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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9-02)


 가나안에 대한 저주

창세기 9장 18-29절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복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인간은 존재의 무의미를 느끼는 순간 절망하기에, 존재의 충만한 가운데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의미 있는 생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후회 속에 생을 마치지 않고 만족할 만한 인생이 되지 위해 필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 아들로부터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과 여덟이었지만,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사방에 퍼졌다는 것은 번성의 축복과 명령의 성취입니다. 세 아들에게 어쩌면 각자 어린 자녀들이 있었는데, 승선 명단에서 무시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이 모두 연루된 커다란 사건입니다.

 

포도주에 취한 노아(18-21)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비난하는 데 함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의롭다 칭함 받은 노아와 그 자녀들의 삶은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우리의 본성적 죄악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주님의 덮어 주시는 은혜만을 간구하게 합니다.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18-21)

방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함이 가나안의 아버지라는 점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온 세상의 백성들이 생겨납니다. 셈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의 본적인 셈족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이름은 앞서 반복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5:32; 6:10; 7:13). 여기서 그들의 이름 뜻을 살펴보는 것은 그들의 미래와 관련하여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함’에 대한 별도의 논평을 주목해야 합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로 소개됩니다. 이것은 의미 없는 논평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 아들에게서 이제 인류가 퍼집니다. 이것은 노아에게 주신 축복과 명령의 성취입니다.

노아는 최초로 포도 농사를 시작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20). 그가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는 것은 포도 열매의 제조도 그가 시작했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먹거리를 위한 단순한 농사가 아닌 삶의 즐거움을 주는 기호식품을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원문에 따르면, ‘땅의 사람 노아가’인데 노아에게 ‘땅의 사람’이라는 특이한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땅의 저주로부터 사람을 위로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 라멕의 바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노아의 포도 수확은 3장의 땅의 저주가 풀릴 것이라는 8:21의 성취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8:21에서 설명한 대로, 그 ‘저주’는 3장의 땅의 저주가 아니라 홍수 심판에 의한 생명의 멸절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저주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3장의 땅의 저주는 풀리지 않았으며 여전히 유효합니다. 노아는 최초의 포도 재배자이면서 포도주 제조 기술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막사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채 벌거벗고 잠들었습니다. 언뜻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지만 취하지 않은 채 잠들었을 뿐이라고 해석하지만, 본문은 명백하게 ‘노아가 술에서 깼다’고 진술합니다(9:24). 범죄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명백히 노아의 술주정이며 하체를 드러낸 행위는 구약 전반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풍성한 포도주는 축복이 분명했지만(창세기 19:31-35; 27:28; 49:11; 신명기 14:23; 사사기 9:13; 시편 104:15; 전도서 10:19; 요엘 3:18) 과음으로 인한 술 취함은 중대한 범죄였습니다(사무엘상 1:14; 잠언 20:1; 23:31; 이사야 28:7). 노아의 만취는 그저 노아 역시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노아는 새로운 인류지만 여전히 아담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당혹스러운 방종과 만취를 이상하게 볼 것은 아닙니다.

  

함의 범죄와 셈과 야벳의 선행(22-23)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했을 삶이었을 텐데도, 먹고 마시며 깨닫지 못했던 홍수 전 사람들의 모습으로 점점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무서운 심판과 큰 은혜를 경험하고도 인간은 이렇게 늘 깨어 있기가 어렵니다.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망각한 채 세상일에만 취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입혀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성령에 취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2-23)

함은 만취한 채 벌거벗고 잠든 아버지의 하체를 목격했습니다. 여기서도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 함’으로 언급됩니다. 본문은 왜 노아가 술에 취해 하체를 노출하며 수면을 취하게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노아의 방종보다는 함의 행동에 있습니다.

술 취함과 하체 노출은 노아의 실수일 수 있지만, 함의 행동은 실수로 볼 수 없는 큰 범죄입니다. 부모 공경은 자녀의 의무이며 십계명의 제4계명에도 명시될 만큼 중요합니다. 어떤 우가릿 문헌에 의하면, 아버지가 술 취했을 때 아들은 아버지를 부축해서 데려가 잘 쉬도록 편한 곳에 모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감추어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함의 행동은 정말 패륜적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하체(‘벌거벗음’)를 보았습니다. ‘벌거벗음’은 성기 노출에 대한 완곡어법입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을 두고 과도한 추론적 해석이 난무했습니다. 어떤 랍비들과 해석가들은 여기서 함이 아버지와 동성의 근친상간을 시도했다는 지나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월키는 함의 일차적인 문제가 ‘그가 보았다’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범죄의 본질은 ‘호색적 관음증’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히브리어 ‘라아’는 단순한 목격이 아닌 관찰 행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본문의 간략한 보고에서 지나친 추론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결과로 보입니다. 본문은 아주 단순하게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우연히 목격한 뒤 그 막사에 형제들을 구경꾼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함의 행동은 중대한 범죄입니다. 이것은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는 신중한 행동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둘은 덮고 잘 수 있는 겉옷을 준비해서 어깨에 멘 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뒷걸음쳐서 아버지의 막사에 들어갑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24-29)

당신은 누군가의 험담을 듣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소문을 확인하려는 호기심보다 당사자의 명예와 영혼을 더 걱정해 주고 있습니까? 셈과 애벳은 옷을 가져다가 아비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뒷걸음쳐 들어감으로써 자신들부터 그 수치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24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24-29)

노아는 술에서 깬 뒤 어떤 이유로 작은 아들(아마 막내 아들)이 저지른 행동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여기서 왜 함의 잘못으로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세 아들에 대한 축복과 저주는 결국 그들의 후손들에 대한 것이기에 함 대신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함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10:6) 함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그들 중에서 유독 가나안에게 그 저주가 선언되는 것은 분명 불공평해 보이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필자의 견해로 볼 때는 함에게 붙은 특이한 수식어 ‘가나안의 아버지 (함)’에 모종의 암시가 깃들어 있는 듯합니다. 유독 아들 가나안이 함에게 수식어로 붙어 다니는 것을 볼 때, 가나안은 이미 배은망덕한 패륜적 행동을 일삼는 아들이었지 않을까 추론해봅니다. 이러한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는 뱀에 대한 저주(3:14) 및 가인에 대한 저주(4:11)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의 내용은 그가 ‘그의 형제들의 가장 낮은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수 ‘형제’가 아닌 복수 ‘형제들’이므로 여기에는 셈과 야벳 둘 다 해당합니다. 26절 마지막의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역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의 원문도 ‘가나안은 그들에게 종이 되고’입니다. 이것은 27b절에서 세 번째로 확인되는데, ‘가나안은 그의 중에 되기를’도 마찬가지로 수정이 요구됩니다.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되기를’, 결국 가나안은 심지 야벳 둘 다의 종이 될 운명으로 전락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26절에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선택된 계열인 셈이 재차 확인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셈의 계보를 선택하시고 뱀을 짓밝으신다는 최초의 암시입니다(창세기 3:15; 4:26). 27절의 해석은 난해합니다. 우선 야벳의 창대함은 물질적 풍요보다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인구가 크게 번성한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야벳의 후손은 주로 아나톨리아와 그리스에서 확산했습니다(창 10:2-5을 보라).

이어지는 어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는 오역이므로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합니다. ‘그는 셈의 장막들에 거할지어다’. 문제는 여기서 ‘그’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는 야벳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유대 문헌과 해석가들은(예. Kaizer)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역본들과 학자들은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은 그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 동거했던 역사적 사례들을 찾아내려 애를 썼으며 다양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제안된 그 어떤 사례도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필자는 첫 번째 견해를 따라 하나님이 주어인 것으로 봅니다. 이 경우 언제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였는지 방대한 역사적 추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성막/성전을 통해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재하셔서 그들의 장막에 함께하셨습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셈과 야벳의 종으로 전락하는데, 이것을 근거로 과거 흑인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흑인 저주론은 전적인 신학적 왜곡입니다. 함의 네 아들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중에 아프리카 민족은 구스와 미스라임, 붓에 해당될 뿐, 가나안과 흑인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나안이 셈의 노예가 된 것은 구약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여호수아 15:63; 17:13; 열왕기상 9:21).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우리 생은 하나님 앞에 복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과 부르심을 따라 자기 생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와 주변 세계를 현상이 아닌 믿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복 주는 자이며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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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9-01)


노아와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

창세기 9장 1-17절


하나님 말씀이 생명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행하시며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삶을 구성하고, 질서를 만들어내며, 삶을 규정하고 창조하는 능력 자체입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책임에 귀속하시는 위대한 은혜입니다. 언약 백성인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홍수 후의 세계는 재창조된 세계이고 노아는 새로운 아담입니다. 아담에게 부여된 명령이 이제 노아에게 부여됩니다. 이것은 땅을 쟁기질해서 뒤엎은 뒤 새로운 씨앗을 심는 것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홍수가 물러가고 질서 잡힌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으며, 그 밭에 노아와 생존한 생명의 씨앗들이 심깁니다. 그들의 생육과 번성을 통해 다시 지구는 생명으로 채워질 것이며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될 것입니다.

 

인간의 재 번성 명령(1-3)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은혜로 죄를 이기시고 악을 다스리십니다. 악한 세상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처럼 행하는 것뿐입니다. 인간은 또 실패하겠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와 함께 다시 은혜 언약을 맺으십니다. 인류는 하나님께 두 번째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3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1-3)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에게도 다시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1-7절은 창세기 1:28-29의 반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인간에게 복을 주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재차 내리십니다. 이러한 명령은 노아 홍수의 심판을 통해 부패한 세상이 전면적으로 뒤집히고 하나님의 둘째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육식이 공식적으로 허용되고 피 섭취가 금지되며 피의 살육을 한 당사자는 그 피값을 치르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생태계의 변화와 함께 육식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목축을 전문적으로 시작하고 제사를 드렸으며, 정-부정 동물이 노아 이전에 이미 구분되고 있었다는 것은 또한 먹을 수 있는 짐승이 원시적 규범으로 나뉘어 있었음을 시사 합니다. 짐승들은 인간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2). 타락 전에 동물은 인간의 통제 하에, 서로 완벽한 교감 속에 공존했습니다. 인간과 짐승 모두에게 채식만이 허용되었기에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인간과 동물과 자연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특히 짐승은 이때부터 만물의 지배권을 지닌 인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2절의 진술은 홍수 이전에는 인간과 짐승이 평화로운 공존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아마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죄가 우주에 들어와 창조 세계에 문제가 생겼고, 아마 동식물의 유전적 변화도 발생하여 육식 동물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때 여전히 인간은 짐승보다 우월했기에 난폭한 짐승마저 통제할 수 있었으며, 짐승은 인간을 언제나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홍수 이후에는 이러한 생태계 질서가 더욱 확고해집니다. 노아의 후손인 새로운 인류는 더욱 강하게 자연계와 동물계를 통제하는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합니다. 육식은 공식화됩니다(3). ‘동물’로 번역된 ‘레메쉬’은 호흡을 하며 움직이는 생물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육식의 허락은, 훗날 율법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는 바와 같이(레위기 7:15; 신명기 14:21; 에스겔 4:14), 자연사나 물어 뜯겨 죽은 짐승처럼 이미 죽은 짐승의 사체는 먹어선 안 된다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도살해서 죽인 짐승은 문제가 없습니다. 육식의 허용이 ‘동물’로 총괄되므로 정-부정 짐승의 구분이 없습니다.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육식의 허용일 수 있습니다. 노아의 후손인 인류는 아무 짐승이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황상 선택된 계열로 이어지는 노아의 가계는 노아 이전의 택자의 가계가 그랬던 것처럼 정결한 짐승을 먹었을 것입니다.

