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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3-01)

 

 


형 에서와 화해하는 야곱

창세기 33장 1-20절


 사이가 멀어진 두 형제가 만났습니다. 둘이 충돌하여 형은 전복되었고 동생은 우회하였습니다. 형제애는 사라지고 빼앗긴 자와 빼앗은 자로 날을 세웠습니다. 두 형제에게 다른 시차가 존재합니다. 형에게는 세겜의 시간이, 동생에게는 하란의 시간이, 여전히 야곱은 자기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마하나임의 환상과 얍복 강변의 씨름에서 연거푸 하나님의 사자들과 하나님(하나님의 사자)을 만난 야곱은 만반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곁에 계셨습니다. 야곱은 ‘눈을 들어’ 멀리서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대에 다시 긴장감이 돕니다.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에서를 영접하기 위해 가족들을 분리했습니다. 현재 그는 비상사태를 대비해 모든 대열을 두 진영으로 나누어놓은 상태입니다. 이번에는 가족들을 나누어 에서를 맞을 준비를 합니다.

 

야곱과 에서의 상봉(1-4)

형은 야곱에게 달려오고, 야곱은 일곱 번 절하며 나아갑니다. 형은 야곱을 동생이라 부르며 반가움을 표하지만, 야곱은 형을 주라 부르며 장정 400명을 경계합니다. 한사코 마다하는 형에게 예물을 강권하기 바쁩니다. 야곱은 형과 만났지만 아직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1-4)

야곱은 멀리서 에서가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가족과 더불어 그를 맞을 준비를 합니다. 그는 가족들의 조를 짰습니다. 먼저 모든 자녀들을 각자의 어머니에게로 가게 했습니다(1). 라헬과 레아, 그리고 그녀들을 섬기는 두 여종입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순서로 줄을 세웠습니다. 에서를 기준으로 역순으로 배치했습니다. 제일 앞에 두 여종과 그들의 자식들을 배치했습니다. 둘째 줄에 레아와 그녀의 자식들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맨 뒤에 라헬과 요셉이 서게 했습니다. 이러한 배치는 명백히 에서의 만일의 공격에 대비해서 가장 아끼는 가족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한 번 그가 라헬을 얼마나 아끼는지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의 이러한 노골적 편애가 불러올 비극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가 가장 아끼던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가장의 자격으로 맨 앞에 나가 에서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몸이 땅바닥에 닿을 만큼 정성껏 절을 올리며 그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일곱 차례 계속된 이 절은 코와 이마가 땅에 닿을 만큼 큰 절이었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따라서 일곱 번의 절은 완전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이러한 예법은 제국의 왕을 방문하는 속국의 왕이나 신하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곱의 예법은 왕을 알현하는 신하의 것입니다. 일곱 번 절을 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야곱을 본 에서는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종주국의 왕은 결코 속국의 봉신에게 달려가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종으로 여기고 있으나 에서는 그를 형제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달려와 그를 껴안았습니다.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울었습니다.

에서가 이토록 야곱을 격하게 환영한 이유는 분명히 그가 야곱에게서 받은 막대한 양의 진심 어린 선물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분명 에서에게는 선물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앙금이 말끔히 사라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20년 만의 가족 상봉을 기대하며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령들의 소식을 접한 즉시 400명의 장정을 이끌고 그에게 달려온 것입니다. 무장한 400명의 장정은 군대 급이었는데 그것은 야곱 일행의 안전한 귀향을 위해 그들을 호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는 도중에 야곱이 보낸 연거푸 세 차레의 막대한 선물을 보고 필시 그는 뜨거운 마음이 벅차오르며 감격했을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에서의 환대(5-12)

형이 먼저 손 내밀며 앞장서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이 그러했듯(창세기 31:52) 돌기둥에 돌무더기라도 쌓아 불가침 조약이라도 맺고 싶은 심정입니다. 야곱이 에서와 만난 그 자리는 경계석만 없을 뿐, 서로 발을 섞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갈르엣(창세기 31:47-49)이었습니다.

5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12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5-12)

환대를 하러 나간 야곱이 오히려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에서의 환대는 야곱의 가족들에게로 확대됩니다. 에서는 야곱의 식구들로 보이는 여자들과 자식들을 보고 그들이 누구냐고 신분을 확인합니다. 야곱은 ‘주(에서) 의 종’인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라고 답합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에서의 종으로 칭합니다. 야곱이 여기서 하나님에 대해 사용한 ‘은혜’라는 단어는 곧이어 에서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야곱은 아내들을 언급하지 않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간단히 자식들만 언급해도 아내들은 자동적으로 신분이 확인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그 자녀들을 얻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들과 아내들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이 있었음에도 그 모든 자녀를 하나님의 ‘은혜’로 얻었다고 고백합니다(5). 야곱의 소개가 끝나자 가족들이 차례로 에서에게 나아와 절을 올렸습니다. 먼저 맨 앞줄의 두 여종인 빌하와 실바가 그들의 자식들과 함께 절을 했습니다(6). 이어서 레아와 그녀의 자식들이 절을 하고 마지막에 라헬과 요셉이 다가와서 절을 올렸습니다(7).

