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6-02)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중요성

고린도전서 6장 12-20절


오늘날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성과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변해 왔습니다. 그 변화 속에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좋은 영향도 받지만 악도 쉽게 받아 들릴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으려면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항상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네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교회 안에 있는 방종한 삶을 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세상 힘 있는 자들의 문화를 따라 만찬 때 방탕하고 음란한 짓을 행하면서도 갖은 논리를 동원하여 자기 삶을 정당화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대화 방법을 사용해 그들을 질책하고 교정합니다. 먼저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고(12-14), 음행과 몸과 주님과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한 후, 문제에 대한 구체적 명령을 전합니다(15-20).

 

고린도 성도들의 주장과 바울의 반박(12-14)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자유는 쉽게 권태로워집니다. 중독이 아니면 만족이 없으며,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도 참된 관계를 맺지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사랑하고 헌신하는 자발적인 매임이 참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주장에 대해 바울은 반박합니다.

 

12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12-14)

 

고린도 교회의 네 번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금욕주의가 있었지만, 반대로 자유분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도 중 일부가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1) 고린도교회의 주장(12)

 

고린도전서 5:1-13의 경우와 다릅니다. 그 부분은 근친상간과 간음이었다면, 본문은 만찬을 배경으로 한 음행입니다. 당시 세상에서 지위와 힘이 있는 사람들은 만찬에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그 자리에 창녀들을 불러 음행하곤 했었습니다.

교인 중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어줍지 않은 표어로 자기를 정당화하였습니다. 어쩌면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젊은이였을지 모릅니다. 어른이 되었으니 모든 것을 할 자유가 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또한 이 표어에는 얄팍한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13).

바울은 대화 형식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교정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 주장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며 바울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그들 문제의 핵심은 ‘내게’라는 표현입니다.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나’가 모든 사고와 결정의 중심이고 철저히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반박에 의하면 그들은 몇 가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러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심지어 영적으로 어둠의 영역(예, 사탄이나 세상 악들)이나 빛의 영역(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에 속할 때도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관계를 벗어난 절대 자유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입니다. 둘째, 죄의 핵심은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존재와 관계의 시작점이 되시는 창조주를 거절하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만 집중하게 하는 것을 죄의 핵심으로 말합니다(창세기 3:5; 로마서 1:28). 단순히 무엇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사고와 결정의 중심에 두는 사유 방식과 그것을 통한 하나님 거절이 죄입니다. 셋째, 신자는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새 언약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참 행복은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과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은 재앙이 됩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가(可)하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합당한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스스로 자유롭다 여기지만, 사실은 음행을 통해 자기에게만 집중하여 마치 하나님 아닌 다른 관계의 노예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그런 것에 얽매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은 채 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2) 음식과 몸과 하나님(13-14)

 

12절에 이어 독자의 자기 합리화를 깹니다. 몸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들은 음식은 배(몸)를 위해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음식과 음행이 결합된 만찬을 배경으로 몸과 연결을 짓고 있습니다. 음식은 몸을 위해 있고 식욕이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처럼, 성욕도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음행도 문제될 것 없다는 논리를 독자들은 펴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어차피 하나님이 미래 어느 날 몸과 음식도 다 폐하실 것인데, 지금 그 몸을 위해 성욕 채우는 것이 무슨 문제이겠냐는 논리를 펴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의 논리를 따라 반박합니다. 몸은 음란이 아니라 주를 위해 존재하고 주는 몸을 위해 존재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님을 다시 살리셨고 이후에 신자 또한 몸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신자 몸은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존재로서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생명과 새로운 관계를 주신 그분이 삶의 주인이며 내 몸의 주인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몸의 주인인 양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몸을 쓰며 사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둘째, 몸은 영원합니다. 독자들은 부활 교리를 인식하지 않기에 몸이 폐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록 부활로 몸이 다르게 변하겠지만(15장), 신자의 몸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누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음행과 몸과 주님과의 관련성(15-17)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은 어두움에 행동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너희만이라도 거룩하게 살아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썩어짐을 방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해달라고 부탁합니다.

 

15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5-17)

 

문답식 대화법으로 음행과 몸과 주님과의 관계성을 설명합니다. 두 가지 전제로 진행하며 모두 ‘~을 알지 못하느냐?’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신자들은 메시아 몸의 일부라는 것입니다(15). 메시아와 신자와의 관계를 신비한 연합으로 묘사합니다. 음행을 통해 그 몸의 일부를 떼어 창녀 몸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바울은 ‘내가…그렇게 하겠느냐?’라는 질문과 ‘그럴 수 없다’는 스스로의 대답을 통해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독자들도 그래야 함을 말합니다. 또 다른 전제는 결혼과 언약 관계입니다.

 

16-17절은 왜 음행이 창녀의 지체를 만드는지를 부연합니다. 역시 ‘~을 알지 못하느냐?’는 질문으로 창녀와 합하는 자는 한 몸이 된다는 원리를 상기시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몇 가지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결혼은 남녀의 성적 결합으로 이루어지며(사실혼), 그 결합으로 한 몸이 됩니다(창세기 2:24). 둘째, 창녀와 성관계하면 그와 결혼한 것이 되고 한 몸이 됩니다. 셋째, 그 상태에서 다른 창녀나 아내와 성관계하면 간음입니다. 넷째, 신자는 새 언약 관계를 통해 주님과 영적으로 결혼한 상태입니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말합니다(17). 다섯째,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성관계 맺는 것이 간음인 것처럼, 주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신자가 음행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를 깨는 간음과 같습니다. 언약 관계에서 몸은 주 위해야 하는데(13), 세상과 관계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명령들(18-20)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죄함도 없지만, 아직은 완전히 완성된 사람은 아닙니다. 천국 가는 날까지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뿐입니다. 순간적으로 과거 죄악으로 돌아서려는 모습이 강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른 성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18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8-20)

 

교회의 음행 문제에 대해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첫째, 음행을 피하라는 것입니다(18). 맞서지 말고 음행의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음행은 다른 죄와 달리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8). 이 외에 두 가지 이유들이 ‘~을 알지 못하느냐?’는 질문으로 제시됩니다(19-20). 그중 하나는 신자의 몸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3:16-17에서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하지만 본문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3:16-17은 집단적 교회를 의미하지만, 본문은 신자 개인을 의미합니다. 창녀와의 음행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표현 사이에 충돌은 없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그들 모임 속에 하나님 영이 거하실 것이라는 구약 약속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에스겔 36:27-28). 또 다른 이유는 신자의 몸이 값으로 산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구속을 통해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로 옮김 받아 새 생명을 얻고 새 언약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골로새서 1:13-14). 그렇기에 자기가 자기 몸의 주인인 양 음행하면 안 됩니다. 오직 새로운 관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명령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이 훌륭한 존재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에 걸맞게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성도의 의무입니다.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을 때, 어느 한순간 하나님께서는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을 찾아서 위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준비된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6-01)

 


세상에 송사하지 말아야할 성도들

고린도전서 6장 1-11절


사람들은 각각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분쟁보다는 분쟁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풀어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방법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얼마 전에 기독교 신문에 한 교회가 법정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을 광고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항상 지루한 다툼과 시비가 끝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성도들끼리 다툼이 세상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은 그렇게 달갑지 않았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 있는 목회자로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 고린도 교회 안에 또 하나의 문제는 영적 무질서입니다. 그들은 불의한 일을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무질서했습니다. 그 문제를 세상의 법정으로 가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질서가 없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불신자들의 재판정에 가서 문제 해결을 부탁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행위입니다.

 

교회 안에 3번째 문제(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최근에 한국 교회 안에는 공동체가 균열하는 모습을 경험합니다. 세상을 이끌기 위해서는 빛과 소금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해답을 본문은 줍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는 교회로 세워갈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1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1)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세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성도들 간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세상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했습니다. 음행의 문제를 다루었던 바울은, 이번에는 교회 내에 있는 분쟁과 소송에 관한 지침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무슨 일인지 정확하게 밝히진 않지만, 세상 법정에 소송했던 문제로 시끄러웠던 같습니다.

 

당시는 세상이 교회를 인정하지 않은 때여서 법정에서 성도들이 고소하고 다투면 세상은 교회를 경멸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동료 성도가 세상에서 벌을 받고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교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은 세상 법정에서 다루어야 할 근친상간 간음에는 침묵하면서(5:1-13) 법정에 고발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고발했습니다. 아마도 음행하는 자는 세상에서 영향력이 크게 때문에 고발하지 못했지만, 본문의 경우는 감당할 수 있어서 고소한 것 같습니다. 세상의 힘의 논리를 따라 성도들을 대하는 참으로 치졸하고 비겁한 태도입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 세상의 논리가 성도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둘째, 교회/성도와 세상과의 역할 관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셋째, 십자가로 인한 구원과 그에 근거한 삶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이후 바울은 둘째와 셋째에 대한 권면을 통해 첫째 모습을 바꾸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도에 대한 두 가지 원리와 적용(2-4)

성도들은 잘잘못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성도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 세상을 심판하고 심지어 천사마저 심판할 존재입니다. 그렇게 할 만큼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처럼 의롭고 온전해야 합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전혀 다른 가치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2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2-4)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길 만큼 지혜를 자랑했지만, 자기들 가운데 일어난 분쟁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의 재판정에 가지고 나아가 서로 송사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해 매우 분격하고 있습니다.

