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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주해(01-02)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장 14-25절


 

처음부터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숨 쉬고 움직이며 번성하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 나왔습니다. 인간이 생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과 원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생과 사가 모두 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가 생명의 주권자임을 인정합니까? 하나님‘도’ 생명의 주권자가 아니라 하나님‘만’ 생명의 주권자임을 인정하십니까?

  

넷째 날에 빛이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발광체인 태양과 달이 하늘에 만들어지고, 더 나가서 별들도 창조됩니다. 다섯째 날에는 하늘(공중)과 물(수중)에 생명체들이 탄생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각자의 영역에 가득 채웁니다. 여섯째 날에는 땅에 동물과 인간이 창조되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마무리 됩니다. 생명체는 식물과는 달리 호흡을 하는 생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흡을 가진 생명체들에게 복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넷째 날의 창조(14-19)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이 아무리 크고 놀랍다 할지라도 천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우상은 신이 아닙니다. 한낱 사람이나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창조주를 떠나 살면 삶은 질서를 잃고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삶의 틀과 내용 모두 주님이 창조하시도록 허락합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14-19)

넷째 날부터는 세상을 충만하게 채우고 살아갈 존재들을 창조하십니다.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신 것에 대응하여,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늘의 해와 달을 만드셨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태양과 달이 이날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초의 ‘빛이 있으라’는 명령과 더불어 지구를 비추는 태양과 달, 별들이 이미 창조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 첫날 창조된 광명체인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지구에 온전히 발현되어 계절과 하늘의 시간표 역할을 시작한 것이 넷째 날일 수 있습니다. 하늘의 광명체인 해와 달을 구분할 뿐 아니라,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결정하는 우주의 시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징조’는 동양의 춘분, 추분, 하지, 동지와 같은 천계 변화의 변곡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계절’은 사계절, ‘날’은 365일의 날짜, ‘해’는 1년의 기간을 뜻할 것입니다. 따라서 3절에서 ‘빛’의 창조가 이미 지구 생태계 조성을 위한 광명체들을 포함했다고 본다면, 앞서 말할 대로 태초에는 직두의 기상 조건에 의해 하늘에 또렷이 나타나지 않았던 해와 달이 이때 드러난 것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14절의 ‘광명체들이 있으라’는 명령은 이미 창조된 해와 달에 대한 지구 중심적인 문학적 묘사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해와 달이 지구의 시간표 기준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하도록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3절에서 빛이 창조될 때 지구를 비친 임시적인 광명체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매우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흥미롭게도 1장의 우주와 지구의 창조 과정 및 생명체의 출현 순서는 과학적으로 드러난 생명체의 출현 순서와 거의 동일합니다. 과학 진화론에서 우주/지구-(미생물)-식물-동물-인간 순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은 과학과 전혀 무관하며, 오로지 신학적-문학적 진술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과도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만일 문자적으로 6일 창조를 믿으면서 식물 이전에 태양은 없었다면, 하루 뒤에 즉시 태양의 창조와 더불어 식물이 자생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넷째 날부터 여섯 째 날까지의 3일은 창조의 처름 3일과 다음 도표와 같이 대조될 수 있습니다. 첫째 날의 광명체들과 별들의 창조로 구체화됩니다.

형태 갖춤/자원
(혼돈에 반대)
영역 채움/사용자
(공허에 반대)
창조물 창조물
1 4 광명체들과 별
2 궁창(1:6-8),
하늘, 바다
5 서식 생물들, 새, 물고기
3 마른 땅(1:9-10)
식물(1:11-13)
6 육상동물(1:24-25),
사람(1:26-31)

둘째 날 궁창의 창조와 더불어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는데, 넷째 날 하늘에는 새가 바다에는 물고기가 창조됩니다. 셋째 날 마른 땅이 드러나고 거기에 식물이 싹트기 시작하며, 여섯째 날에 땅 위의 동물들과 사람들이 창조되고 식물은 그들의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날의 창조(20-23)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이성과 의지로 내적인 것에 속한 것을 유용하고, 먹고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속사람에 속한 것이 내적인 것을 먹고 마셔야지 자연적인 것을 먹고 마셔서는 안 됩니다. 내적인 사람에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내적인 것을 먹고, 남에게 전하여 주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20-23)

