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창세기(26-01)


아버지처럼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이삭

창세기 26장 1-11절


 ‘부전자전(父傳子傳)’입니까? 이삭이 처한 위기 상황도 위기에 대한 처신도 아버지 아브라함을 꼭 빼닮았습니다. 땅과 후손의 약속이 또 한 번 위기를 만나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서둘러 개입하셔서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시고, 축복의 조건이 무엇인지 깨우치십니다. 위기를 축복으로 바꾸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근이 다시 찾아와 이삭이 이주하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던 죄를 반복합니다. 복을 나누어주도록 부름 받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이 도리어 이비멜렉에게 추궁을 당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26장은 아브라함이 175세에 사망한 이후의 사건으로 확인되며(창세기 28:18), 그렇다면 이때 이삭의 나이는 최소 75세, 이미 태어난 야곱과 에서는 최소한 15세입니다.

 

다시 엄습한 기근과 이삭의 이주(1-5)

이삭이 살던 가나안에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 이후 다시 맞은 기근입니다. 약속의 땅에도, 약속을 받은 이들에게도 기근이 찾아오듯,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고난이 비껴가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고난은 당연하게 여기던 축복을, 삶의 조건을, 관계를 다시 보고 새롭게 보게 합니다.

1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1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2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1-5) 

현재의 이삭 이야기를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발생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26:18은 이 사건이 ‘아브라함이 죽은 후’라는 것을 명백히 적시합니다. 이삭이 75세, 에서와 야곱이 15세였을 때, 아브라함이 175세의 나이로 죽었고, 이때 이삭과 리브가는 브엘라해로이로 거처를 옮겼습니다(창세기 25:11). 만일 그 이사가 몇 년이 지난 후였다면, 이삭의 나이는 거의 80세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나이는 20세정도입니다. 이삭은 그 후 기근을 만나 그랄로 이동했으므로 현재의 사건에서 나이는 더 늘어납니다. 결국 이삭과 리브가는 이미 장성한, 앞서 팥죽 사건을 벌인 두 아들을 데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래도록 고도의 사기극으로 매우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데 성공해왔습니다. 26장 전반부는 이러한 이삭의 믿음의 실패를 묘사하지만, 뒷부분은 이삭의 성숙한 믿음과 분쟁을 싫어하는 온유한 성격을 잘 보여주며 그를 높이 칭찬합니다. 무엇보다 이삭의 신앙적 쇠락과 더불어 아내를 누이로 속인 비겁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해 농사를 백배나 얻게 하는 등 그분의 축복은 결국 끊어지지 않았음이 강조됩니다(창세기 26:12 이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26장의 이삭의 믿음의 쇠락은 27장의 육체의 쇠락과 더불어 찾아온 영적 분별력의 상실을 미리 예고합니다.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아브라함 때 흉년이 찾아온 이후 가나안 땅에 다시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은 흉년을 피해 그랄로 이주했습니다. 그가 만난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때 통치한 아비멜렉과 다른 인물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즈음에 만난 아비멜렉 이후 이미 8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1절로 볼 때, 이삭의 이주는 일단 그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애굽으로 갈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2절을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된 일이었음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네게 지시할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랄의 통치자인 아비멜렉은 20장에서와 달리 ‘블레셋 왕’으로 소개되니다. 21:32에서 설명한 대로, 창세기에서 ‘블레셋’이란 명칭의 등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블레셋은 후대의 블레셋과 여러 모로 다른 특징을 보입니다.

