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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21-02)


블레셋의 거인들을 죽인 다윗의 용사들

사무엘하 21장 15-22절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수록 교회조차 공동체 개념이 희박해지는 현실입니다. 주일 예배만 드리거나, 아예 교회에 몸담지않는 일명 ‘가나안 성도’가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건강한 신앙입니까?

 

블레셋과 싸운 네 용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먼저 아비새가 블레셋 장수 아스비브놉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원합니다. 십브개가 곱에서 블레셋과 전쟁할 때에 역시 거인의 후손인 삽을 죽이고,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를 죽입니다. 가드에서 전쟁할 때,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여섯 개씩인 어떤 거대한 블레셋 장소가 이스라엘을 조롱하기에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죽입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15-17)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 기업의 보증이 되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현재의 삶에서 성령으로 인해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릴 뿐만 아니라 장차 완성될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를 확증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영광스러운 나라가 분명히 완성될 것과 주님이 그 나라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을 믿음으로 소망하고 있습니까?

15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16거인족의 아들 중에 무게가 삼백 세겔 되는 놋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17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15-17)

이 본문은 블레셋과의 전투들에 대한 모음집으로 다윗과 요압 이외에 다윗의 용사들이 불레셋과 싸운 이야기들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는 그동안 기록된 다윗과 요압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그동안 언급되지 않은 다윗의 용사들을 소개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 왔을 때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다시’라는 표현은 블레셋과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 피곤한 다윗(15)

다윗이 사무엘하 5:17-25에서 크게 승리한 뒤 8:12에서 또다시 간략하게 블레셋과의 전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다윗은 모든 전투에 참전하며 강한 전투력을 보여주었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렇게 블레셋은 다윗이 왕으로 통치하는 기간에도 끊임없이 이스라엘과 전쟁한 것입니다. 블레셋과 전투하던 다윗이 지친 틈을 노리고 거인족인 르바임 사람의 후손인 이스비브놈이 다윗을 죽이겠다고 외쳤습니다.

(2) 무장한 이스비브놉(16)

이스비브놈은 300세겔의 놋 창을 들고 새칼을 들고 있었는데, 300세겔이면 3.5킬로그램 정도되는 큰 것이었고, 새 칼은 철로 만든 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블레셋은 이미 철기문명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기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거대한 몸집에 위협적인 무기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도 두 개나 들고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다윗이 매우 큰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3) 아비새의 승리(17)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 스루야의 아들이자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죽입니다. 그동안 요압이 전쟁하고 공적을 쌓은 것만 기록되었는데, 그의 동생 아비새의 용맹과 업적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요압의 그늘에 가려 있던 아비새의 업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요압에게 집중되었던 군대의 지도력이 아비새에게로 넘어갈 것임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앞서 거듭 요압의 도에 넘치는 개입과 간섭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했던 사무엘서 저자의 입장이 여기에도 반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 중에 힘이 빠져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일이 생기자 다윗의 부하들은 다시는 전쟁터에 나오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여기서 맹세를 하며 말했다는 것은 강력하게 요구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희망이며 생명이라는 뜻으로, 이제 유능한 전사로서의 역할보다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 그의 존재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정에서는 왕의 생존이 왕국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이후의 에피소드에서는 다윗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만류하는 모습은 사무엘하 18장에서 압살롬을 치는 전투에 참여하지 말라고 만류한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다윗이 나이 들었을 때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비새가 돕는 것을 통해 다윗 왕국이 이제는 다윗 혼자 구원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이 다윗의 구원자 역할을 함께 담당하고 있으며, 이는 다윗 왕조가 점점 확장되고 정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용사들(18-22)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과 끊지 못하는 옛 습관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또한 자신의 거룩함을 무너뜨리려는 세상의 수많은 유혹을 직면할 때마다 어떤 소망을 품게 됩니까? 우리가 발을 듣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과 범죄를 목도할 때마다 어떠한 소원을 품게 됩니까? 이와같은 것들로 인해 속으로 탄식하며 장차 주님의 재림으로 이뤄질 우리 몸의 속량과 모든 피조세계의 완전한 회복을 소망하게 되지 않습니까?

