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창세기(26-02)


이삭과 아비멜렉의 계약

창세기 26장 12-33절


25장에서 시작한 야곱 이야기 중간에 이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다가 27장에서 다시 야곱이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씀을 따라서만 움직이고,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혜를 발휘하지 않고 뒷걸음치는 이삭의 온유함은 야곱의 이야기에서 볼 수 없는 태도입니다.

 

아비멜렉이 가족을 해치지 말라는 방을 전국에 내린 후 이삭은 그 땅에서 평온히 지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는 농사를 지어 백배의 수확물을 얻었습니다. 족장들은 농사꾼이 아니었으며 유목인들은 보통 소규모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는 그랄 땅에서 상당히 오래 체류할 마음으로 큰 농사를 지은 것 같습니다.

 

이삭과 블레셋 백성의 갈등(12-18)

충복(忠僕)의 조건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번성에 시기하여 우물을 막더니 급기야 그 땅에서 쫓아냅니다. 번영이 시기의 원인이 되고 축복이 시련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번영이 축복의 표지이긴 하지만, 그것이 안전까지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참된 안전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12-18)

이삭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특별한 하나님의 복으로 그해 수확이 백 배로 늘어났습니다. 여기서 백 배는 완전수의 하나인 ‘10’의 열 배이므로 완전한 풍작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만일 문자적이라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대폭 늘었을 뿐 아니라 그의 경작지가 크게 늘어난 결과일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이삭은 그랄 땅에서 나그네 신분으로 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과 그랄 백성은 선친 아브라함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지 않고 원하는 곳에서 살도록 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상당히 장기적으로 체류하였기에 이삭은 거기서 농사도 지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갈수록 번창했습니다(13). 히브리어 원문은 ‘크다’를 세 번이나 사용하면서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의 가축 떼와 종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며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아브라함이 거부가 되었을 때 아비멜렉의 백성이 시기하여 우물을 빼앗았습니다(창세기 21:22-26). 나중에 야곱의 목축이 크게 번창하자 삼촌 라반의 시기를 한 몸에 받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모든 우물을 흙으로 덮어 막아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지역에 여러 우물을 팠다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는 상호불가침 조약이 맺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후손들을 포함한 조약이었기에 이삭에게도 그 조약은 적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공격하고 권리를 침해하였으며, 적어도 사용권을 허락받은 땅을 침범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그랄 땅을 떠난 뒤 그가 팠던 우물들은 인구가 많지 않았던 그랄 사람들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삭은 그랄 땅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가 팠던 우물들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웬함은 18절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이 죽은 직후 일단 그랄 사람들이 그가 판 모든 우물들을 덮은 것으로 봅니다. 그랄의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폐쇄함으로써 거부가 된 이삭을 강력히 견제했습니다. 아비멜렉은 노골적으로 조약을 파기하고 그에게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이삭에게 솔직하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보다 더 강하므로 우리를 떠나라’(16). 이것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가 압도적으로 늘어나자 애굽의 바로가 모세에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출애굽기 1:7,20).

이삭은 결국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그랄 골짜기로 옮겨가 거기에 막사를 짓고 거주했습니다(17). 이것은 계절천을 의미하는데, 협곡을 흐르기도 하지만 넓은 분지를 흐르기도 합니다. 비가 올 때만 흐르고 비가 멈추면 하천이 마르는 수많은 계절철들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우물은 당시 대단히 비싼 재산이었습니다. 특히 물이 부족한 네게브와 그랄과 같은 땅에서 우물은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이삭은 골짜기로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골짜기 일대의 어느 곳에는 초지도 충분하고 비교적 지하수를 찾기 쉬웠습니다.

18절은 17절과 분리해서 읽어야 합니다. 17절로 이삭의 추방과 새로운 거주지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 마무리되었습니다. 18절은 그가 그랄 골짜기에 가서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그가 17절에서 이미 그 우물들이 있던 그랄 땅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밀려났기 때문이며, 19절 이하에서 보듯이, 이삭은 거기서 새로운 우물을 파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8절은 그곳 우물의 역사에 대한 요약적인 기록입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는 진술에 대해 웬함은 제이콥(Jacob)의 견해를 따라 이 단어의 동사 시제를 과거완료로 해석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팠었던(had been dug) 그 우물들을 그가 다시 팠다(He had redug)’. 요컨대, 이삭이 그랄에 도착해서 부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서 사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메웠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다시 판 후에 아버지가 붙였던 이름을 다시 붙였습니다. 우물은 큰 재산이므로 우물을 판 소유자가 고유의 이름을 붙여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삭이 그 우물들에 아버지가 붙였던 동일한 이름을 부여한 것은 우물의 소유권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삭과 그랄 목자들의 우물 분쟁(19-22)

