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11-02)
한 몸으로 세워갈 성만찬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
성만찬은 단순히 떡과 포도주만 먹고 마시는 식사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성찬의 떡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몸을, 성찬의 잔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기념합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는 성찬의 정신을 따라 공동체의 유익이 되도록 참여해야 합니다.
- 고린도교회에 예배에 대한 두 번째 문제점은 성만찬이었습니다. 내용을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17-22절은 도입과 문제 진술입니다. 둘째, 23-26절은 주의 만찬에 대한 가르침을 상기시킵니다. 셋째, 27-32절은 주의 만찬 가르침에 근거한 첫 번째 권면입니다. 넷째, 33-34절은 두 번째 권면입니다. 바울의 초점은 주의 만찬 자체가 아니라 그 정신에 따라 공동체 지체들을 어떻게 배려하고 함께 참여할 것인지에 있습니다.
성만찬의 오용을 책망(17-22)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지진 형제적 교제 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됨을 체험하고 천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하나 됨을 기념하고 확인해야할 성만찬 자리가 오히려 상처와 분열을 주장하는 자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17-22)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칭찬 받지 못할 문제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이는 성찬과 관련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파당과 분쟁 문제로 인해 그들의 모임이 유익하지 않고 도리어 해롭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쟁 속에서 옳다고 인정받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은 분쟁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순기능 중 하나입니다.
(1) 주의 만찬 문제 도입(17-19)
‘칭찬하다’(에파이네오)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2절에서도 언급된 것이지만 분위기가 다릅니다. 17-34절은 앞부분보다 심각해서 전혀 칭찬할 상황이 아닙니다. 바울 진단에 의하면 교회 모임 중에 좋은 것보다 나쁜 것들이 더 양산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에 모였을 때 분열이 있음을 들었습니다. 이 분열은 1-4장과 다르게 경쟁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부자 교인과 가난한 교인 간의 차별로 인한 분열입니다. 아마 바울은 가난한 자들 편을 통해 교회 상황을 들은 듯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그런 상황이 있음을 믿고 있다는 말을 추가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독자들 중에 파당이 있어야 옳게 인정함 받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19). 분열을 통해 자신을 괜찮다고 여기며 함부로 행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비꼽니다.
(2) 문제 진술(20-22)
여기서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가톨릭, 20절).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를 통해 그 상황을 설명합니다. 먹을 때 각자가 자기 만찬을 먹어 치우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이는 배고프고 어떤 이는 배부르고 술 취하는 일이 생겼습니다(21). 이상한 상황입니다. 이것을의 언약 백성 모임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관찰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각자’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각자’ ‘자기’ 만찬을 먹는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만찬 음식을 가져와 자기만 먹고 마심으로 주의 만찬을 마치 개인 만찬 성격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마도 부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먹어버리다’라는 표현입니다. 시간적인 요소가 있지만 개인이 만찬 음식을 먹어 치워버렸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주의 만찬을 사유화하고 자기만 먹고 마시는 상황에서는 음식을 가져올 수 없는 가난한 자는 만찬에 참여할 기회마저 박탈당합니다. 더욱이 당시는 심한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했기에 가난한 자들이 만찬 음식을 가져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부자의 이런 행동은 자연스레 주의 만찬을 부자와 가난한 자의 분열의 장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바울은 일련의 질문 형식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합니다(22). 첫 질문은 그들이 먹고 마실집이 없어서 교회에서 그렇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니다’라고 대답하여 부끄럽게 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그러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분의 언약 백성 모임입니다(1:2). 그런 행동은 하나님뿐 아니라 그분의 가난한 백성도 무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은 그들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할까?’, ‘칭찬할까?’, ‘내가 칭찬하지 않는다’라는 일련의 대화 형식으로 그들을 책망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어찌 이해했는지 몰라도 바울 진단에 의하면 그들 행동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 모임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의 만찬 전승(23-26)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교회, 가까운 사람만을 위하는 교회만큼 교회의 본질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치르신 고통, 수치, 생명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땅히 다른 사람을 위해 고통, 수치, 생명을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합니다. 교회의 중심에 놓여 있는 기반은 주님의 십자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23-26)
