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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2-02)

 

 


한 몸을 이룬 공동체

고린도전서 12장 12-31절


 

우리의 몸은 많은 기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두 서로 다 연결이 되어 하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온 몸이 약해지거나 아픕니다. 그래서 몸의 지체는 여러 가지이지만, 몸은 여러 지체를 통해 하나를 이룬 것입니다.

 

  • 바울은 앞에서 은사의 다양성과 일치성에 대해 몸을 통해 비유로 말합니다. 이제 비유를 들어서 고린도 성도들의 의무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지체만을 위대하게 사용하기 원치 않으시며, 지체들에게 각각의 능력과 성품을 주셔서 적절히 연합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온전하게 이루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행하도록 인도하십니다.

 

한 몸과 많은 지체들(12-14)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인종과 국가, 사회적 신분, 남녀 차별 등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차이를 그대로 가지고서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인 교회를 완전하게 이룰 수 없습니다. 지상의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성령에게서 세례를 받아 한 몸, 즉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14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12-14)

 

한 몸과 많은 지체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마치 ~처럼 ~ 하다’라는 비교 표현을 통해 사람의 몸과 메시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연결합니다. 핵심은 다양성과 통일성입니다.

이 요소들은 ‘마치’로 시작하는 종속절 구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과 관련해 12절은 두 개의 절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한 몸을 주어로 많은 지체가 있음을 말하고, 또 다른 하나는 많은 지체를 주어로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한 몸(주어) - 많은 지체- 많은 지체(주어) - 한 몸의 구조입니다. 마찬가지로 메시아의 몸, 곧 교회도 하나이지만,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후 바울은 ‘왜냐하면’이란 두 개의 이유절로 12절을 부연합니다. 하나는 13절입니다. 어떻게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한 몸이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한 몸 안으로 세례를 받고, 한 피를 마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와 주의 만찬을 통한 주님과의 연합입니다.

또 다른 이유 절은 14절입니다. 한 몸에는 하나의 지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들이 있습니다. 두 이유 절 모두 다양성과 통일성 요소를 갖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13절은 통일성에 초점을 맞추고 14절은 다양성에 더 집중합니다.

 

비유와 설명1: 비교로 인한 열등감에 대해(15-20)

우리 몸에는 다양한 기능한 기관들이 많습니다. 가장 비천한 지체도 몸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기관도 몸 전체를 이룬데 기관으로 역할을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비천해 보인 사람이라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성도라면 모든 지체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위치나 특별한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교회의 한 몸입니다.

 

15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15-20)

 

본 단락에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의 봉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교회 안에서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은사라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역설적으로 덜 귀해 보이고 덜 아름답게 보이는 지체일수록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 못할 만큼 존귀하고 요긴하게 사용하십니다.

 

(1) 비유(15-16)

 

다양성과 통일성을 근거로 비교 상황으로 인한 교회 문제를 다룹니다. 첫째는 열등감입니다. 바울은 사람 몸에 있는 여러 지체들을 의인화해 그 문제를 소개합니다(15-16). 발은 자기가 손이 아니니까 몸에 필요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귀 역시 눈과 비교해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은사와 섬김을 통한 비교 의식으로 중요한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를 구별하거나 차별하는 상황을 전제합니다. 특별히 비교로 열등감을 느끼는 존재들의 예를 듭니다.

 

(2) 설명(17-20)

 

몸의 지체들을 의인화한 15-16절 내용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른 지체와의 차이는 비교와 열등감을 느낄 사항이 아닙니다. 만일 모든 몸이 하나의 지체만 있다면 몸은 제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눈만 있으면 몸은 보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이 없습니다. 코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한 지체만으로 구성된 것은 몸이 아닙니다. 한 몸에는 반드시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다른 기능으로 존재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다양한 기능의 지체를 한 몸에 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입니다. 그렇기에 비교를 통한 열등감은 합당치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쓸모없는 자녀와 선물(은사)은 없습니다. 오히려 다양한 성도와 은사가 있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다른 지체의 부족함을 채워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와 설명2: 비교로 인한 우월감에 대해(21-26)

남다른 지식과 은사로 자신을 우월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자들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하고 요긴해도 더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더 많은 이들과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는 무익한 존재일 뿐입니다(13:1-3).

 

21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21-26)

 

교회는 한 몸 의식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특히 셀을 통해서 한 몸 의식을 돈독히 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몸에 지체처럼 붙어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끼리는 육신의 형제보다 더 반갑습니다. 성령의 교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영적인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1) 비유(21)

 

비교로 인한 둘째 문제를 다룹니다. 우월감입니다. 역시 사람 몸의 지체들을 의인화해 상황을 제시합니다. 눈이 손에게 보는 기능이 없으니 쓸데없습니다. 하거나 머리가 발에게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15-16절과 반대 상황입니다. 아마도 교회 안에서 은사와 섬김을 통해 우거리는 부류의 태도를 지적한 듯합니다.

 

(2) 비유 설명(22-26)

 

우월감 문제에 대해 설명합니다. 사람 몸의 예와 교회 안의 예를 섞어가며 제시합니다. 우월감을 설명하기 위해 의인화한 몸의 지체들의 경우와 달리 실제 사람은 몸에서 더 약해 보이는 부분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덜 귀하게 여겨지는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입혀줍니다. 더 약해 보이는 지체는 아마도 내부 장기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손이나 발보다는 약하지만 아주 중요한 기관이기에 여러 모습으로 보호합니다. 또한 덜 귀히 여기는 지체는 성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은 그 부분을 더 귀한 것으로 입히고 가려서 수치가 드러나지 않게 합니다. 하지만 얼굴 같은 이미 아름다운 지체는 다릅니다. 꾸미고 더 아름답게 하지만 가리지는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약한 교회 구성원들은 하나님이 귀중함을 더하게 하십니다. 분쟁 없이 서로 돌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비교하여 우월감으로 차별과 배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은사가 많은 사람은 자신이 더 약한 존재이고 덜 귀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겸손함과 감사함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프듯, 교회에서 한 지체가 차별 받아 상처받고 아파한다면 온 몸과 모든 지체가 함께 아파해야 합니다. 또한 한 지체가 영광 얻으면 모든 지체가 즐거워하듯, 교회에서도 서로에게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한 몸이며 한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를 이렇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개인적 모임일 뿐 아니라 세상의 관점이 통용될 수 있는 단순한 정치 혹은 사교 모임 정도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때만 이런 관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날도 교회를 그렇게 이해하지 않은 모습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오늘 우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들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로의 적용(27-31)

한 지체가 아플 때 공동체 전체가 자기 아픔으로 느끼고, 한 지체의 영광에 모든 공동체가 시기나 질투 없이 같이 기뻐할 때 살아있는 건강한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주셨습니다. 모든 은사가 다 요긴하지만, 초자연적인 은사보다는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은사가 교회를 세우는 데 더 필요합니다.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27-31)

 

한 지체의 고통을 모든 지체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한 지체의 영광을 모든 지체의 영광을 받아 드려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러하지 못하다면 그 상태는 지체의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고통과 즐거움, 아픔과 기쁨을 한 몸으로 함께 느끼는 것이 몸이란 유기체입니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 성도들이 겪는 고통이나 누리는 영광에 대하여 다른 사람 이야기 하듯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성도의 연합이 된 영적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1) 메시아의 몸과 지체(27-28)

 

‘너희’라는 2인칭 표현으로 고린도 교회 상황으로 연결합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몸이며 지체의 부분입니다. 앞서 비유로 설명한 내용의 정리입니다. 그들은 메시아 예수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언약 관계 맺은 자들로서 한 몸으로서의 통일성과 많은 지체로서의 다양성을 함께 갖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은사와 그것을 통한 섬김과 사역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습니다. 은사 차원도 있지만, 1차적으로 부르심에 따른 섬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 진리와 관련된 것이지만, 그 모습은 다릅니다. 한편, 은사에 따른 섬김의 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 고치는 것과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 말하는 것들입니다. 모두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부르심과 은사로 메시아의 몸, 즉 교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성의 요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허락하고 세우신 분이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양성의 요소를 어떻게 묶어서 교회의 통일성을 세워야 합니까? 13장은 그 중요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독자들로 하여금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함으로 관심을 유발합니다.

 

(2) 다양한 섬김과 은사(29-31)

 

모든 사람이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 병 고치는 은사나 방언을 말하거나 통역하는 은사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다양한 섬김의 모습과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최고의 것입니까? 바울은 독자에게 더 나은 은사들을 추구하라고 명하고(‘너희는 더욱 큰 은사들을 사모하라’) 최고의 길을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최고의 은사가 아니라 주어진 은사들을 최고가 되게 하는 방법입니다.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한 후 바울은 13장 내용으로 갑니다.


다름이 다툼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지체가 다양하기에 몸이 제대로 기능하는 것입니다. 저마다 하나님이 두신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비교해선 안 됩니다. 지체를 빛나게, 은사를 은사되게,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것을 주는 ‘평등’이 아닙니다. 다름을 포용하는 ‘사랑’ (13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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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2-01)

 


성령의 은사 사용 지침서

고린도전서 12장 1-11절


졸업이나 입학을 하면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다양한 선물을 받게 됩니다. 그 다양한 선물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것들로 선물을 받습니다. 만약 받은 선물이 필요 없는 물건으로 생각한다면,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첫째는, 선물한 사람이 선물 받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선물에 대한 사용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본문은 교회 모임에 대한 세 번째 주제입니다. 성령의 선물인 은사에 대한 것으로, 특별히 방언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은 그 시작으로 신령한 것과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3절로 신령한 것들에 대한 의미를 재정리해서 독자들의 생각을 교정합니다. 다른 하나는 4-11절로 은사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공합니다.

  

신령한 것들에 대해(1-3)

신령하다는 것은 은사의 기원이 사람이 아닌 성령께 있다는 뜻입니다. 은사 있는 사람만 신령하다거나 은사가 성령의 선물입니다.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고, 보상이나 상급도 아닙니다. 그러니 자기 자랑과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삼아선 안 됩니다.

