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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9-02)


 가나안에 대한 저주

창세기 9장 18-29절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복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인간은 존재의 무의미를 느끼는 순간 절망하기에, 존재의 충만한 가운데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의미 있는 생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후회 속에 생을 마치지 않고 만족할 만한 인생이 되지 위해 필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 아들로부터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과 여덟이었지만,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사방에 퍼졌다는 것은 번성의 축복과 명령의 성취입니다. 세 아들에게 어쩌면 각자 어린 자녀들이 있었는데, 승선 명단에서 무시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이 모두 연루된 커다란 사건입니다.

 

포도주에 취한 노아(18-21)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비난하는 데 함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의롭다 칭함 받은 노아와 그 자녀들의 삶은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우리의 본성적 죄악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주님의 덮어 주시는 은혜만을 간구하게 합니다.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18-21)

방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함이 가나안의 아버지라는 점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온 세상의 백성들이 생겨납니다. 셈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의 본적인 셈족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이름은 앞서 반복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5:32; 6:10; 7:13). 여기서 그들의 이름 뜻을 살펴보는 것은 그들의 미래와 관련하여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함’에 대한 별도의 논평을 주목해야 합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로 소개됩니다. 이것은 의미 없는 논평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 아들에게서 이제 인류가 퍼집니다. 이것은 노아에게 주신 축복과 명령의 성취입니다.

노아는 최초로 포도 농사를 시작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20). 그가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는 것은 포도 열매의 제조도 그가 시작했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먹거리를 위한 단순한 농사가 아닌 삶의 즐거움을 주는 기호식품을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원문에 따르면, ‘땅의 사람 노아가’인데 노아에게 ‘땅의 사람’이라는 특이한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땅의 저주로부터 사람을 위로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 라멕의 바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노아의 포도 수확은 3장의 땅의 저주가 풀릴 것이라는 8:21의 성취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8:21에서 설명한 대로, 그 ‘저주’는 3장의 땅의 저주가 아니라 홍수 심판에 의한 생명의 멸절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저주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3장의 땅의 저주는 풀리지 않았으며 여전히 유효합니다. 노아는 최초의 포도 재배자이면서 포도주 제조 기술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막사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채 벌거벗고 잠들었습니다. 언뜻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지만 취하지 않은 채 잠들었을 뿐이라고 해석하지만, 본문은 명백하게 ‘노아가 술에서 깼다’고 진술합니다(9:24). 범죄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명백히 노아의 술주정이며 하체를 드러낸 행위는 구약 전반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풍성한 포도주는 축복이 분명했지만(창세기 19:31-35; 27:28; 49:11; 신명기 14:23; 사사기 9:13; 시편 104:15; 전도서 10:19; 요엘 3:18) 과음으로 인한 술 취함은 중대한 범죄였습니다(사무엘상 1:14; 잠언 20:1; 23:31; 이사야 28:7). 노아의 만취는 그저 노아 역시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노아는 새로운 인류지만 여전히 아담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당혹스러운 방종과 만취를 이상하게 볼 것은 아닙니다.

  

함의 범죄와 셈과 야벳의 선행(22-23)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했을 삶이었을 텐데도, 먹고 마시며 깨닫지 못했던 홍수 전 사람들의 모습으로 점점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무서운 심판과 큰 은혜를 경험하고도 인간은 이렇게 늘 깨어 있기가 어렵니다.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망각한 채 세상일에만 취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입혀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성령에 취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2-23)

함은 만취한 채 벌거벗고 잠든 아버지의 하체를 목격했습니다. 여기서도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 함’으로 언급됩니다. 본문은 왜 노아가 술에 취해 하체를 노출하며 수면을 취하게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노아의 방종보다는 함의 행동에 있습니다.

