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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7-03)

 


 축복을 빼앗긴 에서

창세기 27장 30-40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에서를 어떻게든 후계자로 앉히려던 이삭의 계획은, 에서의 ‘아버지여’하는 부름과 함께 산산이 부셔졌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빈틈을 노려 내 뜻을 도모해보려 하지만, 도무지 하나님께서는 빈큼이 없으십니다.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의 특식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서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일을 마친 리브가가 야곱을 숨겼기에 집안 전체가 조용했을 것입니다. 에서 입장에서도 이삭과 독대해서 독점적 축복을 받을 계획이기 때문에, 그는 이 요리를 리브가와 야곱 몰래 준비했을 것입니다. 이삭의 집에는 알지 못할 긴장감과 적막감이 흘렀을 것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에서(30-33)

이삭은 왜 떨었겠습니까? 경악이나 분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에서를 축복하려던 자신의 얄팍한 계획조차 빈틈없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묶여 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심을 꺾으실 때, 이삭처럼 떨며 ‘무엇을 할 수 있으랴’(37)하고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30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31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32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33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0-33)

리브가와 야곱은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직후, 야곱은 즉시 아버지의 숙소를 떠났습니다(30). 이것의 히브리어 문장 속에 그 아슬아슬한 긴박성이 잘 드러납니다. 이것은 ‘그가 나가자마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에서가 도착하기 직전에 아버지의 숙소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와 즉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아, 에서는 음식 솜씨도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손질하고 각종 양념을 넣어 끓여서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리브가와 에서 둘 다 이 특식을 준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 입맛에 딱 맞을 별미를 준비해서 숙소로 가져갔습니다(31).

그러고는 아버지를 부르며 일어나 음식을 드시고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서 야곱과 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대화의 차이를 대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뜻 같아 보이지만 다릅니다. 야곱은 ‘내 아버지여’라고 먼저 정중히 부르면서 아버지와 인사를 나눕니다(18). 이어서 그는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축복하소서’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명령형에 겸양을 표현하는 ‘나’(제발, 부디)가 붙어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정중히 인사하는 장면이 보이지 않으면서 곧 바로 ‘아버지여 일어나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축복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나’(부디, 제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아버지에 대한 에서의 태도가 덜 정중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에 대해 웬함은 에서의 어법에서 축복 기도를 앞둔 그의 들뜬 마음이 엿보인다고 설명합니다.

그 순간 이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앞서 야곱에게 물은 ‘너는 누구냐, 내 아들아’와 대조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사를 나누는 성격이 짙었던 질문이었는데, ‘내 아들’이 빠진 지금의 질문은 놀람의 표현입니다. 앞서 이미 에서의 특식을 먹었다고 생각한 이삭은 그 에서가 다시 동일한 특식을 대령했다는 말을 듣고서 크게 놀라며, 본능적으로 ‘너는 누구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영문을 모르는 에서는 순간 조금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큰아들 에서라고 대답합니다(32). 아마 에서는 아버지께서 시력과 청력이 나쁜 탓에 저러시는가 보다 하고, ‘저예요. 아버지 아들, 장남 에서요’라고 답변했을 것입니다.

이삭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히 크게 떨었다.’ 저자는 ‘큰’이라는 형용사와 ‘심히’라는 최상급 부사를 사용하면서 그의 넋 나간 공포심을 잘 묘사합니다. 이삭은 순간 야곱의 사기극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누가 사냥한 고기로 음식을 해 온 것이냐’는 질문은 그저 탄식 소리일 뿐입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자신이 그의 음식을 실컷 먹고 그에게 모든 축복을 쏟았기에 그가 ‘반드시’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33). ‘반드시’라는 강조 부사의 사용은 이 복이 철회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에서의 뒤늦은 축복 요청(34-36)

에서는 왜 통곡하는가. 에서에게 하나님 나라를 떠안는 사명은 팥죽 한 그릇만도 못했으니, 상속권을 뺏긴 데 대한 울분 아니었습니까! 그는 야곱의 ‘욕심’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의 영적 ‘무심’을 한탄하며 울었어야 했습니다. 우리에겐 자신을 돌아보는 울음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34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35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36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34-36)

에서는 이삭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단말마의 비명이 담긴 히브리어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34). 그가 ‘소리 질러 슬피 울었다’는 아쉬운 번역입니다. 오히려 예전 한글개역의 ‘방성대곡했다’가 히브리어 문장의 뉘앙스를 잘 반영한 번역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내어 운 정도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그는 심히 큰 쓰라린 부르짖음을 울부짖었다’는 뜻입니다. 격한 감정을 담은 단어들이 삼중, 사중으로 연속됩니다. ‘심히’(아드 메오드), ‘큰’(게돌라), ‘쓰라린’(우마라), ‘부르짖음’(츠아카)을 ‘울부짖었다’(차아크). 에서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자신도 축복해달라는 말을 반복하며 아버지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이삭은 동생 야곱이 속임수로 그의 복을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35). 이삭의 말대로 그는 속이는 자입니다. ‘속임수’(미르마)라는 단어는 그가 삼촌 라반에게 속을 때 똑같이 사용됩니다(창세기 29:35). 속임수로 상대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가 결국 속임수로 고통을 당합니다. 에서는 야곱이라는 이름 뜻을 들먹이며 그가 그의 이름대로 행동했다고 비난합니다. ‘속이다’라는 동사 ‘아카브’는 야곱의 이름과 어근이 동일합니다. 이 동사는 앞서 설명한 대로 ‘발목을 잡다’, ‘속이다’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마찬가지로 이미 살펴보았듯이, 야곱의 이름인 ‘야아콥’의 원래 뜻은 ‘그가 보호하실 것이다’였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에서는 야곱이 전에 자신의 ‘장자의 명분’(장자권)을 빼앗아 갔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복’(베라카)를 찬탈했다고 격분하며 말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장자의 명분(장자권)과 복이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이 보장하는 유산을 넘겨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가 아버지에게서 받으려 한 ‘복’은 ‘장자의 복’으로서 법적인 장자권을 지닌 자가 미래에 누릴 모든 혜택을 가리킬 것입니다. 결국 아마 안수가 동반된 가장의 이 예언적 축복의 선포는 장자권을 최종적으로 확증하는 의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해밀턴 역시 ‘축복을 선언하는 것은 장자를 주요 상속인으로 인정하는 공식적인 행동으로 간주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장자권을 야곱이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예언된 에서의 미래(37-40) 

이삭이 에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리브가를 통해 받은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다’라는 애초의 예언을 반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깨끗한 승복이자 인정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수식어와 핑계가 많아 장황하다는 건 하나님 뜻과 멀어졌음을 실토하는 것입니다.

37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38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9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40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37-40)

자신의 복의 창고를 모두 비워 야곱에게 쏟아 부었기에 이삭에게는 에서를 위한 복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이미 자신이 야곱을 에서의 주인으로 세웠으며, 나아가 장차 야곱의 형제들도 종으로 주었다고 말합니다(37). 또한 야곱에게 곡식과 포도주의 축복까지 다 건넸으니 에서에게는 더 이상 줄 복이 없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형제들’이란 야곱의 친형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에서만이 유일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온 다른 계열의 야곱의 형제들(즉 친족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들도 야곱의 후손, 곧 이스라엘에게 예속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변 열국이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모두 정복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이해됩니다.

에서는 절박합니다. 아버지에게 빌 복이 하나뿐이냐면서 자신도 축복해달라고 간절히 거듭해서 요청합니다. 그는 소리 높여 울며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에게 그를 위해 빌어줄 여분의 복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큰아들 에서를 위한 미래를 예언합니다. 분명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이 예언은 이삭의 즉흥적인 선언이 아니라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큰아들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에서는 이미 야곱에게 찬탈된 하늘과 땅의 복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대신 그는 칼을 의존해서 삽니다. 이 점에서 에서는 가인과 이스마엘의 운명과 비슷하게 투쟁을 하며 방랑할 운명이 지워집니다. 그는 동생 야곱을 섬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동생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에는 그 멍에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에서의 후예는 구약 전반에서 매우 호전적인 종족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에돔은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되어 아우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섬기게 됩니다. 매임을 벗는다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열왕기하 8:20, 22에서 성취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야곱에 대한 이삭의 축복 또한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운명 속에서 성취됩니다.


이삭의 회개 동작을 따라가노라면, 우리가 그린 청사진들이 이미 하나님의 설계도 안에 치밀하게 엮여 있음을 실감합니다. 내가 지은 소망들을 부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견고히 구축해놓으신 참 소망 안으로 들어서라는 부르심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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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7-02)


축복을 가로채는 야곱

창세기 27장 15-29절


야곱은 유언의 때를 스스로 앞당겨 더 각별하게 사랑하는 아들 육신의 장남 에서를 축복하려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채 동물 가죽과 형의 옷을 뒤집어쓰고 그 축복을 가로채려고 합니다. 이 사이에서 정직한 하나님의 뜻만이 오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행동을 개시합니다. 14절에서 야곱에서 야곱과 리브가의 작전 실행을 표현하는 간결한 세 개의 연속된 동시는 이작전이 즉각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리브가의 신속한 행동은 위장술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그녀의 음모가 즉흥적이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야곱 또한 얼마나 두뇌의 회전과 행동이 빠른지를 보여줍니다.

  

이삭의 특식이 준비(15-19)

이삭은 촉각과 후각을 동원하여 에서를 후계자로 세우려는 자기 뜻을 밀어붙였습니다. 어두운 눈으로도 잘할 수 있었을 듣기와 복종에 힘썼더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삶에도 거추장스러운 몸부림을 중단하고 그저 듣고 무릎 꿇어야 해결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17자기가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니 18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15-19)

리브가의 행동은 일사분란하고 빠릅니다. 그녀는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에서의 좋은 옷을 가져와 야곱에게 입힙니다(15). 히브리어는 이것이 단순히 ‘좋은 옷’이 아닌 매우 ‘소중한’ 옷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리브가는 요리를 위해 새끼 염소 가죽을 벗겨낸 뒤 옷 밖으로 드러난 이삭의 신체를 모두 위장했습니다(16). 팔뚝까지 포함해서 두 손을 덮고 이어서 목에 둘렀을 것입니다. 또 그것을 만졌을 때 에서의 피부와 비슷한 느낌이 들도록 세밀히 새끼 염소의 털을 손질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에서의 피부에 난 털의 크기와 감촉, 밀도까지 고려해서 가짜 피부 털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축복 예식에서는 입맞춤을 하는 것이 관례이기에 이삭의 얼굴 주변에도 염소 털을 붙여 구레나룻을 위장했을 것입니다. 리브가가 새끼 염소 두 마리로 음식과 위장을 동시에 해결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음모가 사전에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된 것임을 알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와 야곱은 옷을 가지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그러나 후에 야곱 자신도 아버지가 된 후 결국 자녀들에 의해 위장된 옷에 속습니다(창세기 37:31-34). 어떤 사람은 이런 조잡한 위장술이 통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 의심을 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삭이 다 알고도 속아준 것일 수 있다는 추론까지 제안합니다. 즉, 이삭은 축복 기도를 받는 아들이 야곱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속는 척하면서 손을 머리에 얹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삭이 에서를 얼마나 편애했는지를 볼 때, 그가 에서를 위해 장자의 축복을 내리기로 결심하고 그를 불러 독대해서 실제적인 축복 의례를 실행하기 시작한 것을 볼 때 전혀 성립할 수 없는 해석입니다. 무엇보다 이삭이 이런 위장술에 속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둔해진 감각 때문입니다. 그는 시력뿐 아니라 손의 감각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녀는 정성스레 준비한 이삭을 위한 특식을 야곱의 손에 들려줍니다(17). 야곱은 그것을 들고 아버지의 숙소로 가서 아버지를 부릅니다(18).