 

1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1-3)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후에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부족함 없이 받은 교회였습니다(1:7). 하지만 이렇게 받은 은사를 예배 중에 무질서하게 사용함으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1) 신령한 것들에 대한 도입(1)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로 집중을 유도하고 ‘~ 대하여’라는 표현으로 편지로 질문한 것에 답합니다. 이번에는 예배 상황 속 신령한 것들, 소위 성령의 선물(은사) 사용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표현으로 원리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참조 10:1). 신령한 것들에 대한 성도의 이해를 교정하며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2) 성령과 구원과 신령함(2-3)

 

지식과 정보와 관련한 동사를 사용해 원리와 설명을 제시합니다. 먼저 ‘너희들이 알고 있다’라는 말을 통해 성도가 알고 있는 지식을 상기 시킵니다. 그들이 이방인으로 있을 때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그대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한다’라고 하여 성도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식으로 진행합니다(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할 때 아무도 예수의 이름으로 저주하지 않으며,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이 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몇 가지 의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독자의 사고와 생각 차원의 교정입니다. 신령한 것에 대해 바울은 그들의 지식과 이해 영역을 먼저 다룹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정리하고 그 의미를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렇듯 바울은 독자의 행동을 교정하기 전에 그들의 사고와 생각을 바꾸어 바른 삶이 나오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 권면의 전형적 특징입니다.

둘째, 성령과 구원 과정과의 연관성입니다. 바울의 설명은 ‘그때’와 ‘이때’라는 구원 이전과 이후의 시간 대조로 진행됩니다. 성령의 존재 여부는 구원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핵심입니다. 성도들은 구원 이전에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단순히 비유 대인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밖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성령이 없었습니다. 오직 우상 숭배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원 이후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신자 안에 있고 그 영이 신자의 고백을 돕습니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은사의 유무와 종류와 상관없이 성령을 모신 신령한 자들입니다.

셋째, 성령과 관련한 신령한 것은 철저히 주님과의 바른 관계성과 관련 있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것들을 기적이나 신기한 것들로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 영으로 말하는 자는 경쟁 관계나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 이름으로 저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사람 사랑의 차원이이지만, 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예수 사랑의 차원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역시 예수님과의 관계성이 핵심입니다. 이렇듯 성령으로 말하는 자, 곧 신령한 자는 철저히 하나님/예수와의 바른 관계성과 사람과의 좋은 관계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런 관찰에 의하면 바울은 독자들에게 1) 특정 은사를 가진 자만 신령한 자가 아니라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신자가 신령한 것을 소유한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2) 진짜 신령한 것은 바른 관계성,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과 은사(4-11)

‘건전한’ 은사 사용이 ‘건강한’ 교회를 세웁니다. 은사는 다양하지만 은사를 주신 뜻을 분명합니다. 과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은사의 우위를 견주지 말고 은상의 목적에 충실하게 사용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4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4-11)

 

다양한 은사가 소개됩니다. 가르침과 관련한 은사에서부터 방언과 통역까지 아홉 개의 은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소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은사 특히 방언을 맨 나중에 언급함으로써 자신들을 좀 더 신령하고 특별한 사람으로 자랑했던 방언하는 자들을 비판한 듯 보입니다. 은사의 우열은 없습니다.

 

(1) 은사와 섬김과 사역(4-6)

 

은사에 대한 구체적 설명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교회 모임과 관련한 요소들, 곧 은사와 섬김과 사역과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4-6).

특별히 다양성과 일치성을 중심으로 보여줍니다. 첫째, 은사와 관련해 다양한 은사들이 있지만, 한 성령만 있습니다. 은사란 은혜로 주신 공짜 선물입니다. 바울은 은사와 관련해 두 가지 내용을 말합니다. 하나는 은사의 다양성입니다. 교회 안에 한 은사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은사의 절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사의 주인은 성령입니다. 다양한 은사는 한 성령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치 자기 것인 양 자랑하거나 비교하면 안 됩니다.

둘째, 섬김과 관련해 섬김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주님은 한 분뿐입니다. 교회 안의 섬김은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들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이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보이는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섬김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한 종류의 섬김만을 최고로 여기는 것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섬김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주님이신 예수 메시아이기에 섬김이 많을수록 예수가 주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사역에 대해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일이 되게 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농사와 관련해 아볼로와 바울의 사역을 설명한 3장 이야기와 맥을 같이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자신의 일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사역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이 세 가지 설명은 이후 진행될 은사와 그것을 통한 섬김과 사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양성이 있기에 자신의 것만을 최고라고 여기는 교만을 버리고, 한 분이지만 동시에 셋인 삼위 하나님의 주 되심을 따라 그분의 의도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2) 은사에 대해: 목적과 다양성과 통일성(7-11)

 

교회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대해 서술합니다. 아홉 개의 은사가 예로 소개됩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들을 분별함, 방언 말함과 방언 통역입니다. 성령의 모든 은사를 나열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없는 것이 28절과 로마서 12:6-8에 있기 때문입니다(예: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 베풂 등).

또한 이것들만 중요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은사와 관련해 바울이 전달하려는 의도는 따로 있습니다. 전달 방식과 표현에서 몇 가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은사는 개인적입니다. 각 사람이라는 표현이 시작(7)과 끝(11)에 나오며, 그 안의 모든 설명에는 은사를 받는 대상이 단수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은사의 개인적 특징을 말해줍니다.

둘째, 은사는 성령이 주십니다. 분명히 은사는 성령의 일하심의 증거이고(7,11) 개인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은사를 가진 자의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다’라는 동사의 수동형을 사용해 은사의 주인이 성령이고 신자는 그분의 선물을 받은 것일 뿐임을 분명히 합니다.

셋째, 둘째 의도와 관련해 은사는 한 성령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은사 문제로 나뉠 수 없습니다. 같은 성령이 다양한 은사로 교회를 분열시킬 리 없기 때문입니다.

넷째, 방언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당시 교회는 방언을 중요시했습니다(14장). 하지만 바울은 방언과 관련된 것을 맨 나중에 언급합니다. 방언을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것 없는, 단지 은사의 하나로 소개하고픈 의도입니다. 이것으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다섯째, 은사의 목적은 교회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에 관해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 내용입니다. 한 성령이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준 것이 은사라면(11), 그 뜻은 은사를 통해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유익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7). 이렇듯 바울은 계속해서 은사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교정합니다.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를 중심으로 삼위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인정하고 겸손해야 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성도를 섬기는 방향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기본 방향은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방향, 곧 그분 뜻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 속 은사가 지금도 지속되는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그 논란을 이렇게 풀고 싶습니다. 은사주의를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친 경계로 성령의 은사를 경시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지’(디모데전서 4:4)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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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1-02)


한 몸으로 세워갈 성만찬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


성만찬은 단순히 떡과 포도주만 먹고 마시는 식사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성찬의 떡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몸을, 성찬의 잔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기념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성찬의 정신을 따라 공동체의 유익이 되도록 참여해야 합니다.

 

  • 고린도교회에 예배에 대한 두 번째 문제점은 성만찬이었습니다. 내용을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7-22절은 도입과 문제 진술입니다. 둘째, 23-26절은 주의 만찬에 대한 가르침을 상기시킵니다. 셋째, 27-32절은 주의 만찬 가르침에 근거한 첫 번째 권면입니다. 넷째, 33-34절은 두 번째 권면입니다. 바울의 초점은 주의 만찬 자체가 아니라 그 정신에 따라 공동체 지체들을 어떻게 배려하고 함께 참여할 것인지에 있습니다.

 

성만찬의 오용을 책망(17-22)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진 형제적 교제 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됨을 체험하고 천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하나 됨을 기념하고 확인해야할 성만찬 자리가 오히려 상처와 분열을 주장하는 자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17-22)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칭찬 받지 못할 문제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이는 성찬과 관련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 문제로 인해 그들의 모임이 유익하지 않고 도리어 해롭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쟁 속에서 옳다고 인정받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분쟁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순기능 중 하나입니다.

 

(1) 주의 만찬 문제 도입(17-19)

 

‘칭찬하다’(에파이네오)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2절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분위기가 다릅니다. 17-34절은 앞부분보다 심각해서 전혀 칭찬할 상황이 아닙니다. 바울 진단에 의하면 교회 모임 중에 좋은 것보다 나쁜 것들이 더 양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모였을 때 분열이 있음을 들었습니다. 이 분열은 1-4장과 다르게 경쟁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부자 교인과 가난한 교인 간의 차별로 인한 분열입니다. 아마 바울은 가난한 자들 편을 통해 교회 상황을 들은 듯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런 상황이 있음을 믿고 있다는 말을 추가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독자들 중에 파당이 있어야 옳게 인정함 받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19). 분열을 통해 자신을 괜찮다고 여기며 함부로 행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비꼽니다.

 

(2) 문제 진술(20-22)

 

여기서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가톨릭, 20절).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를 통해 그 상황을 설명합니다. 먹을 때 각자가 자기 만찬을 먹어 치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이는 배고프고 어떤 이는 배부르고 술 취하는 일이 생겼습니다(21). 이상한 상황입니다. 이것을의 언약 백성 모임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관찰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각자’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각자’ ‘자기’ 만찬을 먹는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만찬 음식을 가져와 자기만 먹고 마심으로 주의 만찬을 마치 개인 만찬 성격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마도 부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먹어버리다’라는 표현입니다. 시간적인 요소가 있지만 개인이 만찬 음식을 먹어 치워버렸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주의 만찬을 사유화하고 자기만 먹고 마시는 상황에서는 음식을 가져올 수 없는 가난한 자는 만찬에 참여할 기회마저 박탈당합니다. 더욱이 당시는 심한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했기에 가난한 자들이 만찬 음식을 가져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부자의 이런 행동은 자연스레 주의 만찬을 부자와 가난한 자의 분열의 장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바울은 일련의 질문 형식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합니다(22). 첫 질문은 그들이 먹고 마실집이 없어서 교회에서 그렇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니다’라고 대답하여 부끄럽게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그러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분의 언약 백성 모임입니다(1:2). 그런 행동은 하나님뿐 아니라 그분의 가난한 백성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은 그들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칭찬할까?’, ‘내가 칭찬하지 않는다’라는 일련의 대화 형식으로 그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어찌 이해했는지 몰라도 바울 진단에 의하면 그들 행동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모임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의 만찬 전승(23-26)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교회, 가까운 사람만을 위하는 교회만큼 교회의 본질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치르신 고통, 수치, 생명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을 위해 고통, 수치, 생명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합니다. 교회의 중심에 놓여 있는 기반은 주님의 십자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3-26)

 

