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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08-01)

 

 


지식에 사랑을 더하는 교회

고린도전서 8장 1-13절


종종 어떤 회사가 음식이나 제품을 먹으면 아주 똑똑해지고 총명해 질 것을 광고한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지혜로워진 것보다 똑똑해지는 것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똑똑해지는 것과 지혜로운 것 중에 지혜로운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삶은 지속적으로 알고 배우고 그리고 지식을 늘리는데 열심을 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돌보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데는 매우 느립니다. 본문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보여줍니다.

 

  • 7장에 이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질문한 것을 계속 다릅니다. 이번에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한 것입니다. 크게 1-3절과 4-13절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에 대해서는’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1,4), 그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방식입니다. 첫 부분은 독자들 행동에 근거가 되는 지식에 대해 다룹니다. 둘째 부분은 우상 제물 먹는 것에 대해 우상에 대한 지식(4-7)과 음식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덕을 세우지 못한 지식인(1-3)

학습을 하므로 무엇인가를 깨달아 갈 때, 마음을 시원케 합니다. 하지만 깨닫는 순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답답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을 무식한 사람으로 무시하며, 때로는 가르쳐 변화시키려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익은 곡식은 머리를 숙인다고 하였습니다.

 

1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1-3)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에게 문의한 또 다른 문제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우상의 제물에 대해 먹을 수 있다는 입장과 먹을 수 없다는 입장이 갈등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1) 우상 제물에 대한 문제 제기(1)

 

바울은 ‘...에 대하여’를 통해 성도들의 질문에 계속 답니다. 이번에는 우상 제물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제물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집중합니다.

먼저 1인칭 ‘우리’로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들이 소유한 지식을 언급합니다. ‘우리는 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줄 안다.’ 이 지식은 우상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것(4-6)과 음식에 대한 것(8)입니다. 그들은 이 지식을 통해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는 듯합니다.

 

(2) 바울의 응답(2-3)

 

지식과 사랑 지식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자들에게 지식과 사랑에 대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세워줍니다. ‘세우다’는 신자와의 관계를 통해 서로 성장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지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어떻게 관계 맺고 함께 살아가는지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두 개의 조건절로 구체화합니다. 만일 누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알아주십니다. 두 가지 요소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진리와 사랑과의 연관성이고, 둘째는 자신과 하나님의 대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지식은 의미 없습니다. 그분을 알 뿐 아니라 그분이 알아주는 관계 요소가 포함돼야 하고, 그 관계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직적 차원과 그분이 귀히 여기는 사람을 향한 수평적 차원이 있습니다. 얕은 지식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적절한 관계 표현인 사랑으로 연결되는지가 중요합니다.

 

구체적인 구원 1 :우정에 대한 독자의 지식과 바울의 인정(4-6)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 올바르고 선한 방법으로 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연약한 성도에게 악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선한 양심을 심어주기보다 더러워질 수 있는 영향이라면 더욱더 조심하고 행동을 삼가 해야 합니다.

 

4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4-6)

 

‘페리 데(περί δε)’로 우상 제물을 먹는 것과 그 행위자에 대한 구체적 권면과 교정을 시작합니다. 역시 우상제물을 먹는 자들이 소유한 지식을 인용하면서 시작합니다.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신명기 6:4-5에 근거하며, 모든 유대 기독교인이 공유하고 있는 공리입니다. 바울은 그들 지식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로 그들 지식이 옳음을 보여줍니다(5). 하늘에나 땅에 신과 주로 불리는 많은 존재들이 있지만, 신자인 ‘우리’에게는 오직 한 분, 곧 아버지가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창조주이고 사람은 그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또한 한 주 예수 메시아가 계십니다. 신자들은 하나님 창조의 통로이며 그분을 통해 존재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들었거나 섬기는 것이지만, 하나님 예수는 사람과 우상에 비할 수 없는 절대타자요 창조주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우상 제물 먹는 자들이 공유하는 진리입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독자들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그 지식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점이고(7), 둘째는 그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 다른 사람을 향한 긍정적 관계 표현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8-13).

 

구체적 권면 2 : 문제 상황들과 바울의 권면(7-1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통해 안식을 얻어야 합니다. 높은 수준의 지식으로 ‘사랑 없는 자유’를 정당화하기보다 연약한 지체들이 깨달을 때까지 ‘절제하는 자유’를 보이는 것이 복음(11)에 합당한 태도입니다.

 

7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7-13)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은 자유로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우상의 제물을 먹을 것인지 말 것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상의 실체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누구신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1) 문제 상황 1 :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7)

 

지식과 관련한 첫 번째 문제 상황입니다. 그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교인 중에 있습니다. 초신자나 진리를 잘 모르는 자일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은 없고 오직 하나님/예수님만이 참 신임을 깊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이해와 습관을 따라 고기를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 음식 먹는 것을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일로 생각해 양심에 거리끼지만 계속 그 행위를 합니다. 마치 우리 문화에서 조상에게 제사한 후 음복하는 것을 귀신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일로 생각하면서 참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참여하면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수 있고, 우상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거나 반대로 하나님을 향한 민감성이 떨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배교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2) 문제 상황 2 : 음식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이해(8)

 

지식과 관련한 두 번째 문제 상황입니다. 우상 신전에서 음식을 먹음으로 지식 없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입니다. 바울은 음식에 대한 그들의 말을 인용함으로 시작합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음식이 신자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하지 않는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음식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입니다. 즉, 음식은 자신의 영적 상태와 관계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음식에 대한 또 다른 지식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우상 신전에서 만찬에 참여합니다.

 

(3) 바울의 권면과 이유(9-13)

 

하지만 바울은 그들의 그 권리가 약한 자들이 걸려 넘어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령합니다. 약한 자들이란 우상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자입니다(7). 우상 제물을 먹는 자들은 두 가지 근거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우상에 대한 지식 (4-6)과 음식에 대한 지식(8)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행위가 다른 교인들 신앙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표현되는 과정이 없습니다(1b-3). 바울은 그 구체적 모습을 10-12절에서 부연합니다. 그들은 우상은 없는 것이라는 지식에 근거해 우상 신전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우상 신전에서 열리는 사회 유력 인사가 주최한 만찬에 참여해 세상 사람들과 사회-정치적 교제를 유지하려는 의도입니다.

또한 음식 자체는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기에 문제없다고 믿고 그렇게 합니다. 우상 신전 만찬에 참여한 교인들은 사회와 교회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와 영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믿음 약한 신자들은 그들로 인해 좋지 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초신자들은 믿음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고, 그 사람들이 사회에서도 영향력 있으면 당연히 하나의 본(本)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본이 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따라하게 됩니다. 우상 제물을 먹고 양심에 계속 거리끼는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바울은 이 상황에 대해 그 약한 형제들은 메시아 예수가 위해서 죽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그들을 실족하게 하면 그들을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사역을 무위로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들은 지식이 있고 만찬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믿지만, 예수 안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곧 언약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 관계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수반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그분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이 표현되지 않으면 그분과의 언약 관계에 진정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배려하고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사회적 관계 유지를 더 우선시했습니다. 이것은 형제 사랑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음식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바울 자신은 절대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분명히 전합니다. 자기 유익보다 형제 사랑이 더 중요하고, 그것으로 하나님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지식과 사랑은 양자택일의 대상일 수 없습니다. 바울이 자적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사용입니다.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다 안다는 오만함에서 건져달라고, 정작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 무지함에서 건져달라고 더 온전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려는 나태함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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