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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7-03)

 


 축복을 빼앗긴 에서

창세기 27장 30-40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에서를 어떻게든 후계자로 앉히려던 이삭의 계획은, 에서의 ‘아버지여’하는 부름과 함께 산산이 부셔졌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빈틈을 노려 내 뜻을 도모해보려 하지만, 도무지 하나님께서는 빈큼이 없으십니다.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의 특식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서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일을 마친 리브가가 야곱을 숨겼기에 집안 전체가 조용했을 것입니다. 에서 입장에서도 이삭과 독대해서 독점적 축복을 받을 계획이기 때문에, 그는 이 요리를 리브가와 야곱 몰래 준비했을 것입니다. 이삭의 집에는 알지 못할 긴장감과 적막감이 흘렀을 것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에서(30-33)

이삭은 왜 떨었겠습니까? 경악이나 분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에서를 축복하려던 자신의 얄팍한 계획조차 빈틈없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묶여 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심을 꺾으실 때, 이삭처럼 떨며 ‘무엇을 할 수 있으랴’(37)하고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30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31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32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33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0-33)

리브가와 야곱은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직후, 야곱은 즉시 아버지의 숙소를 떠났습니다(30). 이것의 히브리어 문장 속에 그 아슬아슬한 긴박성이 잘 드러납니다. 이것은 ‘그가 나가자마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에서가 도착하기 직전에 아버지의 숙소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와 즉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아, 에서는 음식 솜씨도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손질하고 각종 양념을 넣어 끓여서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리브가와 에서 둘 다 이 특식을 준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 입맛에 딱 맞을 별미를 준비해서 숙소로 가져갔습니다(31).

그러고는 아버지를 부르며 일어나 음식을 드시고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서 야곱과 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대화의 차이를 대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뜻 같아 보이지만 다릅니다. 야곱은 ‘내 아버지여’라고 먼저 정중히 부르면서 아버지와 인사를 나눕니다(18). 이어서 그는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축복하소서’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명령형에 겸양을 표현하는 ‘나’(제발, 부디)가 붙어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정중히 인사하는 장면이 보이지 않으면서 곧 바로 ‘아버지여 일어나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축복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나’(부디, 제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아버지에 대한 에서의 태도가 덜 정중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에 대해 웬함은 에서의 어법에서 축복 기도를 앞둔 그의 들뜬 마음이 엿보인다고 설명합니다.

그 순간 이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앞서 야곱에게 물은 ‘너는 누구냐, 내 아들아’와 대조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사를 나누는 성격이 짙었던 질문이었는데, ‘내 아들’이 빠진 지금의 질문은 놀람의 표현입니다. 앞서 이미 에서의 특식을 먹었다고 생각한 이삭은 그 에서가 다시 동일한 특식을 대령했다는 말을 듣고서 크게 놀라며, 본능적으로 ‘너는 누구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영문을 모르는 에서는 순간 조금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큰아들 에서라고 대답합니다(32). 아마 에서는 아버지께서 시력과 청력이 나쁜 탓에 저러시는가 보다 하고, ‘저예요. 아버지 아들, 장남 에서요’라고 답변했을 것입니다.

이삭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히 크게 떨었다.’ 저자는 ‘큰’이라는 형용사와 ‘심히’라는 최상급 부사를 사용하면서 그의 넋 나간 공포심을 잘 묘사합니다. 이삭은 순간 야곱의 사기극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누가 사냥한 고기로 음식을 해 온 것이냐’는 질문은 그저 탄식 소리일 뿐입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자신이 그의 음식을 실컷 먹고 그에게 모든 축복을 쏟았기에 그가 ‘반드시’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33). ‘반드시’라는 강조 부사의 사용은 이 복이 철회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에서의 뒤늦은 축복 요청(34-36)

에서는 왜 통곡하는가. 에서에게 하나님 나라를 떠안는 사명은 팥죽 한 그릇만도 못했으니, 상속권을 뺏긴 데 대한 울분 아니었습니까! 그는 야곱의 ‘욕심’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의 영적 ‘무심’을 한탄하며 울었어야 했습니다. 우리에겐 자신을 돌아보는 울음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34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35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36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34-36)