 

피 섭취 금지와 피 흘림에 대한 징벌(4-7)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사랑해야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앞에 민감하게 살아야겠습니다.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언약으로 그리고 무지개로 확인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4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5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7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4-7)

노아의 새로운 시작과 함께 언약이 채결되었습니다. 이제 인류에게 여러 가지 의무들을 포함한 언약과 하나님의 약속이 필요했습니다. 인간의 육식에 제한이 가해집니다. 그것은 짐승의 피를 섭취해선 안 된다는 명령입니다. 피 자체를 마시는 경우는 없으며 다만 고기를 먹을 때 피를 함께 섭취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동물의 피를 완전히 빼낸 다음 고기를 먹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분명히 육식의 허용이 야만적 도살을 허락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목을 따서 피를 안 뺀 짐승이나 피가 덜 빠진 짐승의 고기를 먹으면 피를 먹는 셈입니다. 여기서 레위기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피 섭취의 금지가 최초로 언명됩니다(레위기 3:17; 7:26-27; 17:10-14).

첫째 창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가 금단의 열매로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둘째 창조에서는 노아와 가족에게 피가 생명을 상징하면서 금지됩니다. 이 피 금지는 노아와 가족에게 명령한 것이므로 택자 계열은 물론 비택자 계열에게도 유효합니다. 따라서 노아 이후 모든 인류는 원칙적으로 짐승을 피째 먹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 비택자인 모든 민족들은 피 섭취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밀그롬에 의하면, 고대 근동 지역의 어떤 민족과 종교에서도 피 금지가 법령화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피 금지는 이스라엘만의 특유의 율법입니다. 구약 시대에 피 섭취는 분명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행과 풍속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피는 이미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 이후, 피의 의미와 기능은 모두 성취되었기에 더 이상 피에 그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우상의 제물과 목매어 죽은 짐승과 피의 섭취 금지는 당시 유대인들을 포교하기 위한 임시적이며 전략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과 바울의 선언대로 신약 시대에는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으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우상의 제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며 자유함 가운데 먹을 수 있고, 목매어 죽인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피마저도 이제 음식으로 가합니다. 생명이 위독하면 헌혈을 통해 몸이 피를 흡수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인간의 생명을 누군가가 해하면, 그 살해자가 자신의 생명으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5).

인간 살인자가 되었든 동물 살육자가 되었든 마찬가지입니다. 짐승도 예외가 아닌데, 바로 이런 이유로 후대의 율법은 사람을 들이받은 소는 죽이라고 명령합니다(출애굽기 2:28-29). 동물의 피를 흘릴 수 있으나 피 섭취가 금지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피는 흘리는 것 자체가 금지됩니다.

6절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라는 본문이 해석의 난제가 있지만, 다음과 같이 번역되는 것이 합당합니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그 사람에 의해 그의 피가 흘려져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은 그 생명을 해한 사람의 피로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동해동형법처럼 생명에는 생명입니다. 7절에서 다시 한 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8-17)

하나님께서는 이제 홍수와 대비되는 최후의 심판이 있기까지(베드로후서 3:1-7) 창조의 갱신을 통해 자연뿐 아니라 인간마저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약속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기를 바라십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혈기 있는 모든 생물을 보존하시려는 자신의 의지를 구름 속에 둔 무지개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8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8-17)

이 언약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표징으로 주신 무지개를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무지개가 수평선 위에 드리우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 사역에 대한 신실하심을 증거 하는 포괄적인 표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표징들은 언약에 참여한 자들에게 언약 규정들을 지켜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통해 영원토록 약속하실 것입니다.

(1) 노아 언약의 대상(8-11)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수립하십니다. 하나님과 노아는 최초의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짐승이 언약의 수혜자가 됩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가축을 부리지 말라는 계명에서 가축도 안식일 법의 통제를 받는 것에 비견됩니다. 율법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땅, 자연의 영역까지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 언약의 증표 무지개(12-17)

노아 언약은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살아남은 생물과 맺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언약의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무지개입니다. 히브리어 ‘케쉐트’는 ‘활’을 뜻합니다. 여호와는 활을 들고 계십니다.

고대 근동에서 활을 든 신의 모습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신들은 활을 들고 전쟁을 수행하는 용감한 전사입니다. 무지개는 활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활입니다. 여호와는 활을 하늘에 걸어두십니다. 이것은 종전과 평화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더 이상 활시위를 당기지 않으신다는 표시입니다. 무지개가 활이라면 폭풍우는 화살이었으며 그분은 화살인 폭풍우를 땅을 향해 날려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는 수단으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영원히 노아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어 이제 홍수로 생명들을 멸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노아 홍수 후에 전 지구적 기후 변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큽니다. 그러나 홍수가 그친 후 출현한 무지개를 지구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무지개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노아 홍수 전에도 시간 주기의 기준이 된 태양과 달은 떴습니다. 햇살이 비치는 한 물보라 속에는 어디서나 무지개가 보입니다. 따라서 이 무지개와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은 무지개의 새로운 출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지개를 재해석한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또한 노아 홍수 전에 궁창의 물 층의 존재로 지구가 온화했으나, 그것이 다 쏟아져 태양의 자외선 과다 노출로 인간 수명이 크게 줄었다는 주장 역시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순간마다 꺼내 보는 빛나는 보석과 같습니다. 불확실성과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언약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날마다 그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언약의 말씀을 가진 자만이 세상을 이기고 확신 가운데 이 땅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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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8-01)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희생 제사

창세기 8장 1-22절


대홍수 사건은 여러 소설과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지구 멸망이라는 재앙 앞에 인간의 한계와 가족 간의 사랑, 재난 속 희망을 다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인공이시며, 인간 존립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새 세계를 지으십니까?

 

홍수의 기세가 꺾이면서 물이 점점 빠지고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박합니다. 장대비가 그치고 솟구치던 심연의 샘의 분출도 멈췄습니다. 점차 물이 빠지면서 무질서한 세상이 정돈되기 시작합니다. 호흡을 가진 세상의 모든 생명이 멸절하고 방주에 있는 생명은 살아남았습니다. 노아는 혁신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새들을 보내 지면의 상태를 신중히 살핍니다. 마침내 하선한 노아와 가족들은 먼저 번제를 올립니다.

 

홍수가 멈추고 방주의 정박(1-5)

구원은 하나님의 기억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향한 긍휼히 여기심이며 자기 언약을 지키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견디고 있는 백성의 간절함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혼돈 한가운데 있다면 그분의 사랑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있는 노아 가족과 동물들을 기억하시고 물이 빠지게 하십니다.

1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2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4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5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1-5)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방주에 탄 모든 사람과 짐승을 ‘기억’하셨습니다. ‘기억하다’는 하나님께서 파괴적인 물의 힘을 되돌려 생명이 거주하기에 적당하도록 땅을 되찾기 위해 개입하신다는 뜻입니다.

폭우는 40일 동안 계속되었고(7:4,12) 물은 110일 동안이나 넘쳤습니다. ‘물이 백오십일을 땅에 넘쳤더라’(7:24). 40일은 때때로 가랑비가 내린 듯한 150일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홍수가 그치고 물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자연적으로 빠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자 물이 물러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빼시는 이유는 방주 안에 탄 노아와 그의 가족 및 모든 생물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홍수 속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생명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어 홍수가 멈춘 뒤 물이 물러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으킨 ‘바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피조물인 물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복종합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신들이 홍수를 일으켜놓고 통제를 하지 못한 채 홍수의 위력 앞에서 쩔쩔맵니다. 이 바람을 뜻하는 ‘루아흐’는 분명 창조 사역을 했던 하나님의 ‘영’(루아흐)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이 물러가게 하는 이 바람의 작용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의 재창조 작업임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바람의 작용은 또한 출애굽기에서 홍해가 갈라질 때도 나타납니다(출애굽기 14:26-28, ‘동풍’이 불었다). 따라서 홍해가 갈라진 기적에서도 물을 제압하고 백성을 물로부터 구원한다는 동일한 모티프가 암시되어 있습니다(참조. 여호수아 4:23).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면서 비가 그칩니다(2). 이것은 7:11의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물은 150일 동안 유지되다가 서서히 줄기 시작합니다. 물이 물러가는 것은 물의 세력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물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우주의 질서가 정돈되기 시작합니다. 방주는 아라랏 산들에 정박합니다. 원문은 ‘아라랏 산들’이지만 방주가 정박한 산은 아라랏 산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물이 점차 줄면서 ‘산들의 봉우리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10월 1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아 홍수가 국지적이었는지 전체적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아라랏 산이 세계 최고봉은 아닙니다. 혹자는 지각 변동으로 지구의 지형이 모두 달라져 현재의 에베레스트 산을 비롯한 고산들이 노아 홍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그랜드 캐니언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지형적 증거를 내밀면서 홍수는 전 지구적 홍수였다고 주장합니다.

  

물이 걷히고 땅이 마름(6-14)

주님의 부활은 의와 생명의 세계를 보여주는 약속이자, 죽음을 이기는 새로운 생명의 징표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노아보다 더 커야 합니다. 주께서 온전하게 보호하셨기에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첫 창조 때처럼 물의 혼돈을 극복하십니다. 하늘을 드러내 까마귀와 비둘기가 날게 하시며(1:8), 물을 한 곳에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하십니다(1:9).

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13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6-14)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6)라고, 다시 40일이 지났습니다. 이 날은 600년 11월 10일이며, 웬함의 계산에 따르면, 이날은 주일, 곧 안식일 후 첫날입니다.

노아는 지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물이 얼마나 물러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까마귀를 보냅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이러 저리 날아다니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가 왕래했다는 것은 그것이 방주로 돌아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까마귀는 사체를 먹기 때문에 아직 나무가 자라지 않은 환경에서 서식이 가능합니다. 사체를 먹는 습성으로 인해 레위기 11장에서 까마귀는 부정한 새로 취급됩니다.