2절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에 대해 혹자는 이 땅이 그랄 땅을 가리키기지 않으며, 계속되는 이야기 속에서 결국 이삭이 정착하게 되는 브엘세바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거기서 ‘거주하라’고 하셨는데 농사가 ‘샤칸’이기 때문에 잠시 머무는 그랄 땅일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3절에서 ‘이 땅에 거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동사는 ‘구르’로서 나그네와 같은 일시적 체류를 의미합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2절과 달리 그랄 땅에 머물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샤칸’은 대부분 천막에 거주하는 것을 지시하는 동사일 뿐 그런 거주의 성격과 기간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주어진 명령과 동일합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이삭도 이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으로 가야 할 곳을 지시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말씀대로 순종하여 그랄 땅에 거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이삭과 그의 후손을 통해 성취하겠다고 재차 약속하십니다. 그것은 ‘복을 누림’, ‘땅을 얻음’, ‘자손의 번성’, 그리고 이삭의 후손을 통한 ‘모든 민족의 복’입니다(3-6). 이것은 아버지에게 주어진 약속들의 반복이지만 이삭이 하나님께 직접 받은 최초의 약속들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그랄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땅은 원래 약속의 땅인 가나안 경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은 일차적인 약속의 땅과 확장된 이차적인 약속의 땅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요단 서편의 약속의 땅을 주겠다고 하셨지만, 나중에 실질적인 약속의 땅의 범위는 훨씬 넓어집니다. 동쪽으로 요단 동편을, 북쪽으로 헤르몬 산과 하맛 어귀를 넘어 유프라테스 강 상류까지, 남쪽으로 멀리 에시온 게벨 항구까지 포함하는 네게브 전체를, 서쪽으로는 그랄 땅을 포함한 블레셋 영토와 북부 해안의 두로와 시돈 지역까지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잠시 거의 성취된 바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랄 땅을 확장된 가나안 땅에 포함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그 땅을 주시는 이유를 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의 탓으로 돌립니다. 모리아 산 제단 위에 기꺼이 올려진 이삭의 절대 순종의 모본이 무시되는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후손을 위한 자신의 약속과 준비된 축복의 토대를 확고하게 아브라함에게 두고 계십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법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들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명령’, ‘계명’, ‘율례’, ‘법도’는 동의어들로 율법과 계명에 대한 다른 표현들인 것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구체적인 율법과 계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 대한 자신의 명령을 미래의 그의 후손들이 받을 구체적인 율법과 계명의 원형으로 간주하십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후손들이 받을 모든 율법과 계명을 선취적으로 지킨 인물입니다. 

 

아버지의 죄를 반복하는 아삭(6-7)

축복의 조건은 비옥한 땅도, 인간의 지혜도 아닙니다. 순종이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삭도 기근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떠나지 않아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누리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땅 끝에서 들려온 약속에 그는 머묾을 선택합니다.

6이삭이 그랄에 거주하였더니 7그 곳 사람들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내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 곳 백성이 리브가로 말미암아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내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6-7)

그러나 이삭은 그랄에 거주하면서 실족합니다. 아버지처럼 그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다닌 것입니다. 이 작은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빼앗기 위해 그랄 사람들이 자신을 살해할까 염려했습니다. 그의 거짓말과 그로 인한 소동은 아브라함이 두 차례나 저질렀던 사기극을 반복한 일입니다. 동일한 이야기의 반복에 대해 많은 비평주의자들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세 가지 상이한 판본들이 존재했던 증거로 봅니다. 그러나 월키가 말한 대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너무 다른 내용을 담고 있기에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판본들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은 동일한 죄를 반복하곤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동일한 범죄가 우리의 삶에서 일종의 습관처럼 반복됩니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어쩌면 죄는 일종의 습관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이삭을 추구하는 아비멜렉(8-11)

앞선 실수를 보고 배우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약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우연’(8)을 가장해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듯이 아들 이사도 속임입니다. 그렇게 안전은 확보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위태로워집니다.

8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9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분명히 네 아내거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로 말미암아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10아비멜렉이 이르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할 뻔하였도다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11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나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8-11) 

이삭은 그랄 땅에 오래 거주하였습니다(아라크, 오래끌다, 길어지다). 하루는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아마도 자신의 왕궁에서 이삭과 그의 아내가 ‘껴안은’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이 행위가 어디서 이루어졌고 아비멜렉이 어떻게 목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장소가 궁중 근처 이삭의 거처일 수도 있고, 야외의 어느 한적한 곳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껴안다’라는 단어는 앞서 롯의 사위들이 롯의 경고를 ‘농담하는 것’으로 여겼을 때, 그리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역본들은 이것을 다양하게 번역했습니다. ‘애무하고 있었다’(caressing); ‘웃고 있었다’(ESV); ‘장난치고 있었다’(LXX; KJV). 이것은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행위이며, 껴안으면서 애무를 하고 있는 것을 돌려 말한 완곡어법(euphemism)이거나 애정 어린 장난을 치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즉시 이삭을 불러 항의하고 따졌습니다. 이삭이 아내의 신분을 속인 이유로 자칫 자기 백성이 유부녀와 동침하고 결혼을 해 큰 죄를 범할 뻔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는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은 전국에 방을 붙여 누구든지 이삭과 그의 아내를 범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결국 이삭은 아내의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은 이삭과 그의 아내를 해칠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믿음이 잠시나마 얼마나 소심한 수준으로 전략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근이 가져온 위리는 말씀을 통해, 이삭의 실수로 찾아온 위기는 하나님의 섭리와 아비멜렉의 의로움을 통해 축복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위기 가운데 믿음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축복 가운데 자만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너무나 인간적인 야곱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