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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6-01)


인위적인 결정으로 이스라엘을 출생한 아브람

창세기 16장 1-16절


신앙은 자신의 한계를 보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보는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는 일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만도 위험하고 부정적인 사고만도 위험합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데려다주었습니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람의 믿음이 늘 한결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째가 되었습니다(3). 아브람의 나이는 80대로 접어들었습니다(창세기 16:16). 아브람의 믿음은 다시 흔들렸습니다. 이러한 언약한 모습은 하나님 백성의 보편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아내 사래가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내와 상의하여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얻기로 합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첩이 됨(1-3)

아브람은 아담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아내 사래의 말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자신들만의 대책으로 응수합니다. 당대의 관습으로는 합법적인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순종이 아니면 결코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실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1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1-3)

이 이야기는 족장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겪은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때때로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의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째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씨에 대한 약속을 재확증하신 후 몇 년이 지났지만, 아브람 부부는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인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는 85세, 사래는 75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참조. 창세기 17:1,17). 이미 여성으로서 오래 전에 가임기가 끝나고 갱년기에 접어들었을 것입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하갈이 애굽 이름인 것으로 볼 때, 아마 그녀의 고향인 애굽에서 얻은 몸종입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신의 몸종과 동침하여 자녀를 얻을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하갈과 동침합니다. 대리모 관행은 주전 삼천 년부터 천년까지 메포소타미아뿐 아니라 애굽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증거 됩니다. 사래는 자신의 계획을 따라 씨의 약속을 실현하려 합니다.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가 세워질 수 있다’는 뜻으로 자신이 아브람의 가문이 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란 장담입니다. 여기서 아브람의 믿음은 순간 실종되고 맙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십년 째이므로 아브람은 땅에 대한 약속이 점점 구체화되어가는 시점에 이런 불신행위를 하고 맙니다.

 

두 아내의 갈등과 하갈의 도피(4-6)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순종할 때 인간 사이의 신뢰 관계는 무너집니다. 여종 하갈은 자신의 임신한 사실만으로 거만해져서 자신의 형편을 모르고 여주인 사래를 저주합니다. 아브람의 부부는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에게 자신의 실수를 전가합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전가하고 아브람은 아내에게 전가합니다. 이번에는 사래의 말대로 아브람은 하갈을 광야로 내쫓습니다.

4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4-6)

아브람과의 잠자리 후 하갈이 아이를 가졌습니다. 임신 후 그녀는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갈이 그녀를 별것 아닌 여자로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고대로부터 아내들 간의 경쟁심과 질투심은 인간 본성의 문제였기에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이 이 문제에 대한 법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우르남무(Ur-Nammu) 법이나 함무라비 법은 이런 상황에서 본 부인을 보호하는 법적 규제를 마련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여주인은 건방진 대리모인 여종을 팔아넘길 수는 없지만 더 낮은 노예 신분으로 전락시켜 질서를 잡게 했습니다. 하갈이 사래를 무시했지만, 사래 입장에서 이것은 단순히 무시당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수모를 ‘하마스’로 표현하는데, 이건 폭력과 횡포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래는 하갈의 행위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입니다(잠언 30:21-23). 사래는 이 일에 대해 아브람에게 강력히 항의하며,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에 호소합니다. 아브람은 일 처리의 전권을 사래에게 위임합니다. 사래는 하갈에게 그대로 갚아주며 복수합니다. 하갈을 ‘학대’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하갈에게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한 하갈의 폭력적 행위(하마스)를 갚아주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학대라는 단어 ‘아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백성에게 당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사래의 하갈에 대한 횡포가 몇 배로 심했다는 것은 하갈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갈은 아마 살기를 느꼈거나 무엇보다 임신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도주했을 것입니다. 두 여인 모두 잘못이 큽니다. 주인을 멸시한 하갈도, 또한 자신이 받은 수모를 몇 배로 갚은 사래도 그러합니다.