이어서 노아는 비둘기를 보냅니다. 이것은 집비둘기(요나)를 뜻하는데, 비둘기는 자기 둥지로 돌아오는 회귀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노아가 당시 비둘기를 사육했을지는 의문입니다. 짐승들이 노아에게 찾아왔는데, 이 비둘기 또한 사육되지 않은 야생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세 번째 보낸 비둘기는 마침내 돌아오지 않고 새로운 둥지를 틀기 때문입니다. 아마 10절에 비추어 볼 때, 까마귀를 보낸 지 7일 후에 첫 번째 비둘기를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로 노아의 이름과 비슷한 비둘기는 노아의 역할을 대신하는데, 비둘기가 방주를 떠난 뒤 노아 역시 방주를 떠납니다. 과거에 해항하는 함선들이 도착할 육지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비둘기는 그냥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물이 아직 빠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7일 후, 노아는 두 번째 비둘기를 보냅니다. 그때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아마 이것은 나뭇가지로 둥지를 만들려는 비둘기의 본능적 행위였을 것입니다. 나무에서 싹이 덮지만, 둥지를 틀만한 곳은 아직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7일 후에 세 번째 비둘기를 보냈을 때,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둥지를 틀 곳을 찾은 것입니다. 육지의 물이 다 빠진 날은 600년 1월 1일이었으며, 노아는 방주 뚜껑을 젖히고 그것을 확인했습니다(13). 그리고 다시 한 달쯤 지나 육지는 완전히 말랐습니다.

 

방주로부터의 하선(15-19)

하나님께서는 소망 없는 인생을 기억하시고 적절한 은혜를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출입을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참혹한 홍수 심판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기억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려움 증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헤를 경험한 것이있을 것입니다.

15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17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19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15-19)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방주에 탄 모든 승객들의 하선을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땅의 상태를 신중히 살폈지만, 자신의 판단으로 하선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선을 명령하시고 노아는 순종합니다. 노아의 이러한 순종의 모습은 방주를 지으라고 할 때나 방주에 승선하라 할 때도 잘 나타났습니다. 배 안에서 오래 시달렸겠지만 인내하고 순종하며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주의 승객들이 모두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다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노아가 번제를 드림(20-22)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노아는 오직 명령을 듣고 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기억하시고 구원하신 것처럼, 훗날 고통 중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20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20-22)

하선한 노아는 가장 먼저 여호와께 번제를 바칩니다. 그는 제단을 쌓은 뒤 승선했던 정결한 짐승들과 새들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바쳤습니다. 네 발 달린 짐승들은 소, 양, 염소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최초의 제단 축조에 대한 언급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최초 행동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였습니다. 이 번제가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의 제물인지, 아니면 홍수를 모면한 노아와 가족의 감사의 제물인지 견해가 양분되지만, 후자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홍수로 심판하셨기에 다른 대속물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물의 ‘향기를 받으셨다’는 것을 인간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반응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반응으로 물로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제물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흠향하셨으나, 그것과 별개로 노아에 대한 언약의 약속은 홍수 이후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통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1). 혹자는 이것을 3장의 범죄로 인한 땅의 저주가 풀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이런 방식으로 땅을 저주하여 멸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에도 인간의 본성이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하여 홍수로 생물을 멸절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땅에는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계속될 것입니다. 심음과 거둠은 팔레스타인 기준으로 우기(파종기-추위-겨울)와 건기(추수기-더위-여름)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전 지구적 기후 변화를 의미할 것입니다.


노아의 제물을 흠향하신 하나님께서는 새 창조를 이루시기까지 세계를 보존하기로 다짐하십니다. 노아의 번제가 만물 보존의 초석이 된 것처럼, 갈보리 산에서 언약의 제물로 드려진 예수님은 새 창조의 확고한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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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7-01)

 


홍수 심판 중에 보이신 은혜

창세기 7장 1-24절


방주가 준비되자 홍수를 통한 심판이 시작됩니다. 홍수는 4-일 동안 지속되어 온 세상을 물로 뒤덮습니다. 노아의 가족과 방주에 탄 생물만 생명을 보존합니다. 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홍수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떤 분으로 드러내십니까?

 

노아의 나이 600세에 대홍수가 시작됩니다. 이 홍수는 일반적인 물난리가 아니며, 주로 신화적 배경에서 언급되는 압도적인 대홍수를 의미합니다. 비가 내리기 7일 전에 노아와 가족은 방주 안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육상 동물들이 암수 쌍으로 노아에게 모여들었습니다. 노아는 가족들과 더불어 모든 짐승을 배에 태웠습니다. 7일 후에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노아 가족과 짐승들의 승선(1-5)

불의한 세계는 항상 의로운 삶을 조롱하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심판의 날,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의로움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폭력과 야만이 가득한 세대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산 의로운 삶을 인정하시고, 그를 새로운 시대의 파트너로 삼으셨습니다.

1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1-5)

여호와께서는 노아와 가족에게 승선 명령을 내립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직접 노아에 대해 인물평을 하십니다. 그는 의로운(차디크)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츠다카)는 ‘반듯한 것’, ‘옳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공평한 것’을 의미하는 미쉬파트와 비교됩니다. ‘츠다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것을 표현합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분과의 관계가 반듯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쌍,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두 쌍을 이끌어 오라고 하십니다(2). 이 짐승들은 하나님에 의해 노아에게 나아오며, 노아는 이들을 방주에 태울 뿐입니다(창세기 7:9). 그 짐승들이 홍수 후에 다시 번성하여 지구를 채울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기 11장(신명기 14장)에서 구분되는 정-부정 짐승들이 이미 구분되고 있습니다. 비평학자들은 이것을 단순히 후대에 편집된 자료의 문제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계시의 발전을 받아들이는 공시적 입장에서는 다른 성경신학적 답변이 요구됩니다.

우선 창세기 1-11장은 원시적 형태의 제의 체계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성전의 원형으로서의 에덴 성전이 그려지고 최초의 회생제 장면이 펼쳐집니다(창세기 4장). 노아 홍수의 시간표는 안식일이 준수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여기서는 정-부정 동물 구분의 원형적 체계가 제시됩니다. 이것은 오경의 율법이 정립되기 이전에, 특히 레위기에서 제의적 체계가 표준화 및 규격화되기 전에 다양한 율법들과 제의적 관행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이미 실행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창세기 4장; 8:20; 15:9-11; 31:34-35,54). 특히 라헬이 생리를 핑계로 말안장에서 내려오지 않고 드라빔 수색을 거부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여자의 생리로 인해 여자의 몸이 부정하게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세기 31:34-35). 따라서 현재의 정-부정 짐승의 구분은 레위기 11장의 정-부정 동물 구분의 원시적 형태, 즉 기록된 모세 율법 이전의 파편적인 구전 율법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부정 동물의 구분은 단순히 종교적 교훈을 위한 상징적인 구분일 뿐이지 동물들이 내재적으로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짐승들은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구출됩니다. 어떤 비평학자들은 여기서 암수 일곱 쌍은 앞서 6:19-20의 한 쌍과 모순이라면서 두 자료의 편집의 증거를 찾아냅니다. 일곱 쌍은 J자료, 한 쌍은 P자료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한 쌍을 집합명사로 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정결한 짐승을 일곱 쌍씩 실으라 한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땅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를 거듭 날려 보낸 것과 하선 후에 정결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부 정결한 짐승에 불과합니다. 아마 대체로 부정한 짐승은 육식 동물이 주를 이루고 정결한 짐승은 초식 동물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것은 먹이 사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차이로 보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생물들의 승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는 것은 불필요한데, 아마 배에 오른 짐승들 중에는 곤충류가 제외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는 곤충류의 유충은 물에서도 보존되어 홍수 후에도 다시 번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7일 후에 비가 40주야를 내릴 것이며, 지상의 모든 동물들은 쓸려갈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노아는 말씀대로 모든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앞서 방주를 짓고 승선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노아가 그대로 준행했다는 6:22의 진술에 이어 다시 한 번 노아의 절대 순종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노아가 배를 건조했다는 말 외에는 어떠한 설명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노아의 배에 대한 지식, 선박 건조 과정과 방법, 동물학에 대한 지식 등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합니다. 단순히 그가 명령을 완수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것이 초점입니다.

 

홍수가 시작되다(6-16)

하나님을 거절하는 곳에는 평안이나 안식이 사라지고, 혼돈과 전쟁이 판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옛 세계를 정결케 하시고, 의가 거하는 새로운 세계를 짓고자 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사적 과정이자 만물을 영광스럽게 완성하기는 통로입니다. 40일 동안 땅과 하늘이 없어지는 이 심판으로, 땅과 하늘의 모든 숨 쉬는 것들은 다 죽었습니다.

6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7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8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0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3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14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15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6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6-16)

홍수가 시작된 날짜가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로 명확히 적시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정확한 날짜가 명시된 최초의 기록입니다. 이후 홍수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계속 날짜가 언급되므로 구체적인 날짜를 확인하면서 홍수의 추이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아래 정돈된 도표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방주에 오른 승선자 명단이 소개됩니다. 이것은 13-16절에서 반복됩니다. 노아와 그의 세 아들 셈, 함, 야벳 및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모두 승선했습니다. 모든 승객들이 승선을 마치자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십니다. 참고로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영웅 아투나피쉬팀이 직접 방주의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홍수 기사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문을 닫아주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문을 닫으심으로써 그분이 노아와 방주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홍수가 진행된 일정표입니다. 이것은 웬함이 계산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날짜는 모두 태음력인 반면, 홍수 일정의 날짜는 유일하게 태양력을 따랐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다만이 날짜 계산은 유대 문헌인 희년서(Jubilee)의 달력 체계에 근거하고 있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추정된 요일 또한 그러합니다. *표로 표시된 날짜가 홍수 기사에 적시된 날짜들이며 다른 날짜들은 이로부터 정확히 계산되어 산출됩니다. 8번은 웬함의 도표에 필자가 새로 넣었습니다.

 

  사건의 진행 날 짜 요일(추정) 일주일
1 홍수 통보(7:4) 600년 2월 10일 주일 제1일
2 홍수 시작(7:11) 600년 2월 17일* 주일 제1일
3 홍수 지속(40일)과 끝(7:12) 600년 3월 27일 금요일 제6일
4 물이 150일간(14+110) 유지됨(8:4) 600년 7월 17일* 금요일 제6일
5 산봉우리가 드러남(8:5) 600년 1월 10일* 수요일 제4일
6 까마귀를 보냄(40일 후, 8:6) 600년 11월 10일 주일 제1일
7 비둘기를 첫 번째 보냄(8:8) 600년 11월 17일 주일 제1일
8 비둘기를 둘 번째 보냄(8:10) 600년 11월 24일 주일 제1일
9 비둘기를 세 번째 보냄(8:12) 600년 12월 1일 주일 제1일
10 물이 걷힘(8:13) 601년 1월 1일* 수요일 제4일
11 노아의 하선(8:14) 601년 2월 27일* 수요일 제4일

만일 이 날짜 계산이 맞다면, 홍수 시작일은 창조의 첫날(주일)과 같습니다. 홍수가 끝난 날과 물의 창궐이 끝난 날은 창조 작업을 마친 제6일(금요일)과 같습니다. 새들을 보낸 날은 다시 창조의 첫날(주일)에 해당합니다. 홍수가 주일에 시작한 것은 창조 작업의 첫날에 부합하며, 금요일에 끝난 것은 창조 작업이 마무리된 제6일에 부합합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가 재창조 작업이었음을 시사 합니다. 다만 이것은 1년을 364일로 산정한 희년서의 월력 체계에 따를 때 들어맞습니다.