문제 상황에 대한 구체적 권면 전에 주의 만찬의 의미를 상기시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전한 가르침이 주님의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비록 주님께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 전승을 전해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주님께 들은 것이기에 그 기원은 예수님입니다. 주의 만찬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함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이 잡히시기 전날 유월절 만찬 때 무교병과 포도주에 대해 각각 자신의 몸과 피라고 말하고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에 몇 가지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첫째,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내’피라는 예수의 말을 직접 인용함으로 강조합니다. 둘째,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너희’라는 표현을 통해 주의 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한 몸, 한 공동체임을 말합니다(10:16-17). 셋째,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임과 그의 희생으로 구원, 곧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선포하는 것입니다. 만찬 안에는 주의 몸과 피로 상징되는 구원 과정과 그 결과 요소가 들어 있기에 그것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 전승에 근거한 첫 번째 권면(27-32)

성찬식에 임할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 게으름이나 음란 같은 개인적인 죄를 돌아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상고해야 합니다. 과연 자신은 소외되고 가난한 지체를 돕고 있는지, 혹은 말로만 그들을 돕는 것은 아닌지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27-32)

 

바울은 성찬식을 비롯해 고린도 교회의 모든 예배에서 합당치 않은 것은 무엇이든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성찬식 참여라는 고귀한 특권과 소명은 엄격한 자기 성찰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 자세와 행동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1) 첫 번째 권면과 이유(27-29)

 

주의 만찬 전승 의미에 근거해 독자들에게 첫 번째 권면을 합니다. 원리와 명령과 이유로 구성됩니다. 먼저 원리입니다. 누구든 주의 빵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27).

두 가지 초점이 있습니다. 첫째, ‘주’에게로의 참여입니다. ‘주’란 말의 반복에서 확인됩니다. 주님께 참여하는 것이기에 개인 만찬처럼 취급하면 안 됩니다. 둘째, 주의 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단순히 빵과 잔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의 만찬 의미에 부합하게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주님의 사역 의미를 놓친다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주님의 몸과 피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주님에 대해 범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에 근거해 사람이 자기를 살핀 후에 먹고 마시라고 명령합니다. 원리의 초점을 기억하고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의 몸을 분별치 않고 참여하면 자기에게 임할 심판을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증(30-32)

 

분별하지 않고 참여해서 받은 심판의 예를 듭니다. 성도들 중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이 주의 만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런 현상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않아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형제들을 부끄럽게 한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일환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심판의 결과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시기까지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성도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일들에 대해 두 가지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째, 죄의 실존과 그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실재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31). 둘째, 이런 현상이 하나님의 최종 심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훈련일 수 있는데, 최후 심판 때 세상과 함께 정죄 받고 멸망하지 않도록 조심시키는 경고입니다(32).

 

주의 만찬 전승에 근거한 두 번째 권면(33-34)

날마다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 성도는 흔히 주님을 위해 산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남을 위해 산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고 주님만 보입니다. 그 주님이 이웃 사랑을 명하시기에 우리는 주변 사람에게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33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33-34)

 

두 번째 권면을 합니다. 첫 번째(27-29절)보다 간단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주의 만찬 때 서로 함께 먹으라고 명하고, 만일 배고프면 집에서 먹고 오라고 합니다. 주의 만찬을 개인 만찬처럼 여겨 자기들만 먹지 말고 음식을 가져올 수 없는 가난한 교인들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임이 하나님의 심판의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런 행동은 주님을 바르게 기억하는 방법이자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머지 일들에 대해서는 교회에 가서 교정하겠다고 하고 이 문제를 마칩니다.


존 스타트 목사님은 ‘성찬’은 은혜의 방편이고, 연합의 상징이고, 살아 있는 교회의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체현인 성찬이 온전히 체화되어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성찬은 주를 기억하고 자신을 살피고 지체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까? 성찬을 통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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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1-01)


거룩한 예배를 위한 자세

고린도전서 11장 2-16절


종종 선교사님들이 선교지 풍습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실패한 경우가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생각대로 전파하려기 때문입니다. 이는 선교지에게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고려를 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복음 전하는 방법은 시대장소에 따라 다르게 전파되었습니다. 복음 자체는 변함없지만, 시대와 장소를 따라서 전달되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각 국마다 다른 모습입니다. 중국에서는 마약을 금했고, 우리나라에서 술과 담배를 금했습니다. 당시에 사회적인 상황에 따라 악한 것을 금했던 것입니다.

 

  • 본문에서부터 14장까지는 예배 중에 있을 이슈들을 권면합니다. 본문은 그 첫 주제로 교회 모일 때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입니다.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2-6절 도입 부분으로 문제 상황에 대한 기본 정보와 권면을 제공합니다. 둘째는 7-12절로 앞부분 권면에 대한 첫 번째 근거입니다. 창조에 근거함여 남편과 아내의 관계성을 설명합니다. 셋째는 13-16절로 2-6절 권면에 대한 두 번째 근거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 스스로의 판단과 당시 관습에 의지해 논증합니다.

 

머리에 쓴 문제에 대한 도입(2-6)

교회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알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각 사람이 어떤 권위 아래에 있는지, 어떤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다가 문제가 발생됩니다.

 

2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3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4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5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6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2-6)

 

바울은 자신이 전한 전통을 지키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 원리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 여자의 머리는 남자,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때 자신이 그 권위 아래 있음을 합당한 방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1)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에 대한 도입(2)

 

사도 바울은 예배 상황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넘어갑니다. 첫 주제는 모임 때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독자를 칭찬하면서 시작합니다. 모든 일에 그를 기억하고 그가 전한 전승을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칭찬한다는 말은 처음 사용됩니다. 고린도전서 안에서는 독자에게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말(1:4) 이후 처음 언급된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아마도 이후 제시될 권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칭찬으로 표현한 수사적 의도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과의 관계성과 그에 근거해 바울이 전한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입니다.

 

(2) 머리에 무엇을 쓰는 문제에 대한 기본 정보와 권면(3-6)

 

‘그러나’로 칭찬과 반대 상황을 다룹니다. ‘알기 원한다’는 형식으로 상황에 대한 기본 정보와 원리를 제시합니다. 그 토대는 하나님과 메시아와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성이고, 권위나 탁월한 위치를 의미하는 머리의 상징으로 표현합니다. 제일 위가 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메시아의 머리가 되신다. 메시아는 남편의 머리이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됩니다(3).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메시아 → 하나님의 관계다. 메시아는 하나님 나라와 새 언약 관계의 시작이기에 남편 → 메시아의 관계이고, 남편과 아내는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기(9)에 아내 → 남편의 구조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여기서 제공하지 않습니다. 구체적 설명 대신 그 원리에 근거해 예배 상황의 문제를 진단합니다. 먼저 남편에 대해서입니다(4). 남자가 머리(물리적)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면 그 머리(상징)를 욕되게 합니다. 당시 황제나 이방 제사장들이 우상에게 제사할 때 토가 같은 겉옷을 머리에 끌어 쓰고 집행했습니다. 아마도 어떤 이들이 이런 세상 방식을 교회 예배 상황에서 연출했던 모양입니다. 세상 지위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는 남편의 머리(상징)인 메시아를 욕되게 하기에 문제입니다. 메시아를 향한 예배를 우상 제사의 모습처럼 만들었기에 합당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아내에 대한 것도 다룹니다(5-6). 당시 아내들은 공적 자리에서 머리에 천을 써서 결혼한 신분을 나타냈는데, 예배 상황에서 그것을 벗는다면 머리(상징)인 남편을 욕되게 합니다. 마치 결혼 관계를 거절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당시 상당히 수치스럽게 여겼던, 공적 자리에 민머리 여자가 나타난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또한 아내뿐 아니라 그런 아내를 둔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공적 예배 때 아내가 천으로 머리를 덮지 않으려면 머리를 밀어 수치스러운 상태가 되거나, 그것이 싫다면 천을 씀으로써 결혼한 자로서의 증표를 유지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남편이나 아내가 공적 예배에서 기도나 예언 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바울의 관심은 예배와 행위의 적절한 연결입니다. 우상 제사 형식을 도입함으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거나 세상 풍조를 따라 교회에서 결혼 관계를 가벼이 여기는 모습으로 참여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권면의 근거 1: 창조에 근거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성 설명(7-12)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질서와 상식을 지켜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혼란스러운 것을 질서 있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질서의 사람이지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판단기준을 제시합니다.

 

7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8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9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10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11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7-12)

 

창조와 새 창조(주 안에서)를 전제로 2-6절 권면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먼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기에 머리(물리적)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형상이란 본질을 잘 드러낸 외적 표현을 의미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잘 드러내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창조 과정을 배경으로 합니다(창세기 1:26-27). 바울은 여기에 영광이라는 표현을 추가합니다. 창세기에는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은 종종 합께 등장합니다(참조. 시편 8:5). 남자는 하나님/메시아의 어떠함과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이기에 예배 상황에서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제사하듯 머리에 무엇을 쓰면 안 됩니다.

한편, 여자에 대해서는 여자가 남자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이기에 머리에 천을 쓰라고 합니다. 바울은 창조 순서와 특징을 통해 여자에 대한 주제를 좀 더 자세히 다룹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 과정에서 기원과 목적이 다릅니다. 아담은 하나님 형상을 따라 흙으로 직접 지어진 존재이지만, 하와는 아담을 통해 나중에 지어졌습니다. 또한 하와는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로 지음 받았습니다(창세기 2:18-23). 이 때문에 여자(아내)는 예배 상황에서 머리에 천을 쓰지 않음으로 자기가 남편과 관련한 모든 관계에서 자유로운 듯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천을 씀으로써 그 머리(물리적)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그 권리를 남편과의 관계를 충실히 표현하는 쪽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돕는 배필로서 남편의 영광을 드러낼 아내가 오히려 남편을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생각하는 부부관계는 아내만 일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수직 관계가 아닙니다. ‘주 안에는’ 남편과 아내의 개념이 세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11). 하와가 아담을 통해 지어졌지만,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를 통해 태어났습니다. 서로 자기의 높임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오직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자리 매김해야 합니다.