 

하갈을 위로하시는 하나님(7-12)

하나님께서는 임신한 몸으로 애굽으로 돌아가던 하갈의 고통을 보시고 만나주십니다. 하갈은 사래 탓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태중의 아이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갈에게 사래에게 복종하는 수고를 요구하십니다. 그녀에게 회개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게 순종하였을 때 이스마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7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7-12)

하갈이 도피한 곳은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도 매우 먼 곳입니다. 그녀는 술로 가는 도중(술 길)의 어떤 우물까지 갔습니다. 그곳은 네겜 광야 최남단의 가데스(바네아)와 베렛 사이에 있었습니다(14). 헤브론의 아브람 거주지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는 약 97km의 거리입니다.

하갈은 임신한 몸으로 매우 먼 곳까지 도망갔는데, 이는 그녀가 이집트 출신이기에 분명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라는 존재가 구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흥미롭게도 구약의 많은 곳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또한 여호와 자신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현재의 사건에서도 하갈은 마지막에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고 고백합니다(13-15).

많은 학자들이 강하게 반대하지만, 여호와를 자처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의 성육신된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견해가 옳다면, 우리는 사자의 임재와 활동을 통해 구약 시대 속에서 선재적 성육신(pre-incarnation)을 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부릅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8) 여호와의 사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만남과 더불어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인사와 같은 질문입니다.

하갈은 여기서 사래를 ‘여주인’으로 칭하면서 그녀의 횡포를 고발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주인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고 말할 뿐인데, 슬픈 도망자가 된 하갈의 낮아진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음이 분명한데, 이는 이미 하갈이 그 정체불명의 남자가 누구인지 아는 상황에서 대화기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 그녀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9). 흥미롭게도 ‘복종하라’는 동사는 ‘자발적으로/스스로를 낮추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사래의 지위와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시켜줍니다. 이 서열을 하갈은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갈을 위한 엄청난 축복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후손의 번성을 약속합니다(10).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장하신 약속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이 낳을 아들에게 ‘이스마엘’이란 이름을 부여합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엘)이 들으신다(샤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 이름을 부여한 배경도 하갈에게 설명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러나 하갈의 후손의 미래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는 ‘들나귀 같이 될 것이다.’ 들나귀에 견주는 것은 호의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소 경멸적입니다. 들나귀가 야생에서 떠돌며 사는 것처럼, 이스마엘의 후손도 그렇게 떠돌며 살 것입니다. 이것은 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스마엘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이 이스마엘을 친다는 예언도 그의 후손이 전투적으로 사람들과 부딧히며 살 것을 예언합니다. 마지막의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산다’는 말은 웬함의 말대로 이중적 뉘앙스를 내포합니다. 웬함은 이것을 ‘opposite’로 옮기긴 하나 일차적으로 생활 방식의 적대 관계를 가리키는 ‘apart from’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형제들은 정착민이 될 것이나 하갈의 아들은 그들과 동떨어진 유목민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저 그런 관례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적개심을 품을 것입니다.

 

하갈의 찬양과 이스마엘의 탄생(13-16)

신앙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적인 판단을 선택했을 때, 아브람은 앞으로 수년 동안 그를 괴롭힐 인과율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성경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일개 이방인 여종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보호와 격려가 필요한 한 인간으로 대우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람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12:3).

1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13-16) 

여기서 하갈이 이미 자신의 대화 상대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알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하갈은 나아가 그를 여호와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엘로이’, 곧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칭합니다.

이어지는 히브리어 문장은 의문문이지만 감탄문으로 해석해야 하는 뉘앙스를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여기서 내가 나를 살피시는 분을 내가 뵈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곳 샘의 이름도 붙입니다. 원래 그 샘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나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이란 뜻의 ‘브엘라해로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거기에 부여된 것입니다. 이 우물의 위치는 가데스와 베렛 사이인데, 가데스는 오늘날 니차네이 사이나이(Nitzanei Sinai)라는 이름으로, 혹은 성경 이름 그대로를 간직한 가데스 바네아로 불리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네겝 남단의 오아시스가 있는 지역입니다. 하갈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여호와의 사자의 지시대로 ‘이스마엘’이라고 지었고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말을 청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과 세상의 소리 중에 어느 쪽이 잘 들리고 있습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은 희미하게 들리고 아내의 현실적인 대안이 크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집안에 큰 싸움의 소리를 만들었고, 하갈의 원망의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그를 살렸고 새 생명을 낳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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