  

홍수에 의한 멸망(17-24)

구원은 시효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선택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힌 것은 누군가에게는 심판이지만, 노아와 그 가족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을 닫으셨지만, 실은 인간이 스스로 기회의 문을 닫은 것이기도 합니다.

17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20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4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17-24)

홍수가 40일 동안 지속됩니다. 물이 창궐하자 방주가 물에 떴고 점점 불어난 물로 인해 방주가 떠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은 더욱 불어나 급기야 높은 산이 모두 잠겼으며 수위는 가장 높은 산보다 15규빗(약 7m) 정도 높았습니다. 방주 높이의 절반인데 이것은 배가 파도에 급격히 쓸려도 바닥이 닿지 않을 만큼 수위가 높았음을 의미합니다. 물이 ‘넘치다’라는 동사는 군사적인 승리를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물이 승승장구하며 창궐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방주는 그 물 위를 타고 다니며 세차게 휘몰아치는 홍수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방주안에 있는 생물들을 제외하고 모든 생물이 죽었습니다.

특히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이 다 죽었다는 표현은 분명히 창세기 2:7을 되울립니다. 하나님께서 불어넣어주신 생명의 숨을 하나님께서 다시 거두어 가십니다. 홍수로 불어난 물은 150일 동안 빠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한 홍수 심판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의 상태로의 회귀이며 창조의 뒤집기입니다.

완전했던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아직 하나님께서 순서대로 질서를 잡지 않으셨던 혼돈과 공허, 무질서의 상태로 복귀합니다. 인간과 생물들도 처음 창조된 ‘종류대로’ 배에 승선하여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을 준비합니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가 무에서의 창조였다면, 재창조는 보존을 통한 새로운 창조입니다.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이 살아남은 것은 노아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그 시대의 구원자로 세워 숱한 생명들을 구원하는 통로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가고 오는 모든 시대의 구원자로 세우시고 그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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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6-01)

 


인류의 타락과 노아의 계보

창세기 6장 1-22절


번성한 인간은 만연한 죄악으로 세상을 더럽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며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하게 하십니다. 그분의 단호한 ㅍ쳥가와 심판의 결심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보여줍니다. 심판의 경고를 통해 오늘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6장은 3장에서 시작된 인간의 죄가 최고조에 이른 시대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부패와 타락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불렀습니다. 폭력과 성적 일탈로 얼룩졌으며 폭압적인 통치자들뿐 아니라 모든 육체가 부패하였습니다. 5장의 택자 계열의 족보에 이어 6장은 타락한 계열이 지배한 무질서한 세상을 묘사합니다.

 

인류의 타락(1-5)

세상은 부패하고 포악이 가득했습니다. 여자를 폭력적으로 취하였고, 네피림이라는 호전적인 영웅을 중심으로 결집하였습니다. 힘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타락한 희망 없는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침판하려 하십니다. 성이 상품화되고, 돈이 숭배되는 시대에 의로움을 지켜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성’하는 복을 주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기 좋아하는 대로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사는 일에만 여념이 없었습니다.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1-4)

하나님께서 번성의 복을 주셔서 인류는 죄악 가운데서도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1절에서 ‘(사람의) 딸들이 나니’라고 언급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힌트를 제고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히브리어 ‘브네 엘로힘’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신들의 아들들’로 둘 다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어구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들’은 택자인 셋 계열의 경건한 남자들을 말하며, ‘사람의 딸들’은 비택자인 가인 계열의 불경건한 여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1절에서 사람이 번성하면서 낳은 ‘사람의 딸들’이 단지 가인 계열로 제한된다는 모순을 내포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들의 아들들’로 번역되어야 하며, 이 경우 이들은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영물이며, 인간 여성들과 음란하게 성적 관계를 맺어 후손을 퍼트렸습니다(4). 이 견해는 초기부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 견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이 천상의 존재를 가리킨다는 것을 근거로 듭니다(시편 29:1; 욥기 1:6). 이것은 여전히 일부 해석가의 지지를 받지만, 천사와 같은 영물은 인간과 성적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거부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 확증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20; 마가복음 12:25). 셋째 견해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당시 폭력을 휘두르며 신처럼 군림한 폭군 왕들로 간주합니다. 이 경우 이 표현은 요즘 유행하는 소위 ‘신의 아들’이라할 수 있습니다. ‘엘로힘’은 실제로 왕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권력가나 영웅에게 붙는 수식어이기도 합니다(사무엘하 7:14; 역대상 17:13; 시편 82:6; 참조. 출 21:6; 22:8,9,28의 ‘재판관’으로 번역된 엘로힘). 고대 가나안 지역의 왕들 또한 ‘신의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이 폭압적인 독재자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취하여 성적 일탈을 일삼으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 해석은 4절의 네피림 및 폭군이었던 고대의 용사에 대한 진술과 잘 어울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나의 영’은 창조 시에 혼돈의 수면 위에 임재하여 세계를 정돈하며 창조를 완성한 하나님의 성령을 연상시킵니다. 또한 ‘루아흐’는 ‘생명의 기운’(life-giving power)을 뜻하기도 하므로(창세기 6:17; 7:15; 에스겔 37:3-9; 참조, 창세기 2:7)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거두어 가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 기한이 120년으로 한정되며, 이것은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는 진술과 잘 부합합니다. 인간의 날이 120년이 된다는 견해는 둘로 팽팽히 나뉩니다. 첫째는 120년 후에 홍수가 임할 것이라는 암시로 이해됩니다. 이것은 실제로 6장이 독자들에게 홍수가 임박했다는 조짐을 알리고 있기에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노아는 이때부터 120년간 방주를 지었다고 해석되곤 합니다. 다른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급격히 짧아진 인간의 기대 수명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홍수 이후에 노아를(아마 가족 포함) 제외하고는 인간들의 수명이 급격히 짧아지므로 더욱 받아들일 만합니다. 물론 홍수 이후에도 120세 이상을 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고, 야곱은 147세, 아론은 123세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수명도 결국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모세의 형 아론이 120세를 넘긴 마지막 인물입니다. 모세가 120세까지 살고 오경이 막을 내리고 이후에는 모두 120세 미만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예고된 기대수명을 채운 표준적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그의 수명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매우 의도적인 수명으로 보입니다.

당시에 네피림이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네피림에 대한 언급은 이어지는 고대의 폭군들을 묘사하는 설명구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이 다시 언급되는데, 그들 사이에서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 폭압적인 통치자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아들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네피림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심판의 선고와 은혜를 입은 노아(5-8)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의 후회와 탄식은 심판의 결심으로 이어져 멸망을 선언하십니다. 우리 사회는 근심이 아닌 기쁨과 희망을 드립니까? 한탄하실 만한 모습이 있다면 바로잡고, 우리로 인해 세상이 보존될 수 있도록 의와 경건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5-8)

하나님께서는 죄로 가득 찬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신다.’ 이것은 언뜻 신학적으로 난감할 수 있으나 구약은 빈번히 신인동형론적 기법으로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지의 불변성이 절대적이라고 오해해선 곤란합니다. 인간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언제든 변경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분의 최종적 목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더불어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홍수로 쓸어내실 계획입니다. 수중 생물들은 홍수의 참사에서 제외되는데 그들이 물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의 은혜를 입습니다.

 

노아의 족보와 부패한 땅(9-13)

모두가 부패할 때, 노아는 홀로 의의 삶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방주를 예비하라는 명령에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노아의 의로움은 말씀하신 바를 순종하여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믿음 곧 순종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겠습니다.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9-13)

간략한 노아의 족보(톨레도트)와 더불어 서사는 다시 전환점을 이룹니다. 노아에 대한 인물 평가가 이어집니다. 그는 그 시대의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늘 동행하던 자였습니다. ‘완전한 자’란 ‘흠 없는 자’(타밈)란 뜻으로 이 표현은 흠 없는 짐승에 사용됩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의 삶과 병행을 이룹니다. 에녹처럼 노아도 홍수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세 아들, 곧 셈, 함, 야벳을 낳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세상은 극도로 부패하고 포악해졌습니다. ‘모든 육체’란 모든 사람을 말하는데, 이것은 온 세상의 타락과 부패가 권력자와 같은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닌 전체의 문제임을 명확히 적시합니다. 인간은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는 자신이 설정해두신 죄의 임계량이 있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죄의 임계점(eritical point)을 넘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됩니다. 홍수 심판의 이유는 인간의 부패와 타락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메소포타미아 홍수 신화에서는 하늘의 신들이 지상의 인구 번성으로 그들의 소음이 하늘에까지 올라오자 불면증에 시달리고, 견디지 못한 신들은 회의를 열어 인구를 솎아내기 위해 홍수를 일으킵니다. 즉, 인간의 죄가 홍수의 원인이 아닙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14-17)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은 자들과 방불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처음에 잠깐 녹색을 띠지만 시간이 지나면 색 바랜 죽은 낙엽이 되는 것처럼,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 없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과 같습니다. 죽음을 통과하는 순간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영혼은 영원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불신자들처럼 이 땅에 살았던 모든 불신자들의 운명입니다.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14-17)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십니다. 이 나무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삼나무 종류로 추정됩니다. 배의 안팎으로 역청을 칠해야 합니다. 방주의 크기가 지시됩니다. 가로 300규빗(150m), 세로 150규빗(75m), 높이 50규빗(25m)입니다(1규빗을 약 50cm로 정함). 실제로 선박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비율은 대형 선박이 커다란 파도를 견딜 수 있게 할 만큼 과학적으로 대단히 안정적인 비율이라 합니다. 참고로 길가메시 서사시의 방주는 120규빗(60m)의 정방체로 대단히 불안정합니다. 위에는 창을 내고 문은 옆으로 내며 방주는 3층으로 나뉩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일으켜 모든 생물을 멸절하리라고 예고합니다.

 

노아 가족과 생물의 보존(18-22)

어두운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할 것입니다. 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각오로 주의 말씀과 기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생명을 바칠 심정을 가지고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노아의 믿음이었습니다.

