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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8-01)

 


여호와를 대접한 아브라함

창세기 18장 1-15절


그리스도인들을 말할 때 적절한 표현 중에 ‘환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특히 조건 없는 환대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하나님 환대와 이웃 환대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환대는 그분을 향한 신뢰, 특별히 창조의 능력에 대한 신뢰이며, 이웃 사랑을 손대접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이야기는 낯선 남자 셋이 아브라함의 마므레 상수리 나무 거주지를 방문한 것으로 전개되지만, 창세기 저자는 그들의 등장이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나탄 것임을 미리 알려줍니다. 이것은 꿈과 완상 속의 현시가 아닌 직접적인 만남을 위한 현시였습니다. 두 천사를 동반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시어 사라의 임박한 출산을 예고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여호와(1-5)

아브라함은 100세인데도 ‘장막 문에서 뛰어나가’(2) 여행객을 초대합니다. 객들의 정체도 모르면서도 가장 귀한 손님 초대하여 몸과 마음이 기운을 차리도록 객들에게 성심껏 쉼과 물과 음식을 제공합니다. 객과 주인이 바뀐 듯 아브라함은 참으로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섬깁니다.

1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1-5)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꿈과 환상 속의 방문이 아닌 몸을 입은 직접적인 방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나무들 근처를 거주지로 삼아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힘든 오전 일과를 마치고 막사 앞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참조, 4). 그곳 전통에 의하면, 정오의 시간은 노동자들이 일을 멈추고 쉬는 시간이며 여행객들도 쉴 곳을 찾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늘 그랬듯이 낮잠을 자려고 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야에 낯선 사람 셋이서 있는 것이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달려 나간 것은 그가 갑자기 방문객을 발견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막사로 오는 중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서 아브라함의 마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가능한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 돌연한 출현은 그들이 범상한 존재가 아님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브라함이 잠을 청하려고 누워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발견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잠이 들지 않았으니 그들이 오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을 리는 없습니다. 즉시 달려가서 영접하고 엎드려 인사합니다. 아브라함의 태도는 아브라함과 같은 영웅마저 소홀히 영접한 소돔 왕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낯선 이들까지도 최선을 다해 맞이 하였음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맞은 나그네 셋 중 둘은 여호와의 천사이며, 하나는 여호와이십니다(3,10,13-15).

그는 자신이 ‘은혜를 입었으면’ 막사에 머물다 갈 것을 간청합니다. 이것은 방문객들에게 막사가 마음에 든다면 쉬어 가라는 초청입니다. 아브라함은 셋 중 한 명을 ‘내 주여’라고 부릅니다. 이는 복수가 사용된 극존칭으로 일반적 존칭 ‘내 주’와 다릅니다(12절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단수 ‘내 주인’이라 부른다). 그는 세 사람의 대표인데, 독자는 그가 여호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이 부담 갖지 않도록 간편한 편의만을 제공해드리겠다고 말합니다(3-4).

물을 ‘조금’ 가져올 테니 씻고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라고 간청하며, 음식을 ‘조금’ 가져올 테니 허기를 달래 기운을 회복하라고 말합니다. 정오의 뜨거운 햇볕에 지친 나그네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들을 대접한 아브라함(6-8)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낳을 확정적인 때를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기다린 지 25년만입니다. 하지만 자식이 없을 때는 시기하고 불평하던 사라가 자식이 생긴다는 말에는 불신의 미소로 반응합니다. 오랜 불임과 끊어진 생리를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크게 본 것입니다.

6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6-8)