 

(1) 성도와 세상에 대해(2)

 

교회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그 시작은 성도와 세상과의 연할 관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원리를 말하고 그것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원리는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통해 독자와의 공유 지식을 상기시키는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성도는 세상을 판단하는 존재라는 것을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성도란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새 언약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1:2). 장차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완성되어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리실 때 그의 백성들도 함께 세상을 다스립니다(디모데후서 2:12; 요한계시록 2:26;22:5). 그런 성도들이라면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조건문과 의문문을 씁니다.

세상이 ‘너희’에게 판단 받겠거늘 ‘너희’는 가장 작은 일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까? 상당히 강한 질책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영적으로 성숙하고 지혜 있다고 여기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자부심을 깨뜨리고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2) 성도와 천사들에 대해(3)

 

성도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두 번째 설명입니다. 2절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것이라면, 3절은 천사라는 영적 존재들과의 관계를 다릅니다.

역시 원리와 적용의 방법을 사용합니다. 원리는 2절처럼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표현을 사용해 성도인 ‘우리’는 천사도 판단하는 자들임을 말합니다. 여기서 천사는 주님의 심판을 받을 악한 천사를 말합니다(유다서 1:6). 그에 대한 적용은 부정의문문을 써서 ‘하물며 세상의 일상적인 것도 못하느냐?’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듣는 자로 하여금 부정적인 대답을 유도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입에서 ‘못한다’는 말을 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악한 영적 존재도 판단하게 될 성도가 세상의 작은 것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하여 스스로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3) 적용(4)

 

바울은 ‘그러므로’를 통해 2-3절 내용을 결론짓고 독자들을 질책합니다. 세상의 사소한 일이 있을 때 교회에서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재판관으로 세우겠느냐고 묻습니다. 교만한 독자들을 심히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주님과 함께 법관이나 관리를 포함한 세상과 심지어 악한 천사도 판단할 사람이 성도라는 것을 아는가? 안다면 왜 그 작은 일도 처리하기 못하고 세상을 의지하는가? 부끄러운 줄 알라!’

 

바울의 책망(5-8)

성도들은 서로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형제들 가운데서는 서로 고소하는 것부터가 이미 잘못된 일입니다. 세상 법정에 송사한 잘못을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좀 속아주고 손해를 보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 낫습니다. 설사 승리하여 손실을 만회하거나 손해를 끼친 상대를 처벌한다 해도 교회와 그리스도께 큰 상처만 남습니다. 결국 둘 다 패배이며 불의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6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5-8)

 

바울은 2-4절과 연결해서 책망을 계속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너희’가운데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말한 지혜가 없느냐고 묻습니다. 긍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며, 독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지혜를 자랑하는 그들이 어리석은 일을 했음을 스스로 고백하게 만듭니다(5). 더 나아가 그들의 행동은 함께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에게 몹쓸 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형제를 고발할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 앞에서 심판 받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소를 통해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했지만, 사실 그들의 행동은 이미 자신들이 그 다툼에서 패한 자임을 보여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형제들의 어떤 것을 빼앗거나 자신들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투기 때문에 사실상 불의를 행하고 속여 빼앗는 자나 다름없었습니다. 형제를 대상으로 그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 모습에는 적어도 세 가지가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분별력이 있었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법정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고소는 하나님 앞에서의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이익과 기득권 유지 때문인 듯합니다. 율법의 첫째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위배됩니다. 둘째, 형제 사랑이 없습니다. 형제들을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자녀로서 사랑의 마음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오직 다툼과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 생각합니다. 이는 율법의 둘째 계명인 형제 사랑에 위배됩니다. 셋째,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모습이 없습니다. 섬김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온 예수님의 모본(마가복음 10:45)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세상이 십자가를 우습게 여기듯 그들 역시 십자가의 삶을 우습게 여깁니다. 오직 자기만 높이려 할 뿐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삶에서 기대하는 필수 요소이지만,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그들이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원리와 독자에게로의 적용(9-11)

교회의 일로 세상의 법정을 소란케 한 일들은 부끄러워하며 회개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법정에 세우기까지 한 것은 죄악입니다. 아무리 자랑할 것이 많다고 하더라도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연약한 아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주변에는 이런 영적 어린 아이들이 얼마나 많이 판칩니까? 성도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자들입니다. 그것을 상속 받을 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세상 법정에 송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이 아니라 육신과 정욕과 욕망을 쫓은 행위입니다.

 

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9-11)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마지막 권면입니다. 구원 과정과 관련하여 독자들의 모습과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2-4절처럼 ‘~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원리를 말하고 그에 대해 적용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 원리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자라고 말한 것과 연결시킵니다. 성도들의 행동은 하나님 나라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적용은 속지 말라는 부정 명령법으로 제시합니다. 여러 악을 행하는 자들, 곧 음행과 우상숭배와 간음과 동성애와 도적질과 탐욕과 술 취함과 모욕 주기와 속여 빼앗는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예수를 통해 구원받았기에 어찌 살든 상관없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이기에, 그 관계 안에서의 삶도 중요합니다. 관계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은 이전의 삶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 없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주 예수 메시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이전 세상의 방식, 곧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라고 권합니다. 세상 법정을 통해 자기 이익과 권리를 지키려는 태도를 포기하고 겸손히 형제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삶입니다.


 

교회는 세상보다 더 높고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 법정이 문제 삼지 않은 일까지도 하나님 나라 기준에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법정을 의지하여 성도 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더 거룩한 성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5-01)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간음 사건

고린도전서 5장 1-13절


고슴도치가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서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고통을 주기 때문에 항상 혼자 다니는 고독한 동물입니다. 외로울 때면 이웃에게 다가가 보지만, 그러면 더 고통스러움이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은 고슴도치와 같이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존 울트버그(John Ortberg)는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했습니다.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은 사람들의 마음 속 상처를 치유 받으면 이웃의 치유자로 설 것입니다.

 

  • 고린도교회의 두 번째 문제로 넘어갑니다. 교회 안에 있던 근친상간과 간음의 문제입니다. 상당히 심각한 범죄임에도 교회는 세상의 힘의 논리에 굴복해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일을 행한 자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교회 상황을 책망하고(1-2) 문제 해결을 촉구합니다(3-13). 이 과정에서 악한 일을 행한 형제에 대한 이전 편지 내용의 오해를 교정하고 현재 문제에 대해 단호한 명령을 내립니다. 음행하는 자를 신속히 내쫓으라고 권고합니다.

 

교회 안에 근친상간/간음문제(1-2)

죄는 절대로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에 대해 단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사탄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거룩과 순결을 지키는 일에 바울처럼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1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1-2)

 

고린도 교회 안에 두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음행의 악행의 죄악이 들어왔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방인들마저 놀랄 불륜의 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입에 담기도 힘든 ‘근친상간(近親相姦)’이었습니다.

 

(1) 문제 상황(1)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음행의 문제입니다. 교회 안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 방법으로 그 심각성을 표현합니다. 첫째, ‘실제로’입니다. 바울이 들은 정보가 확실함을 말해줍니다. 그들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 역시 적절하다는 것을 전합니다. 둘째, 이런 일은 이방 중에도 없던 일이라고 첨언합니다. 세상도 용납 못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아내란 법적으로 어머니 위치에 있는 여자를 의미합니다. 자기 어머니로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계모인 듯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근친상간입니다. 아버지가 죽고 미망인이었다면 간음은 아니지만, 살아 있다면 간음이기도 합니다. 과부라고 하지 않았기에 아마도 아버지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친상간과 간음은 당시 로마법에서도 엄하게 처벌하는 죄였습니다.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당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이런 일에 대해 세상 법에 호소하는 일은 남편이자 아버지가 합니다. 하지만 본문 상황은 그렇게 하지 않은 듯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당시 간음의 일은 먼저 이혼한 후 법적 처리를 하는데, 아직 이혼 과정이 끝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더 가능성 있는 것은 계모가 남편보다 더 높은 신분이나 유력한 집 출신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남편이 그 사회/정치 모임의 수혜자이면 더 그럴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면 이 문제는 단순히 성적 문제만이 아닌, 사회 계급과 신분의 힘이라는 변수도 함께 섞여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 교인들의 반응(2)

 

바울의 당황스러움이 계속됩니다. 그런 문제가 있는 것도 심각한데 교회가 교만해져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묵인하고 비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보통은 아들과 계모를 정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계모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고 법적 아들이 계모를 통해 사회, 정치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 아들의 눈치를 보고 그 죄에 눈감고 오히려 그 사람을 두둔하고 자랑하는 듯합니다(6). 세상 힘이 교회에서도 통하는 사례입니다.

 

문제 해결 촉구:음행하는 자를 내쫓으라(3-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방종은 아님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죄를 범하고서도 교만해 그 죄를 통탄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3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4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5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6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9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3-13)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음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는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교회가 이 일에 대해 통탄하지도 않으며 그러한 일을 한 자를 제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1) 음행하는 자에 대해(3-5)

 

교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답이 제시됩니다. 먼저 음행한 자에 대한 판단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세상 법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기에 교회가 이미 판단하고 처리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추구함으로 판단력을 상실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울은 행음한 자에 대한 판단을 제시합니다. 그 사람을 사탄에게 내주었습니다(5). 출교, 곧 사탄이 통치하는 세상으로 쫓아내는 것이며 언약 백성 밖에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6:9). 바울의 판단은 상당히 엄중합니다. 몇 가지 표현으로 전달합니다. 첫째, ‘나’라는 인칭대명사입니다. 고린도 성도들 태도와 다름을 강조합니다. 둘째, 육신의 몸은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 함께 있는 것 같다는 표현입니다. 어설프게 듣고 판단한 것이 아닙니다. 마치 교회에 함께 있어 듣고 본 것처럼 분명한 결정을 내린다는 말입니다. 셋째, ‘우리 주 예수의 이름으로’입니다(4). 음행하는 자에 대한 바울의 판단을 주님의 권위와 연결시킵니다. 이 모든 것은 고린도 성도가 어찌 생각하고 행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그들은 모임 중에 공개적으로 징계해야 합니다(4-5).

