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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4-02)


다윗의 제사와 하나님의 용서

사무엘하 24장 18-25절


요한은 예수님을 타작마당의 주인으로(마 3:12) 소개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타작하시고 순전하고 고운 믿음을 얻으십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이삭을 드린 모리아 산이며, 다윗이 준비한 모든 것으로 성전이 세워집니다(대하 3:1). 주님께서는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원래 사무엘 상하는 한 권이었습니다. 사무엘서의 시작은 한나의 기도로 시작해서, 마지막은 다윗의 기도로 마무리합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죄를 물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3일 동안 전염병이 돌게 하셨고 그로 인해 칠만 명이 죽습니다. 다윗이 계수한 사람에서 대략 20분의 1이 죽는 끔찍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보고 깊이 뉘우치며 죄 없는 백성들 대신에 자신과 자신의 집을 치시라고 요청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다윗은 왕의 위치와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고 왕은 백성을 지킬 임무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였습니다.
 

선지자 갓의 권면(18-19)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그냥 지나치실 수 없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것이 진노의 재앙을 완전히 멈추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죄인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반드시 치러야 할 우리의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대신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18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아뢰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소서 하매 19다윗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18-19)
주님은 다윗이 범죄했을 때 선지자를 통해 소통하십니다. 율례를 사랑하고 누구보다 주의 마음에 합하게 행해온 다윗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선지자를 통해 무언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주님은 죄를 범했을지라도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분이고, 다윗은 은혜를 알아차리고 즉시 올라갔습니다.
(1) 선지자 갓의 권면(18)
다윗이 자신의 선택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자신과 자신의 집을 죽여 달라고 기도하자 여호와께서는 갓 선지자를 다시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갓 선지자는 다윗에게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해주실 것이니 제단을 쌓고 속죄의 제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이 자신은 희생하지 않고 백성들을 희생시킨 것이 왕으로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차라리 자신과 자신의 집을 죽여 달라고 말하며 회개한 것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그곳에 거하던 주민들로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도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살았습니다. 제단을 쌓을 곳으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지정한 이유는 재앙을 일으키던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의 명령을 받고 재앙을 멈춘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에 가슴 아파하시며 용서와 자비를 베푸신 곳이며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단을 쌓아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은혜를 받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인 것입니다.
(2) 다윗의 순종(19)
이런 하나님의 명령에 다윗은 갓의 말을 따라 아라우나 타작마당으로 올라갑니다. 여기서 ‘말대로’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매입 다윗(20-24)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당사자가 치러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한사코 값을 지불해 제사를 드리려 했던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죽으셨으며,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됩니다.
20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의 부하들이 자기를 향하여 건너옴을 보고 나가서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21이르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하니 다윗이 이르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라 하는지라 22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 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23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24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20-24)
사랑한다면 줄 수 있어서, 받아주어서 고마울 뿐입니다. 죄로 인해 뵐 수도, 들을 수도 없었던 주님과의 거리가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을 뵐 수만 있다면 가진 전부를 다 내어 값을 지불해도 좋았습니다. 주께 드리는 것이 희생으로 여겨진다면 사랑이 동기인지 자문해야 합니다.
(1) 아리우나의 영접(20)
자신의 집에 있던 아라우나는 창문으로 내다보고 있다가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자신의 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얼굴을 땅에 대고 왕에게 절합니다. 여부스 사람인 그는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며 철저히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윗을 ‘내 주 왕’이라 부르고 자신을 ‘종’이라고 칭하면서 정중하게 왜 자신에게 왔는지 묻습니다. 왕이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한 개인을 방문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아라우나는 혹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긴장한 것입니다. 즉, 아라우나의 철저한 복종의 모습은 혹시라도 왕과 왕의 군사들이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으로 아비가일이 사무엘상 25장에서 다윗을 만났을때와 비슷한 행동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다윗은 아라우나에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백성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1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회개하고 제단을 쌓기 전에 이미 재앙을 멈추셨습니다. 오직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는 다윗은 제사를 드리면 재앙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서 지금 장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미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이것을 나중에 알게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2) 다윗의 목적(21)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다윗은 최선을 다해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제단을 쌓기 위해 먼저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사려고 합니다. 제단은 한 번 쌓으면 계속해서 그곳에 있으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장소가 되기 때문에 다윗은 그곳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서 여호와께 바치려고 한 것입니다.
