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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3-01)


막벨라 굴을 산 아브라함

창세기 23장 1-20절


‘강은 가뭄으로 깊어진다’고 했습니다. 가뭄일 때 강은 자신의 깊이를 비로소 드러냅니다. 연이은 시험입니다. 아니, 이번에는 시험이 아닌 시련입니다. 시험대 위에 섰던(22장)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제 큰 시련 앞에 섰습니다. 속절없이 무너지겠습니까? 아니면 이번에도 믿음을 증명해낼 수 있습니까?

 

21장에서 하갈과의 갈등 후(창세기 21:12) 자취를 감춘 사라가 죽음 기사와 더불어 다시 등장합니다. 사라가 127세에 사망합니다. 약 35년 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입니다. 22장에서 사라가 등장하지 않은 이유에 대한 추론이 무성합니다. 사라가 족자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과 큰 다툼을 벌려 헤브론으로 떠났다는 주장도 있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그릇된 추측임이 드러납니다.

 

사라의 죽음과 장례 준비(1-6)

시련 앞의 제대로 된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이 가장 큰 시련과 마주합니다. 아내를 잃은 상심에 더해, 죽은 아내를 묻을 땅 한 평조차 없었으니 낙심 또한 얼마나 컸겠습니까? 땅의 약속의 실현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가 아닙니까? 이런 상황은 그의 믿음을 시험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1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2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3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4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 5헷 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6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1-6)

사라가 22장의 무대에서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이삭 바치는 것을 반대한 사라와 아브라함의 갈등 때문이라고 추론합니다. 그러나 22장에서 사라가 안 나온 것은 당연한데, 22장의 주제는 아브라함의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려고 곁가지는 모두 쳐낸 채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현재의 23장에서도 새로운 막이 열리면서 무대가 헤브론 지역으로 바뀌고 다시 사라가 등장합니다. 이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라가 127세에 헤브론에서 죽고 아브라함이 장례를 치릅니다. 사라는 창세기의 여족장 중 유일하게 나이가 기록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이스라엘의 시조인 그 위상을 잘 보여줍니다.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최초로 거처로 정한 마므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지역입니다(창세기 12:6; 13:18). 헤브론의 원래 이름은 기량아르바였습니다(사사기 1:10). 마므레가 곧 헤브론으로 불리기도 합니다(창세기 23:19).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울었습니다. 그는 사라를 매장할 묘지를 매입하기 위해 그 지역 토착민인 헷 족속에게 갔습니다(3).

‘그 땅 주민’이 성 사람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아마 대표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의 모임으로 보는데, 그보다는 헷 족속의 대표자인 장로들의 모임일 것입니다. 당시엔 원로들이 성문에 모여 중대한 회의를 개최하고 재판을 진행하곤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장례가 생기면 당일에 매장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신명기 21:23). 아브라함은 자신이 개인 사유지가 없는 나그네와 체류자일 뿐이라고 자기 형편을 밝히고 묘지로 쓸 토지를 매입할 의사를 밝힙니다(4).

아브라함이 아무리 막대한 재산을 가진 거부라고 해도, 결국 땅한 필지 없는 외지인일 뿐이었습니다. 헷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깊은 유대 관계 속에 잘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존칭인 ‘내 주여’(아도니, ‘나으리’와 비슷함)라 부르며, 그를 ‘하나님의 귀인(지도자)’으로 칭송합니다(6). 그들은 아브라함이 마땅히 가장 좋은 땅을 묘지로 정해 사라를 묻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좋은 묏자리를 선택하라고 하지만, 이것이 그 묘지의 영구적인 소유권을 보장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계속 사용권을 보장 받아야 할 불안한 묘지가 아닌, 자신의 소유지로 영구적으로 사용할 땅을 마련하려 합니다. 그러나 헷 족속은 땅을 매각할 의사가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막벨라 굴 매입을 위한 협상(7-15)

시련 앞의 기회입니다. 아내의 장지를 고향 우르가 아닌 가나안 땅에서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곳이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라의 죽음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에서 토지를 구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얼마나 절묘합니까? 절망을 감추지 않고 절망 가운데 소망을 담은 곳이 막벨라 굴입니다.

7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8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9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 10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아 있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가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1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12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13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14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15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7-15)

아브라함은 주변 사람들에게 크게 존경받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죽었을 때 주변 에브론 사람들은 사라를 위한 묘지를 기부하겠다고 제언합니다.

(1) 묘지의 기부를 제안한 에브론(7-11)

아브라함은 소유권이 없는 묘지 사용이 얼마나 불안한지, 결국 토지 주인으로부터 많은 부담을 지게 될 결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도지 매매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최고의 존칭을 듣는 그가 최저로 몸을 낮춥니다. 그들 말대로 아주 좋은 뒷자리를 구체적으로 지정한 뒤 구매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그 토지는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소유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 있는 막벨라 굴에 사라를 묻고 싶다면서 충분한 땅값을 내겠다고 말합니다(9). 아마 평소에 사라의 죽음을 생각하며 심중에 정해놓았던 땅일 것입니다. 그는 대표단들이 중재해서 에브론을 설득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런 중재의 부탁은 다시 한 번 토지 소유권자가 땅 매매를 꺼린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막벨라는 ‘두 개의 굴’ 혹은 ‘갈라진 굴’을 뜻할 수 있는 굴의 명칭입니다. 이 굴이 2층 굴인지 나란히 뚫린 굴인지 알 수 없으며, 그 위치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 협상단의 일원으로 앉아 있던 에브론이 중재의 필요 없이 직접 협상 테이블로 나와 흥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성문에 들어온 모든 사람이 듣는 데서’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공언하기를 자신이 그 땅과 거기 있는 굴을 거저 주겠으니 사라를 매장하라고 말합니다(10-11). 고대 근동에서 중요한 거래는 주로 성문에서 이루어졌습니다(룻기 4:1-11). 협상이나 거래가 진행될 때 사람들 앞에서 공적인 약속을 하는 이유는 그들을 증인으로 삼아 그 발언의 법적 효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2) 정당한 값을 지불하겠다는 아브라함(12-15)

에브론의 제안은 실제로 토지를 기부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대 근동에서 쓰는 관례적인 협상 예법입니다. 에브론은 굴과 주변의 토지를 좋은 값에 팔려고 상대방을 높이고 마치 자기는 욕심이 없는 듯 정중한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때로 사람들은 거래를 할 때 덤으로 주는 상품을 제시해 선심을 쓰는 척하면서 결국은 넉넉한 값을 방아내곤 합니다(참조. 사무엘하 24:22-23).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대표단 앞에서 몸을 낮춰 예의를 표하고 에브론에게 공식적인 법적 효력이 있는(‘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협상안을 내놓습니다. 그는 재차 에브론에게 정당한 묘지 값을 주고 그 땅과 막벨라 굴을 사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에브론에게 금액을 제시하라는 격식 있는 요구입니다. 에브론은 다시 그의 말을 받아 구체적인 값을 제시합니다. 그는 땅값이 은 400세겔이긴 하지만, 우리 사이에 그런 돈이 무슨 의미가 있고 돈이 뭐가 중요하겠냐면서, 마치 토지를 무상 기부할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협상 예법의 하나일 뿐입니다. 결국 그는 은근슬쩍 땅값을 제시하는데 아마 상당히 비싼 값을 제시하였을 것입니다. 흥정에서는 원래 동의하기 어려운 값을 먼저 제시하면서 점점 협상하여 낮춰가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불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은 400세겔(약 4.5kg)의 ‘세겔’은 당시 시장에서 상인들이 사용하는 화폐 단위였습니다. 은 400세겔을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 크기의 땅을 살 수 있는 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후대에 다윗이 50세겔을 지불하고 성소를 위한 땅을 매입한 것을 보면, 은 400세겔은 대단히 비싼 토지 값인 것이 분명합니다.

 

막벨라 굴 매입한 아브라함(16-21)

시련 앞에서 최선의 헌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는 순간에, 거저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한 채 상당한 값을 치러 막벨라 굴을 삽니다. 그가 산 것은 약속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가장 큰 시련의 순간을 가장 큰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16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17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18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19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20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16-20)

에브론은 분명 아브라함에게 바가지 대금을 불렀습니다. 홍정을 계속 했으면 값이 더 내려갔을 것이고, 그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그가 제시한 값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은 400세겔 무게의 토지 값을 저울로 달아 에브론에게 지불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물질과 재산에 초연한 아브라함의 태도와 믿음이 엿보입니다. 그는 롯와 소돔 왕에게 크게 양보한 바 있으며, 멜기세덱의 백성에게 비싼 재산인 우물을 빼앗기고도 침묵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업이요 재산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열국과 모든 사람이 복을 누리게 하는 복의 통로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합니다.

헤브론의 막벨라 굴과 그 주변 땅, 거기에 심긴 나무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습니다(17). 아브라함은 사라를 막벨라 굴에 매장했습니다. 이 묘지는 사라의 위상에 걸맞은 비싼 땅입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최대의 예를 갖춰 그녀의 명예를 높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최초로 가나안 땅에서 자신의 땅을 확보한 중대 사건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땅에 대한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그의 후손은 장차 가나안 땅 전체를 점유하게 될 것입니다. 막벨라 굴과 헤브론 지역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미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들이 주어졌습니다(창세기 13:14-18:15). 이곳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비롯하여 그들의 가족이 묻힌 종교적 중심지가 됩니다(창세기 25:7-10; 50:12-13). 또한 이 성읍의 중요성과 군사적 능력은 민수기 13장에서 확인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파견했을 때, 그들은 헤브론 지역을 집중적으로 엄탐했습니다. 그곳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확인해 주는 포도나무를 비롯한 풍성한 과실수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시련을 거친 믿음이 더 단단하고 더 온전한 믿음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악속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가 준비하고 대가를 지불해야할 우리의 막벨라 굴은 어디(무엇)입니까? 약속에 투자하는 수지맞는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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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2-01)


모리아 산에선 순종한 아브라함

창세기 22장 1-24절


 시험을 통해 진위(眞僞)가 가려지고 깊이가 가늠됩니다. 그것이 지식이든 사랑이든 사람이든 믿음이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시험대 위에 오릅니다. ‘후손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그가 얼마나 신뢰하는지 시험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2장은 ‘후손’에 대해, 23장은 ‘땅’에 대해 시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다양한 시련과 어려움을 주시면서 시험하셨습니다(출애굽기 15:25; 16:4; 20:20; 신명기 8:2,16). 시험의 목적은 글이 하나님을 신뢰하는지를 검증하고 낮추기 위해서이며, 시험을 통과한 백성에게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십니다. 이삭을 주신 하나님이 이삭을 요구하십니다. 오랜 불임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낸 후에 얻은 독자가 아닙니까. 대를 잇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후손’의 약속(15:5)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두말없이 순종합니다. 시간과 시련으로 형성된 믿음입니다. 오랜 관계와 신뢰가 쌓인 결과입니다.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1-2)

‘그 일 후에’는 다시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암시합니다. ‘그 일’은 앞서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은 일을 말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오래도록 거주하는 중이었습니다(창세기 21:34).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 나타나셨습니다. 시험은 검증하고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서도 이 시험의 목적은 동일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처음부터 독자들에게 이제 전개되는 사건이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함임을 알림으로써 독자를 희생시키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혼란과 오해를 미리 제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은 이에 응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얻은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삭이 3중적으로 표현됩니다. 네 아들, 네 독자, 네가 사랑하는 이삭, 이것은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아들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웬함은 ‘그에게 아브라함의 모든 희망이 놓여 있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데리고’(‘취하라’) 모리아 땅의 곧 지시할 산으로 가라 하십니다. 모리아 땅으로 ‘가라’는 명령법 문장은 독특합니다. 구약에서 이곳과 12:1의 갈대아를 ‘떠나라’에서만 나타나는 명령법 문장인데, 둘 다 매우 힘든 포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두 명령의 순종에 복이 보장되며, 모리아 산에서의 순종은 더 큰 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땅은 역대하 3:1에서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곳입니다. 성경에서 모리아라는 지명이 나오는 곳은 이 둘뿐입니다. 말하자면, 솔로몬 성전터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한 장소로 확인됩니다.