이 과정에 두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공적으로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일 때 바울도 영으로 동참할 것을 말함으로 모임의 공공성을 말하고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처리하라는 것은 주님의 권위로 징계하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징계가 그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 사람을 하나님 통치 바깥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축출하지만,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육은 세상 사람이 그렇듯 죽게 될 것이지만, 영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회개함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음을 말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계속 교회에 머물러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주님의 심판을 받는 것보다 지금 징계 받아 회개하면 그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2) 묵은 누룩을 버리라(6-8)

 

고린도 성도들 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그들의 자랑은 옳지 않습니다. 그 문제가 심각함에도 교회가 그것을 묵인하고 심지어 음행하는 자를 두둔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룩의 예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듯 그런 죄를 묵인하면 교회 전체가 부정해집니다. 더 나아가 유대 유월절과 관련해 부연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새 언약을 위한 유월절 어린 양, 곧 예수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백성이 되었기에(1:2) 묵은 누륵으로 하나님의 공동체를 더럽히면 안 됩니다. 오히려 순전함과 진실함의 빵으로 새로운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철저하게 예수로 인한 구원과 그로 인한 독자들의 정체성에 근거한 권면입니다. 세상이 아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3) 이전 편지에 썼던 바울 명령에 대해(9-10)

 

갑자기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한 이전 편지 내용에 대한 오해를 교정합니다. 당시 독자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현대 독자는 어떤 내용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현재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를 내쫓으라는 말(2,5,13)과 관련해 오해가 있을까 봐 설명하는 듯합니다. 이전 편지에서 말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 신자를 향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만일 세상 악한 사람들과 사귀지 말라고 하면, 신자는 관계 맺을 사람이 없기에 이 땅을 떠나야 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과장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초점이 하나님 백성 공동체 안에서 음행하는 자에 대한 처리 방법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4) 현재 편지를 통한 명령(11-13)

 

10절과 연결해 현재 바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증합니다. 철저하게 교회 안에 있는 신자에게 해당하는 명령입니다. 만일 어떤 신자가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예를 들어 음행이나 탐욕, 우상숭배,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는 일을 하거든 그와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받을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지금 교회가 행하는 자를 어찌해야 하는가입니다. 그 악한 사람을 내쫓아야 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그 일에 동조하지도, 지지하지도 않게 함으로써 죄의 오염을 막기 위함이고, 죄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그가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일지라도 교회는 악을 용납하면 안 된다. 물론, 그렇게 하면 세상에서 손해 볼 수 있습니다. 악행하는 자는 여전히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일 수 있고 독자들은 그 아래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교회가 바르게 권면하고 징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른 원리가 지배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죄를 살펴야 합니다. 미혹된 일들이 있지 않는가 살펴야 합니다. 죄악이 해결되지 않으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슴도치처럼 수많은 상처의 가시가 남아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살아갑니다. 말씀으로 치료를 받아 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거룩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고 죄악을 제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고린도 교회의 실수는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는 훈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깊이 적용하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말씀 속에 살아있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4-02)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사도

고린도전서 4장 6-21절


온전한 복음에는 고난과 영광이 공존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 부활의 영광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의 고민과 교회의 위기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속화에 대해서 신속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교회가 타락해 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갈등 없이 합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본문은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려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믿음의 사람들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걸어간 고난 길을 보면서 우리에게 숙연하게 하고 경건과 값없이 얻은 은혜에 아름다운 가치들을 다시 한 번 묵상하게 합니다.

 

 

  • 교회 분열 문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3:5부터 교회 문제의 원인(지혜 집착)과 현상(사람 자랑 3:18-23)과 사역자에 대한 바른 인식과 태도를 다룬(4:1-5) 바울은 그 모든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고 권하기 위해서임을 말합니다(6-13). 마지막으로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며 디모데를 보낸 이유를 밝히고, 향후 방문 계획을 통해 그들의 교만을 엄히 경고하며 이 문제를 마무리합니다(14-21).

 

다른 사람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6-13)

로마 시대를 살던 바울은 아마도 원형경기장(콜로세움)에 검투사를 영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내놓고 굶주린 사자나 같은 검투사끼리 싸워야했지만, 수많은 구경꾼들의 쾌락을 위한 눈요깃감으로 생명을 걸고 싸워야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자신의 삶과 생명을 받쳐서 희생하고 해산의 고통을 낳아야만 교회는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의 여정과 수고를 잊어버렸습니다. 이전의 모든 수고를 잊어버리고 복음의 마지막에 있는 영광과 해택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6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6-13)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바울에 대한 비판이나 판단 소리는 영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참된 복음의 의미와 본질, 그리고 복음이 자신들에게 전달되기까지 아름다운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로 껍데기 신앙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원인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이었습니다.

 

(1) 사역자로서 바울과 아볼로(6)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이 일’(이것들)을 바울 자신과 아볼로에게 적용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교회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권면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입니다. 그 속에는 두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지도자 문제 정리와 고린도 성도들의 유익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 요소와 관련해 목적절 두 개를 첨가해 자신의 의도를 전합니다. 하나는 기록된 것을 넘지 말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사도나 사역자들)를 통해 배우게 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도 어떤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둘 모두 교만하게 행하지 말라는 내용을 전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스스로에 대한 교만이 아닙니다. 두 번째 절의 ‘어떤 사람을 위해서’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나 모임이 생각하는 지도자를 위해서 다른 성도를 교만하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지도자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고(3:5-9; 4:1-5) 교회에서 누가 더 중요한지(3:21-23)와 성도들 역할(3:9-17)을 설명한 것입니다.

 

(2) ‘너희’의 상황(7-8)

 

교만에 대한 권면을 잘 전달하기 위해 고린도 성도와 바울의 상황을 비교해 제시합니다. 먼저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한 상황입니다. ‘누구’와 ‘무엇’과 ‘왜’라는 일련의 질문으로 그들 상태를 꼬집습니다. 누가 ‘너’를 특별하다고 했습니까? 사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인식했기에 교만한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 중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이면, 왜 마치 다른 이에게서 받지 않고 스스로 얻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을 거침없이 비판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은 반어적인 표현으로도 그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8).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양 풍족하고 부유하며 ‘우리’(사도나 사역자들)없이도 왕 노릇합니다. 그들에게 주신 풍족함의 은혜가 오히려 그들 마음을 가리고 거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그들의 풍족함을 시기하거나 경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성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8절 후반에 ‘너희’가 참으로 왕 노릇하기 원하는데 ‘우리’ 역시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잘되기를 진정 원하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3) ‘우리’의 상황(9-13)

 

왜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왕 노릇하기 원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그들의 교만을 부각합니다. 그들과 다른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의 생각에 자기들은 사도들(일꾼들)인데(4:1) 왕 노릇은커녕 하나님께서 마치 사형 선고 받은 맨 마지막 사람처럼 자기들을 세상에 보이셨다고 합니다. ‘우리’를 세상과 천사와 사람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구경하는 원형 경기장에서 싸우고 죽어야 하는 검투사처럼 혹은 맹수에게 죽어야 하는 자들처럼 세상에서 고난 당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도 혹은 지도자로서의 화려함이 아닙니다. 세상 보기에 어리석은 실패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계속 비교합니다(10-13). ‘우리’는 메시아 때문에 세상에서 어리석지만, 그들은 메시아 안에서 지혜롭다고 자랑합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그들은 강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고 명예를 추구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거주지가 없고 손으로 수고하며 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욕을 당하지만 축복하고 박해를 당하지만 참고, 비방을 당하지만 권면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꺼기처럼 여김 받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신앙도 있고 세상에서 어느 정도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좋게 여기는 것들, 곧 지위와 명예와 안정과 능력과 부와 지혜 등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십자가 예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메시아 안에서 누리려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다릅니다. 오직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삽니다. 세상에 미련 두지 않고 진정한 평가자이신 하나님을 보고 이 땅에서 십자가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 부르심에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대조가 세상을 중요시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었습니까? 어쩌면 계속 코웃음 치며 듣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자기들의 실상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현대 교회들은 어떻겠습니까? 감히 고린도 교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동일하게 십자가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울의 권면과 계획(14-21)

한 사람이 바르게 세워진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요, 죄인들이 구원의 길로 나오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사명은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십자가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난이 없이는 영광의 부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울며 씨를 뿌리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14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14-21)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는 자신이 예수님 안에 거하며 생명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사랑으로 권면하며 복음을 가르칩니다. 잘못을 지적하며 자신의 우월함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기를 소망하며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도록 질책하고 바른길로 인도합니다.