18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22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18-22)

하나님께서 노아와는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언약은 홍수 후에 체결됩니다(창세기 9:9 이하).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존하십니다. 노아에게는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라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모든 짐승들이 그 종류대로 ‘네게로 나아올 것입니다’(20). 노아는 자신의 가족과 모든 짐승을 위한 식량도 준비해야 합니다(21).


노아와 언약을 맺고 짐승들을 싣도록 하신 것은 심판 중에도 생명을 보존하시려는 은혜로운 조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존하심으로 새 창조의 희망을 쓰시며, 은혜의 씨앗을 남기심으로 미래의 소망을 이어가십니다. 우리를 세상의 남기신 것도 희망을 이어가시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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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5-01)


아담의 후손들에게 대한 족보

창세기 5장 1-32절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족보가 소개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은 아담의 계보에서 제외된 반면, 셋을 통해 이어지는 하나님 백성의 족보는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아담의 족보에 등장하는 인문들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에 따른 우리 삶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합니까?

 

5장에서 서사의 흐름은 전환점을 이룹니다. 그 표지는 2:4에 이어 여기서 다시 나타나는 톨레도트한 단어입니다. 2:4에서는 우주의 내력에 그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이곳을 비롯하여 앞으로는 이것이 모두 사람의 내력, 즉 ‘족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1절의 세페르 톨레도트는 여기서만 사용되는 어구인데, 이후로는 단지 톨레도트만 사용됩니다. 톨레도트는 인명의 목록만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사가 함께 담긴 족보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들 셋(1-5)

성경에는 어떤 스토리가 재미있게 이렇게 기록된 것도 있지만, 어떤 곳은 아무 스토리도 없고 그냥 족보만 쭉 나오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거의 이야기는 별로 없고 아담서부터 노아까지 몇 살에 첫 아들을 낳았으며 몇 살에 죽었는지 그런 것만 써 놓았습니다. 조보 이야기 외에는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5장에서는 아담 이후 후손들에게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1-5)

5장의 계보는 ‘수직적인’ 목록으로서 아담에서 셋을 거쳐 노아에 이르기까지의 가계를 보여줍니다. 4장에 있는 가인 자손의 계보는 일곱 세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아담의 계보(톨레도트)인데 아벨을 대신해서 태어난 셋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이 계보는 4:17-25의 가인의 계보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 여기서는 자카르와 네케바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동물의 암수에도 사용되는 용어들이며, 인간의 생식 기능 및 생육과 번성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 용어 선택입니다. 인간의 생육과 번성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라는 말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로 창조된 인간을 아담이라 부릅니다(2). 여기서 아담은 보통명사 ‘사람’입니다. 그러나 3절의 아담은 다시 인명인 고유명사 ‘아담’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아담은 130세에 아들을 낳는데 이름을 셋이라 짓습니다. 앞서 아담은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셋이 첫 아들은 아닙니다. 여기서 셋의 출생에 대한 언급은 중요한데, 그것은 아담에서 셋으로 이어지는 택함을 받은 자의 계보를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3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담이 ‘자기의 형상대로’ 아들을 낳았다는 언급입니다. 누차 말한 대로, ‘자기의 모양’과 ‘자기의 형상’은 별 차이가 없는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은 이제 ‘자신의 형상’을 가진 자녀를 낳습니다. 아담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또한 셋의 후손은 택자의 계보이지만, 그들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오염된 아담의 형상입니다. 이 오염된 형상을 지닌 후손이 후대를 이어갑니다. 아담은 셋을 나은 후 800년을 더 지내다 930세에 죽습니다.

 

셋에서 야렛까지(6-18)

하나님과 동행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하나님 나라 역사에 ㅁ편입되지만, 하나님 밖에서 이룬 인간의 성취는 제 아무리 위대하게 보이더라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싸우는 문명의 성취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성품의 성취를 더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의 5대손 라멕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복수를 다짐했지만 결국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6-18)

셋의 아들은 그가 105세에 낳은 에노스입니다. 에노스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4:45-46에서 언급된 바 있습니다. 셋은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을 대신해서 준 씨앗이며, 그가 아들 에노스를 낳음으로써 택자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두 계보에서 비슷한 이름들이 나타납니다. 이랏과 야렛/ 므후야엘과 마할렐렐/ 므드사엘과 므두셀라. 동일한 이름이 나타납니다. 에녹/라멕. 둘 다 인상 깊고 중요한 이름입니다. 가인 계열의 에녹은 가인이 추방된 후 낳은 첫 아들이고, 셋 계열의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 365세에 하늘로 올라간 인물입니다. 가인 계열의 라멕은 포악한 폭군이고, 셋 계열의 라멕은 노아를 낳은 인물입니다. 두 족보에서 모두 마지막 인물과 더불어 수직적 족보가 수평적 족보로 바뀝니다. 가인의 수직적 족보는 7대손 라멕에서 멈추며 거기서 수평적 족보로 전환되면서 네 자녀가 소개됩니다. 셋의 수직적 족보는 10대를 이어가다가 노아에서 끝나며 거기서 수평적 족보로 바뀌면서 세 아들이 나열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가인 계열의 인물들은 전혀 수명이 적시되지 않았지만, 셋의 계열의 인물들은 장수했다는 기록이 첨부됩니다. 모든 인물들이 천 살을 넘기지는 않은 채 평균 수명은 800-900세에 이르며, 므두셀라가 969세로 최장수를 누립니다. 이 연령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선 이 인물들의 연령은 마소라 사본 외에 사마리아 오경과 70인역에서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마소라 본문의 권위를 인정한다 해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우선 현대 과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명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한 달, 혹은 두 달을 한 살로 계산한 결과라 해석하면서 현대의 인간 수명과 맞추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비평학자들은 고대 근동의 신화적 배경을 끌고 와서 이긴 수명을 문학적-신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히 수메르 신화의 왕명록은 몇 가지 면에서 비슷한 특징을 보이며, 창세기 5장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수만 년에 이르는 수메르의 신화적 왕들의 통치 기간을 대폭 줄여 비신화화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긴 수명은 성경의 다른 숫자들이 흔히 그렇듯 단지 신학적 과장일 뿐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많은 사람들이 이 숫자에서 신학적 의미를 탐색하는가 하면 수비학(數秘學)의 숫자 놀이를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예컨대, 학자들은 라멕의 777세를 목성과 토성의 주기의 합산과 일치하는 것에 주목하는가 하면, 바벨론의 60진법을 동원해서 숫자풀이를 시도했으나 숫자를 억지로 맞춘 흔적이 역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연령의 숫자들이 5의 배수들이며, 때로 거기에 7이 더해진다는 견해를 내놓았으나, 여러 연령들이 여기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마소라 본문이 신뢰할 만한지 여부를 떠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태고의 인간의 긴 연령을 문자적으로 믿습니다. 고대 근동의 비슷한 체계의 왕명록이나 족보는 앞서 말한 대로, 인류가 태고에 대한 공통의 기억을 희미하게 간직한 결과로 간주합니다. 한편, 이 족보와 연령에서 아담의 탄생 시기와 창조의 시기를 계산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비롯한 성경의 족보는 언제나 중요한 인물들만을 수록하는 신학적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족보에 나열된 인물들 사이에 몇 대가 빠진 경우가 흔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족보도 인물과 인물 사이에 여러 세대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에녹의 영생(19-24)

성도들의 삶은 악한 세상의 방해가 기다릴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의 심령으로 주와 동행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삶은 의인의 심령으로 시대를 거스르며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19-24)

야렛이 낳은 아들 에녹이 5장의 주인공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으며, 그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는데, 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셔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365세를 살았습니다. 그는 5장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5장에는 아담 후손의 죽음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반복입니다. 따라서 5장은 창세기 3장에서 ‘너희가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이고, ‘너희가 죽지 않으리라’한 사탄의 말은 거짓임을 명백하게 증명합니다.

하지만 5장은 동시에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영생의 길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생명나무의 길은 그룹들에 의해 막혔지만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 그 길이 열립니다. 이 점에서 에녹은 5장의 죽음의 배경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소라 사본의 연령을 따라 계산하면 므두셀라는 홍수가 일어난 그 해에 죽었습니다. 에녹은 동시에 노아를 미리 예고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노아의 전조라는 사실은 노아 또한 홍수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생명을 얻었으며, 또한 둘 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동일한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창세기 6:9).

 

므두셀라에서 노아까지(25-32)

죄와 폭력적인 질서를 강화했던 라멕과 달리 아담의 후손 라멕은 죄에 지친 인간을 위로하고픈 소망에 아들의 이름을 ‘안식’이라 짓습니다. 라멕의 신앙은 노아에게 이어져 새로운 시대를 옙하는 산파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쉼과 평화를 위해 아담의 후손 라멕의 정신을 잃지 말라야 합니다.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28-32)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최장수를 누렸으며, 라멕은 180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노아의 이름은 그 뜻에서 보듯이 특별했습니다. ‘쉬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한 이 이름은 여호와의 저주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이 훗날 노아를 통해 쉼을 얻을 것을 예고합니다. 라멕은 777세에 사망했으며 노아는 500세가 되었을 때, 셈, 함, 야벳을 낳았습니다. 777세는 완전수 7의 반복이며, 500은 천의 절반이라는 점에서 이 연령들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에녹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안식에 드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에게서 죽음을 넘어선 희망에 대한 약속을 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시대의 불경건과 심판을 증언했던 에녹처럼, 죄에 물들지 말고 의와 경건함 가운데 주와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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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4-01)

 


에덴의 동편으로 쫓겨난 사람들

창세기 4장 1-26절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에 속하여 처참한 살인마저 주저치 않습니다. 번영은 구가하지만 결국 잔인한 호전성과 탐욕, 음란으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건한 자를 남기시고 의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가인과 셋의 후손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의 이름은 동사 카나()와 관련되어 있어 보이고, 아벨()은 아마도 동일한 명사 헤벨의 의미인 ‘증기, 입김, 허무’와 관련 있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와가 그런 부정적인 의미의 이름을 작명할 리가 없다고 말하지만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직업(1-2)

경건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형통하고 더 편안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조금 늦어도 부요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비록 가인은 세상에서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이루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그 삶은 여전히 하나님을 떠난 삶이며 안식하지 못하는 방황하는 삶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1-2)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의 동편으로 쫓겨납니다. 아담은 아내와 동침한 후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이고 가인은 농사짓는 자입니다. 당시의 목축은 가죽과 털, 우유를 조달하기 위한 것일 뿐 육식은 노아 홍수 이후에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 자연의 변화와 생물의 생태적 변화가 발생했다고 보고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이후 피를 흘리는 동물 제사가 시작되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노아 홍수 전에 이미 인간의 동물의 육식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아벨의 목축도 고기 조달이 주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열납된 재물과 거부된 제물(3-7)

