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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7-02)


축복을 가로채는 야곱

창세기 27장 15-29절


야곱은 유언의 때를 스스로 앞당겨 더 각별하게 사랑하는 아들 육신의 장남 에서를 축복하려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채 동물 가죽과 형의 옷을 뒤집어쓰고 그 축복을 가로채려고 합니다. 이 사이에서 정직한 하나님의 뜻만이 오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행동을 개시합니다. 14절에서 야곱에서 야곱과 리브가의 작전 실행을 표현하는 간결한 세 개의 연속된 동시는 이작전이 즉각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리브가의 신속한 행동은 위장술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그녀의 음모가 즉흥적이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야곱 또한 얼마나 두뇌의 회전과 행동이 빠른지를 보여줍니다.

  

이삭의 특식이 준비(15-19)

이삭은 촉각과 후각을 동원하여 에서를 후계자로 세우려는 자기 뜻을 밀어붙였습니다. 어두운 눈으로도 잘할 수 있었을 듣기와 복종에 힘썼더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삶에도 거추장스러운 몸부림을 중단하고 그저 듣고 무릎 꿇어야 해결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17자기가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니 18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15-19)

리브가의 행동은 일사분란하고 빠릅니다. 그녀는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에서의 좋은 옷을 가져와 야곱에게 입힙니다(15). 히브리어는 이것이 단순히 ‘좋은 옷’이 아닌 매우 ‘소중한’ 옷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리브가는 요리를 위해 새끼 염소 가죽을 벗겨낸 뒤 옷 밖으로 드러난 이삭의 신체를 모두 위장했습니다(16). 팔뚝까지 포함해서 두 손을 덮고 이어서 목에 둘렀을 것입니다. 또 그것을 만졌을 때 에서의 피부와 비슷한 느낌이 들도록 세밀히 새끼 염소의 털을 손질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에서의 피부에 난 털의 크기와 감촉, 밀도까지 고려해서 가짜 피부 털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축복 예식에서는 입맞춤을 하는 것이 관례이기에 이삭의 얼굴 주변에도 염소 털을 붙여 구레나룻을 위장했을 것입니다. 리브가가 새끼 염소 두 마리로 음식과 위장을 동시에 해결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음모가 사전에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된 것임을 알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와 야곱은 옷을 가지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그러나 후에 야곱 자신도 아버지가 된 후 결국 자녀들에 의해 위장된 옷에 속습니다(창세기 37:31-34). 어떤 사람은 이런 조잡한 위장술이 통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 의심을 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삭이 다 알고도 속아준 것일 수 있다는 추론까지 제안합니다. 즉, 이삭은 축복 기도를 받는 아들이 야곱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속는 척하면서 손을 머리에 얹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삭이 에서를 얼마나 편애했는지를 볼 때, 그가 에서를 위해 장자의 축복을 내리기로 결심하고 그를 불러 독대해서 실제적인 축복 의례를 실행하기 시작한 것을 볼 때 전혀 성립할 수 없는 해석입니다. 무엇보다 이삭이 이런 위장술에 속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둔해진 감각 때문입니다. 그는 시력뿐 아니라 손의 감각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녀는 정성스레 준비한 이삭을 위한 특식을 야곱의 손에 들려줍니다(17). 야곱은 그것을 들고 아버지의 숙소로 가서 아버지를 부릅니다(18).

그는 최대한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 냈을 것입니다. 아마 이삭은 이때 시력뿐 아니라 청력도 예전 같지 않았기에 위장된 목소리를 어느 정도 의심하긴 했으나(22), 결국 속고 말았습니다. 이삭은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시력이 희미했던 이삭이 아들의 신분이 의심스러워 이 질문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에게 이 질문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물었던 질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대담하게 자신이 에서라고 답변하면서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특식을 드시라고 권면합니다(19). 사냥한 고기를 다 드신 뒤 자신을 마음껏 축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삭이 속임수에 넘어감(20-23)

서열에서 밀리고 부엌으로 밀려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형의 피부와 냄새를 가장해서라도 갈취하고 쟁취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약속이란 기다림이자 상상력입니다. 조바심과 현실문제로 웅크려도 다시 일어서는 탄성력이 믿음이며 의로움입니다.

20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1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22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20-23)

리브가와 야곱은 계획을 빠른 시간 내에 진행해야 했습니다.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예상보다 너무 빨리 나온 특식이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어떻게 사냥을 이렇게 빨리 마칠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20).