술 취함과 하체 노출은 노아의 실수일 수 있지만, 함의 행동은 실수로 볼 수 없는 큰 범죄입니다. 부모 공경은 자녀의 의무이며 십계명의 제4계명에도 명시될 만큼 중요합니다. 어떤 우가릿 문헌에 의하면, 아버지가 술 취했을 때 아들은 아버지를 부축해서 데려가 잘 쉬도록 편한 곳에 모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감추어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함의 행동은 정말 패륜적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하체(‘벌거벗음’)를 보았습니다. ‘벌거벗음’은 성기 노출에 대한 완곡어법입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을 두고 과도한 추론적 해석이 난무했습니다. 어떤 랍비들과 해석가들은 여기서 함이 아버지와 동성의 근친상간을 시도했다는 지나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월키는 함의 일차적인 문제가 ‘그가 보았다’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범죄의 본질은 ‘호색적 관음증’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히브리어 ‘라아’는 단순한 목격이 아닌 관찰 행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본문의 간략한 보고에서 지나친 추론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결과로 보입니다. 본문은 아주 단순하게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우연히 목격한 뒤 그 막사에 형제들을 구경꾼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함의 행동은 중대한 범죄입니다. 이것은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는 신중한 행동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둘은 덮고 잘 수 있는 겉옷을 준비해서 어깨에 멘 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뒷걸음쳐서 아버지의 막사에 들어갑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24-29)

당신은 누군가의 험담을 듣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소문을 확인하려는 호기심보다 당사자의 명예와 영혼을 더 걱정해 주고 있습니까? 셈과 애벳은 옷을 가져다가 아비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뒷걸음쳐 들어감으로써 자신들부터 그 수치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24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24-29)

노아는 술에서 깬 뒤 어떤 이유로 작은 아들(아마 막내 아들)이 저지른 행동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여기서 왜 함의 잘못으로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세 아들에 대한 축복과 저주는 결국 그들의 후손들에 대한 것이기에 함 대신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함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10:6) 함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그들 중에서 유독 가나안에게 그 저주가 선언되는 것은 분명 불공평해 보이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필자의 견해로 볼 때는 함에게 붙은 특이한 수식어 ‘가나안의 아버지 (함)’에 모종의 암시가 깃들어 있는 듯합니다. 유독 아들 가나안이 함에게 수식어로 붙어 다니는 것을 볼 때, 가나안은 이미 배은망덕한 패륜적 행동을 일삼는 아들이었지 않을까 추론해봅니다. 이러한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는 뱀에 대한 저주(3:14) 및 가인에 대한 저주(4:11)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의 내용은 그가 ‘그의 형제들의 가장 낮은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수 ‘형제’가 아닌 복수 ‘형제들’이므로 여기에는 셈과 야벳 둘 다 해당합니다. 26절 마지막의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역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의 원문도 ‘가나안은 그들에게 종이 되고’입니다. 이것은 27b절에서 세 번째로 확인되는데, ‘가나안은 그의 중에 되기를’도 마찬가지로 수정이 요구됩니다.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되기를’, 결국 가나안은 심지 야벳 둘 다의 종이 될 운명으로 전락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26절에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선택된 계열인 셈이 재차 확인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셈의 계보를 선택하시고 뱀을 짓밝으신다는 최초의 암시입니다(창세기 3:15; 4:26). 27절의 해석은 난해합니다. 우선 야벳의 창대함은 물질적 풍요보다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인구가 크게 번성한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야벳의 후손은 주로 아나톨리아와 그리스에서 확산했습니다(창 10:2-5을 보라).

이어지는 어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는 오역이므로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합니다. ‘그는 셈의 장막들에 거할지어다’. 문제는 여기서 ‘그’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는 야벳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유대 문헌과 해석가들은(예. Kaizer)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역본들과 학자들은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은 그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 동거했던 역사적 사례들을 찾아내려 애를 썼으며 다양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제안된 그 어떤 사례도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필자는 첫 번째 견해를 따라 하나님이 주어인 것으로 봅니다. 이 경우 언제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였는지 방대한 역사적 추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성막/성전을 통해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재하셔서 그들의 장막에 함께하셨습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셈과 야벳의 종으로 전락하는데, 이것을 근거로 과거 흑인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흑인 저주론은 전적인 신학적 왜곡입니다. 함의 네 아들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중에 아프리카 민족은 구스와 미스라임, 붓에 해당될 뿐, 가나안과 흑인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나안이 셈의 노예가 된 것은 구약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여호수아 15:63; 17:13; 열왕기상 9:21).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우리 생은 하나님 앞에 복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과 부르심을 따라 자기 생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와 주변 세계를 현상이 아닌 믿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복 주는 자이며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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