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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3-01)


육신에 속한 성도들의 특징

고린도전서 3장 1-15절


생명을 가진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면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죽어 있는 물건이든지, 아니면 다음으로 성장하는 장애물들로 성장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새 생명을 얻습니다. 생명을 가진 것은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름에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무엇인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성장을 멈추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바울은 1:10에서 시작된 교회 분열 문제에 대한 구체적 권면이 제시됩니다. 고린도 성도들을 보면서 아직 육신에 속한 자로서 어린 아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분쟁은 성령과 무고나한 육적 존재방식입니다. 성장하기 위해 바울이나 아볼로는 심고 물을 주는 일뿐이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일한 대로 각자의 수고한 대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성장이 멈춘 그리스도인(1-4)

거듭난 사람들은 부분적으로만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문제가 아니라 성장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1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1-4)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은 성숙하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미숙하다고 판정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 ‘젖으로 먹임’(2) 등의 표현을 쓴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1) 고린도 성도들에 대한 책망(1-2)

 

바울은 교회 분열 문제에 대한 구체적 답변들을 제시합니다. 1인칭 강조 지시어인 ‘나 자신’(카고 κἀγὼ)와 ‘형제들아’라는 호격을 사용해 주의를 집중시키고 책망함으로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고린도 성도들을 신령한 사람으로 부를 수 없고 어린아이 같은 육신의 사람들로 부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사실 그들은 메시아 안에 있는 사람, 곧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아마 스스로를 성숙하고 신령한 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령을 경험했고 여러 지식과 은사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2:6-16에서 말한 세상과의 분명한 구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오만을 꼬집듯 미성숙한 자, 심지어 세상을 의미하는 육신에 속한 자라 평합니다. 더 나아가 메시아의 마음(2:16)을 이해하지 못하는, 과거에도 지금도 젖만 먹을 수밖에 없는 유아로 평합니다(2).

 

(2) 책망의 이유(3-4)

 

그들이 책망 받아야 할 이유가 소개됩니다. 그들 안에 있는 시기와 분쟁 때문입니다. 분쟁은 경쟁으로 인한 갈등을 뜻하며 교회 문제의 핵심입니다(1:11). 시기는 그 경쟁의 이유입니다. 이 두 항목은 당시 철학 학파나 정치 모임 간의 관계를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세상은 자기 모임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영향력과 이익을 얻고자 그것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모습이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2). 바울은 이 모습을 육신에 속해 사람을 따르는 것이라고 평합니다(3-4). 하나님 백성에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런 평가를 독자 스스로 동의하는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우(ου)를 통해 긍정대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질문함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의 상태를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책망합니다: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요?”

 

 

문제 상황에 대한 바울의 대답1(5-9a)

 

현대 미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잘 속는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처럼 은사를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큰 능력을 행하면 ‘이 정도의 능력을 행한 사람의 위대한 사람이다’라는 법칙으로 사역자를 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믿어버린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그러니깐 이런 거짓 은사주의자들이 아직 미숙한 성도들을 악용합니다.

 

5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5-9a)

 

고린도 성도들이 파당을 지어가며 추앙 하는 지도자들은 사실 성도들을 섬기라고 보내주신 사역자입니다. 그들의 다양한 가르침과 서로 다른 은사 모두 섬김의 수단일 뿐 비교의 기준이나 경쟁의 도구가 아닙니다.

 

(1) 바울과 아볼로(5)

 

4절과 연결해 지도자 바울과 아볼로에 대한 이해를 교정합니다.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입니다.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에베소에 왔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도를 배워 더 탁월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떠난 고린도에 아볼로가 와서 사역을 잘했던 것 같습니다(행 18:24-28). 하지만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를 두고 경쟁하여 분열했습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 이 문제가 발생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제 바울이 이 분열 문제에 대해 자신과 아볼로는 하나님께서 각자 주신 대로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한 사역자라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의 밭과 사역자, 그리고 하나님(6-9a)

 

농사의 예를 통해 사역자와 교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설명gkqsl다. 그 예에서 ‘너희’라고 불리는 독자들은 밭이고, 바울과 아볼로는 농사짓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씨를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이 설명은 독자들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씨를 심듯 교회를 개척한 바울과 물을 주듯 성장케 한 아볼로 중 누가 더 훌륭할까?’하는 경쟁입니다. 그것을 통해 자기 모임의 위치를 높이려는 의도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이해를 교정합니다.