 

권면의 근거 2: 독자의 판단과 당시 관습에 호소(13-16) 

교회의 전통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의해 세워진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예배나 기도나 예언을 할 때,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지나친 자유에 대한 주장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와 질서를 부정하고 공동체를 혼란을 주는 그릇된 자유의 남용을 경계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중에 영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혼란스럽게 만든 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13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14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15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16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13-16)

 

바울은 이 문제를 논쟁거리로 삼지 말라고 본연의 본성과 통념에 따라 판단해보라고 설득합니다. 자유와 개성, 권한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주장하다가 건전한 상식과 문화를 거스리고 공동체에 혼란을 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함과 불쾌함을 주지는 말아야 합니다.

 

(1) 권면의 근거 : 독자 판단에 호소한 논증(13-15)

 

2-6절 권면에 대한 두 번째 근거 제시다. 7-12절이그야이 창조를 통한 논증이었다면, 이 부분은 고린도교회의 성도의 생각과 판단에 호소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는 명령과 함께 두 가지 요건으로 분별하라고 합니다. 모두 질문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한 요소는 적절성입니다. ‘적절하다’는 의미의 동사를 통해 예배 상황에서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타당한지를 묻습니다(13). 앞부분에서 제공한 신학적 논증을 근거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요소는 본성 그 자체입니다(14-15).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창조의 본성이라기보다는 당시 사회에서 용인하는 직관 혹은 보편적 생각을 의미합니다. 남자(남편)와 여자(아내) 모두에게 질문합니다. 먼저 남자에 대해서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라고 질문합니다. 우리 시대에는 문제되지 않지만, 로마 사회에서 긴 머리는 남성성을 거절하고 동성애와 관련해 여성 역할을 하는 자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남자의 긴 머리는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한편 여자에 대해는 긴 머리가 스스로에게 영광스러운 것이 아닌가, 하고 질문합니다. 미(美)를 추구하는 여자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이유를 긴 머리는 가리는 것 대신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긴 머리 때문에 천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마도 긴 머리를 마치 머리를 가리기 위해 추가로 써야 하는 천과 연결시킨 유비 표현인 듯합니다. 여자는 예배 환경에서 머리에 천을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2) 권면의 근거: 당시 관습에 호소한 논증(16)

 

비록 다른 생각을 가진 자가 있다 해도 당시 교회에 그런 관습이 없기에 ‘우리’라는 사도들이 가르친 전승이나 바울의 권면을 따르라고 합니다. 권면과 명령이긴 하지만 강요는 아닙니다. 또한 절대적으로 목숨 걸고 따라야 할 규범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당시 사람들에게 복음 증거가 방해되지 않도록, 그리고 공적 예배 가운데 세상 방식이 아닌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모습으로 하기를 바랍니다.


차이와 질서와 상식을 부정할 때 혼란은 불가피합니다. 자유와 권한의 사용보다 서로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원리에 타당하다면 관습을 무시하거나 본성을 거슬러서도 안 됩니다. 경직된 예배에도 변화가 필요하지만 질서 없이 자유분방함에 경도된 예배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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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0-02)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고린도전서 10장 14절-11장 1절


어떤 공동체 내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영광과 유익만을 위해 행동한다면, 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이곳에는 동물의 법칙인 ‘양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서로를 세우기보다는 서로를 이용하려고 서로를 믿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길 원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국 공동체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자신이 희생되어야할 것은 무엇입니까?

 

  • 8장에서 시작한 우상 제물 문제를 마무리합니다. 14-22절에서는 우상 제물과 관련한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그 일에서 도망가라고 합니다.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23-11:1은 고기 먹는 것에 대한 권면입니다. 시장에서 파는 것이나 불신자가 제공하는 것은 묻지 않고 먹지만, 어떤 성도가 우상과의 연관성을 물으면 그 사람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고 합니다. 타인을 배려하는 원리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상과의 교제를 멈추라(14-22)

오늘날은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야 성공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모임을 만듭니다. 성도들은 설 자리와 날 자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시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편 1:1)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험의 장소를 들어가면서도 시험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14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19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14-22)

 

아무리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우상은 실체 신이 아님을 잘 알고 있더라도, 자신의 지식을 신앙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우상숭배 하는 예식에 참여하지 말라고 합니다. 

 

(1) 우상 제물에 대한 명령(14)

 

‘그러므로’와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으로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결론적 권면을 합니다. 먼저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 명령합니다. ‘우상숭배 하는 일에서 도망가라!’ 시험과 관련해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신다는 13절 내용과 연결되며, 음행에 대한 결론적 권면과 동일합니다(6:18). 즉, 주님이 도우시니 음행의 환경에서 도망하듯 우상에 대한 것에서도 자기 합리화하며 참여하지 말고 도망하라는 것입니다.

 

(2) 설명과 경고(15-22)

 

명령에 대한 설명과 경고를 이어갑니다. 바울은 지혜있는 자들에게 말함 같이 할 테니 자기 말을 스스로 판단해보라고 합니다(15). 독자를 지혜 있는 자라고 말한 점은 의외입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지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16절 이후 내용에 집중하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16-18절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두 가지 요소에 집중합니다. 첫째, 메시아와의 교제입니다. 만찬 때 나누는 축복의 잔은 메시아의 피와 교제하는 것이고, 빵은 그의 몸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상 신전에서 벌어지는 만찬에도 먹고 마시는 요소가 있기에 그것에 우상과의 교제 요소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둘째, 만찬에는 같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공동체가 하나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빵이 하나이기에 같은 빵을 먹는 많은 자는 예수님의 같은 몸에 참여하는 형제들, 곧 한 식구(食口)입니다. 바울은 구약의 예를 들어 부연합니다. 구약 백성이 같은 제단에 참여해 같은 제물을 먹었기에 한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상 제물에 함께 참여하면 우상과 한 식구가 될 수 있습니다. 모두 19절 이하 설명을 위한 전제입니다. 주목할 것은 듣는 자가 긍정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 요소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찬 때의 잔과 빵이 메시아와의 교제라고 말하고, 구약의 예를 통해 같은 음식에 참여하면 한 식구임을 인정하게 하는 방법을 씁니다. 15절에서 독자를 지혜 있는 자로 부르며 스스로 판단하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9절부터 주의 만찬 설명에 근거해 우상 제물의 만찬 행위를 질타합니다. 먼저 우상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 중 일부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만 참신이라고 여기며(8:4-6) 함부로 살지만, 바울은 그들의 짧은 지식을 교정합니다. 이방인의 제사는 분명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의식에 함께하면 귀신 섬기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 신전에서의 만찬은 그 신에게 참여하는 것이기에 주의 만찬으로 예수님과 교제하는 자에게는 합당치 않습니다. 더 나아가 우상의 만찬에 참여하면 그들과 한 식구가 되는 것이기에 이 또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합당치 않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런 일을 그만두기를 강력히 권합니다. 20절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바울 입장에서 말하지만, 22절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의 맹렬한 질투를 불러일으키지 말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내용을 수사적 표현으로 전달합니다. 그렇게 하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처럼 망한다는 경고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23-11:1)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장 큰 자유를 누리게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것들이 다 유익하거나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공동체와 이웃에 대한 배려 없는 자유는 결코 자신에게도, 공동체에게도 유익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남의 유익을 먼저 고려하면서 자신의 자유를 사용해야 합니다.

 

23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11: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0:23-11:1)

 

몸이 가장 약한 곳이 중심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공동체에서 가장 약한 지체들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향평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기준입니다. 그들을 배려하고 기다려주는 것, 이를 위해서 자신의 속도를 조절하고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1) 고기와 관련한 독자들의 주장과 바울의 반박(23-24)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권면을 마친 바울은 이제 나머지 사람들에게 고기에 대한 권면을 합니다. 구체적 권면에 앞서 그와 관련한 원리를 다룹니다. 고린도 성도들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성도 중 일부는 ‘모든 것이 가하다’고 말합니다. 세상 만찬 때의 방종에 대한 자기 합리화 주장과 동일하며(6:12), 지식으로 우상 제물을 합리화하고 다른 성도를 배려하지 않는 자들의 주장과도 같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모든 것이 유익하지도 않고 덕을 세우지도 않으니, 오직 자기 유익이 아닌 남의 유익을 구하며 살라고 합니다. 8:9-12에서 말한 원리를 반복합니다.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와 관련 있다면, 그 제사의 결과인 고기에 대한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원리와 관련 있습니다.

 

(2) 고기와 관련한 세 가지 상황에 대한 명령들(25-30)

 

고기에 대한 세 가지 상황을 제시하며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 시장에서 파는 고기의 경우입니다. 당시 시장 고기는 대부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기에 얼핏 보면 우상을 섬기는 행위의 연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경우 우상과의 연관성을 묻지 말고 먹으라 합니다. 음식의 성격은 그 자체보다 상황 요소가 결정하는데, 이 경우 우상 제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므로 우상과 연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불신자가 초대한 자리에서 먹는 고기 음식의 경우입니다. 바울은 이 경우에도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 합니다. 이 상황도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초대한 사람을 배려해 먹으라는 것입니다. 셋째, 어떤 신자가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라고 말한 경우입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약한 신자가 앞의 두 경우를 포함한 일반 상황에서 고기의 성격을 우상과 연결시킨 경우입니다. 만일 그런 자들과 함께 있으면 그 사람 양심을 배려해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우상에게 제사하는 경우가 아니면 고기 먹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신앙과 상관없습니다. 평가 받을 사항도 아닙니다(29). 또한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감사히 먹으면 됩니다(26,30). 하지만 그것이 믿음 약한 형제를 힘들게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형제 사랑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메시아가 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따라서 자기 행동을 조심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24절에서 말한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라는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3) 결론적 권면(10:31-11:1)

 

우상 제물 주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합니다(31).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에 적용되는 원리는 하나님 사랑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성도들은 우상 제사와 만찬에 참여하면 안 됩니다. 한편, 하나님 사랑의 원리는 또 다른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그분이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다른 신자를 위해 자기 권리와 지식을 주장하는 행위에 절제와 조심과 배려를 더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모습을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게 책망 받을 것 없는 자들이 되라는 명령으로 제시합니다(“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2).

끝으로 바울은 이런 권면에 자신의 모습을 예로 언급하고 마무리합니다. 자기처럼 모든 일에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고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단순히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배려와 섬김을 통해 다른 이들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 과정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의 삶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려는 원리가 지배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명령합니다. “내가 메시아를 본받는 것처럼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11:1).”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고 복음과 사람을 위해 절제하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고자 했던 바울. 그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 몫이고, 그가 제시하는 원리에 반응하는 것 또한 독자들 몫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잘 들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잘 듣고 있습니까? 진지한 질문과 성찰이 요구됩니다.


