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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2-01)

 


에서를 만날 준비하는 야곱

창세기 32장 1-12절


 20년의 세월은 형 에서의 존재를 더 무겁고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형의 낯빛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생각으로는 벌써 몇 백 번이고 세일 땅을 오갔습니다. 상상으로도 몇 백 번 형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 하나님을 만난 마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멀리 세일 땅 에돔 들판에 사는 형 에서에게 전령들을 보내 자신의 귀향 소식을 알립니다. 세일 산이 있는 세일 땅은 에돔 족속의 거점 지역을 일컫는 총칭으로 사해 남쪽 지역의 고산 지대를 말합니다. 에돔이 그곳을 점유하기 전에 호리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에돔 지역에는 그 산지를 중심으로 인근에 아라바 광야라 일컫는 꽤 넓은 평원도 존재했습니다. 압복 강 근처에서 세일 땅까지는 약 150km의 거리였습니다.

 

야곱이 만난 하나님의 사자들(1-2)

형 에서와의 재회를 앞두고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던 야곱에게는 온통 두려움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에서 위기 때마다 찾아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에서 위기 때마다 찾아와주셨습니다. 고향을 떠나던 길에도, 20년이 지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에도 두려움에 휩싸인 그에게 나타나셔서 동행의 증표를 쥐여주셨습니다.

1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1-2)

야곱은 귀향길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의 등장은 언제나 중대한 사건과 전환점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족장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반복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동사 ‘파가’는 공격적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입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마 집단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칭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이 동사는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왜 그 사자들이 야곱에게 나타났는지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습니다. 사자들이 야곱을 만났고, 야곱은 기이한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행렬을 목격한 뒤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칭하고 거기에 ‘마하나임’이라는 지명을 부여했을 뿐입니다(2). 출현한 사자(들)의 침묵과 역할의 부재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사자들의 출현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곧 닥칠 에서와의 만남에 대비한 보호와 인도를 위함이면서 야곱의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를 무장시키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천사들은 무리 지어 군사적 대열을 이루며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칭했습니다. ‘마하네 엘로힘’은 ‘큰 군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큰 무리의 행렬을 목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여기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로 해석되는 것이 무난해 보입니다. 야곱은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쌍수 형태의 ‘마하나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합니다. 야곱은 ‘두 개의 군대(진영)’를 말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두 무리로 나뉜 군대들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단순히 야곱이 목격한 천사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행진했기 때문에 그가 ‘두 개의 군대’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분명히 암시적입니다. 그 두 진영의 군대는 야곱의 진영과 에서의 진영의 만남을 미리 예고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에서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그를 만나러 올 때 야곱은 자신의 무리를 둘로 쪼갭니다. ‘두 떼’로 만듭니다. 이때 ‘마하네’의 복수형이 사용되면서 분립된 두 진영이 ‘두 개의 마하노트’로 표현됩니다. 하늘 군사들의 출현은 야곱에게 어떤 징조를 느끼게 하면서 그로 하여금 심리적 준비를 하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그곳에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은 그에게 이 경험이 특별했음을 암시합니다. 이 경험은 단순히 에서와의 조우에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땅의 약속과 관련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첫발을 내디딜 때 하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그는 하늘 군대가 머물러 있을 곳을 지정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에서에게 인사말을 보내는 야곱(3-5)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어도 평안은 잠시였습니다. 야곱은 외교력을 발휘하여 세일 땅에 사는 형 에서에게 심부름꾼을 먼저 보내 자신을 주의 종으로, 형을 주로 일컫고 있습니다. 세심하게 할 말을 일러주었습니다. 형의 동행을 파악하여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으려 준비했습니다.

3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3-5)

야곱은 전령들에게 극진한 예우를 담은 인사말을 보냅니다. 그는 형 에서를 ‘주인님’(‘아도니’으로 호칭하면서 자신은 주인을 시중드는 ‘종’(에베드)으로 격하합니다. 이것은 상급자에 대한 하급자의 관례적인 인사법이긴 했지만, 그의 호칭에는 형에 대한 뉘우침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극도의 살의를 품은 형에게 화해를 시도하지만, 어쩌면 도리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의 약속을 신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인사말을 담은 전갈은 단지 도착 소식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라반과 함께 거류하여 머물다 돌아오는 중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떠났다가 이제 많은 가축 떼와 종들을 데리고 왔음을 덧붙입니다(4). 이것은 금의환향을 자화자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과분한 축복을 형과 함께 나누겠다는 의사가 들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20년 세월과 왜 라반을 떠났는지는 건너뜁니다. 월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만 아마 단순히 그 긴 사연이 인사의 자리에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형의 자비를 얻기를 바란다며 말을 맺습니다(5).

