(15). ‘귀부인’이라는 이름 뜻이 바뀌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이름의 변경과 더불어 ‘여러 민족의 어머니’라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름 뜻인 ‘여러 민족의 아버지’와 짝을 이룹니다. 사라는 아들을 얻을 것이고 그 아들을 통해 여러 민족과 왕들이 나올 것입니다(16). ‘왕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진정한 왕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입니다. 바로 그분이 하늘의 시온산에서 통치하시고(히브리서 12:22-24) 다른 모든 왕들의 경배를 받으실 것이다’. 훗날 사라의 아들 이삭에게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는데, 에서의 후손은 여러 민족으로 나뉘며(창세기 36장), 야곱의 아들들은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을 형성합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엎드립니다. 이번에는 경외의 엎드림이 아니라 단순히 형식적 엎드림입니다. 그는 엎드려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100세가 된 자신과 90세가 된 사라가 어찌 자녀를 낳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재미있게도 아브라함의 웃음을 표현한 동사 ‘이츠하크’는 이삭의 이름 ‘이츠하크’와 동일합니다. 이삭의 이름 뜻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이것은 동사 미완료로서 ‘그가 웃을 것이다’입니다. 주어는 하나님일 수도, 아브라함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후자가 어울립니다. ‘(아브라함이) 웃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잘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시 한 번 아들에 대한 약속을 확고히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소원대로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어 그는 크게 번성할 것이며 열두 두령을 낳고 큰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이 약속은 25장에서 성취됩니다(창세기 25:13-16). 하지만 여기서 이스마엘의 후손의 지도자는 왕이 아닌 ‘나시’로 표현됩니다. 나시는 귀족이나 높은 지위의 사람을 말합니다. 왕을 ‘나시’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보통 왕 아래의 신분을 가리킵니다. 반드시 사라에게서 이삭이라 이름 붙이게 될(19) 약속의 아들이 나올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언약을 견고히 할 것입니다(‘내 언약은 내가 내년 이 시기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마치고 올라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할례 실행(23-27)

저자는 두 번이나 반복하여 아브라함의 할례를 진술함으로써 그의 순종이 얼마나 철저했고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는지 보여줍니다.

23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24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 세였고 25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십삼 세였더라 26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27그 집의 모든 남자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으로 이방 사람에게서 사온 자가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23-27)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자신의 집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 이스마엘은 13세였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지워지지 않고 잊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 기억을 도우려고 하나님께서는 부모의 이름에, 인간의 몸에, 아들의 이름에 그 약속을 넣으신 것입니다.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7:1)는 말씀은 기억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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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6-01)


인위적인 결정으로 이스라엘을 출생한 아브람

창세기 16장 1-16절


신앙은 자신의 한계를 보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보는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는 일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만도 위험하고 부정적인 사고만도 위험합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데려다주었습니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람의 믿음이 늘 한결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째가 되었습니다(3). 아브람의 나이는 80대로 접어들었습니다(창세기 16:16). 아브람의 믿음은 다시 흔들렸습니다. 이러한 언약한 모습은 하나님 백성의 보편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아내 사래가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내와 상의하여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얻기로 합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첩이 됨(1-3)

아브람은 아담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아내 사래의 말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자신들만의 대책으로 응수합니다. 당대의 관습으로는 합법적인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순종이 아니면 결코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실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1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1-3)

이 이야기는 족장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겪은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때때로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의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째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씨에 대한 약속을 재확증하신 후 몇 년이 지났지만, 아브람 부부는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인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는 85세, 사래는 75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참조. 창세기 17:1,17). 이미 여성으로서 오래 전에 가임기가 끝나고 갱년기에 접어들었을 것입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하갈이 애굽 이름인 것으로 볼 때, 아마 그녀의 고향인 애굽에서 얻은 몸종입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신의 몸종과 동침하여 자녀를 얻을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하갈과 동침합니다. 대리모 관행은 주전 삼천 년부터 천년까지 메포소타미아뿐 아니라 애굽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증거 됩니다. 사래는 자신의 계획을 따라 씨의 약속을 실현하려 합니다.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가 세워질 수 있다’는 뜻으로 자신이 아브람의 가문이 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란 장담입니다. 여기서 아브람의 믿음은 순간 실종되고 맙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십년 째이므로 아브람은 땅에 대한 약속이 점점 구체화되어가는 시점에 이런 불신행위를 하고 맙니다.

 

두 아내의 갈등과 하갈의 도피(4-6)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순종할 때 인간 사이의 신뢰 관계는 무너집니다. 여종 하갈은 자신의 임신한 사실만으로 거만해져서 자신의 형편을 모르고 여주인 사래를 저주합니다. 아브람의 부부는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에게 자신의 실수를 전가합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전가하고 아브람은 아내에게 전가합니다. 이번에는 사래의 말대로 아브람은 하갈을 광야로 내쫓습니다.

4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4-6)

아브람과의 잠자리 후 하갈이 아이를 가졌습니다. 임신 후 그녀는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갈이 그녀를 별것 아닌 여자로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고대로부터 아내들 간의 경쟁심과 질투심은 인간 본성의 문제였기에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이 이 문제에 대한 법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우르남무(Ur-Nammu) 법이나 함무라비 법은 이런 상황에서 본 부인을 보호하는 법적 규제를 마련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여주인은 건방진 대리모인 여종을 팔아넘길 수는 없지만 더 낮은 노예 신분으로 전락시켜 질서를 잡게 했습니다. 하갈이 사래를 무시했지만, 사래 입장에서 이것은 단순히 무시당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수모를 ‘하마스’로 표현하는데, 이건 폭력과 횡포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래는 하갈의 행위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입니다(잠언 30:21-23). 사래는 이 일에 대해 아브람에게 강력히 항의하며,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에 호소합니다. 아브람은 일 처리의 전권을 사래에게 위임합니다. 사래는 하갈에게 그대로 갚아주며 복수합니다. 하갈을 ‘학대’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하갈에게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한 하갈의 폭력적 행위(하마스)를 갚아주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학대라는 단어 ‘아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백성에게 당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사래의 하갈에 대한 횡포가 몇 배로 심했다는 것은 하갈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갈은 아마 살기를 느꼈거나 무엇보다 임신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도주했을 것입니다. 두 여인 모두 잘못이 큽니다. 주인을 멸시한 하갈도, 또한 자신이 받은 수모를 몇 배로 갚은 사래도 그러합니다.

 

하갈을 위로하시는 하나님(7-12)

하나님께서는 임신한 몸으로 애굽으로 돌아가던 하갈의 고통을 보시고 만나주십니다. 하갈은 사래 탓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태중의 아이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갈에게 사래에게 복종하는 수고를 요구하십니다. 그녀에게 회개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게 순종하였을 때 이스마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7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7-12)

하갈이 도피한 곳은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도 매우 먼 곳입니다. 그녀는 술로 가는 도중(술 길)의 어떤 우물까지 갔습니다. 그곳은 네겜 광야 최남단의 가데스(바네아)와 베렛 사이에 있었습니다(14). 헤브론의 아브람 거주지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는 약 97km의 거리입니다.

하갈은 임신한 몸으로 매우 먼 곳까지 도망갔는데, 이는 그녀가 이집트 출신이기에 분명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라는 존재가 구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흥미롭게도 구약의 많은 곳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또한 여호와 자신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현재의 사건에서도 하갈은 마지막에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고 고백합니다(13-15).

많은 학자들이 강하게 반대하지만, 여호와를 자처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의 성육신된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견해가 옳다면, 우리는 사자의 임재와 활동을 통해 구약 시대 속에서 선재적 성육신(pre-incarnation)을 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부릅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8) 여호와의 사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만남과 더불어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인사와 같은 질문입니다.

하갈은 여기서 사래를 ‘여주인’으로 칭하면서 그녀의 횡포를 고발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주인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고 말할 뿐인데, 슬픈 도망자가 된 하갈의 낮아진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음이 분명한데, 이는 이미 하갈이 그 정체불명의 남자가 누구인지 아는 상황에서 대화기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 그녀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9). 흥미롭게도 ‘복종하라’는 동사는 ‘자발적으로/스스로를 낮추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사래의 지위와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시켜줍니다. 이 서열을 하갈은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갈을 위한 엄청난 축복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후손의 번성을 약속합니다(10).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장하신 약속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이 낳을 아들에게 ‘이스마엘’이란 이름을 부여합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엘)이 들으신다(샤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 이름을 부여한 배경도 하갈에게 설명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러나 하갈의 후손의 미래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는 ‘들나귀 같이 될 것이다.’ 들나귀에 견주는 것은 호의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소 경멸적입니다. 들나귀가 야생에서 떠돌며 사는 것처럼, 이스마엘의 후손도 그렇게 떠돌며 살 것입니다. 이것은 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스마엘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이 이스마엘을 친다는 예언도 그의 후손이 전투적으로 사람들과 부딧히며 살 것을 예언합니다. 마지막의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산다’는 말은 웬함의 말대로 이중적 뉘앙스를 내포합니다. 웬함은 이것을 ‘opposite’로 옮기긴 하나 일차적으로 생활 방식의 적대 관계를 가리키는 ‘apart from’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형제들은 정착민이 될 것이나 하갈의 아들은 그들과 동떨어진 유목민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저 그런 관례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적개심을 품을 것입니다.

 

하갈의 찬양과 이스마엘의 탄생(13-16)

신앙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적인 판단을 선택했을 때, 아브람은 앞으로 수년 동안 그를 괴롭힐 인과율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성경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일개 이방인 여종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보호와 격려가 필요한 한 인간으로 대우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람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12:3).

1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13-16) 

여기서 하갈이 이미 자신의 대화 상대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알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하갈은 나아가 그를 여호와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엘로이’, 곧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칭합니다.