바른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은 어떤 일을 하든지 명심해야 할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그 두 원칙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주신 자유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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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0-01)

 

  


선 줄로 생각하는 자의 어리석음

고린도전서 9장 24절-10장 13절


과거 일들은 오늘과 내일 있을 일들의 거울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무시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잘된 것과 잘못된 교훈들을 살펴보면, 선배들의 삶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잘못된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면, 선인들의 훌륭한 교훈을 받아들임으로 자신을 지혜롭게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우리의 거울입니다.

 

  •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를 이어갑니다.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9:24-27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다는 9:18-23 내용과 연결해 바울 자신이 많은 절제를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두 번째 부분은 10:1-13, 구약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들어 권면합니다. 특별히 지식과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고 자만하는 자들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의 자기 절제(24-27)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23)도 알고, 싸움의 상태도 알았습니다. 사명을 이루기 위해 싸워야 할 상대는 다름 아니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긍정과 자기 부정의 싸움입니다. 전리포기(18)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그것 없이는 복음이 요구하는 믿음이 완주도, 사명의 완수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4-27)

 

복음으로 구원 얻은 자들의 자세와 태도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구약시대 그들의 조상 이야기를 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경고가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를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1) 자기 절제 원리와 명령(24)

 

앞부분처럼 바울 자신의 예를 통해 권면합니다. ‘알지 못하느냐?’는 표현으로 원리를 제시하고 그에 따른 적용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운동장에서 많은 사람이 달려도 우승자만 상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이처럼 상 받기 위해 달리라고 명합니다. 초점은 경쟁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우승할 수 있도록 열심히 달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서 열렸던 이스트리안 경기를 배경으로 권면하는 듯합니다.

 

(2) 두 가지 예를 통한 설명(25-27)

 

어떻게 달릴 것인가와 관련한 권면입니다. 역시 원리와 적용으로 설명합니다. 원리는 25a절에 있습니다. 상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모든 자는 모든 것에 절제합니다. 비단 운동경기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냥 되는 것은 없습니다. 수고하고 애써야 하지만, 그 과정에 반드시 철제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원리의 적용을 말하기 전에 중요한 요소 하나를 짚고 갑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목적입니다(25b),

세상 사람들은 썩는 월계관을 목적으로 하지만, 성도인 ‘우리’는 썩지 않는 것을 위해서 합니다. 수고와 절제의 모습은 같지만, 세상이 추구하는 목적과는 다릅니다. 영원한 하나님 안에서 그분 뜻에 따라 살며 그분과의 관계를 온전히 누리기 위함입니다(1:5-9). 그렇기에 세상처럼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배려하고 세상을 따르는 여러 죄에서 떠나는 절제와 수고가 독자들에게도 요구됩니다.

원리에 대한 적용이 26-27절에서 제시됩니다. 두 가지 운동 경기를 배경으로 바울 자신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달리기입니다(26a). 방향 없이 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와 복음 사역자로서의 목적과 방향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권투경기입니다(26b-27). 주먹을 허공에 치듯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사역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싸움의 대상이 바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27). 마치 주먹으로 자기 몸을 거칠게 쳐서 말 잘 듣는 노예로 만들 듯, 주님의 뜻을 따라 잘 살아가도록 절제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첨언합니다. 남에게 복음을 전파하지만 정작 자신이 합당하지 않은 자로 판명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신앙의 삶과 복음 사역을 일회적 성공의 어떤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예수와의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달리는 과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과 예수와 형제들과 구원받아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님의 상급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절제와 성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를 통한 경고(10:1-13)

영적 자만을 경계하되,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변치 않아야 합니다. 변덕스러운 자신을 믿지 말고, 변함없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넘어진 이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시험이 어렵거나 시련이 힘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을 과신하고 하나님을 분신했기 때문입니다.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1-13)

 

그린도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처럼 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출애굽 시대를 예를 들며 고린도 교인들 중에 우상 숭배와 음란에 빠진 자들이 당한 멸망의 위험을 경고합니다.

 

(1) 우상 제물과 관련한 구약의 예(10:1-5)

 

‘형제들아’란 표현으로 바울 자신의 예에서 독자들 상황으로 관점을 전환합니다. 주제도 권리에 대한 것에서 우상 제물에 대한 것으로 바뀝니다.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로 원리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방식으로 논증합니다. 원리는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예입니다. 5절까지 이어집니다.

출애굽에서 광야에서의 멸망까지 시간 순서로 기술합니다. 그들의 시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구름 아래 있었고 홍해 바다를 건넜으며 신령한 음식을 먹고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부정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기에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이 내용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요소는 언약 관계입니다. 내용은 구약 사건이지만, 세부 묘사와 해석은 메시아로 인한 새 언약 관점을 반영합니다. 두 가지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름과 바다에서의 세례입니다. 출애굽 과정에서 구름과 바다는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사건을 세례로 묘사합니다. 독자들이 세례로 인해 새 언약 관계 안에 있듯, 구약 백성들도 옛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다른 하나는 신령한 음식과 음료라는 표현입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 반석에서 난 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물대신 음료라고 말합니다. 또한 동일한 음식과 음료라고 말합니다. 구약 사건을 예수의 몸과 피에 해당하는 같은 빵과 같은 포도주를 먹는 주의 만찬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14절 이하에 나올 권면을 위한 복선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신앙의 경주입니다. 다섯 번 사용한 ‘모든’(1-4)과 ‘다수’(5)의 대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달리지만 한 사람만 승리한다는 말(9:24)처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구원을 경험했지만 모두 끝까지 승리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1-5절에서 말한 원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언약 관계 속에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했던 구약 백성처럼 예수를 통해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에 들어온 고린도 교인들도 신앙의 경주를 계속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 백성은 신약의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2) 구약의 예를 통한 명령들(6-13)

 

구약의 예를 통해 독자들을 권면합니다. ‘그들’(구약 백성)과 ‘우리’(성도)를 연결해 명령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구약의 일을 언급한 이유를 설명함으로 시작합니다(6). 그들 일은 ‘우리’ 성도가 어찌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본보기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들의 악행은 동일하게 언약 관계 안에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하는 독자들에게 타산지석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네 가지 악한 영역에 대해 다룹니다. 첫째, 우상숭배입니다(7).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치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우상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놀았는데(출애굽기 32:6), 그 모습이 고린도 성도 중 일부가 우상 신전 만찬에서 행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구약 백성이 심판받았기에 동일한 심판이 그들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둘째, 음행입니다(8), 구약 백성은 모압 여인들과의 음행 때문에 염병으로 하루에 이만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민수기 25:9).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도 비슷한 음행이 있었습니다. 계모와의 음행(5장)과 부유한 사람들의 만찬에 수반된 음행에 참여하는 일(6:12-20)도 있었습니다. 우상 성전에서 열리는 만찬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구약의 예를 보면서 신자들은 음행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주를 시험하는 것입니다(9). 구약 백성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불뱀에 물려 멸망했기에(민수기 21:5-6)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넷째, 하나님에 대한 원망입니다(출애굽기 17:2-3; 민수기 21:5-6). 셋째 악과 관련된 것으로 광야 생활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 받았습니다. 이집트를 심판하셨던 주님이 당신을 거절하는 자를 동일한 심판자의 위치에서 심판하셨습니다. 이 모든 예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한 중요한 본보기입니다(11). 비록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에 들어와 있지만, 죄와 악으로 신앙의 경주에서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경고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이미 섰다고 생각하는 자, 곧 믿음과 지식과 많은 경험이 있는 자 또는 영적 은사를 포함해 받은 은혜가 많은 자는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12).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감당할 수 있는 시험 외에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감당하지 못할 시험에는 피할 길을 주시니(13), 악한 일에 동참하지 말고 계속 조심해서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해야 합니다. 고린도 독자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신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구원도 사명도 한순간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이자 여정입니다. 그러니 자만과 방심만큼 큰 장애물은 없습니다. 구원의 ‘안전’입니다. ‘확신’보다 구원의 ‘목적’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시험도 이기고, 후회와 후퇴 없는 영적 진보를 이루며 영원한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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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9-01)


사도로써 권리를 포기한 바울

고린도전서 9장 1-23절


세상의 역사는 오늘도 자신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 때문에 싸움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 세계를 호령했던 나폴레옹, 알렉산더, 징키스칸과 같은 전쟁에 영웅호걸들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권리를 얻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들이 죽은 후에 역사 속으로 묻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철저하게 낮아지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셨습니다. 지금까지도 역사에 변함없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 우상 제물 먹는 자들이 주장한 권리(8:9)와 연결해 그 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8:13처럼 바울 자신의 예를 통해 전체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1-14절은 바울의 사도적 권리에 대해 말하고, 15-23절은 복음을 위해 그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이 부분은 대화 방식을 많이 사용하여 진행합니다(1[x3],4,5,6,7[x3],8,9,10,11,12,13, 18). 자기 권리를 타인을 위해 사용하도록 설득하는 것입니다.

 

사도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1-14)

교역자는 성도의 영적 생활을 책임지고 성도는 교역자의 육적 생활을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목회자의 육적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기도하고 인도하는 것이 방해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라디아서 6:6)고 권고한 적도 있습니다.

 

1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1-14)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전과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이 거기서 나오는 것을 먹고 나누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주님도 복음 전하는 자에게 복음을 통해 생계를 꾸려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1) 사도의 자격(1-2)

 

성도 중 일부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고린도 시민으로서 우상 신전에서의 만찬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했습니다(8:9). 바울은 자신의 예를 들어 그들을 교정합니다. 네 개의 수사적 질문으로 자신이 사도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논증합니다(1절). 모두 긍정 대답을 요구하는 방식입니다. (1) 바울이 자유자이고 (2) 사도이며 (3) 부활의 주 예수를 목격했고 (4) 주 안에서 그의 사역의 결과가 독자들입니다. 첫째 근거는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종이 된 것(19)과 연결하고, 둘째와 셋째는 사도의 자격이고(15:8), 넷째는 사역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넷째 내용을 2절에서 부연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독자들에게는 분명 사도의 자격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3:6,10).

