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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8-02)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한 아브라함

창세기 18장 16-33절


 한 나라가 복된 나라가 되고 한 사람이 복되게 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생명이 타인에게 전달되어 누리게 하려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 나라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합니까?

  

여호와 일행은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 소돔 성으로 향합니다. 여호와의 소돔 성 방문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들린 큰 울부짖음 때문입니다(20). 두 성의 죄악은 심각했고 부르짖음은 하늘을 찔렸습니다. 이것은 폭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하늘을 향한 탄원입니다. 아벨의 피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창세기 4:10). 소돔은 권력자들과 힘 있는 자들이 민중을 수탈하고 학대하는 사회였을 것입니다.

 

소돔으로 떠나는 여호와 일행(16-19)

참여하는 나라 두 천사가 소돔으로 향하면서 아브라함에게 그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실 복과 소돔과 고모라에 임할 심판을 알게 하십니다. 소돔을 복되게 하도록 부름 받았으니 기도로든 행동으로든 그 무엇이든 그 나라의 운명을 알고 참여해야 합니다.

16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6-19)

아브라함의 성대한 접대를 받은 여호와 일행은 목적지를 향해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행선지는 소돔 성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나다가 전망이 트인 어떤 장소에서 소돔 성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소돔으로 향하고’는 약간의 오역으로 ‘소돔을 내려다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지리적으로도 옳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헤브론 지역은 상당히 고지대인 반면에 사해 일대의 소돔과 고모라는 해수면 아래의 매우 낮은 저지대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그 장소까지 여호와 일행과 동행했습니다.

17-19절은 소돔을 내려다보던 여호와와 두 천사 간의 대화입니다. 거기엔 아브라함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17절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를 대화가 아닌 여호와의 생각, 즉 독백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셨다.’ (Waltke; Wenham).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천사들과 대화 중이셨습니다. 마치 천상의 어전 회의를 연상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17). 아브라함도 그 즉흥적인 어전 회의에 참여하여 천사들과 함께 자신을 향한 여호와의 계획을 듣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이미 12:1-4에서 아브라함에게 공언했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큰 나라/민족이 될 것이며, 열국이 그를 통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전치사 보()가 흔하게 ‘~에 의해’(by)를 의미하므로, 이것은 앞서 12:2에서 ‘너는 복이 될지라’의 의미에 대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브라함이 열국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한다는 뜻의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로 해석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이 아브라함을 택하였는지 설명해주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신뿐 아니라 그가 후손들을 잘 가르쳐 그분의 도를 지키고 의와 공의를 실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공언한 약속을 모두 실행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후손들을 잘 가르쳐야 하고 후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순종하여 그분의 계획이 자신들을 통해 실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동사 ‘야다’의 사용은 여호와와 아브라함의 친숙한 관계를 잘 표현합니다. 우리말의 개념을 사용하자면, ‘내가 그와 안면을 텄다.’ 정도의 의미일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여호와의 탐문(20-21)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반드시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동시에 천하 만민을 복되게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그 나라가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살아 있는 나라입니다. 분열과 이기심이 들어설 수 없는 나라여야 합니다.

20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20-21)

앞선 말이 여호와의 독백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동석한 자리에서 천사들과 대화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현재의 구절들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왜 소돔 성으로 가는지를 아브라함에게 밝힙니다. 물론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향한 계획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추론되고 또한 이 여행의 목적을 알고 있기에 이 대화는 아브라함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이 소돔에 내려가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리는 아우성 소리가 과연 그들이 행한 일 때문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성읍과 탑을 보려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장면과 유사합니다(창세기 11: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상황을 몰라서 하는 행동일 리 없습니다. ‘알아보기 위해 내려왔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재판 순서를 따르는 수사학적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제 소돔을 심판하러 가십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우리가 내려가자’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내가 이제 내려가서 … 보고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호와가 두 천사를 소돔에 보내시고, 자신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며 현재의 장소에 머무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어전 회의라는 신적 협의체에서의 의견 제시가 아니라 일방적인 자기 결정권 행사임을 다시 한 번 확증합니다.