다섯째 날에 둘째 날 준비된 하늘(궁창)과 바다에 생물을 채우십니다. ‘생물’(네페쉬 하야, היה שׁנפ)은 숨 쉬며 살아 있는 생명체(iving creature)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더불어 물에 생물들이 번성하여 가득 찹니다. 물은 물고기를 비롯한 각종 수증 생물들의 영역입니다. 강과 바다, 호수가 다양한 생물들로 채워집니다. 21절 수중 생물의 ‘번성’(샤라츠 רץשׁ)은 떼 짓는다는 뜻입니다. 물속의 때 잣는 생물은 수영하는 물고기 떼와 바닥에 기는 것들을 포함할 것입니다. 하늘의 궁창은 공중을 나는 새들의 영역입니다. 각종 새들이 하늘을 날면서 지구 생태계에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생명의 역동성을 더합니다. 수중 생물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큰 바다 짐승들’과 ‘떼 지어 움직이는 생물들’입니다. 아마 후자는 작은 생물체들일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큰 바다 짐승들’의 히브리어 타니님(תננים)을 우가릿 신화에서 바알의 대적인 바다 괴물 얌(yam)의 별칭인 타난(tnn)에서 차용한 용어로 봅니다. 물론 창조 기사는 ‘타니님’의 신화적 색체를 걸러내어 단순히 피조물로 보고 있지만 그 단어의 우가릿 기원설은 가능한 견해일 수 있습니다. 타니님(단수 타닌)은 구약의 몇 군데에서도 이러한 신화적 특정이 반영된 상징적인 ‘용’으로 번역됩니다(시편 74:13-14: 이사야 27:1; 51:9; 예레미야 51:34). 하지만 다른 여러 곳에서는 그것이 단순히 고래, 악어, 뱀과 같은 짐승들로 번역됩니다(출애굽기 7:9, 10, 12: 신명기 32:33; 시편 91:13; 에스겔 29:3, 32:2). 타닌/타니님의 정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현재의 번역 ‘큰 바다 짐승’은 무납해 보입니다. 대체로 ‘큰 바다 짐승’은 수종에서 개체로 헤엄치는 큰 생물로 볼 수 있으며, ‘물에서 번성하는 모든 생물’은 기는 것을 포함하여 때 지어 헤엄치는 작은 생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날의 창초 작업을 나타내는 동사는 1절에 이어 다시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만 사용되는 바라()입니다. 이것은 동사의 의도적인 사용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호흡이 있는 생명체의 창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와 물고기의 창조 후,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어 번성할 수 있게 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법이지만, 이것은 자신이 친히 생물들을 축복하여 온 땅을 생물들로 가득 채우려는 창조주의 의지와 계획에 대한 표현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복을 주다’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최초로 나타나는데, 최초의 복의 대상은 생명체들, 곧 새와 물고기들입니다.

 

여섯째 날의 창조(24-25)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듣지 못하고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여 그냥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표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루심을 받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니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내리십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4-25)

여섯째 날의 창조물은 공중의 새와 수중 생물에 이어 땅의 생물들인 육상 짐승과 사람들입니다. 이 단락에서 짐승의 창조가 언급되고 이어지는 단락에서 창조의 절정으로 연간 장조조가 묘사됩니다. 육상 동물들이 종류별로 구분되어 나열됩니다. 가축, 기는 것, 땅의 짐승. ‘땅의 짐승’(하에토 에레츠 )은 매우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범주로 보여지만, 앞선 ‘가축’과 대비되는 ‘야생 동물’로 볼 수 있습니다. 새나 물고기의 경우와 달리 육상 동물에는 복이 선언되기 않습니다. 다음 단락의 인간 창조에서 보듯이, 인간에게도 역시 복이 선언되고 생육과 번성의 명령이 내려집니다(28). 그러나 육상 동물에게는 복뿐만 아니라 생육과 번성의 명령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생육과 번성이 하나님의 복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상 동물의 복과 번성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로 어떤 사람은 동물의 번성이 인간을 위협하고 거주지와 이를 둘러싼 경쟁을 초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주 창조의 절정이자 생물 창조의 절정인 남녀 사람에게 선언 복과 번성의 명령 아래 동물이 자동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2장에서 아담이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짓습니다. 반면에 식물의 작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식물계 또한 그에게 위임되었기에 그가 식물의 이름도 지었다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의 자리를 주시고, 각 생물체에게도 걸맞은 자리를 주십니다. 두신 자리에 있을 때 그 생명은 빛나고, 종류대로 만드신 다양성을 발현할 때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합니다. 우리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려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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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1-0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장 1-13절 


