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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6-02)

 


그리스도 몸으로서의 중요성

고린도전서 6장 12-20절


오늘날 시대와 사회에 따라 성과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변해 왔습니다. 그 변화 속에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좋은 영향도 받지만 악도 쉽게 받아 들릴 수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으려면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항상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네 번째 문제를 다룹니다. 교회 안에 있는 방종한 삶을 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세상 힘 있는 자들의 문화를 따라 만찬 때 방탕하고 음란한 짓을 행하면서도 갖은 논리를 동원하여 자기 삶을 정당화하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대화 방법을 사용해 그들을 질책하고 교정합니다. 먼저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고(12-14), 음행과 몸과 주님과의 관련성에 대해 설명한 후, 문제에 대한 구체적 명령을 전합니다(15-20).

 

고린도 성도들의 주장과 바울의 반박(12-14)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자유는 쉽게 권태로워집니다. 중독이 아니면 만족이 없으며,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도 참된 관계를 맺지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사랑하고 헌신하는 자발적인 매임이 참 자유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주장에 대해 바울은 반박합니다.

 

12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13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12-14)

 

고린도 교회의 네 번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금욕주의가 있었지만, 반대로 자유분방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도 중 일부가 성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1) 고린도교회의 주장(12)

 

고린도전서 5:1-13의 경우와 다릅니다. 그 부분은 근친상간과 간음이었다면, 본문은 만찬을 배경으로 한 음행입니다. 당시 세상에서 지위와 힘이 있는 사람들은 만찬에서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며 그 자리에 창녀들을 불러 음행하곤 했었습니다.

교인 중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는 어줍지 않은 표어로 자기를 정당화하였습니다. 어쩌면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젊은이였을지 모릅니다. 어른이 되었으니 모든 것을 할 자유가 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또한 이 표어에는 얄팍한 신학이 담겨 있습니다(13).

바울은 대화 형식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교정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내게 가하다’고 주장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며 바울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그들 문제의 핵심은 ‘내게’라는 표현입니다. ‘나’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나’가 모든 사고와 결정의 중심이고 철저히 ‘나’의 이익을 위해서만 행동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반박에 의하면 그들은 몇 가지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고, 그러한 관계 속에 있습니다. 심지어 영적으로 어둠의 영역(예, 사탄이나 세상 악들)이나 빛의 영역(삼위일체 하나님과 성도들)에 속할 때도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관계를 벗어난 절대 자유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입니다. 둘째, 죄의 핵심은 ‘나’에게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존재와 관계의 시작점이 되시는 창조주를 거절하고 모든 것을 자기에게만 집중하게 하는 것을 죄의 핵심으로 말합니다(창세기 3:5; 로마서 1:28). 단순히 무엇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를 사고와 결정의 중심에 두는 사유 방식과 그것을 통한 하나님 거절이 죄입니다. 셋째, 신자는 하나님과 관계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새 언약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참 행복은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과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은 재앙이 됩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가(可)하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합당한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구와 함께 살고 있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스스로 자유롭다 여기지만, 사실은 음행을 통해 자기에게만 집중하여 마치 하나님 아닌 다른 관계의 노예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그런 것에 얽매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잊은 채 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 주장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2) 음식과 몸과 하나님(13-14)

 

12절에 이어 독자의 자기 합리화를 깹니다. 몸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들은 음식은 배(몸)를 위해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음식과 음행이 결합된 만찬을 배경으로 몸과 연결을 짓고 있습니다. 음식은 몸을 위해 있고 식욕이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처럼, 성욕도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음행도 문제될 것 없다는 논리를 독자들은 펴고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어차피 하나님이 미래 어느 날 몸과 음식도 다 폐하실 것인데, 지금 그 몸을 위해 성욕 채우는 것이 무슨 문제이겠냐는 논리를 펴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의 논리를 따라 반박합니다. 몸은 음란이 아니라 주를 위해 존재하고 주는 몸을 위해 존재하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님을 다시 살리셨고 이후에 신자 또한 몸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신자 몸은 자기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존재로서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생명과 새로운 관계를 주신 그분이 삶의 주인이며 내 몸의 주인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몸의 주인인 양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몸을 쓰며 사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둘째, 몸은 영원합니다. 독자들은 부활 교리를 인식하지 않기에 몸이 폐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록 부활로 몸이 다르게 변하겠지만(15장), 신자의 몸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누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음행과 몸과 주님과의 관련성(15-17)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은 어두움에 행동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너희만이라도 거룩하게 살아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썩어짐을 방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빛과 소금된 역할을 감당해달라고 부탁합니다.

 

15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15-17)

 

문답식 대화법으로 음행과 몸과 주님과의 관계성을 설명합니다. 두 가지 전제로 진행하며 모두 ‘~을 알지 못하느냐?’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신자들은 메시아 몸의 일부라는 것입니다(15). 메시아와 신자와의 관계를 신비한 연합으로 묘사합니다. 음행을 통해 그 몸의 일부를 떼어 창녀 몸의 일부로 만드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바울은 ‘내가…그렇게 하겠느냐?’라는 질문과 ‘그럴 수 없다’는 스스로의 대답을 통해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독자들도 그래야 함을 말합니다. 또 다른 전제는 결혼과 언약 관계입니다.

 

16-17절은 왜 음행이 창녀의 지체를 만드는지를 부연합니다. 역시 ‘~을 알지 못하느냐?’는 질문으로 창녀와 합하는 자는 한 몸이 된다는 원리를 상기시키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몇 가지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결혼은 남녀의 성적 결합으로 이루어지며(사실혼), 그 결합으로 한 몸이 됩니다(창세기 2:24). 둘째, 창녀와 성관계하면 그와 결혼한 것이 되고 한 몸이 됩니다. 셋째, 그 상태에서 다른 창녀나 아내와 성관계하면 간음입니다. 넷째, 신자는 새 언약 관계를 통해 주님과 영적으로 결혼한 상태입니다.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말합니다(17). 다섯째,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성관계 맺는 것이 간음인 것처럼, 주님과 언약 관계를 맺은 신자가 음행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를 깨는 간음과 같습니다. 언약 관계에서 몸은 주 위해야 하는데(13), 세상과 관계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명령들(18-20)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죄함도 없지만, 아직은 완전히 완성된 사람은 아닙니다. 천국 가는 날까지 점진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뿐입니다. 순간적으로 과거 죄악으로 돌아서려는 모습이 강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른 성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권고합니다.

 

18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8-20)

 

교회의 음행 문제에 대해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첫째, 음행을 피하라는 것입니다(18). 맞서지 말고 음행의 자리에서 도망치라고 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음행은 다른 죄와 달리 자기 몸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8). 이 외에 두 가지 이유들이 ‘~을 알지 못하느냐?’는 질문으로 제시됩니다(19-20). 그중 하나는 신자의 몸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3:16-17에서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하지만 본문 내용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3:16-17은 집단적 교회를 의미하지만, 본문은 신자 개인을 의미합니다. 창녀와의 음행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표현 사이에 충돌은 없습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그들 모임 속에 하나님 영이 거하실 것이라는 구약 약속의 성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에스겔 36:27-28). 또 다른 이유는 신자의 몸이 값으로 산 하나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구속을 통해 죄와 사탄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로 옮김 받아 새 생명을 얻고 새 언약 관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골로새서 1:13-14). 그렇기에 자기가 자기 몸의 주인인 양 음행하면 안 됩니다. 오직 새로운 관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명령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이 훌륭한 존재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에 걸맞게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성도의 의무입니다.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을 때, 어느 한순간 하나님께서는 깨끗하게 준비된 그릇을 찾아서 위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준비된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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