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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4-02)

 


하나님만 의지해 승리한 아브람

창세기 14장 13-24절


우리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생명을 세상에 전하여 모든 족속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도록 보름 받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복을 세상에게 흘려보내며 살아야 하는지를 오늘 아브람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마므레 상수리나무들 근처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제단을 세운 장소이며 헤브론 일대에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마므레라는 인물이 맹주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형제는 에스골과 아넬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당시 불안했던 국제 정세로 인해 토호 세력들이 강력한 이주민 세력인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출(13-16)

애굽에서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람이 더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 지체를 향한 사랑이 그가 롯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3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13-16)

패주한 서방 동맹군 중 한 명이 탈출해서 아브람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특이하게 아브람에게 ‘히브리 사람’(이브리)이라는 호칭이 붙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창세기에서 아브람에게 히브리인 호칭을 붙인 곳은 이곳이 유일한데, 분명히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이브리가 고대 근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하비루(Habiru; 혹은 아피루[Apiru]로 칭함) 집단과 일치하는 명칭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와 발음이 비슷하고 사회의 비주류 세력으로 떠돌이였으며, 도적질을 일삼거나 종종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하비루가 히브리인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많은 학자들은 이브리와 하비루 사이에 언어학적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나그네 신분과 그가 군대를 이끄는 모습은 하비루의 특징에 어느 것도 부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마므레 상수리나무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토호 세력인 헤브론의 세 맹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구출 작전에 나섭니다(4). 여기서 흥미롭게도 그의 주요 관심은 조카 롯이었으며, 다른 것들은 부수적이었습니다. 조카는 원문으로 ‘그의 형제’인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아브람이 예의 없는 롯을 친동생처럼 마음에 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훈련된 종들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사병 부대가 있었습니다. 318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동방 연합군을 추격합니다. 아브람 군대의 숫자 318명은 이미 아브람이 굉장한 부자이며, 군사로 활용 가능한 많은 종을 거느린 막강한 세력의 지도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렇더라도 이 숫자만으로는 동방 군대를 대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브람은 단까지 동방 군대를 추격합니다. ‘단’은 분명 단 지파가 정복했던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곳의 원래 이름은 라이스였습니다(사사기 18:29). 따라서 여기서 단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것은 명백히 연대기에 맞지 않는데, 이것 역시 우리가 앞에서 살핀 대로 후대의 계시의 추가 부분이며, 오경의 최종 편성자가 당대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리적으로 익숙한 장소를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 지파가 새로 개척한 이 지역은 헤르몬 산 아래쪽에 위치했습니다. 약속의 땅의 남쪽 경계는 브엘세바, 북쪽 경계는 단입니다(사사기 20:1; 사무엘상 3:20; 사무엘하 3:10; 17:11). 따라서 아브람은 자신도 모르게 섭리 가운데 약속의 땅 끝까지 다녀온 셈입니다. 그와 그의 군사들은 군대를 나누었습니다.

14절의 더 나은 번역은 이렇습니다: ‘밤에 그는 그들을 향해 자신과 그의 종들을(군사들을) 나누어 그들을 쳤다’. 이것은 아브람의 전술이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사방에서 공격한 야간 공습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적은 병력으로 적들을 효율적으로 격파한 기드온의 전술과 흡사합니다(사사기 7:19-23).

아브람의 군사는 멀리 다메섹 근처의 호바까지 그들을 추격해서 결국 빼앗긴 모든 포로와 전리품을 되찾아왔습니다. 300여명의 아브람의 군대가 어떻게 동방의 막강한 군대를 쳐부수었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합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동방 군대의 침략은 전면전이 아닌 약탈을 위한 소규모 침공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그 도시 국가의 왕들이 직접 출정하지 않고 대장들과 소규모 군대를 파견해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침략자는 여전히 왕들로 기록됩니다. 두 번째로 24절의 아브람의 군대는 318명만이 아니었음이 드러납니다. 헤브론의 동맹체인 위에 언급한 세 명의 맹주들이 합세했습니다. 아브람의 군대는 이보다 몇 배 큰 규모였을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17-20)