이삭은 지금 충분히 자랐습니다. 그가 ‘나아르’로 불리는데(5) 아마 십대 청소년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이스마엘을 잃은 바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마저 요구하시고 그것도 인신제사로 바치라 하십니다. 인신제사는 성경에서 금하고 있습니다(사사기 11:31-40; 열왕기하 3:27; 17:17). 구약 율법은 첫 아들을 하나님께 봉헌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이 그들 대신 성전에 봉헌되어 종신 직무를 감당합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난해하게 느끼게 됩니다. 이삭을 약속의 아들로 주셨는데, 그를 다시 제물로 바치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모순된 분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순종(3-14)

하나님께서는 준비 하십니다. 아들을 향해 칼을 듭니다. 이삭을 낳은 것이 인간의 가능성을 넘어섰다면, 이삭을 살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급히 막으셨고 준비하신 양을 보이십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향해 칼을 들기 전에는 ‘여호와 이레’는 경험 할 수 없습니다.

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3-14)

아브라함의 반응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즉시 순종했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동안의 여행은 아마도 어렵고 힘든 침묵의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의 거리는 대략 80km 정도였습니다.

(1) 이삭을 바치기 위해 떠나는 아브라함(3-8)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합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겨 떠날 준비를 합니다. 짐을 나를 나귀와 두 명의 종, 그리고 번제용 장작도 미리 준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떠났습니다(3). 이미 그가 가야 할 목적지인 그 산을 정확히 적시해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일째’에 아브라함은 모리아 땅에 도착했습니다. 성경에서 3일은 어떤 중요한 일을 위한 전형적인 준비 기간입니다(참조. 창세기 31:22; 42:18; 출애굽기 3:18; 15:22; 19:11,15,16; 민수기 10:33 등).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나귀와 함께 기다리라고 하면서 자신은 이삭과 함께 가서 제사를 마친 뒤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종들과 나귀를 동반하지 않은 이유는 성소에 제사를 바치러 갈 때 헌제자만 들어가야 하는 관례 때문인 듯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돌아온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실 것이란 아브라함의 믿음을 반영한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이 표현이 지극히 단순하고 관례적인 표현일 수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받을 때 바로 그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고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고 바쳤습니다(히브리서 11:17-19).

아브라함은 장비를 챙기고 번제용 장작은 아들 이삭이 지게 했습니다(6). 곧 있으면 장작에 눕게 될 처지에 놓인 이삭이 그 장작을 지고 갑니다. 십자가에 못 박힐 예수께서 그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침묵하며 걸었을 것입니다. 스피셔(Speiser)는 ‘모든 문학을 통틀어 가장 비장하고 웅변적인 침묵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윽고 침묵이 깨지는 부자의 짧은 대화가 시작됩니다. 서로 ‘아버지’, 그리고 ‘아들아’라고 부르는 대화에서 부자간 깊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이삭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삭이 아무것도 모르고 질문을 하고 있다면, 그의 순진무구한 말은 독자들의 가슴을 더욱 사무치게 합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다면, 그가 묵묵히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있음을 의미하므로 그의 질문이 더욱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지금 그의 순전한 모습은 홈 없는 제물 그대롭니다.

(2) 이삭을 바치려 하는 아브라함(9-14)

그들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은 뒤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려놓았습니다(9). 이것은 이삭이 저항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순순히 결박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삭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흠 없는 어린 양입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제사를 감행하려 한 순간 하늘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급히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중단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독자까지도 아끼지 않는 것을 칭찬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주변에서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 한 마리를 발견하고, 아들을 대신해서 번제로 바칩니다(13). 그것은 여호와께서 미리 준비하신 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을 기념하여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칭합니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입니다. ‘모리아’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아마 ‘여호와 이레’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15-19)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인정하십니다. 독자를 향해 칼을 드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가 자식보다 자식을 주신 하나님을 더 신뢰함을 아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언약을 다시 확증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은 그가 바친 제물이 아니라 경외이고 신뢰였습니다. 자기만족의 믿음이 아닌 계산하지 않는 순종이었습니다.

15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15-19)

순종의 대가로 많은 복이 보장됩니다. 시련-순종-축복은 구약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반적인 도식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제 독자마저 아끼지 아니한 그에게 막대한 축복이 약속됩니다.

이 복은 앞서 약속된 복의 반복이지만, 여기서 더 큰 복으로 발전합니다.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이다’라는 새로운 수식어와 더불어 후손의 약속이 더욱 강화됩니다. 또한 땅의 약속도 확증됩니다. 후손이 대적의 성문을 차지한다는 것은 성의 점령을 의미하며, 이는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예고입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열국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최초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는 순종의 조건이 없는 일방적 약속이 주어졌습니다(창세기 12:1-2). 그러나 다시 맺은 아브라함 언약은 일방적인 편무 언약이 아니라 쌍무적 특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에서 브엘세바로 복귀하여 거기 거주하였습니다 

 

나훔의 후손들(20-24)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아들을 버리고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서 그가 기대한 대로 숫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독자를 아끼지 않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을 다시 약속하십니다. 그 결과를 나훔의 후손들을 서술합니다.

20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21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와 아람의 아버지 그므엘과 22게셋과 하소와 빌다스와 이들랍과 브두엘이라 23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24나홀의 첩 르우마라 하는 자도 데바와 가함과 다하스와 마아가를 낳았더라(22-24)

갑자기 나홀의 족보와 후손들이 열거됩니다. 아마 수년이 지난 후(‘이 일 후에’) 우연한 계기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땅의 친족 나홀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나홀과 결혼한 밀가(창세기 11:29)가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이삭의 출생 이전에 태어났을 것입니다. 나홀의 자녀는 본처인 밀가가 낳은 여덟 명, 후처(첩) 르우마가 낳은 네 명을 합하여 열두 명입니다.

흥미롭게도 야곱, 이스마엘 그리고 에서가 열두 명의 아들을 가진 인물들입니다. 특히 두드러진 인물은 브두엘과 그의 딸 리브가입니다. 브두엘이 마지막에 소개되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습니다. 갑작스러워 보이는 이 족보의 등장은 리브가에 주의를 끌기 위함입니다.


언약 당사자 간의 신뢰 없이는 시험을 줄 수도, 치를 수도 없습니다. 시험은 결국 신뢰의 시험이고 관계의 시험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믿습니다’는 ‘심장을 바칩니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신 전부를 드리기 전에, 주님이 전부가 되시기 전에는 진짜 믿음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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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1-02)


브엘세바에서의 아브라함과 언약

창세기 21장 22-34절


그리스도인은 증인입니다. 자기 자신의 중인과 그리스도의 증인이 동시에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총명하고 유능하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전능한 구원주시라는 인상을 동시에 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만 온전히 드러내는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새로운 장면의 시점이 '그 때에'로 명시됩니다. 이는 20장과 연결되어 사라가 아비멜렉의 후궁이 될 뻔한 사건 직후라는 의경과 이삭이 젖을 땐 시기를 가리칸더눈 견해가 있습니다. 가장 무난하게는 직전의 아브라함과 하갈의 결별 직후 시기인 것으로 보입니다. 20장에서는 위험한 씨의 상황이 초점이었다면, 여기서는 위험한 땅이 초점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22-31)

그리스도인의 삶은 증인의 삶입니다. 아비멜렉의 언약 체결 제안은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아브라함과도 함께하셔서 보호하고 계심을 세상이 다 알 만큼 분명하게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 안에 하나님의 창조가 일어날 때 세상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22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24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25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26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27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8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30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31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22-31)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약속하신 시기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약속의 자손을 주셨습니다(18:10). 그들은 그를 이삭이라 이를 짓고(21:3), 언약을 따라 그에게 할례를 행하며(4), 이 놀라운 약속 성취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믿음으로 응답합니다.

(1) 아비멜렉의 언약 제의(22-26)

어느 날 그랄 왕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왔습니다. 아비멜렉이 군대 장관 수행 하에 아브라함을 찾아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건넨 인사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에 하나님이란 명칭이 사용됩니다.

아마 아브라함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믿는 하나님께서 그를 잘 뒷바라지해주었다는 덕담을 한 것입니다. 이 아비멜렉은 20장의 아비멜렉과 동일 인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는 아브라함의 중재 기도로 재앙이 사라진 일을 경험했으며, 아브라함이 기적의 출산을 통해 아기를 가졌다는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인사는 또한 계속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길 바라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복을 내릴 것입니다(창세기 12:3).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으러 왔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승승장구하자 위협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에게 ‘거짓 되이 행하지 않기를 맹세하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흔히 조약을 앞두고 진실과 정직을 요구하는 의례적인 말일 수 있으나, 앞서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누이로 속인 것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브엘세바 명칭의 기원이 된 ‘맹세’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사라의 일로 아브라함을 후대한 사실을 상기시킵니다(20:14-16). 이것은 문자적으로 ‘자비(헤세드)를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은 ‘너도 나에게 그렇게 행하라’고 요구합니다. 원래 호의는 강자가 약자에게 베풉니다. 조약에서 쌍방 간의 호의는 매우 중요하며, 이것이 결국 조약 체결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지금 아비멜렉의 표현은 쌍방 간의 호의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양자의 대등한 관계를 암시합니다. ‘내 아들과 손자’를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과의 장기적이고 평화로운 동거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 후손들의 삶과 그랄 땅에서의 안정적인 거주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거짓으로 행할 것인가, 친절히 행할 것입니까? 그들 관계의 미래는 둘 사이의 선택으로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호의에 화답하겠다고 맹세합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에서도 ‘맹세하다’라는 뜻의 동사 ‘샤바’가 등장합니다. 이 동사의 거듭된 사용은 의도적으로 브엘세바의 기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답변은 간결하지만, 25절은 이 짧은 답변에 대한 이유를 짐작케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중요한 협상 조건을 꺼냅니다. 그는 아비멜렉의 백성이 자신의 우물을 무력으로 강탈해갔다고 따집니다. 우물브에르)은 가나안 지역, 특히 물이 부족한 그랄을 포함한 네겜 전 지역에서 인간과 가축의 생명줄과 다름없이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우물은 대단히 큰 재산이기도 했습니다. 아비멜렉은 크게 놀라고 자신은 전혀 몰랐던 일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왕이 국가 전체의 세부적인 일까지 알 수는 없기에 어떤 지역에서 발생한 우물 다툼을 모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피해자인 아브라함이 책임자인 왕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서 정착지와 목초지를 하사받은 것은 사라 사건 이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제 와서 이 문제를 크게 거론한 것으로 보아 아비멜렉이 이 사건을 적절히 조치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면 우물 찬탈의 배후자를 아비멜렉으로 의심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비멜렉이 자신의 무고를 강하게 주장한 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2) 아비멜렉 언약 체결(27-31)