이어지는 히브리어 문장은 의문문이지만 감탄문으로 해석해야 하는 뉘앙스를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여기서 내가 나를 살피시는 분을 내가 뵈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곳 샘의 이름도 붙입니다. 원래 그 샘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나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이란 뜻의 ‘브엘라해로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거기에 부여된 것입니다. 이 우물의 위치는 가데스와 베렛 사이인데, 가데스는 오늘날 니차네이 사이나이(Nitzanei Sinai)라는 이름으로, 혹은 성경 이름 그대로를 간직한 가데스 바네아로 불리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네겝 남단의 오아시스가 있는 지역입니다. 하갈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여호와의 사자의 지시대로 ‘이스마엘’이라고 지었고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말을 청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과 세상의 소리 중에 어느 쪽이 잘 들리고 있습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은 희미하게 들리고 아내의 현실적인 대안이 크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집안에 큰 싸움의 소리를 만들었고, 하갈의 원망의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그를 살렸고 새 생명을 낳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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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5-01)


아브람과 언약하신 하나님

창세기 15장 1-21절


두려움과 불안이 떠나갈 때가 언재입니까?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더는 우리로 불신앙적인 선택이나 불의한 길을 가게 하지 못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듭 자손과 땅의 약속을 주심으로써 아브람의 마음을 지키십니다. 어떻게 약속하셨겠습니까?

  

전쟁이 끝난 후 시간이 흘렸습니다. 1절의 ‘이 후에’의 문자적 의미는 구약의 서사에서 흐름이 전환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 사용되는 관용구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용기를 북돋우며 ‘네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전쟁 직후의 장면인 것으로 추론됩니다. 가나안의 큰 전쟁을 통해 아브람은 점점 그 왕의 소유권자의 위상을 구축해 가지만, 정작 그에겐 아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후손에 대한 약속(1-6)

수고한 대가를 제때 누리지 못하거나 당장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자원이 없으면, 걱정되고 불안해합니다. 불안함을 느끼면 사람들은 더 힘이 될 만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항상 방패와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께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 연합군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친히 방패와 큰 상급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6)

아브람이 전쟁에서 롯을 구출하고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아브람과 언약을 체결하심으로써 주어진 약속(12:2-3)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랜 기간 동안 속박이 있을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15:13).

(1) 언약 체결 이전에 주어진 약속(1-3)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시기 전에 확신의 말씀으로 아브람의 두려움과 의심을 제거하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어느 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주신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볼 때 아마 시점은 전쟁 직후로 보입니다.

특히 ‘나는 네 방패요 상급이니라’라는 말씀하십니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와 보호를 계속 보장하고, 아브람이 받을 정당한 보상을 자신이 직접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분명히 전쟁 후에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막대한 전리품 중 하나도 취하지 않고 모두 소돔 왕과 동료들에게 돌린 것을 염두에 둔 말씀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러한 아브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호와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십니다(출애굽기 14:13-14; 민수기 21:34; 여호수아 1:9; 8:1). 흔히 칼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무기인 반면에,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했습니다(신명기 33:29; 사무엘하 22:3,31; 시편 3:3; 5:12; 18:2,30).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모든 것을 공급하실 것이라는 보증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권리인 전리품을 포기했는데,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몫을 직접 챙겨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충분한 물질의 보상을 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절박한 것은 그의 씨, 즉 후손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직접 간구합니다. 자기는 소유가 충분하니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겠다면 자식을 달라고 합니다. 그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자신의 종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당시 자녀 없음은 하나님의 저주에 의한 징계로 간주되었습니다(레위기 20:20,21; 예레미야 22:30).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다른 면에서는 저주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보장된 복과 후손에 대한 약속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모순된 상황입니다.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2)라고 자신의 충직한 종 엘리에셀이 그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많은 학자들은 종이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근거를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서 찾습니다. 만일 종이 양자로 입양된다면, 그는 상속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아브람은 현재 하나님만을 상급으로 믿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지만, 그의 입장과 하나님을 향한 이 요청-엘리에셀을 인정해달라는 요청-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입양된 상속자를 통해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흔들리는 그에게 약속을 재 확증 하십니다. 입양된 아들이 아닌 그의 친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중에 그를 밖으로 이끌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게 하신 후 별처럼 수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생생하게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후손의 번성이 별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애초에 인류에게 복을 주어 자손을 번성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아브람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2) 아브람과 언약을 맺어지신 하나님(4-6)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 창세기 15:6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 전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칭의를 얻었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설파한 근거 구절로 유명합니다(로마서 4:1-3; 갈라디아서 3:6-14).

앞서 7:1에서 이미 노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는 ‘옳은 것’,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하나님과의 ‘바른’ 언약 관계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과 언약 체결식(7-11)

무로부터 하늘의 별을 만드신 이가 다 죽은 듯한 아브람의 몸에서 별 같이 많은 자손을 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이 보아야 할 것은 자기 몸이나 양자(養子)감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람의 의로운 믿음의 후손이 됩니다.

7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7-11)

아브람은 마치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인 아브람에게 놀라운 격려의 말씀과 하나님의 유업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1)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7)

자손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확고한 약속을 여기서 재확증됩니다. 아브람은 셀 수 없는 후손과 더불어 가나안 땅을 얻을 것입니다.

 (2) 약속을 위한 증거를 요구한 아브람(8)

그러나 아브람은 여기서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합니다. 이것을 불신앙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그의 믿음은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아브람의 후손인 모세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보내셨다는 증거, 즉 백성들이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출애굽기 3:1-22). 또한 모세는 자신은 말 재주가 없어서 백성을 인도할 수 없으니 대안을 달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따라서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출애굽기 7:1-4).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무조건 불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식(9-12)

여호와께서는 언약 예식을 위해 많은 짐승을 가져오라고 명하십니다. 아무런 제단이 준비되지 않고 짐승들이 땅에서 도살되며, 또 제사법에서는 주로 수컷이 바쳐지는데(레위기 1장), 여기서는 암컷이 요구되는 것을 보면 이것들은 제사의 제물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3년생 짐승은 충분히 다 자라 상품 가치가 가장 높은 것들입니다. 이 짐승들이 도살되는 방식도 제사와 약간 다릅니다. 제사법에 의하면 짐승은 여러 조각으로 각을 뜨지만, 여기서는 중간을 쪼개 둘로 나눕니다. 새들은 쪼개지 않는데, 이것은 제사법과 동일합니다. 쪼개진 짐승이 의미하는 바는 만약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쪼개질 것,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람이 이 약속을 목숨 걸고 지켜야한다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걸고 그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솔개가 그 널브러진 짐승들의 사체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이 쫓아냈습니다. 솔개의 출현은 분명히 부정적 징조와 암시를 내비칩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후손이 애굽 땅에서 솔개와 같은 바로로부터 암울한 고통을 받을 것을 예고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내쫓긴 솔개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아브람에게 보장된 약속들이 보존된다는 것을 암시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에 대한 약속(12-21)

선지자 아브람(20:7)에게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장차 있을 일을 보이소(7-11) 이를 설명하십니다(12-16). 땅의 후속은 후손들이 이방의 객으로 섬기다가 가나안 아모리 족속의 죄가 관영해지는 4대만에 돌아온 후에 이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의 형태로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가심으로써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12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12-21)

바로 그때 갑작스러운 두려움이 아브람을 엄습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불결한 새들(솔개)이 제물로 바친 동물들을 습격하는 안 좋은 징조 때문입니다. 불안한 아브람에게 현현하시고 임재하셔서 ㅁ든 약속에 대한 확증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의 현현과 예언(12-16)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깊은 잠(타르데마)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밤중이 아닌 ‘해 질 때’이므로 이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꿈속에서 흑암이 몰려오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이 겪을 400여 년간의(정확히는 430년) 고난의 시기를 예고하십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지배하던 나라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고, 아브람의 후손은 큰 재물을 얻은 뒤 그 나라에서 나올 것입니다(14; 출애굽기 12:35-36에서 성취).

아브람은 평안히 장수를 누리다가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열조의 무덤에 묻힌다는 약속입니다. 아브람의 후손들이 돌아오는 시기는 4대가 지난 후일 것입니다. 이런 오랜 기간이 필요한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가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는 죄의 임계량이 있다는 암시입니다. 그 임계점을 넘으면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훗날 그들의 죄는 임계점을 넘어 홍수나 유황불이 아닌 이스라엘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는 것은 약속의 선물을 받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땅에 대한 심판의 실행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17-21)

날이 컴컴해지자 아브람의 눈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면서 불타는 횃불이 쪼개진 짐승들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이것은 그 짐승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초자연적인 현상의 불로 태우셨음을 시사 합니다. 아마 짐승들이 모두 삽시간에 소각되었을 것입니다. ‘연기 나는 화로’는 하나님 임재의 현상인 불기둥을 감싸고 있는 구름 기둥을 암시합니다(출애굽기 40:38).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언약 파기에 따른 저주를 암시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 불은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들처럼 될 것임을 확증하는 증표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9장과 비교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언약 인준의 표시일 수도 있습니다. 짐승을 두 쪽 낸 것 자체가 이미 언약 위반의 저주에 대한 경고이므로, 이 불사름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거기서 갓 위임받은 아론과 제사장들이(8장) 1-7장에서 제정된 제사법을 따라 최초의 제사들을 집행합니다. 많은 짐승들이 번제단에 올라갔는데, 타고 있던 제물 위에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 순식간에 태워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이 언약 예물들을 순식간에 소각한 것은 언약의 최종적 확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18절의 ‘언약을 세웠다’는 진술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다시 한 번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범위는 ‘애굽 강에서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입니다. ‘애굽 강’, 혹은 ‘애굽 시내’는 가나안 땅과 시내 반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는데, 오늘날의 와디 엘 아리쉬(Wadi El-Arish)로 추정됩니다. 가데스 바네아 서쪽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이 하천은 계절 천(wadi)으로 우기 때만 흐릅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 사는 여러 종족들 이름을 나열하시면서 그들로부터 그 땅을 빼앗아 아브람 후손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현실인 만큼 두려움도 현실입니다. 우리는 저주 손에 잡힐 듯 한 대안으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당신의 약속을 제시하십니다. 그 약속이,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서 두려움과 염려를 거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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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4-02)

 


하나님만 의지해 승리한 아브람

창세기 14장 13-24절


우리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생명을 세상에 전하여 모든 족속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도록 보름 받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복을 세상에게 흘려보내며 살아야 하는지를 오늘 아브람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마므레 상수리나무들 근처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제단을 세운 장소이며 헤브론 일대에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마므레라는 인물이 맹주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형제는 에스골과 아넬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당시 불안했던 국제 정세로 인해 토호 세력들이 강력한 이주민 세력인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출(13-16)

애굽에서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람이 더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 지체를 향한 사랑이 그가 롯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3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13-16)