 

(2) 바울의 권리 논증(3-14)

 

사도 자격을 설명한 바울은 그에 어울리는 권리도 있음을 논증합니다. 먼저 수사적 질문으로 진행합니다(3-6). ‘권리가 없겠느냐’라는 질문으로 세 가지 내용을 제시gkqsl다. 모두 긍정 대답을 유도합니다. 첫째, 먹고 마실 권리입니다. 사도의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권리입니다. 둘째, 다른 사도나 주의 형제들과 게바처럼 신자 아내와 함께 다닐 권리입니다. 셋째, 자기와 바나바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을 권리입니다. 이 표현들은 현재 바울이 어떻게 사역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교회의 재정 지원 없이 천막 짓는 일을 통해 생계비를 충당하면서 아내 없이 혼자 사역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런 모습으로 사역하고 있지만, 그는 사도이며 사도로서 누릴 권리가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논증이 계속됩니다. 이번에는 여러 예들을 통해 자기에게도 권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7-10). 네 가지 질문으로 진행합니다. 첫 세 개는 ‘누가 ~하겠느냐?’는 형식으로 군인과 농부와 목축업자를 예로 듭니다. 군인은 자비량으로 일하지 않고, 농부와 목축업자는 자기가 일한 것을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바울 역시 복음의 일을 하기에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권리가 있습니다. 네 번째 질문은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구약 율법(신 25:4)을 사용합니다. 구약 내용은 소가 일할 동안 먹을 수 있게 해주라는 뜻이지만, 바울은 그것을 자신의 사역에 적용합니다. 밭을 가는 자나 곡식을 떠는 자는 그 결과를 먹을 기대로 일합니다.

바울은 위의 예들을 교회 상황과 연결시켜 자기 권리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이어갑니다(11-14). 역시 대화 방법으로 진행합니다. 두 가지 유비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씨 뿌리는 농부입니다. 자신이 영적 씨를 뿌렸기에 육적인 것, 즉 사역비를 받는 것을 과하다 할 수 있습니까? ‘아니다’란 대답을 이끄는 질문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다면 바울은 교회를 세운 사도이기에 더욱 자격이 있습니다(1-2). 또 다른 유비는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예배의 일을 하고 그 제물로 살아가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독자와 공유하고 있는 지식을 상기시킵니다. 바울은 성전 제사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기에(3:16) 그들을 위해 사역하는 바울은 영적 의미에서 제사장입니다. 당연히 후원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 유비들은 3장에서 자기 역할을 설명할 때 사용한 것과 동일합니다. 바울은 밭에 씨를 심은 자와 건축 과정에서 터를 닦은 자, 곧 성전 건물을 위해 일한 자로 자신을 묘사했습니다. 그 내용을 상기시켜 자신이 사도의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리라는 주의 명령(마 10:10; 눅 10:7)을 통해 자신의 권리에 대한 논증의 정점을 찍습니다(14).

 

사도의 권리를 복음을 위해 거절함(15-23)

복음을 전할 때 보상이나 특권을 누리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복음 자체가 너무나 귀하기에 그것을 전하는 것 자체가 의무가 아니라 큰 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로 다가온다면 자신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15-23)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자랑하거나 공로로 내세울 수 없는 사명임에도 자신이 왜 자랑할 수밖에 없는지를 다시 고백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누릴 수 있는 마땅한 보상과 특권 대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 자체를 상으로 여겼습니다.

 

(1) 바울의 복음 사역(15-17)

 

‘그러나’를 통해 이제껏 설명한 것을 반전시킵니다. 바울은 자기의 그 권리를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미 12절에서 메시아의 복음에 장애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분은 그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복음과 관련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복음 사역의 상급과 자랑 때문입니다(15b). 바울은 자기 권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 말이 독자들에게 또 다른 오해를 일으킬까 조심합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후원을 요구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의도가 없음을 강조합니다. 죽으면 죽었지 고린도 교회의 후원을 절대로 받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학생을 얻어 수업료를 많이 받으려는 당시 철학 선생처럼 여김 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복음 사역을 통한 그의 자랑은 따로 있습니다. 그 구체적 내용은 둘째 이유를 설명한 후 18-23절에서 다룹니다. 한편 권리를 사용하지 않은 둘째 이유는 그의 복음 사역의 특징 때문입니다(16-17). 비록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지만, 그 복음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사역 주도권도 그에게 있지 않습니다. 단지 복음을 전하라는 청지기직을 부여받았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사역 자체는 후원금을 상으로 받거나 또는 자기 것인 양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임받았기에 그것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禍)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불충실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바울의 입장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가 들어야 하는 보편적 규범입니까? 바울이 말하는 복음 사역의 진짜 자랑과 상급, 사역의 성격은 모든 시대에서 통용되는 원리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사역 후원을 절대로 받지 않겠다는 태도가 모든 사역자들에게 적용해야 할 보편적 규범이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도 후원받을 권리를 긍정적으로 말했고, 실제로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바울의 태도는 고린도 교회의 특별한 상황 때문인 듯합니다.

 

(2) 바울의 상급과 복음사역 방법(18-23)

 

복음으로 인한 진짜 상급에 대해 설명합니다. 자기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첫째 이유와 관련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고 복음 안에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을 상급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세상 철학자들의 태도나 비교와 경쟁이 난무하는 교회 상황을 감안하면 독자들이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기의 권리와 이익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2:17-31). 그 방법을 따르는 것이 참 지혜이자 능력이라는 것도 알았기에 몸소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를 다 쓰지 않고 세상과 다르게 살았습니다. 사도이고 자유인이지만(1) 모든 이의 종처럼 살았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살았고, 비유대인들이나 약한 자들에게는 그들과 함께함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십자가 예수의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막힘없이 드러나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1) 하나님과 예수를 정말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고, (2)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의 삶을 따르려는 제자이며, (3)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사랑하려는 사역자이고, (4) 맡겨진 것에 충성하는 일꾼이며, (5) 무엇이더 가치 있는지를 분별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위해 살아가려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 형제들을 배려하지 않는 자들이 보고 배워야 하는 신앙의 선배이자 사역자입니다.


권리도 자유처럼 사랑의 정신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도 자유처럼 기쁘게 포기했습니다. 네게 주신 권리를 주의 복음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생을 자랑할 것을 얻는 데 매여 살기보다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일에 우리의 삶에 목포를 가지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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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8-01)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교회

고린도전서 8장 1-13절


종종 어떤 회사가 음식이나 제품을 먹으면 아주 똑똑해지고 총명해 질 것을 광고한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지혜로워진 것보다 똑똑해지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똑똑해지는 것과 지혜로운 것 중에 지혜로운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지속적으로 알고 배우고 그리고 지식을 늘리는데 열심을 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돌보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데는 매우 느립니다. 본문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보여줍니다.

 

  • 7장에 이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질문한 것을 계속 다릅니다. 이번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한 것입니다. 크게 1-3절과 4-13절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에 대해서는’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1,4), 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첫 부분은 독자들 행동에 근거가 되는 지식에 대해 다룹니다. 둘째 부분은 우상 제물 먹는 것에 대해 우상에 대한 지식(4-7)과 음식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덕을 세우지 못한 지식인(1-3)

학습을 하므로 무엇인가를 깨달아 갈 때, 마음을 시원케 합니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답답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을 무식한 사람으로 무시하며, 때로는 가르쳐 변화시키려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익은 곡식은 머리를 숙인다고 하였습니다.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1-3)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에게 문의한 또 다른 문제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해 먹을 수 있다는 입장과 먹을 수 없다는 입장이 갈등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1)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 제기(1)

 

바울은 ‘...에 대하여’를 통해 성도들의 질문에 계속 답니다. 이번에는 우상 제물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제물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집중합니다.

먼저 1인칭 ‘우리’로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들이 소유한 지식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줄 안다.’ 이 지식은 우상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것(4-6)과 음식에 대한 것(8)입니다. 그들은 이 지식을 통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는 듯합니다.

 

(2) 바울의 응답(2-3)

 

지식과 사랑 지식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자들에게 지식과 사랑에 대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세워줍니다. ‘세우다’는 신자와의 관계를 통해 서로 성장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관계 맺고 함께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두 개의 조건절로 구체화합니다. 만일 누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알아주십니다.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진리와 사랑과의 연관성이고, 둘째는 자신과 하나님의 대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지식은 의미 없습니다. 그분을 알 뿐 아니라 그분이 알아주는 관계 요소가 포함돼야 하고, 그 관계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직적 차원과 그분이 귀히 여기는 사람을 향한 수평적 차원이 있습니다. 얕은 지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적절한 관계 표현인 사랑으로 연결되는지가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구원 1 :우정에 대한 독자의 지식과 바울의 인정(4-6)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 올바르고 선한 방법으로 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연약한 성도에게 악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선한 양심을 심어주기보다 더러워질 수 있는 영향이라면 더욱더 조심하고 행동을 삼가 해야 합니다.

 

4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4-6)

 

‘페리 데(περί δε)’로 우상 제물을 먹는 것과 그 행위자에 대한 구체적 권면과 교정을 시작합니다. 역시 우상제물을 먹는 자들이 소유한 지식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신명기 6:4-5에 근거하며, 모든 유대 기독교인이 공유하고 있는 공리입니다. 바울은 그들 지식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로 그들 지식이 옳음을 보여줍니다(5). 하늘에나 땅에 신과 주로 불리는 많은 존재들이 있지만, 신자인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 곧 아버지가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창조주이고 사람은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또한 한 주 예수 메시아가 계십니다. 신자들은 하나님 창조의 통로이며 그분을 통해 존재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었거나 섬기는 것이지만, 하나님 예수는 사람과 우상에 비할 수 없는 절대타자요 창조주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우상 제물 먹는 자들이 공유하는 진리입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독자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그 지식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점이고(7), 둘째는 그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 다른 사람을 향한 긍정적 관계 표현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8-13).

 

구체적 권면 2 : 문제 상황들과 바울의 권면(7-1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통해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높은 수준의 지식으로 ‘사랑 없는 자유’를 정당화하기보다 연약한 지체들이 깨달을 때까지 ‘절제하는 자유’를 보이는 것이 복음(11)에 합당한 태도입니다.

