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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36-01)


하나님을 빙자한 어리석은 말들

욥기 36장 1-16절


 

성도들 중에는 자신이 아는 성경 구절이나 신학 지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는 이들이 많습니다. 모든 경우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종종 때와 상황에 맞지 않는 말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함부로 조언하는 습관은 자신이 남보다 낫다는 우월의식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엘리후의 말을 살펴보며, 우월 의식을 반드시 버려야 하는 이유를 배울 수 있습니다.

 

  • 엘리후는 네 번째 연설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하나님을 변증하겠다고 합니다. 엘리후가 말하는 하나님께서는 결국 의인은 성공하게 하시며, 악인은 심판하셔서 젊어서 죽게 하시지만 그래도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하신다는 것으로 이전의 친구들과 동일한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변증 서론(1-4)

성경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가르칩니다(빌 2:3). 하늘보다 높으신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낮아져 죄인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 길을 묵묵히 걸으셨습니다. 우월감에 젖은 사람은 상대에게 공감하기 이전에 자기 지식을 전달하기 바쁩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저런 일로 아파하는 사람에게 자꾸 방법을 제시하지 말고, 그저 마음을 알아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2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3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4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1-4)

 

엘리후는 세 번이나 연설을 하고도 아직도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관해서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에 대한 것이 엘리후의 네 번째 연설의 주제입니다. 3절에서 엘리후는 자신의 지식이 멀리서 온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지식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으며 이 지식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밝히는 데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욥이 의로운 자신에게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불평함으로 과연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나는 문제가 도출되었기에, 이에 대해 자신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변증하겠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기만적인 것이나 속임수가 아니라 온전한 지식이라고 변호하며, 본인이 하나님에 대한 변증을 할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지식이 완벽하며 틀림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벽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이고 이 부분을 인정하고 늘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에 충실하신 하나님(5-16)

우월의식에 빠진 성도는 이중의 폐해를 끼칩니다. 사람에게 상처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분의 주권을 인정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무궁하고, 그분이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아무 지혜도 없으면서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자가 늘어 놓는 진부한 주장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5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6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7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8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9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10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11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12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13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14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 15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 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16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5-16)

 

이 부분에서의 주제는 인과응보의 원칙을 충실하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리후가 묘사한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의로우신 분입니다.

 

(1) 하나님에 대한 기본 전제(5-6)

 

5-6절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에서 밝히는 하나님에 대한 기본 전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또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자 곧, 의인을 물리치지는 않으시는 분이지만 악인은 살려두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21:7에서 욥이 “왜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살려두시냐”고 질문한 것에 대한 답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인은 살려두지 않으신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해서 모두 악인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 이유는 그 가운데서 공의를 베풀어 구원해주시는 사람들이 있으며,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35장에 따르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 때문입니다.

 

(2) 의인을 돌보시는 하나님(7-12)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눈을 거두지 않으시는 분으로 묘사하는데, 언제나 의인을 돌보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왕들과 왕좌에 앉히시고 영원히 존귀하게 하신다는 의미는 실제적으로 왕이 되게 하신다기보다는 왕처럼 존귀하게 혹은 성공하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이 주장은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잠언은 오히려 의인의 성공을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잠 4:18; 10:6; 13:21; 15:6). 오히려 어떤 사람이 의인인지에 대해서 더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인과 성공을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옳은 관점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8-12절은 의인에게 환란이 닥치는 이유와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의인에게 환란이 닥치는 이유는 그들이 교만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교육적 목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환란이 닥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학자와 같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귀를 열어주시고 지혜자들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듣고 죄악에서 돌이키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지혜 선생님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11-12절은 이런 교훈의 결과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11절은 듣고 순종하면 고통에서 벗어나 좋고 즐거운 생애를 보낼 수 있지만, 만일 순종하지 않으면 멸망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멸망 당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듣지 않아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의인의 성공론을 통해서 지금 욥이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의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인이라면 욥은 행복한 날을 보내야 하는데, 이렇게 여전히 고난 중에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죄를 지은 죄인임이 틀림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3) 경건치 않은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13-14)

 

13절 “마음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은 7-12절과 대조적으로 경건치 않은 자 즉,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의 운명으로 이들은 하나님 앞에 진노를 계속 쌓아두어 계속해서 고난을 받지만, 결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운명은 결국 죽음입니다. 14절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에서 젊어서 죽는다는 것은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는 뜻이고, 남창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으로 남창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3: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에 따르면 창기와 개같이 돈을 번 자가 나오는데, 여기서 개같이 돈을 번 자가 바로 남창을 의미하며, 이 둘은 하나님께 가증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해 변증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욥을 협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욥이 자신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명대로 못 살 것이고, 죽어도 가장 수치스럽게 죽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곤고한 자를 건지시는 하나님(15-16)

 

15-16절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은 결론으로, 귀를 연다는 10절의 말을 반복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들으면 곤고한 중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욥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즉, 빨리 귀를 열어 자신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16절 “하나님이 그대를 환난에서 이끌어 내사 좁지 않고 넉넉한 곳으로 옮기려 하셨은 즉 무릇 그대의 상에는 기름진 것이 놓이리라”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욥에게 적용시키기 위해 ‘당신’이라는 이인칭 남성 단수형을 사용합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 따라오면 기름진 것으로 가득 찬풍성한 식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데, 풍성한 식탁의 이미지는 힘과 번영과 건강을 상징합니다. 즉, 그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엘리후는 하나님을 변증한다고 하며 말을 시작하였지만, 결국은 욥에 대한 비난과 설득으로 맺고 있습니다.


우월의식에 빠지면 하나님도, 사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기를 증명하기에만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성도라는 정체성이 사소한 인정욕구로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누구도 누구보다 우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하는 지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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