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14-02)
성숙하게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
고린도전서 14장 20-40절
로마인들은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들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 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투리아인들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은 세계의 승자가 되어 천년 로마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로마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했으며,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인 이야기’를 쓴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그 이유를 제시합니다. 가장 먼저는 법과 제도를 지키는 원칙에 충실했던 로마 시민들의 질서 의식, 준법이라고 합니다.
- 교회 모임에서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 가르칩니다.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20-25절로, 믿지 않는 자와 관련해 방언과 예언을 대조합니다. 둘째는 26-35절로, 교회 예배 상황에 대한 실제적 지침을 제공합니다. 여기에는 방언과 통역과 예언과 아내들이 일으키는 무질서한 상황이 포함됩니다. 셋째는 36-40절로, 은사에 대한 설명의 결론입니다. 자신의 은사 때문에 교만해지지 말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질서 있게 행하라고 권합니다.
구도자/불신자와 관련한 방언과 예언의 대조(20-25)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주신 표적이지만(사 28:11-12), 또한 그들을 위해 절제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초신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자신들이 알아듣지 못한 말들을 함으로 자칫하면 청신 나간 행동처럼 보여 그들에게 겁과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때문에 자기 숨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전파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20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20-25)
방언과 예언을 불신자에 대한 기능 차원에서 비교하고, 은사에 대한 권면을 마무리합니다. 은사 사용을 금하지 않지만, 사랑으로 행하고 교회에서는 질서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1) 방언과 예언과 관련한 명령(20)
방언과 예언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공적 예배에 참여한 구도자나 불신자와 관련해 두 은사를 비교합니다. 먼저 세 가지 명령으로 바른 생각을 요청합니다. ‘생각에 대해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 ‘악에 대해 어린 아이가 되라.’ ‘생각에 대해 온전한 자가 되라.’ 생각에 대한 것을 양 끝에 두고 악을 가운데 둔 A-B-A 형태입니다. 주목할 것은 신령한 것들에 대해 잘 생각할 것과 합리적 판단을 요청한 점입니다. 흔히 신령한 것들은 이성적인 것과 상관없는 듯 여깁니다. 아마 고린도 교인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성적 판단을 계속 요구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합당한 판단과 분별하는 것을 영적이고 성숙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2) 방언과 예언의 대조(21-25)
방언과 예언을 대조합니다. 구약의 예를 들고(21) 그에 근거해 방언과 예언을 대조한(22) 후 방언(23)과 예언(24-25)을 하나씩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먼저 구약 성경을 예로 듭니다. 하나님이 다른 방언과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 것이지만 듣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방언으로 전한 것과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연결점으로 삼기 위해 인용한 듯합니다. 구약도 방언으로 말하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를 통해 구약 인용을 방언과 예언에 대해 적용합니다(22). 방언은 하나님의 표적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지만 예언은 믿는 자를 향합니다. 구약 인용과 23-25절과의 연결에 의하면 방언과 예언이 가져올 결과 차원을 말하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불신자들이 하나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하게 함으로 멸망의 결과를 낳게 하지만, 예언은 그분의 계시를 드러내 궁극적으로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방언이 신령하기에 신자에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뒤집습니다. 방언은 신자가 진리를 증거할 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만일’이라는 조건절을 통해 이 내용을 부연합니다(23-25).
만일 구도자와 불신자가 교회 모임에 참여했을 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전하면, 그들은 그 모임을 미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언을 통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성적인 말로 계시를 전하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주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1-19절 설명이 동료 신자를 향한 사랑의 관점에서 방언과 예언을 대조했다면, 이 부분은 불신자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관점에서 대조합니다. 구도자와 불신자에게 진리를 전하는 차원, 곧 사랑으로 전도하는 것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으로 인정하게 하는 차원, 즉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방언의 문제는 단순히 그것이 신령한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어떤 것이 최고의 비교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그 은사가 사랑의 모습으로 사용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분 이름을 드러내는 수직적 차원과 동료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수평적 차원이 다 포함됩니다.
