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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1-0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장 1-13절 


새해가 되면 새로운 태양을 보는 것처럼 모두가 새 희망을 가지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태양은 어제도 떠올랐던 같은 태양이며, 해가 바뀌었다고 태양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바뀐 것은 인간들의 마음인 심정상태가 변화된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태초가 뜻하는 것은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기 시작하는 처음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창조 기사에서 창조의 각 단계들을 시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루로 표현된 날이 실제 역사에서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주와 지그의 장대한 창조에 대해 매우 제한된 정보만 제공할 뿐 세부적인 내용은 커다란 공백으로 남겨둡니다.

 

창조의 선언(1)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더불어 하늘과 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지으셨습니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존재하며, 하나님의 의해서만 생명과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피조물로서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올바른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

 본문은 1장 전체의 서언인지, 아니면 2-3절의 초기 원시적 우주의 발생을 일으킨 창조의 순간에 대한 묘사인지에 대해 견해가 나뉩니다.

1절은 최초의 무에서 유의 창조 순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3절은 그 최초에 창조된 우주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1장의 창조 기사가 원시적인 혼돈의 상태를 전제한다는 견해는 '배경이해'에서 설명한 대로 수용하기 어렸습니다. 1절은 1장 전체의 서언일 수도 있습니다. 서언은 종종 곧 장 이어지는 내용과 전체 내용을 위한 이중적 서언이 될 수 있습니다(예. 레위기 1:2). 1절의 선언은 가나안과 고대 근동 지역의 우주 발생론과 범신론적 창조론을 의도적으로 반박하고 자연을 비신화하는 여호와 종교의 차별적 선언입니다.

‘천지’, 곧 ‘하늘과 땅’은 전형적인 총칭어법(merism)으로 온 우주와 그 안에 속한 만물을 가리킵니다. 동사 ‘바라’는 언제나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측면에서 매우 특별합니다. 이 동사는 인간이 흉내 내거나 재현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비교 불가한 능력의 창조 행위를 표현합니다.

  

첫째 날의 창조(2-5)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공허를 걷어내고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혼돈의 세력이 전쟁과 파괴와 죽음으로 창조 세계를 위협하지만 혼돈을 이기신 하나님께서 샬롬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존재의 혼돈과 삶의 공허로 힘겨워하고 있습니까? 삶에 질서를 부열하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2-5)

‘혼돈’과 ‘공허’의 상태는 아직 바다와 뭍의 경계가 설정되지 않은 등, 초기 지구의 무질서한 상황을 말하며, 최초 창조 직후의 상태에 대한 묘사일 수 있습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의 문자적 의미는 ‘깊음의 표면 위에 있다’입니다. 이것은 빛이 없는 깊은 어두움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깊음’을 고대 근동의 신화를 배경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깊음’을 뜻하는 ‘테홈’은 수메르 창조 신화에서 바다의 신 티아마트에서 기원하는데, 창세기에서는 신화적 요소가 탈색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이 우가릿어와 에블라어에서 깊음과 심연을 의미하는 비슷한 단어들을 찾아내 그것이 티아마트와는 관련 없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한다’는 묘사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강풍’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신’인데, 다만 사도행전 2:2에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영이 임재한 가운데 자연풍이 아닌 강한 성령의 기운으로서 특별한 바람이 동반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참조. 출애굽기 14:21; 15:10의 루아흐[기는 ‘바람’을 의미하는데 이 바람도 자연풍으로 보이지 않는다).