그의 의도는 몇 가지 반복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입니다. 네 번 언급합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자라는 모든 과정을 그분이 하셨습니다(6-7). 심지어 교회도 하나님 것이고 바울과 아볼로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 동역자일 뿐이라고 말합니다(9). 고린도 성도들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돌려서 더는 사람에게 집중해 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각각’과 ‘자기’라는 표현입니다(5,8). 사역자들 역할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이 다릅니다.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 주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서로 비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비교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은 비교와 상대평가로 사람을 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혜에 대한 개인적 충실함 자체로 평가하십니다. 독자들은 하나님의 평가 방식을 배워서 자신과 교회에 적용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와 ‘함께’의 표현입니다. 비록 역할은 다르지만, 사역자들은 하나님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입니다(7).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입니다(9). 이 세 가지는 모두 관점이나 사고방식과 관련 있습니다. 어디에 초점을 두고 무엇을 중요시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분이 사람 대하는 방식에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문제 상황에 대한 바울의 대답2(9b-11)

 

하나님의 사역에 사람을 일꾼으로 쓰시되 각각의 상황에 따라 인물을 쓰십니다. 저마다 일의 역할이 다르고 일하는 모양이 다를 지라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동일한 사역자입니다. 결국은 그 일꾼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입니다.

 

9…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9b-15)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초로 할 때 믿음에 합당한 삶으로 세워지고,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보존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공적을 세워서 마지막 심판 때 인정받는 거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1) 교회, 하나님의 집(9b-11)

 

집짓기의 또 다른 예로 교회 문제에 대해 권면합니다. 앞부분이 사역자에 대한 관점이었다면, 이번에는 ‘너희’라는 성도들의 일에 대해서입니다. 독자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며 시작합니다.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함을 전달합니다. 집짓기는 터를 파고 주춧돌을 세운 후 건물을 올려 꾸미는 과정이 있습니다. 바울은 첫 과정을 담당해 충실히 수행했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터는 예수님인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그 예수님을 충실하게 전해(1:18-2:5) 독자들이 믿게끔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과정입니다. 그 터 위에 무엇으로 어떻게 짓는가에 따라 하나님 집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 문제는 바울이 잘못 가르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에 엉뚱하게 반응하고 살았기 때문에 벌어집니다.

 

(2) 어떻게 지을 것인가(12-15)

 

집짓기와 관련해 어떻게 지을 것인가에 대해 부연합니다. 특별히 사용한 건축 재료에 따라 세운 집의 항구성 여부로 평가받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로 평가하실 것인데, 만일 금이나 은이나 보석 등 불에 타지 않는 것으로 지으면 상을 받고, 불에 타는 것들로 지으면 해를 받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설명에는 몇 가지 생각할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지어져 갑니다(엡 2:20-21). 이 땅에서 교회의 완성은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는 건물이 아닌 신자의 모임, 곧 관계이기 때문입니다(1:2). 오직 세워져 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둘째, 교회는 신자 개개인이 만들어갑니다. 농사에서 곡식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지만, 집짓기는 성도가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우시지만 초점은 그들이 일한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각각’과 ‘누구든지’를 통해 성도의 개별 역할을 강조합니다. 함께 살아가지만 개인들이 서로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셋째, 성도 삶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바울의 설명은 미래 심판(1:8)을 배경으로 행한 대로 갚는다는 대원칙이 지배합니다(마 16:27; 롬 2:6; 계 22:12). 모든 성도 역시 하나님 평가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주목할 것은 그분의 평가 방법입니다. 건축 재료의 귀천, 즉 금이냐 은이냐로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불에 견딜 수 있게 일했는지로 평가하십니다. 비교를 통한 보상이 아니라 각자의 일과 삶을 통한 절대평가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팎에서 성도 간의 경쟁은 의미 없습니다.

아쉽게도 집짓기와 관련한 설명에 명쾌하지 않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 건축 재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상과 벌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평가하시니 시기와 경쟁이라는 세상 방법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어렵게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돌이켜 교회를 잘 세워가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기초로 각자의 사역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금 사역이 복음을 기초로 이뤄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사역이 복음을 강화합니까가 아니면 오히려 약화합니까? 교회의 사역이 세상의 지혜를 좇거나 자기 위를 기초로 세우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구원을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며, 결국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역의 동기와 방향은 복음을 기초로 해야 합니다. 복음을 설명하고 증명하고 적용하는 사역을 통해 교회의 본질을 지키고 복음의 영광을 높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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