그는 최대한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 냈을 것입니다. 아마 이삭은 이때 시력뿐 아니라 청력도 예전 같지 않았기에 위장된 목소리를 어느 정도 의심하긴 했으나(22), 결국 속고 말았습니다. 이삭은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시력이 희미했던 이삭이 아들의 신분이 의심스러워 이 질문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에게 이 질문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물었던 질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대담하게 자신이 에서라고 답변하면서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특식을 드시라고 권면합니다(19). 사냥한 고기를 다 드신 뒤 자신을 마음껏 축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삭이 속임수에 넘어감(20-23)

서열에서 밀리고 부엌으로 밀려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형의 피부와 냄새를 가장해서라도 갈취하고 쟁취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약속이란 기다림이자 상상력입니다. 조바심과 현실문제로 웅크려도 다시 일어서는 탄성력이 믿음이며 의로움입니다.

20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1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22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20-23)

리브가와 야곱은 계획을 빠른 시간 내에 진행해야 했습니다.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예상보다 너무 빨리 나온 특식이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어떻게 사냥을 이렇게 빨리 마칠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20).

야곱은 하나님께서 사냥감을 ‘내 앞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즉시 발견할 수 있게 해주셔서 빨리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기만적인 위장술에 이어서 거짓말을 추가한 것입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끌어들여 사기극에 이용합니다. 이삭은 나름 신중하게 축복 의례를 진행하려 합니다. 누군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고 축복을 비는 행위는 중대한 일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안전하게 최종적으로 기도의 대상을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침침한 눈과 귀로는 누군지 확인하기 어렵기에 추가적인 검증 절차를 밝습니다. 아들의 몸을 만져 에서인지 확인해보려 합니다. 이삭에게 아들의 음성은 에서의 음성이 아닌 야곱의 음성인 것처럼 들렸습니다(22). 이삭은 야곱의 두 손(아마 팔뚝까지)을 만져보고 에서의 피부 털의 촉감을 느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속임을 당하며, 결국 야곱을 축복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23).

그가 속은 것은 탁월한 위장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별을 하지 못했다’는 저자의 평가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신중치 못함과 손 감각의 기능 저하, 그리고 영적 분별력의 감퇴로 인해 생긴 결과라고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듣는 것을 진리의 원천이라고 말하는데(신명기 4:12) 이삭은 이 감각을 무시합니다.

23절 끝의 ‘축복하였더라’라는 언급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이삭의 축복이 29절에서 실행되는 이유로 여기서 그가 축복했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잘못 첨가된 부분이라고 말하거나 29절과 다른 자료라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베스터만(Westermann)은 이것이 먹고 마시고 키스를 하고 축복을 선언하는 축복 의례 전체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제이콥(Jacob)이나 월키는 이것을 단순한 의례적 인사나 감사의 답례로 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인사로 본다면 문맥상 매우 어색합니다. 분명히 문맥은 이삭이 분별을 못하여 에서가 아닌 야곱을 축복한 것으로 읽힙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이삭이 이러한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해 결국은 야곱을 축복하게 되었다고 미리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24-29)

인간은 저마다의 뜻이 뒤엉켜 엎치락뒤치락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아랑곳없이 흘러갑니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라는 애초의 말씀은 반드시 이뤄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가고 잊고 외면한 말씀들을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그 원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24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5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6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4-29)

이삭은 검증 작업을 마친 후 그가 자신이 총애하는(‘내 아들’) 에서라고 확신합니다(24). 24절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 아니라 확증의 질문입니다: ‘너는 진짜 내 아들 에서로구나!’ 야곱의 ‘맞습니다’라는 마지막 화답과 더불어 확인 작업이 끝납니다. 이삭은 아들이 가져온 별미를 즐깁니다. 축복 예식의 절차대로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 아들을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25). 야곱은 특식과 떡을 드렸고 이어서 포도주를 가져와 마시게 했습니다. 아마 관례적으로 특식에는 포도주가 수반되었지만, 여기서 특별하게 이것이 언급되는 이유는 야곱이 이삭의 분별력을 더욱 흐리게 하려고 가져왔음을 암시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식사를 마친 이삭은 야곱을 가까이 오라고 부릅니다. 이어서 자신에게 입을 맞추라고 명합니다(26). 이것은 쌍방 간의 축복과 평안을 비는 관례적 의례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이삭은 아마 그의 머리와 몸을 껴안았을 것이며, 그의 옷의 향취를 맡으면서 그를 축복합니다(27). 참고로 본문에서 생략되어 있으나 통상적으로 축복을 할 때는 상대방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관례입니다(창세기 4:12-14).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다’라며 그가 받은 복과 그에게 복을 주신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여기서 ‘밭’은 ‘들’을 의미합니다. 앞서 에서는 들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창세기 25:27). 에서의 옷에서 들사람의 냄새가 나기에 이삭은 그가 나가서 활동하는 사냥터와 목초지의 풍요함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축복은 야곱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탁월한 목자가 되었으며, 가나안 전역을 누비는 사람이 됩니다. 이삭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새포도주를 의미함)가 그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원된 복들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던 약속의 반복입니다. 물론 언뜻 그 내용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들과 다소 차이가 있는 듯 보입니다. 후손의 번성, 땅의 약속, 복을 누림, 열국의 복의 통로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의 반복이며 확증입니다. 만민이 그를 섬기고 열국이 그를 경배한다는 것은 야곱의 후손의 번성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창대해져 모든 민족들이 그를 높이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로 말미암아 열국이 복을 받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해 있습니다. 강대한 아브라함과 그의 손자 야곱의 나라를 통해 그에게 부복하고 섬기는 만민이 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어지는 저주와 축복의 이분법적 예언도 같은 맥락에서 선언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했듯이 이삭의 장자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축복하는 자는 목을 받을 것입니다. 이삭의 축복의 승계자는 결국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승계자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알아맞히고 하나님과 거래하여 얻어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삭을 향해 치켜든 아브라함의 칼끝에서야 보이는 세계이며, 내 뜻을 꺾어야 비로소 맞닿는 세계입니다. 내 욕망의 그늘에 가려서도 묵묵히 전진해온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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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7-01)


축복을 가로채려는 리브가와 야곱

창세기 26장 34절-27장 14절


박철수 목사의 [축복의 혁명]에서, 저자는 ‘왜곡된 성령론과 이원론, 축복관’을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세 가지 질병으로 진단합니다. 중증은 단연 잘못된 축복관입니다. 기복적인 신앙으로 집착함으로 변질된 신앙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언약(복)은 인간의 눈먼 욕망에 의해 가려지고 가로채지는 천박한 대상으로 전략합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처럼 40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혼은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일부일체를 고수했습니다. 그의 일부일처는 족장 중에서도 유일합니다. 그러나 에서는 두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그것도 이방 혈통의 여자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에서의 성격이 막무가네여서 그랬겠지만 부모의 만류가 소극적이었음을 암시됩니다. 이 에서에 대한 소개는 그가 왜 선택되지 못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에서의 잘못된 결혼(34-35)

에서는 가나안 헷 족속의 딸 중에서 아내를 얻어 경건한 부모의 근심이 됩니다. 이 일로 영적인 유산과 가치를 가볍게 여기며 언약을 상속받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행복과 번영은 가장되고 포장된 박복(薄福)일뿐입니다.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34-35)

에서는 40세에 두 명의 헷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되었습니다. 우선 그는 가나안 족속의 하나인 햇 족속 여인들과 결혼함으로써 할아버지 아브라함 가문의 전통을 깨뜨렸습니다.

또한 일부일처를 고수한 아버지 이삭과 달리 두 명의 아내를 함께 얻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삭과 리브가는 심적인 고통을 겪습니다. 에서의 결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나중에 에서는 이 두 명의 아내 외에 여러 명의 첩을 맞아들입니다(창세기 28:9; 36:2-3). 에서는 삼손처럼 자신의 욕심과 혈기대로 성급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기에 부모가 만류해도 소용없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그의 결혼을 적극 만류하지 않고 방치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에서를 편애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왜 에서의 잘못된 결혼 이야기가 여기에 등장합니까? 서사는 에서가 선택되지 못한 계열임을 처음부터 드러냅니다. 그것은 왜 결국 야곱이 택자의 계열을 잇는지를 처음부터 암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에서는 에서는 야곱을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에서는 아브라함의 손자로서 가나안 여인들을 피해야 하고 이삭처럼 멀리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신의 배우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잘못된 결혼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약속의 백성이 되기에 무가치하고 부적절한 인물임을 드러냈습니다.

 

에서를 축복하려는 이삭(1-5)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이삭과 대조적으로 리브가는 귀가 밝아서 이삭과 에서의 대화까지 엿듣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탁(25:23)을 기억하지 못한 이삭의 영적 둔감함과 가장을 통한 축복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리브가를 대조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웁니다.

1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1-5)

이삭의 무능함과 영적인 쇠락은 그가 잘못된 결혼을 감행한 에서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이삭은 영적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에서의 행실은 안중에 없으며, 아브라함과 자신에게 준 약속도 잊었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전적으로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장남으로 태어난 데다 힘이 세고 용맹하며 활력이 넘치기에,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집안에만 있기 좋아하는 야곱은 배제하고, 그를 상속자로 굳힌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자신의 약점과 부족한 기질을 메워줄 후계자를 선호했을지 모릅니다.

이삭은 에서를 자신의 상속자로 여긴 뒤 그에게 장자의 축복을 베풀기로 결심합니다. 노년의 아버지가 임종 직전 자녀를 불러 장자에게 자신의 권한을 넘기고 자녀의 복을 비는 것은 일반적 관례였습니다(창세기 49장). 그러나 직전에 결혼한 에서가 40세이므로 현재 이삭의 나이는 100세가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임종과 유언을 준비한 이유는 자신의 신체 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일찍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불렀습니다(27:1). 그러나 에서만 부르고 야곱은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관례에 어긋납니다. 분명 야곱은 이삭의 안중에 전혀 없었으며, 자신의 축복권을 사용하여 가문이 받을 모든 미래의 축복을 에서에게만 쏟아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축복 예식은 유산 상속 절차와 별개의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가족의 전통을 어기고 다른 혈통의 여자와 결혼한 아들입니다. 그는 전혀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27:1에서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그의 육적 상태만이 아닌 어두워진 영적 상태를 암시합니다. 노쇠한 육체와 더불어 육적인 식탐은 더 강해지면서 영적 분별력을 잃은 채 이삭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어긋난 계획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행위가 전혀 부당하게 취급될 수 없는 이유가 내비칩니다. 이삭은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운 것 같다고 말하면서(그러나 무려 80년을 더 산다) 에서에게 나가서 사냥을 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2-4). 그러면 자신이 에서를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5).

이삭은 에서의 고기를 탐닉했고 에서는 야곱의 팥죽을 탐닉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탐닉했습니다. 이 장자의 특권은 당장에 환상의 맛을 주고 순간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으로 맛볼 수 있는 영원한 미래의 축복의 열쇠였습니다.

이후의 이야기에서 이삭은 퇴장하고 그의 한참 이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창세기 31:28-29)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고의적으로 그의 삶의 족적을 공백으로 남깁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이삭을 비난합니다.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려 하는데, 이 기도를 통한 복과 장자권이 주는 유산 및 복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장자권의 현실적 혜택인 상속 재산과 장자권이 주는 영원한 복과 집안 계보를 이권은 분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 야곱이 에서에게서 부당한 거래를 통해 넘겨받은 장자의 명분은 사소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현재 이삭의 축복 의례는 그 집안의 적통을 이어갈 장자권의 확증을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둘이 절차상으로, 법적으로 구분된다 하더라도, 히브리서 기자는 신학적으로는 둘을 그림하지 않고 평가합니다(히브리서 12:16-17).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 때 그는 이미 법적 장자권을 팔았습니다. 결국 섭리 가운데 그것이 이삭의 손을 통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족장 시대에 가장의 축복은 먼 여행을 떠나보내거나(창세기 28:1) 결혼으로 가족이 이별을 할 때(창세기 24:60), 혹은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선언됩니다. 그것은 변경될 수 없었기에 현재 이삭의 상속자를 위한 축복의 선언은 결코 철회될 수 없습니다.