아비멜렉의 해명을 들은 아브라함은 그를 신뢰합니다. 아비멜렉의 제안을 받아들여 평화 조약을 맺습니다. 여러 마리의 양과 소를 가져와서 아비멜렉에게 후한 선물로 주며 쌍방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조약의 두 당사자가 대등한 관계가 아닐 때는 불리한 쪽에서 선물을 주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경우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 나그네로 들어온 터라 약자의 입장이기에 그런 선물을 바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밀턴은 여기서 아비멜렉이 우월한 지위에 있고 아브라함이 약자 입장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나아가 윌키는 아브라함이 여기서 강자라고 간주하면서 강자인 아브라함이 자신의 권리를 더는 훼손하지 않도록 약자인 왕에게 선물을 주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의 어법, 즉 ‘내가 후대한 것처럼, 너도 행하라’에서 나타나듯이 두 사람은 대등한 관계로 조약을 체결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피해자로서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먼저 풍성한 선물을 제공합니다. 롯과 소돔 왕에게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크게 양보했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아브라함의 선물은 조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한 선제적 조치로 이해됩니다. 앞서 이미 아비멜렉은 거주하고 싶은 땅을 그들이 정해서 살도록 허용한 바 있습니다(창세기 20:5). 그러나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아마 우물 분쟁이 터진 후에 법적으로 거주권을 보장받을 필요가 생겼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아브라함은 일곱 마리의 어린 암양을 따로 준비했습니다(28). 이 일곱 머리의 어린 암양은 위의 ‘양과 소’에 포함되어 있던 것입니까? 아니면 별도의 조약 물품으로 준비했습니까? 본문은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암양은 새끼를 날고 우유를 공급하므로 숫양보다 더 비싼 가축이었습니다. 게다가 어린 암양이므로 경제적 가치는 더 높아집니다. 완전수 ‘일곱’이라는 숫자와 더 값나가는 암양이라는 사실은 이 선물이 특별하게 별도로 준비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숫자 ‘일곱’(쉐바) 또한 브엘세바(브에르 쉐바)의 이름에 포함됩니다. 아비멜렉 또한 이 일곱 마리의 어린 암양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29). 아브라함은 그 양들은 자신이 판 우물 소유권의 증거로 삼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30). 우물의 소유권이 이 조약의 주요 쟁점이 되고 있는데, 당시에 우물은 공동 거주와 거주권 보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맹세와 더불어 협정이 조인되었습니다. 협정 기념으로 그들은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우물을 확보합니다. 우물화보는 땅 소유권의 확보를 뜻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땅에 대한 약속 성취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조약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불과한 세대 후에 이삭과 아비멜렉 사이에서 다시 우물분쟁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창세기 26:15-31).

 

아브라함의 브엘세바 예배(32-34)

하나님 앞에 보증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 땅에 있는 우물 값을 지불하고 암양 일곱 마리로 언약을 세워 소유권을 이전합니다. 이 땅 가나안이 약속의 땅임을 두고두고 후손에게 알리기 위해 법적으로 소유권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는 약속의 성취를 믿었기에 오늘 그 약속의 보증으로 살기로 한 것입니다.

32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33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34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32-34)

조약식을 마치고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은 자신이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거주지인 그랄은 브엘세바 서쪽 약 30km지점인 것으로 추론됩니다. 여기서 그들의 땅이 처음으로 '블레셋 땅'으로 묘사됩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에셀 나무를 심고 제단을 쌓은 뒤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33). ‘엘 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이란 뜻으로 그 자체로 독자적인 하나님의 명칭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블레셋 땅에서의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안정적 거주를 기원하고 암시하는 명칭입니다. 그는 실제로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오래도록 거주했습니다(34). 그곳이 마른 광야이기에 유목민들이 나무를 심는 일은 흔한 관행이었다고 알려집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식목 행위가 관례적인 행위였다면, 이것이 서사에서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 나무 심기는 이어지는 그의 제사와 더불어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로써 이곳은 중요한 예배처가 됩니다. 그는 신앙고백의 기념수로 에셀 나무를 심고 근처에 제단을 쌓은 후 그 땅에서의 첫 제사를 바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땅의 약속의 관점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약속은 이뤄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미래에 있습니다. 우리도 그 나라의 약속을 이미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온전한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길에 주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증명하는 증인으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의 보증으로, 그 복을 가시화하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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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1-01)


이삭의 출생과 이스마엘의 추방

창세기 21장 1-21절


구원이 임하였습니다.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복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이 기쁨과 웃음을 주었다. 하지만 모든 이에게 그것이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구원과 복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가능성에 절망하는 이에게만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의 비웃음의 의미와 결과는 무엇입니까?

 

사라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이를 갖게 되리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삭 탄생은 동정녀 마리아의 그리스도 출산에 견줄 수는 없지만 분명 과학을 넘어선 기적입니다. 따라서 그랄 땅에서 90세가 다 된 사라의 미모는 예전 같지 않았을지라도 그녀가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아비멜렉의 후궁으로 간택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사라의 출산(1-7)

‘웃음’이란 뜻의 아들 이삭이 태어납니다.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웃음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불신의 미소를 참다운 기쁨으로 웃음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찬송은 오직 그분의 몫입니다.

1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3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4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5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그에게 태어날 때에 백 세라 6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7또 이르되 사라가 자식들을 젖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마는 아브라함의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 하니라(1-7)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그분의 약속이 드디어 성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1년 전 18:14에서 약속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하셨습니다’(파카드). 출산이 임박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오셨고, 사라는 드디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명령대로 아들의 이름을 이삭으로 지었으며(창세기 17:17),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8일째에 할례를 시키라는 명령에 순종하여(창세기 17:12) 할례를 행했습니다(4). 이삭을 가질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였습니다.

사라는 짧은 시로 노래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을 웃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듣는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웃을 것이라고(이츠하크) 노래합니다. 사라는 자신의 짧은 시에 이삭의 이름을 넣어 교묘한 말놀이를 합니다. 이것은 웃음의 반전입니다. 앞서 아브라함은 엎드려 불신의 웃음으로(창세기 17:17), 사라는 냉소적인 웃음으로(창세기 18:12) 하나님의 약속과 예고에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환희와 감격의 웃음이며, 모든 사람들이 이 웃음에 동참합니다. 7절은 이삭 탄생의 기적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한다. 여자의 기능을 다한 사라가 ‘아기들’의 젖을 먹이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심지어 복수인 ‘자식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이삭을 통해 태어날 후손들을 미리 확신하는 말입니다. 성기능이 사라졌을 노령의 아브라함이 아들을 가졌습니다. 100세와 90세 된 부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사라와 하갈의 갈등(8-13)

이스마엘이 이삭의 존재를 희롱합니다. 복을 거절한 것입니다. 아무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복으로부터 단절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냉소와 희롱의 삶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기대하지 않은 바를 실제로 얻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을 지켜주십니다.

8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9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10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11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12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13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8-13)

서사의 장면이 빠르게 전환됩니다. 이삭이 금세 자라 젖을 뗐고, 그날 아브라함은 성대한 잔치를 베풀였습니다(8). 유대 전통에 따르면(제2마카비서 7:27), 이삭이 젖을 뗀 나이는 세 살 정도로 추정됩니다. 젖을 떼는 날은 경삿날로 잔치를 벌였습니다(참조. 사무엘상 1:22-25; 열왕기상 11:20; 시편 131:2; 호세아 1:8). 기쁨도 잠시, 사라와 하갈의 오랜 갈등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삭이 자라면서 잠복하고 있던 문제가 터졌습니다. 각자의 아들을 둘러싼 적통 논쟁입니다.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기 시작했습니다(9). 여기서 하갈의 아들 이름 이스마엘이 생략되고, 하갈을 언급할 때도 처음으로 그녀가 ‘애굽 여인’임을 밝히는데, 이는 그들을 낮추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창세기 저자는 두 모자를 적통 논쟁에서 밀어냅니다. 이스마엘의 놀림은 ‘차하크’의 피엘 분사 ‘메차헤크’로 표현됩니다. 이 단어는 앞서 19:14에서 롯의 사위들이 롯의 경고와 설득을 ‘농담으로 여겼다’는 말에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상대를 무시하고 희롱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도 웃음과 관련된 이삭의 이름으로 말놀이가 만들어지는데, 이번에는 부정적인 놀림에 사용됩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어떻게 희롱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미드라쉬는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거나 부적절한 성적인 행위와 관련된 것으로 제안하지만, 과도한 추론입니다.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은 이스마엘이 이삭의 지위를 폄하하며 조롱했을 가능성입니다. 이 경우 사라의 맹렬한 분노가 설득력 있게 설명됩니다. 종의 아들이 자유인의 아들을 농락합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갖고 사라를 멸시했듯이(창세기 16:4),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달려가 하갈과 그녀의 아들을 내쫓으라고 소리칩니다. 여종의 아들이 적통인 자신의 아들과 기업을 함께 얻을 수는 없다고 핏대를 높여 말합니다. ‘내쫓으라’의 ‘가레쉬’는 이혼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갈과의 완전한 결별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 사회의 관례대로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는다는 말은 여종-아내의 아들도 유산의 몫이 있다는 뜻입니다. 현재의 정황은 유산의 문제보다는 장자권 경쟁에 두려움을 느낀 사라가 사생결단을 내리는 행위로 보입니다. 당시 가장의 권한은 매우 커서 장자권을 다른 아들에게 넘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48:14; 49:4; 역대상 5:1; 참고 창세기 25:31-36).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연루된 일로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네 아이’로, 하갈을 ‘네 여중’으로 호칭하십니다(12). 이는 아브라함과 그들의 깊은 가족적 유대 관계를 시사합니다. ‘나아르’는 이스마엘이 이미 성장한 청소년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만일 이스마엘이 어린 소년이었다면, 여성 홀로 아이를 데리고 광야를 떠도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보내야 하지만,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다’라고 하시면서 앞서 약속했던(창세기 17:20) 그의 후손의 번성과 번영을 확증하십니다(13).

 

내쫓긴 하갈과 하나님의 약속(14-21)

아브라함은 이삭만큼이나 귀한 아들 이스마엘을 떠나보내는 고통스런 순종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시기에(22장) 이스마엘을 바치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삭을 구원하셨듯이 이스마엘도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모두에게 좋은 방식대로 하십니다.

14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20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14-21)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송별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기본 식량과 물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주석가들은 그가 그 외에 다른 필수품들도 준비해서 보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가죽 부대는 흔히 염소 가죽으로 만드는데 물을 약 15리터 채울 수 있다고 합니다. 여러 주석가들이 히브리어 원문을 아브라함이 하갈의 어깨에 떡 물 한 부대, 아이까지 메워준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어린아이가 아니므로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멀리 브엘세바 광야까지 걸어가 거기서 방랑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오랜 방황 가운데 그들은 15리터의 물을 모두 마셔 결국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스마엘이 어머니보다 먼저 탈진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물이 떨어지자 사방을 맴돌며 물을 찾다가 쓰러졌을 것입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관목 덤불에 던지듯 눕혔습니다. 이것은 하갈이 그를 부축해서 자포자기하며 죽음에 방치해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하갈은 아들의 고통스런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 화살이 날아가는 거리까지 멀리 걸어가 앉아서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흔히 하늘을 향한 소리는 기도를 뜻합니다. 죽어가던 이스마엘은 마지막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느다란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하갈에게 하늘에서 음성으로 응답하십니다. ‘하갈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관목 덤불 아래 던져진 아이의 가느다란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그가 들을 것이다’)이란 이름의 뜻이 의도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뒤덮인 관목 덤불 아래도 살피시며, 거기서 새어 나오는 죽어가는 작은 기도 소리도 다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마지막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갈에게 아이에게로 가서 그를 일으켜 손으로 붙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을 앞서 16:10에서 하갈의 태중에 있는 이스마엘에 대해 말씀하신 약속의 확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의 눈을 밝히시어 애타게 찾던 샘물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갈은 샘물을 가죽 부대에 채워 죽어가던 아이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는 장 성하여 광야에 거주하면서 활을 잘 다루는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생활 방식은 이미 16장에서 예고되었습니다(16:12). 그는 들나귀 같이 될 것이며,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칩니다. 그는 모든 형제들을 대항하며 살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유목 생활을 의미합니다. 이 예언대로 그는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됩니다(20). 활 솜씨는 그의 사냥 실력과 전투적 성향을 시사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바란 광야에 정착했으며(21), 하갈은 그를 위해 애굽에서 아내를 얻어 결혼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를 고향 메소포타미아에서 얻었으며,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의 아내를 고향 애굽에서 얻습니다.