에서는 이삭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단말마의 비명이 담긴 히브리어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34). 그가 ‘소리 질러 슬피 울었다’는 아쉬운 번역입니다. 오히려 예전 한글개역의 ‘방성대곡했다’가 히브리어 문장의 뉘앙스를 잘 반영한 번역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내어 운 정도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그는 심히 큰 쓰라린 부르짖음을 울부짖었다’는 뜻입니다. 격한 감정을 담은 단어들이 삼중, 사중으로 연속됩니다. ‘심히’(아드 메오드), ‘큰’(게돌라), ‘쓰라린’(우마라), ‘부르짖음’(츠아카)을 ‘울부짖었다’(차아크). 에서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자신도 축복해달라는 말을 반복하며 아버지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이삭은 동생 야곱이 속임수로 그의 복을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35). 이삭의 말대로 그는 속이는 자입니다. ‘속임수’(미르마)라는 단어는 그가 삼촌 라반에게 속을 때 똑같이 사용됩니다(창세기 29:35). 속임수로 상대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가 결국 속임수로 고통을 당합니다. 에서는 야곱이라는 이름 뜻을 들먹이며 그가 그의 이름대로 행동했다고 비난합니다. ‘속이다’라는 동사 ‘아카브’는 야곱의 이름과 어근이 동일합니다. 이 동사는 앞서 설명한 대로 ‘발목을 잡다’, ‘속이다’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마찬가지로 이미 살펴보았듯이, 야곱의 이름인 ‘야아콥’의 원래 뜻은 ‘그가 보호하실 것이다’였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에서는 야곱이 전에 자신의 ‘장자의 명분’(장자권)을 빼앗아 갔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복’(베라카)를 찬탈했다고 격분하며 말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장자의 명분(장자권)과 복이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이 보장하는 유산을 넘겨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가 아버지에게서 받으려 한 ‘복’은 ‘장자의 복’으로서 법적인 장자권을 지닌 자가 미래에 누릴 모든 혜택을 가리킬 것입니다. 결국 아마 안수가 동반된 가장의 이 예언적 축복의 선포는 장자권을 최종적으로 확증하는 의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해밀턴 역시 ‘축복을 선언하는 것은 장자를 주요 상속인으로 인정하는 공식적인 행동으로 간주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장자권을 야곱이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예언된 에서의 미래(37-40) 

이삭이 에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리브가를 통해 받은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다’라는 애초의 예언을 반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깨끗한 승복이자 인정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수식어와 핑계가 많아 장황하다는 건 하나님 뜻과 멀어졌음을 실토하는 것입니다.

37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38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9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40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37-40)

자신의 복의 창고를 모두 비워 야곱에게 쏟아 부었기에 이삭에게는 에서를 위한 복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이미 자신이 야곱을 에서의 주인으로 세웠으며, 나아가 장차 야곱의 형제들도 종으로 주었다고 말합니다(37). 또한 야곱에게 곡식과 포도주의 축복까지 다 건넸으니 에서에게는 더 이상 줄 복이 없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형제들’이란 야곱의 친형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에서만이 유일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온 다른 계열의 야곱의 형제들(즉 친족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들도 야곱의 후손, 곧 이스라엘에게 예속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변 열국이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모두 정복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이해됩니다.

에서는 절박합니다. 아버지에게 빌 복이 하나뿐이냐면서 자신도 축복해달라고 간절히 거듭해서 요청합니다. 그는 소리 높여 울며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에게 그를 위해 빌어줄 여분의 복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큰아들 에서를 위한 미래를 예언합니다. 분명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이 예언은 이삭의 즉흥적인 선언이 아니라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큰아들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에서는 이미 야곱에게 찬탈된 하늘과 땅의 복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대신 그는 칼을 의존해서 삽니다. 이 점에서 에서는 가인과 이스마엘의 운명과 비슷하게 투쟁을 하며 방랑할 운명이 지워집니다. 그는 동생 야곱을 섬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동생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에는 그 멍에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에서의 후예는 구약 전반에서 매우 호전적인 종족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에돔은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되어 아우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섬기게 됩니다. 매임을 벗는다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열왕기하 8:20, 22에서 성취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야곱에 대한 이삭의 축복 또한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운명 속에서 성취됩니다.


이삭의 회개 동작을 따라가노라면, 우리가 그린 청사진들이 이미 하나님의 설계도 안에 치밀하게 엮여 있음을 실감합니다. 내가 지은 소망들을 부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견고히 구축해놓으신 참 소망 안으로 들어서라는 부르심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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