 

(1) 바울의 권면: 나를 본받는 자 되라(14-16)

 

고린도 성도와의 대조를 서술한 이유와 그에 근거한 명령을 제시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언급한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녀를 권면하듯 고린도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많은 안내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참 아버지 역할을 하는 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 메시아 안에서 복음으로 새 생명 얻게 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표현으로 그 자격을 강조합니다. 이제 그 ‘아버지-자녀’관계 속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지금까지 내용에 의하면 바울은 (1) 세상을 향한 추구를 멈추고 (2) 십자가 예수만을 중요시하고 (3) 십자가를 포함한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살고 (4) 비교와 경쟁이 아닌 부르심에 신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의 삶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려는 복음의 참 스승이자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따라 예수 안에서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모본)-바울(제자, 모본)-독자(제자, 영적 자녀)로 연결된 삶입니다.

 

(2) 바울의 계획 1: 디모데를 보냄(17)

 

두 가지 계획을 언급하며 교회 분열 문제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는 디모데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를 보낸 이유는 지금까지 바울이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 들을 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 대한 추천의 말을 전합니다. 잘 영접하고 그의 말을 듣고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편지 끝 부분인 16:10-11에서 디모데를 잘 영접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리고 디모데를 통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싶은 의도입니다.

 

(3) 바울의 계획 2: 바울의 방문 계획(18-21)

 

두 번째 계획은 바울의 고린도 방문입니다. 언제 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가고 싶다고 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안 올 것처럼 여기고 교만한 태도를 취하지만, 바울이 가면 그들의 교만한 말이 아닌 참 능력을 보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에 걸맞은 하나님 능력의 유무를 검증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는 상당히 심각한 경고입니다. 자신이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갈지 결정하라고 합니다. 매를 통한 징계냐,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이냐? 이것은 독자들인 고린도 성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전에 빨리 돌이키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것은 값없이 부르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부르셨고 다양한 은사들도 주셨습니다. 은사를 통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통해 섬기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성도가 됩시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4-01)

 


하나님의 성전을 허는 행위

고린도전서 3장 16절 - 4장 5절


남아공아국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지도자는 마땅히 자기의 텃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씨 뿌리고 살피고 일궈야만 하며 그 열매를 거둬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도자는 정원사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경작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평신도이거나 복음사역자이거나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직접관계를 맺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닌 어떤 사람에게 속하거나 판단 받으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려 해야 합니다.

 

  • 교회 분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진행합니다. 16-17절은 앞부분의 집 짓는 예와 연결해 하나님의 성전 개념을 통해 교회가 무엇이고 어찌 행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이후 3:18-4:5에서는 결론 같은 명령들을 이어갑니다.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각각 두 가지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18-23절은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것으로 세상 지혜에 집착해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고, 4:1-5은 사역자에 대한 것으로 그들을 사역자로 여기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16-17)

성도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자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 보존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성전으로 보존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국하게 지키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정체성에 합당한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16-17)

 

‘집 짓는 예’(9b-15)와 연결해 성전 개념으로 경고합니다. ‘알지 못하느냐’는 표현으로 고린도 성도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 생각을 교정합니다. 그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 언약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내주에 대한 약속의 실현을 경험하고 있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는 긍정적 확신을 주려는 것이 아니며, 그 상태를 전제로 삶에 대해 경고하려는 것입니다. 경고는 부정적 내용이 담긴 조건절로 제시됩니다.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성전을 파괴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교회 안에 있는 시기와 경쟁으로 인한 분열 현상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성전 파괴, 즉 공동체의 분열을 경고합니다. 분열은 단순히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기에 즉시 멈춰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 권면1: 세상과 다르게 살라(18-23)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입는 것입니까? 넓고 화려한 안식처를 갖는 것입니까? 주목 받는 자리에 올라서거나 자신만의 특별한 자랑거리를 갖는 것입니까? 이것이 좋아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거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상은 그 일에 지혜를 모으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18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18-23)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지혜와 관련해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세상 지혜를 가지고 자신을 지혜롭다고 여기면 스스로 속아서 결국 어리석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거리끼리는 것과 미련한 것으로 여기게 하고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1) 명령 1: 세상 지혜에 집착하지 말라(18-20)

 

명령법으로 분열 문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합니다. 첫 번째 다루는 것은 세상 지혜에 대한 집착입니다. 문제 상황 이면에 있는 원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 믿고 교회 안에 있지만, 여전히 세상과 구별 없이 삽니다. 세상이 말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계속 따르고 있고, 특별히 말이나 지식과 지혜를 통한 경쟁으로 우위를 점하려는 세상 문화 속에서 당연한 듯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교회와 세상은 단지 용어와 대하는 사람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바울이 명령합니다. ‘아무도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18).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세상에 동화해 살았습니다. 세상 방식을 따르는 것을 지혜롭게 여기고 자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란 변수를 놓쳤습니다. 그들은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고, 정말 지혜로운 자는 세상이 어리석게 여기는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자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지혜자들의 생각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욥 5:13; 시 94:11). 그들은 결국 자기 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과 관련한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바른 정체성에 따른 분별의 삶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많은 은사와 지식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교회가 되었다는 것(1:2)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며,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생각(2:16)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을 어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신령하고 성숙하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돌이켜 복음 안에 있는 예수 메시아에 대한 내용과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2) 명령 2: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21-23)

 

두 번째 명령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의 표면적 모습, 곧 지도자를 내세워 경쟁하는 것을 멈추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소속과 관련한 꼬리물기 방식으로 이유를 제시합니다. 모든 것이 ‘너희’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에는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 등의 지도자들과 세계와 사망과 지금이나 장래 것 등 세상 요소들이 포함됩니다. 하지만 고린도 성도들이 최고는 아닙니다. 그들은 메시아 것이고, 메시아는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결고리는 모든 것 < ‘너희’ <메시아 < 하나님의 구도를 보여줍니다.

몇 가지 중요한 관찰점이 있습니다. 첫째, 성도 삶에 대한 큰 그림입니다.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 속에 들어와 그분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존재들이고 온 우주의 회복을 함께 누릴 자입니다. 누구 편이냐, 하는 작은 일에 얽매여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둘째, 교회 구조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누구에게 속했느냐로 싸우지만, 오히려 교회는 지도자들이 성도들에게 속해 있는 구조입니다. 신적 존재를 제외하면 성도들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역자가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성도 중 한 사람입니다. 단지 섬기는 자, 곧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지도자를 두고 경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셋째, 교회는 하나님/예수의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분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님 백성이 무엇인지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기에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교회를 정쟁이나 이익의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이나 목회자에 대한 바른 자리매김을 잊은 채 주님의 교회를 ‘내’ 교회로 생각하는 일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합니다.

 

결론적 권면2 : 사역자들을 메시아의 일꾼으로 여기라(4:1-5)

주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은 복음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보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파벌을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그런 삶을 지양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사람을 앞세워 그것으로 자신의 뜻을 나타내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속하려 하지 말고 복음에 집중하며 주님께만 속해야 합니다.

 

1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1-5)

 

바울은 그가 주님의 일꾼이기에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매우 작은 일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자신을 판단하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을지라도 그것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주님의 판단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1) 명령 1: ‘우리’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여기라(4:1-2)

 

사역자들을 ‘너희’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바울은 명령형으로 사역자들에 대한 인식을 교정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과 아볼로(‘우리’)를 메시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메시아를 위해 일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맡아 관리하고 전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교회나 사역의 주인이 아니기에 일을 맡긴 주인에 대한 ‘신실함’(개역개정은 ‘충성’으로 번역하고 있다)이 요구됩니다(2). 결국, 그들 역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 중 하나입니다. 단지 성도들을 복음으로 섬기는 역할과 부르심이 다를 뿐입니다(12:28). 주인이 아니기에 그 역할을 자기 것인 양 자랑하거나 경쟁의 통로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은혜이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은사와 직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12-14), 고린도 성도들로 하여금 사역자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확인케 합니다.

 

(2) 명령 2: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4:3-5)

 

사역자와 관련한 두 번째 명령을 전합니다. 판단과 비교를 멈추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비교와 경쟁은 지도자들을 비교함으로써 자신들의 모임을 높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연히 각 지도자들의 장점과 단점들이 부각되고 사역의 내용이 판단과 비교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3절 표현은 그들이 실제로 바울에 대해 그렇게 했음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 자신도 스스로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최종 평가자는 주님입니다(4). 타인이나 스스로의 평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다 해도 그 자체가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주님은 단순히 행동만이 아니라 마음의 뜻과 동기도 보십니다(5). 행동이나 말은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함께 평가하십니다. 셋째, 주님의 평가는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그분이 다시 오셔서 역사를 완성할 때 이루어집니다(5).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나 스스로의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날의 참 평가를 기대하고 계속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독자들 역시 동일한 생각을 공유하기를 기대합니다. 참 사역자와 거짓 사역자를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역자에 대한 평가로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최종 평가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또한 지금의 평가가 최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영에 순종하지 않고 내 맘대로 행함으로서 성전을 세우기는커녕 성전을 허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나 지도자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것만 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이것이 성도의 첫째 되는 사명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3-01)


육신에 속한 성도들의 특징

고린도전서 3장 1-15절


생명을 가진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어 있는 물건이든지, 아니면 다음으로 성장하는 장애물들로 성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을 가진 것은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름에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엇인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성장을 멈추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바울은 1:10에서 시작된 교회 분열 문제에 대한 구체적 권면이 제시됩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보면서 아직 육신에 속한 자로서 어린 아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분쟁은 성령과 무고나한 육적 존재방식입니다. 성장하기 위해 바울이나 아볼로는 심고 물을 주는 일뿐이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일한 대로 각자의 수고한 대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성장이 멈춘 그리스도인(1-4)

거듭난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만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문제가 아니라 성장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1-4)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은 성숙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미숙하다고 판정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 ‘젖으로 먹임’(2) 등의 표현을 쓴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1)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책망(1-2)

 

바울은 교회 분열 문제에 대한 구체적 답변들을 제시합니다. 1인칭 강조 지시어인 ‘나 자신’(카고 κἀγὼ)와 ‘형제들아’라는 호격을 사용해 주의를 집중시키고 책망함으로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고린도 성도들을 신령한 사람으로 부를 수 없고 어린아이 같은 육신의 사람들로 부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 곧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아마 스스로를 성숙하고 신령한 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령을 경험했고 여러 지식과 은사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2:6-16에서 말한 세상과의 분명한 구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오만을 꼬집듯 미성숙한 자, 심지어 세상을 의미하는 육신에 속한 자라 평합니다. 더 나아가 메시아의 마음(2:16)을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에도 지금도 젖만 먹을 수밖에 없는 유아로 평합니다(2).

