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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2-01)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 11장 31절-12장 9절


우리들은 항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안고 살아갑니다. 삶을 살다보면 답이 안 나오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럴 때 보통 삶을 지탱해줄 우리가 가진 ‘어떤 것’들로부터 답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저축해둔 돈일수도 있고, 안정적인 직업이나 원만한 인간관계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살려면 그런 것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은 큰 전환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심과 더불어 아브람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구원사뿐 아니라 세속사에서도 중요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따라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후에 아브람의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이 창세기의 핵심적인 관심사입니다.

 

데라 가족이 우르를 떠남(31-32)

바벨탑은 하나님을 떠난 아담적 인간의 반역의 절정입니다. 스스로 ‘큰’ 성과 대를 쌓았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드날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주와 불명예로 끝났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가야 할 사람과 땅을 정하시고, 그분의 통치하시는 나라를 시작하십니다.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31-32)

데라는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여호수아 24:2). 그는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이사합니다. 그의 이사에는 아들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과 그의 아내만 동행한 것으로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후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증거 되는 바로는 당시 나홀과 밀가도 동행했음이 명백합니다(창세기 22:20-24; 24:10 이하). 롯이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로 표현되는 것은 죽은 하란의 자리를 롯이 현재 대신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데라가 죽은 후에는 아브람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데라는 애초에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떠나려 했던 것이 드러납니다. 대조적으로 12:1-4에서는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 다음 아브람에게 이 지시가 내려진 것으로 이야기됩니다(창세기 12:1-4).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이 지시를 그 이전에 우르에서 이미 받았다고 설교합니다(사도행전 7:2-4). 아마 아브람은 이미 우르에서 환상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고 그를 설득하였으며, 데라는 아브람의 말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가족과 더불어 도중에 하란(인명 하란과 히브리어가 다름)에 도착하여 거기에 일단 정착했습니다. 거기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확정적 계시를 전달하고자 재차 나타나시어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명령하신 것으로 보입니다(창세기 12:1-4).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습니다(32). 그가 205세에 죽을 때 아브람은 75세였는데(창세기 12:4), 이러한 나이들은 계산이 들어맞지 않기에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사도행전 7:4에서 스데반은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사망한 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여행했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 창세기와 내용상 모순이 발생합니다. 11:26에서 데라의 나이 70세에 아브람이 출생합니다. 32절에서 데라가 205세에 죽는다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12:4에서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납니다. 이걸 계산하면,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날 때 데라의 나이는 70+75=145세가 됩니다. 이 경우 아브람은 데라가 살아 있을 때 하란을 떠났으며,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생존한 뒤 205세에 죽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웬함은 이 셈법을 따라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육신의 아버지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떠나기로 결단한 아브람의 순종은 더욱 값어치가 있다고 주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스데반의 설교와 전혀 들어맞지 않으며 창세기 자체 내에서도 모순을 일으킵니다. 만일 11:26의 세 아들의 순서가 출생 순서가 아니라면, 그리고 만일 아브람이 막내였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정황을 보건대, 출생 순서는 하란, 나홀, 아브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란이 조기 사망했는데, 하란의 딸이 나홀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나홀이 아브람보다 형이라는 것을 시사 합니다. 결국 데라가 70세였을 때 태어난 장남은 하란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이 맨 선두에 배치된 이유는 하란이 사망한 뒤 장자권이 차남 나홀이 아닌 아브람에게 넘어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람이 막내였다면, 앞서 계산대로 그는 데라가 130세에 낳은 아들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205세에 하란에서 죽고 아브람이 당시 나이 75세에 하란을 떠났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아브람을 부르심(12:1-4)

하나님의 목적은 ‘떠나라’와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안전한 조건을 버리고 불확실성과 마지의 세계를 향해 말씀만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 당신이 열어 가시는 나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는 기존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결단에서 시작합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1-4)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지시하시고 몇 가지 약속을 보장하십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직접 나타나셨다고 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아마 환상이나 꿈으로 그에게 지시를 내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스데반은 그가 하란에 있기 전에 이미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4절을 볼 때, 그가 이 지시를 받은 것은 하란에서입니다. 현재의 지시는 하란에서의 지시와 달리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확정적 계시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말씀하시면서 땅을 포함해 크게 네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① 큰 민족(후손); ② 복; ③ 큰 이름; ④ 복의 통로 등 입니다.