새해가 되면 새로운 태양을 보는 것처럼 모두가 새 희망을 가지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태양은 어제도 떠올랐던 같은 태양이며, 해가 바뀌었다고 태양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바뀐 것은 인간들의 마음인 심정상태가 변화된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태초가 뜻하는 것은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기 시작하는 처음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창조 기사에서 창조의 각 단계들을 시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루로 표현된 날이 실제 역사에서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주와 지그의 장대한 창조에 대해 매우 제한된 정보만 제공할 뿐 세부적인 내용은 커다란 공백으로 남겨둡니다.

 

창조의 선언(1)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더불어 하늘과 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지으셨습니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존재하며, 하나님의 의해서만 생명과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피조물로서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올바른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

 본문은 1장 전체의 서언인지, 아니면 2-3절의 초기 원시적 우주의 발생을 일으킨 창조의 순간에 대한 묘사인지에 대해 견해가 나뉩니다.

1절은 최초의 무에서 유의 창조 순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3절은 그 최초에 창조된 우주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1장의 창조 기사가 원시적인 혼돈의 상태를 전제한다는 견해는 '배경이해'에서 설명한 대로 수용하기 어렸습니다. 1절은 1장 전체의 서언일 수도 있습니다. 서언은 종종 곧 장 이어지는 내용과 전체 내용을 위한 이중적 서언이 될 수 있습니다(예. 레위기 1:2). 1절의 선언은 가나안과 고대 근동 지역의 우주 발생론과 범신론적 창조론을 의도적으로 반박하고 자연을 비신화하는 여호와 종교의 차별적 선언입니다.

‘천지’, 곧 ‘하늘과 땅’은 전형적인 총칭어법(merism)으로 온 우주와 그 안에 속한 만물을 가리킵니다. 동사 ‘바라’는 언제나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측면에서 매우 특별합니다. 이 동사는 인간이 흉내 내거나 재현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비교 불가한 능력의 창조 행위를 표현합니다.

  

첫째 날의 창조(2-5)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공허를 걷어내고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혼돈의 세력이 전쟁과 파괴와 죽음으로 창조 세계를 위협하지만 혼돈을 이기신 하나님께서 샬롬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존재의 혼돈과 삶의 공허로 힘겨워하고 있습니까? 삶에 질서를 부열하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2-5)

‘혼돈’과 ‘공허’의 상태는 아직 바다와 뭍의 경계가 설정되지 않은 등, 초기 지구의 무질서한 상황을 말하며, 최초 창조 직후의 상태에 대한 묘사일 수 있습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의 문자적 의미는 ‘깊음의 표면 위에 있다’입니다. 이것은 빛이 없는 깊은 어두움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깊음’을 고대 근동의 신화를 배경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깊음’을 뜻하는 ‘테홈’은 수메르 창조 신화에서 바다의 신 티아마트에서 기원하는데, 창세기에서는 신화적 요소가 탈색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이 우가릿어와 에블라어에서 깊음과 심연을 의미하는 비슷한 단어들을 찾아내 그것이 티아마트와는 관련 없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한다’는 묘사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강풍’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신’인데, 다만 사도행전 2:2에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영이 임재한 가운데 자연풍이 아닌 강한 성령의 기운으로서 특별한 바람이 동반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참조. 출애굽기 14:21; 15:10의 루아흐[기는 ‘바람’을 의미하는데 이 바람도 자연풍으로 보이지 않는다).