문제 상황에 대한 구체적 권면 전에 주의 만찬의 의미를 상기시킵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전한 가르침이 주님의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비록 주님께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 전승을 전해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이 주님께 들은 것이기에 그 기원은 예수님입니다. 주의 만찬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함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이 잡히시기 전날 유월절 만찬 때 무교병과 포도주에 대해 각각 자신의 몸과 피라고 말하고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에 몇 가지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첫째,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내’피라는 예수의 말을 직접 인용함으로 강조합니다. 둘째,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너희’라는 표현을 통해 주의 만찬에 참여한 자들은 한 몸, 한 공동체임을 말합니다(10:16-17). 셋째,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임과 그의 희생으로 구원, 곧 하나님과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선포하는 것입니다. 만찬 안에는 주의 몸과 피로 상징되는 구원 과정과 그 결과 요소가 들어 있기에 그것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주의 만찬 전승에 근거한 첫 번째 권면(27-32)
성찬식에 임할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식에 참여할 때 게으름이나 음란 같은 개인적인 죄를 돌아보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핍한 사람을 향한 자신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상고해야 합니다. 과연 자신은 소외되고 가난한 지체를 돕고 있는지, 혹은 말로만 그들을 돕는 것은 아닌지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27-32)
바울은 성찬식을 비롯해 고린도 교회의 모든 예배에서 합당치 않은 것은 무엇이든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성찬식 참여라는 고귀한 특권과 소명은 엄격한 자기 성찰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의 마음 자세와 행동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1) 첫 번째 권면과 이유(27-29)
주의 만찬 전승 의미에 근거해 독자들에게 첫 번째 권면을 합니다. 원리와 명령과 이유로 구성됩니다. 먼저 원리입니다. 누구든 주의 빵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에 대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27).
두 가지 초점이 있습니다. 첫째, ‘주’에게로의 참여입니다. ‘주’란 말의 반복에서 확인됩니다. 주님께 참여하는 것이기에 개인 만찬처럼 취급하면 안 됩니다. 둘째, 주의 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단순히 빵과 잔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의 만찬 의미에 부합하게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주님의 사역 의미를 놓친다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주님의 몸과 피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주님에 대해 범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에 근거해 사람이 자기를 살핀 후에 먹고 마시라고 명령합니다. 원리의 초점을 기억하고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의 몸을 분별치 않고 참여하면 자기에게 임할 심판을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증(30-32)
분별하지 않고 참여해서 받은 심판의 예를 듭니다. 성도들 중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이 주의 만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이런 현상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않아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형제들을 부끄럽게 한 죄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일환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심판의 결과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시기까지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성도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일들에 대해 두 가지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첫째, 죄의 실존과 그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실재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살피고 조심해야 합니다(31). 둘째, 이런 현상이 하나님의 최종 심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훈련일 수 있는데, 최후 심판 때 세상과 함께 정죄 받고 멸망하지 않도록 조심시키는 경고입니다(32).
주의 만찬 전승에 근거한 두 번째 권면(33-34)
날마다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 성도는 흔히 주님을 위해 산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남을 위해 산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는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고 주님만 보입니다. 그 주님이 이웃 사랑을 명하시기에 우리는 주변 사람에게 고개를 돌려야 합니다.
33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33-34)
두 번째 권면을 합니다. 첫 번째(27-29절)보다 간단하지만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주의 만찬 때 서로 함께 먹으라고 명하고, 만일 배고프면 집에서 먹고 오라고 합니다. 주의 만찬을 개인 만찬처럼 여겨 자기들만 먹지 말고 음식을 가져올 수 없는 가난한 교인들과 함께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모임이 하나님의 심판의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런 행동은 주님을 바르게 기억하는 방법이자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머지 일들에 대해서는 교회에 가서 교정하겠다고 하고 이 문제를 마칩니다.
존 스타트 목사님은 ‘성찬’은 은혜의 방편이고, 연합의 상징이고, 살아 있는 교회의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체현인 성찬이 온전히 체화되어 한 몸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성찬은 주를 기억하고 자신을 살피고 지체들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까? 성찬을 통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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