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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1-02)


브엘세바에서의 아브라함과 언약

창세기 21장 22-34절


그리스도인은 증인입니다. 자기 자신의 중인과 그리스도의 증인이 동시에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총명하고 유능하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전능한 구원주시라는 인상을 동시에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만 온전히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새로운 장면의 시점이 '그 때에'로 명시됩니다. 이는 20장과 연결되어 사라가 아비멜렉의 후궁이 될 뻔한 사건 직후라는 의경과 이삭이 젖을 땐 시기를 가리칸더눈 견해가 있습니다. 가장 무난하게는 직전의 아브라함과 하갈의 결별 직후 시기인 것으로 보입니다. 20장에서는 위험한 씨의 상황이 초점이었다면, 여기서는 위험한 땅이 초점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22-31)

그리스도인의 삶은 증인의 삶입니다. 아비멜렉의 언약 체결 제안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아브라함과도 함께하셔서 보호하고 계심을 세상이 다 알 만큼 분명하게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날 때 세상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22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4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30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22-31)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약속하신 시기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의 자손을 주셨습니다(18:10). 그들은 그를 이삭이라 이를 짓고(21:3), 언약을 따라 그에게 할례를 행하며(4), 이 놀라운 약속 성취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1) 아비멜렉의 언약 제의(22-26)

어느 날 그랄 왕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왔습니다.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수행 하에 아브라함을 찾아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건넨 인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에 하나님이란 명칭이 사용됩니다.

아마 아브라함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믿는 하나님께서 그를 잘 뒷바라지해주었다는 덕담을 한 것입니다. 이 아비멜렉은 20장의 아비멜렉과 동일 인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는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로 재앙이 사라진 일을 경험했으며, 아브라함이 기적의 출산을 통해 아기를 가졌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인사는 또한 계속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길 바라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내릴 것입니다(창세기 12:3).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으러 왔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승승장구하자 위협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에게 ‘거짓 되이 행하지 않기를 맹세하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흔히 조약을 앞두고 진실과 정직을 요구하는 의례적인 말일 수 있으나, 앞서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로 속인 것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브엘세바 명칭의 기원이 된 ‘맹세’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사라의 일로 아브라함을 후대한 사실을 상기시킵니다(20:14-16). 이것은 문자적으로 ‘자비(헤세드)를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은 ‘너도 나에게 그렇게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원래 호의는 강자가 약자에게 베풉니다. 조약에서 쌍방 간의 호의는 매우 중요하며, 이것이 결국 조약 체결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지금 아비멜렉의 표현은 쌍방 간의 호의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양자의 대등한 관계를 암시합니다. ‘내 아들과 손자’를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과의 장기적이고 평화로운 동거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 후손들의 삶과 그랄 땅에서의 안정적인 거주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거짓으로 행할 것인가, 친절히 행할 것입니까? 그들 관계의 미래는 둘 사이의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호의에 화답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에서도 ‘맹세하다’라는 뜻의 동사 ‘샤바’가 등장합니다. 이 동사의 거듭된 사용은 의도적으로 브엘세바의 기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답변은 간결하지만, 25절은 이 짧은 답변에 대한 이유를 짐작케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중요한 협상 조건을 꺼냅니다. 그는 아비멜렉의 백성이 자신의 우물을 무력으로 강탈해갔다고 따집니다. 우물브에르)은 가나안 지역, 특히 물이 부족한 그랄을 포함한 네겜 전 지역에서 인간과 가축의 생명줄과 다름없이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우물은 대단히 큰 재산이기도 했습니다. 아비멜렉은 크게 놀라고 자신은 전혀 몰랐던 일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왕이 국가 전체의 세부적인 일까지 알 수는 없기에 어떤 지역에서 발생한 우물 다툼을 모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인 아브라함이 책임자인 왕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서 정착지와 목초지를 하사받은 것은 사라 사건 이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제 와서 이 문제를 크게 거론한 것으로 보아 아비멜렉이 이 사건을 적절히 조치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면 우물 찬탈의 배후자를 아비멜렉으로 의심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비멜렉이 자신의 무고를 강하게 주장한 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2) 아비멜렉 언약 체결(27-31)