1-3절을 중조설, 즉 재창조론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1:1에서 하나님께서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1:2에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었습니다. 그래서 3절부터 하나님께서 우주의 질서를 다시 바로잡는 재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이단 사설에 의하면, 1절에서 이미 인간 창조도 이루어졌는데, 1절과 2절 사이에서 사탄의 반란이 발생하여 그들이 땅으로 내쫓겼고 세상을 혼돈과 공허로 망가트려놓았습니다. 그들은 인간 여성들과 혼음하여 네피림을 낳았으며 이로써 최초의 인류는 모두 사탄의 추종자로 전락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1장과 2장의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류가 아닌 새롭게 창조된 인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전혀 증거가 없는 억측이며 많은 이단들이 악용한 해석입니다. 최초의 직접 명령은 ‘빛이 있으라’입니다. 이후의 창조도 명령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세계창조는 말씀에 의한 창조입니다. 최초의 빛은 갓 태동한 우주에 존재하는 빛의 출현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일 수 있으며, 거기에는 지구를 비추는 태양이 포함될 것이다. 필자는 태양은 넷째 날의 광명체의 창조 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첫째 날에 이미 창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5절에서 빛의 창조와 더불어 ‘첫째 날’의 창조가 마무리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지구적 관점에서 명백히 낮과 밤의 구분이며 하루에 대한 표현입니다. 모세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체계를 이용해 우주와 지구의 창조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과학적 사실의 문제와는 별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장의 본문 자체 내에서도 넷째 날에 지구를 비추는 광명체의 출현과 더불어 ‘사시사철과 날과 해’의 주기, 곧 낮과 밤의 주기가 비로소 고정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날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히브리어 욤()의 의미에 대한 해묵은 논쟁과 관련되어 있는데, 필자는 표현상 창세기 1장에서 ‘욤’은 24시간의 하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오랜 지구론을 믿는 점진 창조론자의 입장을 지지하며, 여기서 ‘날’은 긴 ‘연대’를 가리킵니다. 사실 ‘욤’이 24시간의 하루가 아닌 긴 시대나 기간을 지시하는 것은 구약 여러 곳에서, 특히 ‘마지막 시대(날)’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시편 90:1; 요엘 4:18; 아모스 5;18; 오바냐 1:12,15).

 

둘째 날의 창조(6-8)

창조 신앙은 모든 신앙의 시작이고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있는 모든 신앙의 시작이고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시고 세상은 그분의 의지에 의해서만 존재하기에, 모든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알고 지으신 분을 의뢰할 때만 존재의 참 의미를 누릴 수 있습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6-8)

둘째 날에 하늘의 궁창이 만들어집니다. 궁창(라키아)은 창세기 1장 외에 주로 에스겔(5회), 시편 (2회), 다니엘(1회)에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모두 창세기와 시편처럼 자연계든, 에스겔처럼 천상계든 하늘에 대한 묘사에서 사용됩니다. 동사 라카()는 손바닥이나 천막과 같은 것을 '펼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고대인의 관점에서 거대하게 하늘에 펼쳐져 온 땅을 뒤덮고 있는 창공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마치 거대한 덮개와 같이 이해한 것입니다. 8절에서 그 궁창은 ‘하늘’(샤마임)로 불립니다(참조. 20절의 ‘하늘의 궁창’ [레키아 하샤마임].