승리한 아브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신에게 복을 비는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로 화답합니다. 승리가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전적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내 것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 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복을 나누십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17-20)

아브람은 의기양양하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때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왔습니다. 여기서 소돔 왕의 이름은 거명되지 않습니다. 아마 그는 2절에서 소개되어 동방의 세력에게 패주했던 베라였을 것입니다. 이름을 생략한 것은 분명 그를 폄하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람을 영접한 곳은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인데,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을 의미하기에(시편 76:2), 그곳은 살렘 왕 멜기세덱의 관할 구역으로 보입니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들고 마중 나왔습니다. 포도주는 당시에 주로 잔치에서 사용되었으므로, 이것은 그를 위해 왕실 연회와 같은 큰 식탁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사무엘하 17:27-29).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수혜자인 소돔 왕은 빈손으로 아브람을 맞았습니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멜기세덱의 처신과 크게 대조됩니다.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히브리어는 ‘엘 엘욘’으로 이 자체로 하나님의 별칭으로 사용됩니다. 혹자는 엘이 가나안의 최고신이었기에 멜기세덱의 엘에게서 가나안 종교의 흔적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는 엘 엘욘을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20), 이것은 같은 대화에서 아브람이 사용한 표현과 동일합니다(22). 두 사람이 섬긴 엘은 같은 하나님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제한적으로 참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되어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스 땅에 살던 욥이 그러했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그러했습니다. 제사장이란 말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멜기세덱은 정교 분리가 되지 않은 고대 근동의 관행대로 왕이자 제사장을 겸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 기도를 하고, 아브람은 그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당시 십일조는 고대 근동의 보편적 제도였는데, 국세이자 종교세 개념으로 왕-제사장에게 바쳤습니다. 이 경우 아브람은 분명히 왕이 아닌 자신을 축복한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종교적 십일조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받던 조공이 이제 여호와께 십일조로 바쳐진다’. 훗날 이것이 표본이 되어 율법은 십일조를 왕이 아닌 하나님께 바칠 것을 규정합니다(레위기 27:32; 민수기 18:21 이하; 신명기 12:6 등).

 

재물을 탐하지 않는 아브람(21-24)

아브람은 자기 이해관계에 관심이 있는 소돔 왕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소돔 왕이 주는 것은 실오라기 하나라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 그는 이 승리가 하나님의 승리이며, 하나님만이 자신의 참 분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을 참 분깃이라고 여기는 자가 복의 통로가 됩니다.

21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21-24)

소돔 왕은 멜기세덱과 전혀 상반된 태도를 보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빈손으로 나온 그는 무례하며 태도는 더욱 뻔뻔합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포로들만 주고 다른 전리품은 모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돔 왕은 이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당시 관행상 전리품은 부하가 아니라면 직접 목숨을 걸고 전투를 수행한 사람의 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자신이 마치 승자이자 아브람의 상전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아브람은 그의 치졸한 제안을 두고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롯에게 기꺼이 좋은 땅을 양보했던 것처럼 소돔 왕에게 모든 전리품을 돌려줍니다. 그는 하나님께 맹세하며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소돔 왕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브람의 당찬 믿음이 엿보입니다. 다만 전쟁에 출정했던 군사들이 먹었던 식량은 변제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와 연합 작전을 펼친 세 명의 동지의 몫은 떼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재산인 군사들에게 넉넉한 수고비를 지불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로써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점점 다른 민족들의 복의 통로요 중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돔 왕은 아브람을 멸시했습니다. 이것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는 말씀이 성취될 것을 예고합니다. 앞서 12:3에서 아브람을 멸시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다는 설명을 한 바 있는데, 소돔은 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람을 멸시한 결과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을 축복했던 멜기세덱은 복을 받습니다. 멜기세덱은 시편에서, 신약의 히브리서에서 영원한 제사장 반차로 추앙받았으며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었습니다.


무엇이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되는 길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태도이며, 이웃과 자신을 별개로 나누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살아갈 때 천국의 힘하고 생명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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