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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4-02)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사도

고린도전서 4장 6-21절


온전한 복음에는 고난과 영광이 공존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 부활의 영광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성도들의 고민과 교회의 위기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부활의 영광만을 누리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속화에 대해서 신속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교회가 타락해 가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갈등 없이 합류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본문은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려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믿음의 사람들의 여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걸어간 고난 길을 보면서 우리에게 숙연하게 하고 경건과 값없이 얻은 은혜에 아름다운 가치들을 다시 한 번 묵상하게 합니다.

 

 

  • 교회 분열 문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3:5부터 교회 문제의 원인(지혜 집착)과 현상(사람 자랑 3:18-23)과 사역자에 대한 바른 인식과 태도를 다룬(4:1-5) 바울은 그 모든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고 권하기 위해서임을 말합니다(6-13). 마지막으로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며 디모데를 보낸 이유를 밝히고, 향후 방문 계획을 통해 그들의 교만을 엄히 경고하며 이 문제를 마무리합니다(14-21).

 

다른 사람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6-13)

로마 시대를 살던 바울은 아마도 원형경기장(콜로세움)에 검투사를 영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을 내놓고 굶주린 사자나 같은 검투사끼리 싸워야했지만, 수많은 구경꾼들의 쾌락을 위한 눈요깃감으로 생명을 걸고 싸워야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희생과 자신의 삶과 생명을 받쳐서 희생하고 해산의 고통을 낳아야만 교회는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의 여정과 수고를 잊어버렸습니다. 이전의 모든 수고를 잊어버리고 복음의 마지막에 있는 영광과 해택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6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6-13)

 

고린도 교회의 분쟁과 바울에 대한 비판이나 판단 소리는 영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참된 복음의 의미와 본질, 그리고 복음이 자신들에게 전달되기까지 아름다운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로 껍데기 신앙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원인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이었습니다.

 

(1) 사역자로서 바울과 아볼로(6)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 ‘이 일’(이것들)을 바울 자신과 아볼로에게 적용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교회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권면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입니다. 그 속에는 두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지도자 문제 정리와 고린도 성도들의 유익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 요소와 관련해 목적절 두 개를 첨가해 자신의 의도를 전합니다. 하나는 기록된 것을 넘지 말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사도나 사역자들)를 통해 배우게 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도 어떤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둘 모두 교만하게 행하지 말라는 내용을 전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스스로에 대한 교만이 아닙니다. 두 번째 절의 ‘어떤 사람을 위해서’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나 모임이 생각하는 지도자를 위해서 다른 성도를 교만하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문제를 정확히 지적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지도자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고(3:5-9; 4:1-5) 교회에서 누가 더 중요한지(3:21-23)와 성도들 역할(3:9-17)을 설명한 것입니다.

 

(2) ‘너희’의 상황(7-8)

 

교만에 대한 권면을 잘 전달하기 위해 고린도 성도와 바울의 상황을 비교해 제시합니다. 먼저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한 상황입니다. ‘누구’와 ‘무엇’과 ‘왜’라는 일련의 질문으로 그들 상태를 꼬집습니다. 누가 ‘너’를 특별하다고 했습니까? 사실 그들 스스로 그렇게 인식했기에 교만한 것입니다. 네가 가진 것 중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다 받은 것이면, 왜 마치 다른 이에게서 받지 않고 스스로 얻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고린도 성도들의 교만을 거침없이 비판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바울은 반어적인 표현으로도 그들의 교만을 지적합니다(8).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양 풍족하고 부유하며 ‘우리’(사도나 사역자들)없이도 왕 노릇합니다. 그들에게 주신 풍족함의 은혜가 오히려 그들 마음을 가리고 거만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그들의 풍족함을 시기하거나 경쟁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성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8절 후반에 ‘너희’가 참으로 왕 노릇하기 원하는데 ‘우리’ 역시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함이라고 덧붙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잘되기를 진정 원하지만,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3) ‘우리’의 상황(9-13)

 