 

(2) 책망의 이유(3-4)

 

그들이 책망 받아야 할 이유가 소개됩니다. 그들 안에 있는 시기와 분쟁 때문입니다. 분쟁은 경쟁으로 인한 갈등을 뜻하며 교회 문제의 핵심입니다(1:11). 시기는 그 경쟁의 이유입니다. 이 두 항목은 당시 철학 학파나 정치 모임 간의 관계를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세상은 자기 모임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영향력과 이익을 얻고자 그것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모습이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2). 바울은 이 모습을 육신에 속해 사람을 따르는 것이라고 평합니다(3-4). 하나님 백성에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런 평가를 독자 스스로 동의하는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우(ου)를 통해 긍정대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질문함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의 상태를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책망합니다: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요?”

 

 

문제 상황에 대한 바울의 대답1(5-9a)

 

현대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잘 속는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처럼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큰 능력을 행하면 ‘이 정도의 능력을 행한 사람의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법칙으로 사역자를 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믿어버린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러니깐 이런 거짓 은사주의자들이 아직 미숙한 성도들을 악용합니다.

 

5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5-9a)

 

고린도 성도들이 파당을 지어가며 추앙 하는 지도자들은 사실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주신 사역자입니다. 그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서로 다른 은사 모두 섬김의 수단일 뿐 비교의 기준이나 경쟁의 도구가 아닙니다.

 

(1) 바울과 아볼로(5)

 

4절과 연결해 지도자 바울과 아볼로에 대한 이해를 교정합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입니다.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에베소에 왔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도를 배워 더 탁월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에 아볼로가 와서 사역을 잘했던 것 같습니다(행 18:24-28). 하지만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를 두고 경쟁하여 분열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이 문제가 발생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제 바울이 이 분열 문제에 대해 자신과 아볼로는 하나님께서 각자 주신 대로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한 사역자라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의 밭과 사역자, 그리고 하나님(6-9a)

 

농사의 예를 통해 사역자와 교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설명gkqsl다. 그 예에서 ‘너희’라고 불리는 독자들은 밭이고, 바울과 아볼로는 농사짓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씨를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이 설명은 독자들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씨를 심듯 교회를 개척한 바울과 물을 주듯 성장케 한 아볼로 중 누가 더 훌륭할까?’하는 경쟁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 모임의 위치를 높이려는 의도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이해를 교정합니다.

그의 의도는 몇 가지 반복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입니다. 네 번 언급합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는 모든 과정을 그분이 하셨습니다(6-7). 심지어 교회도 하나님 것이고 바울과 아볼로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 동역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9). 고린도 성도들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돌려서 더는 사람에게 집중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각각’과 ‘자기’라는 표현입니다(5,8). 사역자들 역할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이 다릅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 주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비교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비교와 상대평가로 사람을 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혜에 대한 개인적 충실함 자체로 평가하십니다. 독자들은 하나님의 평가 방식을 배워서 자신과 교회에 적용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와 ‘함께’의 표현입니다. 비록 역할은 다르지만, 사역자들은 하나님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입니다(7).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입니다(9). 이 세 가지는 모두 관점이나 사고방식과 관련 있습니다. 어디에 초점을 두고 무엇을 중요시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분이 사람 대하는 방식에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문제 상황에 대한 바울의 대답2(9b-11)

 

하나님의 사역에 사람을 일꾼으로 쓰시되 각각의 상황에 따라 인물을 쓰십니다. 저마다 일의 역할이 다르고 일하는 모양이 다를 지라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동일한 사역자입니다. 결국은 그 일꾼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9…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9b-1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초로 할 때 믿음에 합당한 삶으로 세워지고,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보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공적을 세워서 마지막 심판 때 인정받는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 교회, 하나님의 집(9b-11)

 

집짓기의 또 다른 예로 교회 문제에 대해 권면합니다. 앞부분이 사역자에 대한 관점이었다면, 이번에는 ‘너희’라는 성도들의 일에 대해서입니다. 독자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며 시작합니다.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함을 전달합니다. 집짓기는 터를 파고 주춧돌을 세운 후 건물을 올려 꾸미는 과정이 있습니다. 바울은 첫 과정을 담당해 충실히 수행했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터는 예수님인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그 예수님을 충실하게 전해(1:18-2:5) 독자들이 믿게끔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과정입니다. 그 터 위에 무엇으로 어떻게 짓는가에 따라 하나님 집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 문제는 바울이 잘못 가르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엉뚱하게 반응하고 살았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2) 어떻게 지을 것인가(12-15)

 

집짓기와 관련해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해 부연합니다. 특별히 사용한 건축 재료에 따라 세운 집의 항구성 여부로 평가받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평가하실 것인데, 만일 금이나 은이나 보석 등 불에 타지 않는 것으로 지으면 상을 받고, 불에 타는 것들로 지으면 해를 받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에는 몇 가지 생각할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지어져 갑니다(엡 2:20-21). 이 땅에서 교회의 완성은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건물이 아닌 신자의 모임, 곧 관계이기 때문입니다(1:2). 오직 세워져 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둘째, 교회는 신자 개개인이 만들어갑니다. 농사에서 곡식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지만, 집짓기는 성도가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우시지만 초점은 그들이 일한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각각’과 ‘누구든지’를 통해 성도의 개별 역할을 강조합니다. 함께 살아가지만 개인들이 서로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셋째, 성도 삶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은 미래 심판(1:8)을 배경으로 행한 대로 갚는다는 대원칙이 지배합니다(마 16:27; 롬 2:6; 계 22:12). 모든 성도 역시 하나님 평가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주목할 것은 그분의 평가 방법입니다. 건축 재료의 귀천, 즉 금이냐 은이냐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에 견딜 수 있게 일했는지로 평가하십니다. 비교를 통한 보상이 아니라 각자의 일과 삶을 통한 절대평가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팎에서 성도 간의 경쟁은 의미 없습니다.

아쉽게도 집짓기와 관련한 설명에 명쾌하지 않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 건축 재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상과 벌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니 시기와 경쟁이라는 세상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돌이켜 교회를 잘 세워가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기초로 각자의 사역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 사역이 복음을 기초로 이뤄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사역이 복음을 강화합니까가 아니면 오히려 약화합니까? 교회의 사역이 세상의 지혜를 좇거나 자기 위를 기초로 세우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구원을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며, 결국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역의 동기와 방향은 복음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복음을 설명하고 증명하고 적용하는 사역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지키고 복음의 영광을 높여야 합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2-01)


바울의 전도하는 방법

고린도전서 2장 1-16절


노래를 부르지 못한 사람을 음치(音癡)라고 합니다. 대부분 음치들은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수준에 맞는 좋은 음악을 많이 들려주고, 점점 음악에 대해서 리듬 박자 음정이 무엇인지 깊숙이 가르쳐 갈 때, 음악을 이해하며 섭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복음이 아니라 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 바울은 1:17에서 자신의 복음 전도 내용과 방법을 언급했습니다. 1:18-31에서 내용 차원을 다루었다면, 2:1-5은 방법에 대한 것을 설명합니다. ‘나’라고 세상 지혜에 대해 비판하고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증거 했는지를 기술합니다. 2:6-16은 ‘우리’라는 복수를 통해 성령으로 인한 참 지혜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이후 3:1부터 소위 영적이라고 믿지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독자를 향한 권면의 근거가 나옵니다.

 

바울의 과거 전도(1-5)

세상에 가장 좋은 소식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게 불편하고 거북합니다. 세상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 속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사용하지 않고 눌변가라는 혹평을 받더라도 오직 십자가를 전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을 전했고, 자신을 드러내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말을 전했습니다.

 

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1-5)

 

바울은 인간의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눌변가라는 혹평을 받더라도 십자가만 전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을 전했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말을 했습니다. 세상으로 가득 채워진 사람 속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과거에 고린도에서 행한 자신의 전도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 방법을 두 단계로 설명합니다.

