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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3-01)


다윗의 마지막 찬양:영원한 언약

사무엘하 23장 1-17절


사랑하면 서로 닮습니다. 세월을 견디며 나란히 걸어온 부부는 걸음걸이도, 보폭도 맞습니다. 사랑하기에 서로를 알아가고 맞추다 보면 어느새 취향도, 생각도, 결국 외모도 비슷해집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전부를 걸고 주님을 사모하더니 닮아버렸습니다. 다윗의 곁에는 그를 닮은 이들도 있습니다.
 
다윗의 사역에 대해 서서히 마감을 지어 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자녀나 후세대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도, 신명기 33장에서 모세도 유언을 남겼습니다. 본문은 이제 다윗의 마지막 유언으로 장차 임할 메시아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찬양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깊은 뜻에 은혜를 받길 바랍니다.
 

다윗의 마지막 말(1-2)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셔서 그 나라를 영광으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신 다윗은 참된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분의 백성을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그분의 통치를 받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1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가 말하노라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5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6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버려질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7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살리리로다 하니라(1-7)
다윗이 평생 갈망하던 한 가지(시 27:4)는 주의 집에서 주의 아름다움을 보며 주를 사모하는 것이었습니다. 빛 되신 주님을 사랑하더니 다윗도 빛을 발합니다. 다윗의 소원이 주님의 소원이 되고, 주님의 소원이 다윗의 소원이 되었습니다.
(1) 자기소개(1-2)
다윗은 자신을 이새의 아들,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높이 세워짐은 비천한 신분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의 왕이며, 열방의 으뜸(머리)이 되었음을 뜻합니다(22:44).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는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와 지원 그리고 특별한 관계의 형성을 뜻하는 칭호입니다. 구약성경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향하여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불리는 사람은 왕입니다. 개역개정이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번역한 ‘네임 저미로트 이스라엘’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의 노래(저미로트 중 아름다운(네임 ) 것을 )부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1절에서 “말함이여”와 “말하노라”는 모두 ‘네움’의 번역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 하나님의 계시로 받은 예언적 말씀인 것을 나타냅니다. 또 여호와의 영이 다윗을 통해 말씀하심 역시 다윗이 자신을 선지자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혀에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흔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을 시작합니다(7:5).
(2) 공의로 다스리는 자(3-4)
다윗은 이와 비슷하게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반석이라 부릅니다. 반석은 의지하고 피할 수 있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은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고 하나님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공의와 경외함이 통치 원리가 됩니다(렘 23:5). 여기서 다스림은 ‘마샬’ 동사로 표현되었습니다. ‘마샬’은 해가 낮을 다스리고 달이 밤을 다스리듯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따라 지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창 1:16). 그리고 4절은 이상적인 왕이 일어날 때,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은혜로운 상황에 관해 말합니다.
(3) 다윗의 집(5)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 있을 때, 이스라엘은 구름 없는 아침의 해가 떠오를 때 아침 빛이 비침 같고, 비 온 뒤 광채로 땅에서 나는 풀 같을 것입니다. 아침 빛은 맑고 순수하며 명랑합니다. 비온 뒤 자라난 풀은 윤택하며 상쾌합니다. 다윗은 자기 집이 하나님 앞에서, 즉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 이와 같다고 확신합니다(5). 다윗의 집에서 의로운 왕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으므로(7장), 다윗의 집이 모든 일에 준비되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윗의 모든 구원과 모든 소원을 풍성히 이루실 것입니다. 다윗 언약 속에 나타난 다윗의 소원인 성전 건축과 왕권의 영원한 보존입니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4) 악인(6-7)
6-7절은 공의로운 자와 대조되는 사악한 자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사악한 자”는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 무도하고 불경한 자입니다. 모든 사악한 자는 내쫓아야 할 가시나무 같으니, 손으로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다’는 것은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가시나무 같은 사악한 자와 접촉하는 사람은 철과 나무로 된 창을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반드시 불태워야 합니다. “당장에”는 문자적으로 ‘그 자리에서’입니다.
 