 

이삭을 속이기 위한 리브가의 계략(27:6-10)

이삭은 하나님의 신탁(25:23)을 망각한 채 에서의 야성과 그가 만든 별미를 좋아하다가 서둘러 축복하려 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 명분을 소홀히 요긴 에서와 비슷합니다. 눈먼 아비이고 아들입니다. 둘 다 자기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복을 소홀히 여긴 것입니다.

6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8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9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6-10)

이삭은 에서를 편애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합니다. 이제 이삭-에서와 리브가-야곱이 충돌하는 가정불화가 임박한 가장의 최종적 축복을 앞두고 본격화합니다.

리브가는 이삭과 에서의 대화를 밖에서 엿듣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사냥을 하러 나가자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찾아가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올 것이 왔습니다! 아마 리브가는 에서에게 아브라함 집안의 계보와 축복이 넘어가서는 안 될 상황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에게 자신이 꾸민 계략을 설명하며 시키는 대로 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것은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 음식을 만들어 시력이 약한 이삭을 속여서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자는 계산이었습니다.

9절을 볼 때, 에서는 요리에도 능했던 갓 같습니다. 아버지의 입맛에 딱 맞는 요리를 잘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음식을 평생 책임진 리브가는 더욱 이삭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와 그의 입맛을 잘 알기에 그녀가 손수 요리를 준비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나가서 기르던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두 마리의 새끼는 두 손과(아마도 팔뚝까지) 목을 뒤덮어 위장할(16) 충분한 털가죽을 확보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머니의 계략에 동조하는 야곱(27:11-14)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옳지 못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축복을 가로챈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수와 계략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가십니다. 이것이 실수와 허물투성이인 인간의 유일한 위안이고 희망입니다.

11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13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14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11-14)

야곱은 어머니의 계획을 듣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에서와 자신은 신체적 특징이 전혀 다르므로 아버지를 속이기 어렵다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애서는 털이 많고 자신은 털이 없는 사람이기에 시력이 약한 아버지도 만져서 둘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고(11), 속임수가 들통 나면 아버지에게서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퍼부어질 것이라고 걱정합니다(12). 이것은 죄질이 아주 나쁜 범죄입니다. 부모를 속이는 데다 부모의 약점을 이용하는 패륜적 범죄입니다. 율법은 소경과 맹인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할 것을 말합니다(레위기 19:14; 신명기 27:12). 소경과 맹인을 착취하고 속이는 것은 반인륜적 범죄였습니다. 맹인의 길을 잃게 하는 자를 향해 저주가 선언됩니다(신명기 27:18). 따라서 부모님의 그런 장애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리브가는 이 일은 자신이 책임질 일이므로 아버지의 저주를 자신이 받겠다고 안심시키며 나가서 염소를 끌고 오라고 지시합니다. 야곱은 나가서 두 마리의 새끼 염소를 끌고 왔습니다. 해밀턴(Hamilton)은 이런 야곱의 모습을 인상 깊게 묘사합니다. ‘나중에 하나님과 씨름을 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그 사람이 그의 어머니와 혹은 그의 =양심과는 별다른 씨름을 하지 않는다.’ 리브가는 두 염소를 잡아 이삭을 위한 특식을 준비했습니다.


인생은 삼인 삼색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무시했고, 이삭은 복을 소홀히 여겼고, 리브가와 야곱은 복을 탈취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편애와 편집(偏執)의 대상이 될 만큼 천박하지 않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면 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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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6-02)


이삭과 아비멜렉의 계약

창세기 26장 12-33절


25장에서 시작한 야곱 이야기 중간에 이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다가 27장에서 다시 야곱이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씀을 따라서만 움직이고,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혜를 발휘하지 않고 뒷걸음치는 이삭의 온유함은 야곱의 이야기에서 볼 수 없는 태도입니다.

 

아비멜렉이 가족을 해치지 말라는 방을 전국에 내린 후 이삭은 그 땅에서 평온히 지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는 농사를 지어 백배의 수확물을 얻었습니다. 족장들은 농사꾼이 아니었으며 유목인들은 보통 소규모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는 그랄 땅에서 상당히 오래 체류할 마음으로 큰 농사를 지은 것 같습니다.

 

이삭과 블레셋 백성의 갈등(12-18)

충복(忠僕)의 조건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번성에 시기하여 우물을 막더니 급기야 그 땅에서 쫓아냅니다. 번영이 시기의 원인이 되고 축복이 시련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번영이 축복의 표지이긴 하지만, 그것이 안전까지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참된 안전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12-18)

이삭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특별한 하나님의 복으로 그해 수확이 백 배로 늘어났습니다. 여기서 백 배는 완전수의 하나인 ‘10’의 열 배이므로 완전한 풍작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만일 문자적이라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대폭 늘었을 뿐 아니라 그의 경작지가 크게 늘어난 결과일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이삭은 그랄 땅에서 나그네 신분으로 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과 그랄 백성은 선친 아브라함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지 않고 원하는 곳에서 살도록 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상당히 장기적으로 체류하였기에 이삭은 거기서 농사도 지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갈수록 번창했습니다(13). 히브리어 원문은 ‘크다’를 세 번이나 사용하면서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의 가축 떼와 종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며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아브라함이 거부가 되었을 때 아비멜렉의 백성이 시기하여 우물을 빼앗았습니다(창세기 21:22-26). 나중에 야곱의 목축이 크게 번창하자 삼촌 라반의 시기를 한 몸에 받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모든 우물을 흙으로 덮어 막아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지역에 여러 우물을 팠다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는 상호불가침 조약이 맺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후손들을 포함한 조약이었기에 이삭에게도 그 조약은 적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공격하고 권리를 침해하였으며, 적어도 사용권을 허락받은 땅을 침범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그랄 땅을 떠난 뒤 그가 팠던 우물들은 인구가 많지 않았던 그랄 사람들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삭은 그랄 땅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가 팠던 우물들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웬함은 18절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이 죽은 직후 일단 그랄 사람들이 그가 판 모든 우물들을 덮은 것으로 봅니다. 그랄의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폐쇄함으로써 거부가 된 이삭을 강력히 견제했습니다. 아비멜렉은 노골적으로 조약을 파기하고 그에게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이삭에게 솔직하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보다 더 강하므로 우리를 떠나라’(16). 이것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가 압도적으로 늘어나자 애굽의 바로가 모세에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출애굽기 1:7,20).

이삭은 결국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그랄 골짜기로 옮겨가 거기에 막사를 짓고 거주했습니다(17). 이것은 계절천을 의미하는데, 협곡을 흐르기도 하지만 넓은 분지를 흐르기도 합니다. 비가 올 때만 흐르고 비가 멈추면 하천이 마르는 수많은 계절철들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우물은 당시 대단히 비싼 재산이었습니다. 특히 물이 부족한 네게브와 그랄과 같은 땅에서 우물은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이삭은 골짜기로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골짜기 일대의 어느 곳에는 초지도 충분하고 비교적 지하수를 찾기 쉬웠습니다.

18절은 17절과 분리해서 읽어야 합니다. 17절로 이삭의 추방과 새로운 거주지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 마무리되었습니다. 18절은 그가 그랄 골짜기에 가서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그가 17절에서 이미 그 우물들이 있던 그랄 땅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밀려났기 때문이며, 19절 이하에서 보듯이, 이삭은 거기서 새로운 우물을 파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8절은 그곳 우물의 역사에 대한 요약적인 기록입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는 진술에 대해 웬함은 제이콥(Jacob)의 견해를 따라 이 단어의 동사 시제를 과거완료로 해석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팠었던(had been dug) 그 우물들을 그가 다시 팠다(He had redug)’. 요컨대, 이삭이 그랄에 도착해서 부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서 사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메웠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다시 판 후에 아버지가 붙였던 이름을 다시 붙였습니다. 우물은 큰 재산이므로 우물을 판 소유자가 고유의 이름을 붙여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삭이 그 우물들에 아버지가 붙였던 동일한 이름을 부여한 것은 우물의 소유권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삭과 그랄 목자들의 우물 분쟁(19-22)

우물을 팔 때마다 블레셋에게 거듭 양보하던 이삭은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번성을 누립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은 결과로 기나긴 고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에게 편히 숨쉴수 있는 ‘넓은 곳’(르호봇)을 주셨습니다. 그 안전한 축복은 온유한 순종의 대가였습니다.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19-22)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우물을 새로 팠지만 그 우물마저 블레셋 사람들이 욕심을 냈습니다(19-20). 우물이 당시에 인간과 가축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합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다툼’이란 뜻의 에섹으로 지었지만 그 우물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사의 다른 우물을 팠는데, 다시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탐내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는 그 우물을 ‘비방’, ‘적의’를 뜻하는 싯나로 불렀는데, 그 우물마저 블레셋 사람들에게 양보했습니다(21). 이삭은 다시 장소를 옮겨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때 분쟁이 더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이 우물도 빼앗길지 모르지만 묵묵히 믿음으로 우물을 팠을 것입니다. 그는 그 우물에 ‘르호봇’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경을 넓혀주셔서 그 땅에서 번성하게 되길 바라는 길은 신앙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22). 땅의 정복과 번성은 창조 명령이며, 이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의 약속들의 핵심 요소입니다. 우물을 포기하는 이삭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고 자신의 막대한 전리품을 소돔에게 양도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브엘세바로 이주한 이삭(23-25)

이삭의 번성을 본 아비멜렉이 브엘세바까지 찾아와 화친을 맺자고 청합니다. 아무리 빼앗겨도 다시 채워지는 이삭의 삶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했을 뿐인데 이삭은 이제 자신을 쫓아냈던 아비멜렉의 부러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23-25)

이삭은 마침내 그랄 골짜기를 떠나 브엘세바로 거처를 옮깁니다. 어느 날 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빈번히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밤중에 이삭에게 직접 나타나셨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 가족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고,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 조약을 맺은 장소이자, 특별한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린 곳입니다(창세기 21:31-33). 하나님께서는 그랄 땅에서 두려워하는 그를 향해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십니다(24). 또 자신을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아버지에게 약속했던 복을 이삭에게 모두 주어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확증하십니다. 이삭은 이것을 기념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며 기거할 처소를 마련했습니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도 새로운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의 조약(26-33)

아브라함과 화친을 맺은 바로 그곳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은 다시 그의 아들 이삭과 화친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아무리 잃고 빼앗겨도 다시 채워지는 이삭의 삶에서 하나님의 배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삭을 자신들이 당해낼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사탄을 무력화한 하나님의 지혜였듯이, 지금도 그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수단이 됩니다.