패주한 서방 동맹군 중 한 명이 탈출해서 아브람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특이하게 아브람에게 ‘히브리 사람’(이브리)이라는 호칭이 붙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창세기에서 아브람에게 히브리인 호칭을 붙인 곳은 이곳이 유일한데, 분명히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이브리가 고대 근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하비루(Habiru; 혹은 아피루[Apiru]로 칭함) 집단과 일치하는 명칭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와 발음이 비슷하고 사회의 비주류 세력으로 떠돌이였으며, 도적질을 일삼거나 종종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하비루가 히브리인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많은 학자들은 이브리와 하비루 사이에 언어학적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나그네 신분과 그가 군대를 이끄는 모습은 하비루의 특징에 어느 것도 부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마므레 상수리나무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토호 세력인 헤브론의 세 맹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구출 작전에 나섭니다(4). 여기서 흥미롭게도 그의 주요 관심은 조카 롯이었으며, 다른 것들은 부수적이었습니다. 조카는 원문으로 ‘그의 형제’인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아브람이 예의 없는 롯을 친동생처럼 마음에 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훈련된 종들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사병 부대가 있었습니다. 318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동방 연합군을 추격합니다. 아브람 군대의 숫자 318명은 이미 아브람이 굉장한 부자이며, 군사로 활용 가능한 많은 종을 거느린 막강한 세력의 지도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렇더라도 이 숫자만으로는 동방 군대를 대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브람은 단까지 동방 군대를 추격합니다. ‘단’은 분명 단 지파가 정복했던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곳의 원래 이름은 라이스였습니다(사사기 18:29). 따라서 여기서 단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것은 명백히 연대기에 맞지 않는데, 이것 역시 우리가 앞에서 살핀 대로 후대의 계시의 추가 부분이며, 오경의 최종 편성자가 당대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리적으로 익숙한 장소를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 지파가 새로 개척한 이 지역은 헤르몬 산 아래쪽에 위치했습니다. 약속의 땅의 남쪽 경계는 브엘세바, 북쪽 경계는 단입니다(사사기 20:1; 사무엘상 3:20; 사무엘하 3:10; 17:11). 따라서 아브람은 자신도 모르게 섭리 가운데 약속의 땅 끝까지 다녀온 셈입니다. 그와 그의 군사들은 군대를 나누었습니다.

14절의 더 나은 번역은 이렇습니다: ‘밤에 그는 그들을 향해 자신과 그의 종들을(군사들을) 나누어 그들을 쳤다’. 이것은 아브람의 전술이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사방에서 공격한 야간 공습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적은 병력으로 적들을 효율적으로 격파한 기드온의 전술과 흡사합니다(사사기 7:19-23).

아브람의 군사는 멀리 다메섹 근처의 호바까지 그들을 추격해서 결국 빼앗긴 모든 포로와 전리품을 되찾아왔습니다. 300여명의 아브람의 군대가 어떻게 동방의 막강한 군대를 쳐부수었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합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동방 군대의 침략은 전면전이 아닌 약탈을 위한 소규모 침공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그 도시 국가의 왕들이 직접 출정하지 않고 대장들과 소규모 군대를 파견해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침략자는 여전히 왕들로 기록됩니다. 두 번째로 24절의 아브람의 군대는 318명만이 아니었음이 드러납니다. 헤브론의 동맹체인 위에 언급한 세 명의 맹주들이 합세했습니다. 아브람의 군대는 이보다 몇 배 큰 규모였을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17-20)

승리한 아브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신에게 복을 비는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로 화답합니다. 승리가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전적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내 것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 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복을 나누십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17-20)

아브람은 의기양양하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때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왔습니다. 여기서 소돔 왕의 이름은 거명되지 않습니다. 아마 그는 2절에서 소개되어 동방의 세력에게 패주했던 베라였을 것입니다. 이름을 생략한 것은 분명 그를 폄하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람을 영접한 곳은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인데,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을 의미하기에(시편 76:2), 그곳은 살렘 왕 멜기세덱의 관할 구역으로 보입니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들고 마중 나왔습니다. 포도주는 당시에 주로 잔치에서 사용되었으므로, 이것은 그를 위해 왕실 연회와 같은 큰 식탁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사무엘하 17:27-29).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수혜자인 소돔 왕은 빈손으로 아브람을 맞았습니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멜기세덱의 처신과 크게 대조됩니다.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히브리어는 ‘엘 엘욘’으로 이 자체로 하나님의 별칭으로 사용됩니다. 혹자는 엘이 가나안의 최고신이었기에 멜기세덱의 엘에게서 가나안 종교의 흔적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는 엘 엘욘을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20), 이것은 같은 대화에서 아브람이 사용한 표현과 동일합니다(22). 두 사람이 섬긴 엘은 같은 하나님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제한적으로 참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되어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스 땅에 살던 욥이 그러했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그러했습니다. 제사장이란 말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멜기세덱은 정교 분리가 되지 않은 고대 근동의 관행대로 왕이자 제사장을 겸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 기도를 하고, 아브람은 그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당시 십일조는 고대 근동의 보편적 제도였는데, 국세이자 종교세 개념으로 왕-제사장에게 바쳤습니다. 이 경우 아브람은 분명히 왕이 아닌 자신을 축복한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종교적 십일조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받던 조공이 이제 여호와께 십일조로 바쳐진다’. 훗날 이것이 표본이 되어 율법은 십일조를 왕이 아닌 하나님께 바칠 것을 규정합니다(레위기 27:32; 민수기 18:21 이하; 신명기 12:6 등).

 

재물을 탐하지 않는 아브람(21-24)

아브람은 자기 이해관계에 관심이 있는 소돔 왕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소돔 왕이 주는 것은 실오라기 하나라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 그는 이 승리가 하나님의 승리이며, 하나님만이 자신의 참 분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을 참 분깃이라고 여기는 자가 복의 통로가 됩니다.

21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21-24)

소돔 왕은 멜기세덱과 전혀 상반된 태도를 보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빈손으로 나온 그는 무례하며 태도는 더욱 뻔뻔합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포로들만 주고 다른 전리품은 모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돔 왕은 이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당시 관행상 전리품은 부하가 아니라면 직접 목숨을 걸고 전투를 수행한 사람의 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자신이 마치 승자이자 아브람의 상전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아브람은 그의 치졸한 제안을 두고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롯에게 기꺼이 좋은 땅을 양보했던 것처럼 소돔 왕에게 모든 전리품을 돌려줍니다. 그는 하나님께 맹세하며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소돔 왕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브람의 당찬 믿음이 엿보입니다. 다만 전쟁에 출정했던 군사들이 먹었던 식량은 변제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와 연합 작전을 펼친 세 명의 동지의 몫은 떼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재산인 군사들에게 넉넉한 수고비를 지불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로써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점점 다른 민족들의 복의 통로요 중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돔 왕은 아브람을 멸시했습니다. 이것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는 말씀이 성취될 것을 예고합니다. 앞서 12:3에서 아브람을 멸시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다는 설명을 한 바 있는데, 소돔은 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람을 멸시한 결과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을 축복했던 멜기세덱은 복을 받습니다. 멜기세덱은 시편에서, 신약의 히브리서에서 영원한 제사장 반차로 추앙받았으며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었습니다.


무엇이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되는 길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태도이며, 이웃과 자신을 별개로 나누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살아갈 때 천국의 힘하고 생명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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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4-01)


동방을 선택한 롯의 결과

창세기 14장 1-12절


 온 세상이 전쟁입니다. 총칼을 들어야만 전쟁입니까? 언론도 전쟁이고 정당도 전쟁입니다. 지역도 동서와 남복으로 갈렸습니다. 나라들마다 강력한 리더십을 세워서 국제 관계에서도 평화를 지우고 있습니다. 오직 자극의 이익뿐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어떤 곳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까?

 

창세기 14장은 격동하는 세계의 상황을 그립니다. 동서로 나뉜 고대의 세계 대전이 발생했습니다. 동쪽의 세력은 시날(바벨론)과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다섯 나라와 왕이 연합군을 결성했고, 서쪽은 소돔과 고모라를 중심으로 네 명의 왕이 규합하여 이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적 사건은 아브라함을 주인공으로 세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무대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의 세계 전쟁 발발(1-4)

가나안은 비옥한 땅이고 주요 무역로가 지나가는 요충지입니다. 강대국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격전지가 될 수 있는 위태한 땅입니다. 자신에게도 좋은 땅은 남에게도 욕망의 땅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좋은 나라이며, 공유와 공존의 나라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나라입니다.

1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1-4)

세상이 나라와 민족별로 나뉘어 분산된 후 격동의 시기를 보냅니다. 세상이 동서로 나뉘어 쌍방 간의 연합군이 격돌한 고대의 세계 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헌에 흔적이 없다 해서 결코 이 전쟁을 허구(fiction)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 전쟁은 운명을 건 전면전이 아닌 제국이 약탈을 위해 침략한 평범한 사건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들 입장에서는 남서쪽의 시리아-팔레스타인 공략은 무시해도 될 만한 역사였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이 사건은 침략과 통치기를 포함하여 15년 안팎의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에 불과합니다. 강력한 동방 세력의 침공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세력이 무기력하게 점령되면서 재산을 약탈당하고 주민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이 연출됩니다(4-12). 이는 제국의 세력 확장의 한 부분에 국한하기에 일반 역사에서는 무시해도 될 만한 사소한 전쟁이었을 수 있지만, 성경은 그것을 세상이 동서로 양분되어 벌인 세계 대전 급 사건으로 조명합니다. 이것이 세속사와 구원사의 역사관 차이입니다.

동편 연합군은 넷입니다. 시날(바벨) 왕 아므라벨이 가장 먼저 소개되지만 연합군의 리더는 엘람 왕 그돌라오멜입니다. 이 전쟁에서 아므라벨이 아닌 그돌라오멜이 연합군 총사령관 역할을 하는데, 이런 상황은 대제국의 왕인 함무라비의 위상과 맞지 않기에, 그를 함무라비와 동일시하는 시도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엘라살 왕 아리옥도 참전합니다. 엘라살 제국의 위치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카르케미시(Carchemish 구약의 ‘갈그미스’)와 하란 사이에 존재했던 일란주라(1lanzura) 나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 근처라고 제안합니다. 엘라살왕 아리옥은 고대 후리족의 이름인데, 이것이 이 전쟁 기사의 역사적 신빙성을 더해줍니다. 혹자는 마리의 왕 아리우크(Ariwuku)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참전합니다. 엘람 제국은 10:22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 매우 초기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강력한 제국입니다. 그돌라오멜은 성경 외의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여기서는 다섯 연합군을 이끈 막강한 권력자로 등장합니다. 네 번째 나오는 왕은 고임 왕 디달입니다. 고임은 ‘민족들’을 뜻하므로 이는 국가명이 아니라 국가 연맹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임 왕 디달의 이름이 히타이트 식의 이름이므로, 아마 고임은 히타이트와 인근 나라의 동맹군이었을 것입니다.