 

7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7-13)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은 자유로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우상의 제물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상의 실체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구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1) 문제 상황 1 :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7)

 

지식과 관련한 첫 번째 문제 상황입니다. 그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교인 중에 있습니다. 초신자나 진리를 잘 모르는 자일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은 없고 오직 하나님/예수님만이 참 신임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이해와 습관을 따라 고기를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 음식 먹는 것을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일로 생각해 양심에 거리끼지만 계속 그 행위를 합니다. 마치 우리 문화에서 조상에게 제사한 후 음복하는 것을 귀신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일로 생각하면서 참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참여하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수 있고, 우상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거나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민감성이 떨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배교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2) 문제 상황 2 : 음식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이해(8)

 

지식과 관련한 두 번째 문제 상황입니다. 우상 신전에서 음식을 먹음으로 지식 없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음식에 대한 그들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합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음식이 신자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음식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입니다. 즉, 음식은 자신의 영적 상태와 관계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음식에 대한 또 다른 지식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우상 신전에서 만찬에 참여합니다.

 

(3) 바울의 권면과 이유(9-13)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그 권리가 약한 자들이 걸려 넘어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령합니다. 약한 자들이란 우상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입니다(7). 우상 제물을 먹는 자들은 두 가지 근거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 (4-6)과 음식에 대한 지식(8)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행위가 다른 교인들 신앙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과정이 없습니다(1b-3). 바울은 그 구체적 모습을 10-12절에서 부연합니다. 그들은 우상은 없는 것이라는 지식에 근거해 우상 신전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우상 신전에서 열리는 사회 유력 인사가 주최한 만찬에 참여해 세상 사람들과 사회-정치적 교제를 유지하려는 의도입니다.

또한 음식 자체는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기에 문제없다고 믿고 그렇게 합니다.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한 교인들은 사회와 교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와 영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 약한 신자들은 그들로 인해 좋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신자들은 믿음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고, 그 사람들이 사회에서도 영향력 있으면 당연히 하나의 본(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본이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따라하게 됩니다. 우상 제물을 먹고 양심에 계속 거리끼는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바울은 이 상황에 대해 그 약한 형제들은 메시아 예수가 위해서 죽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그들을 실족하게 하면 그들을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사역을 무위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지식이 있고 만찬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믿지만, 예수 안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곧 언약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 관계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수반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분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이 표현되지 않으면 그분과의 언약 관계에 진정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배려하고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사회적 관계 유지를 더 우선시했습니다. 이것은 형제 사랑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바울 자신은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분명히 전합니다. 자기 유익보다 형제 사랑이 더 중요하고, 그것으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지식과 사랑은 양자택일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적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사용입니다.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다 안다는 오만함에서 건져달라고, 정작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 무지함에서 건져달라고 더 온전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려는 나태함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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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7-02)

 

 


고린도교회의 문제점: 그리스도인의 결혼관

고린도전서 7장 25-40절


운동선수나 뚜렷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은 목표달성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합니다. 많은 것들을 희생하지 않고는 목표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포기해야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당연해 보이는 것들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내려놓고 포기해야 할 것은 없습니까?

  

  • 1-24절에 이어 결혼과 관련된 주제를 계속 다룹니다. 특별히 약혼한 사람이 결혼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과 과부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질문을 언급한 후(25),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그에 대한 근거를 제공합니다(26-28). 이어 두 가지 근거를 추가로 언급하고(29-35), 약혼한 남자에 대한 주제를 드라눈 후(36-38), 과부에 대한 제안(39-40)을 제시합니다.

문제점 : 문제 제기(25)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하는 사람을 보면 그가 무슨 문제가 있거나 나이 든 후에 쓸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 나라에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 살아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25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2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질문한 미혼자의 결혼에 대한 질문에 대해 대답합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주님께 주신 명령이나 계시는 아니지만 충성스러운 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고 합니다.

약혼한 처녀들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따로 설명하고 명령하신 것은 없지만, 자비로 부르심을 입은 사도로서 권면한다고 합니다. 전체 내용을 목회자의 제안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군거들(26-35)

종말 의식은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 것처럼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심판과 주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결혼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결혼하면 배우자를 살펴야 하는 어려움도 있기 때문에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권했습니다.

 

26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27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28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32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35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26-35)

  

(1)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근거 1(26-28)

 

바울은 그 질문에 대해 ‘내 생각에는’는 말로 시작합니다. 명령이라기보다는 제언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처럼 결혼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26). 또한 만일 약혼한 남자가 결혼 헌신을 약속했으면 이혼하지 말고 계속 살 것이고, 혹시 이혼과 비슷한 파경을 맞았으면 굳이 결혼하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27).

먼저 결혼에 앞에서도 임박한 환난 날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마지막 날이 가깝다는 생각 때문에 미혼들이 결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현재의 어려움 때문입니다(26). 당시 고린도 지역은 기근으로 경제 상황이 많이 안 좋았는데, 그런 형편을 염두에 둔 듯합니다. 결혼해도 어려움 당할 수 있기에 약혼한 상태지만 가급적 결혼을 미루는 것이 괜찮을 듯싶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결혼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약혼자와 결혼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단지 육신의 고난, 곧 기근으로 인한 어려움에 독자들이 고생할까 봐 그렇게 권한 것입니다(28). 모든 시대에 통용되는 절대규범이라기보다 상황에 근거한 목회적인 권면입니다.

 

(2)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근거 2(29-31)

 

약혼한 자들에 대한 제언에 대해 두 번째 근거입니다. ‘때’ 곧 주의 재림과 종말의 시간이 단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심판과 구원을 담고 있기에 종말의 시작이며, 완성은 주의 재림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신자의 ‘오늘’은 종말의 시작과 완성 사이의 시간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 지역의 기근을 종말의 한 징조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직 역사의 끝이 온 것은 아니지만, 그 어려움으로 종말의 시간이 가까이 왔음을 인식하며 살라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세상은 지나가고 없어집니다. 그렇기에 희로애락의 삶이나 소유나 세상 물건을 사용하는 것에 다른 태도를 가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결혼의 영역도 포함되는데, 약혼녀가 있는 자는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좋겠다는 제안도하고 있습니다. 역시 바울의 목회적인 권면입니다.

 

(3) 약혼한 남녀에 대한 제안과 근거 3(32-35)

 

세 번째 근거를 언급합니다. 결혼하면 마음이 나뉘어 상대적으로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두 부류의 예를 듭니다. 첫째, 결혼한 남자입니다. 가정의 가장으로서 세상 일에 마음이 나뉘고 아내를 기쁘게 하기를 추구합니다.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결혼 전에 비해 주님을 향한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둘째, 여자들입니다. 시집가지 않은 일반 여자나 약혼녀는 할 수 있으면 주의 일에 집중하려 하고 몸과 영을 더 순결하게 하려 합니다. 그러나 결혼하면 남편의 경우처럼 세상 일과 남편에게 충실하게 되어 마음이 나뉠 수 있습니다. 결혼이 마음을 나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주님께 마음이 집중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결혼 자체가 주님을 향한 순결한 헌신에 장애물도 아닙니다. 바울의 제안은 기근이라는 당시의 특별한 상황을 배경으로 한 듯합니다. 힘든 시기라서 아무래도 결혼한자들은 혼자 있을 때보다는 가정과 배우자에 대한 염려가 더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아끼는 마음으로 권면한다고 합니다(35). 할 수 있으면 그들이 주를 향한 삶에 덜 방해받고 지내기를 바랐습니다.

 

약혼한 남자에 대한 권면(36-38)

전반적으로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라도 과대평가하거나 절대화하거나 우상시해서는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 곧 없어져 버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물건이나 현 모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곧 사라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36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그 약혼녀의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원하는 대로 하라 그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그들로 결혼하게 하라 37그러나 그가 마음을 정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약혼녀를 그대로 두기로 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38그러므로 결혼하는 자도 잘하거니와 결혼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 잘하는 것이니라(36-38)

 

주제를 약간 바꾸어 약혼한 남자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두 가지 상황을 전제합니다. 첫째, 그 남자가 약혼녀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 경우입니다. 이 부분은 해석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약혼한 남자가 결혼을 미루고 있었는데, 그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 약혼녀가 혼기가 찼고 결혼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그 마음을 실행해 결혼하라는 권면입니다. 결혼하는 것이 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 결혼을 계속 미루는 경우입니다. 약혼한 남자가 강요함 없이 마음을 정하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결혼하지 않고 자기 약혼녀를 그 상태로 두기로 자기 마음에 결정하면 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와 ‘자기 마음으로’라는 표현을 통해 약혼남의 개인적 결정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약혼한 남자는 결혼을 해도 되고 좀 더 미뤄도 됩니다. 둘 다 괜찮습니다.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제안합니다. 좋음과 더 좋음의 선택입니다. 역시 현재의 어려움을 고려해 독자들을 배려한 제안인 듯합니다.

 

과부에 대한 제안(39-40)

결혼을 하면 세상 일로 마음이 나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장가간 자는 아내를, 시집간 자는 남편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염려하느라 주님의 일에 집중하기 어렵고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것이 올무가 아니라 그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명령이 아니라 권면임을 분명히 합니다.

 

39아내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로워 자기 뜻대로 시집 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40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39-40)

 

결혼한 아내에 대해 제안합니다. 기본적으로 아내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만 결혼 관계에 묶여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죽으면 그 관계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기가 원하는 이와 재혼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바울의 다른 편지에서도 언급됩니다(로마서 7:1-3). 바울은 여기에 주안에서만 하라는 말을 첨가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결혼 같은 삶의 일반 관계보다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그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그냥 지냈으면 하는 것입니다(40). 비록 주의 명령이 아니라 바울의 생각이지만, 두 가지 표현을 첨가함으로써 자신의 권면이 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비교급 사용입니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복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으로 인한 의견임을 전달합니다. 이 또한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하는 규범은 아닙니다. 당시의 특별한 상황을 전제하여 성도를 아끼는 제안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결혼과 관련해 신자의 삶과 목회 차원에서 몇 가지 원리들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신자의 삶에 대해서 ① 결혼은 삶의 절대 요소가 아닙니다. 결혼을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② 본인의 진지한 결정과 그에 따른 책임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그 결정은 현실적 어려움이라는 변수와 종말이 있음을 기억하고 조심해서 살아야 하는 것, 그리고 주님을 향한 순전한 집중을 고려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현대에는 다른 요소들이 가감될 수 있지만, 주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집중은 시대를 불문하고 고려해야 합니다. 한편, 목회 차원에서 바울의 모든 권면은 독자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록 주의 명령은 아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고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계속 잘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바울 권면의 또 다른 특징은 독자들에게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충분히 그렇게 해도 될 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여러 변수들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신중하게 판단하도록 유도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도록 돕고 있다. 사역자로서 성도들을 권면하는 좋은 귀감을 보여준다.