18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는 거인족의 아들 중의 삽을 쳐죽였고 19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은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 채 같았더라 20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 곳에 키가 큰 자 하나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기 여섯 개씩 모두 스물 네 개가 있는데 그도 거인족의 소생이라 21그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22이 네 사람 가드의 거인족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의 부하들의 손에 다 넘어졌더라(18-22)

사회는 종종 영웅을 필요로 합니다. 누군가를 영웅으로 만들어서 분위기를 하나로 통합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 세워갈 때 공동체는 건강하게 세워집니다. 신앙은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 속에서 성숙해짐을 명심해야 합니다.

(1) 후사 사람 십브개의 승리(18)

또 다른 용사 후사 십브개는 곱에서 거인족의 후손인 삽을 죽입니다. 18절과 19절에서 전투 장소가 곱이라고 나오는데 이곳이 어느 곳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역대상 20:4에서는 곱을 게셀이라고 말하는데, 게셀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해안 평야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사는 베들레헴 남서쪽 약 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곳입니다.

(2) 엘하난의 승리 이야기(19)

이번에는 엘하난에 대한 소개입니다. 다시 블레셋과 곱에서 전투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베들레헴 사람의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을 죽였다고 보고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을 죽인 것은 다윗으로 사무엘상 17:41-54에서 단신으로 나가서 물맷돌로 죽이는 다윗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엘하난이 죽인 사람이 골리앗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대상 20:5에서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과 대부분의 영어 번역도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다고 말합니다. 라흐미의 창자루는 베틀 채 같은데 이것은 골리앗이 가지고 있던 창자루의 모양과 동일합니다. 이것은 라흐미의 체격도 골리앗과 비슷하게 엄청난 거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가장 덩치가 큰 골리앗과 비슷한 체구의 라흐미를 죽인 엘하난은 매우 뛰어난 용사인 것입니다.

(3) 요나단의 승리 이야기(20-21)

마지막 이야기는 요나단이라는 용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블레셋 출신의 거인족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대신 블레셋 사람의 체격이 묘사되는데, 그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각 여섯 개씩 모두 스물네 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가지고 있으며 키가 큽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체적으로 다른 모습은 강한 호기심과 추측의 대상이 되었는데, 여기서는 손가락과 발가락이 한 개씩 더 있는 것을 용사의 자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람도 거인족 출신입니다. 이 가드 사람이 이스라엘을 조롱하였는데, 이것은 골리앗이 전쟁터에서 이스라엘과 여호와를 조롱하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이런 오만한 가드 사람을 죽인 것은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 왕조는 다윗 가문의 남자들이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누이의 아들들인 요압과 아비새와 비록 죽었지만 아마사와 아사헬도 있습니다.

(4) 네 명의 거인족(22)

이렇게 가드의 거인족 후손들은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에게 모두 죽었습니다. 이것은 가드의 거인족은 블레셋 부족의 가장 강력한 용사들이었는데, 이들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다윗과 다윗의 부하들을 이길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이스라엘을 점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이스라엘을 위해 강력한 블레셋 용사들을 칠 용사들을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도올 용사들을 세워주시고 이스라엘을 지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미리암을 붙여주시고, 후에 70인 장로를 붙여주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돕는 자들을 붙여주신 것처럼, 다윗에게도 이스라엘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이들을 붙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은 지도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하는 자들과 힘을 합쳐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만일 다윗 혼자 모든 전쟁을 감당하려고 하였다면, 다윗의 힘이 약해졌을 때 이스라엘은 다시 주변의 적들에게 침략당하고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주변 사람들과 지혜롭게 협력하며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같이 협력하는 사람이 없다면 돕는 자를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은 혼자 떠나는 여정이 아닙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같이 가면 멀리 간다’는 말이 있듯이, 신앙생활은 지체들과 함께하는 공동체적 여정입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 부대끼면서도, 함께 있을 때에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고, 서로의 좋은 점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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