먼저,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은 씨에 대한 약속으로 해석해야 합니다(창세기 22:17; 32:12). 두 번째 약속은 복인데, 아마 여기에는 이미 전제된 땅의 선물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약속은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그의 후손을 통해 아닌 아브람의 명성이 널리 알려질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높이시는 큰 이름(셈)은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자’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것과 대조됩니다. 결국 사람이 높이려 한 명성은 실패했으나 셈의 후손의 명성은 하나님에 의해 높아집니다. 네 번째의 ‘너는 복이 될지어다’는 난해합니다. 이것은 ‘너는 복의 구현자가 된다’는 뜻으로 단순히 복을 받는다는 의미이거나,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앞서 이미 복이 선언되었기에 복의 근원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3)라는 부연 설명에서 뒷받침됩니다. 따라서 ‘너는 복이 되라’는 말은 그가 열국의 복의 통로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3절은 이러한 약속된 복을 강조하기 위한 부차적 설명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지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고, 롯이 그와 동행했습니다. 아브람의 나이 75세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람(12:5-6)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복덩리라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의식을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느냐? 세상 사람들하고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동일한 말을 하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가문을 기독교 명가문으로 만들겠다는 이 약속은 교회를 세우고 나라를 세우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5-6)

아브람은 하란에서 모은 모든 재산을 모아 짐을 꾸리고 가나안으로 이사했습니다. 그의 이동 경로는 가나안 북쪽에서 남쪽 방향입니다. 그는 세겜 땅의 모레 상수리나무에 여장을 풉니다. 세겜은 가나안의 중앙에 위치하는 고대로부터 매우 중요한 중심 도시였습니다. 거기 모레라는 곳에 특별한 상수리나무가 있었는데, 당시 그런 큰 나무 아래에서 주술을 행하고 신탁을 받는 등 중요한 제의적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신에게 신탁을 받던 이곳을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통해 성스럽게 만드시며(7), 거기에서 모종의 진정한 신탁을 주실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다는 말은 암시를 위한 의도적인 첨언입니다. 이것은 그 땅에서 아브람의 정착이 쉽지 않을 것을 예고합니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9)

하나님 나라는 복의 나라입니다. 생명의 나라입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로 처음부터 한정되지 않고 생명의 하나님께 반응하는 이는 누구든 차별없이 누리는 생명입니다. 축복은 축복으로, 저주(사망)는 저주로 돌려받는 나라입니다. ‘나’를 떠난 ‘우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7-9)

하나님께서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람에게 나타난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추정컨대, 표면적으로는 이 장면이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초의 신현이지만, 우르에서 이미 그에게 나타났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브람은 그곳에서 가나안에서의 첫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가나안의 제단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제사를 바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8절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제사는 자연히 수반되었을 것입니다. 이 첫 제사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뒤 바친 첫 제사를 연상시킵니다. 노아가 새로운 땅에서 제사와 더불어 새 출발하였듯이, 아브람 또한 새로운 땅에서 제사와 더불어 새 출발을 합니다. 아브람은 거기서 벧엘을 향해 옮긴 뒤 벧엘 동쪽 산에 장막을 칩니다. 벧엘과 아이의 중간 지점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는 벧엘 동쪽으로 약 3km 정도에 위치합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다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고는 남쪽의 네겜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가나안 북부에서 중부, 남부까지 모두 여행합니다. 아브람의 이런 여정은 분명히 섭리적입니다. 장차 그의 후손은 그가 최초로 여행했던 가나안의 모든 지역을 차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나라는 복읨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서로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나입니다. 상대방의 저주를 통해 나만 서려는 이가 들어설 수 없는 나라입니다. 나를 버리고 주께 순종할 때 참여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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