 

(1) 고린도로 나아감(1-2)

 

바울은 고린도로 나아갔습니다. 1:17과 연결해 바울의 복음 전파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말합니다. 그는 세상 방식을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1)

바울은 두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는 말과 지혜의 거창함입니다. 당시 어떤 웅변가나 선생이 어느 도시에 가면 자리 잡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보이려고 여러 사람과 논쟁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자리 잡기 위해서입니다. 이 과정에서 말과 지혜의 거창함은 중요한 무기였습니다. 고린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였기에 고린도에 처음 온 바울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당연히 세상 무기를 사용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2). 십자가의 예수님을 세상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구원 과정의 열쇠이자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이 기대하는 말과 지혜의 거창함이 아닌 복음의 내용을 정확히 전하는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2) 고린도에 거주함(3-5)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3)라고 고린도에 거주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서 한 일들이 무엇입니다. 그것은 바로 ‘전도’(4)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세 가지로 ‘(그는) …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3)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하는 동안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무능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에게 나타날 수 있는 3중의 무능함입니다. 즉, 바울은 복음의 능력에 있어 사람에게서 나올 것이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전도를 ‘말과 전도’로 설명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4) ‘말’은 전도하는 언어의 틀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말을 전도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전도’는 전도하는 언어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전한 내용은 ‘복음’이었습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바울의 전도 방법의 두 번째 차원은 외적 인상과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새로운 학파가 자리 잡으려면 외적으로 좋은 인상을 주어야 했습니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나 사람들을 휘어잡는 설득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습니다. 좋은 인상을 주기에는 부족한 덕목입니다. 바울은 애써 외적인 것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결과가 사람의 어떠함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결정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바울의 전도 방법은 세상 방식과 달랐습니다. 외적 화려함이나 거창함을 통해 사람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구원의 비밀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가감 없이 전했고, 그분의 일하심만을 추구하며 전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복음 안에 있는 진짜 지혜와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를 갖고 있기에 사람의 환심을 얻기 위해 애써 어색한 치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복음 전도 이후 믿음의 삶의 초점이 사람에게 맞취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 이런 태도는 여전히 화려한 말의 지혜로 경쟁하는 고린도 교회가 들어야 했지만, 현대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령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6-16)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급조된 임기웅변의 이론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만세 전부터 정하신 것을 ‘때가 차매’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세상의 없어진 어리석은 지혜를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이 성취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6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6-16)

 

복음 선포자는 '십자가의 지혜를 믿으라라고 외쳐야 합니다. 십자가 구원 계획은 급조된 임기웅변의 지혜가 아닙니다. 만세 전부터 정하신 것을 ‘때가 차매’ 이루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세상의 어리석은 지혜를 이용하여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이 성취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 우리는 참 지혜를 전함(6-7)

 

바울이 세상 방식을 따르지 않았지만, 지혜를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온전한 자들, 곧 성령을 받은 성도들 안에서 참 지혜에 대해 말합니다. 1장에서 언급한 복음 안에서 있는 예수 십자가로 인한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먼저 참 지혜의 성격을 대조를 통해 제시합니다. 세상 것이나 세상 통치자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몇 가지 추가 표현으로 참지혜의 성경을 구체화합니다. 첫째, ‘비밀로 감춰진’이란 표현입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세상 지혜로 절대로 알 수 없고 오직 선포를 통해 알 수 있으며(1:21), 시간적으로 오랫동안 감춰졌던 것이 지금 복음 증거로 드러났음을 의미합니다. 둘째, 시간의 영속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멸망’이란 표현을 쓰고 하나님 지혜는 영세 전에 미리 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유한성과 하나님 계획의 무한성의 대조입니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셋째, ‘너희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대상에 독자들이 있으며, 거룩하고 온전케 해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독자들로서는 감사한 일입니다.

 

(2)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방법(8-13)

 

참 지혜에 대한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갑니다.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입니다. 역시 세상과의 대조로 설명합니다. 세상 그 누구도 참 지혜를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지혜는 세상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이 세상 통치자들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8). 그들 보기에 십자가는 어리석고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인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10). 바울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를 성령으로 소개합니다. 구약에서 성령은 창조의 영이자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임한 영입니다. 새 언약 약속 역시 성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에스겔 36:27). 성도 되는 과정과 이후의 삶도 성령과 관련 있습니다(12:13). 하지만, 바울은 왜 성령이어야 하는지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제시합니다(11-13).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에 있는 영 외에는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과 지혜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이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성령이 보이고 가르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12). 성령이 계시한 복음(10)을 믿어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받았으며 성령의 임재 또한 경험했습니다. 바울은 그 목적 중 하나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미 독자는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1:4-7).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인식은 적습니다(12-14장). 그렇기에 그들은 성령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지만, 성령이 아닌 세상의 생각을 갖고 있는 어린아이들입니다. 한편, 성령으로 인한 결과 중 하나가 13절에서 서술됩니다. 바울(‘우리’)이 사람의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으로 가르친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것은 성령을 통해 분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독자들의 모습과 다릅니다. 그들은 영적인 일을 세상 지혜와 경쟁의 모습으로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3) 자연적 사람과 영적 사람의 대조(14-16)

 

8-13절과 연계하여 왜 세상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지 않는가에 대해 다룹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성령을 통한 일들이 어리석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미 1장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실제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방법을 알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간 이상한 말이지만, 성령의 가르침과 행함은 성령을 통해 계시된 것이기에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분별됩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자들이 참 지혜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에 반해, 성령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릅니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각을 알고 있기에 가능합니다(16). 또한 그들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15).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각과 사고를 알기에 주를 알지 못하는 세상의 생각과 판단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16). 아쉽게도 독자들은 성령을 받은 자임에도 성령의 일을 모르며 세상의 가치에 편승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해 성숙한 신령한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 과정은 영원 전 계획에서 시작해(7) 때가 되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역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사도는 이 내용을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했고(4-5), 성령의 계시 사역을 통해 사람들이 이것을 인식했으며(10), 믿음의 반응을 통해 성령이 신자에게 임했습니다(12). 이 성령은 또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은혜를 알게 하고 영적인 것을 분별해 살게 하십니다(12-13). 계속 거룩하게 해서 주님과의 교제를 온전히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1:9). 독자들은 이 과정에 속해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그 과정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여전히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안에 담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논리나 기대를 거스르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비우고 부인하는 것이 사랑이요, 그것이 얻는 것이요 채워지는 것이요 살리는 것임을 믿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1-03)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십자가

고린도전서 1장 18-31절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겉으로 보기에 무기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잡아 죽이는 세력에게 힘으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지혜롭게 빠져 나가지도 못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라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무력하게 만드신 하나님께서 하락하신 속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 이제 바울은 17절에서 말한 복음의 내용과 전달 방식 중 복음의 내용에 대해 다룹니다. 특별히 세상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에게 집중합니다. 18-25절에서는 ‘우리’라고 세상의 이해와 다르게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26-31절까지는 ‘너희’라는 2인칭으로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독자들과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우리’가 전한 그리스도(18-25)

십자가에 대한 태도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구원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지식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열어두신 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도 복음으로 형성하기 때문에, 당연히 복음을 모르면 교회를 모른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고린도 지역에 유행하던 다른 철학이나 영지주의 같은 종교가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18-25)

 

고린도 교회는 성도들은 너무 똑똑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우월하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선생들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를 폐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알았다면 작시 어리석음을 먼저 보았을 것입니다.

 

(1) 십자가의 역설(18)

 

바울은 먼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왜냐하면’을 사용하여, ‘십자가의 도’(로고스)라는 표현으로 앞부분과의 연결성을 보여줍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느냐?’(13)와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7)에서 말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에 복음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연결은 이 부분이 교회 분열 상황과 관련 있으며, 왜 바울이 말의 경쟁이 아니라 복음에만 집중하는지를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더 나아가 독자들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도 인식하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메시지에 관한 대조로 설명을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 십자가의 도가 미치는 영향에 관해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인간에게 ‘구분’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의 두 종류는 멸망하는 자와 구원받는 자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멸망하는 자들, 곧 하나님을 거절하는 세상에 속해 있기에 장차 심판받을 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과 멸망, 어리석음과 능력의 대조이며, 바울을 포함한 성도인 ‘우리’와 불신자 ‘그들’과의 대조입니다.

 

(2)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구원 방법(19-21)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지혜 사이에 있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질문을 사용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조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지혜와 관련해 세상과 하나님을 대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지혜를 멸하시겠다는 이사야 29:14를 인용하여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지리라’라는 말씀을 필두로,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인간 지혜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이 자신을 계시하고 구원 과정을 보이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의 주도권을 갖고 계시며 그분만의 방법으로 진행하십니다. 그 방법은 사람의 생각과 예측을 뛰어넘습니다. 오직 선포(전도)의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선포란 18절에 있는 십자가에 대한 말을 의미하고, 믿음이란 그에 대한 응답을 말합니다. 즉, 십자를 말하는 미련한 방법에 긍정적으로 응답하는 사람만 구원을 경험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세상 지혜를 무색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에 대한 선포를 미련한 방법이라고 한 겁니까? 이어지는 부분(22-25)에서 그 내용을 다룹니다.