우물을 팔 때마다 블레셋에게 거듭 양보하던 이삭은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번성을 누립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은 결과로 기나긴 고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에게 편히 숨쉴수 있는 ‘넓은 곳’(르호봇)을 주셨습니다. 그 안전한 축복은 온유한 순종의 대가였습니다.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19-22)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우물을 새로 팠지만 그 우물마저 블레셋 사람들이 욕심을 냈습니다(19-20). 우물이 당시에 인간과 가축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합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다툼’이란 뜻의 에섹으로 지었지만 그 우물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사의 다른 우물을 팠는데, 다시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탐내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는 그 우물을 ‘비방’, ‘적의’를 뜻하는 싯나로 불렀는데, 그 우물마저 블레셋 사람들에게 양보했습니다(21). 이삭은 다시 장소를 옮겨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때 분쟁이 더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이 우물도 빼앗길지 모르지만 묵묵히 믿음으로 우물을 팠을 것입니다. 그는 그 우물에 ‘르호봇’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경을 넓혀주셔서 그 땅에서 번성하게 되길 바라는 길은 신앙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22). 땅의 정복과 번성은 창조 명령이며, 이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의 약속들의 핵심 요소입니다. 우물을 포기하는 이삭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고 자신의 막대한 전리품을 소돔에게 양도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브엘세바로 이주한 이삭(23-25)

이삭의 번성을 본 아비멜렉이 브엘세바까지 찾아와 화친을 맺자고 청합니다. 아무리 빼앗겨도 다시 채워지는 이삭의 삶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했을 뿐인데 이삭은 이제 자신을 쫓아냈던 아비멜렉의 부러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23-25)

이삭은 마침내 그랄 골짜기를 떠나 브엘세바로 거처를 옮깁니다. 어느 날 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빈번히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밤중에 이삭에게 직접 나타나셨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 가족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고,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 조약을 맺은 장소이자, 특별한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린 곳입니다(창세기 21:31-33). 하나님께서는 그랄 땅에서 두려워하는 그를 향해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십니다(24). 또 자신을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아버지에게 약속했던 복을 이삭에게 모두 주어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확증하십니다. 이삭은 이것을 기념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며 기거할 처소를 마련했습니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도 새로운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의 조약(26-33)

아브라함과 화친을 맺은 바로 그곳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은 다시 그의 아들 이삭과 화친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아무리 잃고 빼앗겨도 다시 채워지는 이삭의 삶에서 하나님의 배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삭을 자신들이 당해낼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사탄을 무력화한 하나님의 지혜였듯이, 지금도 그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수단이 됩니다.

26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26-33)

어느 날 아비멜렉이 부하들을 데리고 그랄에서 이삭을 만나기 위해 브엘세바로 찾아왔습니다. ‘친구/동료’라 불릴 만큼 신임하는 최측근 아홋삿과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했습니다. 유력한 수행원을 대동한 것에서 아비멜렉의 위상이 드러나고 또한 이 조약의 파트너인 이삭의 권세도 잘 나타납니다. 이삭은 자신을 내쫓더니 왜 찾아왔는지 묻습니다(27).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심을 보았기에 새로운 조약을 맺으러 왔다고 말합니다(28). 아비멜렉은 지나치게 커진 이삭의 권세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너는 우리를 해치지 말 것을 약속하고, 또한 우리도 너희를 해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29). 그는 이삭의 가족을 해하지 말라고 전국에 칙령을 내린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거듭된 우물 분쟁과 더불어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선대의 아브라함처럼 다시 두 사람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조약식을 마친 후 풍성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언약이나 조약 체결 후에는 잔치가 배설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들은 밤새 먹고 마시며 친목을 다진 후 일찍 일어나 조약 준수를 다짐한 후 이삭을 떠났습니다(31). 이삭은 거기서 새로 판 우물에서 종들이 생수를 퍼내자 그 우물 이름을 ‘맹세’를 뜻하는 ‘세바’라 칭했습니다. 그 성읍 이름은 아브라함이 붙인 그대로 브엘세바라 칭하였습니다.


비우니 채워지고 물러나니 다가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가능한 역전이고 역설입니다. 이삭의 이런 온유한 행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채우심을 기대하면서 자기 부인과 순종의 비움을 실천하지 않겠습니까?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