아브라함은 급히 막사로 돌아가 사라에게 빨리 음식을 준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가 요청한 요리들은 그 양이 막대했습니다. 밀가루 세 스아는 무려 24리터이므로, 이것을 반죽해서 요리하면 대단히 많은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보통 밀가루 한 포대가 20kg인데, 약 100인분 정도 만들 수 있으며, 다른 재료를 섞으면 최대 200인분까지 면 요리가 가능한 양입니다. 이 빵은 급히 준비하라고 했으니 무교병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유교병은 반죽을 며칠간 누룩으로 숙성시키기 때문입니다. 고기 요리의 양 또한 막대합니다. 하인을 시켜 육질이 좋은 살진 소를 잡습니다. 만일 400kg 소 한 마리를 잡으면 정육만 160kg이 나오는데, 1인분 200g을 기준으로 거의 800인분의 고기가 나옵니다. 그 외 내장과 꼬리까지 포함하면 거의 1,000인분에 이르는데, 1인분을 400g으로 늘려도 500명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마을 잔치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준비한 식사는 그가 거느린 모든 식솔들도 참여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더구나 소를 잡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살진 소는 보통 큰 잔치를 위해 잡습니다. 온 마을과 집안의 큰 잔치를 벌일 때 소를 잡았으며 몇몇 친구들과의 잔치를 위해 염소를 잡는 것도 특별한 일이었습니다(누가복음 15:27 이하). 아브라함은 소화를 돕는 것으로 알려진 발효유(엉긴 젖)와 우유도 준비했습니다. 그는 나그네들을 왕처럼 융숭히 대접하면서 연회 급 식탁을 준비한 것입니다. ‘조금’의 물과 음식이 아닌 큰 식사였습니다. 세 방문객은 나무 아래서 그 풍성한 음식을 먹었다. 아브라함은 인색한 소돔 왕과 대조되며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 이상으로 친절하고 정중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말 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브리서 13:2)

 

임박한 이사 탄생과 사라의 웃음(9-15)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웃음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라는 말로 응수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 붙임은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분께는 창조의 조건일 뿐이고, 우리에게는 믿음의 조건일 뿐입니다.

9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9-15)

하나님께서는 이미 17:19에서 이삭 탄생을 통보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온 여호와께서 이삭의 탄생을 확정하십니다. 그들은 막사 밖에, 사라는 막사 안에 있었습니다. 외간 남자가 방문할 때 아내는 방 안에 머무는 것이 당시의 관례입니다. 천사 등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9).

아브라함은 막사 안에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사실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이미 사라가 어디 있는지 아시고, 또한 여인들이 막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손님들이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을 사라로 부를 때, 아브라함은 그들이 범상한 사람들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여호와는 내년에 다시 아브라함을 방문할 것인데, 그때 사라에게는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라는 이들의 대화를 막사 안쪽 입구에서 엿듣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1년 후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통보는 그들이 여호와의 사자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연로했으며, 특히 사라는 생리가 끝난 노년기의 여성이었습니다. 물론 서사는 사라가 65세였을 때 여전히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미모를 유지했습니다. 더 놀랍게도 이 일 직후에 그랄 땅에서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었을 때도(20장) 90세의 나이였는데,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빼앗깁니다(창세기 20장). 창세기 저자가 사라의 생식 기능은 끝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매우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20장에서 재차 이방 왕이 데려간 사라에 대해서는 미모가 뛰어났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어쩌면 사라가 21장에서 임신을 한 것으로 보아, 90세의 사라의 여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잠시 회복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라는 자신이 이미 늙었고 남편 또한 노쇠하여 더 이상 즐거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즐거움’이란 성적인 기쁨이나 성욕을 가리킬 것입니다. 사라의 나이가 90세라는 것은 앞서 17:17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리 내어 웃었지만(17:17-18)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사라는 감정을 숨겼는데, 그녀의 웃음은 거의 비웃음에 가까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웃음을 표현한 동사(이초하크)는 그대로 이삭(이츠하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사라의 비웃음도(티츠하크; 기녀가 웃었다)이삭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었지만, 그녀의 웃음은 매우 냉소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와 그의 사자들은 그녀의 비아냥거림을 벌하거나 질책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랜 세월 그 약속을 기다렸고, 이 일로 하갈과의 갈등을 빚어 큰 상처를 입었으며 오랫동안 낙심하며 실망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어떤 나그네들의 수태고지를, 비록 그들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해도, 아무런 의심 없이 마냥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 정상이었습니까? 그녀의 반응은 분명히 불신앙적 태도이지만,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믿음의 잣대로 오랜 고통을 겪는 한 인생의 상황과 형편을 함부로 예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웃었다는 것을 드러내며 더욱 강하게 내년에 아들이 태어난다고 확증합니다. 여호와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 이 일을 그분이 행하실 것입니다. 이 순간 사라는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이시고 여호와의 사자들이 자신의 집을 방문 중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이 웃지 않았다고 둘러댑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웃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한 번 그녀의 마음까지 꿰뚫고 계심을 확증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서사자도 여호와의 사자도 별다른 책망을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까지 읽은 그 방문객이 여호와이심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떨결에 자신의 말을 부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창조의 조건은 우리에게 믿음의 조건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과 이스라엘을 통해 자녀 문제를 속히 이루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안 걸음씩 가르쳐주시면서 지금껏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아들’ 탄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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