왜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왕 노릇하기 원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그들의 교만을 부각합니다. 그들과 다른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의 생각에 자기들은 사도들(일꾼들)인데(4:1) 왕 노릇은커녕 하나님께서 마치 사형 선고 받은 맨 마지막 사람처럼 자기들을 세상에 보이셨다고 합니다. ‘우리’를 세상과 천사와 사람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구경하는 원형 경기장에서 싸우고 죽어야 하는 검투사처럼 혹은 맹수에게 죽어야 하는 자들처럼 세상에서 고난 당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사도 혹은 지도자로서의 화려함이 아닙니다. 세상 보기에 어리석은 실패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계속 비교합니다(10-13). ‘우리’는 메시아 때문에 세상에서 어리석지만, 그들은 메시아 안에서 지혜롭다고 자랑합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그들은 강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고 명예를 추구하지만, ‘우리’는 아닙니다. 지금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거주지가 없고 손으로 수고하며 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욕을 당하지만 축복하고 박해를 당하지만 참고, 비방을 당하지만 권면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 세상의 더러운 것과 찌꺼기처럼 여김 받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신앙도 있고 세상에서 어느 정도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좋게 여기는 것들, 곧 지위와 명예와 안정과 능력과 부와 지혜 등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십자가 예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메시아 안에서 누리려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다릅니다. 오직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삽니다. 세상에 미련 두지 않고 진정한 평가자이신 하나님을 보고 이 땅에서 십자가 예수의 삶의 방식을 따라 부르심에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대조가 세상을 중요시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었습니까? 어쩌면 계속 코웃음 치며 듣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자기들의 실상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듯합니다. 현대 교회들은 어떻겠습니까? 감히 고린도 교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동일하게 십자가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울의 권면과 계획(14-21)

한 사람이 바르게 세워진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요, 죄인들이 구원의 길로 나오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사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사명은 다른 사람들을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라는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십자가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난이 없이는 영광의 부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울며 씨를 뿌리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14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5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6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7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8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1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14-21)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는 자신이 예수님 안에 거하며 생명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사랑으로 권면하며 복음을 가르칩니다. 잘못을 지적하며 자신의 우월함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즐거워하기를 소망하며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도록 질책하고 바른길로 인도합니다.

 

(1) 바울의 권면: 나를 본받는 자 되라(14-16)

 

고린도 성도와의 대조를 서술한 이유와 그에 근거한 명령을 제시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언급한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자녀를 권면하듯 고린도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많은 안내자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참 아버지 역할을 하는 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 메시아 안에서 복음으로 새 생명 얻게 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표현으로 그 자격을 강조합니다. 이제 그 ‘아버지-자녀’관계 속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명령합니다. 지금까지 내용에 의하면 바울은 (1) 세상을 향한 추구를 멈추고 (2) 십자가 예수만을 중요시하고 (3) 십자가를 포함한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살고 (4) 비교와 경쟁이 아닌 부르심에 신실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의 삶이 완벽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려는 복음의 참 스승이자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따라 예수 안에서 다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모본)-바울(제자, 모본)-독자(제자, 영적 자녀)로 연결된 삶입니다.

 

(2) 바울의 계획 1: 디모데를 보냄(17)

 

두 가지 계획을 언급하며 교회 분열 문제를 마무리합니다. 하나는 디모데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를 보낸 이유는 지금까지 바울이 가르친 것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 들을 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 대한 추천의 말을 전합니다. 잘 영접하고 그의 말을 듣고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실제로 바울은 편지 끝 부분인 16:10-11에서 디모데를 잘 영접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리고 디모데를 통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싶은 의도입니다.

 

(3) 바울의 계획 2: 바울의 방문 계획(18-21)

 

두 번째 계획은 바울의 고린도 방문입니다. 언제 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속히 가고 싶다고 합니다.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안 올 것처럼 여기고 교만한 태도를 취하지만, 바울이 가면 그들의 교만한 말이 아닌 참 능력을 보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에 걸맞은 하나님 능력의 유무를 검증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는 상당히 심각한 경고입니다. 자신이 갈 때 무엇을 가지고 갈지 결정하라고 합니다. 매를 통한 징계냐, 아니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이냐? 이것은 독자들인 고린도 성도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전에 빨리 돌이키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르신 것은 값없이 부르신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부르셨고 다양한 은사들도 주셨습니다. 은사를 통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통해 섬기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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