인생의 문제는 결국 가치의 문제고, 신앙의 문제입니다. 묵상은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사라지기 않는 것(가치)에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 안목을 갖는 일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묵상의 이유이고 목표입니까?

 

 

*** 용서

 

영화 ‘밀양’의 내용은 대략,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아들과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들까지 유괴 후에 살해당합니다. 신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안정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기를 권합니다. 그녀는 예수를 믿고 나서 위로를 받고, 살인자를 용서하려 교도소에 면회를 가서 어렵게 예수를 믿고 나서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범인도 “나도 교도소에서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라면서, 비아냥거리면 “내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줄 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신애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뒤집어지기 시작합니다. 미치기 시작하고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영화 ‘밀양’에서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 큽니다.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진정한 자유란 것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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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7-01)

 


 고린도교회의 문제점:결혼과 부부생활

고린도전서 7장 1-24절


어떤 가정들은 자녀 교육을 잘해보겠다고, 남편은 한국에 남아 있고, 아내와 자녀들만 외국으로 가서 헤어져 사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러한 가정의 남편들을 ‘기러기 아빠’라고 부릅니다. 이 ‘기러기 아빠’들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이나 외도로 많은 가정들이 파괴된다는 슬픈 소식을 듭니다. 자녀를 좋은 교육을 시키는 것은 좋지만, 얼마나 잘해 보겠다고 가정까지 파괴되면서 교육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이렇게 교육받은 자녀들이 장차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없다고 봅니다.

 

  • 7장부터 16장 12절까지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한 질문들을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주로 결혼과 부부 관계에 대한 여러 주제들을 짧게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내용은 부부간 성관계에 대한 것(1-5)과 결혼과 독신(6-9)과 이혼에 대한 것(10-16)입니다. 한편, 17-24절은 결혼이란 주제와 약간 다른 내용이 제시됩니다. 하나님꼐서는 부르신 대로 살라는 권면입니다. 유대인/비유대인 문제와 노예 상태에 대한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문제점(1) : 부부간에 성관계에 대해(1-5)

 

결혼한 목적은 성적 만족을 위해서 아닙니다. 부부간의 성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긴밀히 연계된 사안입니다. 성적 방종이 문제지만, 이습이나 편견에서 비롯된 금욕주의적 태도도 만만찮은 걸림돌이 됩니다. 하지만 결혼의 중요한 축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은 오직 부부 관계 안에서만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1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2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4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5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1-5)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어려운 문제들을 질의하는 편지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점에 관해 편지를 공식적 질문을 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합니다.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편지로 질문한 것에 대해 다르기 시작합니다.

 

(1) 질문 내용(1)

 

먼저, 첫 질문은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남자가 아내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질문했습니다. 바울과 성도들은 알고 있었겠지만, 현대 성도들에게 어떤 문맥에서 그 말이 나왔는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부부간 성관계에 대한 내용인 듯합니다.

 

(2) 바울의 대답(2-5)

 

바울은 부부의 성에 대한 대답을 합니다. 음행 때문에 각 남자는 자기 아내를 갖고, 각 여자들도 자기 남편을 갖게 하라고 합니다(2). ‘갖다’라는 말은 성관계를 의미하며, 세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부부간 성관계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한 것에 대한 구체적 대답입니다. 둘째, 음행의 요소입니다. 5-6장에서 계속 다룬 주제입니다. 부부간 성관계는 음행과 관련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런 죄를 막을 수 있게 합니다. 셋째, 성관계는 부부에게만 허락됩니다. 성관계가 한 몸 되게 하는 가장 친밀한 행위이기에(창세기 2:24), 오직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만 허락됩니다. ‘각각’과 ‘자기’ 표현을 반복함으로 이 요소를 강조합니다.

이런 원리에도 불구하고 실제 상황에서는 첨가할 요소들이 더 있습니다. 바울은 두 가지를 추가합니다(3-5). 한 가지는 상대방을 향한 배려와 섬김입니다(3-4).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 대한 성적 의무에 충실해야 하며, 자기 몸에 대한 배우자의 주장을 허락해야 합니다. 그 권리를 빼앗으면 안 됩니다. 상당히 놀랍습니다. 오직 남편의 권리만 인정되는 당시 문화에서 서로 섬김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른 원리가 부부간 성관계에도 적용됩니다. 또 다른 추가 요소는 성관계의 예외 사항입니다. 기도 같은 경건 생활을 위해 잠시 절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합의 하에 해야 하고 오랫동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제 못함으로 음행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에 대한 이기적 왜곡과 부부 관계에 대한 어그러짐이 여전히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도 적용해야 하는 놀라운 가르침입니다.

  

문제점(2) : 결혼과 독신에 대해(6-9)

지혜 있는 부부는 서로에게 필요한 영적, 성적 필요를 이해하고 합의를 통해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요리에 적당한 조미료가 필요하듯이 부부 사이에도 조화로운 합의와 협력이 필요합니다. 은사대로 순종할 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부가 서로 연합하여 합력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그리고 이웃을 섬김으로 거룩한 삶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또 독신자는 많은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길 수 있습니다.

 

6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7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8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6-9)

 

바울은 자신의 말이 명령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결혼이 부정한 것도, 독신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결혼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하나님께 은사를 받아 혼자 사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 바울 같기를 원함(6-7)

 

결혼과 독신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가 허락하는 것, 곧 사도의 의견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결혼했는지, 혹 했다면 언제 독신이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독자들이 그 정보를 알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혼자된 것은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자기처럼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살기 바란다고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부르심이 같지는 않다고 첨언합니다. 독신이 강제의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2) 결혼하지 않은 자나 과부에 대해(8-9)

 

독신과 관련해 미혼자와 과부에게 말합니다. 역시 자기처럼 그냥 혼자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구체적 이유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25절부터 처녀에 대해 언급하면서 몇몇 이유를 제시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지나갑니다. 대신 절재할 수 없으면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성관계 자체가 결혼의 목적은 아니지만, 2절 설명처럼 음행보다 결혼의 낫다는 말입니다.

 

문제점(3) : 이혼에 대해(10-16)

요즘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지면서 자신의 일과 자유분방한 삶을 유지하고자 독신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당신은 독신으로 살고자 합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복음 안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에게 자신만을 위한 삶은 없습니다.

 

10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1(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2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3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4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5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6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10-16)

 

본문은 결혼과 이혼 상담소 같습니다. 먼저 ‘독신’에 대해, 영적인 과욕으로 독신을 고집한다면 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말합니다.

 

(1) 결혼한 자에 대한 주의 명령(10-11)

 

화제를 바꾸어 결혼한 자에 대해 이혼하지 말라는 주의 명령을 전합니다(마가복음 10:9). 아내는 남편과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이혼했다면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그대로 독신으로 있든지 다시 남편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은 안 됩니다. 남편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아내와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바울의 제안(12-16)

 

바울의 제안 나머지 사람들의 경우로 화제를 돌리고 주의 명령이 아닌 사도의 권면으로 다룹니다. 부부간 일이지만, 앞의 상황과 다른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의 경우입니다. 기본 원칙은 이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만일 믿지 않는 배우자가 원치 않으면 이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믿는 자로 인해 배우자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이 될 수도 있고, 자녀들 또한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배우자가 나도 원하면 이혼해도 됩니다. 이혼이 절대적 금지 명령은 나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배우자 때문에 애써 이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배우자를 위한 생명의 통로로 부르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16).

결국, 결혼이냐 이혼이냐의 문사 제는 신자에게 절대적 구속 요건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통로로서 이 땅에서 배우자를 포함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가는가가 중요합니다. 진리와 사랑의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관계입니다.

 

부르심에 따른 삶(17-24)

성도의 삶의 자리 전반에 관한 문제로 논의를 확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혈통, 신분, 결혼 여부 등 외적인 삶의 조건보다 소명(신자다운 삶)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 더 근사하게 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하다가 지금 그 자리에서 주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닙니다.

 

17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8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9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20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17-24)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 가운데에는 자신의 상태나 신분을 바꾸려 하는 자들이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대로 있으라고 권했습니다. 할례자는 할례의 표지를 제거하기 위해 육체적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고, 무할례자 역시 할례를 신자의 참된 표지로 여기며 그것을 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1) 원리 부르신 대로 살라(17)

 

부르심에 따른 삶이라는 주제로 넘어갑니다. 결혼이나 이혼과 무관한 듯하지만 연결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앞부분에서 독신, 결혼, 이혼에 대해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상관없이 주 안에서 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주제를 일반화해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명령합니다.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주 되심 입니다. 삶의 모습을 주께서 나눠주셨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도 합니다. 반복하며 상황과 처지를 비롯한 모든 삶의 주인이 그분임을 강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부르심의 개별성입니다. ‘각 사람’이란 말의 반복을 통해 제시됩니다. 그렇기에 각 사람은 부르심에 충실함으로 주님의 주 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에 그 명령을 모든 교회가 들어야 한다고 첨언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전달합니다.

 

(2) 적용1 : 할례와 무할례(18-20)

 

부르심에 충실한 첫 번째 예입니다. 할례와 무할례, 곧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의 구별에 대해서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런 구별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됨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3) 적용2 : 노예 상태에 대해(21-24)

 

두 번째 적용으로 노예 상태를 예로 듭니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입니다. 기회가 되어 자유인이 되면 좋습니다(21). 하지만 신분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형제들’이라고 불리는 신자의 정체성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노예지만 예수로 인해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자유인이더라도 메시아께 속한 사람, 그분의 종인 정체성이 더 중요합니다. 둘째, 정체성에 합당한 삶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과 신분에 얽매여 신자로서의 삶의 표현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답게 그분께 충성하며 세상에서 진리와 사랑으로 신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벼운 주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도 ‘주의 명령’은 아니라고 거듭 말하며, 분명한 원칙을 지키면서도 구체적 상황의 특수성을 배려하는 의도를 내비칩니다. 그러고는 이 난제를 ‘종말의 시각’(26)에서 한 번 더 헤아려보라고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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