2절에서 다섯 개의 도시 국가로 구성된 서편 연합군이 등장합니다. 총사령관은 소돔 왕 베라입니다. 구약에서는 대부분 소돔과 고모라가 짝을 이루며 언급되는데, 고모라 왕은 비르사입니다. 이들 이름의 원래 어원으로 베라에 대해서는 ‘정복하다’라는 뜻의 아랍어 바라아(bara‘a)가, 비르사에 대해서는 ‘싫음’을 뜻하는 비르쉬(birshi)가 제안되나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왕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입니다. 시납과 세메벨 또한 이 전쟁 기사의 역사성을 엿보게 하는 고대 이름의 흔적이 있습니다. 서편의 다섯번째 왕은 벨라, 곧 소알 왕입니다. 소알은 지명이 분명합니다(창세기 13:10).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경우 소알 성 왕의 이름만 누락되기에 벨라를 왕의 이름으로 해석하자고 제안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소알 왕 벨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히브리어 어구는 그러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다섯 도시 국가의 위치는 오늘날의 사해 일대입니다(5).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소돔과 고모라, 소알의 위치를 중심으로 논쟁 중입니다. 일반적으로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 남단으로 추정하는데, 그곳에는 소금이 굳은 암석들로 가득차 있고 다량의 유황이 새어나옵니다. 싯딤 계곡은 사해 남동쪽에 위치하며 역청이 생산됩니다. 이 서방의 다섯 왕은 세를 규합하여 동방의 네 왕 연합군의 침략에 맞섰습니다. 양측은 염해, 곧 오늘날 사해의 싯딤 골짜기에서 격돌했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4절에서 간단하게 보고됩니다. 서방 연합군은 패하여 12년간 동방의 맹주 그돌라오멜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13년째에 서방 세력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영주들에게 더는 공물을 바치지 않고 독립을 꾀했을 것입니다.

 

그돌라오멜 동맹군의 침공(5-7)

욕망이 들 끊는 곳에는 전쟁이 일어나곤 합니다. 가나안 땅은 풍요로운 땅이기 때문에 전쟁과 갈등의 끊임없는 땅입니다. 지배와 반란이 반복되는 땅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는 한 마음이었습니다.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죽이는 추악한 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배가 없는 곳에 힘의 지배만 있고. 생명이 아니 죽음만 있습니다.

5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5-7)

고대의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식민 국가들을 제압하기 위해 동방 세력은 다시 4개 연합군을 결성하여 침략합니다. 이번에는 전쟁의 국면이 나름대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진격해 오면서 요단 동편의 성들을 차례로 점령합니다. 먼저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임 족속(‘르바 족’은 오류)을 격파했습니다. 요단 동편에 있는 그 성은 훗날 아모리 족속인 옥이 통치하는 바산 제국의 수도였습니다(신명기 1:4; 9:10). 인근의 가르나임과 가깝다는 이유로 아스드롯 가르나임으로 불린 듯합니다. ‘르바임’은 거인을 뜻하므로 르바임 족속은 골격이 매우 큰 종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모압 족속은 에밈으로, 암몬 족속은 삼숨밈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르바임이란 말이 때로는 덩치가 큰 무서운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신명기 3:11에서 바산 왕 옥이 르바임의 마지막 남은 자로 평가되지만, 그는 아모리 족속의 왕이었기에 이 경우 르바임은 ‘거인’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함이란 성도 함락됩니다. 그곳에는 수스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암몬 족속의 방언으로 일컬어진 삼숨밈과 동일한 종족일 것입니다(신명기 2:20). 삼숨밈은 르바임에 대한 암몬 식 이름입니다. 사웨 기랴다임에서는 엠 족속이 격파됩니다. 이 성은 함 인근에 위치했을 것인데, 역시 그곳에 있던 엠 족속이 제압되었습니다. 엠 족속(에임)은 신명기 2:10-11에서 거인 족속인 ‘에빔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에밈은 르바임에 대한 모압 방언입니다. 결국 르바임은 암몬에서는 삼숨밈, 모압에서는 에밈으로 불렸습니다. 동방 연합군은 강력한 골격을 지닌 르바임 세력을 모두 쳐부순 것입니다. 동방 연합군은 계속 남하하여 세일 산 일대를 공략했습니다. 그곳은 사해 남쪽의 높은 산악 지대로 훗날 에돔 족속의 영토가 됩니다. 그전에는 그 일대가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습니다(신명기 2:12,22). 호리 족속은 주전 제 2천년기의 고대 중동 문헌들에서 발견되는 후리 족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창세기 26:2의 ‘히위 족속’과 동일한 민족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더욱 남하하여 엘바란에 이릅니다. 이곳은 바란 광야로 이네겝(남방) 남쪽의 넓은 광야 지대입니다. 시내 반도 북쪽 지역인데 바란 광야와 네갭 지역의 경계선에 가데스바네아가 위치해 있습니다. 이들의 침략 경로를 종합하면, 홋날 암몬 땅과 모압 땅, 에돔 땅을 모두 점령했으며,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남쪽의 네집 지역까지 장악했습니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세력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궤멸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아브람이 거주하는 요단 서편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침략당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은 보존되고 그 경계선 밖의 모든 영역이 장악된 것입니다.

 

소돔 동맹군의 패배와 잡혀간 롯(8-12)

성도들이 자녀들을 향해 소돔의 실상과 같은 재물을 전해주지 않은 채, 물질적 혜택만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아브람이 약속의 땅을 공유하고 살자는 제안(13:9)을 거부하고 물질적인 풍요로운 곳만 찾아서 동쪽으로 이동했던 록도 국제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무기력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녀들을 롯이 점점 동쪽으로 가다가 결국 요단강을 건너서 모압과 암몬이 되어버린 세상의 길로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8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8-12)

그들의 비참한 패배가 간략히 보고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왕은 황급히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싯딤 골짜기로 쫓기더니 역청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소돔 왕은 살아남은 것을 볼 때(17) 이것은 역청 구덩이에 빠져 궤멸된 그 군대의 처참한 패배를 의미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남은 군대는 모두 산으로 도망하였습니다. 동방의 네 왕은 그들의 성에서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거두어 갔습니다. 재물과 양식에는 식량과 가축, 귀중품, 귀금속은 물론이고 포로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소돔에 거주하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잡혀갔으며 그의 모든 재산도 빼앗겼습니다. 그는 가장 좋은 모든 것을 차지하려 했지만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롯은 탐욕스런 국제 전쟁의 예매한 피해자만은 아닙니다. 풍요와 안락만을 좇아 힘을 숭상하는 큰 죄인들의 세계(13:13)를 선택한 롯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저 소돔의 실상을 전해주지 않은 채 그곳의 물질적 혜택만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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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3-01)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온 아브람

창세기 13장 1-18절


사람들은 대게보고 싶은 대로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치관이 되고, 그 가치관을 따라서 우리는 욕망하며, 그 욕망을 따라 우리의 시간과 돈과 관계가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람과 룻의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애굽의 바로와 고별한 후 아브람은 네게브로 ‘올라와’ 가나안으로 복귀합니다. 그의 복귀 시점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가나안의 기근이 해결된 후였을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복귀한 후 땅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으며, 이 일을 계기로 아브람과 롯은 결별하게 됩니다.

 

가나안으로 복귀한 아브람(1-4)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곱 번을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생각에 의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이제 실패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1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2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3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4)

아브람은 애굽에서 ‘복의 근원’이 아니라 ‘재앙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약속의 땅을 두고 애굽으로 내려간 일, 애굽에서 아내 사래를 누이로 속이는 일 등,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친히 개입하여 구원하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도록 하십니다. 이전보다 더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1)가 함께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바로가 아브람을 떠나보낼 때 썼던 표현과 동일합니다. 다만 여기에는 롯이 추가되어 있는데, 이것은 곧 일어날 롯과 관련된 사건을 예고합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잃은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해주며, 오히려 ‘모든 소유’라는 표현에는 그가 넉넉하게 복을 받고 돌아 왔다는 인상을 남깁니다. 귀환 대열의 목록에 롯이 마지막에 나열된 것은 아브람과 롯 사이에 벌어질 거리를 예고하는 듯합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아브람에게는 가축뿐 아니라 금과 은도 풍부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하면 그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심히 무거웠다’입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표현할 때는 ‘라브’가 많이 쓰이는데, 대신 ‘카베드’를 쓴 것은 앞서 기근이 매우 ‘심했다’(카베드)는 표현과 대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입니다. 여기서 은과 금이 처음으로 재산 목록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애굽에서 사래와 관련한 사건으로 바로에게서 많은 가축을 받았지만, 거기에서 귀금속을 얻었다는 말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량의 은과 금은 그가 애굽에서 여호와의 복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직전에 애굽 사람들에게서 은과 금을 받은 사건과 비교됩니다(출애굽기 12:35-36). 아브람의 애굽 이탈과 가나안 복귀는 출애굽 사건을 예고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아브람은 정확히 역순으로 가나안 땅에 복귀합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그들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이르는데, 이곳은 애굽으로 가기 전에 거처로 삼았던 곳입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제사했는데, 애굽에서 올라와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고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애굽에는 아브람이 예배를 드렸다는 표현이 한 곳도 없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결별(5-13)

세상은 피를 말리는 경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경쟁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라도 삶의 성패는 경쟁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배려할 줄 알고 나누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가나안과 브리스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골육’끼리 다를 수 없어 롯에게 거할 땅을 먼저 선택하게 합니다.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5-13)

아브람이 복을 받을 때, 조카 롯도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조카 롯에게도 복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근이 재앙이 아니듯이, 많은 재물이 자동적으로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 아브람과 롯 모두 더 부강해졌기 때문에 좁은 땅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롯에게 거주할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했고, 롯은 요단 계곡 근처를 선택합니다.

