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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8-02)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창세기 28장 10-22절


 우리는 외롭고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항상 함께하시며 신실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진심으로 섬기고 신뢰해야 합니다.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라반의 집이 밧단아람이 아닌 하란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브두엘과 라반의 집을 강조할 때는 밧단아람, 29:1에서 야곱의 여행 방향에 주목할 때는 ‘동방’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란’이란 지명을 쓰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떠나온 지역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은 결국 아브라함이 떠나온 곳을 그대로 역행하여 여행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본인이 직접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늘 사다리(10-12)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탑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오직 혼자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들과 언약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며 저녁에 꿈을 꿉니다.

10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10-12)

야곱은 에서를 피해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 집이 있는 하란으로 갑니다. 도중에 어느 곳에 도착해 해가 지자 밤을 보내기 위해 여장을 풀었습니다. 저자는 그곳을 ‘그 장소’(하마콤 디)로 부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단순히 ‘한 장소’를 의미한다고 말하나 그 경우 관사 없이 ‘마콤’을 쓰는 것이 관례입니다(창세기 24:23,25; 출애굽기 21:13; 신명기 1:33). 분명 저자는 그곳이 특별한 장소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돌 하나를 취해 베개 삼고 누워 잠들 없습니다(11). 혹자는 돌이 베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맡에 두었을 뿐 베개로 삼지는 않았다고 말하나 애굽에서는 금속으로 만든 베개가 있었습니다. 베개용이라면 그 돌은 그리 큰 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사실 많은 학자들의 견해대로 쌍방향 통행이 가능한 층계가 분명해 보이나 우리는 편의상 전통적인 견해대로 사닥다리로 간주합니다. 사닥다리에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천상과 지상을 오가는 천사들의 분주한 임무 수행 장면으로 보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13). 참고로 예수님은 장차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자신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현재의 하나님이 계신 자리에 자신을 놓으셨습니다(요한복음 1:51).

 

야곱에게 주신 여호와의 약속(13-15)

초등학생들을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로 서열을 정한다는 이 관기의 시대에, 내가 누운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적인 줏대를 세우고 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모든 백성들을 보호해주십니다. 이러한 약속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13-15)

사닥다리 위에 계신 여호와께서 야곱을 향해 자신을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분이며 그와 언약을 맺고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던 그 하나님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분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이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계보가 야곱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확증하고 계시며 더불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모든 약속이 야곱의 것이 될 것임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야곱은 어머니와 꾀를 내어 에서와 이삭에게서 그 권리를 훔쳐냈습니다. 이삭은 속았지만 야곱의 합법적 권리를 승인하고 마침내 그에게 아브라함의 약속이 승계됨을 선언했습니다(창세기 28:3-4). 이제 그것을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인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 대한 약속들을 구체적으로 확증하십니다(13-14). 앞서 12:1-3,7의 반복입니다. 또한 더욱 흥미롭게도 아브라함이 롯과 결별한 후 현재의 장소인 벧엘로 거주지를 옮겼을 때인 13:14-16에서 약속된 복들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땅의 선물과 후손의 번성, 만민이 야곱의 후손을 통해 받을 복, 그리고 보호와 동행입니다. 먼저 그가 누워 있는 땅, 즉 가나안 땅을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 줄 것입니다. 후손은 번성하여 사방 땅에 퍼질 것입니다. 땅에 퍼져 나간다는 것은 아마 가나안 땅의 정복과 그 땅의 분배에 대한 예고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이어 야곱 자신이 받을 복은 생략되어 있지만, 열국이 그를 통해 받을 복에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약속이 다 성취될 때까지 언제나 야곱을 보호하고 동행하며 인도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 땅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벧엘에서 이 약속을 맹세하셨고 이제 역으로 야곱이 다시 하란 땅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이 약속을 재확증 하십니다. 야곱과 끝까지 동행하시고 그를 지키시며 그에게 준 약속들을 반드시 성취하겠다고 맹세하십니다(15절). 이후의 야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그 약속들이 그분이 맹세한 대로 어떻게 실현되는지 드라마처럼 보여줍니다.