물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뉩니다. 이것은 땅 위의 강과 호수, 바다에 담긴 물과 더불어 하늘에 갇혀 있는 물(비구름이 담고 있는 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반목 형식문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물의 창조가 셋째 날의 육지의 조성과 더불어 마무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셋째 날의 창조(9-13)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권능이 있어 존재와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려고 말씀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오신 말씀이실 때 말씀을 듣는 자는 변화와 능력을 경험합니다. 말씀이 새 창조의 능력임을 믿는다면,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9-13)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직 미완성이었던 최초의 창조 상태, 곧 혼돈의 무질서한 세계에서 정돈되고 질서 있는 세계로 진행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필자는 창세기 1장이 시적인 형식의 창조 작업을 묘사하지만, 성경은 저자 모세의 지적 수준과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에 역사적 사실 또한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9절은 지구의 점진적인 형성 과정에 대한 묘사일 수 있습니다. 뭍이 드러나고 물이 한곳에 모여 '바다'라 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풀과 채소와 초목이 종류대로 나오게 하십니다(11). 여기서 ‘종류’(민)의 범주는 동식물 분류학적으로 정확히 적시하기 어렵습니다. 창조와 진화와 관련된 토론에서 이 용어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지만, 그것이 생물학적 분류의 어느 범주에 속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진화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직접 개입에 의한 창조를 믿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예컨대 개나 고양이의 ‘종류’를 창조하셨고, 아종과 변종은 번식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로 간주합니다. 진화론은 자연법칙에 따라 생명체가 우연히 탄생하고 이후로는 물리학적 법칙에 의한 자가 발전의 진화를 이어갔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유신 진화론은 생물의 탄생과 진화의 방향만 유도할 뿐 생물 개체의 직접적 창조에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유신진화론에 의하면, ‘각기 종류대로’에서 모든 생물의 종류는 결국 진화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아직은 비어있는 땅, 바다, 하늘에 셋째 날부터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채워 가십니다. 이 삼중적 자연계의 공간은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채우기 위해 준비한 무대로서 생명으로 충만한 생태계로 조성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보시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창조 안에 지혜와 영광, 권능이 충만히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이자 거룩한 임재를 담은 성소입니다. 우리는 세계가 정결하고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도록 보존과 회복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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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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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나 철학자들은 인류의 시작을 물, 불, 공기, 단백질 등등 다양한 근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인류의 기원이 최초 어떤 생명체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이 동물로부터 진화했지만, 지금쯤은 원숭이이나 짐승이 종(種)이 다른 생명체를 변형 출산했다는 토픽이라도 들어봤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소식을 들어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에 소개된 천지만물의 시작은 이론(理論)이나 가설(假說)이 아니라 사실(事實)입니다. 창세기는 로마서, 계시록과 함께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창세기는 우리의 기원을 말하고, 계시록은 우리가 최종적으로 가야할 곳을 소개합니다. 또 로마서는 우리가 그곳에 가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믿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만물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창세기의 제목  

원래 구약 성경들은 이름 없이 두루마리로 존재했습니다. 점차 유대인들은 각 두루마리 성경의 첫 단어를 중심으로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세기의 첫 단어는 ‘태초에’라는 뜻의 ‘베레쉬트’입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창세기’는 70인역에서 ‘기원’이란 의미로 ‘톨레돗(toledoth)’를 사용하자, ‘게네세오스(Geneseos)’fh 변역하고 이를 명칭으로 정했습니다. 한문 성경에서는 ‘創世記’로 정했고, 한글 성경에서는 한문 성경의 영향을 받아서 ‘창세기’라고 부르게 됩니다.

 

창세기의 저자

유대인들은 앞의 다섯 성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토라’로 부르고, 기독교는 ‘모세오경’으로 칭합니다. 예수님도 ‘모세의 글’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모세의 저작설을 지지했습니다. 신약 성경의 정경화 과정 속에서 ‘사도성’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모세의 권위는 모세오경을 이해는 기본 틀입니다.

⑴ 내적 증거

성경에서 모세가 작성했다는 자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기 17:14; 신명기 1:1; 여호수아 1:7; 열왕기상 2:3 등,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8:4; 마가복음 12:26; 요한복음 7:19; 사도행전 26:22 등이 있습니다.  

⑵ 외적 증거

전통적으로 전승(傳承)들은 다섯 권은 모세가 기록한 것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비평적 의미에서 모세는 아닙니다. 신명기에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면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권위를 가진 사람이 창세기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누가 기록했던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기 때문에 그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창세기의 기록

연대 창세기의 정확한 기록 연대를 추정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출애굽으로부터 모세가 죽은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출애굽 연대는 성경 연대에 근거하여 B.C. 1446을 출애굽 시기를 봅니다. 이 역사적 근거는 투트모세 3세(Thutmoses, B.C. 1504~1448)를 이스라엘의 탄압자로 보고 그 아들 아멘호텝 2세 (Amenhotep, B.C. 1450~1420)때 모세로 인해 출애굽 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모세 오경은 출애굽으로부터 가나안 입성 직전까지인 B.C. 1446-1407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창세기의 기록 목적