26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26-33)

어느 날 아비멜렉이 부하들을 데리고 그랄에서 이삭을 만나기 위해 브엘세바로 찾아왔습니다. ‘친구/동료’라 불릴 만큼 신임하는 최측근 아홋삿과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했습니다. 유력한 수행원을 대동한 것에서 아비멜렉의 위상이 드러나고 또한 이 조약의 파트너인 이삭의 권세도 잘 나타납니다. 이삭은 자신을 내쫓더니 왜 찾아왔는지 묻습니다(27).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심을 보았기에 새로운 조약을 맺으러 왔다고 말합니다(28). 아비멜렉은 지나치게 커진 이삭의 권세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너는 우리를 해치지 말 것을 약속하고, 또한 우리도 너희를 해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29). 그는 이삭의 가족을 해하지 말라고 전국에 칙령을 내린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거듭된 우물 분쟁과 더불어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선대의 아브라함처럼 다시 두 사람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조약식을 마친 후 풍성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언약이나 조약 체결 후에는 잔치가 배설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들은 밤새 먹고 마시며 친목을 다진 후 일찍 일어나 조약 준수를 다짐한 후 이삭을 떠났습니다(31). 이삭은 거기서 새로 판 우물에서 종들이 생수를 퍼내자 그 우물 이름을 ‘맹세’를 뜻하는 ‘세바’라 칭했습니다. 그 성읍 이름은 아브라함이 붙인 그대로 브엘세바라 칭하였습니다.


비우니 채워지고 물러나니 다가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가능한 역전이고 역설입니다. 이삭의 이런 온유한 행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채우심을 기대하면서 자기 부인과 순종의 비움을 실천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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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6-01)


아버지처럼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이삭

창세기 26장 1-11절


 ‘부전자전(父傳子傳)’입니까? 이삭이 처한 위기 상황도 위기에 대한 처신도 아버지 아브라함을 꼭 빼닮았습니다. 땅과 후손의 약속이 또 한 번 위기를 만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서둘러 개입하셔서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시고, 축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깨우치십니다.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근이 다시 찾아와 이삭이 이주하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던 죄를 반복합니다. 복을 나누어주도록 부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이 도리어 이비멜렉에게 추궁을 당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26장은 아브라함이 175세에 사망한 이후의 사건으로 확인되며(창세기 28:18), 그렇다면 이때 이삭의 나이는 최소 75세, 이미 태어난 야곱과 에서는 최소한 15세입니다.

 

다시 엄습한 기근과 이삭의 이주(1-5)

이삭이 살던 가나안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다시 맞은 기근입니다. 약속의 땅에도, 약속을 받은 이들에게도 기근이 찾아오듯,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난이 비껴가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고난은 당연하게 여기던 축복을, 삶의 조건을, 관계를 다시 보고 새롭게 보게 합니다.

1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1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1-5) 

현재의 이삭 이야기를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발생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26:18은 이 사건이 ‘아브라함이 죽은 후’라는 것을 명백히 적시합니다. 이삭이 75세, 에서와 야곱이 15세였을 때, 아브라함이 175세의 나이로 죽었고, 이때 이삭과 리브가는 브엘라해로이로 거처를 옮겼습니다(창세기 25:11). 만일 그 이사가 몇 년이 지난 후였다면, 이삭의 나이는 거의 80세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나이는 20세정도입니다. 이삭은 그 후 기근을 만나 그랄로 이동했으므로 현재의 사건에서 나이는 더 늘어납니다. 결국 이삭과 리브가는 이미 장성한, 앞서 팥죽 사건을 벌인 두 아들을 데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래도록 고도의 사기극으로 매우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데 성공해왔습니다. 26장 전반부는 이러한 이삭의 믿음의 실패를 묘사하지만, 뒷부분은 이삭의 성숙한 믿음과 분쟁을 싫어하는 온유한 성격을 잘 보여주며 그를 높이 칭찬합니다. 무엇보다 이삭의 신앙적 쇠락과 더불어 아내를 누이로 속인 비겁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해 농사를 백배나 얻게 하는 등 그분의 축복은 결국 끊어지지 않았음이 강조됩니다(창세기 26:12 이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26장의 이삭의 믿음의 쇠락은 27장의 육체의 쇠락과 더불어 찾아온 영적 분별력의 상실을 미리 예고합니다.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아브라함 때 흉년이 찾아온 이후 가나안 땅에 다시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피해 그랄로 이주했습니다. 그가 만난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때 통치한 아비멜렉과 다른 인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즈음에 만난 아비멜렉 이후 이미 8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1절로 볼 때, 이삭의 이주는 일단 그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애굽으로 갈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2절을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된 일이었음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네게 지시할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랄의 통치자인 아비멜렉은 20장에서와 달리 ‘블레셋 왕’으로 소개되니다. 21:32에서 설명한 대로, 창세기에서 ‘블레셋’이란 명칭의 등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블레셋은 후대의 블레셋과 여러 모로 다른 특징을 보입니다.

2절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에 대해 혹자는 이 땅이 그랄 땅을 가리키기지 않으며, 계속되는 이야기 속에서 결국 이삭이 정착하게 되는 브엘세바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거기서 ‘거주하라’고 하셨는데 농사가 ‘샤칸’이기 때문에 잠시 머무는 그랄 땅일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3절에서 ‘이 땅에 거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동사는 ‘구르’로서 나그네와 같은 일시적 체류를 의미합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2절과 달리 그랄 땅에 머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샤칸’은 대부분 천막에 거주하는 것을 지시하는 동사일 뿐 그런 거주의 성격과 기간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주어진 명령과 동일합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이삭도 이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가야 할 곳을 지시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랄 땅에 거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이삭과 그의 후손을 통해 성취하겠다고 재차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복을 누림’, ‘땅을 얻음’, ‘자손의 번성’, 그리고 이삭의 후손을 통한 ‘모든 민족의 복’입니다(3-6). 이것은 아버지에게 주어진 약속들의 반복이지만 이삭이 하나님께 직접 받은 최초의 약속들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그랄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땅은 원래 약속의 땅인 가나안 경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일차적인 약속의 땅과 확장된 이차적인 약속의 땅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요단 서편의 약속의 땅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나중에 실질적인 약속의 땅의 범위는 훨씬 넓어집니다. 동쪽으로 요단 동편을, 북쪽으로 헤르몬 산과 하맛 어귀를 넘어 유프라테스 강 상류까지, 남쪽으로 멀리 에시온 게벨 항구까지 포함하는 네게브 전체를, 서쪽으로는 그랄 땅을 포함한 블레셋 영토와 북부 해안의 두로와 시돈 지역까지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잠시 거의 성취된 바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랄 땅을 확장된 가나안 땅에 포함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그 땅을 주시는 이유를 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의 탓으로 돌립니다. 모리아 산 제단 위에 기꺼이 올려진 이삭의 절대 순종의 모본이 무시되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후손을 위한 자신의 약속과 준비된 축복의 토대를 확고하게 아브라함에게 두고 계십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법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들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명령’, ‘계명’, ‘율례’, ‘법도’는 동의어들로 율법과 계명에 대한 다른 표현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구체적인 율법과 계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한 자신의 명령을 미래의 그의 후손들이 받을 구체적인 율법과 계명의 원형으로 간주하십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후손들이 받을 모든 율법과 계명을 선취적으로 지킨 인물입니다. 

 

아버지의 죄를 반복하는 아삭(6-7)

축복의 조건은 비옥한 땅도, 인간의 지혜도 아닙니다. 순종이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삭도 기근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떠나지 않아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땅 끝에서 들려온 약속에 그는 머묾을 선택합니다.

6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6-7)

그러나 이삭은 그랄에 거주하면서 실족합니다. 아버지처럼 그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다닌 것입니다. 이 작은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빼앗기 위해 그랄 사람들이 자신을 살해할까 염려했습니다. 그의 거짓말과 그로 인한 소동은 아브라함이 두 차례나 저질렀던 사기극을 반복한 일입니다. 동일한 이야기의 반복에 대해 많은 비평주의자들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세 가지 상이한 판본들이 존재했던 증거로 봅니다. 그러나 월키가 말한 대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너무 다른 내용을 담고 있기에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판본들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은 동일한 죄를 반복하곤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동일한 범죄가 우리의 삶에서 일종의 습관처럼 반복됩니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어쩌면 죄는 일종의 습관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이삭을 추구하는 아비멜렉(8-11)

앞선 실수를 보고 배우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약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우연’(8)을 가장해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듯이 아들 이사도 속임입니다. 그렇게 안전은 확보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위태로워집니다.

8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8-11) 

이삭은 그랄 땅에 오래 거주하였습니다(아라크, 오래끌다, 길어지다). 하루는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아마도 자신의 왕궁에서 이삭과 그의 아내가 ‘껴안은’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이 행위가 어디서 이루어졌고 아비멜렉이 어떻게 목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장소가 궁중 근처 이삭의 거처일 수도 있고, 야외의 어느 한적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껴안다’라는 단어는 앞서 롯의 사위들이 롯의 경고를 ‘농담하는 것’으로 여겼을 때, 그리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역본들은 이것을 다양하게 번역했습니다. ‘애무하고 있었다’(caressing); ‘웃고 있었다’(ESV); ‘장난치고 있었다’(LXX; KJV). 이것은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행위이며, 껴안으면서 애무를 하고 있는 것을 돌려 말한 완곡어법(euphemism)이거나 애정 어린 장난을 치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즉시 이삭을 불러 항의하고 따졌습니다. 이삭이 아내의 신분을 속인 이유로 자칫 자기 백성이 유부녀와 동침하고 결혼을 해 큰 죄를 범할 뻔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는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은 전국에 방을 붙여 누구든지 이삭과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이삭은 아내의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은 이삭과 그의 아내를 해칠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믿음이 잠시나마 얼마나 소심한 수준으로 전략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근이 가져온 위리는 말씀을 통해, 이삭의 실수로 찾아온 위기는 하나님의 섭리와 아비멜렉의 의로움을 통해 축복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위기 가운데 믿음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축복 가운데 자만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너무나 인간적인 야곱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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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5-02)


야곱과 에서의 장자권 다툼

창세기 25장 19-34절 


‘복(福)’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창세기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약 84회 정도 나타납니다. 그중에서 야곱과 에서 형제가의 숨 막히는 ‘복’의 투쟁사를 다루는 26-28장에서만 31회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복은 어떻게,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이삭의 족보(톨레도트)가 시작됩니다. 이삭은 분명 족장사에서 중심인물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삭은 야곱의 장자권 탈취 사건 이후에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야곱이 중심인물입니다. 그렇더라도 장대한 야곱 이야기 대부분, 곧 그 다음 ‘에돔의 톨레도트’가 나타날 때까지 25:19-35:29 전체가 이삭의 톨레도트로 묶입니다. 이는 이삭이 무려 180세까지 살기 때문입니다. 독자적인 야곱의 톨레도트는 37:2에 가서야 나타납니다.