(1) 목초지를 둘러싼 분쟁(5-9)

롯도 아브람의 복의 수혜자로서 심히 많은 가축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복의 통로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축이 많아서 그곳의 목초지는 아브람과 함께 목축을 하기 에는 매우 협소하였습니다(6). 때로 축복이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은 반-유목민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들은 잠시 거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착할 곳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반-유목민은 유목민처럼 목초지를 찾아 계속 이동하지 않으며, 한 곳에 영구적 거주지를 마련한 뒤 목초지가 있는 주변 지역을 제한적으로 돌아다닙니다. 이때 우물은 생존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자산이 되며, 우물을 중심으로 거점을 마련합니다. 세력이 커지면 자주 목초지와 우물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곤 했습니다(창세기 26:12-22; 36:6-7). 아브람과 롯 사이에서도 각자의 목자들 간에 목초지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그들 곁에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7)는 말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기록한 이유는 그 땅이 더는 여유가 없었음을 시사하며, 아마 아브람과 롯이 정착을 다투던 지역에는 이 두 종족이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형제 의식을 강조하면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는 조카 롯에게 통 큰 제안을 내놓습니다. 롯에게 그가 원하는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합니다. 당시 관례대로 하면 아버지가 없었던 롯은 아브람에게 입양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롯의 후견인이면서도 그에게 권리를 양보하고 있습니다.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결정이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롯과 대조되는 아브람의 도량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온 결단일 것입니다.

(2) 아브람을 떠난 롯(10-13)

롯은 아브람의 제안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할 땅을 찾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눈에 가장 좋아 보이는 요단강 유역의 땅을 선택했습니다. 수자원이 풍부하고 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그 땅은 목축에 가장 적합한 땅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요단강 남쪽 계곡에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만일 소알과 소돔이 많은 학자들 견해대로 사해 서쪽에 위치한다면, 롯이 본 범위는 요단강 남단에서 더 남쪽으로 사해의 서쪽 분지를 포함할 것입니다. 롯에게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 즉 에덴동산 같았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애굽 땅은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토지인 나일강 삼각주 일대를 말합니다. 롯이 관찰한 요단 계곡과 사해 서편에는 샘들이 많아 여리고, 엔게디, 더 남쪽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여러 도시들에 사람이 몰려 살았습니다. 창세기는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기 전에는 그곳이 매우 기름지고 물이 넉넉한 땅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브람이 차지한 땅은 서쪽의 반대편으로 고지대로 강과 하천이 없고 샘도 많지 않아 물이 부족했으며, 항상 비를 기다려야 하는 지역입니다. 아브람은 물이 넉넉하지 않았던 벧엘 근처의 가나안 땅에 여전히 머물게 됩니다.

롯은 동쪽으로 이동합니다(11). 그가 선택한 땅은 요단강 남단 유역과 사해 서쪽 지역입니다. 이곳은 약속의 땅 동쪽 경계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곳은 약속의 땅의 변두리이며, 훗날 롯의 후손은 거기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 요단강 동편에서 모압과 암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롯은 여전히 약속의 땅의 일부에 남아 있으나 그곳은 변두리이며, 더 동쪽으로 진출할 때는 약속의 땅을 등지게 되는 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동쪽’ 모티프가 나타납니다. 롯은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보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창세기는 인간이 죄를 지은 후 하나님과 멀어질 때 동쪽으로 떠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24; 4;16; 11:2). 롯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따른 선택은 에덴동산에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던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탐욕이 재현된 일입니다. 롯이 동쪽으로 이동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는 소돔에서 멈추며 거기에 거주합니다(창 14:12). 그러나 소돔은 죄악의 범죄 도시였습니다(13). 결국 그가 선택한 땅은 심판을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인 모압과 암몬은 약속의 땅 경계선을 넘습니다.

 

이 땅을 네게 주리라(14-18)

아브람은 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롯에게 먼저 거할 땅을 선택할 권리를 양보한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라고 권하십니다. 아브람이 바라본 동서남북은 롯이 선택하고 차지한 땅까지 포함합니다.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4-18)

롯이 떠난 후 아브람의 심정은 단지 좋은 지역을 놓쳤다는 서운함보다도 롯을 떠나보낸 허전함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벧엘의 위치로 알려진 현대의 베이틴 시 일대는 높은 고지대입니다. 노트(M. Noth)에 의하면, 그곳에 가나안 땅 동서남북이 모두 보이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지중해가 보이고 동쪽으로 요단강 건너의 산들, 북쪽으로 헤르몬 산, 남쪽으로 사해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과 후손의 약속을 확증하십니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네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번성케 하리라’. ‘땅’과 ‘후손’은 아브라함 언약의 두 가지 핵심 요소이며, 앞으로 오경과 이후의 성경의 역사는 이 두 가지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 사방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니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그 땅의 사방 전체가 아브람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아브람은 이미 그 땅을 북에서 남으로, 다시 남에서 북으로 이동을 거듭했으며, 이후의 삶에서도 이 땅 전역에서 많은 사건들에 연루되며, 활동 범위는 북쪽의 단 지역까지 이릅니다(창세기 14:14).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헤브론으로 이동함으로써 실제로 그 땅을 두루 다닙니다. 그곳은 벧엘에서 남쪽으로 약 46km에 위치합니다. 헤브론 또한 이후 역사에서 벧엘 못지않게 정치적, 종교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중심지가 됩니다. 헤브론 인근의 ‘마므레’라는 곳에도 세겜 땅의 모레처럼 상수리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벧엘과 헤브론의 중간 지점에 예루살렘이 소재합니다.

아브람은 여기서도 아마도 이방인들의 제의 장소로 추정되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새롭게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분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데로, 언약하시고 지켜주시는 참 신실한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신이 보고 좋은 데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눈을 들어 보라하신 것을 보았을 때, 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면서 아브람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다시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은 새로운 눈이 열렸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애굽으로 내려갔고, 자신이 고안해낸 계획으로 안전을 도모하려 했던 그가 이제 하나님께서는 보라고 하실 때까지는 스스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신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어떤 눈을 갖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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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2-01)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 11장 31절-12장 9절


우리들은 항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안고 살아갑니다. 삶을 살다보면 답이 안 나오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럴 때 보통 삶을 지탱해줄 우리가 가진 ‘어떤 것’들로부터 답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저축해둔 돈일수도 있고, 안정적인 직업이나 원만한 인간관계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살려면 그런 것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은 큰 전환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심과 더불어 아브람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구원사뿐 아니라 세속사에서도 중요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따라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후에 아브람의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이 창세기의 핵심적인 관심사입니다.

 

데라 가족이 우르를 떠남(31-32)

바벨탑은 하나님을 떠난 아담적 인간의 반역의 절정입니다. 스스로 ‘큰’ 성과 대를 쌓았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드날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주와 불명예로 끝났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가야 할 사람과 땅을 정하시고, 그분의 통치하시는 나라를 시작하십니다.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31-32)

데라는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여호수아 24:2). 그는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이사합니다. 그의 이사에는 아들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과 그의 아내만 동행한 것으로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후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증거 되는 바로는 당시 나홀과 밀가도 동행했음이 명백합니다(창세기 22:20-24; 24:10 이하). 롯이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로 표현되는 것은 죽은 하란의 자리를 롯이 현재 대신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데라가 죽은 후에는 아브람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데라는 애초에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떠나려 했던 것이 드러납니다. 대조적으로 12:1-4에서는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 다음 아브람에게 이 지시가 내려진 것으로 이야기됩니다(창세기 12:1-4).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이 지시를 그 이전에 우르에서 이미 받았다고 설교합니다(사도행전 7:2-4). 아마 아브람은 이미 우르에서 환상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고 그를 설득하였으며, 데라는 아브람의 말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가족과 더불어 도중에 하란(인명 하란과 히브리어가 다름)에 도착하여 거기에 일단 정착했습니다. 거기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확정적 계시를 전달하고자 재차 나타나시어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명령하신 것으로 보입니다(창세기 12:1-4).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습니다(32). 그가 205세에 죽을 때 아브람은 75세였는데(창세기 12:4), 이러한 나이들은 계산이 들어맞지 않기에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사도행전 7:4에서 스데반은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사망한 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여행했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 창세기와 내용상 모순이 발생합니다. 11:26에서 데라의 나이 70세에 아브람이 출생합니다. 32절에서 데라가 205세에 죽는다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12:4에서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납니다. 이걸 계산하면,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날 때 데라의 나이는 70+75=145세가 됩니다. 이 경우 아브람은 데라가 살아 있을 때 하란을 떠났으며,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생존한 뒤 205세에 죽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웬함은 이 셈법을 따라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육신의 아버지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떠나기로 결단한 아브람의 순종은 더욱 값어치가 있다고 주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스데반의 설교와 전혀 들어맞지 않으며 창세기 자체 내에서도 모순을 일으킵니다. 만일 11:26의 세 아들의 순서가 출생 순서가 아니라면, 그리고 만일 아브람이 막내였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정황을 보건대, 출생 순서는 하란, 나홀, 아브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란이 조기 사망했는데, 하란의 딸이 나홀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나홀이 아브람보다 형이라는 것을 시사 합니다. 결국 데라가 70세였을 때 태어난 장남은 하란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이 맨 선두에 배치된 이유는 하란이 사망한 뒤 장자권이 차남 나홀이 아닌 아브람에게 넘어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람이 막내였다면, 앞서 계산대로 그는 데라가 130세에 낳은 아들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205세에 하란에서 죽고 아브람이 당시 나이 75세에 하란을 떠났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아브람을 부르심(12:1-4)

하나님의 목적은 ‘떠나라’와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안전한 조건을 버리고 불확실성과 마지의 세계를 향해 말씀만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 당신이 열어 가시는 나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는 기존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결단에서 시작합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1-4)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지시하시고 몇 가지 약속을 보장하십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직접 나타나셨다고 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아마 환상이나 꿈으로 그에게 지시를 내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스데반은 그가 하란에 있기 전에 이미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4절을 볼 때, 그가 이 지시를 받은 것은 하란에서입니다. 현재의 지시는 하란에서의 지시와 달리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확정적 계시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말씀하시면서 땅을 포함해 크게 네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① 큰 민족(후손); ② 복; ③ 큰 이름; ④ 복의 통로 등 입니다.