 

(3) 세상의 추구와 ‘우리’의 전도 내용(22-25)

 

왜 ‘십자가의 도’가 세상 보기에 미련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세상 반응과 대조되는 바울의 선포 내용을 서술합니다. 세상 반응과 관련해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의 경우를 구분해 설명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증거를 구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표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한 혐오감과 반대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인데(신명기 21:22-23), 예수님께서 나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한편,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철저한 실패이자 수치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우리’)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만 전합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진실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 자체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단지 끔찍한 죽음의 장소일 뿐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새롭게 인식되고 이를 통해 그분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비로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 곧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만 경험되는 비밀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지혜로 부활을 못 믿는 자들에게 예수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유대인과 헬라인을 막론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분은 하나님께서 능력이자 지혜입니다. 아쉽게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세상보다 지혜롭고 그분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부연합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고린도 교인의 경우가 보증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독자들과의 관계(26-31)

갈등은 모두 서로 자신의 힘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생깁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인간의 능력을 폐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제대로 알면 자신의 연약함을 제대로 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지체의 도움으로 산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26-31)

 

개인은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지도자를 따르면서 파당이 형성되었고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그들은 교회를 구성했지만, 하나님과 복음 자체를 몰랐기 때문에 일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1) 독자들의 구원(26)

 

이전 상황 2인칭 지시어(‘너희’)를 통해 왜 십자가의 예수님만 하나님의 능력이고 구원인지를 독자들과 연계해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형제들아’라는 호격과 ‘보라’라는 명령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 곧 독자들의 구원 경험을 상기시킵니다. 그들 모두가 세상 지혜와 능력이 탁월하거나 좋은 가문 출신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세상 최고의 사람들이 아니며, 세상 보기에 구원의 조건을 가진 자들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 방법과 이유(27-29)

 

독자들을 주어로 사용한 26절과 달리 27-28절은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해 독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 세상의 기대와 다름을 설명합니다. 세상은 능력과 지혜를 포함해 무엇을 가진 자를 선택합니다. 효용성 높고 어떤 결과를 산출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역시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고, 세상의 선택을 추구하며 살려 합니다. 심지어 세상의 선택 방식을 교회에 도입하여 서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다릅니다. 세상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선택하고 연약한 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천하게 여김 받는 자들과 멸시 받는 자들, 심지어 없는 존재처럼 여김 받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세상 지혜나 능력이나 자랑을 무색하게 하고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9). 하나님 대신 자신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죄의 근원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에서도 그 죄의 오만함과 자부심을 완전히 꺾어버립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방법은 죄악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향한 사랑이기도 하고, 높은 마음 가진 세상 죄에 대한 정의로운 심판이기도 합니다.

 

(3) 하나님의 구원 방법의 결과(30-31)

 

독자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의 수혜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와 독자와의 관계성을 통해 이를 표현합니다(30). 초점은 독자들의 상태입니다. 주절 안에 주어(너희)와 현재 상태 동사(에스테)를 통해 그들의 현재 모습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들의 상태는 세 가지 표현을 통해 구체화합니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구원 과정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27-28절에서 언급한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의미합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입니다. 구원 과정의 결과로서 하나님/예수님의 통치 안에서 그분과 관계 맺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독자들은 공의와 은혜라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통해 현재 예수님의 통치 안에 있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1:9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와 독자와의 관계성을 묘사한 것과 일치합니다. 셋째,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로 얻게 된 상태입니다. 한편, 바울은 독자들 상태와 더불어 예수님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관계절을 통해 부연합니다(30).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우리’(바울과 독자들 모두)에게 지혜가 되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으니).’ 독자들의 구원과 관련해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하나님 구원 방식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이 부분에서 말하는 바는 독자들이 세상 방식이 아닌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에 세상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방식의 경쟁을 멈추고 오직 주님께만 집중해야 함을 전달합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공동체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세상의 능력을 이기고, 십자가의 지혜로 세상의 지혜를 이기는 공동체입니다. 십자가만이 갈등과 분열을 이기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합니다. 분열의 공동체에 없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1-02)

 


복음으로 하나 되어야 할 교회

고린도전서 1장 10-17절


단체 경기는 팀워크(team work)이 중요합니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수들이라 할지라도 단체 경기에서 팀워크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그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없습니다. 교회도 구성원들이 팀워크이 제대로 이룰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종종 분열이나 편 가름이 있습니다.

 

  • 사도 바울은 서론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교회 문제로 들어갑니다. 인편으로 주고 받은 주제들을 먼저 다루는데, 6:20까지 이어집니다. 첫 주제는 교회 속에 있는 분쟁이며 4:21까지 진행됩니다. 바울 입장에서는 그만큼 심각한 문제인 듯합니다. 본문은 그 시작 부분입니다.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해 전해 받은 것을 근거로 성도들에 대한 전체적 권면을 하고, 그들 문제가 무엇인지 재신술함으로써 주체적으로 다르기 시작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할 공동체(10-11)

교회(敎會)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 된 몸입니다. 분쟁이 아닌 연합과 조화가 교회의 본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저마다 취향에 따라 어떤 인간 지도자들을 선호하면서 숭배한다면,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허무는 행위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참된 일치를 위해서는 모두가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11)

 

사도 바울은 본격적인 본론으로 성도들의 첫 번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 문제는 다름 아닌, 교회 안에 분열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그 문제에 대한 전체 권면을 제시합니다. 비록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친밀함을 유지하지만, 바울의 권면은 묵직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주 예수 그리스도, 곧 구원 과정의 핵심이요(2) 성도가 주님으로 섬기고 교제할 대상이자(9) 다시 오셔서 역사를 완성하실 분(7)의 이름을 걸고 권면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권면의 내용은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라며, 정리하면 세 가지 권면으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① 모두 같은 말을 하고, ② 그들 분열이 없게 하고, ③ 같은 생각과 같은 판단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같이 됨’을 통해 분열 문제를 해결하라고 명합니다. 여기에는 말과 사고 판단의 영역들이 포함됩니다. 행위에 앞서 내적 인지 영역과 그것을 표현하는 말의 영역을 통해 온전히 회복된 교회를 만들라는 권면입니다. 8절에서 말한 책망할 것이 없는 모습이며,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게 어울리는 거룩함으로의 회복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거룩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다른 생각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너무 깊어지면 분쟁으로 발생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11-12)

기독교의 핵심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언제나 주인으로 인정할 때 겸손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될 때,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종종 공동체 안에서 자기만을 세우려 하고, 자기중심적인 활동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려는 행동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1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11-12)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신학적인 차이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경쟁과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해서 교회 안에서도 분파에 따라 지도자를 중심으로 분열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의 문제점은 세상적인 삶의 원리의 방법을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1) 바울이 들은 것(11)

 

바울은 10절에서 전체적 권면을 했지만, 곧 바로 구체적 명령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의 상황 인식과 그에 대한 권면의 적절함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합니다. 바울은 글로에Chloe의 집 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받았다고 밝힙니다. 현대 성도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지만, 당시 고린도 성도들은 이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정보의 신뢰성을 주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분쟁(分爭)'이란 단어의 원어 의미는 경쟁과 불화로 인한 갈등입니다. 이 단어는 바울이 교회 상황을 진단하는 3:3에 다시 언급되는데, 시기심과 연결되어 나옵니다. 결국 바울이 얻은 정보에 의하면 교회 분열의 핵심은 시기와 경쟁이 어우러진 비교의식이었습니다.

 

(2) 구체적인 상황(12)

 

본문애서 분열의 구체적인 모습이 제시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은 어떤 이는 바울에게, 또 다른 이는 아볼로Apollos, 혹은 게바(베드로)Cephas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심지어 그리스도Christ에게 속한 자라고 말합니다. 자기와 관련된 지도자들을 내세워 서로 비교와 경쟁하여 자신의 우월성을 세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은 로마 식민 도시인 고린도에서 있었던 경쟁 분위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학풍의 분위기가 수사학 학파들의 경우 제자들은 자기 선생을 변호하기 위해 상대 학파를 논쟁으로 공격하여 우위를 점하려 했습니다. 선생들 역시 더 많은 학생과 후원자를 얻기 위해 상대 학파의 지도자와 경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경쟁은 또한 도시 행정과 관련해 우위를 점하려는 정치 모임과도 관련 있었습니다. 만일 어느 모임이 경쟁을 통해 지방 총독이나 황제 앞에서 도시 행정관으로 임명되면 재정이나 명예와 관련한 기회를 얻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마치 오늘날 정치인들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렇기에 당시 엘리트 계층은 경쟁을 사회생활의 필수요건처럼 여겼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비록 정치 요소는 아닐지라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통해 자신들을 우위에 두고 싶은 경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이기고자 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 안에 있던 엘리트 계층 사람들을 중심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의 삶의 원리와 형태가 교회 안에서도 여과 없이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난 폐단입니다.

 

바울의 응답(13-17)

 

현란한 말이나 감동적인 언어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능력이 없는 것에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구원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빈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말의 지혜, 곧 인간적인 웅변술이나 철학과 사상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13-17)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례를 받아서, 이제는 사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지도자한테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이제는 그분처럼 자신을 죽이고 남을 높이며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1) 반문(13)

 

교회 문제에 대한 바울은 대답하기 시작합니다. 세 가지 수사 질문으로 진행합니다. 첫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입니다. 그리스도는 한 개인을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열쇠입니다. 또한 그런 개인들이 모인 하나님이 백성 모임, 곧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가 경쟁으로 성도를 나누고 편애를 통해 몸을 찢었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그 개념 자체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를 들먹인 12절 마지막 표현에 대한 응답일 듯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질문은 바울과 관련된 형태로 제시됩니다. 바울이 독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바울의 이름으로 성도들이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듣는 자들이 부정적으로 답하는 방식으로 질문함으로써 스스로 아니라고 대답하게끔 유도합니다.