 

마중 나오는 에서와 겁에 질린 야곱(6-12)

야곱은 에서가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에 겁에 질렸습니다. 즉시 일행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누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곱씹으며 전직으로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지난 시간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6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6-12)

전령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비관적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형 에서가 무려 4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행진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6). 이 ‘만남’에 사용된 동사 ‘카라’는 일반적 만남에도 사용되지만(창세기 24:65; 여호수아 9:11; 열왕기하 8:8,9; 9:18) 전쟁터에 적을 만나러 갈 때도 사용됩니다(창세기 15:10; 민수기 21:3; 열왕기상 20:27; 열왕기하 23:29). 야곱은 에서가 대군을 끌고 오는 이유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 에서의 행동은 군사적 관점에서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전령을 먼저 보내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 자신들을 모두 노출시키며 상대방이 대응할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의 공격은 효과적이지 않으며, 공습이나 야간 기습 작전이 상식적인 군사 행동일 것입니다. 사실 에서는 야곱을 호위하기 위해 큰 병력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잔뜩 겁에 질렸습니다(7). 죽느냐, 사느냐의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명석한 그는 자신들은 무장행렬이 아니기에 승산이 없는 정면 대결은 피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습니다. 그는 대열을 반으로 나눕니다. 이것은 절반만이라도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만일 에서가 한 무리를 공격하면, 그때 시간을 확보한 다른 무리가 탈출한다는 계산입니다(8). ‘두 떼’로 번역된 단어는 흥미롭게도 ‘두 개의 마하노트’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쌍수’가 아닌 둘을 받는 복수형입니다. 그는 앞서 두 무리로 나뉜 하나님 군대의 대열에서 힌트를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절박한 기도를 올립니다(9). 이것은 그의 서원 기도를 제외하고(창세기 28:20-22) 야곱 이야기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최초의 기도이며 매우 긴 기도입니다. 그는 조부 아브라함에게 땅의 선물과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시고 인도와 보호를 보장하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맹세했던 약속을 기억하시기를 탄원합니다. ‘네 고향, 네 족속에게 놀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라고 하셨으니 지금 자신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베풀었던 그분의 모든 은총(헤세드)과 모든 진실하심(에메트)에 호소합니다. 혜세드는 끊임없는 자비와 성실한 도움을 의미합니다. ‘에메트’는 ‘진리’, ‘진실성’, ‘옳은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헤세드를 베푸는 자가 보여주는 변함없는 신뢰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진실하신 분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고향을 떠날 때 지팡이만 쥔 맨손의 홀몸으로 요단강을 건넜으나 하나님께서 두 개의 진영(‘두 떼’)으로 나눠도 될 만큼 거부가 되게 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10). 지팡이에서 거대한 군단으로의 변화입니다. 야곱이 말하는 요단강은 사실은 요단강으로 흘러가는 지류인 얍복 강인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중에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 때문입니다. 얍복 강은 암몬 땅에서 흘러나와 동서로 흐르면서 요단강으로 합류합니다. 야곱은 지금 요단강 지류인 얍복 강을 요단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강은 요단강을 향해 동서로 흐르는데 메소포타미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이었습니다. 현재 그는 얍복 강 너머에 머물러 아직 건너오지 않았습니다(창세기 32:22).

야곱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호소하며 자신을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를 건지시옵소서!’(11). 야곱의 삶에서 그의 입으로 내뱉는 최초의 탄원입니다. 그의 삶의 여정을 볼 때 그는 벨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 그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20년의 긴 세월 동안 라반의 끊임없는 견제와 핍박, 착취 속에서도 성자처럼 생활했습니다. 자신의 지혜로 라반의 부를 모두 차지하긴 했지만, 더 이상 속임수와 반칙, 그리고 착취를 부의 축적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야곱 그가 기도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힘든 기억도 잊힌다고 하지만, 야곱에게는 20년 전 형과 해결하지 못한 갈등이 계속 마음을 옥죄어왔습니다. 두려움이 평안을 앞지를 때, 우리가 선 곳이 마하나임, 곧 칼의 진영이 아닌 하나님의 진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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