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14-01)
덕을 세우는 은사
고린도전서 14장 1-19절
모든 은사는 선물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대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새 창조의 목표를 따라, 성도들이 서로의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은사를 사모할 때 가급적이면 어떤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방법인 사랑을 따라 행하라고 일한 후 예언과 방언에 대해 비교합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1-5절입니다. 사랑을 따라 신령한 것을 추구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말하고 예언과 방언을 대조합니다. 둘째 부분은 6-12절입니다. 왜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방언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셋째 부분은 13-19절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설명하고 결국 예언이 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예언과 방언(1-5)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첫째가 사랑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큰 은사의 기준은 신령함이 아니라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사랑은 은사를 은사 되게 하는 필수 요소며, 사랑을 추구하는 은사라야 선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모든 성도들이 봉사를 행할 때, 사랑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은사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은사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모든 은사를 통한 봉사에 있어서 항상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입니다.
1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1-5)
고린도 성도들은 다른 영적 은사들보다 방언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영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은사가 방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방언을 함으로 영적 은사를 자랑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하고 특별히 공적 모임에서는 방언보다 예언을 더 추구하라고 합니다. 방언을 하려면 반드시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과 소통해서 인격적 관계성을 증진하고 교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예언을 추구(1)
더 큰 은사들을 만드는 길(12:31)인 사람을 설명한 후(13장), 교회 상황에 대해 권면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면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에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언하기를 권합니다.
(2) 예언과 방언(2-5)
바울은 방언의 무익성과 예언의 유익성을 대조적으로 설명하면서,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교회를 세우는데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 방언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소개합니다.
예언을 더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방언과 예언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방언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소통 방식이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2).
성령으로 자신의 비밀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방언은 성령으로 혀가 움직여 말하는 것이기에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심지어 방언하는 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사람과의 관계성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요소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언은 다릅니다(3).
사람들을 세워주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잘 표현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방언이 필요 없고 예언만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서로의 기능과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4). 방언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웁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성에서 잘 서기 위해 방언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어찌 살아야 하는지를 도울 수 있습니다. 사실 예언과 방언은 서로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둘 다 필요합니다. 단지 그 기능과 목적이 다르기에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할 지를 분별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에서 방언과 예언의 상황을 구분해 권면합니다. 기본적으로 그는 독자들이 다 방언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성령으로 인한 교제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통로이기에 개인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독자들이 예언을 더 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통역되지 않은 방언보다 교회를 세워가는 데는 예언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결국 개인이냐 교회냐 사이의 상황 인식과 어떤 것이 함께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 배려이고 성도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분별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6-12)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은사를 추구할 때, 그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세우지만, 사사로운 욕심으로 구한 은사는 시기와 경쟁으로 교회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떠나 은사는 언젠가는 변질됩니다. 은사에 대한 열정이 항상 교회를 건강하게 섬기는 열정과 조화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6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12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6-9)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것이 더 많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에자기 덕을 세우는 데만 유익하지만, 예언은 사람들에게 알아듣게 말하는 것입니다.
(1)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6-9)
예언이 왜 필요한지를 계속 설명합니다. 일련의 조건절로 ‘나(바울)’의 예를 ‘너희(독자들)’에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두 가지가 언급됩니다.
6-9절은 그중 하나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전하는 경우입니다. 먼저 ‘나’의 경우입니다(6-8). 만일 ‘나’가 너희에게 가서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이 아닌 방언으로 말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6) 방언이 다른 은사보다 열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소통이 되지 않아서 독자에게 유익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7-8절에서 악기의 예를 통해 설명을 이어갑니다. 만일 피리나 거문고 등의 생명 없는 악기들이 음의 구분을 전달하지 못하면 어떻게 그 악기들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전쟁 때 신호를 전달하기 위한 나팔이 구분된 소리를 내지 못하면 어찌 전쟁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들어도 상식선에서 동의할 수 있는 예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런 설명을 ‘이와 같이’라는 표현을 통해 ‘너희’ 경우로 적용합니다(9). 만일 너희가 방언을 통해 분명치 않은 말을 전한다면, 그 말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방언으로는 의사소통 할 수 없기에 마치 허공을 향한 소음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공적 모임에는 적절치 않습니다.
(2) 예언의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 이유 2(10-12)
‘나의 상황을’ 너희에게 적용한 두 번째 내용입니다. 언어 소통 과정을 예로 듭니다. 먼저 언어를 표현하는 소리에 대한 일반 원리를 제시합니다(10). 아마도 세상에 많은 종류의 언어가 있지만, 소리 없는(뜻 없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 사람들에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렇기에 ‘나’가 그 소리의 능력을 알지 못하면 ‘나’는 그 말하는 자에 대해 야만인이 되고, 말한 자 또한 ‘나’에게 야만인이 됩니다(11).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신령한 것을 추구하기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예언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12). 교회 안 공적 모임에서 방언을 말하면 서로 소통이 안 되고, 결과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없기에 소통할 수 있는 예언을 하라는 것입니다.
공적 예배 때 방언 사용에 대해(13-19)
은사를 추구하는 열망보다 은사 추구의 동기를 항상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무엇입니까? 그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고 사랑을 구연하는 은사가 더 큰 은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타인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13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14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15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16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17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18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3-19)
바울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의 무익성에 대해 설명한 후, 교회 것을 세우기 위한 영적인 은사가 더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설명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유익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세우기 위해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합니다.
(1) 방언 사용자는 통역을 위해 기도하라(13)
앞부분 설명을 근거로 방언 사용자에게 권면합니다. 방언을 하는 자들은 통역하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모든 방언 말하는 자가 반드시 통역의 은사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통역의 은사가 있으면 공동체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됩니다.
(2) 바울 경험을 통한 설명(14-15)
바울은 1인칭 표현으로 통역의 은사를 구하라는 13절 내용을 부연합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해 볼 때, 방언 기도를 알아듣지 못한 것은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통역의 은사는 공동체적으로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경건 생활에도 도움이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이성적 이해에는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14)
따라서 기도나 찬송할 때 영으로 하는 방언과 이성으로 이해하고 말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합니다(15). 하지만 상황 분별이 필요합니다. 영으로 하는 기도나 찬송은 14절처럼 개인 상황이지만, 이성으로 기도하고 말하는 것은 교회 모임이란 공적 상황입니다. 방언을 공적 모임에서 사용하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3) 독자들 상황을 통한 설명(16-17)
이제 바울은 왜 공적 모임에서 방언으로 기도나 찬양을 하면 안 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14-15절이 ‘나’를 통해 바울 차원에서 설명했다면, 이번에는 ‘너희’를 통해 독자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의사소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한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축복하거나 감사의 말을 해도 그것에 공감해 함께 유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적 예배 유지가 불가능하고 메시아의 한 몸이자 하나님의 한 식구로서의 정체성과 유대감, 인격적 사랑 나눔이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교회를 망칠 수 있습니다.
(4) 바울의 권면(18-19)
바울은 다시 1인칭 ‘나’를 사용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많은 방언을 하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방언 자체가 필요 없다는 인식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방언은 분명 성령의 선물입니다. 애써 금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공적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때는 통역이 없는 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자기 자랑이 될 수 있고, 기본적으로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교제하고 함께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최고의 은사가 되게 하는 사랑 차원에서의 권면입니다.
신령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사모하도록 권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자신을 위한 은사이기 때문에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은사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교회를 세우는 데 사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말씀으로 세우는 예언의 유익한 은사를 구하길 바랍니다. 당신에게도 성령의 풍성한 은사를 주시되,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유익한 예언의 은사를 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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