아비멜렉의 해명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를 신뢰합니다. 아비멜렉의 제안을 받아들여 평화 조약을 맺습니다. 여러 마리의 양과 소를 가져와서 아비멜렉에게 후한 선물로 주며 쌍방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약의 두 당사자가 대등한 관계가 아닐 때는 불리한 쪽에서 선물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경우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 나그네로 들어온 터라 약자의 입장이기에 그런 선물을 바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밀턴은 여기서 아비멜렉이 우월한 지위에 있고 아브라함이 약자 입장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아가 윌키는 아브라함이 여기서 강자라고 간주하면서 강자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권리를 더는 훼손하지 않도록 약자인 왕에게 선물을 주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의 어법, 즉 ‘내가 후대한 것처럼, 너도 행하라’에서 나타나듯이 두 사람은 대등한 관계로 조약을 체결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피해자로서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먼저 풍성한 선물을 제공합니다. 롯과 소돔 왕에게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크게 양보했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아브라함의 선물은 조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한 선제적 조치로 이해됩니다. 앞서 이미 아비멜렉은 거주하고 싶은 땅을 그들이 정해서 살도록 허용한 바 있습니다(창세기 20:5). 그러나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아마 우물 분쟁이 터진 후에 법적으로 거주권을 보장받을 필요가 생겼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아브라함은 일곱 마리의 어린 암양을 따로 준비했습니다(28). 이 일곱 머리의 어린 암양은 위의 ‘양과 소’에 포함되어 있던 것입니까? 아니면 별도의 조약 물품으로 준비했습니까? 본문은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암양은 새끼를 날고 우유를 공급하므로 숫양보다 더 비싼 가축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린 암양이므로 경제적 가치는 더 높아집니다. 완전수 ‘일곱’이라는 숫자와 더 값나가는 암양이라는 사실은 이 선물이 특별하게 별도로 준비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숫자 ‘일곱’(쉐바) 또한 브엘세바(브에르 쉐바)의 이름에 포함됩니다. 아비멜렉 또한 이 일곱 마리의 어린 암양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29). 아브라함은 그 양들은 자신이 판 우물 소유권의 증거로 삼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30). 우물의 소유권이 이 조약의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데, 당시에 우물은 공동 거주와 거주권 보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맹세와 더불어 협정이 조인되었습니다. 협정 기념으로 그들은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우물을 확보합니다. 우물화보는 땅 소유권의 확보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땅에 대한 약속 성취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조약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불과한 세대 후에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서 다시 우물분쟁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창세기 26:15-31).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예배(32-34)

하나님 앞에 보증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땅에 있는 우물 값을 지불하고 암양 일곱 마리로 언약을 세워 소유권을 이전합니다. 이 땅 가나안이 약속의 땅임을 두고두고 후손에게 알리기 위해 법적으로 소유권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는 약속의 성취를 믿었기에 오늘 그 약속의 보증으로 살기로 한 것입니다.

32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3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32-34)

조약식을 마치고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은 자신이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거주지인 그랄은 브엘세바 서쪽 약 30km지점인 것으로 추론됩니다. 여기서 그들의 땅이 처음으로 '블레셋 땅'으로 묘사됩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에셀 나무를 심고 제단을 쌓은 뒤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33). ‘엘 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이란 뜻으로 그 자체로 독자적인 하나님의 명칭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블레셋 땅에서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안정적 거주를 기원하고 암시하는 명칭입니다. 그는 실제로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오래도록 거주했습니다(34). 그곳이 마른 광야이기에 유목민들이 나무를 심는 일은 흔한 관행이었다고 알려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식목 행위가 관례적인 행위였다면, 이것이 서사에서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 나무 심기는 이어지는 그의 제사와 더불어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로써 이곳은 중요한 예배처가 됩니다. 그는 신앙고백의 기념수로 에셀 나무를 심고 근처에 제단을 쌓은 후 그 땅에서의 첫 제사를 바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땅의 약속의 관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약속은 이뤄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미래에 있습니다. 우리도 그 나라의 약속을 이미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온전한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길에 주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증명하는 증인으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의 보증으로, 그 복을 가시화하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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