이스마엘의 비웃음은 복의 근원인 이삭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떠나보내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 결별이 이삭을 살리는 길이었으며, 이스마엘을 살리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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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0-01)


아비멜렉 앞에서의 아브라함의 속임수

창세기 20장 1-18절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는 늘 미생입니다. 온전하지 못하고 미숙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의 복은 위태로워집니다.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전달될 하나님의 생명이 막힙니다. 아브라함의 미숙함이 가져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어떻게 그 막힌 복을 다시 열어주시는가 보시길 바랍니다.

 

씨의 약속이 위기를 맞습니다. 애굽 바로에게 사라를 빼앗길 뻔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과 사라가 너무 연로해 지녀 출산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섭리와 기적으로 위기를 넘겼는데, 오늘 또 다시 관련된 위기 상황이 닥쳤습니다.

 

사라의 두 번째 위기와 하나님의 개입(1-8)

애굽에서의 위기가 재현됩니다. 아브라함의 불신 때문입니다. 그는 여전히 미숙합니다. 하마터면 자신은 물론이고 아비멜렉을 범죄하게 할 뻔했습니다. 복의 근원이요 열국의 아비가 될 아브라함이 약속의 외인이던 아비멜렉에게서 추궁과 꾸중을 듣습니다. 그는 잠시 빛이 가려진 어둠이었습니다.

1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3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4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5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6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7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8아비멜렉이 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종들을 불러 그 모든 일을 말하여 들려 주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1-8)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따라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강조점은 순전함, 특히 사라의 순전함을 보전하는 데 놓여 있습니다.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혼이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에 참여하는 것은 부패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합니다.

(1) 그랄 땅에서 닥친 사라의 두 번째 위기(1-2)

아브라함은 네게브로 이주합니다. ‘거기서’는 현재까지 아브라함이 거주해온 헤브론 지역의 마므레 상수리 나무들이 있는 곳입니다. 가데스와 술 사이의 그랄 땅에서 잠시 머물렀습니다. 사해 반도 북서쪽의 그랄 땅은 전통적으로 블레셋의 주요 거점 지역이었습니다(창세기 26:1). 아브라함은 그곳에서도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며 다녔습니다. 아마 그랄을 점유하며 살던 거친 해양 세력이 두려워서였을 것입니다.

다시 아브라함의 믿음이 쇠락한 듯 보이며, 이로 인해 그는 다시 아내를 빼앗기는 비극을 당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후궁으로 삼고자 데려간 것입니다.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앞선 12:9-20과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이유로 두 이야기를 같은 전승의 상이한 자료로 간주하지만, 같은 죄를 반복하는 인간의 본성을 볼 때 이것은 별개의 사건이 분명하며, 두 사건의 세부적 내용과 특징도 전혀 다릅니다.

씨에 대한 약속이 깨질 위기가 다시 닥쳤습니다. 앞서 우리는 과연 사라가 90세가 된 나이에도 미모를 유지했을 지에 대해 나름의 답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이방 왕이 데려간 사라에 대해서는 미모가 뛰어났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따라서 아마 아비멜렉은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 그녀를 취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라가 곧이어 21장에서 90세에 임신한 것으로 보아 늙은 사라의 몸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상당한 활력을 찾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녀의 임신이 기적적인 일임을 강조합니다. 그녀의 회춘 또한 이 관점으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그녀는 127세에 죽었습니다.

(2) 사라를 보호하시는 하나님(3-8)

‘그 밤에’는 분명 사라를 빼앗긴 당일 밤이 아닙니다. 아래서 설명하겠지만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밤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셨습니다. 그가 사라를 취한 이유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시고 사라가 남편이 있는 유부녀인 사실을 알려줍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은 사라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며 무고를 주장하면서 ‘주께서 의로운 백성을 멸하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백성’이란 표현은 멜기세덱이 이 문제가 자신 혼자만이 아닌 백성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이것은 왕의 지위는 백성의 대표로서 왕이 백성 전체와 동일시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왕과 제사장은 백성을 대표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레위기 4:3,14; 10장, 사무엘상 2:24). 율법에 의하면 유부녀와 통간한 자는 두 남녀 모두 사형에 처합니다(레위기 20:10; 신명기 22:22). 이집트와 우가릿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의 율법도 간통죄에 대해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무고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무고한 왕 자신과 백성을 멸망시킨다면, 그것은 불공정한 일이라고 항변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 부부의 거짓말을 지적합니다. 둘 다 거짓말로 자신을 속였기에 무고한 자신이 큰 죄를 지을 뻔했다고 주장합니다(5).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무고함을 아시고 그가 부지중에 범할 수 있는 죄를 꿈을 통해 막아주셨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6). 하나님께서는 꿈에서 아브라함에게로 사라를 돌려보내라고 명하시면서 그가 ‘선지자’이며, 그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만일 아브라함의 아내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멜기세덱과 그 집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난 아비멜렉은 모든 신하들을 불러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그것을 들은 신하들은 심히 두려워하였습니다(8). 아브라함이 선지자인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며(창세기 18:17),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사람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정황상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일과 하나님의 현몽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을 막아 그가 사라에게 접근할 수 없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현몽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조치를 취했음을 의미합니다. 월키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을 질병으로 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 앞서 파라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독종 피부 전염병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창세기 12:17). 아비멜렉은 질병이 발생하여 사라와 잠자리를 가질 수 없었으며, 아비멜렉의 아내뿐 아니라 수하의 모든 여종들의 태를 닫아 출산을 막으셨습니다. 그 여종들은 그의 후궁들이 아닌 궁녀들입니다. 궁내의 모든 여자들이 임신을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 역시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을 추궁하는 아비멜렉(9-13)

하나님께서는 주신 복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처럼 다시 개입하십니다. 범죄를 막으십니다. 그래서 경건한 아비멜렉을 지키시고 사라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약속한 ‘자손’의 약속(15장)도 지키십니다.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아브라함의 역할을 회복하십니다.

9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기에 네가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10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11아브라함이 이르되 이 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12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13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 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9-13)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지 추궁합니다(9). 그는 아브라함이 의도적으로 자신과 백성으로 하여금 ‘큰 죄’를 저지르게 할 뻔 했다고 의심합니다. 바로는 자신의 위안만 염려했지만, 아비멜렉은 백성까지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장하길, 아브라함은 자신이 험담하지 않은 일, 곧 간음죄를 저지르도록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10)고 따집니다. 원인을 파악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여호와라는 분을 경외하고 그 부하들도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8).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을 오판했습니다. 그는 ‘여기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아내를 취하기 위해 자신을 죽일 것을 염려했다고 변명합니다. 여기서 오히려 아비멜렉보다 아브라함이 더 부끄럽게 보입니다. 아브라함은 앞서 이집트 땅에서 이미 동일한 봉변을 당한 바 있었으면서도 어리석은 일을 반복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녀는 정말 나의 이복 누이다’라고 변명하는데 그의 말은 반은 사실이긴 하지만 아내라고 밝히지 않았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거짓말입니다(12). 훗날 레위기의 근친상간 금지 규례에서 누이는 물론 삼촌간의 결혼도 금지되며, 다만 사촌간의 결혼은 허용됩니다(레위기 18; 20장). 그러나 레위기 규례가 만들어지기 전의 족장 시대에는 그런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기에 삼촌간의 결혼은 물론 심지어 반-누이(half sister)와의 결혼도 허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일부다처제가 그랬던 것처럼 점진적인 계시의 발전 속에 하나님이 잠시 묵인하셨던 과도기적 관행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큰 선물(14-18)

아브라함은 회개 대신에 변명으로 일관한데 반해 아비멜렉은 아무 대꾸 없이 아브라함의 변명을 부끄럽게 만들 만큼 철저한 사후 처리를 합니다. 실수에 대한 보상뿐 아니라 위기를 가져온 이에게 거할 땅을 내주고, 실추된 사라의 명예까지 회복해줍니다.

14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종들을 이끌어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의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15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네가 보기에 좋은 대로 거주하라 하고 16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가리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해결되었느니라 17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출산하게 하셨으니 18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음이더라(14-18)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막대한 하사품을 주면서 사태를 수습합니다. 그는 양 떼와 소 떼, 그리고 여러 명이 남종과 여종을 선물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원하는 땅을 정해서 기거하도록(야샤브) 허락합니다. 이것은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닌 항구적 거주지로 아브라함이 원할 때까지 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원하는 땅을 주는 아비멜렉의 호의는 아브라함을 내놓은 바로와 대조됩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롯에게 원하는 땅을 선택하라 한 호의와 비견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데, 이는 그가 가나안 땅의 궁극적 상속자가 될 것을 암시합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당한 수치에 대한 일종의 배상금으로 은 천 개(아마 은 천 세겔)를 별도로 줍니다. 1세겔은 보통 11.4g으로 추정되므로 현대의 도량형으로 따지면 약 11kg의 은입니다. 이것 역시 그가 별 책임이 없음에도 자진해서 아브라함에게 과도한 호의를 베풀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여전히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임이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애굽에서의 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이방 왕들에게서 풍성한 선물을 받아 거부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요동치는 믿음과 상관없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로 아비멜렉 집의 모든 여자들의 닫혔던 태가 열려 출산을 시작했습니다(17).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25년 만에 자녀 출산을 앞두고도 시험에 자빠집니다. 성숙할 때 미숙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게까지 복이 아니라 화를 줄 수 있습니다. 그를 보면서 신앙의 경주란 연륜, 직분, 경험에 상관없이 매 순간 그리고 끝까지 전력해야 넘어지지 않고 완주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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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9-03)


소돔 성을 탈출한 이후에 롯의 생활

창세기 19장 24-38절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말씀에 따라 세상은 창조되고 있고, 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말씀은 정보가 아니라 창조하는 힘이다. 창조주의 인격입니다. 소돔의 멸망, 롯의 아내가 소금기둥이 된 일, 롯의 딸들의 행태를 말씀에 대한 태도와 연관하여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심판의 범위는 소돔과 고모라 정뿐이 아니었습니다(25). 롯이 탐내었던 주변의 넓은 목초지와 성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 땅에서 나는 모든 식물과 작물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소알도 주변 성들 중 하나였으니 롯의 간청으로 심판을 면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롯의 삶은 개선되지 않습니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24-26)

끝내 구원의 길을 외면한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의 간곡한 중보기도에도 불구하고 재가 됩니다. 정욕이 춤추는 대로 살고 '힘'과 우격다짐이면 다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 한순간에 재로 사라졌습니다. 재림의 날에 하나님을 조롱하는 세상은 모두 재로 변할 것입니다.

