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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5-02)


야곱과 에서의 장자권 다툼

창세기 25장 19-34절 


‘복(福)’에 관한 이야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창세기에는 ‘복’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약 84회 정도 나타납니다. 그중에서 야곱과 에서 형제가의 숨 막히는 ‘복’의 투쟁사를 다루는 26-28장에서만 31회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복은 어떻게,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새로운 전환점이 되는 이삭의 족보(톨레도트)가 시작됩니다. 이삭은 분명 족장사에서 중심인물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삭은 야곱의 장자권 탈취 사건 이후에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야곱이 중심인물입니다. 그렇더라도 장대한 야곱 이야기 대부분, 곧 그 다음 ‘에돔의 톨레도트’가 나타날 때까지 25:19-35:29 전체가 이삭의 톨레도트로 묶입니다. 이는 이삭이 무려 180세까지 살기 때문입니다. 독자적인 야곱의 톨레도트는 37:2에 가서야 나타납니다.

 

이삭의 족보(19-20)

사라처럼 리브가도 천만인의 어미가 될 약속과 함께 20년 동안 불임도 받습니다. 약속은 생명의 주권자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선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약속을 신뢰한다는 것은 탐욕과 인간적인 확실성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불임과 불안정성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9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19-20)

이삭의 족보와 더불어 서사의 장면이 바뀝니다. 이후의 긴 야곱 이야기는 180세까지 사는 이삭의 삶 속에 포괄됩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이삭의 삶의 전반부는 영적 분별력을 지닌 순종의 삶이 어지만, 현재의 장면은 그의 신앙적 쇠락을 엿보게 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출생(21-26)

이삭의 족보도 불임으로 시작합니다. 20년의 기다림과 간절한 기도 끝에 열매가 맺혔습니다. 언약의 축복은 투쟁의 산물이 아닌 은혜의 선물이며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게 하십니다. 답은 처음부터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오랜 시행착오와 시련 끝에 그 진리를 깨닫습니다

21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21-26)

씨의 위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 이어 이삭 또한 오랜 기간 자녀를 갖지 못합니다. 이삭은 아내의 임신을 위해 ‘간구했습니다’(아타르). 이 동사로 표현되는 기도는 매우 절박한 기도입니다. 보통 이 동사는 고통과 질병을 헤결해 달라는 기도에서 사용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잉태케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이 임신이 초월적 능력자에 의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태중의 아이들이 ‘싸웠다’(라차츠), 이 동사는 매우 강한 다툼에 사용되는 단어로 ‘부수다’, ‘깨트리다’, ‘박살내다’라는 뜻입니다. ‘라차츠’라는 발음부터가 언뜻 우리말 ‘으라차차’와 비슷한데, 어쩌면 의성어에서 기원된 단어인지도 모릅니다. 두 태아가 태중에서 그야 말도 맹렬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미 태중에서부터 야곱과 에서가 동거하기에는 방이 좁니다. 그들의 최초의 전쟁터는 엄마 뱃속입니다. 독자들은 리브가의 태중에 쌍둥이가 들어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 그녀는 매우 당황스러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짧은 시로 태중의 아이가 둘이며,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립니다. 두 아이가 태어날 것이며 그들이 각자 민족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이 더 강할 것인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언이었으며, 그녀의 삶 속에서 전차 그것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때가 되어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에서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았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붉은 색은 갈색부터 홍색의 범위를 포괄합니다. 따라서 에서의 피부색은 빨간색이 아닌 갈색 계통이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에서가 지닌 빨간색은 피부색이 아닌 머리털의 색깔이었을 것으로 추론합니다. 어찌되었든 이 색깔의 히브리어 ‘아돔’(홍색)이 에서의 별명이자 그의 후손 종족의 이름인 에돔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털옷’의 히브리어 ‘세아르’는 에서의 후손들의 거주지인 ‘세이르’(세일[산])의 기원이 되었을 것입니다(창세기 14:6; 32:3). 그의 이런 신체적 특징은 그 자체로 문명 및 문화와 동떨어진 그의 삶의 방식을 암시합니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엔키두(Enkidu)라는 인물이 전신이 털로 덮인 야수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동생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이로 인해 야아콥(라p:)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이삭의 나이 60세가 되어 이 쌍둥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씨를 위한 기도 후 무려 20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상극의 두 아이(27-28)

맏아들 에서에게 당연히 주어지리라고 여겼던 축복을 아우 야곱이 가로채 갔습니다. 출생의 서열이 축복의 서열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다. 당연한 축복은 없습니다.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인간의 고약한 심보입니다. 값없이 주어진다고 은혜가 값싼 것은 아닙니다.

