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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9-01)

  


야곱과 라헬의 우물가 사랑

창세기 29장 1-20절


성도들이라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 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에 서 있는 자에게만 부어주십니다. 하란은 향한 야곱의 여정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가까스로 그곳에 도착하더라도 새로운 험로가 펼쳐질 것입니다. 라반과 야곱, 라헬과 레아의 갈등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어떻게 개입하시겠습니까, 어떻게 그를 향한 약속을 이루시며,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겠습니까!

 

야곱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떠납니다. 그는 낙타를 타지 않고 도보로 직선거리 600km가 넘는 거리를(아마 실제 여행 거리는 800km 정도 될 수 있음) 여행 중입니다. 왜 이삭이 신부를 구하도록 야곱을 보내면서 신부 값을 실어 나를 낙타와 종들의 대동 없이 혼자 보냈게습니까? 아마 이삭은 에서를 배려하거나 그의 눈치를 봤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 규모 있는 야곱의 여행단은 형 에서를 더욱 견디기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 근처에 도착(1-8)

성도는 구별된 자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성도들은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로서 영적인 순결을 지녀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악과 섞일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1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1-8)

이삭은 야곱에게 아브라함의 복으로 축복하면서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가 아니라 그 친족 중에서 아내를 맞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을 고향으로 보냈듯이, 이삭도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섞이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출발을 히브리어로 독특하게 ‘발을 들었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며, 그가 먼 거리를 낙타도 타지 않고 일행도 없이 홀로 도보 여행 중임을 시사합니다. 그는 ‘동방 사라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가 하란 근처의 들판에 도착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들판에 한 우물이 있고 주변에 목자들이 거느린 세 무리의 양 떼가 누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현재 목자 세 명이 각자의 양 떼를 몰고 왔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관례에 따라 그들은 약속된 목자들이 각자의 양 떼를 몰고 모두 모이면 우물을 열어서 공평하게 물을 먹였습니다.

‘큰 돌’로 우물 위를 덮어놓았다는 언급은 분명 다분히 의도적입니다(2). 이것은 나중에 야곱이 라헬 앞에서 의도치 않게 이 돌을 홀로 치울 만한 기력을 가진 능력 있는 남자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돌이 너무 컸기에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나중에 10절에서 야곱이 그 돌을 라헬 앞에서 혼자 치운 것은 갑자기 괴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갑자기 그런 놀라운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의 이전 모습이나 이후의 모습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영리하고 계획적이고 경영에 능한 사람일 뿐 놀라운 육체적 능력은 전혀 그의 특징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야곱 이야기에서 그의 갑작스런 괴력은 너무나 엉뚱할 뿐입니다. 이 문제는 그가 돌을 치우는 10절에서 더 살피기로 합니다.

야곱과 목자들의 대화는 전반적으로 단순하고 무료합니다(3-8). 야곱은 그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며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습니다. ‘형제’라는 호칭은 전형적인 접근을 위한 친근감의 표시입니다. 이러한 무뚝뚝한 단답식 대화를 통해 저자는 현재 야곱이 어느 곳에 와 있는지 알려주면서 결국 하나님의 섭리로 하란 사람과 만났으며 또한 정확한 시점에 라헬을 만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6).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야곱의 여정에 그분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목자들의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홀대는 곧 있을 라헬의 따뜻한 환대를 더욱 부각하는 역할을 합니다. 야곱은 그들에게 아직 해가 지려면 멀어서 가축 떼가 모일 시간이 아닌데 양 떼에게 물을 빨리 먹이고 다시 양 떼를 몰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의향이 없다고 하면서 목자들이 양 떼를 몰고 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말합니다(7-8). 그들이 이렇게 예정 시간보다 훨씬 빨리 온 이유는 아마 도착한 순서에 따라 선착순으로 물을 먹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과 라헬이 만남(9-14)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정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생깁니다. 또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내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야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9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11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13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14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9-14)

야곱과 목자들의 대화는 더 이어진 것 같습니다. 우물을 여는 시간까지는 상당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양 떼를 몰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그가 하란의 목자들을 거기서 만나 라헬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는 물을 얻어먹고 계속 길을 갔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녀가 목자들이 말한 라반의 딸인 것을 인식하고 가까이 가서 돌을 옮기고 그녀가 몰고 온 양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 야곱이 아브라함의 종과 달리 기도와 찬양을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라헬과의 만남은 덜 극적이고 신비적이며, 이어지는 라반과의 만남에서도 일이 꼬이고 고난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여행과 만남이 지닌 특징을 간과한 지나친 단순화로 보입니다. 앞서 그는 아브라함의 종과 달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체험했기에 영적인 충만함과 민감함 속에서 여행 중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기도를 통한 섭리로 인도를 받았으나 야곱은 임재를 통한 섭리로 인도를 받습니다. 섭리의 방식과 과정이 다를 뿐 야곱의 경우도 전혀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극적인 섭리가 작동 중입니다.