교회 예배 상황에 대한 실체적 지침들(26-35)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영적 유익이 있지만, 공동체적 차원에서 는 그 방언을 통역해 주는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배 중 방언은 누군가가 그 방언을 통역해 줄 수 있는 경우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26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34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26-35)
앞서 사랑을 따라 은사를 사용하라는 말을 이제 질서를 따라서 은사를 사용하라는 권면으로 달리 표현합니다. 질서를 따라 찬송시, 가르침, 계시, 방언, 방언 통역, 예언 등 각자가 가진 은사를 발휘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 성도의 덕을 세울 수 있습니다.
(1) 교회 예배 상황에 대한 실제적 지침들: 원리(26)
그간의 논의를 근거로 실제 지침을 제공합니다. 먼저 ‘그러면 어찌할까?’라고 스스로 질문하고 명령으로 답하는 형식으로 원리를 정리합니다. 교회 모임 때 찬송, 가르침, 계시, 방언, 통역 등 여러 은사를 사용해도 됩니다. 하지만 은사를 통한 비교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원리, 곧 모든 것을 서로 세워주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사랑에 근거한 은사 사용입니다.
(2) 방언에 대한 실제적 지침(27-28)
방언을 사용할 때 반드시 둘 혹은 많아야 셋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차례대로 질서 있게 하되 통역이 반드시 수반돼야 합니다. 만일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 모임에서는 잠잠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나 찬양할 때 사용해야 합니다.
(3) 예언에 대한 실제적 지침(29-33a)
예언할 때도 둘이나 셋이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해야 합니다. 만일 예언할 때 다른 이에게 성령의 계시가 임하면 말하는 사람은 잠잠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예언하면 교회 모임이 무질서해집니다. 성도들이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권면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스스로도 그렇게 예언을 주지 않으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이기에 교회 모임에 유익이 되도록 질서 있게 예언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언하는 자들은 다른 예언하는 자들 밑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 외에 또 다른 사람에게 계시를 주실 수 있음을 인정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언을 할 때도 이성적 사고를 사용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4) 문제 일으키는 아내들에 대한 실제적 지침(33b-35)
여기서는 질서 없는 상황의 예를 듭니다. 아내들이 교회 모임에서 무질서하게 질문하거나 은사를 사용한 상황인 듯합니다. 그 모습은 예배를 방해할 뿐 아니라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이에 바울은 문제가 되는 아내들에게 잠잠하라고 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지 못하게 금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아내들의 은사 사용을 막은 것도 아닙니다. ‘잠잠하라’는 명령은 이미 모든 성도들에게 방언과 예언과 관련해 무질서함을 막는 방법으로 제시했습니다(28,30). 그렇기에 아내들에 대한 명령도 무질서함을 막기 위한 임시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은사 문제에 대한 결론적 권면(36-40)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더 신령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하고 영적인 것처럼 들리는 말씀이라도 성경에 어긋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36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36-40)
고린도 교회에 자신이 신령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라고 주장하면서 바울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1) 결론적 권면: 교만한 자들에 대한 경고(36-38)
은사 사용에 대한 결론적 권면입니다. 질문(36)과 조건절(37-38)을 통해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냐? 그것이 ‘너희’에게만 임했느냐? 상당히 비관적인 질문들입니다. 공통점은 ‘너희’라는 표현입니다. 신령한 것들이 ‘자기’에게만 있는 특별한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 그 기원도 자기 것인 양 착각한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런 교만은 자연스레 비교 의식으로 이어지고, 교회 모임의 질서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이어지는 조건문 표현은 이들의 교만을 구체화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한다면’ 그들의 자기 인식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엄히 경고합니다. 만일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해 교만해져 있다면 자기가 편지에 쓴 것들을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조심하라고 합니다. 단순히 사도로서의 권면이 아닌 주님의 명령입니다. 반드시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바울 가르침의 성격을 알지 못하면 그들은 스스로의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나 신령한 자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교만을 버리고 바울 가르침을 듣고 겸손해야 합니다.
(2) 마지막 명령들(39-40)
은사에 대한 마지막이자 실제적 명령입니다. 예언도 하고 방언도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적절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구체적 추가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사랑으로 실제로 그렇게 하면 됩니다.
성숙한 생각과 행동으로 교회 공동체와 믿지 않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작은 은사라도 교회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 섬기는 일에 취선을 다해야 합니다. 방언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도 구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감사하고 자기 덕을 세우는 테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방언 경험에 대해서 문외한이거나 신앙의 초신자들은 방언으로 하는 기도나 찬양에 ‘아멘’으로 응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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