24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25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주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24-26)

카운트다운이 끝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심판의 버튼은 누르자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이 쏟아졌습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두 천사와 함께 계시지 않은 것이 확인됩니다. 그분은 하늘로 돌아가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분은 심판은 유황 성분으로 가득한 역청이 생산되던 지역의 지질학적 특징을 고려해볼 때, 지상이 대격변으로 인한 파국으로 이해됩니다. 대지진과 더불어 지하에 묻혀 있던 가스와 유황이 터져 나오면서 유황 성분의 역청과 뒤범벅이 되어 불이 붙은 채로 쏟아져 내렸을 것입니다. 동시에 유황이 불과 분리된 것으로 보아 불이 안 붙은 유황도 쏟아진 것으로 보입니다. 땅이 뒤집혔다는 것은 25,29절의 ‘엎으셨다’는 말에서도 암시됩니다. 원래 그 지역은 물댄 동산처럼 물이 많고 대형 목축업자 롯이 선택할 만큼 좋은 목초지였습니다. 따라서 ‘다 엎었다’는 말은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29). 그 좋았던 땅이 유황불 심판으로 뒤엎어졌으며, 그 이후 오늘날과 같은 황무지와 같은 땅이 되었습니다. 성들과 그 주변을 ‘다 엎으셨다’는 말에서 대홍수가 연상됩니다. 하늘의 물과 땅에서 나온 물이 모든 것을 뒤집어놓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하늘의 불과 땅에서 나온 유황이 모든 것을 뒤집어놓았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26). 그녀는 소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소돔에 두고 온 모든 것들이 아까웠기에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누가복음 9:6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사람이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 것은 주변이 소금 덩어리로 가득 찬 사해(염해)의 지역적 특징을 볼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아마 대격변으로 지하의 유황과 가스가 분출될 때 소금 덩어리들도 솟구치면서 롯의 아내를 덮쳤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는 아브라함(27-29)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은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롯의 아내는 이 경기를 외면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의인 롯과 함께 살았지만 그녀는 남편의 하나님보다는 타락한 소돔의 문화에 더 사로잡혀 산 것입니다. 손에 쟁기를 쥐고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누가복음 9:62). 

27아브라함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에 이르러 28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29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27-29)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가 명망한 모든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서 있던 곳’으로 다시 갔습니다. 그곳은 여호와 일행이 소돔을 내려다본 장소이자 아브라함이 여호와에게 그 성을 위해 중재를 시도한 곳입니다. 이미 그 성의 심판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해가 뜨자마자 상황을 보기 위해 그 장소로 달려간 것입니다. 이미 심판이 실행되어 소돔과 고모라 및 그 주변의 땅들에서 연기가 옹기 가마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솟고 있었습니다(2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롯을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롯을 구출해주셨다고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롯이 구원받은 이유는 다중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입어 강권적으로 붙들려 빠져나와 구출되었습니다. 동시에 여전히 부족하지만 의인으로 평가되었으며, 소돔을 떠나기로 믿음의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또한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의 결단으로 이루어집니다.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조상(30-38)

말씀하신 대로 소돔이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대로 이루지 못하실 리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의 멸망을 보면서 이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아들은 태어날 것이고, ‘후손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라’는 명령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30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31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온 세상의 도리를 따라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으니 32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3그 밤에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큰 딸이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4이튿날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어제 밤에는 내가 우리 아버지와 동침하였으니 오늘 밤에도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네가 들어가 동침하고 우리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후손을 이어가자 하고 35그 밤에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작은 딸이 일어나 아버지와 동침하니라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36롯의 두 딸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임신하고 37큰 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의 조상이요 38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었더라(30-38)

이 결론 부분은 산에 있는 굴에서 롯의 두 딸이 행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롯은 산지로 도망하는 것을 두려워해서(19장) 소알 성으로 피신했습니다(22). 그러나 이제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소알을 떠나 산지에 가서 거기에 있는 굴에 거했습니다(30).

(1) 대를 잇기 위한 두 딸의 그릇된 시도(30-35)

소알로 피신한 롯은 그곳에서 살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많은 원인이 추론될 수 있습니다. 그는 빈털터리로 빠져나온 상황이며 가축도 모두 잃었습니다. 가난한 그가 일단 주택을 마련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삼촌 아브라함이 롯과 그의 딸들을 위한 최소한의 뒷바라지를 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변 보호가 보장될 수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소돔에서 그가 성문에 앉아 있을 만큼의 영향력이 있었어도 소돔의 폭도들에게 결국 ‘이 자가’라는 말을 듣고 봉변을 당했을 만큼 주변인 신분을 넘지 못했습니다. 소알에서도 그 상황은 달라겠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결국 롯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이 그토록 가길 거부했던 산으로 올라가 동굴에서 거주합니다(30). 동굴에서의 삶은 그의 비참한 상황을 말해줍니다. 그는 가진 재산이 전혀 없기에 정상적인 거주지가 아닌 굴로 갔을 것입니다. 굴은 무덤으로 사용하거나(29:9), 아니면 도망자들이나 산적들이 기거하는 곳이었습니다(여호수아 10:16; 사무엘상 13:6;22:1).

이제 대를 이을 아들마저 없는 상황이니 그의 삶은 막을 내린 듯 보입니다. 더구나 이어지는 20장에서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아브라함이 새로운 거치를 떠나면서 롯과 완전히 결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후 롯은 독자적인 계보를 이루면서 독립된 두 민족의 지상이 됩니다. 롯의 족보와 후손들의 역사의 시발점이 현재의 사건입니다. 롯의 큰 딸은 작은 딸을 꼬드겨 자신들의 씨를 낳아 집안의 대를 이을 공모를 꾀합니다. 큰 딸은 롯도 이제 늙었고, 인생의 순리를 따라 배필을 구할 방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온 세상(땅)의 도리’는 아마 모든 사람이 거쳐 가는 필연적인 인생의 순리를 가리킬 것입니다(여호수아 23:14; 열왕기상 2:2). 순리에 따라 그들은 남자를 구해 결혼해야 하지만 ‘배필 될 사람이 이 땅에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두 말들은 소돔 성에서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처지이며, 폭도들에게 봉변을 당할 뻔했습니다. 롯과 딸들의 입장에서 그 지역에는 더 이상 믿을 남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살아남은 지역 주민들 입장에서도 빈털터리가 되어 동굴에 기거하는 가난한 롯의 딸들이자 이방 여자인 그녀들을 며느리로 삼으려 했을지 의문입니다. 결국 롯은 아들이 없어 대가 끊길 위기에 있습니다. 큰딸은 이러한 상황에서 끔찍한 음모를 꾸밉니다. 아버지가 술(포도주)에 잔뜩 취하게 해서 동침한 뒤 후손을 이어 가자고 계획한 것입니다. 그녀들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근친상간은 후대의 레위기에서 사형 및 끊어짐의 중벌과 더불어 금지됩니다(레위기 18, 20장). 거기에 가장 가까운 근친인 아버지와 딸과의 관계는 적시되어 있지 않으나, 너무 당연한 이유로 생략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당시 관례로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든 이방 민족들에게든 용인될 수 없는 반인륜적 행위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 딸은 아버지가 만취하게 만들어서 이 일을 감행합니다. 그런 근친상간은 아버지가 용인할 수 없는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 문화권에서는 대를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형사취수, 혹은 계대 결혼 제도가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이 여자의 품행을 벗어나면서까지 보아스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하는 이유는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를 잇기 위한 처절한 노력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룻기 3:1-11).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딸과의 성적 결합은 허용될 수 없었으며, 그런 방식의 대 잇기는 상상 밖의 일입니다. 두 딸의 도덕관념은 소돔과 고모라의 문화에서 영향 받았을 수 있습니다.

또한 두 딸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이 오랜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노아가 술 취한 이야기와 비교됩니다. 아버지가 술에 취했습니다. 두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죄를 범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의 미래가 결정되었습니다.

(2) 롯의 두 아들 작명(36-38)

두 딸은 각자 아들을 낳은 후 이름을 각각 ‘모압’과 ‘벤암미’로 지었습니다. ‘모압’의 이름 뜻은 ‘아버지로부터’이며, ‘벤암미’는 ‘내 백성의 아들’입니다. ‘모압’은 모압 족속의 조상이 되었고, ‘벤암미’는 암몬 족속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근친상간을 통해 그들의 후손이 된 모압과 암몬 족속은 자신들과 모든 후손의 어머니가 된 두 딸을 영웅으로 추앙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두 딸의 행위는 오히려 용기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을 오직 대를 잇기 위한 일념으로 감행한 영웅적 행위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저자 입장에서는 분명히 그들 뿌리의 부정적이고 파행적인 측면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손님들을 위해 딸들을 이용하려던 아비 롯(19:8)은 이제 자손 잇기를 위해 딸들에게 이용당하는 신세가 됩니다. 풍요를 좇아 걸어온 롯의 인생은 아내와 딸에게, 사위에게, 소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소돔의 자녀로 키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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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9-02)


멸망한 소돔에 구원 받는 롯

창세기 19장 12-23절


구원은 수동태이자 동시에 능동태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혀 이끌린다는 점에서 수동태이지만, 과거의 나로부터 떠나서 그 손을 잡는다는 점에서 능동태입니다. 수동태가 능동태를 가능하게 합니다. 소돔에게 마지막 남은 구원의 길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봅시다.

 

소돔과 고모라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되었습니다. 천사들은 롯과 그의 가족을 성 밖으로 끌어내려고 서두릅니다. 여기에는 롯과 아내, 두 딸뿐 아니라 그의 예비 사위들도 포함됩니다. 롯에게는 이미 출가한 다른 딸들도 있었을지 모르나 아들은 없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두 딸이 아버지를 통해 후대를 이어가려 한 사실에서도 드러납니다.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고 아내는 미련을 남기고 뒤를 바라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롯의 탈출을 재촉하는 천사들(12-14)

떠남만이 구원입니다. 소돔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심판을 작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간구를 기억하시고 롯의 가족을 구원하기로 하십니다. 노아의 가족들처럼 롯과 그의 딸들과 사위들에게 성 밖으로 나오라고 하십니다. 방주는 들어가야 구원 얻었지만, 소돔은 나와야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12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13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4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12-14)

여호와의 심판이 임박하자 천사들은 롯과 그의 가족들을 서둘러 피신시킵니다. 이미 그들의 죄는 유죄로 확정 판결이 되었고(18:20), 두 천사가 목격한 직접적인 증거와 더불어 원심이 확정됩니다. 율법에서 두 명의 증인의 증언은 유죄의 강력한 증거로 채택됩니다(민수기 35:30; 신명기 19:15).

그들은 롯에게 다른 가족이 또 있는지 묻습니다. 천사들은 여기에 ‘네 사위’를 포함시킵니다. 원래 딸들이 시집가면 다른 가족의 식구가 됩니다. 그러나 롯의 딸들은 현재 약혼녀 신분이기에 여전히 아버지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롯은 다른 가문 사람들인 사위들을 전혀 책임질 필요가 없었으나, 천사들은 혼약을 한 딸들을 위해 함께 탈출시키려 했습니다. 다시 한 번 소돔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되어 자신들이 내려왔고, 이제 ‘우리가 멸하리라’ 라고 최종 선고를 내립니다(13). ‘우리가 멸하리라’라는 말은 여호와와 두 천사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고 있음을 보입니다. 천사들은 최종 결정권자인 것처럼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의 대행자인 천사는 여호와 자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많은 역본들이 ‘그 성의 주민들을 향한 부르짖음’으로 의역합니다. 이것은 그 부르짖음이 소돔과 고모라의 비명이 아니라 롯과 같은 나그네와 다른 지역 사람들의 탄원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주민이 심판을 당했으므로 그들의 탄원으로 보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 가운데 학대받는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벨의 피의 울부짖음(차아크)이 하늘에 닿았습니다(창세기 4:10). 소돔은 권력자들이 민중을 수탈하고 학대하는 사회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 전체가 힘의 논리를 따라 생활했기에 책임을 면할 수 없었으며, 그들 모두가 깊숙한 부패와 타락에 연루되어 있었습니다.

