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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4-02)


다윗에게 화해하려고 시도하는 압살롬

사무엘하 14장 21-33절


 

결속력이 강한 공동체일수록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돋보입니다. 공동체의 일치에 지도자의 역량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만 작동되면 부작용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한 요소나 대책은 없겟습니까? 있다면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암논이 죽은 지 3년 정도가 흐르자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줄 안 요압은 드고아의 지혜로운 여인을 불러 왕 앞에서 연극을 하게 합니다. 다윗은 드고아의 여인 이야기가 사실인 줄 알고 살인한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고, 드고아의 여인은 이를 이용하여 압살롬을 용서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며 용서가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다윗은 이 모든 계획이 요압에게서 나온 것인 줄 알았지만, 압살롬을 보고 싶은 마음에 못이기는 체하며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부릅니다.

 

압살롬의 예루살렘의 귀환(21-24)

사막을 지나던 낙타와 그 주인이 있었습니다. 추운 밤이 되자 텐트 안에 있는 주인에게 낙타가 춥다면서 텐트에 머리만이라도 집어넣으면 안 되겠느냐고 했습니다. 주인이 허락하자 이번에는 앞다리까지 들어가게 해 달라고 했고, 그것도 허락하자 결국은 낙타가 텐트 안으로 들어와 텐트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정죄 받아야 할 압살롬의 복권을 허락했지만, 결국 이런 결정 때문에 왕국 전체가 위기를 맞고 맙니다.

 

21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23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24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21-24)

 

죄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지만 그를 만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공의를 집행하지 않은 책임을 회피하려 했습니다. 지도자가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하다 보면 나중에 더 안 좋은 결과를 맞게 됩니다.

 

(1) 다윗의 명령(21)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일이 요압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안 후 요압에게 어떤 책망이나 언급도 하지 않고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압살롬을 그만 용서하고 데리고 오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요압의 암묵적인 제안을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준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가장 아쉬운 부분을 가장 효과적으로 챙겨준 셈입니다. 여기서 압살롬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소년’이라고 한 것은 압살롬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위한 것입니다.

 

(2) 요압의 감사(22)

다윗의 명을 받은 요압은 다윗에게 엎드려 절하며 감사의 인사를 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계략에 대해 화내지 않고 받아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요압은 압살롬을 매우 그리워하는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다윗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일 뿐 다윗의 미움을 받을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압은 형식적으로 다윗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압살롬을 데리고 오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자신의 요청을 받아주어서 감사하다고 인사합니다. 여기서 요압은 압살롬의 후견인을 자처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3) 예루살렘에 귀환(23-24)

다윗의 허락을 받은 요압은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다윗은 압살롬을 왕궁으로 오지 못하게 하고 보지도 않습니다. 암논을 죽인 죄는 용서하였지만, 왕자 지위를 회복시켜줄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압살롬에 대한 소개(25-27)

교회가 공의가 아닌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손해 볼뿐만 아니라 전체에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는 공의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됩니다. 사소한 이익을 얻으려는 자로 인해 교회의 정체성이 위협받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공의를 추구해야만 진정한 유익을 얻게 됩니다.

 

25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6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7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25-27)

 

이 단락은 이제부터 사건의 중심이 되는 압살롬에 대해 설명합니다. 압살롬의 특징은 아름다운 외모와 긴 머리카락입니다. 온 이스라엘에서 압살롬과 비교될 자가 없었고, 바바락에서 정수리까지 어떤 흠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탁월한 외모는 딸 다말을 통해서도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1) 압살롬의 인기(25)

25절에서 압살롬의 외모에 대해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압살롬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칭송을 받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음을 의미합니다.

압살롬은 그의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전혀 흠이 없었습니다. 이 표현은 주로 제사장들이 몸에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데, 여기서는 압살롬의 완벽한 외모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특별히 아름다운 외모를 말하는 경우는 본문에서 그 외모가 특별한 역할을 하는 경우입니다.