(3) 아라우나의 헌신(22-23)
이런 다윗의 제안에 아라우나는 다윗이 원하는 대로 취하여 제사를 드리라고 하면서 번제를 드릴 소와 땔 나무를 제공하겠다고 먼저 제안합니다. 이것은 땅과 소와 땔 나무 모두를 제공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윗에게 땅을 거저 주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고대 사회에서 땅을 사고팔거나 협상을 할 때 하는 화법입니다.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해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 굴을 사려고 할 때도 처음에는 그냥 쓰라고 말합니다(11). 이것은 땅을 팔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으로 협상을 하기 위해 먼저 거절 의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몸을 굽히고 정중하게 땅을 팔아달라고 요청하였고, 마침내 그들에게 400세겔을 주고 막베라 굴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라우나가 땅을 편히 쓰라는 말은 거저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협상을 위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라우나는 여호와께서 다윗을 기뻐하시기를 원한다고 기원하며 여호와의 복을 빌어줍니다. 이것은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한 일반적인 인사로 왕께서 소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길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라우나는 최대한 다윗의 호의를 얻은 상태에서 협상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왕이고 부하들을 데리고 왔으므로 힘으로 빼앗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라우나는 최대한 다윗의 호의를 얻어 땅을 일방적으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쓴 것입니다.
(4) 다윗의 매입(24)
아라우나의 걱정과 달리 다윗은 거저 쓰라는 말에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반드시 값을 주고 사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값없이, 즉 공짜로는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는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반드시 사겠다는 의미이지만, 이차적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는 자신이 큰 희생을 치르면서 드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사는 죄를 지은 사람이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가져와 여호와께 바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대가로소 값이나 염소 값이나 비둘기 값 등 제물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자신이 값을 치러서 드려야 하는 것이지 남이 대신 드리거나 공짜로 드리면 안 됩니다. 현재 우리가 죄 사함 받는것도 공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대가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 제사의 대가는 구약 시대 제사의 대가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치 아무 대가 없이 죄 사함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여 죄와 용서와 회개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신의 죗값을 감당하고 계속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은 50세겔을 주고 타작마당과 소를 삽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립니다. 번제와 화목제는 속죄를 하는 기본적인 제사로 번제는 모두 태워서 바치는 제사이고 화목제는 지방과 내장은 여호와께 태워드리고 가슴살과 뒷다리 살은 제사장을 주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제사로 감사와 교제를 나누는 제사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자 여호와께서는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상 21:14에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처럼 이번에도 기도를 들어주시고 이스라엘 위에 내린 재앙을 멈추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위에’라는 표현은 1절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라는 구문과 연결됩니다. 재앙의 원인이 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를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와 응답(25)

우리에게는 오직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도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는 자임을 믿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종교 행위, 개인의 부단한 노력을 계산하며 구원에 대해 안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교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또한 삶의 목적과 태도, 일상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까?
25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25)
결국 인구조사로 인해 이스라엘에 내린 재앙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죄와 다윗의 죄를 모두 심판하신 것이며 여기서 왕인 다윗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왕정 시대에는 왕이 백성들의 대표가 되기 때문에 왕의 잘못된 선택이 백성들을 모두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고 왕이 잘하면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무엘서는 전체적으로 왕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와 이 요구를 실행한 사무엘과 첫 번째 왕 사울과 두 번째 왕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왕에 대한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이스라엘의 왕들은 여호와의 대리자일 뿐이며,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한 분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왕은 여호와의 명령에 복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잘 인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전부를 드려 예배했던 사람입니다. 자신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 자로 기록됩니다. 위대한 성취를 이룬 왕의 이름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여 전부를 드린 사람으로 기록하면서 사무엘서는 막을 내립니다. 인생이 한 줄의 묘비명으로 기록된다면, 어떻게 기록되길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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