 

이삭의 족보(19-20)

사라처럼 리브가도 천만인의 어미가 될 약속과 함께 20년 동안 불임도 받습니다. 약속은 생명의 주권자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선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은 탐욕과 인간적인 확실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불임과 불안정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9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19-20)

이삭의 족보와 더불어 서사의 장면이 바뀝니다. 이후의 긴 야곱 이야기는 180세까지 사는 이삭의 삶 속에 포괄됩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이삭의 삶의 전반부는 영적 분별력을 지닌 순종의 삶이 어지만, 현재의 장면은 그의 신앙적 쇠락을 엿보게 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출생(21-26)

이삭의 족보도 불임으로 시작합니다. 20년의 기다림과 간절한 기도 끝에 열매가 맺혔습니다. 언약의 축복은 투쟁의 산물이 아닌 은혜의 선물이며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게 하십니다. 답은 처음부터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오랜 시행착오와 시련 끝에 그 진리를 깨닫습니다

21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21-26)

씨의 위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 이어 이삭 또한 오랜 기간 자녀를 갖지 못합니다. 이삭은 아내의 임신을 위해 ‘간구했습니다’(아타르). 이 동사로 표현되는 기도는 매우 절박한 기도입니다. 보통 이 동사는 고통과 질병을 헤결해 달라는 기도에서 사용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잉태케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이 임신이 초월적 능력자에 의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태중의 아이들이 ‘싸웠다’(라차츠), 이 동사는 매우 강한 다툼에 사용되는 단어로 ‘부수다’, ‘깨트리다’, ‘박살내다’라는 뜻입니다. ‘라차츠’라는 발음부터가 언뜻 우리말 ‘으라차차’와 비슷한데, 어쩌면 의성어에서 기원된 단어인지도 모릅니다. 두 태아가 태중에서 그야 말도 맹렬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미 태중에서부터 야곱과 에서가 동거하기에는 방이 좁니다. 그들의 최초의 전쟁터는 엄마 뱃속입니다. 독자들은 리브가의 태중에 쌍둥이가 들어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그녀는 매우 당황스러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짧은 시로 태중의 아이가 둘이며,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립니다. 두 아이가 태어날 것이며 그들이 각자 민족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이 더 강할 것인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언이었으며, 그녀의 삶 속에서 전차 그것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때가 되어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에서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았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붉은 색은 갈색부터 홍색의 범위를 포괄합니다. 따라서 에서의 피부색은 빨간색이 아닌 갈색 계통이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에서가 지닌 빨간색은 피부색이 아닌 머리털의 색깔이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어찌되었든 이 색깔의 히브리어 ‘아돔’(홍색)이 에서의 별명이자 그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에돔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털옷’의 히브리어 ‘세아르’는 에서의 후손들의 거주지인 ‘세이르’(세일[산])의 기원이 되었을 것입니다(창세기 14:6; 32:3). 그의 이런 신체적 특징은 그 자체로 문명 및 문화와 동떨어진 그의 삶의 방식을 암시합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엔키두(Enkidu)라는 인물이 전신이 털로 덮인 야수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동생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이로 인해 야아콥(라p:)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삭의 나이 60세가 되어 이 쌍둥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씨를 위한 기도 후 무려 20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상극의 두 아이(27-28)

맏아들 에서에게 당연히 주어지리라고 여겼던 축복을 아우 야곱이 가로채 갔습니다. 출생의 서열이 축복의 서열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다. 당연한 축복은 없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고약한 심보입니다. 값없이 주어진다고 은혜가 값싼 것은 아닙니다.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27-28)

두 아이는 자라면서 상극의 기질과 성향을 보이며 전혀 다른 생활 방식을 따랐습니다. 에서는 사냥에 능통했으며 들에 나가기를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집에서 지내야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조용한’ 사람인데, 이 히브리어 ‘탐’은 해석하기 난해합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완전한’, ‘온전한’을 뜻합니다. 문맥상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호합니다. 노아와 욥은 ‘완전한/온전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이 단어가 사람에 대한 평가에 사용될 때는 도덕적 측면에서 흠결이 없다는 뜻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단어는 야곱의 도덕적 평가와 무관한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명백히 그의 ‘완전성’은 에서와 대조되는 그의 고유한 기질 및 성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차분하고 조용한 기질을 표현한 말로 보입니다. 거칠고 투박한 것은 흠이 있는 불완전한 성격이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것은 흠이 없는 온전한 성격으로 간주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두 사람의 말투나 주변 정돈, 옷매무새도 이에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에서의 옷차림은 늘 흐트러졌지만 야곱의 옷차림은 ‘흠 없이’ 깔끔했을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이유를 말하지는 않지만, 아마 야곱이 유순한 아들로 어머니의 말을 잘 들었을 것이고, 늘 집 안에 머물며 어머니 일을 돕는 등 어머니의 편애를 받을 만했을 것입니다. 이삭의 기질과 성향은 에서보다 야곱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고(창세기 24:63) 다툼을 싫어했으며(창세기 26:12-22) 아버지 아브라함과 같은 왕성한 육체적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에서를 편애한 것은 에서가 자신의 식탐을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편애가 결국 비극을 낳습니다. 특히 고기에 대한 이삭의 집착은 나중에 노년의 노쇠한 몸과 시력 상실, 그리고 판단력과 영적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창세기 27:1-4).

 

장자권을 잃은 에서(29-34)

잠깐의 허기에 장자권을 판 에서의 결정은 평소 그것을 얼마나 가벼이 여겼는지 보여줍니다. 언약의 후사가 되기를 포기한, 팥죽 한 그릇보다 못한 존재의 가벼움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는 성급했고 더 중요한 것을 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패착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고도 다 잃었습니다.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9-34)

운명의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거머쥐기로 계획합니다. 그는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시간에 맞춰 의도적으로 죽을 쒸 놓았습니다(29). 이것은 렌틸(lentil) 콩으로 만든 ‘말죽’(네지드 아다심)입니다(34). 렌틸의 종류는 다양한데 주로 적갈색을 띕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 그 죽을 쒀서 에서가 좋아하는 고기 수프처럼 꾸몄다고 생각합니다. 허기진 에서는 ‘붉은 것을 달라’고 부탁합니다(30). 원문은 ‘그 붉은 것, 이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입니다. ‘붉은 죽’(아돔)이 두 차례 사용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의 허기진 상태와 거칠고 급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다시 한 번 ‘붉은 색’이 에서의 다른 이름인 에돔의 기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서의 장자권을 오늘 당장 자신에게 팔라고 말합니다(31). 교활하고 비열한 야곱은 자비심으로 늘 양보했던 아브라함과 대비됩니다. 아버지의 상속물은 아들들의 숫자에 맞춰 분배되며 장남은 항상 두 배를 가질 권리를 갖습니다. 장자는 이러한 특권을 누리며 집안의 장손으로서 가문의 전통을 잇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당장에는 혜택이 없는 장자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멸시했습니다(34). 웬함은 이때 에서는 장자의 법적 지위는 유지했으며, 다만 장자가 누리는 혜택인 유산 상속권을 팔아 넘겼다고 말합니다. 27장에서 그는 야곱에게 두 번째로 속아서 장자권 자체를 잃습니다. 미래에 누릴 복을 잃고 가문의 혈통이 야곱으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에서는 사냥과 들판의 삶을 좋아하기에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아 막사에 기거해야 하는 생활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야곱은 맹세를 요청해서 다짐을 받아낸 뒤 떡과 팥죽(렌틸 죽)을 내놓았습니다. 이 경우 구두는 증거가 될 수 없기에 법적 효력이 있는 어떤 증표를 나누어 가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서는 그저 야곱이 준 음식을 먹고 마신 뒤 일어나 갔습니다. 이것은 에서가 이 일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장사권을 멸시했습니다(바자).


성경에는 감취어진 보화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판 사람의 이야기도 있지만,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가 값진 보화를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에서가 바로 그 불행의 주인공입니다. 불운한 것이 아니라 불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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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5-01)


 아브라함의 죽음과 이스마엘의 계보

창세기 25장 1-18절


우리는 인생이 끝나는 지점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계속된다는 사실을 믿고, 그 약속을 따라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부록’편입니다. 말 그대로 ‘덧붙인’ 기록입니다. 독자 이삭의 멋진 혼사(24장)로 대미가 장식되면 좋았을 텐데, 아브라함-이삭의 어냑 계보를 벗어난 후처의 자식들과 이스마엘의 후예들의 계보가 아브라함의 부고(訃告)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은 일과 그의 죽음과 장례(1-11)에 이어 이스마엘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많은 비평학자들은 이것이 연대기에서 이탈한 것으로 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결혼하기 전에 후처를 얻었으며, 이삭이 결혼할 때는 이미 사망했다고 주장합니다. 24장에서 리브가가 브엘라해로이의 이삭과 직접 만나 결혼한 이유가 아브라함은 이미 사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일찍 배치한 것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처를 얻음(1-6)

아브라함은 후처를 두어 많은 자손을 낳았지만 모든 소유와 권리를 이삭에게 넘겨주어 이삭만이 유일한 상속자임을 명백히 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에게 그랬듯이 남은 자식들도 이삭을 떠나게 하여 그의 안전까지 보장해줍니다. 아들 ‘이삭’ 지키십니다. 아니 하나님의 ‘언약’ 지키십니다.

1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2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3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4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이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5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6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1-6)

겉으로 드러난 서술한 시간 흐름을 따르자면, 사라가 죽고 이삭이 결혼한 후 아브라함은 후처 ‘그두라’를 얻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40세에 결혼할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40세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175세에 사망할 때까지 35년의 공백이 있는데, 이때 그두라를 새 부인으로 얻어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입니다. 140세가 넘은 나이로 많은 자녀를 낳은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이 100세에 낳은 이삭이 기적적 탄생이었다면, 140세 이후에 낳은 자녀들은 더 놀라운 기적이 됩니다. 아브라함이 오랜 기간 그두라에게서 여러 자녀를 낳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아마 하갈을 취하기 매우 오래 전에 그두라를 후처로 얻었다고 결론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두라와 결혼한 시점이 문제일 뿐 전체적인 서술의 시간 흐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따라서 24장에서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이 등장하지 않고 이삭이 직접 리브가를 만나 결혼한 장면에서 그가 이미 죽었다고 추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처는 아니었지만 그두라는 무려 여섯 아들을 낳았습니다. 시므란, 욕산, 므단, 미디안, 이스박, 수아. 그중에 욕산과 미디안의 경우 후손들까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거점이 아라비아 지역으로 그들로부터 여러 아라비아 종족들이 기원되었습니다. 욕산의 손자에 앗수르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 앗수르는 후대의 고대 중동의 강자였던 아시리아 민족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목할 인물은 미디안입니다. 그두라의 아들 미디안은 후대의 미디안 종족의 조상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미디안 종족은 여러 권력자들이 분할 통치하는 부족 연맹체의 특징을 가졌습니다. 민수기 31:8에는 바알브올 음행 사건이 발생했을 때 처형된 미디안 다섯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가하면 그들은 광범위하게 돌아다니는 유목민이나(출애굽기 3;1, 모세의 장인 이드로) 약대를 타고 다니는 무역상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창세기 37:28, 요셉을 사들여 애굽으로 간 상인들). 특별히 그들 중의 일파인 겐 족속이 중요한 미디안 종족으로 등장합니다. 미디안은 다섯 아들을 낳습니다: 에바, 에벨, 하녹, 아비다, 엘다아이. 아마도 미디안 연맹체는 이들 다섯 아들이 후손인 부족으로 구성되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민수기 31:8(여호수아 13:21)은 미디안의 다섯 왕을 언급하는데 이들은 어쩌면 각각이 다섯 부족들에 속한 인물들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모든 유산을 유일한 상속자인 이삭에게 넘겨주었습니다(5). 그는 자신의 서자, 즉 ‘첩들의 아들들’에게는 재산의 일부를 떼어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땅이 없으므로 유산에는 막대한 가축과 종들, 은금과 귀중품 따위가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서자들에게 ‘소유를 주었다’란 표현은 정확히는 ‘선물(마타나 기꾸)을 주었다’는 뜻입니다. ‘첩들’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데 여기에는 그두라와 하갈 둘 다가 포함될 것입니다. 첩은 둘째 부인으로서 본부인보다 여러 면에서 권리가 낮았습니다. 하갈도 바로 이 신분이었으며, 빌하도 이 명칭으로(그의 아버지의 첩 = ‘서모(庶母)’) 불립니다(창세기 35:22).

