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사무엘하(16-02)


악한 계략을 따르는 압살롬

사무엘하 16장 15-23절


 

타락한 지도자들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몇 번의 소심한 타협과 자기 합리화가 시작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전략은 노골적인 핍박이나 명백한 거짓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이비보다 유사 복음이 해롭고, 세속적 교훈보다 거짓 영성이 위험합니다. 목숨을 다하기까지 충성한다고 해서 그것을 참된 충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충성은 항상 선한 목적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본격적으로 도망가는 다윗은 후새와 사독과 아비아달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면서 정보를 알려달라고 부탁합니다. 길에서 므비보셋의 종 시바를 만나 양식을 얻지만, 므비보셋을 의심하여 그의 재산은 몰수합니다. 바후림을 지날 때는 베냐민 사람 시므이의 저주를 받으면서 쉬지도 못하고 어렵게 도주합니다. 그동안 압살롬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고 다윗의 친구 후새를 만나게 됩니다.

 

후새와 압살롬의 만남(15-19)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중 어디에 속해 살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까? 주님의 뜻에 굴복하는 하나님의 백성이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을 기대합니까? 후자의 마음이 강하다면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섬기는 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 자신을 위한 종교가 필요했고 그 가운데 기독교를 택한 것일 뿐입니다.

 

15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6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17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18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19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15-19)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이자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저주로 받아들입니다. 다윗은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 그가 바란 것은 시므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이 수치를 다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1) 후새의 등장(15-16)

다윗이 비참한 모습으로 도망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압살롬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합니다. 여기서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언급하는데, 이것은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후새가 압살롬을 크게 환영합니다. 학자가 후새에 대해 다윗의 친구라고 설명한 것은 후새가 압살롬에게 충성을 맹세하지만 여전히 내면적으르는 다윗의 편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압살롬을 마중하고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를 외치며 환영합니다.

 

(2) 후새의 충성 서약(17-19)

이런 후새의 모습에 후새가 다윗의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압살롬은 이것이 당신의 친구 다윗에 대한 충성심이냐고 비아냥거리면서 왜 친구를 따라가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압살롬은 의도적으로 ‘당신의 친구’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후새의 배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압살롬의 질문에 자신은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한 자에게 속하였으며 그와 함께 있겠다고 하면서.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왕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충성을 맹세합니다. 자신이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자에게 속하였다고 한 것은 자신은 여전히 다윗의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압살롬이 아니라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재는 다윗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압살롬을 섬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섬긴 것처럼 자신을 섬긴다는 말을 들은 압살롬은 후새가 자신을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사람으로 인정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후새는 다윗이 부탁한 대로 무사히 예루살렘에서 압살롬의 신하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압살롬이 배신한 후새를 쉽게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배신하였기 때문에 사람을 배신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반란을 한 압살롬은 예루살렘에서 한 명이라도 더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압살롬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달라고 기도했고, 마치 그 기도의 응답처럼 나타난 사람이 후새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며, 압살롬이 의심 없이 후새를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르는 압살롬(20-23)

세상의 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그 유혹에 넘어갈 때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혹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지금 당장 불편해지거나 손해를 당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정직하게 사는 자보다 남을 속이는 자가 흥왕하는 것을 보면서 잠시 일지라도 부러워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분명 근시안적인 삶이요, 영생을 바라보지 못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1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2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3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20-23)

 

후새는 다윗의 조언을 따라 압살롬에게 굴복한 척합니다. 압살롬의 승리를 여호와의 승리로 해석하고, 자신의 충성은 대를 이은 충성으로 포장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을 공개적으로 겁탈하게 함으로써 다윗 왕권의 종언과 새로운 왕의 등장을 상징적으로 알리라고 압살롬에게 조언합니다.

 

(1) 아히도벨의 첫 번째 계략(20-21)

후새를 신하로 받아들인 압살롬은 아히도벨에게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획을 말해보라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너희’란 남성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비록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 옆에서 후새나 다른 신하들도 듣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압살롬의 물음에 아히도벨은 다윗이 남겨둔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면 압살롬이 다윗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을 다들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압살롬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더욱 힘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왕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전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전왕의 권력과 모든 재산을 차지했다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아버지의 첩을 취하는 것은 근친상간으로 간주하여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히도벨은 하나님의 율법보다는 고대 근동의 관행을 따라서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을 조언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은 또한 이런 행동을 다윗이 듣게 되면 압살롬을 미워하게 될 것이고, 압살롬과 다윗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더욱 긴장하고 힘낼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다시 다윗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고, 이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욱 다윗과 강력하게 싸울 것이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첩을 취하는 행동을 통해 외부적으로는 압살롬이 다윗을 승계했다는 것을 알리고, 내부적으로는 결속을 다지는 기회로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아히도벨의 조언을 들은 압살롬은 그대로 시행합니다. 옥상에 천막을 치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합니다. 후궁들을 ‘그의 아버지의 후궁들’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압살롬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천막을 친 옥상은 예전에 다윗이 목욕하고 있던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었던 장소로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곳입니다. 옥상이란 장소를 통해 화자는 왜 다윗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독자들로 하여금 떠올리게 합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윗의 첩들이 강간을 당하는 사건은 일차적으로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예언한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나단은 다윗에게 ‘네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기고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라고 말씀을 전한 것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앞에서’라는 단어가 두 부분에 공통적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받는 벌을 통해 한걸음 한 걸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에 대해 계속 선고대로 시행하고 계시며 사해주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은 언급하지 않지만, 압살롬이 다윗의 첩들을 강간한 것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것에 대해 다윗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복의 의미도 있습니다. 사실 다말이 암에게 강간당했을 때 다윗이 적절하게 조치를 취했다면, 압살롬이 반역을 하는 일도, 다윗의 첨을 강간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무책임함 때문에 다윗의 딸이 강간당한 일에서 시작된 비극이 다윗의 첩 열 명이 강간당하는 비극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여기서 힘없는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모습은 현재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지도자들이 공의와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상황은 항상 그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불의를 일삼을 때 일어납니다. 사사기 19장의 레위 첩, 다말, 다윗 첩들의 강간이 그렇습니다. 창세기 34장에서 디나의 강간 사건도 야곱 집의 영적 타락과 세겜의 불의함이 결합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사회가 불의할수록 그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이용당하고 폭력의 희생자가 되며 이런 희생자들을 또한 무정하게 대합니다. 사회가 정의로울수록 그리고 정의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가장 힘없는 사람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들과 힘없는 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희생을 정당화하는 곳은 불의한 곳입니다.

 

(2) 암살롬의 실행(22-23)

23절에서 아히도벨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사무엘하 15:31에서 아히도벨의 이름이 처음 나올 때 나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나온 이유는 17장에서 나올 아히도벨과 후새의 대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림이나 둠밈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탁을 받은 것처럼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아히도벨의 지략은 뛰어났으며, 이런 아히도벨의 능력은 다윗도 압살롬도 전적으로 신뢰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섰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이런 아히도벨 같은 뛰어난 지략을 가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짓은 그것이 진리처럼 보이기에 강력합니다. 그 작은 간극을 무시하고 타협하면서 타락이 시작됩니다. 현대 교회를 향한 가장 큰 도전은 명백한 이단 사상이나 노골적인 핍박이 아닙니다. 진리처럼 보이는 거짓에 대한 분별 없는 타협입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매우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