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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주해(02-01) 


 인간 창조와 안식의 의미

창세기 1장 26절-2장 3절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왕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직접 계획하시고 도모하시므로 완벽하게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땅 위의 생물과 더불어 인간을 지으시므로 창조 사역을 완결하십니다. 결코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거나 진화론적 산물일 수 없습니다.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사명과 더불어 생육을 명하셨습니다.

 

여섯째 날 마지막 창조물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물리적 의미의 형태나 실체를 의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내적 형상, 곧 속성과 본질에 대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자비하심과 거룩함의 속성을 인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은 역시 인격적 존재들인, 하나님을 시중하는 천상존재들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여섯째 날의 인간 창조(26-27)

인간은 왕적 권한을 이행하는 존재입니다. 권한을 선히 사용하여 지혜와 성실함으로 다스리면 기뻐하실 것이나, 남용하여 함부로 짓밟고 탈취한다면 탄식을 낳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지나친 착취와 전횡으로 인간과 자연을 위험에 빠트리지는 않습니까? 대리통치자로서 겸손과 자애를 가지며 살아가야 합니다.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인간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6-27)

여섯째 날의 마지막 창조물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많은 난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를 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만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함께 머리를 맞대신다는 이 특이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이제 창조하고자 하시는 대상의 중요함과 독특함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1) ‘우리’(26a)

먼저 살핀 것은, 복수형 ‘우리’에 대한 의미를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유대 해석가들의 견해를 따라 하나님과 천상 존재들의 하늘의 어전 회의 장면에 대한 묘사라는 해석이 인기를 얻어왔습니다(창세기 11:7; 이사야 6:8; 예레미야 23:18,22). 반면에 초대교회 시대부터 기독교 해석가들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일 수 있겠지만, 아직 삼위일체 개념이 드러나지 않은 창세기 본문에 조직신학적 개념을 과도하게 주입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다른 기독교 해석가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존엄 복수 호칭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표현은 이것이 하늘의 어전 회의에서의 어법이긴 하되 천상존재들의 왕으로서 천사들과의 협의를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자기 결정권의 행사에 의한 일방적 선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절대 주권을 가진 권력자는 ‘우리가 ∽하자’는 어법으로 선언적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27절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진술에도 정확히 부합합니다.

(2) ‘형상’과 ‘모양’(26b)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형상’과 ‘모양’은 별다른 의미론적 차이 없이 유사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형상’은 복사본 혹은 원본과 아주 흡사한 형태를, ‘모양’은 한 대상과 다른 대상이 비교됨을 강조하거나 두 대상의 유사함을 강조합니다.

27절에 비추어 보면, ‘형상’과 ‘모양’은 자주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으로 대표됩니다. 아마도 천상의 인격적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성품,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을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공유한 하나님의 속성을 내던지고 반란을 저질렀으며, 결국 인간의 하나님 형상까지도 훼손해 타락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최근의 매우 좋은 해석은 이어지는 26절 마지막의 ‘다스리게 하자’는 표현과 28절에 비추어 하나님의 형상을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제국들은 왕을 신의 형상을 지닌 대리 통치자로 간주했습니다.

(3) 창조(27)

세 번이나 반복된 ‘창조하다’라는 특별한 용어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구절의 조합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심으로 창조 목표를 이루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 창조 주간에 바다의 거대 생물에게만 ‘창조하다’가 사용된 사실은(21) 하나님이 인류의 기원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진술에서 이 ‘사람’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집단 명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이들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을 포함합니다. ‘형상’의 반복하며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을 배치해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본문이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도발적인 구절은 학자들의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해당 문맥과 9:5-6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어구가 차지하는 역할을 보면 그 의미에 대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표현을 배치하여 이 구절을 강조합니다. 이 기본적인 관계 외에 인간은 삶을 유지하고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27절은 중요한 네 가지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1) 남녀의 구분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의 본질적 측면은 하나님의 본성과 상당히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녀라는 양성에서 각기 보이는 뚜렷한 특성들을 포괄해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어느 한 성에 치우친 속성을 가진 분으로 상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림은 부분적이고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2) 인간의 양성에 대한 이 언급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산의 복을 베푸시고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시는 배경으로 작용합니다(28). (3) 이 구절은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인간됨의 본질적 측면에서 남자와 여자는 질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시고 친교를 특징으로 하는 관계에서 정체성과 운명을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어구는 기본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상호 호혜적 관계임을 암시합니다(참조, 2:21-24). 이 기본적인 관계 외에 인간은 삶을 유지하고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이 단락에서 인간됨의 중요한 측면을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또 다른 하나는 말이나 언어를 다루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축복하시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심으로 태초에 이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28-30).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을 닮은 이들과 대화하실 수 있으며, 성경은 그러한 대화들의 기록입니다. 나아가 사람은 대화로 하나님과 순전한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근거가 이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부르심으로 자신을 전심으로 예배할 한 민족을 세우셨습니다. 사람은 또한 대화로 서로 소통하고 이를 통해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풍부한 인격적 교류로 인간은 큰 기쁨을 얻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깊은 내면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성의 한 측면에서 흘러나옵니다.

나아가, 인간은 말을 다루는 능력으로 사물을 개념화하고 계획하며 평가하고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생물학적 필요를 넘어서는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행동을 인지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또한 인간은 언어 능력이 있기에 지혜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은 인간이 창조적 본능을 실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28)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에게 먹을거리를 주십니다. 원초적인 즐거움이자 충만한 생을 위한 축복입니다. 탐욕으로 취한다면, 복은 저주로 바뀌고, 질서는 깨지고, 생태계의 균현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고 서로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욕심을 버리고 제 몫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28)고 인간에게 특별한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식 능력은 신체적 조건에 내제되어 있지만 다산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다산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는 주변 이웃 국가들과 차이를 보입니다. 주변 국가들은 지역 산당에서 다산 의식을 행해야만 땅이 풍성한 곡식을 내고 가축과 여성들이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스리거나 지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1:26,28). 하나님의 지배권이 어느 한 ‘대표’(representative)에 의해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만물이 인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2:8).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의 때에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키실 것입니다(히브리서 2:5-8).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부요하게 되고 번영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경이로운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의 지상 대표적인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연속적인 복을 기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창조의 완료와 안식(2:1-3)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영적으로 회복되는 시간입니다. 다시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이름을 높여드릴 때 창조의 축복으로 다시 회복될 줄 믿습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1-3)

마지막으로 인간의 창조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다 이루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하늘과 땅(천지)을, 그리고 하늘과 땅의 다양한 구성물들(만물)의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창조되었고 세상이 자체적으로 지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일을 멈추고 안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일곱째 날은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신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한 날로 구별하셨습니다.


안식은 창조의 목적이자 향유의 축제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평온과 휴식을 경험하는 영광스럽고 축복된 시간입니다. 사람이 안식을 회복할 때, 생존을 위한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창조의 주기를 따라 살 때 진창 같은 삶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인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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