죄악은 다스리지 않으면 점차적으로 확산이 되어갑니다. 불경건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자들을 파멸시키려고 하며, 더 나가서 자신의 죄악에 대한 책임과 유죄성을 부인합니다. 그 결과는 불경건한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채 세상에서 죄악의 문화를 확장시키면서 살아갑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3-7)

세월이 지난 후 두 사람이 각각 소산물을 바칠 시기가 되었습니다. 농사꾼 가인은 땅의 소산, 즉 곡식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벨도 자신의 기른 영/염소의 첫 새끼를 골라 기름과 함께 바쳤습니다. ‘첫 새끼와 그것의 기름’에서 기름은 복부의 내장 기름 덩어리를 말합니다. 기름은 짐승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위로서 제단에 태워야 했습니다(레위기 1:8; 3:3-4; 4:8-9). 기름과 고기를 다 태우고 남은 고기는 젲사장 몫으로 돌았습니다(출애굽기 13:2; 레위기 27:26; 민수기 18:15,17; 신명기 12:6). 많은 해석가들이 제물에 피가 있는지 여부에 의해 하나님의 반응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폰 라드(von Rad)는 피의 희생이 여호와께 더 기쁜 제물이었기에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제물을 폄하하신 적이 전혀 없으며, 곡식 제사는 다른 동물 제사와 동일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를 ‘네가 선을 행하지 않았다’(7)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상세히 관찰하면 두 사람의 제사 태도에서 차이가 발견됩니다. 가인은 단순히 ‘소산물의 일부’를 가져옵니다(개역개정, ‘땅의 소산’으로). 여기에는 이것이 첫 소산물이거나 최상품인지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첫 새끼’와 그 최상의 부위, 곧 기름을 가져옵니다. 가인은 마지못해 허례허식(tokenism)의 제사를 집행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그의 마음가짐은 제물이 거절당했을 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가인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문자적으로 ‘얼굴을 떨어트렸다’). 이것은 부끄러워서 면목이 없어서 보이는 반응이 아니라 분을 참지 못해 고개를 숙인 것이며, 굴욕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지 못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는 선한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제사의 거부가 그의 탓이라고 꾸짖습니다. 그는 낮을 들 수 있는 선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이것은 죄가 언제나 뱀처럼 숨어 있다가 기습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죄가 가인을 원한다는 말씀도 죄가 간절히 그를 노린다는 뜻입니다. 죄는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런 죄를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인의 징계와 보호의 약속(8-15)

죄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이웃을 향한 책임을 외면하는 태도입니다. 더나가서 죄악은 무서울 정도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갑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배격하는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은 자신을 대적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동쪽으로 추방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자비를 구하는 그에게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8-15)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개하기는커녕 분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분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향한 시기심과 살의를 아시고 그에게 경고하십니다.

가인은 아벨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말의 내용이 안 나옵니다. 70인역(LXX)과 사마리아 오경, 시리아 역, 벌게이트(Vulgate), 중세의 몇몇 히브리어 사본들에는 ‘말했다’는 표현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가 추가되어 있습니다(공동 번역; 표준 새번역; NIV; RSV; NJB).

형제간의 투쟁이 시작되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죄는 아버지 아담의 세대보다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을 찾으시고 문책하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심문은 사실상 질책입니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죄에 대한 변명 또한 아담보다 더 시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호소한다고 하십니다(10). 무고하게 흘린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이 의인화된 표현은 신적 재판관을 향한 사법적 탄원입니다. 가인에게 유죄 판결과 더불어 중형이 선고됩니다. 그는 그가 흘린 피값을 치를 것입니다. 가인에게 하나님에 의한 직접적인 저주가 선언됩니다. 이미 아담의 죄로 땅은 엉망이 되었지만, 가인의 죄로 땅의 상황이 더 악화되면서 그는 가중처벌을 받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땅은 아무런 효력도 없을 것이며, 그는 땅을 배회할 것입니다. 농사꾼이었던 그에게 이것은 파산을 의미합니다. 가인은 자신에게 가해진 형벌이 너무 과중하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멀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가인에게, 또한 모든 인간에게 사실 가장 무겁고 두려운 형벌입니다(14).

이에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보호하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안전을 보장하십니다.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될 것입니다. 완전수 ‘칠’이 암시하는 대로, 이것은 혹독한 징벌을 의미합니다(창세기 4:24; 레위기 26:24,28; 시편 12:6; 79:12; 잠언 6:31; 다니엘 3:19). 추가로 그에게 보호의 증표로 ‘표’를 줍니다. 이 증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가인이 받은 ‘표’는 그에게 부여된 자기 방어를 위한 어떤 비상한 능력이었을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16-24)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모습은 유리하며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방랑자는 규모 있고 질서정연한 삶을 살기보다는 무질서와 방탕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리고 죄악은 대부분 어두운 곳에서 자행됩니다. 밝은 곳에서 행동하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들의 죄악된 모습이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인의 후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16-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가인의 계보를 계속 추적합니다. 그는 ‘놋’은 ‘방랑’, ‘배회’라는 의미하고, 그곳에서 거주합니다. 이 지역명은 다시 한 번 가인의 운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놋의 위치는 에덴동산의 동쪽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곳이라고 언급합니다. 놋은 하나님에게서 피신한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가인은 아내를 만나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 외에도 많은 자녀를 낳았고(창세기 5:4), 그들이 분산되고 상당히 세월이 흘러 인구가 늘어났을 것입니다. 가인은 에녹을 낳고 곧이어 도성을 건축했는데, 그 성의 이름 또한 ‘에녹’이라고 짓습니다. 역설적으로 가인은 성을 쌓음으로써 방랑하고 유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의 운명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가인의 계보인 에녹의 후손들이 7대까지 열거됩니다. 아담으로부터 가인을 거친 일곱 번째의 자식은 ‘라멕’이었습니다. 가인의 가계에서 일부일처제가 최초로 무너지는 사례가 나타납니다. 또한 가인의 계보에서 목축과 예술, 문명이 유래됩니다. 아다의 첫아들 야발은 셈의 생계형 목축과 달리 전문 목축업의 원조가 됩니다. 야발의 동생 유발은 현악기(수금)와 관악기(퉁소)를 다루는 조상이 되었습니다. 씰라의 첫 아들 두발가인은 금속 제련사로서 금속 기술의 원조가 된 인물로 소개됩니다. 그의 여동생 나아마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목록에 오릅니다. 가인의 계열에서 인류의 산업과 기술, 예술과 문명이 기원되었다는 것은 구원의 문제와 별개로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공헌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가인의 5대손 라멕은 복수의 화신이자 폭군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상해를 두려워했으나, 라멕은 적극적인 공격과 복수로 잔인한 자기 방어력을 갖춥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젊은 전사를 죽였으며 어떤한 복수에서든 가인에게 임한 관대함보다 더 큰 관대함을 요구했습니다(24). 그는 살인을 자랑했으며, 이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행위에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가인을 해친 자에게는 7배의 벌이 주어지지만, 자신을 해친 자는 벌이 77배가 될 것이라고 하여 공포심을 조장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과 그의 법에 대항하면서 쾌락과 방종을 추구하는 풍요한 사회의 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제사장 나라로 나서야만 했습니다.

 

아벨을 대신한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25-26)

불경건한 사람은 인간의 힘과 번성, 자랑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조롱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항상 겸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갑니다. 물길을 거슬릴 수 없습니다. 경건을 통해 갈려진 사람들은 자신의 심령대로 행동하게 경건과 불경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들이 성장한 것처럼, 또 다른 경건한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5-26)

이러한 불경건한 사회의 정반대 편에는 의로운 자들이 있었습니다. 셋의 계보에서 신앙이 있었습니다. 아담에게서 아벨을 대신하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름은 ‘셋’인데, 그 이름 뜻인 ‘대신한 자’는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쉬트)는 의미일 것입니다. 셋 자신이 바로 하와의 신앙고백에 따른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총이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에노스’의 어원을 추적하면 아담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뜻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흔히 신적 존재와 다른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을 의미할 것입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향한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인간의 깨달음은 에노스라는 이름에 의해 상징되는 인간의 약함을 인식할 때 더욱 강화된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의 마음과 삶을 보시고 그를 받으십니다. 우리는 합당한 예배를 위해 죄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다스리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가인이 간 길이 아닌 경건한 의인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할 때, 우리를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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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3-01)

 


 죄의 결과와 회복의 소망

창세기 3장 1-24절


사람이 뱀의 유혹에 빠짐으로 창조 질서에 저주가 임하고 관계가 어긋났습니다. 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은 생명의 소망에서 점차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고, 죄의 권세에서 건지셨습니다. 죄의 결과와 아들을 통해 이루신 일은 무엇입니까?

 

갑자기 뱀이 등장합니다. 이 뱀은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간교함과 벌거벗음의 히브리어는 비슷한 단어로 말놀이가 만들어지는데 교묘하게 인간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인간은 영민하게 되길 추구했으나 벌거벗게 된다.’(Wenham) 이 뱀의 정체는 사탄입니다. 사악한 존재로 인간보다 지혜롭고 그들을 지배하려 합니다.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1-7)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의견으로 전락했고, 순종이 아니라 고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피조물이 자기 욕망의 눈에 ‘보기 좋은’ 것을 탐하다가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 결 기쁨 대신 두려움이 찾아왔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았지만 눈이 밝아져 자기가 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1-7)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록했으나, 이제는 뱀이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질서를 가져 왔지만, 뱀의 말은 혼돈과 죽음을 자져왔습니다. 진실은 거짓 이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탄의 거짓말보다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합니다. 뱀의 질문인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하나님 말씀의 교묘한 왜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나무를 제외하고 동사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으라 하셨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부정적으로 답변하지만, 그녀의 말 역시 하나님의 맘씀을 왜곡하거나 순화합니다. 동산 중앙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하셨다고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경고하셨는데, 그녀는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고 왜곡합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경고를 순화함으로써 유혹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뱀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합니다. 뱀은 나아가 죽음은커녕 오히려 인간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여자가 금단의 열매가 맺힌 나무를 보았을 때, 그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여자는 결국 유혹을 못 이기고 그 열매 따 먹었으며, 더 나아가 남편에게도 권하여 먹게 했습니다. 인간은 인내심이 요구되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대신에 당장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선악과를 선택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추구하는 것은 생명이 아닌 힘이다’(Waltke).