아비가일의 경우는 다윗의 호의를 얻는 데 유리한 역할을 하였고, 다말의 경우는 암논에게 강간당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아름다운 외모는 그가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데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2) 아름다운 머리카락(26)

압살롬의 외모 중 가장 특별한 것은 그의 머리카락입니다. 압살롬은 유난히 머리숱이 많고 긴 머리카락을 지녔는데 일 년 동안 자란 머리카락의 무게가 1킬로그램이 넘었습니다. 이것은 머리카락이 길고 숱도 많을 뿐 아니라 굵기도 굵고 아름다웠다는 것인데, 검고 숱 많은 머리가 압살롬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압살롬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사무엘하 18:9에서 그가 풍성하고 긴 머리 때문에 죽게 되는데, 그 배경 지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3) 압살롬이 자녀들(27)

압살롬은 자식도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딸의 이름은 다말이고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습니다. 딸이 특별히 소개된 것은 이름과 외모가 암논에게 강간당한 다말과 같기 때문으로, 이것은 그가 불행한 누이를 기억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생각됩니다. 후에 사무엘하 18:18에서는 아들이 없다고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도 세 아들은 압살롬이 죽기 전에 죽은 것으로 보이며 딸 다말 만이 살아남아 그의 누이 다말의 불행을 기억하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과 만난 압살롬(28-33)

죄가 공동체에 들어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죄를 보면서도 문책하지 않으면 결국 큰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 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가 임시방편으로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안일하게 일을 처리하면 나중에는 더 안 좋은 결과를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28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29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30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31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32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3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28-33)

 

다윗은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했습니다. 요압에게 기만당한 것을 알고도 그를 엄중히 문책하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하자 그술 땅에 있는 압살롬이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를 보지 않겠다는 임시방편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1) 외면당한 압살롬(28)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지 2년이 지나도록 아버지 다윗이 자신을 부르지 않자, 압살롬은 요압을 왕에게 보내어 자신을 만나달라고 요청하려고 하였지만, 압살롬을 만나는 것을 원치 않은 요압은 두 번이나 거절합니다.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 것으로 자신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예루살렘으로 부른 것은 압살롬의 지위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다윗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현재 다윗이 압살롬을 무시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서 둘의 만남을 주선하여 왕의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없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그술에 있을 때는 압살롬을 많이 그리워했지만, 막상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자 압살롬을 만나주지도 않았으며, 암논의 살인에 대해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권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압살롬을 혼내거나 처벌하지도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다말이 강간당했을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것처럼, 이번에도 다윗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2년 동안 압살롬을 무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무시하는 다윗의 태도는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감을 더욱 키웠고, 결국 2년이 지나면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요압을 만나는 압살롬(29-32)

압살롬이 요압에게 다윗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할 때는 이미 반란을 결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다윗의 재판을 가로채서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항상 자녀들이 일으킨 문제에 침묵하였고, 그 침묵은 다윗과 자녀들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다윗이 침묵한 이유가 자신도 암논과 같이 성적인 범죄를 저질렀고, 압살롬처럼 살인죄를 저질렀으므로 자식들의 죄를 처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훈육하지 못했고, 집안에 비극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린 형벌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요압을 강제적으로 만나기 위해 종들을 시켜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릅니다. 그러자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는 왜 자신의 밭에 불을 질렀느냐고 항의합니다. 요압은 다윗과 압살롬 사이를 더는 중재하고 싶지 않았지만, 압살롬이 계속해서 자기 밭에 불을 지르면 손해가 커질 수 있어서 부득불 압살롬의 집으로 온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의 집에 온 요압에게 자신이 이전에 종을 보내 요압을 만나려고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를 부른 목적을 말합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자신의 말을 전해달라고 요압에게 부탁합니다. 압살롬이 다윗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왜 자신을 그술에서 돌아오게 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재 처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그술에 있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길 원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다윗에게 외면당하고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상황이 도망자로 그술에서 살던 때보다 더 치욕적이고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요압에게 자신이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이 죄가 있다면 기꺼이 왕의 심판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만나서 다윗이 내린 처벌을 받고 죽는 것이 낫겠고, 그러려면 일단 다윗을 만나야 죽임을 당하든 용서를 받든 양단간에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속으로는 다윗이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일 만큼 미워하거나 심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예루살렘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다윗을 만나는 압살롬(33)

압살롬의 말을 들은 요압은 다윗에게 나아가 압살롬의 말을 전합니다. 그때서야 다윗은 압살롬을 궁으로 부릅니다. 압살롬은 다윗을 만났을 때 땅에 엎드려 절하였고, 다윗은 압살롬에게 입을 맞춥니다. 이들의 만남은 매우 형식적인 인사일 뿐 화해와 용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서로 간에 나눈 한마디 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5년 만의 만남이 매우 냉랭하고 형식적이었음을 의미하며, 다윗은 아직도 압살롬을 용서하지도 않고 심판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다윗과 압살롬의 만남은 둘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만 확인한 것으로 이 만남 이후 압살롬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합니다.

 

 


사적인 관계에서부터 국가 간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깨진 관계를 복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시 복원한다는 것은 많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며, 시의적절한 지혜와 노력이 요구됩니다.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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