 

야곱의 서원(16-22)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을 때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애곱은 자신의 미래를 이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께 결박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만약 …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신앙이었습니다. 더 깨지고 버리고 변해야 할 것이 남은 야곱이었습니다.

16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16-22)

야곱은 에서를 피해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갑니다. 도중에서 날이 저물자 돌을 베개를 삼고 잡니다. 그는 그곳에서 꿈을 꾸게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을 때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현현을 기념(16-19)

야곱은 아마 그 꿈을 꾸고서 한밤중에 깨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심히 두려운 마음이 엄습해왔습니다. 그는 떨며 ‘여호와가 과연 여기 계시는데 내가 알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의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을 거의 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잔 곳을 가리켜 ‘이곳이 하나님의 집(베트 엘로힘)이요 하늘의 문(샤아르 하샤마임)이구나’하고 말합니다. 베트 엘로힘의 축약형이 벧엘입니다. ‘하늘의 문’은 앞서 11:5-7에서 설명한 대로 ‘바벨’의 원래 이름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바벨이나 다른 장소가 아닌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진정한 ‘신의 문’임을 깨닫습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어나 자신이 뺐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어 기념석으로 삼았습니다. 돌기둥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그곳을 거룩한 장소로 삼았음을 암시합니다(출애굽기 40:90-13; 레위기 8:10-12). 말하자면, 야곱은 그곳을 거룩한 성소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벧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나안의 종교적인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는 그가 돌기둥을 세운 뒤 제단을 세워 바졌다거나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벧엘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창세기 35:1-7). 그 후 야곱은 원래 루스라 불리던 그 장소에 '벧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미 족장 시대, 곧 루스로 물리던 시대에도 벤엘은 가나안의 큰 성읍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곳이 아무리 유명한 지역이었을지라도 신학적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장소’가 중요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비로소 벧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됨으로써 구속사의 관점에서 중대한 장소로 바뀝니다.

월키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여러 가지 변화들로 채워져 있다: 고향으로부터 도망가며 달음질하는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달려간다: 형제를 두려워하던 한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저 어떤 한 장소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장소가 됩니된다; 바위가 성소가 된다; 밤이 아침으로 바뀐다; 가나안의 루스가 벧엘이 된다; 그 꿈이 성취될 때, 야곱(‘발꿈치/움켜쥐는 자’)은 이스라엘(‘하나님과 사람을 이긴 자’)이 될 것이다.’

(2) 서원하며 간구하는 야곱(20-22)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께 서원을 드립니다. 성경에서 서원과 서약(맹세)은 구분됩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기도 제목의 조건을 걸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서원자가 자신이 약속한 것을 실행하는 기도입니다(사무엘상 1:11, 한나의 서원; 사사기 11:30-31, 입다의 잘못된 서원). 그러나 서약(맹세)은 일방적인 다짐과 결심의 약속입니다(여호수아 2:17,20, 라합의 비밀 보장의 서약: 이사야 21:1,5,7, 이스라엘의 베냐민에 대한 서약). 야곱의 이 서원은 구약에서 가장 긴 서원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셔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면’, 자신이 돌기둥을 세운 곳은 하나님의 집(전)이 될 것이며 자신은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는 야곱이 그곳을 성소로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앞의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줌으로써 ‘증명되는 사실’일 뿐 야곱이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최초로 택자의 백성이 십일조를 서원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피엘 동사 ‘야야세르’는 지속과 반복의 피엘 용법으로 ‘계속 십일조를 할 것입니다’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향후 계속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기로 서원합니다.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선물로 바친 십일조는 그것의 원형일 수 있으나(창세기 14:20)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로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거기서도 설명했듯이 원래 십일조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널리 시행되던 제도로 국세와 종교세 개념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은 이제 그 십일조를 왕이나 이방 신전의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께 바칩니다.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내려놓는다는 결단입니다.


우리 머리 위로도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면, 그 사다리 끝에서 천사를 부리시는 분이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세상이 규정한 행복의 문법에 휩쓸릴 이유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조차 나를 위해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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