1-3절을 중조설, 즉 재창조론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1:1에서 하나님께서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1:2에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었습니다. 그래서 3절부터 하나님께서 우주의 질서를 다시 바로잡는 재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이단 사설에 의하면, 1절에서 이미 인간 창조도 이루어졌는데, 1절과 2절 사이에서 사탄의 반란이 발생하여 그들이 땅으로 내쫓겼고 세상을 혼돈과 공허로 망가트려놓았습니다. 그들은 인간 여성들과 혼음하여 네피림을 낳았으며 이로써 최초의 인류는 모두 사탄의 추종자로 전락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1장과 2장의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류가 아닌 새롭게 창조된 인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전혀 증거가 없는 억측이며 많은 이단들이 악용한 해석입니다. 최초의 직접 명령은 ‘빛이 있으라’입니다. 이후의 창조도 명령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세계창조는 말씀에 의한 창조입니다. 최초의 빛은 갓 태동한 우주에 존재하는 빛의 출현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일 수 있으며, 거기에는 지구를 비추는 태양이 포함될 것이다. 필자는 태양은 넷째 날의 광명체의 창조 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첫째 날에 이미 창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5절에서 빛의 창조와 더불어 ‘첫째 날’의 창조가 마무리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지구적 관점에서 명백히 낮과 밤의 구분이며 하루에 대한 표현입니다. 모세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체계를 이용해 우주와 지구의 창조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과학적 사실의 문제와는 별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장의 본문 자체 내에서도 넷째 날에 지구를 비추는 광명체의 출현과 더불어 ‘사시사철과 날과 해’의 주기, 곧 낮과 밤의 주기가 비로소 고정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날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히브리어 욤()의 의미에 대한 해묵은 논쟁과 관련되어 있는데, 필자는 표현상 창세기 1장에서 ‘욤’은 24시간의 하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오랜 지구론을 믿는 점진 창조론자의 입장을 지지하며, 여기서 ‘날’은 긴 ‘연대’를 가리킵니다. 사실 ‘욤’이 24시간의 하루가 아닌 긴 시대나 기간을 지시하는 것은 구약 여러 곳에서, 특히 ‘마지막 시대(날)’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시편 90:1; 요엘 4:18; 아모스 5;18; 오바냐 1:12,15).

 

둘째 날의 창조(6-8)

창조 신앙은 모든 신앙의 시작이고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있는 모든 신앙의 시작이고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시고 세상은 그분의 의지에 의해서만 존재하기에, 모든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알고 지으신 분을 의뢰할 때만 존재의 참 의미를 누릴 수 있습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6-8)

둘째 날에 하늘의 궁창이 만들어집니다. 궁창(라키아)은 창세기 1장 외에 주로 에스겔(5회), 시편 (2회), 다니엘(1회)에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모두 창세기와 시편처럼 자연계든, 에스겔처럼 천상계든 하늘에 대한 묘사에서 사용됩니다. 동사 라카()는 손바닥이나 천막과 같은 것을 '펼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고대인의 관점에서 거대하게 하늘에 펼쳐져 온 땅을 뒤덮고 있는 창공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마치 거대한 덮개와 같이 이해한 것입니다. 8절에서 그 궁창은 ‘하늘’(샤마임)로 불립니다(참조. 20절의 ‘하늘의 궁창’ [레키아 하샤마임].

물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뉩니다. 이것은 땅 위의 강과 호수, 바다에 담긴 물과 더불어 하늘에 갇혀 있는 물(비구름이 담고 있는 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반목 형식문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물의 창조가 셋째 날의 육지의 조성과 더불어 마무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셋째 날의 창조(9-13)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권능이 있어 존재와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려고 말씀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오신 말씀이실 때 말씀을 듣는 자는 변화와 능력을 경험합니다. 말씀이 새 창조의 능력임을 믿는다면,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9-13)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직 미완성이었던 최초의 창조 상태, 곧 혼돈의 무질서한 세계에서 정돈되고 질서 있는 세계로 진행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필자는 창세기 1장이 시적인 형식의 창조 작업을 묘사하지만, 성경은 저자 모세의 지적 수준과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에 역사적 사실 또한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9절은 지구의 점진적인 형성 과정에 대한 묘사일 수 있습니다. 뭍이 드러나고 물이 한곳에 모여 '바다'라 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풀과 채소와 초목이 종류대로 나오게 하십니다(11). 여기서 ‘종류’(민)의 범주는 동식물 분류학적으로 정확히 적시하기 어렵습니다. 창조와 진화와 관련된 토론에서 이 용어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지만, 그것이 생물학적 분류의 어느 범주에 속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진화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직접 개입에 의한 창조를 믿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예컨대 개나 고양이의 ‘종류’를 창조하셨고, 아종과 변종은 번식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로 간주합니다. 진화론은 자연법칙에 따라 생명체가 우연히 탄생하고 이후로는 물리학적 법칙에 의한 자가 발전의 진화를 이어갔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유신 진화론은 생물의 탄생과 진화의 방향만 유도할 뿐 생물 개체의 직접적 창조에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유신진화론에 의하면, ‘각기 종류대로’에서 모든 생물의 종류는 결국 진화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아직은 비어있는 땅, 바다, 하늘에 셋째 날부터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채워 가십니다. 이 삼중적 자연계의 공간은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채우기 위해 준비한 무대로서 생명으로 충만한 생태계로 조성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보시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창조 안에 지혜와 영광, 권능이 충만히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이자 거룩한 임재를 담은 성소입니다. 우리는 세계가 정결하고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도록 보존과 회복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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