10절에서 야곱이 돌을 치울 때 저자는 별다른 인상적인 묘사를 하지 않고 ‘큰 돌’이라고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돌’로 칭할 뿐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무슨 괴력을 발휘했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으며 오로지 야곱과 라헬의 조우와 야곱의 한 여성에 대한 친절과 배려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우물 덮개용 돌은 실제로는 다른 목자들이 합세해서 치웠거나, 아니면 그 돌은 분명 상당한 무게의 돌이긴 했더라도 성인 한 사람이 감당할 정도였을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의도적으로 ‘큰 돌’로 묘사되었던 것은 야곱의 자상함과 야곱이 남자로서의 능력이 중문하다는 것을 라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앞서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나 여기서는 야곱이 라헬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야곱은 양 떼에게 물을 먹인 뒤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이것은 멀고 힘든 여행 끝에 극적인 친족 상봉에 대한 기록의 눈물로 이해됩니다. 또한 이 눈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때서야 라헬에게 자신을 상세히 소개하며 그녀의 혈육임을 밝힙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처음 봤을 때와 달리(창세기 24:16), 여기서는 라헬에 대한 첫인상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라헬은 뙤약볕 아래서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때 등장한 라헬에게서는 여성적 매력이 부각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라헬은 즉시 아버지 라반에게 달려가 야곱의 도착을 알렸습니다. 라반은 조카 야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달려와서 그를 영접했습니다(13). 아마 그는 앞서 아브라함의 종이 낙타 열 마리를 동반해서 방문했을 때 막대한 재물을 함께 가지고 왔음을 상기하고 이번에도 그런 물욕에 사로잡혀 급히 달려 나왔을 개연성이 큽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맨몸의 여행객인 야곱은 라반에게 얼마나 실망스러웠겠습니까? 비록 라반이 겉으로는 야곱을 안고 입 맞추며 그를 맞아들이긴 하나 이미 빈 몸으로 확인된 야곱을 그가 진심으로 환대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모든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장자권이나 그것을 획득하게 된 과정 등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그저 이삭의 아들임을 확인해 주면서 신붓감을 구하러 왔다고 말했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라반이 야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너는 정말 내 혈육이구나’라고 말하며 비로소 그의 거주를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아크)은 반색과 환영의 뉘앙스가 아닌 ‘진짜네’와 같은 심드렁한 감정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결국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한 달을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함(15-20)

하나님의 사람은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삶이 아닌 대화와 양보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살펴서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원망 대신 감사의 기도를 하길 바랍니다.

15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16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15-20) 

한 달 동안 야곱을 지켜본 라반은 음흉한 계산을 끝낸 것으로 보입니다. 신부를 찾으러 온 야곱이 라헬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을 간파했을 것입니다. 그는 품삯으로 무엇을 주길 원하는지 물으면서 우회적으로 야곱을 자신의 목적으로 유도합니다. 그는 이 순간 야곱에 대한 혈육의 관계를 끊고 품삯을 주는 삯꾼으로 전락시킵니다. 라반에게는 큰딸 레아와 작은 딸 라헬이 있었습니다. 라반의 입장에서는 야곱이 괜찮은 신랑감이고 집안도 매우 좋기에 딸들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일이 나쁘지 않다고 결론내린 것 같습니다(19).

레아는 시력이 약했습니다. 문자적으로 ‘레아의 두 눈이 약했다(라크)’인데 이것은 시력보다는 눈에 총기가 없음을 뜻할 것입니다. 이삭에게서 보듯이 흔히 시력은 영적 분별력을 암시하기도 하므로 어쩌면 이것은 은연중에 내려진 그녀의 신앙과 분별력 또는 총명함에 대한 평가인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라헬은 곱고 아리땁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라반은 7년 노동의 대가로 라헬을 주기로 약속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가 라헬을 주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것에서도 드러납니다(26). 그런데 그는 대놓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7년이 매우 긴 세월이지만, 야곱은 라헬을 위해 기쁘게 불과 며칠을 일한 것처럼 7년 동안 라반을 위해 일했습니다.


 등불(시 119:105)은 헤드라이트와는 다릅니다. 목적지까지 속 시원히 비추진 않지만, 발걸음 하나하나를 내딛게 하는 안전한 빛이 되어줍니다. 하나님의 길을, 마음을, 존재를 일깨우시는 만큼 우린 안심하고 나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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