27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으므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으므로 장막에 거주하니 28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27-28)

두 아이는 자라면서 상극의 기질과 성향을 보이며 전혀 다른 생활 방식을 따랐습니다. 에서는 사냥에 능통했으며 들에 나가기를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 집에서 지내야 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조용한’ 사람인데, 이 히브리어 ‘탐’은 해석하기 난해합니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완전한’, ‘온전한’을 뜻합니다. 문맥상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호합니다. 노아와 욥은 ‘완전한/온전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이 단어가 사람에 대한 평가에 사용될 때는 도덕적 측면에서 흠결이 없다는 뜻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단어는 야곱의 도덕적 평가와 무관한 문맥에서 사용됩니다. 명백히 그의 ‘완전성’은 에서와 대조되는 그의 고유한 기질 및 성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차분하고 조용한 기질을 표현한 말로 보입니다. 거칠고 투박한 것은 흠이 있는 불완전한 성격이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것은 흠이 없는 온전한 성격으로 간주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두 사람의 말투나 주변 정돈, 옷매무새도 이에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에서의 옷차림은 늘 흐트러졌지만 야곱의 옷차림은 ‘흠 없이’ 깔끔했을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이유를 말하지는 않지만, 아마 야곱이 유순한 아들로 어머니의 말을 잘 들었을 것이고, 늘 집 안에 머물며 어머니 일을 돕는 등 어머니의 편애를 받을 만했을 것입니다. 이삭의 기질과 성향은 에서보다 야곱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고(창세기 24:63) 다툼을 싫어했으며(창세기 26:12-22) 아버지 아브라함과 같은 왕성한 육체적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도 에서를 편애한 것은 에서가 자신의 식탐을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편애가 결국 비극을 낳습니다. 특히 고기에 대한 이삭의 집착은 나중에 노년의 노쇠한 몸과 시력 상실, 그리고 판단력과 영적 분별력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창세기 27:1-4).

 

장자권을 잃은 에서(29-34)

잠깐의 허기에 장자권을 판 에서의 결정은 평소 그것을 얼마나 가벼이 여겼는지 보여줍니다. 언약의 후사가 되기를 포기한, 팥죽 한 그릇보다 못한 존재의 가벼움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는 성급했고 더 중요한 것을 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패착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고도 다 잃었습니다.

29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하여 30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피곤하니 그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31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29-34)

운명의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거머쥐기로 계획합니다. 그는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올 것을 예상하고 시간에 맞춰 의도적으로 죽을 쒸 놓았습니다(29). 이것은 렌틸(lentil) 콩으로 만든 ‘말죽’(네지드 아다심)입니다(34). 렌틸의 종류는 다양한데 주로 적갈색을 띕니다. 어떤 사람은 야곱이 그 죽을 쒀서 에서가 좋아하는 고기 수프처럼 꾸몄다고 생각합니다. 허기진 에서는 ‘붉은 것을 달라’고 부탁합니다(30). 원문은 ‘그 붉은 것, 이 붉은 것을 내가 먹게 하라’입니다. ‘붉은 죽’(아돔)이 두 차례 사용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의 허기진 상태와 거칠고 급한 성격이 드러납니다. 다시 한 번 ‘붉은 색’이 에서의 다른 이름인 에돔의 기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에서의 장자권을 오늘 당장 자신에게 팔라고 말합니다(31). 교활하고 비열한 야곱은 자비심으로 늘 양보했던 아브라함과 대비됩니다. 아버지의 상속물은 아들들의 숫자에 맞춰 분배되며 장남은 항상 두 배를 가질 권리를 갖습니다. 장자는 이러한 특권을 누리며 집안의 장손으로서 가문의 전통을 잇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당장에는 혜택이 없는 장자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멸시했습니다(34). 웬함은 이때 에서는 장자의 법적 지위는 유지했으며, 다만 장자가 누리는 혜택인 유산 상속권을 팔아 넘겼다고 말합니다. 27장에서 그는 야곱에게 두 번째로 속아서 장자권 자체를 잃습니다. 미래에 누릴 복을 잃고 가문의 혈통이 야곱으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에서는 사냥과 들판의 삶을 좋아하기에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아 막사에 기거해야 하는 생활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야곱은 맹세를 요청해서 다짐을 받아낸 뒤 떡과 팥죽(렌틸 죽)을 내놓았습니다. 이 경우 구두는 증거가 될 수 없기에 법적 효력이 있는 어떤 증표를 나누어 가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에서는 그저 야곱이 준 음식을 먹고 마신 뒤 일어나 갔습니다. 이것은 에서가 이 일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장사권을 멸시했습니다(바자).


성경에는 감취어진 보화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판 사람의 이야기도 있지만,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가 값진 보화를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에서가 바로 그 불행의 주인공입니다. 불운한 것이 아니라 불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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