십자가는 성도가 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고, 세례는 하나님의 교회 구성원 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이 두 과정 모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바울을 그 과정 중심에 놓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중심으로 한 경쟁적 분열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 백성 됨의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권면은 3장에서 제시됩니다.

 

(2) 바울과 세례(14-17)

 

바울은 13절의 세례 문제와 연결해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주제를 언급한 것은 독자들이 세례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과의 관계를 오해 혹은 왜곡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들은 세례의 과정을 마치 세상 학파에서 선생과 제자의 관계 혹은 정치 모임에서 후견인과 후원 받는 자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처럼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이해와 그로 인한 분열의 결과의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그의 의도는 몇 가지 표현을 통해 전달됩니다. 먼저 자신이 세례 준 사람이 적다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또한 세례를 적게 준 목적이 누군가 자신의 이름으로 주었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세례 준 사람들은 경쟁의 분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본인 역시 경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세례를 주지 않았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보Crispus와 가이오Gaius를 언급한 후, 스데바나Stephanas의 집 사람들이 생각나 추가했지만,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부연합니다.

 

바울의 입장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17절 표현입니다. 자신이 왜 세례에 집중하지 않는지를 설명합니다. 소명과 그의 사역 내용과 방법 때문입니다. 그의 소명, 곧 그리스도가 자신을 보낸 것은 세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한 마지막 명령 속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마태복음 28:19), 그 자체가 핵심이 아닙니다. 구원은 세례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함을 통해서만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의 복음 증거 내용과 방법도 다릅니다. 그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말로 경쟁에서 이기려는 세상 방법으로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가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복음의 내용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7절 표현은 바울의 입장뿐 아니라 독자들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보여줍니다. 이 표현에 의하면 독자들의 문제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의 지혜를 통해 경쟁에서 이기려 하고 분열을 만든 것입니다. 세례도 그런 통로로 이용되었습니다. 그 주장 안에는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세상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7절에 근거한 구체적 설명은 18절부터 복음의 내용(18-31)과 절달 방식(2:1-5)을 언급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에게 세례를 준 지도자를 중심으로 분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은 예수님만 높임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자신은 죽여서 지체를 살리고 세우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당신 때문에 분열되었던 교회가 성령의 은헤로 하나가 되길 바랍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고린도전서(01-01)

 

 


고린도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

고린도전서 1장 1-9절


 

당신에게 대통령 취임식 후 만찬까지 참석해달라는 초대장이 왔습니다. 이런 큰 행사에 초대장을 받았다면 얼마나 황송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천국잔치에 초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죄인이 아닌 거룩한 사람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에 걸맞게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고민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합당하게 살아가야 하지만, 삶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냈던 교회에 독보적인 교회는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무시하지 않고 문안합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증거 위에 굳게 서서 모든 은사에 부족함 없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을 감사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에베소에 있던 소스데네(Sosthenes)는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합니다.

  

거룩한 초대를 받은 교회(1-3)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 인식은 모든 문제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으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거룩한 교회(Holy Church)’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공동체는 세상의 공동체와는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해야할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1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3)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분당과 은사 남용, 부도덕 등 유난히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먼저 그들에게 따끔한 회초리를 드는 대신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가섭니다. 고린도 전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성도들을 향한 뜨거운 관심이 있었습니다.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감동이 됩니다.

 

⑴ 발신자(1)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내는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사도(使徒)’로 부르셨다고 소개합니다. 고린도 모든 성도들 또한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도(聖徒)’로 불러서 세우셨다고 합니다. 그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⑵ 수신자(2)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바울은 수신자를 문제가 많은 교회이지만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임을 분명히 합니다.

 

본문을 통해 ‘교회(敎會)’를 정의해 보면, 첫째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룩해진 자들이며, 마지막으로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께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잠시 고린도 도시는 무역항으로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무역이 매우 발달한 항으로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기초한 스콜라 철학자, 시인, 수많은 상인, 무역업자들 그리고 퇴역 군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종으로는 그리스인, 로마인 그리고 유대인까지도 합세한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했습니다.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인 영향을 받아서 고린도 문화를 형상해 갔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든 만큼이나 많은 종교가 있어서 우상을 숭배하였고,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이 ‘당신은 고린도사람!’이라고 하면, 이 의미는 고린도 사람들처럼 방탕하고 음란하며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큰 욕이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에 고린도 교회에도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그 고린도에 있는 문제들로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성도들끼리 분쟁이었고, 영적으로 점점 우상숭배 제물, 성적 타락, 은사 문제 등을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고린도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교회 안에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바울이 전해 듣고 그는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자라도록 권면하기 위해 바울 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비록 고린도교회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지만, 바울은 보이는 데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시각(視覺)에 기초하여 보았습니다. 문제점들이 많았지만,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고린도 성도들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부르신 거룩한 공동체며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聖徒)’란 하나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에 의해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세상에 통용되는 인간적 모든 가치관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거룩한 초대를 통한 축복(4-9)

성도들이 온전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신 은혜 자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의식과 부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린도의 문제점은 이러한 교회와 성도에 대한 정체성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4-9)

 

서신의 목적이 고린도교회를 바르게 고치는 것이지만,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감사하는 부분을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른 교회들에 대해 감사하듯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서 1:8; 에베소서 1:16; 빌립보서 1:3; 골로새서 1:3; 데살로니가전서 1:2; 데살로니가후서 1:3; 디모데전서 1:12; 디모데후서 1:3; 빌레몬서 4 등). 책망보다 칭찬을 통한 권면이 인격적인 관계 형성과 변화를 가져옵니다. 고린도 교회는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였지만, 바울은 문제점들을 책망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사랑의 대상이자 근심의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와 스승이 아닌 아버지로서 관계합니다(4:14-15). 교회의 아비지인 바울은 잠시도 자녀인 고린도 교회에게서 마음을 뗄 수 없습니다.

 

(1)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이유(4)

 

바울은 인사말 이후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언급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4) 감사합니다. 은혜란, 사람의 형편과 관계없이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을 따라 무엇인가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우상 숭배자들이었던 고린도 사람들을 부르시는 은혜를, 그리고 이 부르심에 더하여 신령한 선물을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4) 주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바깥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은혜의 범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서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효력이 있습니다.

 

(2) 감사의 이유에 대한 내용Ⅰ(5-7)

 

바울은 감사의 이유에 대해서 부연 설명하면서, 먼저 고린도 성도의 상태에 대해 집중합니다. 감사의 이유는 그들을 향한 은혜의 영역에 말과 지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5)라고 ‘풍족’한 것에 감사합니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 그들 가운데 메시아에 대한 증거가 견고하게 확증되었습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철학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이성적으로 올바른 것을 판단하고 지혜를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도 언변에 능하고 그리스 철학에서 발생한 지식에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합니다(7). 고린도 교회의 특징 중에 하나는 고린도 성도들은 은사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사랑했던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은사, 특히 진리 체계와 진리 이해의 은사를 풍성하게 주셨지만, 사람들은 이 풍요를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의 도와 하나님의 지혜(1:18,24)는 잊히고 풍요한 은사는 분쟁의 도구가 되고 맙니다(12:12이하). 이처럼 사실 감사할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삶을 보면서 당시 상황은 한심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미래 거룩하게 변화될 모습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3) 감사의 이유에 대한 내용Ⅱ(8-9)

 

바울의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출발점을 둡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풍족한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입니다(8). 성도들을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와의 교제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9) 구원의 과정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성도의 현재 삶에도 은혜를 베푸셔서 미래 완전함으로 연결시키시기에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런 감사 이유들은 고린도 교회들의 모습을 상당히 고무적인 것으로 보게 하지만, 사실 아픈 현실에 대한 반어적 진단이 담겨 있습니다. 서신 뒷부분에 나타난 교회의 현실은 5-7절의 감사의 내용과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은 교만하여 교회를 어지럽히는 데 사용되었고(4:19-20), 지식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도구였습니다(8:1,10-11). 주님과 연합하는 만찬은 우상 재물과 섞여버렸고(10:19-22), 성령의 은사 역시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소가 되었으며(12-14장), 주님의 오심과 관련해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기도 했습니다(15장). 오히려 그들은 책망 받을 것이 많기에 주의 오심을 두려워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감사 이유를 기술한 것은 그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과 기대의 마음 때문이며, 몇 가지를 인식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첫째, 비록 그들 개인과 공동체에 문제가 많지만 여전히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예수 안에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수신자 소개 내용을 통해 전하려는 의도와 같습니다. 둘째, 그들에게 신자 삶의 중요 요소를 인식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과의 교제 안으로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기본적으로 주의 만찬을 통한 연합을 의미하지만(10:16-17) 교제란 일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그 관계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는 그런 삶을 개인과 공동체적으로 만들어가고 세워주는 통로여야 합니다. 또한 그 과정은 시간적으로 과거의 구원과 현재 구원의 삶, 그리고 미래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과 다른 가치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은혜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예수와의 언약 관계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셋째,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이 감사하는 것은 신자의 삶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5절은 그 은혜의 풍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이라는 표현을 세 번 반복합니다. 또한 8-9절에서 신자의 삶을 만들어가고 완성케 하신 하나님의 신실함을 말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꼭 기억해야 하고 그것으로 삶을 돌이켜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문제 많은 교회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고 그 은혜에 성도들을 의탁합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귀한 사역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사람으로 초대하셨고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는 구원의 은혜를 만끽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흠잡을 곳 없는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초대를 받은 성도의 책임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 배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