먼저,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은 씨에 대한 약속으로 해석해야 합니다(창세기 22:17; 32:12). 두 번째 약속은 복인데, 아마 여기에는 이미 전제된 땅의 선물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약속은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그의 후손을 통해 아닌 아브람의 명성이 널리 알려질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높이시는 큰 이름(셈)은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자’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것과 대조됩니다. 결국 사람이 높이려 한 명성은 실패했으나 셈의 후손의 명성은 하나님에 의해 높아집니다. 네 번째의 ‘너는 복이 될지어다’는 난해합니다. 이것은 ‘너는 복의 구현자가 된다’는 뜻으로 단순히 복을 받는다는 의미이거나,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앞서 이미 복이 선언되었기에 복의 근원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3)라는 부연 설명에서 뒷받침됩니다. 따라서 ‘너는 복이 되라’는 말은 그가 열국의 복의 통로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3절은 이러한 약속된 복을 강조하기 위한 부차적 설명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지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고, 롯이 그와 동행했습니다. 아브람의 나이 75세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람(12:5-6)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복덩리라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의식을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느냐? 세상 사람들하고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동일한 말을 하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가문을 기독교 명가문으로 만들겠다는 이 약속은 교회를 세우고 나라를 세우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5-6)

아브람은 하란에서 모은 모든 재산을 모아 짐을 꾸리고 가나안으로 이사했습니다. 그의 이동 경로는 가나안 북쪽에서 남쪽 방향입니다. 그는 세겜 땅의 모레 상수리나무에 여장을 풉니다. 세겜은 가나안의 중앙에 위치하는 고대로부터 매우 중요한 중심 도시였습니다. 거기 모레라는 곳에 특별한 상수리나무가 있었는데, 당시 그런 큰 나무 아래에서 주술을 행하고 신탁을 받는 등 중요한 제의적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신에게 신탁을 받던 이곳을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통해 성스럽게 만드시며(7), 거기에서 모종의 진정한 신탁을 주실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다는 말은 암시를 위한 의도적인 첨언입니다. 이것은 그 땅에서 아브람의 정착이 쉽지 않을 것을 예고합니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9)

하나님 나라는 복의 나라입니다. 생명의 나라입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로 처음부터 한정되지 않고 생명의 하나님께 반응하는 이는 누구든 차별없이 누리는 생명입니다. 축복은 축복으로, 저주(사망)는 저주로 돌려받는 나라입니다. ‘나’를 떠난 ‘우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7-9)

하나님께서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람에게 나타난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추정컨대, 표면적으로는 이 장면이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초의 신현이지만, 우르에서 이미 그에게 나타났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브람은 그곳에서 가나안에서의 첫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가나안의 제단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제사를 바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8절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제사는 자연히 수반되었을 것입니다. 이 첫 제사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뒤 바친 첫 제사를 연상시킵니다. 노아가 새로운 땅에서 제사와 더불어 새 출발하였듯이, 아브람 또한 새로운 땅에서 제사와 더불어 새 출발을 합니다. 아브람은 거기서 벧엘을 향해 옮긴 뒤 벧엘 동쪽 산에 장막을 칩니다. 벧엘과 아이의 중간 지점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는 벧엘 동쪽으로 약 3km 정도에 위치합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다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고는 남쪽의 네겜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가나안 북부에서 중부, 남부까지 모두 여행합니다. 아브람의 이런 여정은 분명히 섭리적입니다. 장차 그의 후손은 그가 최초로 여행했던 가나안의 모든 지역을 차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나라는 복읨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서로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나입니다. 상대방의 저주를 통해 나만 서려는 이가 들어설 수 없는 나라입니다. 나를 버리고 주께 순종할 때 참여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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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02)


은혜와 구원과 소망의 족보

창세기 11장 10-30절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졌던 민족들 중에 ‘아브람’까지 이어지는 셈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하나님의 언약이 노아와 셈을 거쳐 어떻게 ‘아브람’까지 이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반역의 세계에서 자멸의 길을 가는 인간들에게 보이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줍니다.

 

새로운 족보와 더불어 서사의 무대가 바뀝니다. 이것은 택자의 계열인 셈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등장을 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12장에서 등장할 아브람의 뿌리를 직전에서 추적합니다. 셈의 후손들은 많은 자녀를 낳았지만, 비택자의 후손들은 모두 쳐지고 하나의 선택된 계열만이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데라의 등장과 더불어 셈의 족보는 마무리됩니다.

 

셈에서 아르박삿까지(10-15)

셈의 족보는 단순한 아브라함의 가계도가 아니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여줍니다. 섬과 탑을 쌓아 인간의 힘을 결집하려 시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심판 중에도 구원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죄인이던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10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10-15)

셈의 족보가 여기에 등장하는 이유는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등장을 준비하기 위한 무대이자 혈통적 배경입니다. 셈은 100세 되던 해, 곧 홍수 후 제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습니다. 아르박삿이 태어난 해에 대한 언급은 앞선 창세기의 기록과 모순되어 보입니다. 5:32에서 노아는 500세였을 때, 셈과 함, 야벳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7:6에서 홍수가 왔을 때 그가 600세였습니다. 그때 셈의 나이는 100세입니다. 여기서는 100세 되던 해가 홍수 후 2년째라고 언급하기에 모순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야벳이 장남이었으며 그가 노아 500세에 태어났다고 추론합니다.

10:21의 ‘야벳의 형’이라는 히브리어 어구는 ‘형인 야벳’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경우 5:32에서 노아 500세에 낳은 아들들의 실제 출생 순서는 야벳, 셈, 함일 것입니다. 야벳과 셈의 나이가 두 살 터울이라면 이 문제가 깨끗이 해결됩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았으며 셀라는 에벨을 낳습니다. 에벨은 매우 중요한데, 앞서 말한 대로, 히브리인 명칭의 기원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5장에서 인간 수명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사실입니다. 5장에서 장남 출산 시의 평균 나이는 156세, 장례 시의 나이는 858세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각각 36세와 300세로 급격히 줄어듭니다. 특히 그들이 첫 아들을 낳는 나이는 30대로 일반적인 관례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날이 120년이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120년을 홍수 때까지 남은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홍수 심판과 더불어 이후의 수명 심판이 선고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수명은 11장 내에서도 점점 급속도로 줄어갑니다. 평균을 따지자면, 아르박삿부터 에벨까지 수명은 약 450년, 벨렉부터 스룩까지 수명은 약 250년으로 무려 200년이나 줄어듭니다. 셈은 600세에 죽지만, 족보의 마지막 인물 데라의 사망 연령은 205세에 불과했습니다. 이 연령은 뒤로 갈수록 줄면서 오경의 마지막 인물 모세가 예고된 인간의 수명인 120세에 죽습니다. 모세 이후 모든 인물의 연령은 120세 이하입니다.

 

에벨에서 데라까지(16-26)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세 아들들 가운데 셈을 선택하시고, 에벨의 아들들 가운데 벨렉을 선택하십니다. 욕단은 바벨의 아들들 가운데 벨렉을 선택하십니다. 욕단은 바벨의 길을 가지만, 벨렉은 하나님 경외의 길을 갑니다. 아담의 열째 후손으로 노아가 나온 것처럼, 셈의 열째 후손으로 아브람이 나옵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 주권의 역사입니다.

16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25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16-26)

앞서 말한 대로 연속되는 택자의 계보에서 에벨은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벨렉을 낳습니다. ‘분리, 나눔’을 뜻하는 그의 이름은 10:25에서 진술된 대로 세상의 나누어짐을 반영한 이름입니다. 이것은 벨렉의 탄생과 더불어 택자와 비택자가 나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벨렉은 선택된 계보를 이어가고 그의 동생 욕단은 선택되지 못한 계보를 이어갑니다. 벨렉은 르우를 낳았는데, 르우는 성경 전체에서 여기에서만 언급되는 감춰진 인물입니다. 르우는 스룩을 낳았습니다. 이 인물 역시 하란 지역에서 비슷한 지명은 발견되었으나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스룩이 낳은 나홀이란 인물의 이름은 중요합니다(22). 그는 아브람의 할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브람의 친형제 중 하나 역시 그 이름이 나홀입니다(26). 나홀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를 낳았습니다. 데라라는 이름 또한 그것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셈족인 아모리식 이름이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으며, 비슷한 이름을 가진 유적지도 발견되었습니다. 셈의 족보와 더불어 아브람이 등장하기 전 인류의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태고의 인간 역사는 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아브람의 등장이 필요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다음은 월키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의 패턴을 정리한 도표를 새로 각색한 것입니다.

 

데라의 족보(27-30)

데라의 후손을 기술하며 다음 이야기에 등장할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특히 사래가 임신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다는 기술은 데라의 열째 가족을 채우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합니다. 사망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 이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27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27-30)

여기서 셈의 족보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족보가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데라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는 11:27-25:11에 절친 긴 아브라함 이야기를 포괄합니다. 이 새로운 톨레도트 단위의 주인공이 아브라함이기에 이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족보’라는 제목으로 도입되지 않는 것은 난제입니다. 그러나 웬함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은 후 135년을 더 살다 205세에 죽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까지 생존한 인물로서 이 죽보의 주인공이 될 사격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사실상 창세기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이 족보의 제목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수수께끼입니다. 데라는 세 아들인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습니다. 이것은 출생 순서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아브람’의 이름 뜻은 ‘높으신 아버지’ 혹은 ‘아버지는 높으시다’란 뜻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킬 수 있으나, 단순히 위대한 아버지나 조상 혹은 귀족 집안을 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약간 개명된 그의 이름 ‘아브라함’에 ‘많은 자(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 하란에게서 롯이 태어난 것이 언급됩니다. 하란은 우르에서 일찍 죽는데(28), 그 후 아버지를 잃은 롯이 고인이 된 아버지 하란를 대신하여 데라 아래 있다가 데라가 죽은 후 아브람에게 입양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롯이 아브람과 계속 동행하는 이유이며, 여기에 특별하게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란이 죽은 고향 우르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이 매우 치열했지만, 이 우르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우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갈대아의 우르는 주전 삼천 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의 유명한 도시 국가가 분명합니다. 우르는 하란과 더불어 달의 신인 신(Sin)을 숭배하는 중심 도시였는데, 아마 데라의 가족들 또한 이 우상을 섬겼을 것으로 추론됩니다(여호수아 24:2,15). 그들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데라의 후손 라반의 집에서 드라빔을 숭배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창세기 31:30-32).

