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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05)

 


부활을 통한 승리의 하나님

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큰 숙제는 죽음을 정복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겨보려고 수많은 노력해 왔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중국의 진시황제입니다. 그는 방방곳곳에서 늙지 않을 불로초를 찾았고, 북쪽 흉노족으로 보호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1500리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50세도 못 넘기고 49세 때 죽었습니다. 모든 인류는 어느 누구도 사망 권세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 부활 논의에 대한 결론으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새로운 몸으로 변화할 것입니다. 그때 사망의 권세는 완전히 정복할 것이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던 죽음이 부활의 승리 속으로 삼켜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소망하고 주님께 충성할 것을 권면합니다.

 

유업으로 받을 천국(50)

부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부활은 주의 재림 때 일어날 것입니다. 변화와 옷 입는 표현을 통해 썩어질 현재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고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어둠의 통치 세력 중 하나인 사망을 이기고 모든 것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그때를 기대하고 지금 더 정성스럽게 주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50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

 

35절에서 제기한 두 가지 질문 중 부활의 과정에 대해 답합니다. ‘형제들아’라는 표현으로 독자의 반응을 유도합니다. 부활의 몸을 설명할 때 ‘어리석은 자들아’로 시작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둘 다 독자들을 비난할 의도는 아닙니다. 그들의 집중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사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부활 과정 설명에 대해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언급함으로 시작합니다. 살과 피로 구성된 몸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50). 앞부분에서 설명한 현재의 몸과 부활의 몸의 차이를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와 그를 대적하는 반역의 나라라는 두 영역 개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50절 표현은 앞부분 설명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또 다른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입니다. ‘유업을 받다’라는 말(클레로노메오)은 언약 관계 용어로 그 관계 안에 있는 자가 상속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 안에서 그분과의 언약 관계 결과를 누린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썩지 않음을 상속 받는다는 것도 같은 개념입니다. 결국, 성도에게 부활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관계를 누리려면 썩어짐의 과정을 경험하는 살과 피로 된 현재 몸이 아니라 불멸의 몸, 곧 영이신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할 수 있는 신령한 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변화와 새 옷을 입는 부활(51-53)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이 이뤄질 것을 믿지만 그 부활에 대해 적잖은 부분을 오해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혼만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도 부활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육체를 더러운 것으로 여기며 육체는 썩고 영혼만 다시 살아난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잘못된 개념입니다. 우리의 몸도 예수님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1-53)

 

몸의 부활에 대해 설명입니다. 죽음이 모든 성도(‘우리’)의 마지막 상태가 아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나팔에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51). 마지막 나팔은 주의 나타나심과 관련된 표현으로 그분의 재림 때를 의미합니다(15:23). 죽은 자의 부활을 다룬 데살로니가전서 4:14-17은 주의 재림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합니다. 주님이 큰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주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살아있는 자들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주의 재림 때 단순히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난다고만 말하지만 고린도전서 15:51-53은 두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부활 과정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변화, 곧 바뀐다는 말입니다(51-52). 부활과 관련해 처음 사용한 단어입니다. 부활 과정은 죽은 자들이 이전 몸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말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도 순식간에 바뀝니다. 바울은 52절에서 이 변화 과정을 앞서 언급한 부활의 몸의 본질에 대한 것과 연결해 다시 묘사합니다. 주의 강림 때 나팔 소리와 함께 죽은 자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고, 살아 있는 ‘우리’ 몸도 순식간에 신령한 몸으로 바뀔 것입니다. 물론 이 바뀜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수동형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부활 과정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은 옷 입는다는 것입니다(53). 마치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 새로운 몸이라는 옷을 입는 것으로 부활 과정을 묘사합니다. 약하고 영광스럽지 않고 썩어 없어질 것이 강하고 영광스럽고 썩지 않을 것으로 덧입어 새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부활 과정에 대한 이 두 표현은 새롭게 된다는 것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나’라는 성도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활은 ‘나’가 없어지고 또 다른 새로운 ‘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몸이 바뀌는 것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지낼 언약 관계의 상대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하나님과 관계할 뿐입니다. 그런 면에서 부활 과정은 하나님께 온전히 반응할 수 있고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바울의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변화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성령(예. 롬 8:9-10; 고후 3:18)이나 예수님의 일하심(빌 3:21)으로 된다고 말하지만, 구체적 과정은 알 수 없습니다. 구체적 설명 자체가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변화의 과정을 경험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신비요 비밀입니다(5).

 

사망에 대한 승리(54-57)

우리는 예수님의 승리로 인해 ‘이미’와 ‘아직’ 사이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로 인해 ‘이미’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예수님의 부활 생명으로 죄를 죽이며 거룩하게 살아갑니다. 반면 ‘아직’의 차원이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병들고 노쇠하며 죽어 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한 승리를 맛볼 것입니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4-57)

 

부활 과정과 관련해 사망에 대한 승리를 다룹니다. 바울은 썩을 것이 썩지 않는 것으로 옷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않는 것으로 옷 입을 때는 사망이 승리 안으로 삼켜진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합니다(54). 앞에서 말한 부활 과정이 온전히 실현되는 것(51-53)을 구약 이사야 25:8의 성취로 표현합니다. 두 가지 함의가 있습니다. 부활을 통한 죽음에 대한 승리는 하나님의 오래전 계획의 일부라는 것과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에 대한 구약 약속을 이루셨기에 부활을 통한 완성의 약속 또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다른 구약 본문인 호세아 13:14을 통해 사망에 대한 승리의 찬가를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으며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 그러나 이런 외침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와 사망과 율법과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관계성을 사망이 쏘는 것은 죄이고 죄의 능력은 율법이라고 말합니다(56).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앎과 지식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절하는 죄를 막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은 그 뜻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더 거절합니다. 이 과정에서 율법은 죄의 죄됨을 더 심각하게 보여주고, 그 죄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됨을 더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율법이 죄의 능력이란 말의 의미입니다. 그 심판과 저주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렇기에 사망이 찌르는 무기는 죄입니다. 마치 사람을 죄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이 죄와 죽음의 카르텔을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 메시아의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의 길을 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람들을 향한 자신의 심판을 예수님에게 쏟음으로 죄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었고, 부활을 통해 그 심판이 끝났음과 죽음의 통치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는 주의 재림 때몸이 부활하는 과정을 통해 그 해방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내용입니다(15:1-8). 그가 ‘우리 주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57).

 

결론적 권면(58)

부활의 소망 때문에 우리는 믿음 가운데 더 굳게설 수 있고, 복음을 전하고 알리는 데 수고하게 됩니다. 대적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죽음의 위협 등 우리의 믿음을 가로막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부활의 소망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게 만듭니다. 죽어도 다시 영원히 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귀히 여기고 더 붙들게 만듭니다.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58)

 

부활에 대한 설명에 근거해 독자들에게 권면합니다. 메시아의 사역으로 인해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영역으로 옮김 받은 신자는 장차 부활을 통해 참 해방의 완성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 실재를 경험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은 미래에 있을 그 완성의 보증입니다.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서 항상 주의 일에 더 힘쓰라고 바울은 권합니다. 주께서 역사를 완성하시는 그 때가 있고, 신자는 부활의 몸으로 그분과 영원한 교제를 하게 될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이뤄놓으신 죄 용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죽음의 독침을 견디지 못하고 끔찍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와 죽음의 사술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결코 정죄를 받지 않게 됩니다(롬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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