선악과를 먹은 직후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일종의 자각에 의한 인식 변화입니다. 최초의 부부는 한 몸의 일체성으로 인해 둘 사이에 아무런 장벽과 거리낌이 없었으며, 벌거벗음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둘은 부부라도 죄가 개입하자 죄 묻은 자기 본 모습과 치부를 감추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죄책감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서도 스스로를 숨기려 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 수치의 본질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을 숨깁니다. 그들은 부끄러움 때문에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치부를 덮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추궁(8-13)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는 이웃과의 관계 파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떠나자 그들은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두려움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것은 여자를 창조한 하나님, 뱀을 창조한 하나님을 향한 비난일 뿐입니다. 뱀을 의지한 인류는 이제 뱀이 창조한 세상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8-13)

‘그 날 바람이 불 때’ 아담과 하와는 동산의 숲속에 숨습니다. ‘바람’을 뜻하는 ‘루아흐’는 단순히 자연풍이 아닌 자주 신적 바람, 즉 바람과 같은 성령의 임재, 혹은 성령의 기운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동반하여 아담과 그의 아내를 찾아오셨다는 암시가 엿보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낮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이 우주 공간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숨은 곳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그를 불러내는 재판관의 소환 명령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숨바꼭질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내가 벗어서 두려워서 숨었다’고 말할 뿐 자신이 숨은 본질적인 이유를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Cassuto). 그런 이유로 하나님의 심문이 이어집니다. 그것은 사실상 꾸짖음입니다. 아담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죄를 아내 탓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친한 동료와 심지어 배우자에게마저 적대적이게 합니다. 하와는 자신의 죄가 뱀의 유혹 때문이었다고 변명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4-21)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는 또한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땅으로부터도 거절을 당하는 신세로 이어집니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했을 뿐만 아니라 땅의 저항으로 인해 이제 노동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대신에 좌절과 수고를 거친 후에야 그 대가를 먹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실하게 수고의 대가를 먹으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새 질서를 찾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과는 물론 자연과도 회복된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14-21)

심문을 마치신 하나님의 판결이 선고됩니다. 판결 순서는 이제 심문 순서의 역순인 뱀, 여자, 남자 순입니다. 먼저 뱀이 저주를 받습니다. 여기서 뱀이 다른 짐승들보다 ‘더욱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다른 짐승들도 저주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뱀이 1절에서 ‘다른 들짐승들보다 더욱 간교했다’는 진술이 다른 짐승들도 간교했다는 뜻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필자는 이 뱀은 실제 뱀이 아닐 것으로 해석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옛 뱀’의 심판을 언급합니다(요한계시록 12:9; 20:2). 그 뱀은 용이라고도 칭하는데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다’라고 규정짓습니다. 이 옛 뱀은 분명히 창세기 3장에 등장한 그 뱀일 것입니다. 따라서 하와에게 나타난 그 뱀은 사탄입니다. 결국 이 뱀은 실제적인 뱀이 아닌 하와의 환상 중에 나타난 뱀일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과 자연이 소원해지기 전에 최초의 인간은 에덴에서 친히 이름을 지어주었던 동물들과도 완벽한 교감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때 사탄은 하와에게 환상 가운데 피조물 중에서 호기심을 자아내는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 그녀를 유혹했을 것입니다.

이일 후에 뱀은 사탄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것의 기는 특징에는 저주의 상징이 새롭게 부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뱀 자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한편, 뱀이 흙을 먹는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이것은 뱀이 비참하고 굴욕적인 신세로 전락한 것을 의미합니다(시편 72:9; 미가서 7:17). 뱀에 대한 심판 선고인 3:15은 유명한 구절로 소위 ‘원시 복음’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뱀은 여자와 원수가 되고 이 관계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에게서 계속됩니다. 결국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에 치명상을 입히나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또한 뱀의 후손은 비택자의 계열을, 여자의 후손은 택자인 이스라엘을 예고하는 예언일 수 있습니다. 양자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가벼운 상처를 입지만 적들은 치명상을 입고 패할 것입니다. 아마 이 예언은 이런 중의적 목적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의 심판은 임신의 고통입니다. 여자는 남편을 갈망하나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게 됩니다. 여러 학자들은 이것을 여자의 남편에 대한 지배욕을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4:7에서 ‘죄가 너를 원한다’(문자적으로 ‘죄의 소원이 너를 향한다’)는 말에서 뒷받침됩니다.

죄는 가인을 지배하길 원하나 가인은 오히려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이렇듯 여자는 남편을 지배하길 원하나 첫작 남편이 그녀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최초의 두 남녀는 동등한 관계였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담에게는 힘든 노동의 수고를 해야 소산물을 먹게 되는 심판이 주어집니다. 또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줍니다. 이름 뜻 그대로 그녀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 즉 인류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임시적인 잎사귀 옷 대신 오래 견디는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들의 죄로 인한 수치를 덮기 위해 구약에서 최초로 짐승이 희생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이 일을 실행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22-24)

하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 대신에 가죽욧을 지어 인간에게 입히셨습니다. 훗날 동쪽으로 문이 난 성막을 통해, 더 나아가 친히 성전이 되어 자신의 죽음으로 휘장을 찢으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함’ 나아가 영생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22-24)

인간들에 대한 심판 선고는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이어집니다. 앞서 선악과의 나무 열매가 금지될 때 생명나무 열매에 대한 금지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학자들은 선악과만 금지되었지 생명나무 열매는 금지되지 않았으며,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먹으며 풍성한 생명을 누렸을 것이라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먹으면 효과가 ‘영생’이었다는 사실과 아담이 생명나무마저 먹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을 볼 때(3:22)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먹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아담이 선악과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면 때가 되어 그에게 영생을 허락하기 위해 준비된 특별한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의 금지와 더불어 생명나무도 잠정적으로 금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악과 금지가 최초의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계명을 믿음으로 잘 지키면 생명나무의 영생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하여 내쫓긴 인간은 에덴에서와 달리 에덴 밖에서는 땅을 개간하고 직접 수고를 하며 수확을 얻어야 합니다. 그가 내쫓긴 쪽은 에덴의 동쪽입니다. 이 방향 묘사는 성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 드러난 생명나무 열매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 하신 말씀은 이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 안에 두려움과 수치심, 책임 전가라는 비겁함을 낳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나누고, 사람의 관계도 파괴합니다. 잘못을 했다면, 책임 회피와 전가, 원망 대신 솔직한 인정과 고백으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살지 않도록 힘써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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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2-02)

  


 인간의 존재와 사명

창세기 2장 4-25절


사람을 중심으로 복보 형식을 발려 첫 창조를 정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특권과 흙으로 지어진 존재하는 한계를 동시에 갖습니다. 창조질서를 유지할 책임과 더불어 다스릴 권한도 부여받습니다. 특권과 한계, 권한과 책임 사이에 선 인간은 무엇입니까?

 

2:4을 절반으로 나누어 전반적의 ‘… 땅의 내력이니’를 1장의 마무리로, 후반절을 2장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에 대한 서언으로 봅니다. 그러나 창세기 구조를 나누는 기준인 핵심 단어 톨레드트가 서언이 아닌 결언에 나타나는 경우는 없으므로, 4절 전체를 2장의 서언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처음 나타나는 톨레드트는 모두 인간의 복보와 관련하여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유일하게 세상의 기원 및 역사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인간 창조의 서막(4-6)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고 그분을 통해서만 존귀케 될 수 있습니다. 떠나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특권과 흙이라는 한계 사이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을 때 존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숨결 따라 살 때, 영원의 땅에 이르게 됩니다.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4-6)

2장 4절부터는 분명히 별개의 창조 기사로 인간 창조에 초점을 맞춥니다. 5절은 땅을 갈 사람이 없어 채소와 식물류가 창조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5절은 1장의 창조 순서와 모순되어 보이나 2장의 창조 기사는 인간 창조를 주제로 삼고 있기에 1장처럼 창조의 순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지에 아직 비가 내리지 않고 안개만 땅에서 올라오는 상황입니다(6).

‘안개’에 대해 대체로 주석가들은 다른 번역을 내놓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메소포타미아의 거대한 두 강물이 지하로 스며든 뒤 주변의 대지에 솟구쳐 흘러 적시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의 창설(7-9)

에덴은 놀고 먹는 것이 아니라 경작하고 가꾸어야 하는 세계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잠재된 가능성과 감춰진 영광을 개발하여 드러내도록 의도 되었습니다. 범죄로 인해 가혹한 것이 되었으나 노동 자체는 신성한 것입니다. 노동이 세상을 충만케 하는 축복이 되기 위해 변화시켜야 할 사회적 과제는 무엇입니까?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7-9)

하나님의 창조는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려이니’라는 내용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그는 살아 있는 존재로 변화했습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빚어집니다(야차르). 사람(아담)과 땅(아다마)이란 단어의 기원이 무엇이든 어근의 공유는 인간의 존재가 땅을 근원으로 한다는 사상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기(‘생명의 호흡’)를 그 코에 불어넣으십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생기는 동물적 호흡이 아닌 영혼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잠언 20:27; 참고 에스겔 37:3-9).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인간은 ‘생령’(네페쉬 하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신 뒤 인간을 그곳에 두십니다. 흔히 ‘에덴’의 어원은 ‘들판, 평원’(plain, steppe)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두 큰 강 사이의 비옥한 농토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풍요로움을 뜻하는 아람어 어근 아단(adan)에서 기원을 찾거나 ‘기쁨’이라는 뜻의 동음이어 히브리어인 에덴(דן󰘠)과 관련짓습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에덴에 동산을’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동산’(정원)이 에덴 안의 일부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곳에서 ‘에덴 동산’이 일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비추어 볼 때(창세기 2:15; 3:23,24; 에스겔 36:35; 요엘 2:3), 에덴 전체가 특별한 정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아름답고 탐스런 열매가 맺히는 각종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동산 가운데에는 특별한 두 나무인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소위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에덴에서 흐르는 네 개의 강(10-14)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쁨의 동산 에덴을 다스리고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에게 노동은 공동 운명체인 자연을 가꾸고 관리하기 위해 주신 신성한 책임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그 노동 본연의 가치와 노동에서 오는 기쁨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땀 흘리는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실하게 일하고 정직한 땀의 대가를 양식으로 취하며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존재입니다.

10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10-14)

에덴은 네 강의 발원지(로쉬 שׁרא 머리)입니다. 비손 강과 기혼 강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월라와 에티오피아 지역인(이사야 20:3; 예레미야 46:9) 구스 온 땅을 흐른다는 언급에 근거하여 이 두 강을 나일강의 두 줄기 상류인 청나일과 백나일로 추론합니다. 그러나 나일강은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과 지리적으로 너무 멉니다. 또한 구약에서 구스로 지칭되는 지역은 의외로 다양합니다(창세기 19:7-12에서는 구스가 바벨론, 하바국 3:7에서는 미디안 땅으로 나타난다).

가장 합리적인 이해로 비손 강과 기혼 강은 힛데겔(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유프라테스) 강의 한 지류일 수 있으나 더 이상의 추적은 어렵습니다.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확인이 어려운 보석 종류들입니다. 호마노는 성막 건설 시 대제사장 복장의 장식에 사용되었습니다(출애굽기 25:7; 28:9,20). 순금 또한 은금과 더불어 성막에 사용된 금속류 중에서 가장 비쌌습니다. 에덴과 관련된 이러한 보석류와 순금의 언급은 마찬가지로 에덴이 성막의 원형임을 암시하며,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천상낙원의 모형임을 암시합니다(요한계시록 4:3; 21:11,19,20).