야곱은 하나님께서 사냥감을 ‘내 앞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즉시 발견할 수 있게 해주셔서 빨리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기만적인 위장술에 이어서 거짓말을 추가한 것입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끌어들여 사기극에 이용합니다. 이삭은 나름 신중하게 축복 의례를 진행하려 합니다. 누군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고 축복을 비는 행위는 중대한 일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안전하게 최종적으로 기도의 대상을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침침한 눈과 귀로는 누군지 확인하기 어렵기에 추가적인 검증 절차를 밝습니다. 아들의 몸을 만져 에서인지 확인해보려 합니다. 이삭에게 아들의 음성은 에서의 음성이 아닌 야곱의 음성인 것처럼 들렸습니다(22). 이삭은 야곱의 두 손(아마 팔뚝까지)을 만져보고 에서의 피부 털의 촉감을 느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속임을 당하며, 결국 야곱을 축복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23).

그가 속은 것은 탁월한 위장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별을 하지 못했다’는 저자의 평가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신중치 못함과 손 감각의 기능 저하, 그리고 영적 분별력의 감퇴로 인해 생긴 결과라고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듣는 것을 진리의 원천이라고 말하는데(신명기 4:12) 이삭은 이 감각을 무시합니다.

23절 끝의 ‘축복하였더라’라는 언급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이삭의 축복이 29절에서 실행되는 이유로 여기서 그가 축복했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잘못 첨가된 부분이라고 말하거나 29절과 다른 자료라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베스터만(Westermann)은 이것이 먹고 마시고 키스를 하고 축복을 선언하는 축복 의례 전체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제이콥(Jacob)이나 월키는 이것을 단순한 의례적 인사나 감사의 답례로 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인사로 본다면 문맥상 매우 어색합니다. 분명히 문맥은 이삭이 분별을 못하여 에서가 아닌 야곱을 축복한 것으로 읽힙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이삭이 이러한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해 결국은 야곱을 축복하게 되었다고 미리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24-29)

인간은 저마다의 뜻이 뒤엉켜 엎치락뒤치락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아랑곳없이 흘러갑니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라는 애초의 말씀은 반드시 이뤄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가고 잊고 외면한 말씀들을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그 원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24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5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6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4-29)

이삭은 검증 작업을 마친 후 그가 자신이 총애하는(‘내 아들’) 에서라고 확신합니다(24). 24절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 아니라 확증의 질문입니다: ‘너는 진짜 내 아들 에서로구나!’ 야곱의 ‘맞습니다’라는 마지막 화답과 더불어 확인 작업이 끝납니다. 이삭은 아들이 가져온 별미를 즐깁니다. 축복 예식의 절차대로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 아들을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25). 야곱은 특식과 떡을 드렸고 이어서 포도주를 가져와 마시게 했습니다. 아마 관례적으로 특식에는 포도주가 수반되었지만, 여기서 특별하게 이것이 언급되는 이유는 야곱이 이삭의 분별력을 더욱 흐리게 하려고 가져왔음을 암시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식사를 마친 이삭은 야곱을 가까이 오라고 부릅니다. 이어서 자신에게 입을 맞추라고 명합니다(26). 이것은 쌍방 간의 축복과 평안을 비는 관례적 의례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이삭은 아마 그의 머리와 몸을 껴안았을 것이며, 그의 옷의 향취를 맡으면서 그를 축복합니다(27). 참고로 본문에서 생략되어 있으나 통상적으로 축복을 할 때는 상대방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관례입니다(창세기 4:12-14).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다’라며 그가 받은 복과 그에게 복을 주신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여기서 ‘밭’은 ‘들’을 의미합니다. 앞서 에서는 들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창세기 25:27). 에서의 옷에서 들사람의 냄새가 나기에 이삭은 그가 나가서 활동하는 사냥터와 목초지의 풍요함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축복은 야곱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탁월한 목자가 되었으며, 가나안 전역을 누비는 사람이 됩니다. 이삭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새포도주를 의미함)가 그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원된 복들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던 약속의 반복입니다. 물론 언뜻 그 내용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들과 다소 차이가 있는 듯 보입니다. 후손의 번성, 땅의 약속, 복을 누림, 열국의 복의 통로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의 반복이며 확증입니다. 만민이 그를 섬기고 열국이 그를 경배한다는 것은 야곱의 후손의 번성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창대해져 모든 민족들이 그를 높이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로 말미암아 열국이 복을 받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해 있습니다. 강대한 아브라함과 그의 손자 야곱의 나라를 통해 그에게 부복하고 섬기는 만민이 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어지는 저주와 축복의 이분법적 예언도 같은 맥락에서 선언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했듯이 이삭의 장자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축복하는 자는 목을 받을 것입니다. 이삭의 축복의 승계자는 결국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승계자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알아맞히고 하나님과 거래하여 얻어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삭을 향해 치켜든 아브라함의 칼끝에서야 보이는 세계이며, 내 뜻을 꺾어야 비로소 맞닿는 세계입니다. 내 욕망의 그늘에 가려서도 묵묵히 전진해온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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