 

아브라함의 중재와 탄원(22-33)

선지자 아브라함(20:7)은 심판이 임박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하여 기도합니다. 죄를 묵인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 때문에 의로운 자들이 멸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다섯 번이나 의인의 수를 줄여가며 구원을 호소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긍휼을 구합니다.

22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0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1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2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22-33)

여호와께서 수행하던 두 천사를 소돔으로 보내시고 자신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함께 행동하던 여호와 일행이 여기서 나뉩니다. 앞서 독자들은 세 명의 여호와 일행의 역할이 계속 뒤바뀌기에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세 사람 모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대표자 한명 여호와께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순되어 보이는 장면은 여기에서만이 아닌 구약의 다른 곳들에서도 반복됩니다(창세기 19:17-18; 21:17; 사사기 6:7-24; 사사기 13장). 따라서 이것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비로운 임재와 성육신의 특징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독대하게 된 아브라함은 비로소 모든 상황을 간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탄원하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해 중재를 시도합니다. 그 과정은 마치 협상 테이블의 홍정과 비슷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에녹과 노아를 조상으로 둔 의인의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 노아가 타락한 세상을 구하여 보존하려 애를 쓰다 마침내 방주를 지어 세상의 보존자가 되었던 것처럼, 그는 소돔을 보존하려고 주재를 시도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반드시 보존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신적 인과응보, 말하자면, 의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으며 순종하면 축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도식은 구약에 깔려 있는 기본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시더라도 의인들과 회개하는 자들을 신판에서 제외하십니다. 이방 여자 기생 라합이 구원을 받았고(여호수아 6:22-25), 하나님의 진멸을 두려워해 이스라엘 군대에게 거짓 투항한 기브온 백성은 생명을 보존했습니다(여호수아 9장). 요나의 설교를 통해 회개한 니느웨 성 주민들도 심판을 모면했습니다(요나 3:4-10). 아브라함은 공의의 하나님이 의인과 함께 심판을 행하여 멸망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졌습니다. 과연 심판을 행하는 하나님께서는 부당합니까? 아브라함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함께 멸망시킬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는 소돔에 50명의 의인이 있다면 소돔을 용서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왜 50명으로 시작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당시 작은 마을의 인구수가 100명이었거나, 군인이 100명 정도였기에 그 절반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돔 성은 왕이 있는 도시 국가이자 가나안의 맹주로서 대단히 큰 성이었습니다. 발굴된 여리고 성의 규모로 볼 때 성내에 약 삼천 명의 주민이 살았을 것으로 추론되며, 성 주변에도 군락을 이루며 산 주민의 수는 몇천 명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50명은 아브라함이 소돔 성내 의인의 최소 숫자로 생각하고 안전하게 제안한 숫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50명이 그 성내에 있다면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답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 있게 협상을 시작했으나(23-25) 점점 자신감을 잃으면서 주저하는 질문으로 마칩니다(31-32). 아브라함이 제시하는 의인의 숫자는 45명에서 40명으로, 30명에서 20명으로, 마침내 열 명까지 내려갑니다. 협상은 열 명에서 멈추고 아브라함은 입을 다뭅니다. 그는 차마 다섯 명이나 그 이하까지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롯과 그의 가족을 고려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롯마저도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취급하신다는 확신이 없기에 홍정을 단념했을 수 있습니다.

소돔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혹은 아브라함은 극소수의 의인은 극도로 썩은 사회의 심판을 면하게 해달라고 요구할 명분으로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의인이 몇 명이든 이제 그분이 결정하실 일이며, 소돔은 심판을 받아도 할 말 없는 타락한 성읍이 분명했습니다. 다만 소돔에서 롯과 두 딸만이 구원을 얻는데, 성경은 롯이 의인이었다고 평가합니다(베드로후서 2:6-8; 참조. 창세기 19:12-13). 소돔의 극악한 죄로 인해 아브라함의 중재가 실패로 돌아갔고, 대화를 마친 후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여호와는 하늘로 복귀하셨고, 아브라함은 막사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강한 것은 남을 굴복시키는 힘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며, 정의와 공의의 나라이며, 긍휼과 자비의 나라입니다. 섬김과 나눔의 나라입니다. 그런 데서만 하나 됨과 샬롬과 안식이 나옵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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