 

아담에게 부여된 직무와 금지(15-17)

인간은 영생하는 생명나무를 비롯한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견줄 수 없는 존재지만 자유를 갖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에게 이 금지명령은 ‘올무’나 ‘함정’이 아니라, 자유의 한계를 정하여 참 생명을 누리도록 돕는 이정표입니다.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15-17)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경작하며(아바드 עבד 노동하다, 섬기다) 지키는(샤마르 מרשׁ) 직무가 부여됩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무노동 고임금의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에덴에서 노동을 합니다. 히브리어 아바드는 ‘예배하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므로 에덴의 노동은 일종의 예배 행위였습니다. 그에게 모든 나무열매를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금지됩니다. 여기에 생명나무 열매가 금지되었다는 언급이 없는데, 그 이유는 3장에서 설명하기로 합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분명 하나님께만 독점되어 있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열매의 섭취는 인간이 신적 지혜를 추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얻었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스스로 자율권을 획득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처럼 자기만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독립 선언이며, 이러한 자기주장이 죄의 본질입니다.

 

아담의 배필 하와의 창조(18-2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면서 그들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녀는 동등한 가치를 갖지만 동시에 상호 보완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로만 존재합니다. 결혼이든 무엇이든 타인을 인정할 때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18-25)

하나님께서는 독처하는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마련하십니다. ‘돕는 배필’은 여자가 단순히 남자의 도우미로서 열등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돕는 자가 도움을 받는 자보다 더 우월한 것도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는 상보적 존재로서 짝을 이룸으로 완전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도 흙으로 창조하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십니다. 여기서도 인간 창조 후 동물이 창조되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은 권위를 지닌 자입니다.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가 생물들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와를 창조하신 방법과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우선 아담을 깊은 잠(타르데마 תרדמה)에 빠지게 하십니다. 구약 대부분의 사례에서 이 잠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발생한 영적 현상으로서의 깊은 수면 상태를 가리킵니다(창세기 2:21; 15:12; 사무엘상 26:12; 욥기 4:13; 33:15; 이사야 29:10).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그것으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갈비뼈로 아담의 짝을 만든 사건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와를 아담 위에 군림하도록 머리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에게 짓밟히도록 발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와 동등하도록 그의 팔 아래 보호를 받도록 그의 옆구리로 만들었고, 그의 사랑을 받도록 그의 심장 곁에서 만드셨다’(Mattew Henry). 아담은 하와를 본 순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인간의 발언인데, 어떤 측면에서 인류 최초의 사랑 고백입니다. 이 표현 역시 남자와 여자의 본질의 동등성을 가리킵니다. 24절은 소위 창조의 결혼 규례입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 결혼을 통해 새 가정을 꾸리더라도 대가족의 일원으로 족장의 통제 하에 함께 거주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물리적 의미의 떠남이 아니라 관계적 의미의 떠남입니다. 남자의 우선순위는 이제 더는 부모가 아니라 아내입니다. 둘이 합한다는 동사 다바크(ק󰔨󰕏)는 부부의 강한 결속을 잘 표현합니다.

부부의 결합은 이처럼 견고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태복음 19:6). 이 창조 시의 결혼 규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곧 일부일처제가 하나님의 의도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들의 벌거벗음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 측면으로만 이해되어선 안 됩니다. 이것은 최초의 부부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나 장벽이 없으며(Hamilton) 서로에게 열린 마음과 신뢰감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죄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완전했던 부부 관계가 어긋났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치부를 부끄러워하며 감춰야 했습니다.


여자를 만들어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과업을 수행하도록 하십니다. 남녀는 존중과 이해, 대화와 타협으로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상태를 통해 사랑을 배우며, 폭넓은 인간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녀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모범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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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주해(02-01) 


 인간 창조와 안식의 의미

창세기 1장 26절-2장 3절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왕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직접 계획하시고 도모하시므로 완벽하게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땅 위의 생물과 더불어 인간을 지으시므로 창조 사역을 완결하십니다. 결코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거나 진화론적 산물일 수 없습니다.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사명과 더불어 생육을 명하셨습니다.

 

여섯째 날 마지막 창조물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물리적 의미의 형태나 실체를 의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내적 형상, 곧 속성과 본질에 대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자비하심과 거룩함의 속성을 인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은 역시 인격적 존재들인, 하나님을 시중하는 천상존재들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여섯째 날의 인간 창조(26-27)

인간은 왕적 권한을 이행하는 존재입니다. 권한을 선히 사용하여 지혜와 성실함으로 다스리면 기뻐하실 것이나, 남용하여 함부로 짓밟고 탈취한다면 탄식을 낳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지나친 착취와 전횡으로 인간과 자연을 위험에 빠트리지는 않습니까? 대리통치자로서 겸손과 자애를 가지며 살아가야 합니다.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인간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6-27)

여섯째 날의 마지막 창조물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많은 난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를 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만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함께 머리를 맞대신다는 이 특이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이제 창조하고자 하시는 대상의 중요함과 독특함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1) ‘우리’(26a)

먼저 살핀 것은, 복수형 ‘우리’에 대한 의미를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유대 해석가들의 견해를 따라 하나님과 천상 존재들의 하늘의 어전 회의 장면에 대한 묘사라는 해석이 인기를 얻어왔습니다(창세기 11:7; 이사야 6:8; 예레미야 23:18,22). 반면에 초대교회 시대부터 기독교 해석가들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일 수 있겠지만, 아직 삼위일체 개념이 드러나지 않은 창세기 본문에 조직신학적 개념을 과도하게 주입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다른 기독교 해석가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존엄 복수 호칭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표현은 이것이 하늘의 어전 회의에서의 어법이긴 하되 천상존재들의 왕으로서 천사들과의 협의를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자기 결정권의 행사에 의한 일방적 선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절대 주권을 가진 권력자는 ‘우리가 ∽하자’는 어법으로 선언적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27절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진술에도 정확히 부합합니다.

(2) ‘형상’과 ‘모양’(26b)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형상’과 ‘모양’은 별다른 의미론적 차이 없이 유사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형상’은 복사본 혹은 원본과 아주 흡사한 형태를, ‘모양’은 한 대상과 다른 대상이 비교됨을 강조하거나 두 대상의 유사함을 강조합니다.

27절에 비추어 보면, ‘형상’과 ‘모양’은 자주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으로 대표됩니다. 아마도 천상의 인격적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성품,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을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공유한 하나님의 속성을 내던지고 반란을 저질렀으며, 결국 인간의 하나님 형상까지도 훼손해 타락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최근의 매우 좋은 해석은 이어지는 26절 마지막의 ‘다스리게 하자’는 표현과 28절에 비추어 하나님의 형상을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제국들은 왕을 신의 형상을 지닌 대리 통치자로 간주했습니다.

(3) 창조(27)

세 번이나 반복된 ‘창조하다’라는 특별한 용어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구절의 조합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심으로 창조 목표를 이루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 창조 주간에 바다의 거대 생물에게만 ‘창조하다’가 사용된 사실은(21) 하나님이 인류의 기원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진술에서 이 ‘사람’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집단 명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이들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을 포함합니다. ‘형상’의 반복하며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을 배치해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본문이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도발적인 구절은 학자들의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해당 문맥과 9:5-6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어구가 차지하는 역할을 보면 그 의미에 대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표현을 배치하여 이 구절을 강조합니다. 이 기본적인 관계 외에 인간은 삶을 유지하고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27절은 중요한 네 가지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1) 남녀의 구분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의 본질적 측면은 하나님의 본성과 상당히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녀라는 양성에서 각기 보이는 뚜렷한 특성들을 포괄해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어느 한 성에 치우친 속성을 가진 분으로 상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림은 부분적이고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2) 인간의 양성에 대한 이 언급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산의 복을 베푸시고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시는 배경으로 작용합니다(28). (3) 이 구절은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인간됨의 본질적 측면에서 남자와 여자는 질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시고 친교를 특징으로 하는 관계에서 정체성과 운명을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어구는 기본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상호 호혜적 관계임을 암시합니다(참조, 2:21-24). 이 기본적인 관계 외에 인간은 삶을 유지하고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이 단락에서 인간됨의 중요한 측면을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또 다른 하나는 말이나 언어를 다루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축복하시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심으로 태초에 이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28-30).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을 닮은 이들과 대화하실 수 있으며, 성경은 그러한 대화들의 기록입니다. 나아가 사람은 대화로 하나님과 순전한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근거가 이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부르심으로 자신을 전심으로 예배할 한 민족을 세우셨습니다. 사람은 또한 대화로 서로 소통하고 이를 통해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풍부한 인격적 교류로 인간은 큰 기쁨을 얻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깊은 내면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성의 한 측면에서 흘러나옵니다.

나아가, 인간은 말을 다루는 능력으로 사물을 개념화하고 계획하며 평가하고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생물학적 필요를 넘어서는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행동을 인지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또한 인간은 언어 능력이 있기에 지혜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은 인간이 창조적 본능을 실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28)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에게 먹을거리를 주십니다. 원초적인 즐거움이자 충만한 생을 위한 축복입니다. 탐욕으로 취한다면, 복은 저주로 바뀌고, 질서는 깨지고, 생태계의 균현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고 서로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욕심을 버리고 제 몫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28)고 인간에게 특별한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식 능력은 신체적 조건에 내제되어 있지만 다산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다산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는 주변 이웃 국가들과 차이를 보입니다. 주변 국가들은 지역 산당에서 다산 의식을 행해야만 땅이 풍성한 곡식을 내고 가축과 여성들이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스리거나 지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1:26,28). 하나님의 지배권이 어느 한 ‘대표’(representative)에 의해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만물이 인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2:8).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의 때에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키실 것입니다(히브리서 2:5-8).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부요하게 되고 번영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경이로운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의 지상 대표적인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연속적인 복을 기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창조의 완료와 안식(2:1-3)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영적으로 회복되는 시간입니다. 다시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이름을 높여드릴 때 창조의 축복으로 다시 회복될 줄 믿습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1-3)

마지막으로 인간의 창조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다 이루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하늘과 땅(천지)을, 그리고 하늘과 땅의 다양한 구성물들(만물)의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창조되었고 세상이 자체적으로 지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일을 멈추고 안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일곱째 날은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신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한 날로 구별하셨습니다.


안식은 창조의 목적이자 향유의 축제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평온과 휴식을 경험하는 영광스럽고 축복된 시간입니다. 사람이 안식을 회복할 때, 생존을 위한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창조의 주기를 따라 살 때 진창 같은 삶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인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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