롯은 재빨리 나가서 예비 사위들에게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렸습니다(14). 그러나 두 사람은 롯의 말을 농담처럼 여겼습니다. 두 남자가 결국은 소돔 사람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롯의 집에 몰려든 폭도는 아니었을 테지만, 적어도 롯을 위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방관자였으며, 그런 점에서 공범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돔의 죄를 심각히 여기지 않았으며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위들이 롯의 말을 들을 리 만무합니다. 상황은 노아 홍수 때와 동일합니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임박한 홍수를 수 없이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정신 나간 헛소리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롯의 두 딸과 약혼 관계였지만, 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딸들을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약혼 관계에서는 법적으로 혼인의 유효성은 인정되어 다른 남자에게 갈 수 없으나, 아직 여자는 아버지의 권리 하에 있었으며, 언제든 약혼이 취소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약혼녀를 쉽게 내보낸 사위들의 행동은 그들이 롯의 딸들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소돔 성을 탈출한 롯의 가족(15-17)

하나님의 이끌림이 구원입니다. 롯은 반신반의하며 여전히 소돔에 미련이 남아 ‘지체’지만, 천사들이 ‘재촉’하여 롯과 그 아내와 두 딸들을 성 밖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나태와 게으름과 안일한 삶을 떠나자고 두 손 잡아 이끄시는 자비와 용서의 손길을 붙잡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15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6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7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15-17)

밤이 지나 막 동이 트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롯을 재촉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재앙에 휩쓸려 갈 것입니다. ‘여기 있는(원문 ‘발견된’) 네 아내와 두 딸을 끌어내라’고 말하는데, ‘발견된’(찾아낸)이라는 원문을 볼 때 롯에게는 시집간 다른 딸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잠들기 전의 소동이 끝나고 새벽이 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의미합니다. 아직은 눈먼 사람들 때문에 시끄러웠을지도 모를 성읍에서 롯은 사위들을 설득하러 갔고 다른 식구를 찾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롯의 ‘지체’원인이었습니다. 롯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롯은 여전히 완전하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에게는 에덴처럼 보였던 소돔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으며, 그의 막대한 재산도 그를 주저하게 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천사들은 롯과 그의 아내, 두 딸의 손을 잡고 탈출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들고 가지 못하고 빈손으로 떠나야 했음을 의미합니다. 롯의 선택은 얼마나 허무합니까! 강한 물리력 행사를 의미하는 동사 ‘하자크’가 사용됩니다. 앞서 강제로 집으로 끌어들인 것처럼, 이제 천사들은 강제로 성 밖으로 끌어들인 것처럼, 이제 천사들은 강제로 성 밖으로 끌어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베푸신 은총과 자비였습니다(16).

그들은 롯과 그의 가족에게 급히 피신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말합니다. 뒤를 돌아보고 머뭇거려선 안 되며 산으로 도망하라고 경고합니다. 이렇듯 노아와 그의 가족처럼 롯과 그의 가족도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습니다(19).

롯이 구출된 이유는 의인을 보존해달라는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입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심판을 면할 롯의 구원은 자신의 의로움과 그의 최종적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소알 성으로 피신한 롯의 가족(18-23)

불신이 죽음입니다. 롯의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은 소돔의 멸망 소식을 ‘농담’(웃음)으로 여깁니다. 아들 주실 계획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음’으로 반응했듯이, 그들도 하나님의 계획은 우습게 여긴 채 물질적인 번영을 구가하는 소돔의 환락을 더 사랑하다가 결국 죄악 중에서 멸망하고 맙니다.

18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주의 종이 주께 은혜를 입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에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네가 말하는 그 성읍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23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18-23)

이 절박한 순간에 롯은 다시 시간을 지체합니다. 롯은 여전히 두려움에 싸여 있습니다. 이제 자신이 피할 장소를 두고 천사들과 실랑이를 벌입니다. 롯은 그들을 ‘내 주여’라고 부릅니다. 이 아도나이 (28)는 ‘존엄 (장엄) 복수’의 극존칭으로 하나님께 사용됩니다. 여호와는 지금 여기 계시지 않고 하늘에 복귀하시어 유황불을 내릴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롯은 천사를 하나님의 대행자로 깍듯이 예우하며 산이 아닌 인근 소알 성으로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산으로 가서 재앙을 만나 죽을까 염려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또다시 롯의 미숙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재앙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신입니다. 이미 천사들을 통한 그분의 보호하심을 받고 있는데도 두려워합니다. 또한 그는 도시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롯은 소알 성을 도피처로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가 말한 구실과 명분 또한 그의 어리석은 판단력과 온전치 못한 영적 분별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삼촌 아브라함과 나눌 때 자신에게 먼저 주어진 선택권을 행사할 때도 물댄 동산처럼 보이는 소돔 지역을 선택했는데, 다시 한 번 자신이 보기에 안전한 소일 성을 피난처로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현재 소일 정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뿐 아니라 인근 들판과 주거지들에도 심판의 불이 떨어진다고 예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읍을 멸하지 않겠다’는 천사의 말로 미루어 볼 때, 애초에 소알 성도 심판의 대상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21). 롯의 명분은 ‘작은 성읍이 아닙니까?’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작은 성읍에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지 않으리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작은 성읍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죄의 분량도 적어 심판이 면제될 것이라는 판단이 섰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죄는 결코 인구수와 분량의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 도덕적 측면에서는 같은 지역에 위치한 소알도 소돔과 동일한 문화권의 한패거리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롯은 소알을 선택했지만, 나중에는 반대로 소알에서도 살기를 두려워하여 결국 산으로 거처를 옮깁니다(창세기 19:30). 천사들이 롯의 간청을 받아들여 소알 땅은 보존됩니다. 여기서 소수의 의인만으로 멸망을 피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의인들은 도피시키시지만, 때로 소수를 살리기 위해 성의 심판이 유예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간이 점점 지체되는 상황에서 천사들은 롯에게 속히 소알로 도피하라고 명합니다. 롯과 가족들이 소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버튼을 누르지 못하십니다. 천사 중 한 명이 ‘내가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22).

그러나 24절은 여호와께서 하늘로부터 유황과 불을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천사들의 역할이 구분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의 말은 여호와의 말이고, 그들의 결정은 여호와의 결정입니다. 그들이 도피한 성의 원래 이름은 ‘멸망’, ‘삼킴’을 뜻하는 ‘벨라’였습니다. 처음에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지만, 심판 이후에 그 마을은 ‘작다’는 뜻의 소알로 바뀌었습니다. 롯은 해가 돋을 즈음에 소알에 도착했습니다.


천사들은 뒤를 돌아보거나 소돔 근처들에 머물지 말고 아주 멀리 있는 산으로 안전하게 피하라고 명령했지만, 롯은 가까이 있는 작은 성 소알로 피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나의 성 소알은 절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갈보리 산까지 올라가지 않고는 구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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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9-01)


소돔에 입성한 천사들

창세기 19장 1-11절


죄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냉대이며, 심판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박대입니다. 왜? 구원은 환대이며, 믿음도 환대이기 때문입니다. 극진한 대우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영접이며, 믿음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찬양을 통한 대접이기 때문입니다.

 

저녁이 되어 두 천사가 소돔에 도착했습니다. 그 자리에 여호와께서는 안 계셨습니다. 아브라함과의 흥정 이후 ‘가셨다’고 언급되어 있지만, 어디로 가셨는지는 본문이 침묵합니다. 이는 독자들에게 여호와가 심판을 행할 준비를 하고 계심을 암시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24). 롯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돌아온 후 소돔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다시 그곳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는 성문에 앉아 있다가 낯선 두 나그네를 발견하고 그들을 정중히 환대합니다.

 

두 천사를 극진히 덥대하는 롯(1-3)

‘날이 저물 때’ 두 천사는 소돔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날이 저물 듯 열적으로 어두운 그 성의 운명도 기울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18:1-8) 롯도 두 천사의 정체를 모르면서도 극진히 대접합니다. 무법천지인 소돔에서 외인들이 밤에 거리에서 경야하지 않도록 간곡하게 만류합니다.

1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2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3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1-3)

아브라함을 방문한 하늘의 세 사자(18장) 가운데 둘이 소돔으로 향했고 ‘저녁 때’ 도착합니다. 두 천사는 저녁에 소돔에 도착했습니다. 본문은 오후의 만찬을 즐긴 여호와 일행이 해가 진 뒤 소돔에 도착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확인되지 않은 소돔의 실제 위치가 어디든 헤브론에서 거기까지는 하룻길이 넘는 거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간의 흐름이 서사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롯과 소돔 성의 운명입니다.

롯은 포로로 잡혔다가 아브라함에 의해 구출된 후 소돔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그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가 그 대가를 지불할 때가 임박했습니다. 롯은 그때 소돔 성의 성문에 앉아 있다가 낯선 두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막사 입구에서 쉬고 있다가 여호와 일행을 목격한 아브라함과 대조됩니다. 당시 성문은 성의 입구로서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성문에는 문만 있지 않고 다양한 시설물들이 있었습니다. 흔히 기념석이 놓였고 몇 개의 소규모 건물들이 세워졌습니다. 또한 성문은 다양한 공적 활동이 이루어진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성의 대표자들인 원로들(장로들)이 거기에 모여 성의 제반 문제를 상의했고 공적인 집회가 열렸으며 재판이 개최되었습니다(신명기 21:18-23; 22:13-21; 룻기 4:1,11; 사무엘하 15:2). 롯이 저녁 즈음 성문에 있었다는 것은 그가 소돔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마도 14년 전 그의 삼촌 아브라함의 활약으로 소돔이 구조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9절을 보면, 그는 여전히 이방인 신분으로 소돔 사람의 진정한 식구는 되지 못한 주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롯은 비록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계속 보여 앉지만, 도덕적,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그들과는 어울리지 못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먼저 두 천사를 성문에서 보고 집으로 초청했지만, 다른 사람들도 분명 낯선 그들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중에 소돔 사람들이 모두 롯의 집으로 몰려든 것입니다. 롯은 그들을 정중히 영접하면서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집으로 와서 발을 씻고 하룻밤을 지내고 갈 것을 제안합니다.

앞서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에게 보였던 예법을 롯이 반복합니다. 나그네에 대한 이러한 극진한 대접은 낭시 교양과 덕목을 갖춘 사람들의 관행이었을 것입니다. 이로써 롯 역시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고 있습니다. 롯의 대접이 훨씬 간략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이것은 단지 아브라함 때에 상세히 묘사했기에 지루한 반복을 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롯의 예의 바른 태도는 그들을 겁탈하려 한 소돔 성 사람들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롯의 초청을 거절하면서 거리에서 밤을 지내겠다고 말합니다(2). 이는 당시 예법상 매우 무례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롯의 제안을 받지 않은 것은 자신들 때문에 롯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롯은 그들을 간청해서 집으로 들였습니다. 간청을 뜻하는 동사 ‘파차르’는 9절에서 폭도들이 롯의 집을 밀고 들어올 때도 사용됩니다. 이것은 롯이 뒤에서 그들을 떠밀어서 집에 들여보냈음을 암시합니다. 롯의 입장에서 나그네를 밖에서 재우는 행위는 비난받을 일이었기에 그들을 설득했을 수 있었습니다. 롯이 볼 때 소돔 성은 폭력의 도시였기에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아침 일찍’ 떠나라고 한 것을 보아 롯은 나그네들을 위험한 도시로부터 보호하려 했을 것입니다(참조. 사사기 19:18-20). 롯의 간청에 못 이긴 그들은 환대를 받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처럼 빠르고 정성스럽게 식탁을 준비하는데, 아브라함 때처럼 그것은 ‘연회’라 불릴 만큼 성대한 만찬이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의 집단적 범죄(4-8)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 막론하고 사방에서 몰려와 두 천사를 에워싼 것을 보면 소돔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손님들을 보호하려고 이미 정혼한 두 딸을 성난 폭군들에게 내주겠다는 롯의 제안은, 롯 역시 얼마나 소돔의 가치관에 물들었는지 보여줍니다.