유산 상속은 본부인의 아들들에게만 해당되었으며, 첩의 아들은 상속권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자신의 재량대로 풍성한 선물을 줄 수 있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비슷한 규정이 발견됩니다. 그 규정에 의하면, 만일 한 남자가 여종에게서 얻은 후손을 아들로 삼지 않을 경우 아버지가 죽은 뒤 그 아들은 아무런 상속권을 갖지 못합니다. 첩의 자녀에게 재산의 일부가 선물로 주어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낼 때 떡과 물과 함께 그의 몫의 넉넉한 선물을 주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미 하갈은 아브라함과 결별하여 떠났고, 그두라의 자녀들은 이삭에게 유산을 물려줄 때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준 넉넉한 재산을 가지고 동방 땅으로 떠났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앞서 주목한 대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상징하는 ‘동진(東進)’이 주는 부정적 뉘앙스를 고려해 볼 수 있으나, 단순히 고유명사일 수도 있습니다. 이곳은 시리아 사막이나 이스라엘 땅의 동쪽의 광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장례(7-11)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삭에게 축복하심으로써 기업을 잇게 하시고, 그를 통해 언약을 이어가십니다. 약속의 성취(17:20)인 이스마엘 후예의 번영은 이삭을 향한 언약의 성취를 예고합니다. 내 인생을 견인해온 것은 현실입니까, 언약입니까?

7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8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9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10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11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7-11)

아브라함이 향년 175세에 죽었습니다(7). 그는 75세에 가나안에 들어왔으므로 가나안 땅에서 100년을 산 셈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죽을 때 ‘열조에게 돌아갔다’는 형식문이 처음으로 나타납니다(8). 이삭과 이스마엘이 나란히 상주 역할을 했습니다(9). 이렇듯 부모의 장례식에는 적자와 서자 자녀들이 모두 참여했습니다(창세기 35:29, 야곱과 에서가 함께 참여한 이삭의 장례). 그들은 아브라함의 시신을 아브라함이 구입했던 마므레 앞의 막벨라 굴에 안치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장사되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 집 안의 가족묘로 그들에게 중대한 장소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제 이삭에게로 이어집니다.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로 거처를 옮깁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는 아브라함 가족의 삶은 브엘세바, 브엘라해로이, 헤브론을 거점 삼아 그곳들을 오가는 삶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그가 아브라함 생전에 아버지와 떨어져 잠시 브엘라해로이에 있었던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서 그는 리브가와 선을 봤고 헤브론으로 복귀해 결혼하고 살았으며, 아브라함이 죽자 브엘라해로이로 복귀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보고는 의도적으로 일찍 여기에 배치되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죽기 35년 전에 결혼하며 아브라함의 손자들은(에서와 야곱) 그가 죽을 때 15세였습니다. 계산해보자면, 25:26은 이삭의 나이 60세에 쌍둥이를 낳았다고 보고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아 그의 나이 140세에 40세의 이삭이 결혼하고 그의 160세에 60세의 이삭이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175세에 사망할 때 이삭은 75세이고 쌍둥이는 15세였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죽음은 이어지는 리브가의 쌍둥이 출산 이후 15년이 지난 뒤의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을 후손의 번성과 함께 묶기 위해 저자는 의도적으로 이것을 앞에 배치한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계보(12-18)

자손의 약속은 이어지고 성취됩니다.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마저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다 죽은 아브라함의 소망을 이삭에게 ‘복 주심으로’ 이어가실 것이고, 결국 그 후손에서 날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삭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 이스마엘에게 주신 약속(21:17-18)도 성취하십니다. 이스마엘은 열두 아들을 낳고 그들은 모두 지역의 방백들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12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13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14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15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16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17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18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12-18)

그두라의 후손들이 소개된 후 이스마엘의 족보가 펼쳐집니다. 이 톨레도트(후예) 또한 앞선 이야기와 다른 새로운 단위를 표시합니다. 특별히 이 족보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매듭짓고, 이삭 이야기로 전환시킵니다. 분명히 이것은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의 갈등을 상기시키면서 이삭 이야기를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마엘은 나중에 야곱이 그러하듯이 총 열두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느바욧, 게달, 앗브엘, 밉삼, 미스마, 두마, 맛사, 하닷, 데마, 여둘, 나비스, 게드마. 이들에게서 각각 종족들이 분화됩니다. 이들도 대체로 여러 아랍 종족들의 조상들이며 또한 그들의 이름이 성읍 이름이나 지역명이 되었습니다(16). 이스마엘은 137세에 죽었습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 이삭이 60세에 쌍둥이를 낳을 때에 이삭보다 14살 많은 이스마엘은 74세였습니다(이스마엘이 14세 때에 이삭이 태어남). 그의 자손들은 아라비아의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시내 반도 북부)와 근접한 애굽 변방의 술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아라비아와 시내 반도가 그들이 분포한 지역입니다. 18절의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다’는 앞서 16:12에서 여호와의 사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이스마엘 후손의 미래는 앞서 16:12의 ‘모든 형제와 대항하며 산다’는 여호와의 사자의 예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동일한 히브리어 문장을 개역개정은 16:12에서는 지리적 대척으로, 현재의 구절에서는 관계적 배척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함께 포괄하고 있습니다. 지리적 배척과 관계적 배척은 상호 배타적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께서 누구이며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서술이요 증언입니다. 삶과 죽음 모두, 부름 받은 날부터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증명해 보인 인생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하나님을 읽고 믿음을 배우는 표준적이고 표본적인 서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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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4-03)

 


신부 리브가가 가나안 땅에 도착함

창세기 24장 50-67절


김교신은 ‘닮지 못한’ 세대를 향한 안타까움을 ‘오리알 깐 암탉의 비애’에 빗댄 적이 있습니다. ‘닮은 생명’을 낳아보려고 가슴에 알을 품은 어미 닭처럼, 아브라함도 아들의 혼사에 마음 졸이며 ‘다른’ 믿음이 아니라 ‘닮은’ 믿음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언약 계승은 그 믿음의 계승입니다.

  

앞에서 아브라함의 종의 간증을 들은 라반과 브두엘은 이 일이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대답합니다(50). 리브가도 결혼을 결심하고 믿음으로 떠납니다. 지체하지 않고 다음 날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 리브가의 결단은 아브라함의 결단을 닮았습니다. 이제 서사의 흐름은 아브라함-사라에서 이삭-리브가로 초점을 옮겨서 집중합니다.

 

리브가의 결혼을 승락(50-53)

하나님을 의지한 아브라함의 결혼 계획과 믿음으로 주인의 명령을 따른 종의 순종, 그리고 그 믿음에 순적한 만남으로 화답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듣고 하반은 자신이 결혼을 승낙하고 말 여지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여호와의 명령’이었고 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50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51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52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53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보물을 주니라(50-53)

아브라함의 종의 간증은 라반 가족의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라반과 브두엘은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결혼을 승락합니다. 여기서 가장 브두엘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현재 라반이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많은 학자들은 브두엘이 사망했다고 추론하면서 이 ‘브두엘’은 후대에 잘못 첨부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브두엘이 어떤 이유로 가장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장남 라반과 그의 어머니가 가정을 이끌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라반이 브두엘보다 앞서 나열된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라반이 이 가정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가진 인물로 활약하는 장면은 추후 야곱 이야기를 준비하는 역할도 합니다. 그들은 리브가를 데려가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의 아내로 삼으라고 승락합니다(51).

리브가의 결혼이 최종적으로 허락되자 그 종은 다시 한 번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를 올립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혼인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결혼식 전에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신부 값을 내야 합니다. 그것은 두 남녀의 약혼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여러 가지 값 비싼 은금 패물과 옷들을 리브가에게 줍니다. 이어서 그는 그녀의 오빠 라반과 어머니에게도 값진 물건들을 제공합니다(53). 이 값진 물건들은 신부 값에 해당하는 다양한 귀중품들이었을 것입니다.

 

결혼을 결심한 리브가(54-58)

라반의 결혼 승낙을 듣고 아브라함의 종은 라반이 아니라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의 역사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삭의 아내 구하는 일에 사람의 생각이 들어설 곳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나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곳에 참된 경배와 참된 감사가 있습니다.

54이에 그들 곧 종과 동행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5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56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 57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58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54-58)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에야 종과 일행들은 그날 저녁 식탁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그날 밤을 거기서 보낸 그들은 다음 날 아침 일어났습니다. 종은 서둘러 라반과 그의 어머니에게 가서 가나안으로 돌아가겠다고 통보합니다. 한 달이 넘는 장거리 여행객들에게 불과 하룻밤의 휴식은 적절치 않았을 것입니다. 라반은 만류하면서 며칠 더 묵고 가라고 요청합니다. 방문객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고 리브가와 충분한 작별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자칫 결례가 될 수 있음에도 왜 아브라함의 종은 서둘러 떠나려 했겠습니까? 라반에게서 느껴지는 탐욕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리브가를 내놓지 않을지 몰라서 걱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종이 본연의 임무에 집중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인의 상속자가 될 이삭의 빠른 혼인이었습니다. 연로한 아브라함을 고려할 때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여 결례를 무릅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종은 라반과 그의 어머니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리브가를 불렀습니다. 아마 라반과 그 어머니는 분명히 리브가가 지금 당장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에게 지금 떠날 것인지를 묻자, 리브가는 간결하고 단호하게 대답 했습니다: ‘가겠나이다’.

여기서 메소포타미아를 떠나겠다는 리브가의 결단은 아브라함의 결단과 비교됩니다. 둘 다 각자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버리고 지시한 곳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라’고 명령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름에 응답하여 그곳을 떠났습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을 통한 ‘가라’는 하나님의 간접적인 부름에 응답하여 떠납니다.

 

가나안으로 떠나는 리브가(59-61)

아브라함의 종이 기도하며 이삭의 신부를 찾고 있을 때 이삭 역시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부를 기다립니다. 기도(24:3)에서 시작하고 진행된 혼사가 기도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순전한 신뢰와 기도에 성실하게 화답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친히 이루어 가셨습니다.

59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60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61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59-61)

라반의 가족은 리브가를 위해 유모 한 명을 붙여줍니다(59). 이것은 아기가 태어날 것을 대비한 ‘젖먹이 유모’(wet nurse)입니다. 유모는 젖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양육도 책임졌기에 대단히 중요한 직분이었습니다. 이 익명의 유모 이름은 그녀가 죽을 때 드보라로 소개됩니다(창세기 35:8).

리브가의 식구들은 고향을 떠나는 리브가를 위해 복을 빕니다. 리브가가 천만인의 어머니가 되기를, 또한 후손이 적들의 성들을 차지하기를 기도합니다. 씨의 번성과 성문의 획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반복입니다(창세기 22:17). 리브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러 여종들과 함께 낙타에 올랐습니다. 이 여종들은 유모와 별도로 그녀의 개인 몸종들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62-67)

이삭은 리브가를 사라의 장막으로 들입니다. 이는 사라에게 약속하신 ‘열국의 어미’의 축복이 리브가에게 이어졌음을 암시합니다. 아브라함-사라를 잇는 언약의 2세대가 시작됩니다. 당대에 머무는 신앙은 화석화되기 쉽습니다. 세대를 잇고 세월을 견디고 미래를 여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62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63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 67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2-69)

당시 이삭은 네게브 지역의 브엘라해로이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16:14에서 이 지명의 유래와 위치를 살펴본 바 있습니다. 이곳은 오히려 하갈과 이스마일에게 중요한 장소인데 왜 이삭이 그곳에서 기거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헤브론에서 남쪽 가데스 근처에 있는 브엘라베로이까지는 약 90km의 거리입니다. 본문은 난해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브라함은 현재 사라를 매장한 헤브론에서 살고 있는데, 이삭은 왜 네게브의 브엘라해로이에서 살고 있습니까? 왜 종은 리브가를 아브라함에게 데리고 가지 않고 이삭에게 데려갔습니까? 그가 65절에서 이삭을 ‘주인님’으로 호칭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수수께끼에 대해 이 상황은 아브라함이 최근에 죽은 것을 전제한다고 결론 내립니다.