참고로 이곳의 ‘갈대아’라는 명칭은 아브라함 시대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갈대아인들은 주전 천 년경에 바벨론 지역에 등장했으며, 그 이후에 그 땅이 갈대아로 불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세오경을 전수받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 오경을 읽는 후대의 독자들이 지리적 배경을 이해하도록 추가 설명을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추가적인 계시에 의한 성경 본문의 보완은 구약의 정경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아브람 이야기에서 등장할 ‘단’이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하는데, 사래는 그의 의붓 누이였습니다. 두 사람의 아버지는 데라지만 배다른 남매였던 것입니다. 나홀은 밀가와 결혼하는데, 그의 형제 하란의 딸입니다. 즉, 나홀은 조카와 결혼한 것입니다. 하란은 밀가와 더불어 여기서만 등장하는 다른 딸 이스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웬함은 레위기에서(18:8; 20:17) 친누이나 반누이와의 결혼은 금지되지만 조카와는 가능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레위기 법은 삼촌 관계인 이모와 고모와의 결혼을 금지하는데, 여기에는 역시 삼촌 관계인 조카와의 혼인 금지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레위기 법 이전 구약의 족장 시대에는 레위기에서 금지된 관계의 결혼들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나홀은 여덟 명의 아들을 낳는데, 그중 한 명이 라반과 리브가의 아버지인 브두엘입니다. 라반과 리브가는 나홀의 손자와 손녀입니다.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했다는 보고와 더불어 11장이 마무리됩니다. 모든 후손들이 자녀를 낳았다고 보고하고 있는 가운데 사래의 불임에 대한 보고는 눈에 띕니다. 이 불임 소식은 다음에 전개될 아브람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합니다.


바벨탑 시간 이후 민족과라가 나뉘고 혼잡한 세상이 되었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줄기차게 이어져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위험과 위기와 거센 도전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역사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를 믿으며 신앙의 계보를 이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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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01)

 


바벨탑 이후 분산된 인류

창세기 11장 1-9절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욕망은 어디서 멈출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입니까? 자기 생존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망상은 얼마나 지속된 것입니까? 본문은 인류 역사가 추구해온 배반과 반역의 역사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이미 죄성이 유전되는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졌습니다. 특히 홍수 후에 인간이 다시 번성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또 다시 그 교만성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때까지 온 땅의 많은 종족들이 갈라져서 살았으나 아직은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는 야심과 흩어짐을 면하려는 계획으로 바벨탑을 건설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시날 평지로 이동한 인류(1-2) 

인류는 시날 평지를 만나 큰 도시국가와 같은 성을 쌓고 거대한 탑을 건설합니다. 심판에 대한 저항이며,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주 되심을 부정하고, 복 주심을 욕망의 도구로 삼는 인간의 교만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벨 성의 균열을 위해서는 세상을 배신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1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1-2)

창세기 11장은 시간적으로 인류가 흩어지는 것을 보고하는 10장에 앞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여 집니다.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을 부르는 12장을 준비하기 위해 12장의 무대로 11장을 여기에 배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학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든지 당시 온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사실 언어학적으로도 인류의 6천여 개의 언어는 결국 한 뿌리, 즉 단일 기원을 가진다는 견해가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는 표현에 대해 해밀턴은 당시 언어는 세계 공용어(언어)와 통상어(말)로 구분 되었기에 둘은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민족들은 고유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당시 언어가 하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중복어법일 뿐입니다.

인류는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 정착했습니다. 구약에서 언제나 ‘아무개가 자리 잡았다/거류했다’는 표현이 나올 때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징조입니다. ‘동방’은 단순한 방향 지시만은 아닌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의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날 땅은 구약에서 부와 권세를 상징하는 땅이었습니다. 예컨대, 여호수아 7:21에서는 여리고 성의 헤렘으로 바쳐진 모든 물건들에서 아간이 훔친 장물 목록에 시날에서 생산된(시날 산) 옷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바벨 지역이 높은 수준의 산업과 문화를 지녔음을 엿보게 합니다.

 

바벨탑 건축과 인류의 결집(3-5)

반역을 꾀할 수 없는 원인이 한 언어에 있음을 아시고 언어를 섞어놓으십니다. 언어의 혼란은 힘을 분산시켜 악의 응집력을 약화시켰고, 국가 단위로 견제와 경쟁을 유발시켜 통합된 거대 제국의 출현을 막았습니다. 잘못된 도모에 대한 심판이자 세상을 보존하시려는 온혜로운 조치입니다.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3-5)

시날 평지에 집결한 인류는 거대한 성을 쌓아 강력한 제국을 구축하길 꿈꿨습니다. 대규모 도시 건축 공사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돌을 대신해서 단단한 벽돌을 구웠으며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진흙이 아닌 역청으로 벽돌을 구웠다고 이해해선 안 됩니다. 진흙으로 번역된 ‘호메르’는 진흙뿐 아니라 회반죽을 의미합니다. 역청은 원유가 분출되는 지역에서 채취한 현대의 콜타르나 아스팔트로 보입니다. 이것을 벽돌 사이에 발라 단단히 붙게 만듭니다. 벽돌 건물에서는 회반죽보다 역청이 훨씬 더 건물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산이 거의 없이 광활한 평지가 펼쳐져 건물도 대부분 돌이 아닌 벽돌로 지었습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신전을 비롯한 건축물에 돌을 사용하면서 돌들 사이와 벽면에 회반죽을 발랐습니다. 역청을 바르며 벽돌로 올린 건물은 대단히 견고하여 오늘날에도 그런 건물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도록 올리려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말자’고 뭉쳤습니다. 이것은 대도시 건축입니다. ‘탑’은 아마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지구라트라는 신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신에게 올라가 신이 그 신전에 내려오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이름을 내자’고 선언합니다. 문자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 이름을 만들자’는 뜻입니다. 이름의 히브리어 ‘셈’은 노아의 선택된 계열의 아들 셈과 동일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업적을 이루어 자신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선택된 계열의 이름을 셈으로 지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계보를 통해 그들의 이름을 높이는 위대한 일을 할 것임을 시사 합니다.

또한 인간은 ‘흩어짐을 면하자’고 말하며 뭉칩니다. 인간은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흩어짐은 힘의 분산을 의미하며 소통과 문명의 구축에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육과 번성을 통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규례와 명령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언어의 혼잡과 인류의 분산(6-9)

바벨은 음행의 포도주로 유혹하는 음녀의 도성이요, 인간 정신과 문명이 집결되는 곳이자 유례없는 번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무너질 것이고 세상의 왕들과 상인들은 울게 될 것입니다. 음녀의 미혹에 취하지 말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기 바랍니다.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7-9)

하나님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내려다보셨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내려오심’이라는 표현에는 인간의 시도에 대한 비아냥이 엿보입니다. 인간들은 엄청난 노력으로 탑을 높이 쌓았으나 정작 하늘에서는 그 탑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한 업적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내려온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비웃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하늘에 계신 이가 옷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편 2:1,4). 인간은 하늘에서 볼 때 메뚜기 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이사야 40:22).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헛된 망상과 도전을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혈통의 분산이 아닌 보존을 추구하며 단일 대오를 형성하려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강제로 흩기로 결정하십니다. 이들의 행동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만일 이대로 두면, 인간은 통제 불가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무한히 정당화될 수 없으며 제약되어야 합니다. 계획과 행동에 제약이 없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인간에게는 선악과의 제재가 필요하고 율법과 계명의 규제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제재를 가하시어 인간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없게 하는 것처럼 하늘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려가서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자’고 말씀하십니다. 혹자는 5절에서 이미 내려오신 하나님이 여기서 다시 내려온다고 말하는 것을 모순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의 문학적 기법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상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계시고 그것을 통제하며 간섭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자(천사)를 지상에 보내어 모든 것을 통제하십니다. 지상도 하늘 왕이신 하나님의 창조의 제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우리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천사들과의 천상 어전회의의 언어 형식을 사용하나 이것은 천사들과의 협의에 의한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결정권의 행사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는 표현은 분명히 ‘우리가 벽돌을 굽자’는 것과 대조됩니다. 인간은 벽돌을 구워 흩어짐을 면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갑작스런 언어의 혼잡으로 그들은 더 이상 단합하면서 건축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언어의 분산은 힘의 분산입니다. 이로써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던 자들이 흩어집니다. 그들이 가장 원치 않았던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여태까지 추방과 멀어짐은 언제나 죄의 결과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가인이 또한 그러했으며, 이제 시날 땅의 인류가 그러합니다. 여기서 도시 건설의 중단만 언급되고 탑에 대해 침묵하는데, 탑보다는 분산을 거부한 거대한 도시의 건축 자체가 하늘을 향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영원한 제국을 만들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했습니다. 시날 땅의 이름이 바벨로 명명되었습니다. 이 이름의 기원이 언어 혼잡 때문이었다는 원인론적 설명이 덧붙여집니다. 여기서 ‘바벨’에 ‘혼동’, ‘섞임’이란 의미가 부여되었으나, 원래 이 이름은 아카드어 ‘밥일루(Bab-ilu)’에서 기원했습니다. 일루(ilu)는 무슬림의 신 알라의 정확한 이름 하일라(‘그 신’)에서 보듯이 ‘신’이란 뜻입니다. 밥일루는 ‘신의 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바벨이란 이름과 ‘뒤섞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발랄’을 연결시켜 거기에 ‘혼동’, ‘혼란’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바벨의 언어 분산이 일시적으로 원 상태로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사도행전 9장). 천하 각국에서 온 예루살렘 방문객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터져 나온 소리를 마치 한 언어로 소통하는 것처럼 모두 자기 지역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복음이 한 언어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로써 인간 나라의 건축이 좌절되도록 언어가 분산되었으나, 하나님 나라 건축을 위해 언어의 장벽이 사라졌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을 때 인간의 성취는 높아 보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할 때 인간의 문명은 크고 위대해 보입니다. 하지만 창조와 구원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인간 역사의 크기는 바르게 보이고, 인간의 망상이 다다르게 되는 결과를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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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0-01)


노아 아들들의 족보

창세기 10장 1-32절


창세기는 열 개의 족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족보 기록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정적인 점, 반복되는 강조점, 배열의 순서, 기록된 인원의 숫자, 구성 방식 등을 세심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노아 후손의 이름과 그들이 거한 곳, 성향들을 볼 때, 족보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서사는 새로운 족보로 전환됩니다.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입니다. ‘홍수 후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명령대로 노아의 후손들이 세계로 번성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32절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이 후손의 번식이 홍수 후의 축복의 결과임을 말해줍니다.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이후에도 셋만 등장하며, 이 세 아들을 통해 온 민족들이 기원했습니다.