4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6롯이 문 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8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4-8)

그날 밤 만찬을 마치고 잠들기 전 모든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몰려들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모든 연령층(‘노소를 막론’)과 거주지 모든 곳에서(‘원근에서’) 모든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말합니다. 물론 문학적 과장일 것이나 모인 사람들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였다는 뜻이며, 사실상 거기에 오지 않은 소돔 사람들도 모두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여기엔 심지어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협상에서 하나님의 협상 거부가 옮았음을 증거합니다(창세기 18:16-33). 소돔 성 주민 모두가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롯을 불러내 손님들을 내보내라고 요구하면서 그들을 강간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힙니다. 물론 소수가 난동을 벌였고 나머지는 구경꾼이었을 것입니다. 폭력과 겁탈의 현장을 구경하자고 아이돌과 늙은이까지 몰려들었습니다. 결국 그들도 모두 이 범죄의 가담자들일 뿐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들 모두가 눈멀게 된 것을 볼 때 분명해집니다. 놀랍게도 동성 겁탈을 시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소돔은 동성애 자체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동성이든 이성이든 문란한 성적 이탈과 성폭력이 문제의 핵심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폭도들이 여자는 거절하고(롯의 두 딸) 남자만을 원했던 것을 볼 때 그들의 극단적인 성적 일탈을 본문은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는 신구약에서 일관되게 분명 극악한 죄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으며, 유다서는 소돔의 동성애를 근원적 죄로 지목하고 있습니다(레위기 18:22; 20:13; 로마서 1:26-27; 유다서 1:7). 그러나 이웃 나라들은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느슨했으며 문화권에 따라 쌍방이 합의할 경우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는 동성애 자체도 문제지만 집단 강간의 시도가 더욱 큰 문제였습니다(사사기 19장).

롯은 문 밖으로 나가 문을 굳게 닫은 뒤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면서 그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설득합니다. 롯은 그들의 행위를 ‘악’으로 규정합니다. 롯은 기본적으로 신앙에 입각하여 그들과 다른 도덕적 표준을 따라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롯의 제안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그는 아직 처녀인 두 딸을 내놓을 테니 나그네들을 건들지 말라고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두 딸은 약혼을 한 상태였기에 롯에게는 두 사위가 있었습니다. 약혼도 당시에는 법적으로 결혼을 한 지위로 미리 인정받았습니다. 훗날 율법은 약혼한 여자를 겁탈하는 자는 투석형으로 죽이도록 명령합니다(신명기 22:23-27).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도 약혼한 딸들을 겁탈당하도록 내놓는 행위는 극악한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롯은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 딸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딸과 손님 중 누가 더 가치 있습니까?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가족보다 우선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명예와 수치가 중요한 가치였던 고대 근동의 문화권에서는 가족을 우선시하고 귀한 손님을 희생시키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었을 수 있습니다. 혹은 롯은 어차피 모두의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타협적 선택을 했을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을 내놓는다면, 남은 가족과 손님들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롯은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결국 롯이 소돔 성을 선택한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롯의 가정을 보호하는 두 천사(9-11)

짐승처럼 욕망에 이끌려 ‘힘’을 믿으며 사는 영적 소경들의 눈을 어둡게 하십니다. 그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그냥 두십니다. 눈이 어두워졌는데도 정욕을 끄지 못해 롯의 문을 찾기 위해 안달하는 모습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날이 될 때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행한 대로 행하실 것입니다.

9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10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11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9-11)

폭도들은 롯의 제안을 거절하였으며, 도리어 롯이 건방지다면서 으름장을 놓습니다. ‘이 자가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에서 사용된 동사 ‘샤파트’는 ‘재판하다’라는 사법적인 의미 이상으로 정치적인 실력 행사를 의미합니다. 이들의 발언을 보면 롯이 소돔에서 나그네 신세에 그쳤고 주변인에 머물러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14년 전 롯의 삼촌 아브라함에게 입은 큰 은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폭도들이 문을 부수며 들어오려 하자 두 천사는 급히 롯을 집으로 끌어들인 후 문을 닫았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자 하나님께서 방주 문을 닫으셨듯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인 후 천사들이 롯의 집 문을 닫습니다. 천사들은 군중의 눈을 멀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눈먼 상태인 ‘산붸림’의 추정되는 어원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강렬한 빛에 눈이 부셔서 앞이 안 보이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무리는 대소를 막론하고’ 눈이 멀었으며 문을 찾기 위해 우왕좌왕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모두가 이 범죄에 가담한 공범임이 드러납니다.


롯은 재판하는 자리에 앉을 만큼 어엿한 소돔 시민이 되었지만, 소돔인들에게는 여전히 ‘잠시 우거하는’ 외인일 뿐이었습니다. 소돔은 롯을 냉대하였습니다. 약속의 사람 아브라함을 떠나 물질적인 풍요를 선택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축복과 세상의 인정을 모두 얻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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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8-02)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한 아브라함

창세기 18장 16-33절


 한 나라가 복된 나라가 되고 한 사람이 복되게 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들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생명이 타인에게 전달되어 누리게 하려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 나라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해야 합니까?

  

여호와 일행은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 소돔 성으로 향합니다. 여호와의 소돔 성 방문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들린 큰 울부짖음 때문입니다(20). 두 성의 죄악은 심각했고 부르짖음은 하늘을 찔렸습니다. 이것은 폭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하늘을 향한 탄원입니다. 아벨의 피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창세기 4:10). 소돔은 권력자들과 힘 있는 자들이 민중을 수탈하고 학대하는 사회였을 것입니다.

 

소돔으로 떠나는 여호와 일행(16-19)

참여하는 나라 두 천사가 소돔으로 향하면서 아브라함에게 그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실 복과 소돔과 고모라에 임할 심판을 알게 하십니다. 소돔을 복되게 하도록 부름 받았으니 기도로든 행동으로든 그 무엇이든 그 나라의 운명을 알고 참여해야 합니다.

16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16-19)

아브라함의 성대한 접대를 받은 여호와 일행은 목적지를 향해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행선지는 소돔 성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떠나다가 전망이 트인 어떤 장소에서 소돔 성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소돔으로 향하고’는 약간의 오역으로 ‘소돔을 내려다보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지리적으로도 옳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헤브론 지역은 상당히 고지대인 반면에 사해 일대의 소돔과 고모라는 해수면 아래의 매우 낮은 저지대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그 장소까지 여호와 일행과 동행했습니다.

17-19절은 소돔을 내려다보던 여호와와 두 천사 간의 대화입니다. 거기엔 아브라함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17절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를 대화가 아닌 여호와의 생각, 즉 독백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셨다.’ (Waltke; Wenham).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천사들과 대화 중이셨습니다. 마치 천상의 어전 회의를 연상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17). 아브라함도 그 즉흥적인 어전 회의에 참여하여 천사들과 함께 자신을 향한 여호와의 계획을 듣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이미 12:1-4에서 아브라함에게 공언했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큰 나라/민족이 될 것이며, 열국이 그를 통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전치사 보()가 흔하게 ‘~에 의해’(by)를 의미하므로, 이것은 앞서 12:2에서 ‘너는 복이 될지라’의 의미에 대한 근거를 제공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브라함이 열국으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한다는 뜻의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로 해석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이 아브라함을 택하였는지 설명해주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신뿐 아니라 그가 후손들을 잘 가르쳐 그분의 도를 지키고 의와 공의를 실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공언한 약속을 모두 실행하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후손들을 잘 가르쳐야 하고 후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순종하여 그분의 계획이 자신들을 통해 실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동사 ‘야다’의 사용은 여호와와 아브라함의 친숙한 관계를 잘 표현합니다. 우리말의 개념을 사용하자면, ‘내가 그와 안면을 텄다.’ 정도의 의미일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여호와의 탐문(20-21)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반드시 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동시에 천하 만민을 복되게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자면 먼저 그 나라가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살아 있는 나라입니다. 분열과 이기심이 들어설 수 없는 나라여야 합니다.

20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20-21)

앞선 말이 여호와의 독백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동석한 자리에서 천사들과 대화를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현재의 구절들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왜 소돔 성으로 가는지를 아브라함에게 밝힙니다. 물론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향한 계획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추론되고 또한 이 여행의 목적을 알고 있기에 이 대화는 아브라함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이 소돔에 내려가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리는 아우성 소리가 과연 그들이 행한 일 때문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성읍과 탑을 보려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장면과 유사합니다(창세기 11:5).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상황을 몰라서 하는 행동일 리 없습니다. ‘알아보기 위해 내려왔다’는 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재판 순서를 따르는 수사학적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제 소돔을 심판하러 가십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우리가 내려가자’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내가 이제 내려가서 … 보고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호와가 두 천사를 소돔에 보내시고, 자신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하며 현재의 장소에 머무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어전 회의라는 신적 협의체에서의 의견 제시가 아니라 일방적인 자기 결정권 행사임을 다시 한 번 확증합니다.

 

아브라함의 중재와 탄원(22-33)

선지자 아브라함(20:7)은 심판이 임박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하여 기도합니다. 죄를 묵인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자들 때문에 의로운 자들이 멸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다섯 번이나 의인의 수를 줄여가며 구원을 호소합니다. 참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긍휼을 구합니다.