다윗의 용사들(8-17)

믿음의 용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교회 안에 언약을 믿고 그리스도를 붙잡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믿음의 용사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마땅히 존중해야 합니다. 믿음의 용사들을 분별해 직분자로 잘 세워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서 믿음의 용사를 적극적으로 길러내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이 그 복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이름은 믿음의 용사들의 명부에 올라 있습니다.
8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죽였더라 9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11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3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4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6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7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8-17)
앞에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들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입니다. 이 용사들은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다윗을 도왔던 사람들입니다(대상 11:10). 주님이 그리워하시는 바를 다윗이 알았다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만 있다면 자기를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태도를 늘 지켜보던 부하들도 다윗의 목마름과 그리움을 채워주려고 자기 전부를 겁니다.
(1) 요셉밧세벳(8)
‘요셉밧세벳’이라는 이름의 뜻은 ‘그 자리에 거주하는 자’입니다. 7절 끝에 있던 밧쉐베트가 용사의 이름에 들어간 것은 사악한 자(벨리야알)를 죽이는 요셉밧세벳의 업적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다그몬 사람이며,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불립니다. 역대기에서처럼 다그몬은 학문으로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대상 11:11). 요셉밧세벳은 야소암이 본래 이름일 것입니다(참조, 대상 11:11 대상 272, 32). 아마도 7절 마지막 단어 밧쉐베트를 고려하여 야소브(요셉)-암을 요셉-밧세벳으로 수정했을 것입니다. 요셉밧세벳은 세용사의 두목이었으며, 한 번에 팔백 명을 죽였습니다.
(2) 엘르아살(9-10)
아호아 사람 도대(=도도)의 아들 엘르아살이 소개됩니다(9). 그는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 하나였습니다. 역대기는 다윗이 용사들과 함께 있던 장소가 바스담밈이라 말합니다. 바스담밈은 골리앗이 등장했던 소고와 아세가 사이의 에베스담밈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습니다(삼상 17:1).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 모였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퇴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용사가 남아서 상대를 조롱하면서 싸움을 돋우었습니다. 그리고 엘르아살이 일어나서 블레셋을 치는데, 그의 손이 피곤해서 칼에 들러붙기까지 싸웠습니다. 그날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베푸셨으므로, 백성들이 돌아와 그의 뒤를 따르며 노략질할 뿐이었습니다.
(3) 삼마(11-12)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가 소개된다(11절). 블레셋 사람들이 무리(하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니, 이스라엘 백성이 도망하였다. 삼마가 그 밭 가운데 서서 그 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빼앗고(나찰 빼앗다), 블레셋 사람들을 죽였다.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베푸셨다.
(4) 세 명의 용사(13-17)
이들은 30명의 용사 중 세 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30명의 용사는 다윗의 핵심적인 군사들로 그 명단은 24-39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세 사람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18-23절에서 이들의 이름과 업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이 아둘람 굴 혹은 산성에 자리 잡고 있을 때로 다윗이 아직 왕이 되기 전 사울을 피해 아둘람으로 도망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30인의 두목 중 세 사람이 추수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습니다. 이 세 사람은 앞서 언급한 요셉밧세뱃, 엘르아살, 삼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때 블레셋 사람의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습니다. 그때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치는 이 일이 사무엘하 5장의 전쟁 중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생각하게 합니다(5:17-25). 베들레헴은 아둘람에서 동쪽으로 대략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그 사이에 베들레헴으로 르바임 골짜기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즉, 아들람에서 베들레헴으로 가려면 르바임 골짜기에 진 치고 있는 블레셋과 마주치게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갈망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자기에게 마시게 할 자가 누구냐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말이 고의성이나 강제성이 없었다는 것은 물을 받았을 때 그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자기가 배들레헴에 거주할 때 마시던 물맛을 잊지 못하여 더 목이 말랐을 것입니다. 그러자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지나가 베들레헴 성문 겸 우물물을 길어왔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물 마시기를 거절하고 여호와 앞에 부어드렸습니다. 그 물은 용사들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피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도저히 자신이 마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 음료를 바칠 때는 주로 포도주를 부어서 전제로 드리는데, 다윗은 물을 자신의 용사들의 피라고 여기고 그 피를 여호와께 바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앞에서 자신을 위해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할릴라’, 즉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할릴라’는 불경한 것, 즉 금기를 뜻하는 말이며, 금지 맹세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다윗은 그 물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라고 말하면서, 그 물 마시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사랑하여 더 사랑하고 싶은 열기가 충만합니다. 자기의 욕구로 가득한 공간을 비워내고, 타자를 위한 공간을 내어주어 소중히 여기는 것,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상에서 목이 타는 이에게 물 한잔 내미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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