 

야벳의 족보(1-5)

야벳의 아들 마대는 메데를, 야완은 헬라를, 달시스는 서반아 남방 가리킵니다. 함의아들로 구스는 에티오피아를, 마즈라임은 이집트를, 가나안은 팔레스타인을 많고, 니므롯이 특징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셈의 아들들은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거주합니다.

1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1-5)

노아의 세 아들인 셈, 함, 야벳의 족보가 설명됩니다. 2절에 야벳의 일곱 아들들이 나열됩니다. 그는 손자도 일곱입니다. 첫 아들 고멜은 에스겔 38:6에서 바사와 구스와 함께 곡의 연합군을 형성한 민족으로 언급되는데, 이들은 러시아 남부에서 살았던 키메르족(Cimmerian)이며 인도 유럽 계통의 민족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주전 7-8세기경에 아시리아에 상당한 압박을 가하다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에 정착했습니다. 마곡에 대해 요세푸스는 이들을 시키티안족(Scythian)과 동일시하나 분명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은 리디아와 관련시킵니다. 마대는 아시리아 본문에 나타나는 인도 유럽 계통의 민족으로 후대에 이란 북서부에 거주한 메대 사람들입니다. 야완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입니다(에스겔 27:13; 이사야 66:19; 다니엘 8:21;10:20). 두발과 메섹은 에스겔에서 여러 번, 나란히 언급됩니다(에스겔 27:13; 32:26; 38:2-3; 39:1). 이들은 중앙과 동부의 아나톨리아에서 거주했는데, 그들을 티바레노이 (Tibarenoi=Tiberia)와 모스코이(Moschoi)로 불렀습니다. 디라스(대상 1:5)는 아마 에게 해 지역에서 온 해양 민족인 투르크샤족(Turcsha)일 수 있습니다. 3절에서 고멜의 세 아들이 소개됩니다. 아스그나스(역대상 1:6; 예레미야 51:27)는 남부 러시아에서 온 스키티아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리밧은 몇몇 추정된 민족이 있으나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도갈마(에스겔 27:13-14; 38:3-6)는 시리아 북쪽의 카르케미쉬(갈그미스) 지역에 거주했던 아르메니 안족으로 보입니다. 야완의 아들들은 넷입니다. 엘리사는 헬라족의 한 혈족인 엘리스족으로 추정됩니다. 해양 민족인 그들은 사이프러스 섬 지역에 거주했습니다(역대상 1:7; 에스겔 27).

달시스는 요나서에서 다시스로 번역되었습니다(요나 1:3; 4:2). 오늘날 스페인 지역입니다. 깃딤은 사이프러스(구브로) 섬으로 간주됩니다(이사야 23:1, 12; 예레미야 2:10). 이 섬은 사도행전에서 자주 등장한다(사도행전 4:36; 11:19; 13:4; 21:16). 도다님은 두로 북쪽의 거주민인 다누나족(Danuna)일 수 있습니다. 야벳의 후손은 여러 민족으로 나뉘어서 나라를 구성했습니다(5). 야벳의 후손은 주로 바닷가 땅에 자리를 잡았는데, 히브리어 이는 섬뿐만 아니라 해변과 연안 지역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들은 무역에 능한 해양 세력을 구축했으나 야벳 후손의 분포 지역은 이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한편, 이렇게 여러 민족들과 나라로 나뉜 상황은 바벨탑 사건이 이미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10장은 바벨탑 사건 이후의 세계와 민족의 상황으로 보아야 합니다. 서사의 시간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함의 족보(6-20)

70명 숫자는 완성될 인류를 대표합니다. 노아를 통해 옛 인류를 완성하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새 인류를 짓길 원하셨습니다. 70인 전도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백성으로 온 땅을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새 인류 창조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6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13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15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19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6-20)

 족보 중간에 함의 자손 가운데 니므롯의 업적과 그의 성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이는 그가 시날 땅 바벨 성의 주인이며 다른 주변 지역들에 영향을 미친 자로서 바벨탑 사건(11:2)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 구스의 후손(6-12)

함의 네 아들이 소개됩니다. 구스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지역 종족입니다. 구스는 흑인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예레미야 13:23). 미스라임(미츠라임)은 이집트를 뜻하는데 쌍수인 이유는 그 지역이 나일강 하류의 상이집트와 상류의 하이집트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붓은 리비아족으로 추정됩니다(나훔 3:9). 가나안은 가나안 지역에 넓게 분포한 인종인데 주로 지중해 연안 쪽에 거주했습니다. 가나안은 여러 종족으로 나뉘었습니다(15). 구스의 아들들은 모두 남부 아라비아 일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월라가 2:11의 에덴 근처의 그곳과 동일한 지명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곳이 남서부 아라비아의 어느 장소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창세기 25:18; 사무엘상 15:7). 8절에서 독자들의 주목을 끄는 인상적인 진술이 나타납니다. 구스에게서 니므롯이란 고대의 영웅이 태어났습니다. 니므롯이 그가 ‘첫 용사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용사로 군림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으로 유명했습니다. 문자적으로 ‘사냥의 용사’ 인데 강조점은 ‘용사’를 뜻하는 ‘기보르’에 있습니다. 그 용사이며 사냥에도 매우 능숙합니다. 사냥은 그의 호전적인 성향을 잘 드러냅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그가 여호와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 아래 용감한 사람’과 같이 최상급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는 시날 땅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병합해서 대제국을 이루었습니다. 시날은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 지역을 가리키는 관행적 용어입니다(창세기 11:2; 14:1,9; 여호수아 7:21; 이사야 11:11; 다니엘 1:2; 스가랴 5:11). 시날 땅의 그의 제국은 바벨, 에렉, 악갓(아카드), 갈레로 구성되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남쪽의 시날(바벨론)에서 북쪽의 앗수르(아시리아) 지역으로 진출했습니다. 앗수르에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레센을 건설했습니다. ‘이는 큰 성읍’이라는 수식어는 히브리어 문장으로 볼 때 앞의 성들 중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레센일 수도 있으나 니느웨의 위상과 이 성에 대한 요나서의 인상적인 묘사를 볼 때 니느웨로 볼 수도 있습니다.

(2) 미스라임과 가나안의 후손(13-20)

미스라임의 여러 후손들이 나열됩니다. 이들은 주로 이집트에 자리 잡았으며, 그 외 지중해 섬들과 해안 지역에 널리 분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슬루힘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으나 갑도림 (갑돌)은 크레타 섬에 거주하는 크레타 인을 가리킵니다. 후대에 아모스 9:7에서는 블레셋이 갑돌에서 나왔다고 말하며, 그들은 갑돌 섬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예레미야 47:4). 가슬루힘과 갑도림(갑돌)이 나란히 배치된 것으로 보아 둘 다 타당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주로 페니키아 연안의 해안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장자 시돈은 두로와 더불어 페니키아(베니게)의 핵심 도시국가였습니다. 헷은 거대한 히타이트 제국을 이룬 히타이트 족과 다른 종족일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족장 시대에 가나안의 주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세기 23장 외). 여부스 족은 유명한데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그 외 가나안의 아들들은 나중에 가나안의 여러 종족들을 구성합니다. 그들의 경계는 주로 가나안 땅 서편의 지중해 연안과 소돔과 고모라 일대입니다.

 

셈의 족보(21-32)

큰 성읍들을 건설했다는 표현은 힘과 잔악함을 노래했던 라멕을 연상하게 합니다. 가인의 후손에게 역사했던 어둠의 세력이 새 인류 가운데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시날 땅, 바벨의 정신으로 구축되는 세상에서 주를 따라 십자가 승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니므롯을 세상의 첫 용사로 언급합니다. 

21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하살마웨ㅅ)과 예라와 27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31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21-32)

맨 마지막으로 셈의 후손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셈의 첫 번째 아들 엘람의 후손인 엘람 족속은 바벨론의 동쪽에 있는 산지에 거했습니다. 앗수르는 앗수르 지역과 그곳의 거민들을 칭하는 이름인데, 함족인 니므롯은 앗수르에서 여러 성읍들을 건설한 적이 있습니다.

(1) 아람과 아르박삿의 후손(21-24)

가장 중요한 택함을 받은 자 계열인 셈의 후손이 나열됩니다. 그러나 셈의 후예 중에서도 택자의 계보는 아르박삿과 에벨, 그리고 벨렉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특히 서두에서 이미 야벳의 형제 셈이 그의 손자인 에벨의 조상으로 소개됩니다(21). 참고로, ‘야벳의 형’이란 표현은 '형인 야벳'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하게도 에벨은 히브리인을 뜻하는 말의 어원입니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엘람, 앗수르, 아람은 고대 중동의 막강한 제국을 이룩한 민족들입니다. 에벨로 이어지는 셋째 아들 아르박삿에 대해서는 11:10을 보시길 바랍니다.

(2) 에벨의 후손(25-32)

히브리인의 조상이자 그 이름의 어원이 된 에벨은 벨렉과 욕단을 낳습니다. 벨렉의 이름 ‘펠레그’는 ‘분리하다’를 뜻하는 팔라그에서 파생한 이름으로 ‘분리’, ‘나눔’을 뜻합니다. 이때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은 분명 바벨탑 사건을 가리킬 것입니다. 벨렉의 후손은 11:18 이하에 나열되며 그 계보를 통해 아브라함이 출생합니다. 여기서 셈의 계보는 선택되지 못한 자들(예. 욕단에서 요밥까지, 10:26-30)과 선택된 자들(예. 벨렉에서 아브라함까지, 11:18-26)로 나뉩니다. 욕단을 통한 셈의 비택자 계보는 바벨탑 사건으로 이어지고 벨렉을 통한 택자인 셈의 후손들은 별도의 족보로 편성됩니다. 욕단(요크탄)의 이름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작다’라는 뜻의 카탄과 관련되어 ‘작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욕단의 아들들은 남부 아라비아 부족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중요한 거주지인 오빌과 하월라는 금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열왕기상 9:28; 10:11; 22:48; 역대상 29:4; 욥기 22:24).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이는 이름을 잇고, 그러지 못한 이는 족보 기록을 끝으로 역사에서 퇴장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는 주인공으로 부각되지만, 불의한 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당신은 어떤 족보에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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