22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0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1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2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22-33)

여호와께서 수행하던 두 천사를 소돔으로 보내시고 자신은 아브라함과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함께 행동하던 여호와 일행이 여기서 나뉩니다. 앞서 독자들은 세 명의 여호와 일행의 역할이 계속 뒤바뀌기에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세 사람 모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대표자 한명 여호와께서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순되어 보이는 장면은 여기에서만이 아닌 구약의 다른 곳들에서도 반복됩니다(창세기 19:17-18; 21:17; 사사기 6:7-24; 사사기 13장). 따라서 이것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신비로운 임재와 성육신의 특징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독대하게 된 아브라함은 비로소 모든 상황을 간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탄원하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해 중재를 시도합니다. 그 과정은 마치 협상 테이블의 홍정과 비슷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에녹과 노아를 조상으로 둔 의인의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 노아가 타락한 세상을 구하여 보존하려 애를 쓰다 마침내 방주를 지어 세상의 보존자가 되었던 것처럼, 그는 소돔을 보존하려고 주재를 시도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반드시 보존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신적 인과응보, 말하자면, 의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으며 순종하면 축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도식은 구약에 깔려 있는 기본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시더라도 의인들과 회개하는 자들을 신판에서 제외하십니다. 이방 여자 기생 라합이 구원을 받았고(여호수아 6:22-25), 하나님의 진멸을 두려워해 이스라엘 군대에게 거짓 투항한 기브온 백성은 생명을 보존했습니다(여호수아 9장). 요나의 설교를 통해 회개한 니느웨 성 주민들도 심판을 모면했습니다(요나 3:4-10). 아브라함은 공의의 하나님이 의인과 함께 심판을 행하여 멸망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졌습니다. 과연 심판을 행하는 하나님께서는 부당합니까? 아브라함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함께 멸망시킬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는 소돔에 50명의 의인이 있다면 소돔을 용서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왜 50명으로 시작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당시 작은 마을의 인구수가 100명이었거나, 군인이 100명 정도였기에 그 절반을 가지고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돔 성은 왕이 있는 도시 국가이자 가나안의 맹주로서 대단히 큰 성이었습니다. 발굴된 여리고 성의 규모로 볼 때 성내에 약 삼천 명의 주민이 살았을 것으로 추론되며, 성 주변에도 군락을 이루며 산 주민의 수는 몇천 명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50명은 아브라함이 소돔 성내 의인의 최소 숫자로 생각하고 안전하게 제안한 숫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50명이 그 성내에 있다면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답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 있게 협상을 시작했으나(23-25) 점점 자신감을 잃으면서 주저하는 질문으로 마칩니다(31-32). 아브라함이 제시하는 의인의 숫자는 45명에서 40명으로, 30명에서 20명으로, 마침내 열 명까지 내려갑니다. 협상은 열 명에서 멈추고 아브라함은 입을 다뭅니다. 그는 차마 다섯 명이나 그 이하까지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롯과 그의 가족을 고려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롯마저도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취급하신다는 확신이 없기에 홍정을 단념했을 수 있습니다.

소돔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혹은 아브라함은 극소수의 의인은 극도로 썩은 사회의 심판을 면하게 해달라고 요구할 명분으로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의인이 몇 명이든 이제 그분이 결정하실 일이며, 소돔은 심판을 받아도 할 말 없는 타락한 성읍이 분명했습니다. 다만 소돔에서 롯과 두 딸만이 구원을 얻는데, 성경은 롯이 의인이었다고 평가합니다(베드로후서 2:6-8; 참조. 창세기 19:12-13). 소돔의 극악한 죄로 인해 아브라함의 중재가 실패로 돌아갔고, 대화를 마친 후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여호와는 하늘로 복귀하셨고, 아브라함은 막사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강한 것은 남을 굴복시키는 힘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며, 정의와 공의의 나라이며, 긍휼과 자비의 나라입니다. 섬김과 나눔의 나라입니다. 그런 데서만 하나 됨과 샬롬과 안식이 나옵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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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8-01)

 


여호와를 대접한 아브라함

창세기 18장 1-15절


그리스도인들을 말할 때 적절한 표현 중에 ‘환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특히 조건 없는 환대는 사랑의 절정입니다. 하나님 환대와 이웃 환대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환대는 그분을 향한 신뢰, 특별히 창조의 능력에 대한 신뢰이며, 이웃 사랑을 손대접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을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이야기는 낯선 남자 셋이 아브라함의 마므레 상수리 나무 거주지를 방문한 것으로 전개되지만, 창세기 저자는 그들의 등장이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나탄 것임을 미리 알려줍니다. 이것은 꿈과 완상 속의 현시가 아닌 직접적인 만남을 위한 현시였습니다. 두 천사를 동반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시어 사라의 임박한 출산을 예고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여호와(1-5)

아브라함은 100세인데도 ‘장막 문에서 뛰어나가’(2) 여행객을 초대합니다. 객들의 정체도 모르면서도 가장 귀한 손님 초대하여 몸과 마음이 기운을 차리도록 객들에게 성심껏 쉼과 물과 음식을 제공합니다. 객과 주인이 바뀐 듯 아브라함은 참으로 이타적이고 순수하게 섬깁니다.

1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2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3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4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에서 쉬소서 5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1-5)

여호와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꿈과 환상 속의 방문이 아닌 몸을 입은 직접적인 방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나무들 근처를 거주지로 삼아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힘든 오전 일과를 마치고 막사 앞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었을 것입니다(참조, 4). 그곳 전통에 의하면, 정오의 시간은 노동자들이 일을 멈추고 쉬는 시간이며 여행객들도 쉴 곳을 찾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늘 그랬듯이 낮잠을 자려고 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야에 낯선 사람 셋이서 있는 것이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달려 나간 것은 그가 갑자기 방문객을 발견했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막사로 오는 중이 아니라 이미 도착해서 아브라함의 마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가능한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 돌연한 출현은 그들이 범상한 존재가 아님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아브라함이 잠을 청하려고 누워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발견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잠이 들지 않았으니 그들이 오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을 리는 없습니다. 즉시 달려가서 영접하고 엎드려 인사합니다. 아브라함의 태도는 아브라함과 같은 영웅마저 소홀히 영접한 소돔 왕과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이 낯선 이들까지도 최선을 다해 맞이 하였음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맞은 나그네 셋 중 둘은 여호와의 천사이며, 하나는 여호와이십니다(3,10,13-15).

그는 자신이 ‘은혜를 입었으면’ 막사에 머물다 갈 것을 간청합니다. 이것은 방문객들에게 막사가 마음에 든다면 쉬어 가라는 초청입니다. 아브라함은 셋 중 한 명을 ‘내 주여’라고 부릅니다. 이는 복수가 사용된 극존칭으로 일반적 존칭 ‘내 주’와 다릅니다(12절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단수 ‘내 주인’이라 부른다). 그는 세 사람의 대표인데, 독자는 그가 여호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이 부담 갖지 않도록 간편한 편의만을 제공해드리겠다고 말합니다(3-4).

물을 ‘조금’ 가져올 테니 씻고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라고 간청하며, 음식을 ‘조금’ 가져올 테니 허기를 달래 기운을 회복하라고 말합니다. 정오의 뜨거운 햇볕에 지친 나그네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들을 대접한 아브라함(6-8)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낳을 확정적인 때를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기다린 지 25년만입니다. 하지만 자식이 없을 때는 시기하고 불평하던 사라가 자식이 생긴다는 말에는 불신의 미소로 반응합니다. 오랜 불임과 끊어진 생리를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크게 본 것입니다.

6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7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8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6-8)

아브라함은 급히 막사로 돌아가 사라에게 빨리 음식을 준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가 요청한 요리들은 그 양이 막대했습니다. 밀가루 세 스아는 무려 24리터이므로, 이것을 반죽해서 요리하면 대단히 많은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보통 밀가루 한 포대가 20kg인데, 약 100인분 정도 만들 수 있으며, 다른 재료를 섞으면 최대 200인분까지 면 요리가 가능한 양입니다. 이 빵은 급히 준비하라고 했으니 무교병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유교병은 반죽을 며칠간 누룩으로 숙성시키기 때문입니다. 고기 요리의 양 또한 막대합니다. 하인을 시켜 육질이 좋은 살진 소를 잡습니다. 만일 400kg 소 한 마리를 잡으면 정육만 160kg이 나오는데, 1인분 200g을 기준으로 거의 800인분의 고기가 나옵니다. 그 외 내장과 꼬리까지 포함하면 거의 1,000인분에 이르는데, 1인분을 400g으로 늘려도 500명이 먹을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마을 잔치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이 준비한 식사는 그가 거느린 모든 식솔들도 참여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더구나 소를 잡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살진 소는 보통 큰 잔치를 위해 잡습니다. 온 마을과 집안의 큰 잔치를 벌일 때 소를 잡았으며 몇몇 친구들과의 잔치를 위해 염소를 잡는 것도 특별한 일이었습니다(누가복음 15:27 이하). 아브라함은 소화를 돕는 것으로 알려진 발효유(엉긴 젖)와 우유도 준비했습니다. 그는 나그네들을 왕처럼 융숭히 대접하면서 연회 급 식탁을 준비한 것입니다. ‘조금’의 물과 음식이 아닌 큰 식사였습니다. 세 방문객은 나무 아래서 그 풍성한 음식을 먹었다. 아브라함은 인색한 소돔 왕과 대조되며 예루살렘 왕 멜기세덱 이상으로 친절하고 정중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말 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브리서 13:2)

 

임박한 이사 탄생과 사라의 웃음(9-15)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웃음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라는 말로 응수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 붙임은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분께는 창조의 조건일 뿐이고, 우리에게는 믿음의 조건일 뿐입니다.

9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9-15)

하나님께서는 이미 17:19에서 이삭 탄생을 통보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두 천사와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온 여호와께서 이삭의 탄생을 확정하십니다. 그들은 막사 밖에, 사라는 막사 안에 있었습니다. 외간 남자가 방문할 때 아내는 방 안에 머무는 것이 당시의 관례입니다. 천사 등은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9).

아브라함은 막사 안에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사실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이미 사라가 어디 있는지 아시고, 또한 여인들이 막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손님들이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을 사라로 부를 때, 아브라함은 그들이 범상한 사람들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여호와는 내년에 다시 아브라함을 방문할 것인데, 그때 사라에게는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라는 이들의 대화를 막사 안쪽 입구에서 엿듣고 있었습니다. 사라가 1년 후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통보는 그들이 여호와의 사자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는 연로했으며, 특히 사라는 생리가 끝난 노년기의 여성이었습니다. 물론 서사는 사라가 65세였을 때 여전히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미모를 유지했습니다. 더 놀랍게도 이 일 직후에 그랄 땅에서 비슷한 사건이 반복되었을 때도(20장) 90세의 나이였는데, 아브라함은 다시 아내를 빼앗깁니다(창세기 20장). 창세기 저자가 사라의 생식 기능은 끝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매우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20장에서 재차 이방 왕이 데려간 사라에 대해서는 미모가 뛰어났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어쩌면 사라가 21장에서 임신을 한 것으로 보아, 90세의 사라의 여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잠시 회복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라는 자신이 이미 늙었고 남편 또한 노쇠하여 더 이상 즐거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즐거움’이란 성적인 기쁨이나 성욕을 가리킬 것입니다. 사라의 나이가 90세라는 것은 앞서 17:17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리 내어 웃었지만(17:17-18)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사라는 감정을 숨겼는데, 그녀의 웃음은 거의 비웃음에 가까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웃음을 표현한 동사(이초하크)는 그대로 이삭(이츠하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사라의 비웃음도(티츠하크; 기녀가 웃었다)이삭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었지만, 그녀의 웃음은 매우 냉소적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와 그의 사자들은 그녀의 비아냥거림을 벌하거나 질책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랜 세월 그 약속을 기다렸고, 이 일로 하갈과의 갈등을 빚어 큰 상처를 입었으며 오랫동안 낙심하며 실망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어떤 나그네들의 수태고지를, 비록 그들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해도, 아무런 의심 없이 마냥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 정상이었습니까? 그녀의 반응은 분명히 불신앙적 태도이지만,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믿음의 잣대로 오랜 고통을 겪는 한 인생의 상황과 형편을 함부로 예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웃었다는 것을 드러내며 더욱 강하게 내년에 아들이 태어난다고 확증합니다. 여호와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 이 일을 그분이 행하실 것입니다. 이 순간 사라는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이시고 여호와의 사자들이 자신의 집을 방문 중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자신이 웃지 않았다고 둘러댑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웃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다시 한 번 그녀의 마음까지 꿰뚫고 계심을 확증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서사자도 여호와의 사자도 별다른 책망을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까지 읽은 그 방문객이 여호와이심을 깨닫고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얼떨결에 자신의 말을 부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창조의 조건은 우리에게 믿음의 조건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과 이스라엘을 통해 자녀 문제를 속히 이루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안 걸음씩 가르쳐주시면서 지금껏 25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아들’ 탄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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