에서는 이어서 야곱이 사전에 보낸 가축 떼에 대해 물었습니다(8). 야곱은 다시 한 번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앞서 하나님께 사용했던 ‘은혜’가 이제 에서에게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야곱이 이제 에서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정직하게 형의 용서와 자비를 요청합니다. 에서는 은혜를 베풉니다. 그는 동생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에서의 모습에서 먼지 은혜를 베풀고, 특별히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그는 동생 야곱을 위해 그의 선물을 사양합니다. 에서는 야곱을 ‘내 동생’이라 부릅니다. 야곱은 계속해서 형을 ‘주’라 부르며 자신은 ‘종’으로 불러 낮추고, 에서는 계속해서 그를 동생으로 맞아들이며 동생으로 호칭합니다. 에서의 은혜입니다. 에서도 막대한 가축을 거느린 거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서는 야곱을 배려해서 그 가축 떼를 야곱이 그대로 간직하라고 권합니다(9). 여기서 우리는 에서가 베푸는 ‘은혜’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대신하여 야곱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 셈입니다.

선물을 둘러 싼 두 사람의 씨름이 잠시 진행됩니다. 야곱은 다시 한 번 그 선물(민하)을 받아달라고 요청합니다(10). 이미 야곱은 에서의 ‘은혜’를 받은 셈입니다. 이제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는 감사의 예물로 그것을 에서에게 선물하고 싶어 합니다. 조건 없는 용서와 은혜를 베푼 에서는 마치 야곱에게 하나님과 같은 인물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표현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브네 엘로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얍복 강의 씨름장에서 뵈었던 하나님의 얼굴과 에서의 얼굴이 겹칩니다. 에서의 얼굴은 브니엘(프니엘,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이어지는 야곱의 말 또한 놀라운 의미를 내포합니다.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동사 ‘라차’는 ‘기쁘게 받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야곱은 다시 그 ‘선물’(베라카)을 받아 들라고 강권합니다. 마치 에서는 야곱의 하나님과 같이 그와 그의 예물을 기뻐합니다. 야곱의 거듭된 간청을 못 이겨 에서는 야곱의 예물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위의 10절에서는 선물이 ‘민하’로 표현되나 11절에서는 그것이 ‘베라카’로 표현됩니다. ‘베라카’는 ‘복’을 뜻합니다. 월키의 통찰은 놀랍습니다. ‘선물’(선물)로부터 예물로의 의도적이고 중대한 변화가 관찰됩니다. 이 히브리어는 27:35-36에서 야곱이 처음에 훔쳤던 ‘복’을 가리키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에서에게서 취했던 그 ‘복’을 대신해서 어떤 ‘복’(개역개정, ‘예물’)바침으로써 절묘하게 배상을 합니다.

에서는 동생에게 이제 길을 떠나자고 말합니다.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내가 너의 맞은편에서 걸으리라’입니다. 의역하면 ‘내가 너와 나란히 걸으리라’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자신의 군사들과 더불어 야곱의 여행길을 지켜주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에서는 하나님과 같은 인물로 역할합니다. 형을 피해 도망가던 벧엘에서, 떠나오던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인도와 보호를 약속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에서는 야곱과 동행하여 그를 보호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대신 성취하려 합니다.

 

야곱의 정착과 정착 기념물들(13-20)

20여년만의 계획은 서로의 간격만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야곱은 레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물만 건넬 뿐 마음은 건네지 않았습니다. 또한 라반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우를 갖추되 선을 그었습니다. 결국 에서는 세일에서 왔다가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하란에서 왔다가 숙곳에 머뭅니다.

13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13-20)

야곱은 에서의 에스코트 제안을 정중히 거절합니다. 광야를 누비는 사람들의 속도를 목축하는 자신들이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에서를 먼저 떠나보냅니다(13). 야곱이 뒤따라간 뒤 나중에 세일로 가서 에서를 뵙겠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또 다른 속임수인지를 놓고 주석가들의 토론이 진행됩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분리되었습니다.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숙곳’으로 갔습니다. 애초에 아마 이름이 없던 그곳에 야곱이 거처할 ‘집들’(수코트, 움막들)과 가축 우리를 지으며 잠시 거주하면서 ‘숙곳’이란 지명을 붙였습니다. ‘숙곳’은 ‘초막들’, ‘움막들’이란 뜻입니다. ‘숙곳’은 아마 얍복강 근처에 위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야곱은 세겜으로 이동하여 거기에 장막을 쳤습니다. 야곱은 세겜이란 인물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자신이 장막을 친 땅을 백 크시타에 샀습니다. 그는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 이를 때만 해도 한 번이었는데, 브니엘을 지날 때에 아침을 보게 됩니다. 눈부신 해가 비출 때에 그토록 두려웠던 아침이 더는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맞은 브니엘의 아침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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