아브라함의 죽음과 장례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인 25장에 나옵니다. 웬함은 이것을 단순히 문학적 기법에 의한 시간 순서의 뒤바뀜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 경우 연대기적 연령의 계산이 들어맞지 않습니다. 이삭이 결혼한 나이는 40세입니다(창세기 25:20).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으므로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40세입니다. 이후 그는 35년을 더 살다가 175세에 죽은 것이 확인됩니다(창세기 25:7). 따라서 이삭이 40세에 결혼할 때 140세의 아브라함이 죽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저자의 의도를 잘 살펴야 합니다. 가나안의 거부가 된 아브라함은 현재 브엘세바와 헤브론, 브엘라해로이까지 자신의 생활권을 넓혀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당시 아버지 아브라함의 지시를 받고 이삭은 멀리 남쪽의 브엘라해로이에 잠시 거주하는 상황이었겠지만, 사소한 집안 사정은 전혀 서사의 관심이 아닙니다. 브엘라해로이가 이삭의 임시적 거점이며 자주 거기서 헤브론을 왕래했다는 사실은 결혼 후 그가 즉시 헤브론으로 복귀하는 장면에서 확인됩니다(67절에서 리브가가 사라의 장막으로 들어감).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데리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재 그것은 전혀 서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제 주인공은 이삭과 리브가입니다. 따라서 서사는 불필요한 곁가지를 자르고 새로운 주인공들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을 ‘나의 주인’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제 이삭이 독점적 상속자의 자리를 굳혔고(창세기 25:5), 아브라함은 노쇠하여 영향력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마 종은 일단 아브라함에게로 돌아온 뒤 그녀의 도착 소식을 이삭에게 알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리브가를 데리고 브엘라해로이로 갔을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이삭은 아마 때에 맞춰 그날 늦은 저녁까지 들에서 묵상하며 리브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녀가 온다. 멀리 낙타 떼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리브가도 눈을 들어(아마도 얼국을 가린 너울을 들어올려) 이삭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먼발치에서 낙타에서 내려 남종을 통해 그가 남편이 될 이삭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아마 결혼식은 헤브론으로 복귀하여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리브가를 사라의 장막에 살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리브가가 이제 이삭과 더불어 아브라함 가문의 머리가 된다는 것을 시사 합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그는 다시 브엘라해로이로 이사합니다(창세기 25:11). 이삭은 어머니 사라를 잃은 후 상실감이 컸습니다. 이제 그 자리를 리브가가 메움으로써 그가 큰 위로를 얻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사라가 사망한 지 몇 년 안 되었고, 아브라함은 여전히 생존해 있음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연령을 계산해보면 사라가 죽은 뒤 3년 후에 이삭이 결혼 했습니다: 사라 90세에 이삭 출산-사라 127세 사망 시 이삭 37세-이삭 40세에 결혼, 그는 3년 상을 치르듯이 그 기간에 큰 상실감 속에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은 닮습니다. 그 주인의 그 종이고,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입니다. 일상에서 신앙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공유하는 언어가 사라지고,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면 믿음의 세대는 단절되고 연대는 약해질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은 ‘오리 알을 낳은 암탉의 비애’를 비껴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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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4-02)


리브가의 집안에 청혼을 전한 종

창세기 24장 28-49절


김기석 목사는 자신의 저서에게 ‘인생은 살만한가?’에서 ‘종교한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살고 있는 하늘에 대해 말해주고 일상의 시간 속에 영원의 숨결을 불어넣는 데 그 본령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일의 성사 앞에서 ‘잊고 살던 하늘’에 대해 들려줍니다.

 

앞서 아브라함의 종 일행과 가축들의 물을 먹인 리브가는 재빨리 집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립니다. 손님의 신속한 환대를 위해 달린 그녀가 이제 신속한 소식 전달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녀의 달려감은 손님을 빨리 집으로 초대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도 그녀의 깊은 마음씨가 잘 드러납니다. 리브가에게서 귀빈 방문 소식을 들은 오빠 라반이 또한 달려 나옵니다. 그는 방문객 일행을 극진히 환대하나 그의 의중에는 순수하지 않은 것이 엿보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을 토대하는 라반(28-33)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잊을 수 없습니다. 라반의 환대를 받은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의 정체와 여행목적을 설명합니다. 극진한 대접 앞에서도 자신의 신분과 임무를 잊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전한 후 결과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28소녀가 달려가서 이 일을 어머니 집에 알렸더니 29리브가에게 오라버니가 있어 그의 이름은 라반이라 그가 우물로 달려가 그 사람에게 이르러 30그의 누이의 코걸이와 그 손의 손목고리를 보고 또 그의 누이 리브가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그 때에 그가 우물가 낙타 곁에 서 있더라 31라반이 이르되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 내가 방과 낙타의 처소를 준비하였나이다 32그 사람이 그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낙타의 짐을 부리고 짚과 사료를 낙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그의 동행자들의 발 씻을 물을 주고 33그 앞에 음식을 베푸니 그 사람이 이르되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 라반이 이르되 말하소서(28-33)  

리브가는 우물에서 집으로 즉시 달려가 귀빈 방문 소식을 알렸습니다. 여기서 리브가의 집이 그녀의 ‘어머니의 집’으로 표현되는 것은 매우 이상합니다. 학자들은 이미 아버지 브두엘이 사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29절에서 아브라함의 종을 마중 나온 사람이 브두엘이 아닌 그의 아들 라반인 것을 통해서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53절에서는 그 종이 가족에게 큰 선물을 줄 때 리브가와 ‘그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 주었다고 언급하고 브두엘은 누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브두엘이 죽었다면 50절에서 ‘라반과 브두엘’이 등장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에 비평학자들은 50절의 브두엘은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든(Gordon)은 큰아들 라반이 실질적인 가장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당시 그들의 가족 상황이 아버지보다는 형제 중 한 명이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하는 체제(fratriarchy, 형제 가장제)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자료들에는 족장이 생존해 있어도 그가 제 역할을 못할 경우(아마 그가 무능하거나 지나치게 연로하거나 병들었을 경우) 보통 장남이 가정을 대표했다는 증거가 보입니다.

리브가에게는 라반이라는 오빠가 있었습니다. 라반은 리브가가 전한 소식을 듣고 즉시 우물로 ‘달려가’ 그들을 마중합니다. 리브가처럼 라반도 급히 달립니다. 그도 언뜻 그의 누이 리브가처럼 손님을 정중하게 환대하려고 서두르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리브가의 귀금속에 대한 언급은 라반의 성품과 특징을 은연중 드러냅니다(30). 그렇지 않다면 리브가가 받은 귀한 선물이 그의 주목을 끌었다는 말을 저자가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누이에게 비싼 순금과 은 장신구를 선물한 큰 부자가 자신의 집에 머물려 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설렌 것입니다. 그가 물질에 사로잡힌 탐욕적 인물임이 암시되며, 이러한 그의 인물됨은 나중에 야곱과의 충돌 과정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30-32장). 결국 리브가는 환대를 위해 달려왔지만, 라반은 탐욕에 사로잡혀 달려왔습니다. 리브가의 고운 성품이 그의 오라비로 인해 더욱 두드러집니다. 라반은 우물가에 많은 낙타들과 함께 서 있는 방문단의 규모를 보고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30).

그가 급히 마중을 나간 이유는 그들이 그 마을을 떠날까 두려워서였을지 모릅니다. 그는 귀빈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라는 말은 의례적인 인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라반의 인사에 담긴 의도가 엿보입니다. 라반과 그의 가족들은 그 종의 정체를 아직 정확히 모릅니다. 앞서 그 종이 드린 감사의 기도는 그가 홀로 드린 기도였을 뿐이며, 리브가가 집으로 달려간 뒤에 한 기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라반은 그 방문객이 소유한 많은 물품을 보고 덕담을 건넸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종의 신분은 옷에서 금방 드러났을 것이니, 이미 라반과 리브가는 그가 누군가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유민이 아닌 종에게 이렇게 극진하고 신속한 환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방문객은 아브라함의 종일뿐이므로 라반의 ‘복을 받은 자여’라는 인사는 빗나간 인사입니다. 복은 그의 주인이 받았으며, 그 모든 물건은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이 복을 받은 자라는 라반의 말도 결국 틀리진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섭리로 바라던 대로 일이 순적하게 잘 풀리고 있으며, 원하는 최고의 신붓감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귀빈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미 그들이 묵을 공간과 낙타들이 쉴 공간까지 준비해놓았습니다. 라반은 그를 극진히 예우합니다. 낙타들에게서 짐을 내린 뒤 사료를 먹입니다. 배가 잔뜩 끓은 낙타들을 위해 아마 엄청난 짚과 사료가 소모되었을 것입니다. 종과 수행한 모든 사람들의 발 씻을 물을 내놓습니다(32). 라반은 여장을 풀고 몸을 씻은 그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달리 음식 준비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는 이유는, 이 이야기의 흐름에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라반의 음식 제공이 아브라함만큼이나 큰 연회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어찌되었든 독자들에게 그의 시중이 여전히 순수한 환대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음식이 눈앞에 차려져 있지만 아브라함의 종은 먹는 것을 유보합니다(33). 갈증을 해소했던 그는 허기는 아직 채우지 못했습니다. 종일 여행 끝에 해 질 때 도착했으니 일행 모두는 대단히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음식에 손대지 않고 자신의 중대한 임무를 일단 마무리하려 합니다. 먼저 자신의 일을 그들에게 다 말하고 나서 음식을 먹겠다고 고집합니다. 라반은 그에게 마무리를 넘겼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간증(34-49)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를 만나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일을 회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결과라고 밝힙니다. 아브라함의 가산에 복을 주시고 사라의 태를 여시고 그 아들의 아내를 예비하시고 종의 길을 순전하게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인고이 되어 만들어 가시는 이야기입니다.

34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35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36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 37나의 주인이 나에게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너는 내 아들을 위하여 내가 사는 땅 가나안 족속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택하지 말고 38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 39내가 내 주인에게 여쭈되 혹 여자가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어찌하리이까 한즉 40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 41네가 내 족속에게 이를 때에는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만일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할지라도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 하시기로 42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43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44그의 대답이 당신은 마시라 내가 또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도 길으리라 하면 그 여자는 여호와께서 내 주인의 아들을 위하여 정하여 주신 자가 되리이다 하며 45내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와서 우물로 내려와 긷기로 내가 그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내게 마시게 하라 한즉 46그가 급히 물동이를 어깨에서 내리며 이르되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기로 내가 마시매 그가 또 낙타에게도 마시게 한지라 47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냐 한즉 이르되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코걸이를 그 코에 꿰고 손목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 48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 49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34-49) 

우리는 사명을 미루지 않고 신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직전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인의 명을 받아 먼 나홀성까지 한걸음에 달려왔고, 도착한 그 날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리브가를 만난 이후에도 쉬지 않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1) 아브라함이 하달한 지시(34-41)