창세기의 기록 목적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출애굽을 해야 했으며,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 익숙했던 이스라엘은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오히려 애굽으로 되돌아가 몸은 힘들지만 정신은 편한 상태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모세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과 아들됨의 신분을 확인시켜주고, 노예가 아닌 자유자로서 살아가야할 정체성을 심어줍니다. 그를 위해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알려 줍니다. 창조주이시며, 심판자이시며, 이스라엘이 조상인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아와를 창조했으나 타락했고, 그 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타락하여 홍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고 새로운 민족과 나라를 약속하십니다. 그 후손들이 바로 지금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인 것입니다.

 

창세기의 특징

이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다른 여러 나라의 국민, 특히 바빌로니아의 개벽설화에 힘입은 바 많다고 합니다. 그 중심사상은 전혀 유대인 독특의 것으로서, 철저한 유일신교의 사상으로서 일관되어 있음을 봅니다. 또 극히 태고의 사실 중에, 신약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깊은 세계관, 인생관, 사회관이 간직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의미에 있어서, 창세기는 놀라울 만큼 하나님의 계시의 글(책)이라 할 것입니다. 또 족장사의 부분에 있어서는 그 전기가 보통의 영웅의 전기와는 전연 취이를 달리하여 정복자나 개선장군 같은 위훈(偉勳)도 없으려니와 정치적 경제적 활동에 있어서도 볼 것이 없고, 문학적 예술적 공적의 기술도 없이, 다만 오로지 유일신 하나님의 신앙사로서 시종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 비친 선민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전편에 넘쳐있는 사상은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관계여하에 있는 것으로서, 그 의미에 있어서 본서를 읽는 경우에 비로소 본서의 뜻을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일관하는 사상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이를 훈련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 인류에게 축복을 주시는 일인 것으로서, 본서는 이에 그 단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주요 내용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과 언약을 맺었지만 아담이 깨뜨렸습니다. 인간은 타락했고,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타락한 인류의 번성은 오히려 저주가 되었고, 노아 때에 홍수로 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기원이 됩니다. 창세기는 시작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창조의 시작, 역사의 시작, 타락의 시작, 이스라엘의 시작들이 담겨있습니다.

 

창세기의 구조

창세기의 구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11장까지는 창조시기로 분류하고, 12-50장까지는 족장 이야기로 분류합니다. 족장들의 이야기는 창조와 고대 세계 위에 서있습니다. 11장까지의 사람들은 보편적 사람이라면, 12장부터 등장하는 사람들, 즉 족장들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1-11장까지가 토양이라면 12-50장까지는 나무와 같습니다. 족장들의 이야기는 고대 창조 시대의 설화에 뿌리는 내리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분해  

Ⅰ. 천지 창조로부터 아브라함까지 1:1-11:32

천지와 만물을 및 인류의 창조 1:1-2:25

죄의 시작 3:1-5:32

홍수의 심판과 노아의 구원 6:1-9:29

노아로부터 아브라함까지 10:1-11:32

Ⅱ. 아브라함의 일생 12:1-25:3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 12:1-20

아브라함과 롯이 거주지를 따로함 13:1-14:24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심 15:1-17:24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 18:1-19:38

이삭의 출생 20:1-21:34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험 22:1-24

이삭의 결혼과 두 아들 23:1-25:34

Ⅲ. 이삭과 야곱의 일생 26:1-36:43

이삭의 번영과 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 26:1-27:46

야곱이 라반으로 도망감 28:1-30:43

야곱이 하란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옴 31:1-35:29

에서의 계보 36:1-43

Ⅳ. 요셉의 일생 37:1—50:26

요셉이 애굽으로 팔리워 감 37:1-36

유다와 다말의 사건 38:1-30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 39:1-41:57

요셉이 형제들을 만남 42:1-45:28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함 46:1-49:33

야곱의 죽음 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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