아브라함의 종은 당장의 식사보다 더 중요한 일을 이야기함으로써 대화를 주도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합니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혀 자신이 아브라함의 종임을 알립니다. 여기서도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데, 이것이 그를 조연에 머물게 하려는 저자의 의도적 생략인지, 아니면 그의 겸양의 표현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듣고 라반이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종이 이렇게 돈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닐 정도라면 그의 주인은 도대체 얼마나 큰 거부이겠습니까! 그 중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큰 복을 주셨는지 말합니다. 서사의 대화는 간결하나 아마 그는 상당히 장황하게 자신의 종이 어떻게 큰 복을 받았는지 설명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목민에게 귀한 재산의 품목들이 나열됩니다. 소 떼와 양 떼는 고기와 우유의 공급원이고 은금은 현금과 같은 재산이며, 인력 자원인 남종과 여종, 현대의 승용차와 트럭과 같은 운송용 가축들입니다. 이어서 종은 말하고 싶은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에게 물질의 복을 풍성히 주신 하나님께서 드디어 아브라함의 노년에 아들을 보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자신의 주인이 그 아들에게 재산을 다 물려주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아직 재산 상속을 하지 않았으며, 이삭에게 상속되기 직전이었습니다(창세기 25:5). 그러나 그 종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브두엘 가족들도 가장이 생존해 있는 가운데 아들에게 이미 유산을 넘겨줬다는 이야기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실질적으로 이미 노령의 아버지의 재산은 아들에게 넘어가 것이나 다름없음을 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어지는 간증은 앞선 장면을 반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반복이 아니고 종의 의도가 잘 전달되는 방식으로 재구성됩니다. 그는 복을 받은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이곳에 보냈다고 설명합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상속자라는 사실을 부각시킨 종은, 이삭과 가나안 여자와의 결혼은 부가하므로 리브가의 자녀들이 이삭과 함께 그 모든 유산을 누리게 될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만일 신붓감인 처녀가 고향을 떠나 먼 가나안 땅으로 시집오기를 싫어한다면, 자신들이 빈손으로 돌아갈지언정 이삭이 이곳으로 올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다른 대안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하면서 브두엘 가족의 선택과 결단을 압박합니다. 종은 아브라함이 보장한 ‘하나님의 천사’의 인도하심을 강조하여 이 만남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2) 리브가를 만나게 된 사연(42-49)

그가 리브가를 만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는 그날 저녁 즈음에 있었던 리브가와의 신비하고 극적인 만남을 간증합니다. 자신의 기도가 어떻게 정확히 응답되었으며 자신이 리브가를 검증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설명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브두엘 가족에게 빠른 결정을 요구합니다. 그들의 답변에 따라 그도 다음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처럼 하나님의 이야기가 당신에게도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간증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에 참여하여 그 이야기를 살고 이야기가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가 형성한 신앙입니까? 그 이야기가 요구하는 사명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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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4-01)

 


이삭을 위한 신붓감을 찾기

창세기 24장 1-27절


이삭의 신붓감을 구하는 이야기기는 창세기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장입니다. 하지만 거창한 사건이나 거대한 서사도 아닙니다. 평범한 가정사이고 혼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제는 ‘결혼(성사)’보다는 ‘언약(상속)’입니다. 22장에 이어 이삭의 아내를 정하는 이야기 역시 자손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반영된 사건입니다.

  

이야기는 다시 아브라함의 씨의 약속과 관련된 문제를 다룹니다. 이제 독자 이삭의 결혼과 그를 통한 후손이 관심사입니다. 이삭이 결혼을 하지 못했고 노령의 아브라함은 가장의 자리를 물려줘야 하기에, 그는 다시 씨와 관련된 위기를 맞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모든 일에 복을 박았습니다(1). 하지만 저자는 그가 범사에 복을 받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씨의 문제를 안고 있음을 서막에서 암시합니다.

 

이삭의 짝을 구하는 아브라함(1-9)

아브라함의 마지막 사명은 이삭의 배필 찾기였습니다. 혈통 잇기보다는 언약 잇기입니다. 그는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이 아닌 하란에 있는 친족 가운데서 찾았고, 아들을 약속의 땅 밖으로 보내지 않고 종을 대신 보내는 신중함도 보입니다. 모든 결정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묻어납니다.

1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3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5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6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8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9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1-9)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은 거동이 힘들 정도로 늙습니다. 그는 약속대로 많은 복을 누렸으나 아직 후손의 축복은 불투명합니다. 독자 이삭이 결혼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붓감을 가나안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절대 신임하는 유능한 늙은 종을 멀리 고향 땅 메소포타미아로 보내 신붓감을 구해오게 합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집안 살림의 총책임자인 시종관급의 종이라는 위상을 볼 때 아브라함이 양자로 입양하려던 엘리에셀일 가능성이 큽니다(창세기 15장).

본문은 의도적으로 종의 이름을 생략하여 그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전 재산의 관리자라는 점에서 절대적 신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2; 참조. 창세기 39:4-5; 창세기 41:41-45). 절대 신임하는 종을 이삭의 배우자감을 찾도록 보내는 것을 볼 때, 이 일이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늙은 종입니다. 장거리의 고된 여행에 적합한 젊고 건강한 종이 아닌 늙은 종을 선발한 것은 그를 신임한 이유 외에도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판단력과 깊은 신앙심을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종에게 자신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맹세하라고 명령합니다. 성기를 의미하는 ‘야레크’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신체 기관입니다. 야곱의 자녀들은 ‘야곱의 몸(야레크)에서 나온 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창세기 46:26; 참조. 출애굽기 1: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들’). 아브라함은 언약의 증표로 성기에 할례를 받았으며, 성기는 씨의 번성을 위한 생식 기관입니다. 따라서 성기 주변의 허벅지에 손을 대고 후손을 이어갈 며느리를 찾기 위한 기도와 맹세를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참조. 창세기 47:29). 그는 종에게 하늘과 땅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가나안 족속의 딸이 아닌 자신의 고향 친족 중에서 며느릿감을 찾아오라고 명령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받은 민족이므로 결혼 대상에서 제외되며, 아브라함은 동일한 혈통에서 신붓감을 구합니다. 이삭도 야곱이 아내를 찾도록 메소포타미아로 보낼 것입니다. 종은 만일 여자가 그곳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삭을 직접 그리로 데려가야 하느냐고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5). 이는 이삭이 직접 신붓감을 고르도록 그곳으로 보내야 하느냐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삭이 그 여자와 그곳에서 살도록 보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단호하게 답변합니다. 이삭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삭이 돌아간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떠나온 갈대아로 복귀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고향을 떠나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이삭과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7). 그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종보다 앞서 보낼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거기서 이삭의 신붓감을 찾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처녀가 따라오기 싫어한다면 차라리 빈손으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의 기도(10-14)

종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확인하며 이삭의 배우자를 찾다가 리브가를 만납니다. 자신이 구한 징조대로 반응한 여인을 만났지만 섣불리 단정하기보다 끝까지 신중하게 살핍니다. 서둘러 얻기 위해 내 뜻을 구하지 않고 주님의 때에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구합니다.

10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11그 낙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 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 12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 곁에 서 있다가 14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10-14)

아브라함은 종에게 막대한 양의 여행 물품을 준비시켜 함께 보냅니다. 낙타 열 마리가 떠나는 대규모 여행단입니다. 종의 지휘를 받아 낙타들을 끄는 인부를 포함 여러 종들이 수행했습니다(54). 낙타는 드물었기에 매우 큰 재산에 속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낙타를 거느리고 있을 정도의 거부였습니다. 낙타 열 마리를 동원한 것은 짐 수송을 위한 것입니다.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은 막대한 선물이 준비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이삭에게 시집올 처녀의 신부 값입니다. 목적지는 나홀의 성입니다. 유프라테스 강과 하부르 강사이에 위치한 그곳은 헤브론에서 600km가 넘는 거리이며, 따라서 여행 기간은 한 달이 넘었을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종은 저녁 즈음에 낙타들을 성밖의 우물곁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것은 지친 낙타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함입니다. 통상적으로 나그네는 물을 얻어먹어야 합니다. 그는 우물곁에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올립니다(12). 그는 매우 구체적인 기도를 드립니다. 최고의 신붓감이 될 여자의 조건으로 매우 친절한 여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에서 종의 관심은 신붓감의 고운 마음씨입니다. 목마른 그에게 물을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낙타들에게도 물을 준다면, 그 여자를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신붓감으로 여기겠다고 합니다(14). 미혼의 처녀들이 물을 긷고 짐승에게 꼴을 먹이는 것은 혼한 풍습이었습니다(창세기 29:10; 출애굽기 2:16; 사무엘상 9:11). 여자들이 물을 길어 놓으면 힘센 남자들이 그 물을 짐승에게 먹였습니다. 따라서 종이 제시한 시험은 통상적으로 통과하기 힘든 수준입니다. 아낙네가 짐승에게 물을 먹이되, 무려 열 마리의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것은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진심 어린 큰 자비심이 없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봉사입니다.

 

리브가를 만난 아브라함의 종(15-27)

종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만나게 하십니다. 그가 구하지 않은 조건까지 갖춘 친족의 딸을 만나게 하십니다. 세상은 우연이라고 우기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진행된 필연적인 만남이고 이끄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15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16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17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18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20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21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22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한 개와 열 세겔 무게의 금 손목고리 한 쌍을 그에게 주며 23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 24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25또 이르되 우리에게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 26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27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15-27)

드디어 리브가가 등장합니다. 독자들은 22:23을 통해 리브가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리브가가 나홀의 족보의 초점이 된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독자들의 기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저자는 그녀를 다시 짧게 소개합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형제 집안의 딸입니다. 종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우물로 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15). 이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즉각적이었으며, 특별한 섭리 가운데 이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면접 심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녀의 외모가 묘사됩니다. 리브가는 외모(마르에)가 대단히 아름다웠고(토바 메오드) 처녀(베툴라)였습니다.

‘남자가 그녀를 알지 않았다.’ 남자와 잠자리를 갖지 않은 처녀였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미혼의 처녀는 관례적으로 입는 옷 복장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종은 쉽게 그녀가 처녀임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리브가가 물통에 물을 담은 뒤 우물에서 올라왔습니다. 그 종은 즉시 달려가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행동합니다. 그는 리브가에게 마실 물을 조금만 달라고 요정합니다. 그녀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신속합니다. 리브가는 물통을 내려 즉시 물을 건넸습니다. 낙타 떼를 위해서도 물을 먹이겠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낙타들이 배부르게 물을 먹이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종이 기도한 것 이상으로 자비를 베푸는 모습입니다. 그녀는 ‘급히’ 구유에 물을 붓고 많은 낙타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반복해서 우물로 ‘달려가서’ 물을 채워 모든 낙타를 배불리 마시게 합니다. 낙타 한 마리는 최대 95리터까지 물을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열 마리의 낙타와 일행들이 마시는 물의 양이 1,000리터에 이릅니다. 추정컨대 그 종과 동행한 아브라함의 다른 종들이 도움을 줘야 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동작에 사용된 ‘마하르’(서두르다)와 ‘루츠’(달려가다)는 리브가가 주저하지 않고 신속히 물주는 일을 했음을 잘 표현합니다. 이러한 신속한 환대는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찾아온 여호와의 일행을 대접할 때 실천한 최고의 섬김이었습니다. 리브가는 마치 여자 아브라함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녀를 묵묵히 관찰하면서 시험이 최종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녀는 도대체 어느 집안의 딸입니까? 과연 하나님은 일을 형통케 하신 것입니까? 그는 섬김을 마친 리브가에게 여성미를 더욱 돋보이게 할 값비싼 금속 장신구를 선물합니다(22). 이어서 종은 그녀가 누구의 딸인지 묻고, 그날 밤을 거기서 신세 지고 싶다고 요청합니다(23).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신의 가족 관계를 알려줍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브라함의 혈족입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종의 요청을 받아들여 집으로 초대합니다. 종은 여호와의 완전한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에 감사하여 여호와께 찬양과 경배를 올립니다(26-27). 자신의 길을 정확히 여기까지 인도하셨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창세기의 중요한 주제이며, 그분의 섭리하심은 요셉 이야기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언약을 이루어갈 때 인간의 신실한 반응을 늘 요구하십니다. 이삭의 배우자를 정하기 위한 모든 결정마다 믿음이 묻어나고, 모든 과정마다 기도가 담겨 있습니다. 일의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자상하게 준비하시고 신실하게 이끄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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